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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위한 통성기도를 강요하지 말라!

그를 위한 통성기도를 강요하지 말라!
 
 
고등학교 2학년 때, 잠깐 교회를 다닌 적이 있었다. 그 때까지는 나도 순수한 마음이 조금은 남아있던 터라 그냥 봉사활동같은 걸 여러사람들과 함께 다니고 싶다는 마음에 짝궁이 다니던 교회에 따라갔다. 그런데, 한 두어번 갔을때쯤에 교회에 발길을 뚝 끊어버리게 만드는 일을 겪게되었다. 그것은 바로 통성기도 때문이었다. 목사의 지시에 따라 신도들이 다같이 일어나더니 옆사람과 손을 잡고 목놓아 울부짖으며 기도를 한다. 여러사람이 한꺼번에 울부짖으니 각자의 기도내용이 뭔지 알 수도 없다. 다들 ‘용서하소서’라는 말은 반복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이런 ‘과격한’ 기도 행위가 낯설었던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들 다 울면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나만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으려니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나도 뭔가 하나님께 용서받아야 할 일을 생각해 내려고 애를 썼다. 결국 엄마, 아빠, 누나한테 잘못했던 것들을 생각해 내어 조금씩 목소리를 내 보았다. 아, 그런데 끝까지 눈물은 안 났다. 좀 억울하다 싶으면서도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한 ‘간절한 기도’에 함께하지 못한게 못내 찝찝했다. 그러나 그 일 이후로 한달도 안되어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있지도 않은 슬픔을 쥐어 짜낼만큼 내 감정의 상상력은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8년 후인 2009년 오늘, 나는 또 다시 통성기도의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은 많은 시민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 수도 봉하마을에만 60만, 전국적으로는 200만명을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인터넷에서는 ‘지못미’ 바람이 불고 있다. 사회원로인사라는 사람들은 앞다투어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읊조린다. 친노인사라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워오던 (주로 진보진영) 인사들도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데 대한 죄스러움을 드러낸다.
 
 
나는 왜 이 ‘통성기도’가 불편한가?
 
8년 전 내가 마주쳤던 그 교회의 통성기도 현장에서처럼, 지금의 한국사회는 나를 비롯해 그의 죽음에 울부짖지 않는 사람들을 참으로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인터넷에 오가는 글들을 보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참으로 매정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생각이 한나라당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 보라“는 사상검증을 받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이런 네티즌들의 공격적인 태도보다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진보진영 인사들의 신앙고백이다. 통성기도를 할 때, 단상에 선 목사는 신도들의 죄의식을 북돋기 위해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울부짖는다. 있는 힘껏 목소리를 쥐어짜고 몸을 부들부들 떨기도 한다. 이를 통해 신도와 목사 모두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전능하심에 감동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느낀다. 지금 진보진영 인사들이 보이고 있는 작태가 이런 공허한 믿음을 강요하는 목사들의 모습과 다를바가 뭔가?
 
무엇보다도 노무현 대통령 임기 당시 온갖 진보적 운동단체의 대표는 다 맡아왔던 오종렬씨의 언사는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서민후보’였다고 추켜세우고는(프레시안은 이 기사를 전하면서 처음엔 ‘민중후보’라는 표현을 썼다가 ‘서민후보’라는 표현으로 바꾼 이유가 뭔지 해명해 주길 바란다), ‘장렬히 산화’했다고 말한다. 그가 수도 없이 한 집회장 발언들을 생각해 볼 때, ‘장렬히 산화’했다는 표현은 노동·민중열사들의 분신에나 쓰는 표현이다. 그런데 그는 노무현도 ‘장렬히 산화’했다고 말한다. 즉 ‘노무현 열사’라는 것이다. 오종렬씨에게 묻는다. 그는 이 표현을 쓰는데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는가? 비정규직의 삶에 비관하여 목숨을 끊고도 노무현에게 ‘민주화된 시대에 낡은 투쟁방식을 고집한다’고 비난을 들어야 했던 이용석 열사의 얼굴을 대하고도 감히 ‘장렬히 산화’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노무현은 왜 자살을 선택했는가? 수사과정에서 의문점이 많이 남는 것이 사실이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는 권력형 비리에 대한 수사를 받다가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함이었든 자신을 믿었던 이들에 대한 미안함에서 였든지 간에 말이다. 자유, 평등, 정의, 평화 등 이 모든 숭고한 가치들은 그의 마지막 선택과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 그런 그에게 열사의 지위를 부여하려는 오종렬씨의 발언에 분노를 금치 못하는 것이 오직 나뿐일까?
 
또 김상봉 교수가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한 시대의 종말을 애도함>)을 보자. 그는 “그(노무현)가 권력이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했을 때, 나는 깊이 좌절하고 실망했으나, 생각하면 그것은 그 개인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한계였다. 자본이 절대 권력이 된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 한계 앞에서 변절하거나, 세치 혀로 한계를 넘어갈 때, 그는 자기 방식으로 시대의 한계와 끊임없이 부딪혔고, 결국 좌절했다.” 라고 말한다. 이 무슨 궤변인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의 당당한 자기고백이 ‘우리 시대’(대체 이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386인가?)의 한계였다고 말하며 그에게 면죄부를 주고는 그의 삶은 치열했다는 찬사로 마무리짓는다. 그리고 글의 말미에서 “뜨겁게 사랑했으므로 내가 미워했던 마음의 벗이여, 잘 가오. 그대 영전에 오래 참았던 울음 우노니, 그대 나 대신 죽어, 내 마음에 영원히 살아 있으리.”라고 뜨거운 연정을 표시한다. 이로써 2003년부터 2007년까지 그 ‘시대’의 잔혹함을 못이겨 목숨을 버려야만 했던 수많은 열사들의 이야기는 노무현이 ‘시대의 한계와 끊임없이 부딪치는’ 동안 벌어진 한낱 에피소드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한 이 사랑고백에 담긴 무한한 ‘용서와 화해’의 정신은 침몰하는 듯 보였던 자유주의 개혁세력에게 힘찬 찬송가가 되어 입에서 입으로 불려질 것이다.
 
 
누가 노무현의 무덤 앞에 무고한 제물을 갖다 바치는가?
 
김상봉 교수의 말대로 그가 한 시대의 상징이었다면, 그 상징은 진작에 스러졌어야 했다. 그의 일생, 적어도 90년대 이후 ‘정치인 노무현’의 일생이 상징하는 바는 민주도, 정의도, 평등도 아닌 오히려 그 훈장을 밟고 일어서 기지개를 편 탐욕과 착취의 시대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2007년, 많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부 충격을 통한 개방과 성장’이라는 미명하에 추진된 한미FTA에 반대하며 스러져간 어느 평범한 택시 노동자의 삶이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다.
 
그의 죽음 앞에, 그가 진작에 버렸던 민주, 정의, 평등이라는 가치를 제물로 갖다 바치지 말라. 그의 죽음 앞에, 이미 이 세상엔 없는 소중한 열사들의 정신을 제물로 갖다 바치지 말라.
 
나는 노무현이 투신했다는 뉴스를 접한 지난 토요일 오후, 시내의 작은 영화관에서 2006년 평택 대추리에서 미군기지 확장에 의해 삶의 터전을 빼앗긴 농민들의 삶을 기록한 ‘길’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 농민들은 절규했고 울부짖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한 시간 내내 나도 그들과 함께 하염없이 울부짖었다. 그 정직한 농민들에게 눈물을 선사한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러므로, 나에게 노무현을 위한 눈물을 강요하지 말라. 그를 위한 통성기도를 강요하지 말라. 나는 오로지 평택 대추리에서 스러져간 뭇생명들에 안타까워 하는 딱 그 만큼만 노무현이라는 소중한 생명의 (억울한) 스러짐을 애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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