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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 강연회 후기

어제 대전시민아카데미에서 홍기빈씨를 모시고 강연을 한다기에 가봤다.

주제가 "홍기빈과 함께 읽는 폴라니"였는데,

그의 책은 재미있게 읽은 것도 좀 많고, 폴라니에 대해서 언론 상에서 유행처럼 하는 얘기 말고

좀 더 영양가 있는 얘기가 있을까 싶어 가보게 되었다.

 

물론 워낙 대중강연의 형태를 띤 것이어서

엄청 새로운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최근의 경제상황과 돈벌이=경제로 통용되는 세간의 경제관념에 대해

일상적인 예들로 고정관념을 깨주는 정도의 강연이었다.

그런만큼 사람들의 호응도 좋은 그런 강연이었다.

 

그러나 강연에서 했던 그런 얘기들은 사실 그가 쓴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만 봐도 다 알 수 있는 내용이라

나의 관심사와는 좀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질의응답 시간에 나는

좀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봤다.

 

"최근에 폴라니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유지를 따르겠다는 사람들도 폴라니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보고 좀 뜨악했는데, 그동안 한미FTA 등 노무현 정부의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홍기빈 선생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폴라니 독해에 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 질문에 대해 홍기빈은 "내가 무슨 가톨릭 교황도, 폴라니 대변인도 아닌데 그 사람들이 폴라니 읽는다는데 뭐라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하며 질문 자체를 좀 어이없게 생각한 듯 했다. 사실 나는 더 직접적으로 "친노신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라고 묻고 싶었지만 강연 주제가 폴라니이고 하니 약간의 우회로를 선택한 것이어서 그런 반응을 그냥 덤덤히 받아들였다.

 

어쨌든 홍기빈은 그들이 폴라니를 읽기 시작했다는데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들이 읽은 폴라니가 그들 정책 속에서 어떤 영향을 보여줄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지켜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반성 했습니다. 작년 금융위기가 발발했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미FTA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었죠? 그건 그의 솔직한 자기반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대통령으로써 접하는 정보라는 것은 일반인이 상상할 수 있는 것과는 격이 달라요. 노무현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따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그 정도로 소탈한 사람이죠. 저는 예전에 노무현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하는 모임, 미래발전연구소라는 데에 가서도 폴라니에 대해 발제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들이 노무현의 어떤 측면을 계승할 것인지를 고민하는데 있어서 정확히 그렇게 한미FTA에 대해서 반성했던 그런 자세를 배우라고..."

 

난 이 새롭디 새로운 주장에 순간 '얼음'이 되었다. 내가 아는 홍기빈은 그래도 대중적으로 알려진 진보 지식인 중에서는 (경제정책의 측면에서)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가장 정확하고 날카롭게 비판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맥락없이 '대통령 노무현은 반성했다'는 말은 어떤 근거에서 타당화 될 수 있는 것일까?

 

그 증거로 삼아볼 수 있는 발언은 작년에 그가 민주주의2.0에 한미FTA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는 글을 올리고, 이에 대해 심상정이 '지난 5년간 정책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는 반론을 펴면서 벌어진 논쟁이 전부일 것이다. 그런데 이 논쟁에서도 확인되듯이, 노무현은 심상정의 '반성 요구'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내가 모르는 노무현의 발언이 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 봐서는 당췌 그가 어떤 부분에서 반성을 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홍기빈의 말처럼, 이런 판단 과정에서 노무현은 어떤 정치적 계산도 하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건 '반성'이 아니라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경제학적 상식에 기초한 것일 테다. 그 논쟁 와중에 노무현이 한 이야기는 한미FTA를 철회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심상정이 그렇게 주장했을 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잘 보라) 오바마가 재협상 얘기하고 있으니 섣불리 국회비준하지말고 재협상 준비해서 '완성된FTA' 체결하자는 거였다.

 

난 대체 홍기빈이 왜 이런 얘기를 했는지 이해가 안된다. 이건 전적으로 '노무현 착시효과'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이 안된다. (민주당 세력도 아니고) 노무현 그 자체에 대한 희망과 환상, 기대의 이 말도 안되는 근거지는 어디일까? 죽은 자는 말이 없는데, 산자들이 죽은자를 대신해 그의 입이 되어주고 있다. 그러나 그 죽은자를 대신해 말을 하는 사람들이 한다는 얘기가 이렇게 천가지 만가지이니 죽은자는 얼마나 답답할까?

 

나는 요즘 故 전인권 박사가 쓴 [박정희 평전]을 읽고 있는데, 노무현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평전이 당장 필요한 시점이다. 전인권 박사가 박정희의 정치적 행동의 심리사회학적 근원을 파헤쳤듯이, 노무현이 대중들에게 환상과 희망, 기대를 생성케 했던 정치인 노무현의 정신분석학적 근원과 그것이 대중과 상호작용했던 매커니즘 그 자체에 대해 까발려놓고 따지고 들어가 봐야 할 시점이다.

 

故 전인권 박사가 97년에 쓴 [김대중을 계산하자]는 '김대중 문제'를 우회하고는 지역주의를 해결할 수 없으며, 그를 죽은 놈 취급하는 일련의 정치적 언사들은 우익이든 좌익이든 그를 살아있는 시체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를 necrophilia(시체애호증)라고 불렀다. (김대중의 경우와는 좀 다르긴 하나) 말이 없는 죽은자를 붙잡고 빙의한 것처럼 그의 말을 대신하고자 하는 이들도 자신이 '시체애호증'이 걸린건 아닌지 심각하게 자문해 봐야 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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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관료를 위한 힘찬 응원가,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

 

 

 

요즘은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말이 진보라는 말 만큼이나 진부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그 재구성의 내용들이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것보다 못한 것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경제위기 바람을 타고 고개를 내미는 사민주의 논의와 함께 주목받고 있는 장하준의 경제학도 비슷한 케이스란 생각이 든다. 아니 어떤 면에선 경악스럽기까지 한 측면도 많다.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은 '진보의 재구성'의 요소들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경악스러운 논의의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그의 전체적인 논의 속에서 계속 눈에 걸리는 것은 사실상 그가 동어반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다른 목소리를 통해 같은 말을 한다'. 그러면 우선 그의 논리 구조를 따라가 보자. 그는 순수한 의미의 '자유시장'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상 모든 '시장'의 형성에 있어서 어떤 사회에서도 국가의 개입을 배제하고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난 여기까지는 전혀 색다를 것이 없는, 진보학계에서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란 생각이 드는데, 왜냐면 이런 사실은 장하준이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칼 폴라니가 자기조정적 시장경제라는 허상을 공격하면서, 그리고 쉬잔느 브뤼노프가 국가와 자본이라는 머리 두개 달린 독수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미 깨뜨린 논리이다. 물론 폴라니나 브뤼노프를 굳이 언급하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어찌되었건 이 정도로 뭐 대단한 사상적 진전을 본 것마냥 오바할 거 하나 없다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가 '자유시장'이라는 베일에 감춰진 '국가'라는 마피아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이 국가를 미화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보통 신자유주의의 선봉장들은 국가를 시장경제의 해가 되는 존재로 인식한다.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장하준은 폴라니나 브뤼노프처럼 사회의 파멸을 초래하는 시장경제의 성장에 동조한 국가의 역할을 폭로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전에 국가가 엄청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고전파 경제학이 경제성장을 위해선 국가의 역할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장하준은 같은 이유로 국가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국가가 암암리에 시장경제 활성화를 위해 해 왔던 '긍정적인 역할'들을 인정하고 이를 확대하자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간간히 심지어 구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계획경제에도 긍정성을 부여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마치 허무개그를 보는 것만 같다. 장하준은 초국적 기업에 대한 전통적 신자유주의자들(신고전파, 오스트리아학파, 후생경제학 등)의 주장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자랑하는 외국인 직접투자는 사실 선진국 내부에서만 발생했고 실제 개도국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고 말한다. 실제 신자유주의가 관철되는 과정에서 산업부문에서의 직접투자보다는 금융에서의 포트폴리오 투자 같은 간접투자가 증가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내가 장하준에게 묻고 싶은 말은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이다. 그는 줄곧 강조하는 산업정책의 발전을 위해서 이런 부문에까지 해외 자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산업부문에도 외국자본이 직접개입하기 좋은 조건을 만들자? 뭐 이런건가?

 

나의 이런 의문은 뒷부분으로 가면 말끔히 정리된다. 그는 초국적 기업  투자를 촉진하는 것은 규제완화 조치들이 아니라 국내정치적 안정성이라 주장한다. 왜냐면 실제 규제완화 여부와 상관없이 개도국의 기업투자 유치 실적은 늘지 않았고, 오히려 선진국에서만 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171쪽)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주도하는 '전략적 산업정책'을 통해 국제적 조건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앞에서 그의 주장이 '다른 목소리로 같은 말하기'일 뿐이라고 일갈한 이유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가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자나 장하준 자신이나 모두 초국적 기업 투자 자체는 '선'이라는 인식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신자유주의자는 규제완화를 주장하고 장하준은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주장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식이라면 사실상 세계적으로 '순수한 의미의' 신자유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20세기 말 신자유주의 정책의 전진기지라고 할 수 있는 남미에서도 워싱턴 컨센서스를 수용하는 친미세력의 정권 장악이라는 국내정치적 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NAFTA도 체결하고, 아옌데도 때려잡았던거 아닌가? 물론 이 당시 남미의 정치 상황이 매우 불안정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하준이 박정희 정권 당시 한국 정치 상황을 안정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면 당췌 이 양반이 생각하는 '안정'이 뭔지 아리송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 신자유주의자들도, 장하준도 국가주의자이다. 다만 장하준이 좀 더 솔직할 뿐이다. 여기서 장하준이 어떤 국가주의자인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기술관료 즉, 테크노라트에 대한 비판이 주되게 제기되고 있는데, 장하준은 정확히 이런 테크노라트들의 치어리더다. "선별적 산업, 무역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경제학자로서의 능력보다는 오히려 관리자로서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229쪽) 이딴 식이라면 어떻게 박정희 신드롬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 장하준은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에겐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장하준의 테크노라트를 위한 응원가는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는 중국, 한국, 폴란드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초국적 기업은 매몰비용의 문제 때문에 정부의 정책전환에 불만을 가지고 자금을 회수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초국적 기업을 상대로 해당 국가 정부가 다양한 협상 카드를 제시할수 있고, 협상 과정에서 초국적 기업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165-167쪽) "그러니 이 땅의 모든 기술관료들이여! 두려움을 버리고 당당히 나아가라! 전 세계 자본에게 당당히 호객행위를 하라!"

 

한 학생단체에서 낸 팜플렛을 보니까 장하준을 비판하면서 그의 입장이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하던데, 솔직히 난 이런 비판도 좀 오버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가 만약 현시기 자본주의가 위기라고 생각한다면 그 의미가 이 단체가 생각하는 '위기'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일테고, 그렇기 때문에 장하준은 (이 단체가 생각하는) 위기를 극복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단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극복의 방향은 '대안세계화'인데, 장하준은 대안세계화 정도되는 대안 논의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거다.

 

정확히 이런 수준에서, 노무현은 장하준의 책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결국 그놈의 '진보의 재구성'을 이루기 위해선 장하준도 노무현도 넘어서는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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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노무현, 김대중... 그속에 우리는??

올해 들어서 안타까운 죽음이 너무나 많다. 용산참사로 희생되신 분들의 경우가 가장 가슴이 아프지만, 이 나라의 거목들이 줄줄이 스러지는 것도 용산의 경우만큼은 아니어도 가슴이 쓰리긴 마찬가지다. 김수환, 노무현, 김대중. 올 해 들어 세명의 거목들이 스러졌다. 물론 노 전 대통령을 제외한 두 사람은 내 인생 자체와 별 상관이 없던 사람이긴 하지만, 요즘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이 세 사람이 세트로 연결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몇 달전 노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묻지마 추모'열기에 거품무는 글을 쓴 적이 있긴 하지만, 나도 개인적으로는 그의 죽음이 안타깝다. 그래도 한 시대를 풍미했고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우리'(??)를 '대표'(??)했던 이였는데, 그런 감정이 조금이라도 안 든다면 이상할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노 전 대통령이 '자살'이라는, 정치인으로서 상상해 볼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해서 너도 나도 충격이 장난이 아니었는데, 이번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는 그 때의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임기 당시에도 '그 노인네 임기만 채우면 다행'이라고 걱정 아닌 걱정을 하던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분위기가 덤덤 한 것 같다. 물론 나 또한 그렇다.

 

이렇게 '뜻하지 않게' 차분한 분위기 때문인지 좀 딴 생각이 든다. 김수환 추기경 때도 그렇고, 노 대통령때도 그렇고 소위 '좌파'라는 사람들은 (물론 나도 그랬지만) 참 냉소적이었다. 물론 게 나쁜 건 아니다. 5년 내내 그의 정책이 맘에 안들었는데 죽었다고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라는 맘에도 없는 고백을 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런 면에서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은 참 솔직하고 당당한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어느 누가 죽어도 그럴 것 같다는 거다. 물론 좌파에게는 '열사'가 있긴 하지만 '열사'의 영정 앞에서 오열하는 것은 희생된 자에게 느끼는 연민과 고통이지, 일부 사람들이 노무현과 김대중의 영정 앞에서 드러냈던 것과 같은 '존경'과는 사뭇 다른 것일테다. 사회적으로 명성이 난 어떤 이가 이승을 떠나도 그렇게 '쿨'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는 원래 나쁜 놈이었으니까 당연하다고 말하기에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왜냐면 그런말이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좌파'가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니까...

 

사실 이건 좀 비극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다 같이 보고 배울 만한 '스승'이 없다는 거.... 내가 아직 한 세기로 따지면 1/4분기 정도밖에 안 살아서 잘은 모르지만 좌파가 다 같이 존경하는 그런 스승이 아직은 없는 것 같다. 전태일 열사 정도가 있으려나? 김진균 교수 돌아가셨을때는 어떤 분위기였을지 세삼 궁금해 진다.

 

그리고... 이런 얘기 미리 하는 건 완전 무례한 말인 거 알지만, 백기완 선생님이 돌아가신다면 좀 많이 슬플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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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시오 구즈만의 <칠레전투>

redbrigade님의 "선거? 그거 이겨 뭐하게?"에 관련된 글

 

 

 

3일 전에 그 동안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도 못 보고 있었던 <칠레 전투>를 보았다.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고, 한 편당 거의 90분에 육박하는데, 누군가가 친절하게도 인터넷에 그걸 다 올려놨더라. 낮 시간 내내 일이 없을 때 짬짬이 봤는데도 결국 2부작까지 밖에 못봤다.

 

아옌데의 민중연합 정부를 탄핵하기 위한 2/3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기독교민주당 세력들이 합법적인 방식으로는 이 정부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옌데를 대중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외곽조직을 만들어 낸다. 조직의 이름까지 영화에서 명확히 나오는 것은 아니었는데, 어쨌든 그들은 반 정부 친위대라 할 수 있을만한 조직이다.

의회에서 다수당인 기독교민주당이 아옌데 정부가 내놓는 개혁법안이나 임명하는 장관들의 대부분을 꼬꾸라뜨리고 있는 동안  이 조직은 맑시스트 정부가 칠레를 망쳐놓았다는 선전을 하면서 '폭력적인' 방식으로 친정부 단체들을 공격한다.

이렇게 의회 내외적으로 파시즘적 기운이 충천해 가고 있는 동안, 기독교민주당은 아옌데 정부 초기에 국유화를 통해 소위 '귀족 노동자'가 된 구리광산 노동자들을 부추겨 파업을 일으키도록 한다. 40%의 임금인상을 요구한 것이다. 구리광산 노동자들은 아옌데 정부를 지지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그들의 행동은 민중연합파 노동자들 내부의 갈등을 불러와 보수파의 공세에 직면한 아옌데를 궁지로 몰아넣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어차피 기독교민주당에게는 미국 CIA라는 강력한 백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들 밑에서 강력하게 훈련된 군 조직이 있었으며, 독점 자본과 방송을 비롯한 미디어도 이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대중조직과 노동계급의 분열을 통한 파시즘적 기운을 북돋움으로서 아옌데의 민중연합 정부를 아사상태로 몰아갔고, 결국엔 군사 쿠데타로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지구 반대편의 나라에서 40여년 전에 벌어진 이 광경이 한반도 남녘의 과거이자 미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과거라고 한다면, 노무현의 집권 5년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비적으로 아옌데의 민중연합과 기독교민주당의 관계는 노무현과 한나라당의 관계를 빼다 박은 듯 하다. 물론 전자가 합법적인 탄핵은 못시켰어도 무력으로 대통령을 끌어내렸고, 후자가 합법적으로 탄핵시켰음에도 헌법재판소라는 최고 법률기관의 판정에 따라 무효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영화를 통해서 2004년 3월 12일을 떠올리는 것은 기억에 의존해 살아가는 인간의 매우 자연스러운 두뇌작용일 것이다. 얼마 전에 <시대와 철학> 최근호의 서문으로 실린 김교빈 교수의 글을 보니 영화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예 대놓고 노무현은 한국의 아옌데라는 식으로 말하던데, 같은 영화는 아니지만 어쨌든 나도 <칠레 전투>를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이 완전히 억지는 아니겠다라는 느낌이다. 그러나 김교빈 교수가 놓치고 있는 점이 있다면 한국과 칠레는 엄연히 정치적 대립의 선이 다른 지점에 그어져 있다는 것일게다. 아옌데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 민병대, 각종 노동자의 자주적 위원회, 노조 등에 근거하고 있었다면, 노무현은 그런 기반은 물론 경제적 기반까지 무너져 상실감에 빠진 대중들의 '비물질적인' 열망에 기반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건 이 글을 쓰면서 우연히 든 생각일 뿐이니 이런 정의에 대해 딴지걸지 마시길 ㅋㅋㅋㅋ) 그래서 노무현의 이념적 지향은 쉽게 묻어갈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자리잡지 않았나 생각한다.

 

어쨌든 과거는 과거인거고,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일텐데... 영화 초반에 등장한 기민당의 친위조직을 보면서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장면이 있다. 바로 얼마전에 거국적으로(!!) 창립하신 '애국기동단' 어르신들!!! 그들이 서울대 교수들 시국선언하는데 쫓아가서 깽판치고 노무현 분향소를 때려부시는 모습들... 게다가 그들은 항상 '군복'을 입고 다닌다. 그들을 보면서 이 나라가 칠레에서와 같은 군사쿠데타의 전주부분을 연주하며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얼마전에 통과된 미디어법. 이걸 보면 그런 징후는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것을 통해 보수세력의 전방위적 선전망이 강력하게 확보된다면, redbrigade님의 말처럼 사실상 다음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당선이 안되도 이들 입장에서는 별 상관없는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이들은 대통령 자리보다 더 강력한 것을 가진 것이기에, 정치의 모든 인풋 아웃풋을 자신들 통제하에 검열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 제일 안좋은 경우의 수는 미디어법과 금융지주회사법 등이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다음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낙선하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실질적인 자본권력, 언론권력, 거기다 지방권력까지 보수세력이 독점한 상태에 민주당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정치권력의 일부(분명 위 법들이 안정적으로 정착되면 대통령이라는 것은 권력의 '일부'일 뿐인 존재가 될 것이다)를 가지게 된다면? 정세는 지금보다 더 엄혹한 상황이 되겠지만, 지금과 같이 불만스러우나마 반MB전선 따위도 만들지 못할 것이고, 권력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의 결집을 도모하기는 더욱 요원할 것이다.

 

물론 내 상상력이 만들어낸 그림일 뿐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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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가 노무현의 유산이 아니라고?

어제 오랜만에 시립도서관엘 갔다.

시립도서관엔 다른데엔 없는 녹색평론과 진보평론이 있다.

근데 어제 녹색평론을 보다가 정말 기가 막히는 글을 발견했다.

송기호. 작년 광우병 논란때 100분토론에 출연하여 농림부 관료의 협상문 해석 오류를 폭로한 '스타' 변호사. 한미FTA반대대책위에서 통상관련 전문 변호사로 활동한 유능한 변호사.

사상적으로는 나와 별로 맞는 부분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참 훌륭한 사람이라 생각했던 그 분.

 

그가 녹색평론에 <한미FTA는 노무현의 유산인가?>라는 글을 썼다.

결론은, 아래 옮겨놓은 글에서도 보면 알겠지만, 노무현의 유산이 아니라는 거다.

앞에서는 한미FTA는 민주주의의 문제이며, 그래서 자신은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한

한미FTA에 반대했던 것이라고 해놓고, 결말에 가서는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디딤돌이며

이명박의 한미FTA는 노무현의 한미FTA와 다르다고 말한다.

 

그전에 봤던 다른 386들의 글에서도 느꼈던 것인데,

노무현을 둘러싼 이 386들의 정신분열이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노무현이 임기 초 한미FTA를 구상하고, 임기 말에 가서는 결국 체결 하기까지

그 수년 간, 노무현에게는 이명박의 영혼이 빙의되기라고 했단 말인가?

노무현이 추진하는 FTA는 '애통'한 일이고, 이명박이 추진하는 FTA는 '분통'터지는 일인가?

 

이 글로 인해 나의 올 해 목표가 하나 세워졌다.

노무현에 대한 기억을 둘러싼 386들의 정신분열의 원인은 무엇인가?

답이 나올때까지 파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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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와 민주주의

 

내가 노 대통령 재임 시 한미FTA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던 이유는 민주주의 때문이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이명박 정부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대중이 5년에 한번씩 대통령 선거를 위해 투표소에 갈 수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허헌중 지역재단 이사가 이번호 녹색평론에 썼듯이, 자본과 시장을 민주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노동자가 일상적인 노동 공간에서 무방비적으로 축출당하는 곳을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

한미FTA는 바로 이 민주주의를 전복시킨다. 자본과 시장이 관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과 시장이 공적 제도를 관리한다. 수천만의 대중을 대표한 국회가 만든 법률이 단 한 사람의 미국인 투자자에 의해서, 셋 중 둘은 외국인인 국제중재에 회부당하는 것에 동의하는 법적 문서가 한미FTA이다. 단 세명의 국제중재 결정을 한국이 거부할 경우, 오로지 이를 이유로 미국이 한국에게 무역제제를 하는 것을 합법화하는 장치가 한미FTA이다.

이런 틀은 수출동원의 박정희 체제에도,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무역기구 체제에도 없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한국은 노무현 대통령 시기에 이르러 한미FTA체제를 시도하려 했을까? 왜 그 시기에 미국인 투자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무역제재를 당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했을까? 왜 미국인 투자자에게 한국의 헌법재판소와 행정법원에 충분히 호소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 이유를 한미FTA가 우리 안의 경제민주주의를 해체하기 위한 국제통화기금(IMF)체제 기득권이 택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미FTA가 법적 힘을 갖게 되는 날, 국제금융자본과 한국의 IMF 기득권자들은 두손을 들고 만세를 부를 것이다. 한미FTA는 자본과 시장을 민주적으로 관리하려는 노력을 좌절시키는 강력한 무기이다. 보라! 지금 이명박 정부는 세계무역기구를 핑계로 유통 대자본이 골목 상권마저 싹쓸이하는 것을 규제하려 들지 않는다. 한미FTA가 되면 자본에 대한 국가의 정당한 규제는 끊임없이 공격당할 것이다. 노 대통령의 역설을 빌면, 권력을 시장에 넘기는 법적 문서가 한미FTA이다. 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미FTA 서명을 마친 김현종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을 영입한 곳이 삼성인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노 대통령이 한미FTA서명을 지시한 것은 노 대통령에게 권력을 준 대중이 흘릴 눈물을 예고한 비극적 과오였다.

아파트값 폭등과 사교육비 폭발이 상징하듯이, 참여정부가 자본과 시장에 대한 민주적 관리를 제대로 못한 결과 IMF 이후 해체와 빈곤의 위기를 맞은 중하층, 중산층들이 사적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선택한 것이 이명박 정부다. 그러므로 노 대통령이 한미FTA를 비판한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으며, 노 대통령은 그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시장을 민주적으로 관리하려는 치밀하고도 집요한 노력을 수행하지 못했다. 오히려 한미FTA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쇄국론자로 몰아세웠다. 참으로 애통한 과오였다.

 

한미FTA는 노 대통령의 유산인가

 

노 대통령이 몸을 던져서라도 지키고자 했던 뜻은 대중의 행복한 삶과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뜻은 이명박 정부의 한미FTA로는 실현할 수 없다. 왜 그런가? 이명박 정부가 참여정부의 비젼2030를 폐기했기 때문이다. 비젼2030은 사회복지 지출을 획기적으로 늘리려는 노대통령의 종합미래구상이었다. 노 대통령은 한미FTA가 초래할 경제민주주의의 퇴행을 1,100조원에 달하는 비젼 2030의 예산으로 보완하고자 했다. 물론 이는 시장의 패배자들을 조장해 놓고 그들에게 세금을 걷어 치료하는 것이므로 온당치 않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이마저 폐기했다. 지금 그 어떠한 관료도 더 이상 비전2030을 말하지 않는다. 노 대통령의 한미FTA는 이명박 정부의 것과 같지 않다. 이명박 정부의 한미FTA는 노 대통령의 유산이 아니다.

또한 이명박 정부는 농업선진화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쌀의 전면 수입개방(관세화)을 검토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한미FTA는 질적으로 전혀 달라진다. 노 대톨령의 한미FTA는 쌀을 일단 비켜가는 구조이다. 쌀이 수입자유화가 되지 않아 '수입관세율'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쌀을 전면 개방하면, 쌀의 수입관세율이 나올 것이고, 그러면 관세율 폐지를 중요 목적으로 하는 한미FTA는 조만간 쌀을 포함할 수 밖에 없다. 쌀이 농업과 국민생활에 갖는 위치에서 볼때, 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FTA로 변질된다. 또한 국제금융위기를 낳은 국제금융자본을 민주적으로 관리하려는, 세계 정세의 근본적 변화에서 볼 때에도, 이명박 정부의 한미FTA는 노 대통령 때의 그것이라 할 수 없다. 한미FTA는 더 이상 노 대통령의 그것이 아니다.

노 대통령은 수백만 사람들의 진실된 추모와 애도 속에 갔다. 노 대통령을 떠나보낸 대중은 노 대통령에 대한 집단적 기억에서 자양분을 얻으며 새로운 역사를 감당할 것이다. 한미FTA라는 과오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노 대통령을 한국 민주주의의 디딤돌로 삼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고 추모하는 대통령이 될 것이다. 나 또한 단 한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그를 사랑하고 추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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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주의 타파가 노무현의 업적??

며칠전에 서점에 가서 잠깐 고종석씨의 <경계긋기의 어려움>이라는 책을 봤다.

거기 한 꼭지의 제목이 "정동영 생각"인데, 아주 인상깊었다.

지난 대선 전에 정동영이 광주를 찾아 "민주화의 성지 광주에서 이명박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단다. 그런데 고종석씨는 그에게 징징거리지 말라고 훈계한다. 사실 정동영이 주도해서 창당한 열린우리당의 기본 모토가 "호남표 절반을 버리고 영남표 절반을 가져온다" 였다는 거다. 결국 그런식으로 지역주의 깨자는 거였고... 지들이 호남표 버리겠다고 선언해 놓고는 어디서 또 징징거리냐... 뭐 요런 말씀이시다...

 

아, 요걸 보고 있자니 왜케 웃기는지??

요런 방식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 노무현의 '업적'이라고 칭송되고 있는

지역주의 타파라는 것도 전혀 대단할 것 없는 정치수작일 뿐인 거다.

노무현이 떨어질 것 알면서도 부산을 끊임없이 찔러본 것은, 당장엔 실패해도

결국 그게 자신의 주가를 올리는 것이라는 점을 그 자신은 알았다는 거다.

지금 식으로 생각하면 이것이 곧 '민주당 외연확장'인 셈이고....

한 마디로 노무현은 이 전략을 수행하는데 있어 선봉장에 섰던거다.

그게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거랑 아무 상관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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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사망으로 한국사회가 집단 환각에 빠졌다!!!

갈수록 내 독설이 늘어만 간다.

 

어쩐담. 나 이런 성격 버릴려고 했는데, 우리 전능하신 노짱께서 내 의지를 또 꺾어놓으셨다.

 

아, 노짱 탓만 할 것은 아니지.... 노무현이 아이스크림 먹는 사진까지 뿌려대며

 

그를 신화화하는 언론도 한 몫 하고 있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아이스크림 먹고, 봉하마을서 자전거타는 노무현이 소탈해 보이고

 

탈 권위주의적으로 보인다면, 그것과 아주 같은 방식, 똑같은 의미로

 

청와대 사저에서 출퇴근할때 자전거 이용하고, 대선광고에서 시장 아줌마랑 뜨거운 포옹

 

을 나누었던 이명박도 그에 못지않게 소탈하고 탈 권위주의적으로 보인다.

 

내 말이 틀렸나? 얼마 전 어린이날에 이명박도 초딩들 앞에 모아놓고 퇴임 후 환경운동

 

하고싶다고 말했단다. 이명박이 환경운동 한다면 개구라고, 노무현이 한다고 하면 진심어린

 

서민적인 면모인가? 엎어치나 매치나 이명박은 4대강 갈아엎으려는 놈이고, 노무현은 이미

 

새만금 갈아 엎은 놈인데...

 

 

아, 그리고 요즘 방송 보니까 노무현 생전 모습을 보여주는데 기가막힌 장면이 있었다.

 

1. 노무현이 모 연설장에서 주머니에 손넣고 약간 불량한 자세로 말하는 사진. 그 장면 나도 기억하는데 당시 언론에서는 대통령 품위에 맞지 않는 자세와 언행이라고 비난의 화살을 날렸었다. 그런데 요새 언론에서는 이게 탈권위주의적인 카리스마를 나타내는 모습이란다. 아, 앞으로 나도 사람 많은데서 말할 기회 있으면 주머니에 손 넣고 고개 쭉 빼고 다녀야 겠다. 카리스마 있어 보이게.

 

2. 어제 밤 집에 오는길에 동네 호프집 밖에 설치된 뉴스에서 나온 장면. 노무현 임기 당시 서민 대통령으로서의 면모를 모아서 보여준단다. 김선일씨 이라크에서 피랍되었을 때, 자국민의 안위를 고민하며 고뇌하는 모습이 나온다. 소파에 앉아서 턱을 괴고 한껏 인상을 찌푸리면서. 아, 그랬던 그가 내렸던 결정은 무엇인가? 그의 결정으로 김선일씨는 처참한 시체로 돌아왔는데, 얼굴 한번 찌푸린 사진 한방에 노무현은 서민적인 대통령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노무현 그 보다 먼저간 영령들이 다시 한번 기절하실 노릇이다.

 

이놈의 대한민국, 전부 다 집단 환각에 빠진 것이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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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위한 통성기도를 강요하지 말라!

그를 위한 통성기도를 강요하지 말라!
 
 
고등학교 2학년 때, 잠깐 교회를 다닌 적이 있었다. 그 때까지는 나도 순수한 마음이 조금은 남아있던 터라 그냥 봉사활동같은 걸 여러사람들과 함께 다니고 싶다는 마음에 짝궁이 다니던 교회에 따라갔다. 그런데, 한 두어번 갔을때쯤에 교회에 발길을 뚝 끊어버리게 만드는 일을 겪게되었다. 그것은 바로 통성기도 때문이었다. 목사의 지시에 따라 신도들이 다같이 일어나더니 옆사람과 손을 잡고 목놓아 울부짖으며 기도를 한다. 여러사람이 한꺼번에 울부짖으니 각자의 기도내용이 뭔지 알 수도 없다. 다들 ‘용서하소서’라는 말은 반복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이런 ‘과격한’ 기도 행위가 낯설었던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들 다 울면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나만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으려니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나도 뭔가 하나님께 용서받아야 할 일을 생각해 내려고 애를 썼다. 결국 엄마, 아빠, 누나한테 잘못했던 것들을 생각해 내어 조금씩 목소리를 내 보았다. 아, 그런데 끝까지 눈물은 안 났다. 좀 억울하다 싶으면서도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한 ‘간절한 기도’에 함께하지 못한게 못내 찝찝했다. 그러나 그 일 이후로 한달도 안되어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있지도 않은 슬픔을 쥐어 짜낼만큼 내 감정의 상상력은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8년 후인 2009년 오늘, 나는 또 다시 통성기도의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은 많은 시민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 수도 봉하마을에만 60만, 전국적으로는 200만명을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인터넷에서는 ‘지못미’ 바람이 불고 있다. 사회원로인사라는 사람들은 앞다투어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읊조린다. 친노인사라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워오던 (주로 진보진영) 인사들도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데 대한 죄스러움을 드러낸다.
 
 
나는 왜 이 ‘통성기도’가 불편한가?
 
8년 전 내가 마주쳤던 그 교회의 통성기도 현장에서처럼, 지금의 한국사회는 나를 비롯해 그의 죽음에 울부짖지 않는 사람들을 참으로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인터넷에 오가는 글들을 보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참으로 매정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생각이 한나라당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 보라“는 사상검증을 받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이런 네티즌들의 공격적인 태도보다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진보진영 인사들의 신앙고백이다. 통성기도를 할 때, 단상에 선 목사는 신도들의 죄의식을 북돋기 위해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울부짖는다. 있는 힘껏 목소리를 쥐어짜고 몸을 부들부들 떨기도 한다. 이를 통해 신도와 목사 모두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전능하심에 감동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느낀다. 지금 진보진영 인사들이 보이고 있는 작태가 이런 공허한 믿음을 강요하는 목사들의 모습과 다를바가 뭔가?
 
무엇보다도 노무현 대통령 임기 당시 온갖 진보적 운동단체의 대표는 다 맡아왔던 오종렬씨의 언사는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서민후보’였다고 추켜세우고는(프레시안은 이 기사를 전하면서 처음엔 ‘민중후보’라는 표현을 썼다가 ‘서민후보’라는 표현으로 바꾼 이유가 뭔지 해명해 주길 바란다), ‘장렬히 산화’했다고 말한다. 그가 수도 없이 한 집회장 발언들을 생각해 볼 때, ‘장렬히 산화’했다는 표현은 노동·민중열사들의 분신에나 쓰는 표현이다. 그런데 그는 노무현도 ‘장렬히 산화’했다고 말한다. 즉 ‘노무현 열사’라는 것이다. 오종렬씨에게 묻는다. 그는 이 표현을 쓰는데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는가? 비정규직의 삶에 비관하여 목숨을 끊고도 노무현에게 ‘민주화된 시대에 낡은 투쟁방식을 고집한다’고 비난을 들어야 했던 이용석 열사의 얼굴을 대하고도 감히 ‘장렬히 산화’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노무현은 왜 자살을 선택했는가? 수사과정에서 의문점이 많이 남는 것이 사실이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는 권력형 비리에 대한 수사를 받다가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함이었든 자신을 믿었던 이들에 대한 미안함에서 였든지 간에 말이다. 자유, 평등, 정의, 평화 등 이 모든 숭고한 가치들은 그의 마지막 선택과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 그런 그에게 열사의 지위를 부여하려는 오종렬씨의 발언에 분노를 금치 못하는 것이 오직 나뿐일까?
 
또 김상봉 교수가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한 시대의 종말을 애도함>)을 보자. 그는 “그(노무현)가 권력이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했을 때, 나는 깊이 좌절하고 실망했으나, 생각하면 그것은 그 개인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한계였다. 자본이 절대 권력이 된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 한계 앞에서 변절하거나, 세치 혀로 한계를 넘어갈 때, 그는 자기 방식으로 시대의 한계와 끊임없이 부딪혔고, 결국 좌절했다.” 라고 말한다. 이 무슨 궤변인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의 당당한 자기고백이 ‘우리 시대’(대체 이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386인가?)의 한계였다고 말하며 그에게 면죄부를 주고는 그의 삶은 치열했다는 찬사로 마무리짓는다. 그리고 글의 말미에서 “뜨겁게 사랑했으므로 내가 미워했던 마음의 벗이여, 잘 가오. 그대 영전에 오래 참았던 울음 우노니, 그대 나 대신 죽어, 내 마음에 영원히 살아 있으리.”라고 뜨거운 연정을 표시한다. 이로써 2003년부터 2007년까지 그 ‘시대’의 잔혹함을 못이겨 목숨을 버려야만 했던 수많은 열사들의 이야기는 노무현이 ‘시대의 한계와 끊임없이 부딪치는’ 동안 벌어진 한낱 에피소드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한 이 사랑고백에 담긴 무한한 ‘용서와 화해’의 정신은 침몰하는 듯 보였던 자유주의 개혁세력에게 힘찬 찬송가가 되어 입에서 입으로 불려질 것이다.
 
 
누가 노무현의 무덤 앞에 무고한 제물을 갖다 바치는가?
 
김상봉 교수의 말대로 그가 한 시대의 상징이었다면, 그 상징은 진작에 스러졌어야 했다. 그의 일생, 적어도 90년대 이후 ‘정치인 노무현’의 일생이 상징하는 바는 민주도, 정의도, 평등도 아닌 오히려 그 훈장을 밟고 일어서 기지개를 편 탐욕과 착취의 시대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2007년, 많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부 충격을 통한 개방과 성장’이라는 미명하에 추진된 한미FTA에 반대하며 스러져간 어느 평범한 택시 노동자의 삶이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다.
 
그의 죽음 앞에, 그가 진작에 버렸던 민주, 정의, 평등이라는 가치를 제물로 갖다 바치지 말라. 그의 죽음 앞에, 이미 이 세상엔 없는 소중한 열사들의 정신을 제물로 갖다 바치지 말라.
 
나는 노무현이 투신했다는 뉴스를 접한 지난 토요일 오후, 시내의 작은 영화관에서 2006년 평택 대추리에서 미군기지 확장에 의해 삶의 터전을 빼앗긴 농민들의 삶을 기록한 ‘길’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 농민들은 절규했고 울부짖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한 시간 내내 나도 그들과 함께 하염없이 울부짖었다. 그 정직한 농민들에게 눈물을 선사한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러므로, 나에게 노무현을 위한 눈물을 강요하지 말라. 그를 위한 통성기도를 강요하지 말라. 나는 오로지 평택 대추리에서 스러져간 뭇생명들에 안타까워 하는 딱 그 만큼만 노무현이라는 소중한 생명의 (억울한) 스러짐을 애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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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법

1/
 
전국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의 분위기로 숙연하다. 그런데 나에겐 추모의 분위기에 마음이라도 보태고 싶어지면서도 망설여지는 일들이 보인다. 그런 모습 때문에 여러 고민이 들어 또 이렇게 짧지 않은 글을 쓰려 한다.
 
많은 이들이 노 전 대통령은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분이고, 그래서 그의 개혁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그와 대립각을 세워오던 진보정당들에서도 이런 목소리가 나온다. 최근 검찰조사 등으로 안타까운 상황에 놓였으나, 대통령 재직중에 정치개혁의 초석을 놓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진보신당 논평) 심지어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는 이런 사태가 오기까지 침묵해온 자신들도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단다. 이건 웬 고해성사인가?
 
고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나누고 애도를 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노무현의 재임기간 내내 그의 경제개혁은 물론이고 정치개혁에 있어서도 진정성 없음을 비판해 왔던 진보세력에서 갑자기 이런 태도로 돌변하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하나? 나는 이런 태도가 ‘애도’와는 하등 상관 없는 것이라고 본다. ‘애도’라는 것은 하나의 소중한 생명이 남아 있는 다른 생명들 곁을 떠나감을 슬퍼하는 것이지, 고인에 대한 그리움을 핑계로 또는 그 죽음의 억울함에 기대어 결국엔 그가 옳았음을 인정하는 ‘고해성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2/
 
한편 나는 지난 주말 많은 이들의 추모 분위기 속에서 조금은 다른 종류의 슬픔을 느꼈다.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니까 봉하마을을 찾아온 조문객들이 조중동 등 언론사들의 왜곡보도를 규탄하면서 하는 말이 "당신들, 어디 노무현 같이 훌륭한 대통령을 이 나라에서 다시 만나 볼 수나 있는 줄 알아?"였다. 2004년 탄핵사태 때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비극적인 방식으로 ‘메이저 보수세력’의 희생양이 된 '마이너 보수세력' 노무현은 점점 시민들 사이에서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대안적 정치인의 최대치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지난 탄핵반대 촛불집회에 나왔던 많은 시민들이 결국 4.15총선 투표장으로 가서 민주당 후보를 찍을 것을 종용받았던 것처럼, 지금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많은 시민들도 그런 반복되는 역사의 순환 속으로 복귀할 것을 강요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3/
 
인터넷을 돌아다니다보니 이런 말이 있더라.
 
"인간 노무현의 특이성은 ('도덕성'의 붕괴라는) 이 사실을 '수치'(shame)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었다. 그만큼 그의 주이상스는 한국 사회의 평균을 넘어서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죽음은 한국 부르주아의 위선을 외설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다."
- 이택광 블로그  (http://wallflower.egloos.com/1909217)
 
내가 대학을 다녔던 딱 그 기간만큼 대통령직에 있었던 그의 정책 대부분에 반대했던 나이지만, 여러 정황을 봤을 때 위 사실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자살을 그만이 가진 도드라진 자존심 때문이라 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고... (물론 성격을 파악하는 문제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진실로 간주할 수는 없지만...) 노무현이 이명박, 전두환과 대립적으로 보이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비자금 수천억원을 챙긴 놈은 떵떵거리면서 골프치러 다니고, 전과 14범에다가 성매매를 일삼는 비서관을 청와대 내에서 거느리고 있는 대통령도 고개 뻣뻣이 들고 다니는데, 그에 비하면 노무현이 뭐 그렇게 잘못을 했냐는 항변, 나올만도 하다.
 
 
4/
 
이런 분위기 속에서 노무현 지지자들은 노무현을 죽인 ‘공범’들을 색출해 내 분노를 쏟아내려는 듯 하다. 그런데 한승수, 박근혜, 정몽준 등의 조문이 저지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정동영의 조문이 저지된 것은 나로선 좀 이해하기 힘들었다. 정동영이 임기말의 노무현 대통령을 많이 씹기는 했지만, 정적(政敵) 수준은 아닌데 굳이 막을 필요 있나? 그런 생각이 들던 와중에 프레시안에 실린 다음 글을 보고 노무현 지지자들의 심성 밑바닥에 있는 사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대통령직에 계실 때 그 수모와 고초를 당하시고도 당당한 의지를 보이셨기에, 언제까지나 꿋꿋하시리라 믿었습니다. 진보라는 사람들이 허망한 몽상을 쫓느라 님을 공격하고 등을 돌려도 희망을 간직하시기에, 늘 저희 곁에서 등불이 되어 주실 줄만 알았습니다. (...)
대통령님을 괴롭힌 모든 인종들을 지목해서 조목조목 비난하고 싶습니다만, "원망 마라"고 하신 당부를 지금은 따르겠습니다. 검찰이 법으로 사람을 잡는 인간사냥개 노릇을 한 것이 아닌지도 지금은 따지지 않고, 얼치기 진보들의 자기방어용 결벽증이 대통령님께 얼마나 부담스러웠을지도 지금은 들춰내지 않고(...)
 
권위주의적인 표현인 ‘각하’라는 표현을 김대중 대통령때부터 쓰지 않는게 관례가 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에게 ‘각하’라는 극존칭을 써가며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노무현을 공격했던 이들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여기에 맞장구를 치려는 듯, 일부 네티즌들은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타살에 진보/보수를 막론한 모든 언론사와 정치세력들도 공범이라고 몰아세우고 있단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정치적 분위기는 분명히 진보냐 보수냐, 또는 개혁이냐 수구냐 같은 이념논쟁이 아니라, ‘노무현’이냐 ‘非/反노무현’이냐 라는 대립구도를 띠고 있는 듯 하다.
 
 
5/
 
노무현의 죽음이 현 정권의 정치보복에 의한 타살이라는 점을 백번 인정한다 하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연루된 이번 사건 또한 이전 정권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권력형 비리의 한 사례라는 것이다. 물론 액수로 치자면 군사정권 시절에 비자금 조성한 놈들과 비교가 불가능하지만, 분명 그들 사이에도 64억이라는 돈이 오갔다. 검찰의 강압적, 저인망식 수사의 문제점을 염두에 둔다 하더라도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피해자일 뿐이라고 하는 건 순 억지일 뿐이다.
 
또한 노무현의 도덕적 결벽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그래봤자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평균적인 도덕성이 심각하게 하향평준화된 상황이라 상대적으로 그의 도덕성이 높아보이는 것일 뿐이지만), 처음부터 그를 둘러싼 민주당 세력이 부패했다는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이다. 2002년 대선 때 민주당이 불법대선자금 119억여원을 모금했고, 그 중엔 삼성에서 받은 30억원도 있었다.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참여정부가 태생부터 거대 기업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 그래서 참여정부의 부패실상은 암흑 세력의 유혹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씨앗 자체가 부패의 토양에 심어졌다는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증언에 따르면 ‘참여정부’라는 이름도 삼성 구조조정 본부에서 만들어준 이름이라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개인의 카리스마적 정치 스타일과 탈권위주의적 언행 등은 대중들에게 이런 미묘한 차이를 커다란 간극인 것으로 이해되게 했으며, 이런 차이에 기반해 결집한 ‘노사모’등은 이른바 ‘3김정치’에 후속하는 패거리 정치를 만들어냈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터진 (그들의 상징적 존재인) 노무현의 죽음은 급기야 지금과 같은 악무한적 원한과 분노의 정치로 귀결되고 있다. 나는 바로 이것이 고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번 사건이 낳은 가장 비극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로써 시민들의 정치적 상상력은 ‘노무현이냐 이명박이냐’하는 양자택일식 선택지 안에서 한계지워질 것이고, 이명박도 노무현도 아닌 제3의 길을 추구해 왔던 진보운동의 목소리는 철저하게 억압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사건은 당연하게도 표면상으로는 언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살아있는 권력이 죽은 권력을 살해한 사건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죽은 정치인의 유령이 산 정치를 지배하는 역사상 유례없는 현상이 벌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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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생명의 죽음을 앞에 두고 너무 매정한 말만 쏟아놓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다른 어떤 이유에서가 아니라 바로 ‘소중한 생명의 (억울한) 죽음’이기에 애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에게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나에게도 ‘정치인 노무현’이 훌륭해 보일때가 있었다. 대통령 후보시절, 모 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 ‘반미 좀 하면 어떠냐’는 발언으로 청중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장면을 본 고3시절의 나 또한 함께 박수를 쳐 주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웹서핑 중에 발견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 파업중인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앞에서 행한 연설문을 보고 왠지모를 생경한 감동이 느껴졌다.
 
“여러분! 이번 여러분의 파업은 법률상 위법입니다. 그런데 법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 산동네의 철거민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도 하루 종일 일하고 퇴근해서 따뜻하게 등 눕힐 수 있는 구들장이 필요하고 그 사람 자식들도 밥 먹던 상이나마 행주로 닦아 책 놓고 공부할 수 있는 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법에 위반되었다고 무허가라고 집을 뜯어버립니다. 노점상들도 그렇습니다. 입에 풀칠을 하려고 나와 있는 노점상들을 도로교통법을 걸어 목판을 차버립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집에 불이 나 다섯 가구가 몽땅 타버렸는데 피해액이 백만 원도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목판 하나는 전 재산입니다. 밥 못 먹게 하는 법, 그것은 법이 아닙니다. 
여러분! 헌법에는 노동3권을 명시해놓고 방위산업체는 안 된다고 합니다. 입만 열면 안보, 전쟁 위협을 하면서 비행기로 3분 거리에 있는 서울에 왜 63빌딩을 짓습니까? 방위산업체 쟁의는 안 된다고 하는 말은 대한민국 노동운동을 콱 밟아버려라 이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법은 정당할 때 지키고 정당하지 않을 때는 지키지 않아야 합니다. 또 말로만 하지 말고 악법은 국민의 손으로 철폐시켜야 합니다. 노동자가 놀면 온 세상이 멈춥니다. 그 잘났다는 대학교수, 국회의원, 사장님 전부가 뱃놀이 갔다가 물에 풍덩 빠져 죽으면 남은 노동자들이 어떻게든 세상을 꾸려 나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날 노동자가 모두 염병을 얻어 자빠져 버리면 우리 사회는 그날로 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률, 경제, 사회관계 등 모든 것을 만들 때 여러분이 만듭니까? 그게 바로 오늘 한국의 노동자가 말하는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입니다. 그런 사회를 위해 우리 다함께 노력합시다.“
 
많은 이들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지 않는다. 비정규직 법안을 만들어 수 많은 이들을 불안정한 일자리로 내몰고, 한 평생 땅에만 의지해 정직하게 살아온 평택 대추리 농민들을 내쫓아 미군기지를 들여오고, 게다가 컴퓨터 게임하듯 소중한 생명들을 짓밟았던 미국의 이라크 학살동맹에 참여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여전히 나에게 비판의 대상일 뿐이다. 또한 나는 그가 ‘민주화된 시대에 분신이라는 낡은 투쟁 방식을 고집한다’고 비판했던, 그의 재임기간에 죽어간 수많은 열사 노동자들을 그곳에 가서 꼭 만나뵙고 그들에게 사과하길 바란다.
 
하지만 나는 ‘인간’ 노무현을 추모한다. 발톱이 빠질 정도로 고문당한 부산지역 운동권 대학생들을 변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노동자 파업에 함께 나서 이 땅에 ‘법’이 가야할 길이 어딘지를 고민했던 ‘변호사’ 노무현을 추모한다. 그런 ‘인간’ 노무현은 2009년 5월 23일 보다 훨씬 전에 죽은 것이 분명하지만, 오늘 우리가 추모해야 할 노무현은 단연 후자라고 생각한다.
 
 
7/
 
고인의 죽음을 진정 애도하는 길은 무엇일까?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른 이들을 고인의 무덤 앞에 제물로 갖다 바치고 ‘나야말로 진정한 노무현 정신의 계승자다’라고 외치는 신앙고백은 올바른 애도의 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땅의 ‘정치’ 자체를 죽음으로 내모는 길이다. 모르긴 몰라도 고인은 이 땅의 ‘정치’까지 자신의 동행자로 만들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남긴 유산을 올곧게 평가하자. 그것이 진정 한 생명의 죽음을 애도하는 올바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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