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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의료가 민중의 건강에 가하는 위협은, 교통량과 그 강도가 민중의 기동성에 가하는 위협, 교육과 미디어가 민중의 배움에 가하는 위협, 도시화가 민중의 자기 집을 짓는 능력에 가하는 위협과 유사하다. 어떠한 경우에도 주요한 제도적 노력은 반생산적인 것으로 전환된다. 교통에 있어서 시간을 소비하는 가속화,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커뮤니케이션,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더욱 높은 수준의 기술적 능력을 몸에 익히도록 하여 전체적으로는 무능력한 전문가 바보가 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교육, 이 모든 것들은 의료에 의한 병원병의 생산과 지극히 닮은 현상들이다. 각각의 경우에 주요 제도적 분야는 그것을 만들고 기술적으로수단화하기 위한 특정한 목적으로부터 사회의 방향을 돌려놓고 있다. (17쪽)
보르네오에 역설적인 질병통제의 좋은 예가 있다. 말라리아 제압을 위하여 촌에서 사용된 살충제가 바퀴벌레에 축적되어 대부분의 바퀴벌레가 저항성을 갖게 되었다. 이 바퀴벌레를 도마뱀붙이가 잡아먹고 혼수상태에 빠져 고양이의 먹이가 되었다. 그 결과 고양이는 죽고 쥐들이 불어났다. 그리고 쥐들이 페스트를 전염시켰다. 그래서 군대는 고양이를 낙하산으로 정글의 마을에 투하해야 했다. (30쪽)
의사에 의해 가해지는 고통과 질병은 언제나 의료 행위의 한 부분이었다. 전문가의 무감각, 태만, 완전한 무능력 등은 낡은 형태의 이료 과오이다. 의사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에게 그 기술을 행사하는 기능인에서 과학적 법칙을 다양한 환자들에게 적용하는 전문가로 변모함에 따라, 의료 과오는 의사 개인의이름에 오점을 남기지도 않고, 거의 존중받다시피 하는 일이 되었다. 옛날에는 신뢰의 남용과 도덕적 결함이었던 것이, 현재에는 장치나 수술자의 우연적 사고라고 합리화되고 말았다. 복잡하게 기술화된 병원에서 태만은 '우연한 인간적 오류' 또는 '시스템의 고장'으로 미화되고, 무감각은 '과학적인 냉정함'으로 호도되며, 무능은 '전문적 장치의 부족'으로 합리화되고 있다. 진단과 치료의 비인간화는 의료 과오를 윤리적 문제에서 단순한 기술적 문제로 변모시켜 왔다. (39-40쪽)
나는 스스로 강해져 가는 이 제도적인 부정적 피드백의 고리를 고전 그리스어의 동의어에 따라 '의료의 네메시스(nemesis)'로 부르고자 한다. 그리스인은 자연의 힘 중에서 신들을 보았다. 그들에게 네메시스는, 신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특별히 지키고 있는 특권을 침략한 사람들을 습격하는 신들의 복수이다. 네메시스는 인간이기보다는 영웅이고자 하는 인간의 비인간적인 시도에 대하여 반드시 가해지는 벌이다. 수많은 그리스어의 추상명사와 같이 네메시스는 신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는 '교만', 곧 신의 속성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뻔뻔스러움에 대한 대자연의 반응을 상징한다. 현대의 위생상의 교만함이 새로운 의료 네메시스의 병상(病狀) 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44쪽)
근원적 독점은 하나의 단체, 또는 정부에 의한 독점 이상으로 뿌리 깊은 것이 된다. 그것은 수많은 형태를 갖는다. 교통 수단으로 붐비는 도시가 건설되면, 인간의 다리에 대한 평가는 낮아진다. 학교가 학습을 점유하게 되면 독학자의 가치는 낮아진다. 위기의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병원이 맡게 되면 병원은 사회에 새로운 죽음의 형식을 강요한다. 독점은 보통 시장을 매점하나 근원적 독점은 사람들이 스스로 행위하고 스스로 만드는 능력을 빼앗아 버린다. 상업상의 독점은 상품의 유통을 제한한다. 그리고 독점이 집요하게 되는 만큼, 비시장적인 사용가치는 마비된다. 근원적 독점은 나아가 자유와 독립을 침범한다. 그것은 환경의 형태를 바꾸고, 사람들에게 스스로 싸우는 힘을 주었던 환경의 여러 특징을 '전유하는' 것에 의해, 사회 전체에 사용가치를 상품으로 바꿔치기 할 것을 강요한다. 집약적 교육의 결과 독학자는 고용되지 않고, 집약적 농업은 자작 농부를 파괴하며 ,경찰의 배치는 지역 사회의 자기 통제를 좀먹는다. 의료의 유해한 확대도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곧 상호치료, 자기 투약을 경범죄나 때로는 중죄로까지 만들어 버린다. 임상적 병원병이 위기적인 강도에 도달하여 그 사업 자체의 몰락에 의해서만 역전될 수 있을 때 의학적으로 불치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병원병은 전문가의 지배를 없애는 정치적 행동에 의해서만 역전될 수 있다. (51-52쪽)
의료화된 사회에서는 의사의 영향력이 지갑이나 약상자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분하는 분류에까지 미친다. 의료 관료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곧 자동차 운전이 가능한 자, 일을 하여서는 안 되는 자, 감금되어야 하는 자, 군인이 될 수 있는 자, 국경을 넘어도 되는 자, 요리해도 되는자, 매춘해도 되는 자, 미국 부통령에 출마할 수 없는 자, 사망자, 범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 자, 범죄를 범할 경향이 있는 자 등이다. 1766년 11월 5일,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명령을 내려, 궁정의 의사들에게 건전한, 곧 '정확한' 증언을 보장하도록 하기 위하여 피의자가 고문에 이길 수 있는가 어떤가를 증명할 것을 요청했다. 이것은 명령에 의해 의학적 증명서를 설정한 최초의 법이었다. 그 후 형식을 충족시킨 보고서를 작성하고 진술서에 서명하는 것이 점점 다수의 의사로부터 시간을 뺏게 되었다. (86-87쪽)
일정한 제한은 있으나 유효한 의학적 치료의 엄밀한 한계는 오랫동안 질병으로 인정되어온 상태--류머티즘, 맹장염, 심장마비, 퇴행성질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더욱 최근에 의학적 치료에 대한 수요를 창출시킨 상태에 적용되고 있다. 예컨대 노년은 불안한 특권, 또는 비참한 종말이라고는 생각되었지만 결코 질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의사의 지시 하에 놓여직 ㅔ되고 말았다. 노인 치료에 대한 요구는 증가되고 있으나 그것은 생존하는 노인이 더욱 많다는 이유에서보다는, 노년은 치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인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91쪽)
전문가의 서비스에 의존하는 노인이 증가함에 따라, 노인을 위한 특별한 시설에 가두어지는 노인의 수도 증가된다. 반면 이웃 사람은 짐이 되는 사람들에게 더욱 냉담하게 된다. 이러한 시설은 노인 처리를 위한 현대적 전략으로 생각되고, 노인은 다른 사회에 의한 것보다는 공명정대하게, 덜 지독한 형식으로 수용된다. 입소 후 1년간의 사망률은 본래의 환경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의 사망률에 비하여 훨씬 높다. 가정으로부터 단절됨에 따라 다수의 중병이 나타나고 사망률도 오른다.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시설 입소를 희망하는 노인도 있다. 의존하는 것은 언제나 가혹한 것이고, 노인에게 있어서는 특히 그러하다. 젊은 시절의 특권이나 빈곤도 현대에는 노년기에 정점에 도달한다. 엄청난 부자와 확실한 독립성을 가진 인간만이 의료화되지 않은 자기 인생의 끝을 선택할 수 있다. 곧 빈민은 의료화에 굴종하지 않을 수 없고, 그들이 사는 사회가 풍부하게 되면 될수록 의료화는 극단 또는 보편적인 것이 된다. 노년을 전문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상태로 변모시킴에 따라, 노인은 세금으로 지탱되는 특권과 관련된 어떤 차원에서 자신이 수탈되고 있음을 통절히 느끼는 소수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때로는 비참하고 무시에 의해 크게 낙담하는 노인으로부터 가장 슬픈 소비자 그룹에 속할 자격이 있는 구성원으로 변모하는 것까지, 결코 충분한 것을 획득할 수 있도록 계획되고 있지는 않다. (94쪽)
위기의 의식화(그것은 병적인 사회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특징이나)는 의료 담당자에게 세 가지를 부여한다. 그것은 보통으로는 군인만이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을 의료 담당자에게 부여한다. 위기라고 하는 압력 밑에서, 지휘관이라고 믿어지는 전문가는 쉽게 정의와 예의범절이라고 하는 일반적 규범으로부터 면제된다. 죽음을 통제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전상자를 치료하는 우선 순위를 선택할 수 있는 지휘자로, 그의 살인은 정책적으로 은폐되고 만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모든 행위가 위기의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매혹적인 변경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의료 기업에 의해 요구되는 시간의 폭과 지역 사회의 공간은, 종교적 또는 군사적 시공간과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것이 된다. 임종 관리의 의료화는 단지 불길한 꿈을 의식화하고 지겨운 노력에 대한 전문적 면허 확대하는 것만은 아니다. 곧 임종의 치료가 확대되는 것은 의사로 하여금 그가 요구하는 수단의 기술적 유효성을 증명할 필요를 없애버린다. 더욱 많은 것을 요구하는 그의 힘에는 어떤 제한도 없다. 마지막으로 환자의 죽음은 의사를 잠재적 통제와 비판의 피안에 방치한다. 환자의 마지막 시선과 '죽어 가는 자'의 일생의 전망 중에는 희망이란 없고 단지 의사의 마지막 기대가 있을 뿐이다. '위기'를 향한 어떠한 시설의 방향이라도, 거대한 일상적 무효를 정당화한다. (110-111쪽)
의료 처치가 '흑마술'이 되는 것은, 그것이 환자에게 스스로 치유하는 힘을 부여하는 대신에, 병자를 불구자로 만들어 자시에게 가해지는 치료를 훔쳐보는 자로 신비화시키는 때이다. 의료 처치가 '병든 종교'로 변하는 것은, 그것이 병자의 모든 기대를 과학과 그 기능에 집중시키고, 병자가 자신의 곤경에 관한 시적 해석을 구하거나, 고통을 당해본 사람--고인이든, 이웃사람이든--중에 존경할 만한 모범을 발견하는 것을 잊게 하는 의식으로서 나타날 대이다. 의료 처치는 그것이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사회적 관용을 증가시키는 동기와 훈련을 사회에 부여가힉 보다는, 환자를 전문적인 환경 속에 격리시키고 말았을 때에 '도덕적 퇴폐'에 의해 질병을 증가시킨다. 생의학의 이름 아래 생겨난 마술적 파괴, 종교적 상해, 그리고 도덕적 퇴폐는 사회적 병원병을 만들어 내는 결정적인 장치이다. 그것은 죽음의 의료화와 혼합되고 있다. (126-127쪽)
전통문화와 기술 문명은 정반대의 가정에서 출발한다. 모든 전통 문화에서 정신요법과 신앙 체계 그리고 고통을 참기 위해 필요로 하는 약은 일상생활 속의 행동에 포함되고, 현실은 냉엄하고 죽음은 회피될 수 없다고 하는 확신을 반영하고 있다. 20세기의 디스토피아, 반 유토피아에서 내부 및 외부의 고통스런 현실을 인내할 필요성은 사회 경제 시스템의 실패로 해석되고, 고통으 비정상적인 개입에 의해 처리되어야 할 긴급한 우발적 사건으로 다루어진다. (148쪽)
치유하는 자의 에토스는 종교, 민간 전승, 진통제의 용이한 이용이 일반인을 훈련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과 마찬가지의 위엄을 갖춘 실패에 대한 수용력을 의사에게도 부여했다. 현대 의료의 종사자들은 다른 위치에 놓여 있다. 곧 그의 제 1의 방향 설정은 치료이지 치유가 아니다. 그는 인내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고통이 환기하는 의문 부호를 인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한 건의 서류 속에 모을 수 있는 불평의 목록 속에 떨어뜨리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고통의 메커니즘을 알고 있음을 과시하고, 그리하여 환자의 동정으로의 초대를 뿌리치고 만다. (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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