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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중에서

2년간의 암울했던 공익근무요원 시절에, 내 삶의 유일한 빛이 되주었던 김상봉 선생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다시 읽으니 그 맛이 아주 쏠쏠하구나~~~

 

"만약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단순히 그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인식하는 주체 앞에서 다른 사람의 운명이 내 앞의 술잔의 운명과 다를 수가 없습니다. 그 때 타인을 이해하다는 것은 타인을 해부한다는 것과 다른 일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내가 개념적 사유를 통해 타인을 모두 규정할 수 있다면, 나는 누더기가 된 타인의 시신 앞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두고 이성의 신봉자들은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라 부르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그것은 내가 나 속에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 타인이 내 속에 들어와 머물고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 그리하여 때로는 내가 곧 네가 되어버리는 것, 그런 것이 아니던가요? 그러나 타인은 언제 내 속에 들어와 머무를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오직 타인의 슬픔이 내 속에 쉴 때뿐입니다. 오직 내가 타인의 슬픔이 내 속에서 머무를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한에서 타인은 내 속에 들어와 고요히 쉴 수 있습니다. 내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속에서 타인의 슬픔이 고요히 움직이는 것을 느낄 때인 것입니다." (260쪽)

 


"오랫동안 나는 세상에 왜 이토록 받아들일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널려 있는지 묻고 또 물어왔습니다. 지금 나는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왔던 그 오랜 물음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려 합니다. -- 오직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그 많은 슬픔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사랑은 만남에 존립합니다. 그리하여 신은 만남과 사랑을 완성하라고 인간에게 이 ㅁ낳은 슬픔을 넘치도록 허락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단지 고통을 핑계로 우리가 삶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에피쿠로스의 신들이 아무리 완전하 행복을 누리고 산다 하더라도 내가 그들의 삶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는 것은, 만남 없는 삶의 행복이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내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인간의 삶에 널려 있는 슬픔과 고통 앞에 몸서리치면서도 인간의 가난한 삶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 것은 오직 고통과 슬픔 속에서만 우리는 서로에게 손내밀고 서로에게 말건네며 서로서로 온전히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그대, 우리에게 삶은 얼마나 신비한 선물인지요? 푹풍우치는 이 깊은 고통의 바다 위에서도 삶은 깃털처럼 가볍고, 마음은 파랑새처럼 명랑할 수 있으니...." (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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