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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20
    기술관료를 위한 힘찬 응원가,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
    구르는돌
  2. 2009/06/23
    월러스틴, <유토피스틱스> 2장 요약
    구르는돌

기술관료를 위한 힘찬 응원가,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

 

 

 

요즘은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말이 진보라는 말 만큼이나 진부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그 재구성의 내용들이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것보다 못한 것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경제위기 바람을 타고 고개를 내미는 사민주의 논의와 함께 주목받고 있는 장하준의 경제학도 비슷한 케이스란 생각이 든다. 아니 어떤 면에선 경악스럽기까지 한 측면도 많다.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은 '진보의 재구성'의 요소들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경악스러운 논의의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그의 전체적인 논의 속에서 계속 눈에 걸리는 것은 사실상 그가 동어반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다른 목소리를 통해 같은 말을 한다'. 그러면 우선 그의 논리 구조를 따라가 보자. 그는 순수한 의미의 '자유시장'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상 모든 '시장'의 형성에 있어서 어떤 사회에서도 국가의 개입을 배제하고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난 여기까지는 전혀 색다를 것이 없는, 진보학계에서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란 생각이 드는데, 왜냐면 이런 사실은 장하준이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칼 폴라니가 자기조정적 시장경제라는 허상을 공격하면서, 그리고 쉬잔느 브뤼노프가 국가와 자본이라는 머리 두개 달린 독수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미 깨뜨린 논리이다. 물론 폴라니나 브뤼노프를 굳이 언급하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어찌되었건 이 정도로 뭐 대단한 사상적 진전을 본 것마냥 오바할 거 하나 없다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가 '자유시장'이라는 베일에 감춰진 '국가'라는 마피아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이 국가를 미화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보통 신자유주의의 선봉장들은 국가를 시장경제의 해가 되는 존재로 인식한다.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장하준은 폴라니나 브뤼노프처럼 사회의 파멸을 초래하는 시장경제의 성장에 동조한 국가의 역할을 폭로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전에 국가가 엄청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고전파 경제학이 경제성장을 위해선 국가의 역할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장하준은 같은 이유로 국가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국가가 암암리에 시장경제 활성화를 위해 해 왔던 '긍정적인 역할'들을 인정하고 이를 확대하자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간간히 심지어 구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계획경제에도 긍정성을 부여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마치 허무개그를 보는 것만 같다. 장하준은 초국적 기업에 대한 전통적 신자유주의자들(신고전파, 오스트리아학파, 후생경제학 등)의 주장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자랑하는 외국인 직접투자는 사실 선진국 내부에서만 발생했고 실제 개도국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고 말한다. 실제 신자유주의가 관철되는 과정에서 산업부문에서의 직접투자보다는 금융에서의 포트폴리오 투자 같은 간접투자가 증가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내가 장하준에게 묻고 싶은 말은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이다. 그는 줄곧 강조하는 산업정책의 발전을 위해서 이런 부문에까지 해외 자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산업부문에도 외국자본이 직접개입하기 좋은 조건을 만들자? 뭐 이런건가?

 

나의 이런 의문은 뒷부분으로 가면 말끔히 정리된다. 그는 초국적 기업  투자를 촉진하는 것은 규제완화 조치들이 아니라 국내정치적 안정성이라 주장한다. 왜냐면 실제 규제완화 여부와 상관없이 개도국의 기업투자 유치 실적은 늘지 않았고, 오히려 선진국에서만 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171쪽)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주도하는 '전략적 산업정책'을 통해 국제적 조건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앞에서 그의 주장이 '다른 목소리로 같은 말하기'일 뿐이라고 일갈한 이유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가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자나 장하준 자신이나 모두 초국적 기업 투자 자체는 '선'이라는 인식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신자유주의자는 규제완화를 주장하고 장하준은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주장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식이라면 사실상 세계적으로 '순수한 의미의' 신자유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20세기 말 신자유주의 정책의 전진기지라고 할 수 있는 남미에서도 워싱턴 컨센서스를 수용하는 친미세력의 정권 장악이라는 국내정치적 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NAFTA도 체결하고, 아옌데도 때려잡았던거 아닌가? 물론 이 당시 남미의 정치 상황이 매우 불안정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하준이 박정희 정권 당시 한국 정치 상황을 안정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면 당췌 이 양반이 생각하는 '안정'이 뭔지 아리송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 신자유주의자들도, 장하준도 국가주의자이다. 다만 장하준이 좀 더 솔직할 뿐이다. 여기서 장하준이 어떤 국가주의자인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기술관료 즉, 테크노라트에 대한 비판이 주되게 제기되고 있는데, 장하준은 정확히 이런 테크노라트들의 치어리더다. "선별적 산업, 무역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경제학자로서의 능력보다는 오히려 관리자로서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229쪽) 이딴 식이라면 어떻게 박정희 신드롬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 장하준은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에겐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장하준의 테크노라트를 위한 응원가는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는 중국, 한국, 폴란드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초국적 기업은 매몰비용의 문제 때문에 정부의 정책전환에 불만을 가지고 자금을 회수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초국적 기업을 상대로 해당 국가 정부가 다양한 협상 카드를 제시할수 있고, 협상 과정에서 초국적 기업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165-167쪽) "그러니 이 땅의 모든 기술관료들이여! 두려움을 버리고 당당히 나아가라! 전 세계 자본에게 당당히 호객행위를 하라!"

 

한 학생단체에서 낸 팜플렛을 보니까 장하준을 비판하면서 그의 입장이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하던데, 솔직히 난 이런 비판도 좀 오버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가 만약 현시기 자본주의가 위기라고 생각한다면 그 의미가 이 단체가 생각하는 '위기'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일테고, 그렇기 때문에 장하준은 (이 단체가 생각하는) 위기를 극복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단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극복의 방향은 '대안세계화'인데, 장하준은 대안세계화 정도되는 대안 논의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거다.

 

정확히 이런 수준에서, 노무현은 장하준의 책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결국 그놈의 '진보의 재구성'을 이루기 위해선 장하준도 노무현도 넘어서는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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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러스틴, <유토피스틱스> 2장 요약

 

■ 어려운 이행기, 지상의 생지옥?



1. 거대이윤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자본주의는 자본의 끊임없는 축적을 허용하며 긍정하는 체제이다. 하지만 거대 이윤을 내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닌데, 왜냐면 경쟁자들은 가격과 그에 따른 이윤폭을 낮추기 때문이다.

수요와 공급을 결정하는 ‘손’인 가격과 비용은 안 보이는 것도 아니지만, 완전히 보이는 것도 아니며, 페르낭 브로델이 자본주의의 ‘불투명한 지역’이라 부르는 어렴풋한 중간세계에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시장에 불가피하게 개입하는 국가와 관련된다. 전통적으로 자본주의 이론가들은 애덤 스미스를 따라 국가의 시장 ‘개입’을 개탄해왔다. 그러나 나는 무제한적 자유방임주의가 자본주의의 대들보라는 주장은 속임수일 뿐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고 믿는다.

자본주의 생산자들은 임금지출액과 세금부담액을 줄이는 데 많은 힘을 쏟는다. 우리는 이를 딜레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임금지출액이 거의 제로인 경우, 물론 이윤의 즉각적인 폭은 치솟을 것은 분명하지만, 유효수요에 미칠 중기적 영향은 참혹할 것이다. 마찬가지의 경우가 세금부담액에도 해당된다. 세금은 생산자들이 필요로 하는 봉사에 대한 대가이며, 여기에는 특정한 생산자들이 시장을 부분적으로 독점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국가의 노력이 포함된다. 따라서 지나치게 낮은 세율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세금부담액과 임금지출액이 각기 늘어날 때마다 이윤의 폭은 잠식된다. 실제로 이것이야말로 자본가들 사이에서 성공의 시험대이며, 가장 잽싸고 정치적인 연줄이 가장 좋은 사람이 이기는 경기이다.


2. 생산자 부담의 증대와 생태계의 위기


임금과 봉급의 형태로 개별 피고용자들에게 사회적으로 규정된 재생산 비용보다 더 많이 이전되는 잉여가치의 일부는 작업장과 정치적인 장에서 이루어지는 계급투쟁의 결과이다. 국지적인 노동자집단이 작업장이나 정치적 영역에서, 혹은 좀더 흔히는 양쪽 모두에서 조직화됨으로써,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생산자가 실질임금의 상승을 거부하는 데 드는 비용이 이를 받아들이는 데 드는 비용보다 더 높게 만들 수도 있다. 물론 임금지출액의 상승은 또한 유효수요의 상승이며 따라서 어느 집단의 생산자들에게는 이득이지만, 상승된 임금을 지불하는 집단에게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한 상승이 일정한 집단의 생산자들에게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그런데도 이들이 그곳의 정치적 장에서는 이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없을 때, 그들은 자기네 생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노동자들의 임금이 역사적으로 낮은 곳으로 재배치함으로써 해결책을 찾고자 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가장 약한 노동자집단은 화폐화가 덜 된 농촌지대를 벗어나서 도시의 생산지대로 처음 옮겨온 사람들이다. 이렇게 정치적 약점을 지녔던 어떤 노동자집단도 그런 약점들을 30-50년 내에  극복했고, 오늘날에는 훨씬 더 짧은 기간 안에 그렇게 되리라 장담할 수 있다. 즉 생산의 재배치라는 것은 그것에 따른 이득이 다분히 일시적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제 지구에서 재배치가 가능한 지대가 존재하는 비율을 가리키는 곡선은 점차 점근선에 도달해가고 있다. 세계의 탈농촌화가 가속화되면서 노동자들의 교섭력은 증대하고 있다.

점근선은 세금부담액에서도 나타난다.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본가까지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국가가 더 많은 지출을 하기를 바라왔는데, 만약 국가가 더 많은 지출을 하려면 더 많은 세금을 걷어야 한다. 국가로 하여금 더 많이 지출하되 동시에 더 적게 과세하라는 모순적 압력이 작동하는 것이다.

세 번째 점근선은 생존조건의 고갈이라는 곡선이다. 점점 더 많은 발전과 그에 따른 더 많은 파괴가 점근선에 다다르게 만든다. 이렇게 된 이유는 파괴에 의해 이득을 보는 생산자들이 대부분 그러한 파괴를 생산비용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비용의 절감으로서 기록해왔기 때문이다. 신고전경제학에서는 이를 비용의 외부화(externalization of costs)라고 부른다. 국가는 점차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재정지출을 늘리라는 요구에 직면해 있고, 이는 생산자에 대한 이윤압박과 기업의 재정위기를 초래할 것이다.


3. 신자유주의는 성공할 것인가?


현재의 상황에서 자본가들마저도 강한 국가를 요구한다. 강한 국가가 없다면 상대적인 독점이란 있을 수 없으며, 자본가들은 경쟁적 시장의 부정적인 면들을 겪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국가는 왜 약해졌는가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초국가적인 기업체들이 제 진정으로 전지구적이 되어서 국가 규제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오류다.

우리는 주변에서 온통 반국가주의적 목소리들을 듣는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반국가주의적 목소리들은 세계 노동인구 그 자체로부터 나오고 잇는데, 이들은 모두 서방세계의 조절된 ‘사회 경제’ 모델이건, 이제 신용을 잃은 쏘비에뜨 모델이건, 혹은 제3세계의 ‘개발주의적’ 모델이건 간에 자유주의 국가들의 개혁주의적 과제에 대한 환멸의 결과이다.

신자유주의에 덧붙여 이윤압박에 대응할 수 있는 두 번째 계획은 마피아 원칙의 확대이다. 여기서 마피아란, 법적 제약을 어기고 탈세를 하거나 보호비용을 갈취함으로써 상당한 이익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 또 이를 위하여 사적인 물리력이나 엄청난 뇌물, 국가 공식과정의 부패를 동원할 태세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약한 국가들의 관료와 정치가는 많은 경우, 점점 더 약해지고 대중적 정당성을 상실하게 되면서, 국가기구 외부의 마피아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키곤 해왔다. 몇몇 경우에는 그 두 집단을 구분하는 것이 유용하지도 않고 무의미할는지도 모른다. 이는 점점 더 국가의 정당성을 박탈하는 결과가 된다.


4. 국가의 쇠퇴와 국가외적 자기방어 증가의 악순환


권력의 바깥에 있는 ‘보통사람’들은 국가의 행동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효과적으로 봉사해줄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해 환상을 버리면서 국가에 대하여 적대적으로 돌아서게 되고, 그 결과 자신들의 요구에 응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을 약화시킨다. 이는 결국 보통사람들이 국가의 결정들을 바꾸는 대신에 피호관계나 국가외적인 자기방어, 혹은 이 두 가지의 복합물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임을 뜻한다. 이는 거의 500년간 보통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피호관계나 국가외적인 자기방어의 역할이 줄어왔다는 근대 세계체제의 장기적 추세가 역전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1)

국가 정당성 하락의 가장 크고 즉각적인 결과는 두려움, 즉 범죄와 인종갈등과 관련된 것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두려움이다. 사람들은 범죄가 빈발한다고 생각되는 지역을 피하게 되며, 또한 국가에 징벌적 구조를 증가시키도록 압력을 넣는다. 이는 정당성의 관점에서건 재정적 자원의 관점에서건 궁극적으로 체제에 과부하를 가져온다.

경찰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형성된 19세기 초엽에는 개인적 치안과 자경단을 만들어냈던 공포스러운 환경을 끝장내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이 개념은 세계체제 전역으로 확산되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25년 동안 최고치의 효율성에 도달했다. 이제 그 추세가 눈에 띄게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범죄의 확산에 대해 국가의 대처능력이 명백히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사람들은 커다란 초조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범죄율 증가에 따라 경찰력은 점점 더 강력하고 무절제한 힘으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미연방수사국(FBI)은 한때는 갱단을 소탕하는 영웅으로 우상화되고,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는 없어서는 안 될 수호자로 간주되어 왔지만 최근 들어 그 자신의 무법성과 무능력으로 욕을 먹는 조직이 되었으며, 이는 우파 쪽에서 주로 제기되기 십상이었다.


5. 근대 세계체제의 창조물로서의 인종갈등


최근 레바논, 보스니아,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르완다, 등에서 일어난 종교적, 언어적 공동체에 기반한 전쟁에 대한 통상적인 분석은 이들이 원시적인 분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는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전혀 설명해주지 않는다.

‘인종적’ 정체성은 어디까지나 근대 국가구조의 틀 안에서 주장되는 정체성인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행동의 양식이며, 기존 정치구조가 최소 수준의 공정한 경기도 보장해줄 수 없는 것으로 탈정당화된 바로 그때, 그리고 다른 분할선들, 다시 말해 좀더 납득이 갈 수도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정치적 분할선들이 정치적으로 가당찮아 보이게 된 바로 그 때 더욱 격렬해진다. 인종분규의 증가는 국가 정당성 상실의 가장 큰 지표이다.

19세기 초부터 인류가 경험한 민족주의는 스스로 근대주의적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프랑스나 러시아 혁명의 전통에 호소했다. 오늘날 인종정화의 지지자들은 바로 이 전통을 거부하며 행동한다. 상대적으로 문명화되었다고 주장하는 부유한 나라들에서 이러한 종류의 절망적인 인종분규가 출현하는 것 또한 목격할 수 있다.


6. 세계체제의 해체를 가져올 몇가지 형태의 분출


앞으로 다가올 콘드라티예프 A국면은 틀림없이 양극화의 격차를 더욱 벌려놓을 것이다. 이에 따라 세 가지 분출 형태가 나타날 것이다. 하나는 적어도 지난 2세기 동안 세계 안정성의 중요한 대들보였던 필연적 진보의 이데올로기가 정당성을 잃은 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비중심 지역에서 자본축적의 근본 원리를 전면 부정하는 강력한 운동들을 보게 될 것인데, 이는 기존 맑스주의의 거부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이다. 우리가 마구잡이로 ‘근본주의적’이라고 부르는 운동의 다수가 이러한 태도를 반영하고 있으며, 종종 종교적인 색채를 띤다. 여기에는 유대교, 기독교, 힌두교, 불교 기타 등등의 다양한 변종들이 존재하는데, 이는 현존 세계체제에 내재한 양극화를 극복할 능력이 자신들에게 없다는 자각으로 인해 자신들이 세운 국가구조나 고전적인 반체제운동들에 대해 느끼는 대중의 환멸에서 나온다. 이 운동들은 아마 그 자체로서는 근본적인 변화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넘어서는 (전지구적인 이윤압박이나 개혁주의적 자유주의의 대한 전지구적인 환멸과 같은) 요소들의 맥락에서 보면, 전체 구조에 심각한 파탄을 초래하게 된다.

그보다 더 큰 해체의 힘은 세계 군비의 민주화이다. 이제 핵의 확산은 막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게다가 일부 무기는 국가가 아닌 집단들의 손에 이미 들어가 있을 지도 (혹은 곧 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옴진리교는 비국가집단이 화학무기를 통해 끼칠 수 있는 해악을 보여준 바 있다. 이에 따라 비중심지대에서 강대국들에 군사적으로 도전하는 싸담 후세인같은 이들이 등장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미국은 그를 물리치는데 매우 힘든 정치적 동원을 했는데, 앞으로 그런 동원이 또 다시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도전은 가난한 나라로부터 부자 나라로의 개인적인 이민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중심지대는 얼마간의 이민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지만 오려는 사람을 모두 받아들이고자 하지는 않는다. 경기하강국면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그리하여 그들은 장벽을 세우지만, 시간이 갈수록 장벽의 효과는 희미해진다. 이에 따라 범유럽권국가는 점점 덜 백인적이게 된다. 이에 따라 그들은 이민자들에게서 시민권을 박탈한다. 그런데 이민자 집단이 일정 비율 이상에 도달하면 국내 분규의 조건이 갖춰지게 된다. 그리고 그야말로 모든 개별 국가들이 나름대로 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을 것이기에, 어떠한 충돌이든 촉발되기만 하면 마치 번지는 산불처럼 쉽게 국경을 넘을수 있을 것이다.


7. 위기에 처한 체제와 자유의지 요소의 부상


체젲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구조적 결정력은 개인과 집단의 자유의지를 능가한다. 그러나 위기와 이행의 시기에는 자유의지의 요소가 중심적이 된다. 2050년의 세계는 우리가 만드는 대로 될 것이다. 이는 우리의 주체성과 우리의 헌신 그리고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 전적인 권한을 부여하게 된다. 이는 또한 이 시기가 끔찍한 정치투쟁의 시기가 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는데, 이른바 정상적인 시기에 비하여 훨씬 더 많은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1) ‘봉건제적 정치양식의 부활’ 가능성에 대한 암시라고 보여짐. (요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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