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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 <위건부두로 가는 길>(한겨레출판) 2부 발췌독

 

 

그게 우리가 듣고 자란 말이다.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넘을 수 없는 장벽과 마주친다. 어떤 호감도 혐오감도 ‘몸’으로 느끼는 것만큼 근본적일 수는 없다. 인종적 혐오, 종교적 적개심, 교육이나 기질이나 지성의 차이, 심지어 도덕률의 차이도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신체적인 반감은 극복 불능이다. 살인자나 남색자에겐 호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입 냄새가 지독한 사람에겐 호감을 가질 수가 없다. 어떤 사람에게 아무리 호의를 품는다 해도, 아무리 그의 정신과 성품을 존경한다 해도, 입 냄새가 고약하면 그는 끔찍한 대상이 되며 당신은 마음속 깊이 그를 혐오하게 된다. 평균적인 중산층 사람이 노동 계급은 무식하고, 게으르고, 술꾼이고, 상스럽고, 거짓말쟁이라 믿도록 교육받고 자란다 해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더러운 존재라 믿도록 교육받는다면 대단히 해로운 일이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 바로 우리가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던 것이다. (172-173쪽)

 

 

 

그렇다면 ‘하층민’은 정말 고약한 냄새가 날까? 물론 대체로 그들이 상류층보다 깨끗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들의 생활 여건으로 볼 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처럼 개명한 시절에도 영국 주택 절반 이상에 욕실이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유럽에서 매일같이 온몸을 씻는 풍습은 아주 최근에 생겨난 것이며, 노동 계급은 대체로 부르주아보다 보수적이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눈에 띄게 점점 더 깨끗해지고 있으며, 앞으로 100년 뒷면 일본인만큼 깨끗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노동 계급을 너무 이상시하는 사람들이 노동 계급의 특징을 무조건 찬미하여 불결함도 장점인 양하는 것은 딱한 일이다. 그래서 희한하게도 사회주의자와 체스터턴 같은 감상적인 가톨릭계 민주주의자가 손을 잡는 일이 벌어진다. 이를테면 둘 다 불결은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청결은 한 때의 유행 아니면 사치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 덕분에 노동 계급 사람들이 안 깨끗한 건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원해서라는 오해가 사실처럼 비칠 수 있다는 점을 모르는 것 같다. 실제로는 욕실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쓰려고 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중산층 사람들이 노동 계급은 더럽다고 ‘믿는’데 있다. 아울러 더 문제인 것은 아무튼 노동자는 ‘본래부터’ 더러운 존재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175-176쪽)

 

 

 

중산층인 사람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공산당에까지 가입했다고 하자. 그래서 달라지는 게 과연 얼마다 될까? 자본주의 사회라는 틀 안에서 살아야 하는 만큼 그는 계속해서 돈벌이를 해야 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그가 부르주아로서의 경제적 지위에 매달리는 것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취향이나 습관, 거동, 상상력의 배경은, 공산주의 용어로 말해 그의 ‘이데올로기’는 변할까? 이제는 선거에서 노동당에, 아니면 가능한 경우 공산당에 표를 던진다는 것 말고 그에게 무슨 변화가 가능할까? 그가 여전히 습관적으로 자기 계급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와 뜻이 같을 노동 계급 사람보다는 그들의 위험한 ‘과격분자’라 여기는 같은 계급 사람과 있는 게 훨씬 편하다. 음식, 와인, 의상, 독서, 그림, 음악, 발레에 대한 취향은 여전히 현저하게 부르주아적이다. 무엇보다 그는 반드시 같은 계급 사람과 결혼한다. (182-183쪽)

 

 

 

골즈워디는 민감하고 눈물 많은 전쟁 전 인도주의자의 훌륭한 표본이다. 그는 결혼한 여자는 전부 사티로스에게 사슬로 묶여 지내는 천사라고 생각될 정도로 병적인 연민 콤플렉스를 보이는 작품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과로하는 사무원이, 저임금에 시달리는 농장 인부가, 타락한 여인이, 범죄자가, 창녀가 동물이 겪는 고통에 대해 언제나 분노로 부르르 떤다. 그의 초기작을 보면 세상은 압제자와 피압제자로 양분되며, 압제자는 이 세상에 있는 다이너마이트를 다 터뜨려도 타도하지 못할 무지막지한 석상처럼 꼭대기에 앉아 있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정말 타도를 원할까? 확고부동한 압제에 맞서 싸우는 그를 붙들어주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자신이 그것을 확고부동한 것으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뜻밖의 일들이 벌어지고 그가 알던 세계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의 생각은 좀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압제와 불의에 맞서 싸우는 패배자들의 옹호자로 출발한 그가 끝에 가서는 경제적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노동 계급이 가축 무리처럼 식민지에 끌려가도 좋다는 주장을 한다.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그는 아마 좀 더 품위 있는 형태의 파시즘에 도달했을 것이다. 이것이 감상주의의 불가피한 운명인 것이다. 그의 모든 견해는 현실을 최초로 맞닥뜨리자마자 정반대의 것으로 변해버린다.

(...)

다른 것은 별도로 치더라도, 영국에서 우리가 누리는 높은 생활수준은 우리가 제국을, 그중에서도 인도나 아프리카 같은 열대 지역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영국인이 상대적으로 안락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인도인 500만 명이 기안선상에서 허덕여야만 한다. 그것은 참으로 못된 일이지만, 우리가 택시에 발을 들여놓거나 딸기 곁들인 크림 한 접시를 먹을 때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시이다. 대안은 제국을 뒤집어엎고 영국을 축소시켜, 우리 모두 아주 열심히 일해야 하고 청어와 감자를 주로 먹어야 하는 춥고 시시하고 작은 섬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느 좌파 사람도 원치 않는 바다. 그러면서 그는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아무 도덕적 책임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는 제국의 단물은 다 빨아들일 태세이면서, 제국을 지키는 사람들을 조롱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제한다.

(212-215쪽)

 

 

 

노동자는 진정한 노동자로 남는 한, 엄밀한 의미의 사회주의자인 경우가 거의 혹은 결코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노동당에 투표할 가능성이 다분하며, 기회가 닿으면 공산당에도 표를 던질 수 있겠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인식은 그보다 신분이 높고 책으로 훈련받은 사회주이자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기 마련이다. 평번한 노동자에게, 이를태면 토요일 밤 아무 선술집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유형에게, 사회주의는 더 많은 임금과 더 짧은 노동 시간과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사람이 없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 혁명적인 유형에겐, 즉 기아 및 실업에 항의 하는 시위에 참석하고 고용주의 요주의 인물 명단에 오른 유형에겐, 사회주의란 압제에 저항하는 일종의 구호일 뿐이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진정한 노동자라면 그 누구도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보다 심각한 의미를 파악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내가 보기엔 그런 그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보다 더 진정한 사회주의자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그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와는 달리 사회주의란 곧 정의와 상식적인 양식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단 그가 모르는 것은 사회주의를 경제적 정의로만 축소할 수는 없으며, 사회주의를 실현하자면 우리의 문명과 우리 자신의 생활양식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는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236-237쪽)

 

 

 

나는 사회주의자(자기 글을 소책자로 만들어내는 지식인이며 스웨터 차림의 더벅머리에 마르크스를 수시로 인용하는 타입을 말한다)를 보며 도대체 그의 ‘진짜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품곤 한다. 그것이 누군가에 대한, 특히 자신과는 가장 동떨어진 부류인 노동 계급에 대한 사랑이라 믿기는 어려울 때가 많다. 내가 보기에 많은 사회주의자들의 숨은 동기는 병적으로 심한 질서의식일 뿐이다. 그들이 현 세태를 불쾌히 여기는 것은 그것이 비참한 현실을 초래하기 때문도, 자유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보다는 무질서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을 장기판 비슷한 무엇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평생 사회주의자로 지낸 버나도 쇼의 희곡들을 생각해보자. 노동 계급의 생활에 대한 이해나 자각이 얼마나 많이 드러나는가? 쇼 자신은 노동자를 무대에 올릴 수 있는 것은 “연민의 대상으로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는 노동자를 그런 역할로도 무대에 올리지 않으며, W.W.제이콥스의 우스꽝스러운 인물 같은 모습으로만 무대에 올린다. 노동계급에 대한 그의 태도는 기껏해야 <펀치>처럼 키득거리는 태도이며, 그보다 심각한 경우에는 그들에게서 경멸스럽거나 역겨운 점만 발견한다. 그에게 빈곤이란, 더욱이 빈곤에서 비롯되는 정신의 빈곤이란 ’위에서‘ 없애야 할 무엇이다. 그것도 필요하다면, 심지어 가급적이면 폭력으로 없애야 할 무엇이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인간을 숭배하며, 독재자나 파시스트나 공산주의자에게 호감을 갖는 것이다. 또 그래서 스탈린과 무솔리니를 거의 동격으로 보는 듯하다. (240-241쪽)

 

 

 

우리는 유토피아의 시민들이 토마토 통조림 공장에서 하루 두 시간씩 손잡이 돌리는 일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일부러 더 원시적인 생활방식으로 돌아가 자신의 창조적 충동을 달래기 위해 나무 세공이나 도자기 칠이나 베 짜기 같은 일을 소소하게나마 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하지만 이는 참으로 그럴듯하지 않은 광경이다. 그것은 항상 작용하지만 항상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은 원리 때문이다. 즉, 기계가 ‘있는 한’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수도꼭지를 돌리면 그만인데 굳이 우물물을 길어 쓸 사람은 없다. 여행을 생각해보면 좋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개발 안 된 나라에서 원시적인 방법으로 다녀 본 사람이라면 그런 여행과 기차나 자동차를 이용하는 근대식 여행의 차이가 생사의 차이만큼 크다는 것을 안다. 낙타 등이나 달구지에 짐을 싣고 걷거나 짐승을 타고서 다니는 유목민은 온갖 불편을 겪기는 하지만 적어도 여행하는 동안 살아있다. 그에 비해 급행열차나 호화유람선의 승객에게 그 여행은 일종의 공백기 또는 죽음이다. 그렇지만 철길이 존재하는 한 사람은 기차로 여행하게 되어 있으며, 자동차나 비행기도 마찬가지다. (...) 모든 걸 기계로 할 수 있는 세상에서는 모든 게 기계로 이루어진다. 일부러 원시적인 방법으로 되돌아가는 것, 구식 연장을 쓰는 것, 무슨 일을 할 때 괜히 조금 더 어렵게 하는 것은 전부 일종의 딜레탕트 취미이며 과도한 멋 부리기다. 그것은 엄숙한 표정을 짓고 앉아 돌로 만든 식기로 만찬을 드는 것과 같은 일이다. 기계의 시대에 수공의 세계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대충 흉내만 내어 그 옛날의 찻집이나 튜더 양식 주택을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기계적 진보의 경향은 노고와 창조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본성을 좌절시킨다고 하겠다. 그것은 눈과 손의 활동을 불필요하게 하거나 심지어 불가능하게 한다. ‘진보’의 사도들은 그런 건 문제가 아니라고 선언하곤 하는데, 우리는 그럴 수 있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끔찍하게 긴지를 지적함으로써 그들을 구석으로 몰아붙일 수 있다. 대체 손은 왜 쓴단 말인가? 코를 풀거나 연필을 깎는데도 손을 쓸 필요가 있나? 어깨에 쇠와 고무로 만든 무슨 장치를 달아 쓰면 될 테고, 그러면 팔은 뼈와 가죽만 남은 줄기처럼 시들어버릴 것 아닌가? 그것은 신체의 모든 기관과 모든 기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이 먹고, 마시고, 잠자고, 숨쉬고, 번식하는 것 이상의 활동을 할 이유가 아예 없어진다. 그 밖의 모든 것은 기계가 대신 해줄 테니 말이다. 그러니 기계적 진보의 논리적 귀결은 인간을 병 속에 든 뇌 비슷한 무엇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물론 우리가 뜻하는 바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 우리가 향해가고 있는 목표이다. 위스키를 매일 한 병씩 마시는 사람이 딱히 간경화에 걸릴 뜻이 있는 게 아니듯 말이다. (269-271쪽)

 

 

 

파시즘 운동을 어느 정도 지켜본 사람이라면 말단의 파시스트 당원이 반듯한(이를테면 실업자의 운명을 개선하고자 하는 열의가 진지한)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파시즘이 보수주의의 나쁜 변종뿐 아니라 좋은 변종에서도 힘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전통과 질서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파시즘을 일단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요령 없는 사회주의들의 선전만 잔뜩 듣다 보면 파시즘을 유럽 문명의 장점을 지킬 마지막 방어선으로 보게 되기가 아주 쉽다. 심지어 한손엔 몽둥이를 들고 다른 한손엔 약을 든, 상징적으로 최악인 파시스트 깡패도 자신을 깡패라 생각지 않는다. 그보다는 기독교계를 지키기 위해 롱스보 고개에서 야만족과 맞서 싸운 롤랑이 된 기분일 것이다. (...) 그들은(사회주의자들) 경제적인 면에만 눈이 멀어 있어서, 인간에겐 영혼이란 게 없다는 가정에 따라 활동해왔으며, 노골적으로건 암시적으로건 물질적 유토피아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말았다. 때문에 파시즘은 쾌락주의와 ‘진보’라는 값싼 관념에 반발하는 모든 충동을 이용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해 파시즘은 유럽 전통의 옹호자 시늉을 할 수 있었으며, 기독교 신앙과 애국주의와 군사적 가치에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파시즘을 ‘집단 사디즘’이니 뭐니 하며 간단히 무시해버린다면, 그냥 무익하기만 한 게 아니라 몹시 해로울 수 있다. 파시즘을 머지않아 절로 사라질 예외적인 현상인 듯 여긴다면, 누구에게 몽둥이로 얻어 맞고서 깨어날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287-288쪽)

 

 

 

민감한 사람들이 흔히 ‘진보’와 기계문명에 대해 느끼는 혐오감은 정서의 차원으로서만 변호할 수 있다. 그것이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이유로 타당하지 않은 것은,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삼기 때문이다. ‘나는 기계화와 표준화에 반대한다, 고로 나는 사회주의에 반대한다’고 말한다면 사실상 ‘나는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기계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셈인데, 말이 안되는 소리다. 우리는 모두 기계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기에, 기계가 작동을 중지한다면 대부분 다 죽게 될 것이다. 기계문명을 혐오할 수 있고 혐오하는 게 옳을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선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가 문제일 수 없다. 기계문명은 이미 ‘여기’ 존재하며 우리는 그 안에서만 비판할 수가 있다. 우리 모두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는 벗어났다고 자부하는 것은 낭만적인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온수 나오는 욕실 딸린 튜더 양식 오두막에 사는 문단의 신사나 소총과 수레 네 대 분량의 통조림을 챙겨 정글로 들어가 ‘원시적인’ 생활을 하는 사나이가 그런 사람들이다. (...) 아무리 바람직해 보인다 해도 보다 단순하고 자유롭고 덜 기계화된 생활양식으로 돌아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 이는 숙명론이 아니라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일 뿐이다. ‘벌집 국가’에 반대한다고 해서 사회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벌집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직은 인간적인 세상이냐 비인간적인 세상이냐를 선택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단지 사회주의냐 파시즘이냐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파시즘은 아무리 최상의 것이라 해도 미덕을 다 빼버린 사회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293-295쪽)

 

 

 

그렇다면 사회주의의 본질은 무엇인가?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나는 진정한 사회주의자란 압제가 타도되는 꼴을 보기를 바라는(그냥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바라는) 사람이라고 말하겠다. 하지만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대부분 그런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받아들인다 해도 몹시 못마땅해할 것이다. 이따금 나는 그들이 말하는 걸 들을 때, 그리고 그들의 책을 읽을 때는 더더욱, 사회주의 운동 전체가 그들에겐 일종의 흥미로운 이단 사냥에 불과한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장단에 맞춰 이리저리 미친 듯 뛰어다니며 '어험, 어험, 이거 변절자의 피 냄새가 나는구먼!' 하는 듯하다. 그래서 노동 계급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자신이 사회주의자라 느끼기가 훨씬 더 쉬운 것이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융통성 없이 구는 일이 너무 많은데, 그런것들은 너무나 쉽게 근절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자가 문학에 대해 취하는 딱한 태도를 보자. 많은 경우가 기억나지만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사례다. <데일리 워커>의 전신 중 하나인 <워커스 위클리>에 '편집인 책상 위에 책' 타입의 문학 한담 칼럼이 있었다. 여기서 몇 주 동안 셰익스피어에 관한 얘기를 연재했는데, 그 때문에 몹시 화가 난 독자가 이런 글을 쓴 일이 있다. "친애하는 동지, 우린 셰익스피어같은 부르주아 작가들 얘긴 듣고 싶지 않아요. 좀더 프롤레타리아적인 얘길 쓸 순 없나요?" 편집인의 대답은 간단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색인을 다시 들춰보시면 셰익스피어가 여러번 언급되어 있다는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정도로 불만을 간단히 잠재울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디 주목하시라. 셰익스피어는 마르크스의 축복을 받자 당장 존경할 만한 인물이 되어버렸다. 바로 이런 정서가 민감한 사람들을 사회주의 운동에서 떼어놓는 것이다. (297-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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