구르는돌님의 [이태경의 반론] 에 관련된 글.
 


오늘 프레시안에 보니까 우리 이태경씨가 또 반론을 올렸더라. 내용의 옳고 그름, 나아가 그 부질없음을 떠나, 그 성실함에 대해서만큼은 거듭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 경의의 실상은 뭐랄까, 존경과 경악이 뒤얽힌 느낌?ㅎ 뭐 사실 따지고 보면, 구르는 돌님이 앞선 글에서 밝혔듯,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또한 영광스런 조국 독일의 관료로서 자기 직분에 성실했던 사람이었으니, 성실함을 유일한 평가잣대로 삼는 건 매우 부적절할 뿐더러 해로운 일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태경씨를 보면서 새삼 드는 생각은, 서유럽산 시민사회 모델이 실은 그 세속성만큼이나 얼마나 종교성에 뿌리박고 있는지 꼼꼼히 들여다봐야겠다는 것. 근까, 더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로서 지탱되기 힘들었던 중세 기독교 특유의 도덕적 엄숙주의와 현실 세계의 '질서와 변화'관들은 근대 시민사회 형태 속에서 어떻게 '세속화'했는지, 나아가 지정학적 위치상 근대성 담론이 종교적 우상 수준에서 떠받들어졌던 한국 같은 반주변부에선 어떻게 변주됐는지 말이다. '종교에서 이성'이라는 계몽주의 담론의 유럽중심적 신화가 가리고 있는, 근대 이성의 종교화란 측면에 주목해야겠다고 할까나.. 그러지 않고서, 특히 근대국가와 시민사회라는 제도의 발전이 역사적 자본주의 경제 본연의 양극화기제가 지속하는 데서 했던 역할과 관련해, 이태경씨가 '대한민국 모범시민'으로서 견결하게 보여주시는 적반하장식인 논지는 납득하기 쉽지 않을 듯싶다.

 

뭐, 구르는 돌님의 앞선 글에 관해 이태경씨가 도덕적 엄격주의라고 대꾸할 만한 빌미가 사실 없진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사르트르를 인용한 대목은 구르는 돌님 스스로 인정하셨듯 그 의도 여하를 떠나 상당수 독자들에겐 마치 모든 게 '개인의 결단'에 달려 있다는 느낌을 줬을 법도 했겠다는 거지. 내가 아는 구르는 돌님이야 물론 그런 결단 이상으로 그런 결단을 힘겹고 심지어 나쁜 것으로까지 만드는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더 주목하려는 분일 텐데, 차라리 이 점이 아울러 살아났으면 좋았겠다고 할까. 구르는 돌님이 도덕적 엄격주의에 입각해 있다는 이태경씨의 공박이 적절했단 얘기가 아니다. 외려 그 반대면 모를까.

 

이태경씨에겐 역시나 사상적 적색경보 대상일 그람시란 네오맑시스트가 그랬다고 한다. 국가가 이런저런 이유로 헐렁하거나 헐렁해질수록, 그 자리를 메우려 시민사회가 정의의 수호천사 마냥 떠오르게 마련이라고.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태경씨가 지금 돌아가는 자본주의사회에 대해 좀 제대로 알자고 하는 대목에선 나도 모르게 그만 실소가 터지더라. 삼성의 폭주를 둘러싸고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고 있다는 이태경씨의 반박만 해도 그렇다. 그의 시각에선, 삼성식 글로벌 스탠다드가 일찌감치 지구적 축적 경쟁의 압력 속에서 상호 되먹임질을 하며 형성 작동해왔는지는 아예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건, 그의 시각이 얼마나 심각한 맹점을 안고 있는지를 방증하는 것뿐인데도, 이 대목에서 그는 정작 그가 그간 성실히 정련해왔을 시민사회론을 설교하는 데 집중한다. 그래서 그에게 제일 화급한 건, '근본적 접근'을 요청하고 그에 따른 실천 전략이 필요하겠다는 이들한테 일일이 토달며 훈장질하는 게 아니라, 다시 말해 그야말로 빛바랜 민주화 테제들에 안쓰럽게 매달릴 게 아니라 지구화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동학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겠다 싶은 거다. 토지정의시민연대 활동 같은 건 당분간 내지 경우에 따라선 영영 접더라도 말이다.

 

가라타니 고진도 NAM과 관련한 자기 경험을 근거로 그러던데, 그저 일단 생겼으니까 지속의 논리를 억지로 같다 붙여 거꾸로 조직의 존속 자체에 목매다는 조직은 굳이 존속할 필요가 없다고. 이태경씨의 논지를 보노라면, 토지정의시민연대란 단체가 바로 그런 데가 아닐까 싶기까지하다. 이태경씨의 성실한 반론들이 이런 생각을 유발하는 게 이태경씨 본인한테 득일까 실일까. 토지정의시민연대로선 실무자 하나를 잃으니 실이겠으나, 이태경씨로선 자기성찰의 계기가 열린 셈이니 확실히 득일지까진 몰라도 적어도 실은 아니지 싶다. 글쎄, 이태경씨=토지정의시민연대인 상황이면 얘기가 좀더 복잡해질라나. 어떻든 그가 새로운 물꼬를 틀어주기까지 바라진 않아도, 물을 흐려서야 되겠나 하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내가 보기엔, "도덕적 엄격주의"란 비판도 이태경씨로선 사실 제 발등 찍기다. 이른바 "선한 국가"를 매개로 이건희일가와 가신그룹의 전횡을 추상같이 엄단하면 될 일이란 자신의 주장이야말로, 법치국가란 유토피아적 이상과 나란히 가는 '시민도덕'에 푹 쩔어 있는 상태임을 스스로 보여줬던 셈이니까. 그러고 보면 이 분도,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지금 엔엘계가 북한 변호에 쏠리듯 소련 사회주의 비판을 공박하고 날조니 뭐니까지 하며 변호에만 급급해 하다, 캐뻘쭘해하며 전향했거나 실천적, 사상적 자폐화를 정치적 올바름과 동일시해버린 상당수 좌파들의 전철을 밟는 건 아닐지 싶을 정도던데.

 

백 번 양보해, 자신이 따르는 시민도덕으로 삼성 같은 지배적 자본의 권력 축적을 저지는 고사하고 제어할 수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자꾸 그러는데.. 이건 뭐, 신앙의 힘으로나 가능한 허장성세인 건지, 자기기만인 건지. 그 과정이야 어찌됐든 남부럽잖게 빵빵하게 부푼 경제적-문화적 파이를 오그라뜨리는 게 내심 아까워죽겠는 모양이다. 그렇게 커져버린 파이가 아직 빠지려면 멀었다는 글로벌 거품의 일부는 아닌지부터 살펴봐도 션찮을 판에 말이지.

 

비투비총서 시리즈 중 하나인 <자유주의>의 저자만 해도, 이태경씨 같은 이들은 필시 시민사회적 자유시장주의를 사상적 동앗줄로서 믿어 의심치 않았을 바로 그 무렵에 이 책 개정판을 내면서 이랬더라. 자유주의자를 스스로 표방하긴 하지만, 자유주의 사상 자체의 내적 난점 탓에 비 혹은 반자유주의 사상들의 부상(혹은 귀환)을 더 이상 막기는 어려워졌다고. 아무리 자유주의자여도 이 점은 인정해야 한다고 말이다.

 

보아 하니, 좌파 진영에 대해선 무슨 파블로프의 개 마냥 습관적으로 사상적 시효만료 딱지를 붙이려 드는 이태경씨는 그럼 어떨까. 자기 사상이 대지를 비옥케 하진 못할 망정, 여타 사상의 씨를 아예 말려 황폐케 해서야 될까 싶은데. 그렇지, "인간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던 홍상수 영화 대사처럼 말이다. 급진좌파적 사상의 싹을 비현실적이라 해가며 일소하려 발버둥 친다고 그리 될 리도 만무하겠지만 말이다. 이거야말로 비현실적 대응의 극치 아닌가. 어느 정치사상이 됐든 그걸 움직이는 현실(내지 토대)에 대한 유효한 사상적 준거틀이 아닌 세속화된 신학의 정치로 타락시키는 건 역시나, 그 사상의 반대자가 아니라, 열렬한 추종자인갑다.

 

어찌 됐든, 그간의 민족민주 운동 계열 중에서도 소위 '급진적이고 과격한' 시각과 접근을 못마땅해하며 시민사회 공동체의 미덕 내지 도덕을 설파해온 부류 중에서 이태경씨가 무척이나 성실한 분이란 점만큼은 이번 논쟁을 통해 더 없이 또렷이 드러난 것 같다. 이태경씨 본인 입장으로선 곧죽어도 그리 하고야 말겠다는 모양이지만, 어디다가 심지어 권하거나 반길 일이 결코 아닌 거야 두 말 하면 잔소리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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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8 21:05 2010/04/08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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