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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20
    기술관료를 위한 힘찬 응원가,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
    구르는돌

기술관료를 위한 힘찬 응원가,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

 

 

 

요즘은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말이 진보라는 말 만큼이나 진부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그 재구성의 내용들이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것보다 못한 것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경제위기 바람을 타고 고개를 내미는 사민주의 논의와 함께 주목받고 있는 장하준의 경제학도 비슷한 케이스란 생각이 든다. 아니 어떤 면에선 경악스럽기까지 한 측면도 많다.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은 '진보의 재구성'의 요소들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경악스러운 논의의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그의 전체적인 논의 속에서 계속 눈에 걸리는 것은 사실상 그가 동어반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다른 목소리를 통해 같은 말을 한다'. 그러면 우선 그의 논리 구조를 따라가 보자. 그는 순수한 의미의 '자유시장'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상 모든 '시장'의 형성에 있어서 어떤 사회에서도 국가의 개입을 배제하고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난 여기까지는 전혀 색다를 것이 없는, 진보학계에서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란 생각이 드는데, 왜냐면 이런 사실은 장하준이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칼 폴라니가 자기조정적 시장경제라는 허상을 공격하면서, 그리고 쉬잔느 브뤼노프가 국가와 자본이라는 머리 두개 달린 독수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미 깨뜨린 논리이다. 물론 폴라니나 브뤼노프를 굳이 언급하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어찌되었건 이 정도로 뭐 대단한 사상적 진전을 본 것마냥 오바할 거 하나 없다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가 '자유시장'이라는 베일에 감춰진 '국가'라는 마피아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이 국가를 미화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보통 신자유주의의 선봉장들은 국가를 시장경제의 해가 되는 존재로 인식한다.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장하준은 폴라니나 브뤼노프처럼 사회의 파멸을 초래하는 시장경제의 성장에 동조한 국가의 역할을 폭로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전에 국가가 엄청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고전파 경제학이 경제성장을 위해선 국가의 역할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장하준은 같은 이유로 국가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국가가 암암리에 시장경제 활성화를 위해 해 왔던 '긍정적인 역할'들을 인정하고 이를 확대하자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간간히 심지어 구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계획경제에도 긍정성을 부여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마치 허무개그를 보는 것만 같다. 장하준은 초국적 기업에 대한 전통적 신자유주의자들(신고전파, 오스트리아학파, 후생경제학 등)의 주장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자랑하는 외국인 직접투자는 사실 선진국 내부에서만 발생했고 실제 개도국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고 말한다. 실제 신자유주의가 관철되는 과정에서 산업부문에서의 직접투자보다는 금융에서의 포트폴리오 투자 같은 간접투자가 증가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내가 장하준에게 묻고 싶은 말은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이다. 그는 줄곧 강조하는 산업정책의 발전을 위해서 이런 부문에까지 해외 자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산업부문에도 외국자본이 직접개입하기 좋은 조건을 만들자? 뭐 이런건가?

 

나의 이런 의문은 뒷부분으로 가면 말끔히 정리된다. 그는 초국적 기업  투자를 촉진하는 것은 규제완화 조치들이 아니라 국내정치적 안정성이라 주장한다. 왜냐면 실제 규제완화 여부와 상관없이 개도국의 기업투자 유치 실적은 늘지 않았고, 오히려 선진국에서만 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171쪽)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주도하는 '전략적 산업정책'을 통해 국제적 조건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앞에서 그의 주장이 '다른 목소리로 같은 말하기'일 뿐이라고 일갈한 이유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가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자나 장하준 자신이나 모두 초국적 기업 투자 자체는 '선'이라는 인식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신자유주의자는 규제완화를 주장하고 장하준은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주장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식이라면 사실상 세계적으로 '순수한 의미의' 신자유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20세기 말 신자유주의 정책의 전진기지라고 할 수 있는 남미에서도 워싱턴 컨센서스를 수용하는 친미세력의 정권 장악이라는 국내정치적 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NAFTA도 체결하고, 아옌데도 때려잡았던거 아닌가? 물론 이 당시 남미의 정치 상황이 매우 불안정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하준이 박정희 정권 당시 한국 정치 상황을 안정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면 당췌 이 양반이 생각하는 '안정'이 뭔지 아리송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 신자유주의자들도, 장하준도 국가주의자이다. 다만 장하준이 좀 더 솔직할 뿐이다. 여기서 장하준이 어떤 국가주의자인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기술관료 즉, 테크노라트에 대한 비판이 주되게 제기되고 있는데, 장하준은 정확히 이런 테크노라트들의 치어리더다. "선별적 산업, 무역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경제학자로서의 능력보다는 오히려 관리자로서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229쪽) 이딴 식이라면 어떻게 박정희 신드롬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 장하준은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에겐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장하준의 테크노라트를 위한 응원가는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는 중국, 한국, 폴란드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초국적 기업은 매몰비용의 문제 때문에 정부의 정책전환에 불만을 가지고 자금을 회수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초국적 기업을 상대로 해당 국가 정부가 다양한 협상 카드를 제시할수 있고, 협상 과정에서 초국적 기업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165-167쪽) "그러니 이 땅의 모든 기술관료들이여! 두려움을 버리고 당당히 나아가라! 전 세계 자본에게 당당히 호객행위를 하라!"

 

한 학생단체에서 낸 팜플렛을 보니까 장하준을 비판하면서 그의 입장이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하던데, 솔직히 난 이런 비판도 좀 오버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가 만약 현시기 자본주의가 위기라고 생각한다면 그 의미가 이 단체가 생각하는 '위기'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일테고, 그렇기 때문에 장하준은 (이 단체가 생각하는) 위기를 극복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단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극복의 방향은 '대안세계화'인데, 장하준은 대안세계화 정도되는 대안 논의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거다.

 

정확히 이런 수준에서, 노무현은 장하준의 책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결국 그놈의 '진보의 재구성'을 이루기 위해선 장하준도 노무현도 넘어서는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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