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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05
    <반두비>, 한국사회의 뒷통수를 까발리다!(40)
    구르는돌

<반두비>, 한국사회의 뒷통수를 까발리다!

 

작년과 올해, 두편의 이주노동자 문제와 관련된 소설을 읽게 되었다. 하나는 박범신의 <나마스테>, 또 하나는 김려령의 <완득이>. <나마스테>가 한국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이주노동자와 그를 포함한 이주노동자 공동체 모두가 피해갈 수 없는 비극적인 시련을 과연 작가가 표현해 내는 것 이상의 것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슬프게 표현해 냈다면, <완득이>는 이주노동자 어머니를 둔 한 소년의 성장과정을 통해 그것이 비극이 아닌 경쾌한 삶의 에너지, 그리고 내 안에 오롯이 박혀있는 긍정적인 자기 정체성임을 확인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냈다. <나마스테>와 <완득이> 모두 훌륭한 작품이지만, 나는 이 구리고 구린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불쌍하고 때론 불결한 이미지로 범벅이 된 이주노동자의 삶을 경쾌한 목소리로 전달해 준 <완득이>에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에 나는 <완득이>에 필적할 만한 영화를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이 영화는 임금체불에 시달리는 이주노동자와 거침없는 행동과 말투로 당당한 포스를 자아내는 10대 소녀의 아슬아슬한 러브스토리(??)를 통해 한국사회의 치부를 여과없이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그려내는 한국사회는 한 일주일은 머리 안 감은 사람처럼 비듬 투성이이다. 아닌척 하고 앞머리에만 대충 왁스를 범벅하고 돌아다니는, 이 비듬으로 떡이 된 한국사회의 뒷통수는 <반두비>에 의해 하나둘씩 경쾌하게 까발려진다.

 

 

"저 사람이 끼어들어서..."

 

카림이 컵라면을 먹고 있던 편의점에서 우연히 술에 취한 중년 남성이 로또를 사러 왔다. 그러나 편의점 직원은 8시가 넘었기 때문에 안된다고 한다. 그러자 중년 남성은 "너 지금 내가 명박이 믿고 뉴타운 투자했다가 쪽박찬 놈이라고 무시하는거야?"라고 소리를 지르며 편의점 직원에게 시비를 건다. 이에 편의점 직원 왈 "그걸 왜 시급 3500원짜리한테 따지세요? 명박이 한테 가서 따지지!" 그렇게 시비가 붙은 둘은 결국 멱살잡이를 하는데, 이를 보다 못한 카림은 둘의 싸움을 말린다. 그런데 이 둘은 그 사이에 눈빛이 통했는지,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갑자기 연대를 형성해 싸움의 책임을 카림에게 덮어씌운다. 

 

뉴타운으로 쪽빡차고 로또에 하룻밤 희망을 걸다가 그게 여의치 않자 시급 3500원짜리한테 분풀이를 하고, 그러다 경찰서까지 끌려가자 엉뚱한 사람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는게 바로 '내국인'들의 모습이다. 여기서 카림을 둘러싼 상황은 애니메이션 영화 <마다가스카>에서 동물원을 뛰쳐나온 동물들이 친구였던 사자가 야생성을 되찾아 점점 자신들을 고깃덩어리로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 해 일종의 '제물'로 바닷고기를 회를 떠서 사자에게 갖다 바치던 상황과 겹쳐진다. <마다가스카>에는 온갖 금수(禽獸)들이 등장하지만 오로지 바닷고기들만이 눈빛이 없고 말할 수 없는 존재로 나온다. 중년 남성과 편의점 직원의 눈에 비친 카림 또한 마찬가지다. 실업자든 시급 3500원 짜리든간에 '한국'이라는 정상국가의 구성원이라는 계급적 지위를 잃고 싶지 않은 이들은 이주노동자라는 무표정의 제물을 경찰이라는 국가기구에 상납한다. 그리곤 중년 남성은 이렇게 내뱉는다. "이딴 새끼 그냥 지네나라로 보내 버려요. 괜히 여기서 우리 일자리나 뺏지 말고." 한번도 카림이 했던 3D업종에서 일하겠단 생각을 한 번도 안해 봤을 법한 양반이. 아마 이 중년 남성도 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을 찍고,  08년엔 촛불을 들고 시청광장에 나와 "이명박 개새끼"를 외쳤을 것이다. (아마도...) 그리고 지금은 "재수없는 깜댕이"를 읊조리고 있다.

 

 

"자지 하나 달고 들어와서 빌붙는 주제에..."

 

민서의 절친이 된 카림은 민서의 친구들과 영어학원 원어민 강사와의 만남에도 초대된다. 그 만남에서 카림은 내내 굳은 표정인데 반해, 원어민 강사는 김치가 햄버거보다 맛있다느니, 한국사람들 너무 좋다느니 수다를 떨고 있다. 카림의 어두운 표정이 불만이었던 민서는 돌아오는 길에 카림에게 화를 내며 말한다. "후진국에서 와서 그래." 하지만 카림은 그 잘난 선진국에서 온 원어민 강사가 한국 여자들을 두고 뭐라고 했는지 상기시킨다. "한국여자들 다루기 쉽데. 그게 무슨 말이겠어? 한국여자들 창녀같다고 말한거야." 카림과 원어민 강사의 영어대화를 못 알아듣고 내내 웃음만 짓던 민서가 이제서야 그 뜻을 알고 빡돈다. 그리고 학원에서 만난 원어민 강사의 '자지'를 휘어잡고는 말한다. "너 어제 뭐라고 했어? 다시 한번 말해봐. 한국여자들 다루기가 쉽다고?"

 

남성의 상징(??)인 이 '자지'는 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코드로 자리잡고 있다. 주유소 알바에서 짤린 민서는 마사지 업소에서 남성의 '자지'를 만져주는 일을 한다. 남자들 세계에선 그것이 '남근의 상징'일지 몰라도 민서에게는 그저 돈벌이에 쓰이는 도구일 뿐이다. 게다가 업소에 출입하는 남성들은 그런 성적 서비스를 받는 것에 금전적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다. 이는 곧 그 물건이 그냥 '물건'일 뿐이라는 거다. 원어민 강사의 자지를 휘어잡고 "다시 한번 말해봐"라며 윽박을 지르고, 카림을 출입국사무소에 신고한 민서의 '아빠 지망생' 기홍에게 "자지하나 달고 들어와서 빌붙는 주제에..."라는 일격을 가한다. 카림의 1년치 월급을 떼먹은 사장집에 찾아것는 "만수야, 너 언제 인간될래?"라고 말하며 집안을 때려부순다. 자지하나 달고 세상을 호령하는 남성들이 여성, 그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 없어보이는 여고생에게 시종일관 엿을 먹는 거다.

 

이 영화의 핵심은 '여성'의 세계에서 최하층인 여고생이 '남성'의 세계에서 최하층인 이주노동자와 '반두비'로서 연대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서가 다른 남성들과의 관계에선 늘 공격의 타겟이 되었던 '자지'는 카림과의 관계에서만은 친밀함의 코드로 상징화된다. 이 영화에 '19금' 딱지를 붙이고 '원조교제를 조장한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는 인간들이 볼 때에는 불순한 장면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어떤 사람들은 카림이 순진한 여고생 꼬득여서 성관계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담긴 장면이라고 하지만, 그런 말 하는 인간들은 영화 안보고 지껄이는게 분명하다. 카림은 분명 민서의 손길을 뿌리쳤고, 집에 돌아와 회개의 기도를 드린다. 물론 나중엔 둘 사이의 관계가 더 깊어져 바닷가에 가서 키스를 나누기도 한다. 근데 그게 뭐 어때서? 남녀가 사랑한다는데 누가 말릴꺼야? 20살 가까이 나이차이 나는 사람들끼리도 잘 만 결혼하는 세상에 여고생과 29살 청년의 사랑이면 예쁘게 봐줄 수도 있는 거지... 혹여나 무슬림 남자들은 여성들을 명예살인 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인간들이 있다면 난 이영애씨처럼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너나 잘하세요."

 

적어도 이런 말은 그 무슬림 나라에 가서 섹스관광 즐기는 남정내들이 벅지글거리는 한국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리는 아닌거다.

 

 

촛불집회, 그리고 한국사회의 풍경

 

이 영화에서 계속해서 눈길을 끌었던 것은 2008년 한국사회를 집약하는 상징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영화 시작부터 학교 정문 바로 옆을 비추면서 서울시 교육감 선거 벽보가 보이고, 민서가 던져놓는 가방엔 촛불소녀 뱃지가 달려있다. 신만수 사장집에 쳐들어간 민서는 테이블에 놓인 조선일보를 집어들고 흔들며 "이 따위 신문이나 읽고 있으니까 니가 쓰레기처럼 살지"라고 말한다. 심지어 마사지 업소를 그만둔 민서는 대문짝만한 광우병 소 반대 현수막이 걸린 서점에서 알바를 한다. (눈치 챈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 서점은 바로 서울대 앞 고시촌에 있는 사회과학서점 '그날이 오면'이다.)

 

그런 역동적인 2008년의 모습을 담아낸 영화를 보면서 씁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온 국민이 한 목소리로 '광우병 반대'를 외쳤던 그 속에서도 여전히 이주노동자는 타자로 남아있고, 내국인들이 쳐 놓은 욕망의 울타리에 이주노동자는 '출입금지'를 선고받았다는 점 또한 영화는 확인시켜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편의점에서 명박이 탓하던 중년남성과 민서가 하나가 아니듯이 2008년 촛불도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가 아닌것을 하나라고 외치는 사이 우리는 카림을 울타리 밖으로 또 추방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점이야 말로 촛불에 동의했건 안했건 간에 '내국인'들이 가장 보고 싶지 않아했던 한국사회의 지저분한 뒷통수가 아닐까? <반두비>는 그런 내국인들의 얼굴 앞뒤로 거울 하나씩을 갖다놓고 "자, 니 뒷통수좀 봐. 얼마나 더러운지..."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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