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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14
    땅이 숨쉬길 바라며 쓴 서평 - <<이윤에 굶주린 자들>>
    구르는돌

땅이 숨쉬길 바라며 쓴 서평 - <<이윤에 굶주린 자들>>

1.

 

 

얼마 전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워낭소리>를 봤다. 워낙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아서 거의 완벽한 스포일링을 당하고 간 상태였지만, 영화의 여운이 아직까지 남는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처럼 봉화의 아름다운 풍경들에 감탄하고, 할아버지와 소의 애틋한 사랑에 동감한 것은 아니다. 물론 소가 죽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슬픔에 잠겨 있는 장면에서 나 또한 눈시울을 적셨지만, 지금까지 내 마음 한켠을 붙들고 흔드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소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등뼈가 앙상하게 보일 정도로 다 늙어서 일만하는 소가 뭐가 부럽냐고? 그러나 내가 부러운 것은 소의 '살아생전'이 아니라 죽어서 '흙'이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소는 죽고 산 언저리에 묻혔다. 그리고 그 위엔 풀이 자라났다. 그리고 수 십년이 지나면 소의 육체도 미생물들을 만나 변형되면서 풀이 되고, 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어서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매일 같이 이산화탄소를 내뿜어대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육중한 도시에는 내가 흙이 되고 풀이 되고 꽃이 될 수 있는 조그만 땅 뙤기도 허락하지 않는다. 오로지 저 먼 중동 땅에서 왔을 법한 석유 찌꺼기들만이 온 도시를 뒤덮고 오직 흙 한줌의 숨통조차도 조여매고 있다.

 

괜히 이런 생각도 해 본다. 불교에선 전생과 내세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죽어서 흙이 될 수 없고, 풀이나 꽃이 될 수 없는 이 도시중심적 사회에서도 전생과 내세가 존재할 수 있을까? 내가 모르긴 몰라도 아마 석가모니가 생각한 전생과 내세는 단순한 정신 또는 영혼의 순환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의 분리라는 관념은 철저히 서양 근대의 사고방식이 아닌가!) 육체와 자연의 순환까지 포함하는 언어였을 것이다. 어차피 하얀 가루가 되어 조그마한 항아리 안에 담겨질 육체라면 내세도 기약할 수 없는 것 아닐까? 물론 어차피 벌써부터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2.

 

 

예전에 <<블루골드>>(모드 발로 & 토니 클라크 저, 개마고원, 2006)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물 사유화의 문제를 다룬 꽤 두꺼운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 물 사유화를 추진하는 초국적 기업들을 '현대판 봉이 김선달' 정도로 표현하기에는 2%, 아니 20% 정도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선달은 대동강물은 멀쩡히 놔두고 양반댁에 물을 길어다 날라주는 짐꾼들에게 동전 몇 닢 받는 걸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여 대동강 물을 4천냥을 받고 한양 상인에게 판 정도였지만, 21세기의 봉이 김선달들은 아예 육지에 있는 물을 고갈시켜서 그 희소성을 증대시키는 악질적인 방식을 택한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눈여겨 볼 것은 육지에서 담수(淡水)를 보관할 토양을 없애버린다는 점이다. 도시화로 인해 농업을 위한 경작지는 점점 파헤쳐지고, 그 위에 곧게 뻗은 길과 높은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그 위는 전부 시멘트와 석유 찌꺼기일 뿐인 아스팔트가 덮어버린다. 그리고 도시 생활에 적합한 하수도 시설이 갖춰진다. 그런데 예전엔 비가 오면 빗물을 토양이 잡아두어 지하로 흐르면 그 물이 저수지 등으로 흘러 사람들이 쓸 수 있었는데, 시멘트와 아스팔트는 빗물을 전부 하수도로 내다 버린다. 하수도로 흘러간 물은 대부분 강을 거쳐 바다로 직행한다. 이런 토양의 손실, 그리고 온갖 오염의 원인으로 인해서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담수는 점차로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그나마 있는 물의 사용도 온갖 댐 건설, 관개시설 정비를 통해 전적으로 공업적 시설을 비롯한 자본의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된다. 그렇게 해 놓고 사람들이 몸을 씻고, 목을 축이고, 음식을 만들어 먹을 물은 비싼 값에 사서 쓰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21세기 봉이 김선달은 초국적 기업들로 집단화 되어 있으며, 좀 더 뻔뻔하고 노골적이다. 그리고 역시나 이 문제의 열쇠는 '흙'에 달려 있다.

 

 


3.

 

 

 

그리고 최근에 읽은 <<이윤에 굶주린 자들>>(프레드 맥도프 외, 울력, 2006)에서는 토양의 획득과 이용이 오로지 초국적 '농식품복합체'(agribusiness)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토양에 대해 자본의 논리가 들어서게 된 것은 세간의 이해와는 다르게 그리 최근의 현상만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 책의 첫 번째 글인 엘런 우드의 '농업 자본주의의 발생'에서는 이런 점을 강조하면서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농업 문제를 논의의 바깥으로 밀어낸 기존의 인식에 대해 반성을 요구한다.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이 산업혁명의 신화에 반대해서 자본주의의 기원을 '상업'에서 찾으려 했다면, 오히려 그는 그 반대편에서 찾으려 한 것이다.


그는 노동을 통해 재산소유권이 형성된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알려진 로크의 이론은 꼼꼼히 살펴보면 논점이 노동 자체가 아니라 생산적이면서 이윤을 낳는 토지 이용인 '토지 개량'이 소유권을 형성하는 것에 맞춰져 있다고 말한다. 토지를 개량하는 적극적인 지주(↔봉건적 지주)는 자기 자신의 직접적인 노동이 아닌, 자신의 토지와 다른 사람의 노동을 생산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소유권을 확립한다. 개량되지 않은 토지, 임대되지 않아서 이윤을 낳지 못하는 땅은 '황무지'였고, 이러한 토지를 전유하는 것은 개량하는 사람들의 권리이고, 심지어 의무이기도 했다. 영국에서의 토지 개량에 대한 이런 관점은 식민지 뿐만 아니라 본국에서도 토지 강탈을 정당화 했고, 이는 인클로저와 같은 토지 소유권의 재정립 가져왔다. 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을 위해 의존해 왔던 공유적 관습적 토지 이용권이 소멸되는 현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대량의 비농업 노동력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생산성을 갖는 농업 부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계 최초의 산업 자본주의가 출현 할 수 있었을까? 영국의 농업 자본주의가 없었다면, 임금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하는 무산대중이 존재했을까?

 

자본주의적으로 개량된 농업은 이제 도시의 무산 대중에게 공급될 식량 생산이나 목양, 원예, 과일 등 고부가가치 농업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그 중심에 농업생태체계의 신진대사를 교란시키는 단종경작(monoculture)이 자리잡고 있다. 존 포스터와 프레드 맥도프는 독일의 토양화학자 리비히와 마르크스의 논의를 빌려와 단종경작이 중심이 된 영국의 집약적 농업이 농촌에서 도시로 식량과 섬유의 원거리 수송을 필연화하는 반면, 질소, 인 칼륨 등의 영양물질을 재생시키기 위한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주변부의 농촌은 토양의 영양분을 박탈당하고, 중심부의 도시는 쓰레기와 공해로 환경이 훼손된다. (거름이 되지 못해 길거리에 뿌려진 똥 때문에 하이힐이라는 뛰어난(!!) 패션 상품을 만들어낸 프랑스 파리를 생각해 보자.)

자본주의의 중심부가 미국으로 넘어오면서 농업은 또 한번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이 시기에 탈곡기, 수확기 트랙터 등의 기계가 발명되고, 질소비료, 살충제, 제초제 등 화학적 투입물이 대량 생산된 것을 배경으로 농업과 공업의 '수직적 통합'이 단행된다. 농민들이 자신의 토지에서 수행하는 영농에서부터 생산물의 수송, 가공, 유통, 판매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초국적 농식품복합체를 정점으로 한 수직적 배치 아래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례가 수직적 통합을 잘 설명해 준다.

 

"계약 영농의 본질을 잘 보여 주는 사례는 특히 계약 시스템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육계broilers(식육용으로 사육되는 닭)생산에서 볼 수 있다.(... ...)
육계 생산은 타이슨(혹은 유사한 다른 지방 기업들)과 4년 계약을 맺고 생산되는데, 이 계약에 따라 타이슨이 사육할 병아리, 사료, 그리고 수의학 서비스의 독점 공급자가 된다. 타이슨은 공급되는 병아리의 유형, 공급량과 공급 빈도의 유일한 결정자이다. 타이슨은 7주 후에 자신들이 정한 날짜와 시간에 다 자란 닭을 수집한다. 타이슨은 사육되는 닭의 무게를 재는 저울을 공급하고 닭을 싣고 갈 트럭을 제공한다. 농민은 노동, 사육장, 사육장이 세워지는 토지를 제공한다. 사육에 필요한 투입재와 사육 방식에 대한 엄밀한 통제는 전적으로 타이슨의 손에 달려 있다. 그래서 "생산자(농민)는 사료, 수의약품, 제초제, 농약, 살충제, 쥐약 등 회사에 의해 공급되거나 그 회사의 문건에 의해 승인된 것 이외의 다른 어떤 물품도 사용하지 않아야 하고, 그에 서명해야 한다." 더구나 농민은 회사의 "육계 사육 지침"을 준수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농민들은 "집중 관리" 대상이 되어 타이슨의 "육계 관리 및 기술 자문관"의 직접 감독을 받게 된다."


- 167-8pp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토지는 농민이 제공한다는 것이다. 농민은 '토지 소유자'이다. 즉 요즘엔 옛날처럼 소작농이 없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지주인가? 그렇지도 않다. 지주치고는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게 너무 없다. 농업에 투입되는 비료 및 사료, 농약, 농기계, 생명공학 등의 대부분의 투입물를 외부에서 조달해야 한다. 이 과정은 전적으로 시장논리에 따라 이루어지며, 생산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영농의 출발점이 되는 종자에 대한 정보와 기술은 생명공학기술을 독점한 초국적 종자기업(몬산토, 노바티스, 듀퐁 등. 이들은 미국에서 제약회사 다음으로 높은 이윤율을 내고 있는 기업들이다.)은 종자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끊임없이 강화하려 한다. 그래서 생명공학적으로 조작된 종자를 도입하는 농민은 작물에서 생산된 다음 세대의 종자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양도한다는 계약을 종자 생산자와 맺어야 한다. 이를 어기고 농민이 농사를 지어 얻은 종사를 다른 농민에게 팔거나, 다음해 농사를 짓기 위해 자신의 농장에서 생산된 2세대 종자를 다시 파종하는 행위는 '해적질'로 매도된다. 그럼에도 영농과정에서 나타나는 모든 비용, 즉 자연재해, 병충해, 농민 건강 악화, 생태 파괴 등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농민이 부담해야 한다. 왜? 농민이 땅 소유자니까....

 

 


4.

 

내 주변에는 숨 쉬지 못하고, 그래서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그냥 '땅'들만이 가득하다. 제작년까지 우리집이었던 곳의 뒷 마당에는 엄마가 상추, 고추, 고구마 등을 심어서 우리집 네 식구 먹을 거리는 해결했는데, 그나마 그 땅도 이제 아파트 만든다고 다 밀어내고 있다. 그렇다고 숨 쉬고 있는 땅이 사정이 좋은 것도 아니다.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땅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외부에서 들여온 비료며 종자기술로 생을 연명하는 땅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그렇게 많은 땅의 숨통을 틀어 막아놓고는 그나마 숨쉬고 있는 좁은 농촌의 땅과 농민들을 무한히 착취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착취한 결과가 엄청 풍요로운 것도 아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던 생물종의 절반 가까이가 멸종해 가고 있다니 따지고 보면 먹는 우리가 먹는 것의 종류도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오로지 비만과 당뇨병을 재촉하는 것들 위주로 말이다.

 

그런 모습들에 근육을 키우기 위해 닭가슴살과 고구마만을 먹었다는, 얼마 전에 '스타킹'에 출연했던 몸짱의 얘기가 오버랩 되는 것은 왜일까? 그 때 옆에서 강호동이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 울린다. "그러다 죽어요!"

그렇다. 그러다 진짜 죽는다. 근데 죽어도 그 근육으로 단단했던 몸은 풀도 못되고, 꽃도 못된다. 그냥 흰 가루일 뿐이다. 뭐하는 짓이니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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