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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뉴스가 소위 '전 세계'라는어법으로 말하는 세계는 -- 어느 라디오 네트워크는 한 시간에도 수차례씩 이렇게 읊조린다. "우리에게 22분만 할애하십시오. 우리가 당신에게 전 세계를 보여드리겠습니다" -- (전 세계는커녕) 지리적으로나 관심 여부로나 아주 국한된 장소일 뿐이며, 뭔가 알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매우 짧고 굵게만 방송되는 것이 고작일 뿐이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벌어진 전쟁들 중에서도 고작 몇 개만이 추려내질 뿐이니, 그처럼 선택된 전쟁들 속에서 [대중매체가] 모아놓은 고통을 의식한다고 한들 그것은 억지 의식일 뿐이다. 게다가 카메라에 찍힌 형태인 한, 그 의식은 금방 불타올랐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된 뒤, 곧장 우리의 생각에서 사라져갈 것이다. (복잡한 사유, 문헌, 어휘에 기대기 때문에 비교적 소수의 독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글로 씌여진 이야기와 대조적으로, 사진은 단 하나의 언어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잠재적으로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41p)

 

 

 

 

텔레비전 카메라가 매일같이 보여준 최초의 전쟁, 즉 미국이 개시한 베트남전쟁 상시에는 머나먼 곳을 상세히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장치를 통해서 죽음과파괴의 모습이 가정의 코앞에까지 찾아들어 왔다. 그때 이래로, 발생할 때마다 곧바로 필름에 담겨지게 된 각종 전투와 대량 학살은 정기적으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올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작은 화면으로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곳곳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극적인 사건들에 노출된 시청자들이 어떤 분쟁을 중요하다고 의식하도록 만들려면, 이제는 그 분쟁을 다룬 단편적인 필름들을 일상적으로 확산시키고 또 확산시켜야 될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이미지들이 가져다 주는 충격을 통해서 전쟁을 이해한다. (43p)

 

 

 

 

[사진이] 실제적인 사회 문제를 손쉽게 추적 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합의가 새롭게 대세를 이루게 되자, 사진작가들의 생계와 독립성이라는 쟁점이 전면에 부각됐다. 그 결과, 카파와 그의 친구들 몇 명(칭과 앙리 카르티에-브레송도 이들 중 하나였다)은 1947년 파리에서 일종의 조합인 <매그넘 포토 에이전시>(이하 매그넘)를 설립했다. (곧 가장 영향력 있고 명망 높은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의 조합이 된) 매그넘이 직접적으로 표방했던 취지는 매우 현실적인 것이었다. 사진 잡지들이 할당해준 일을 위해서 위험을 감수한 채 자유 계약으로 일하는 사진작가들을 대변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취지였다. 이에 덧붙여, 종전 직후에 새롭게 창설된 각종 국제 조직이나 동업 조합의 창립 선언문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이었던 매그넘의 선언문은 윤리적인 부담이 가중되고 예전보다 확대된 포토저널리즘자각들의 사명을 명쾌하게 밝혀 놓았다. 전쟁의 시게에서든 평화의 시기에서든, 광신적 애국주의의 편견에서 벗어난 채 공정한 목격자의 한 명으로서 자신들이 활동하던 시대를 기록할 것. (59p)

 

 

 

 

 

초창기 전쟁 사진들 중 걸작이라고 칭송 받은 사진들이 대부분 연출된 것이었다거나 피사체에 손을 댄 흔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암실이 딸린 마차를 타고 세바스토폴 근처의 첩첩이 층이 진 계곡에 도착했던 팬턴은 삼각대를 고정한 뒤 똑같은 위치에서 두 차례 촬영을 개시했다. 훗날 팬턴이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인 계곡"(그렇지만 제목과는 달리, 이곳은 영국의 경기병단이 숙명의 돌격을 감행한 바로 그곳이 아니었다)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는 저 유명한 사진의 첫 번째 판본에는 길가 왼쪽에 포탄들이 첩첩이 쌓여 있었다. 그렇지만 두 번째 사진(오늘날 늘 복제되는 사진)을 찍기 전에, 펜턴은 포탄들을 길가에 이리저리 흩어놓았다. 실제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던 활양한 장소를 찍은 사진, 즉 피사체에 손을 댄 흔적이 더 많은 베아토의시칸다바그 궁전 사진은 전쟁의 무서움을 최초로 묘사한 사진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궁전이 공격을 당한 것은 1857년 11월이었다. 승승장구한 영국군과 영국에 충성을 바쳣던 일군의 인도인 부대가 이 궁전의 모든 방을 샅샅이 뒤져,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1천8백 명의 세포이 반란자들을 총검으로 굴복시키고 난 바로 직후였다. 이제 죄수가 된 이들의 주검은 궁전 안마당에 던져졌으며, 독수리들과 들개들이 뒷일을 처리했다. 1858년 3월이나 4월경 이곳의 사진을 찍었던 베아토는 사진 뒤쪽에 나외 있는 궁전 기둥에 몇몇 인도인들을 세워두고, 궁전 안마당에 인간의 뼈를 이리저리 뿌려둔 뒤, 폐허가 된 이것에서 마치 주검들이 수습되지 않았다는 듯이 짜 맞춰 놓았다. (84-5pp)

 

 

 

 

 

희생자들, 슬픔에 빠진 친지들, 뉴스를 소비하는 사람들 -- 이들은 모두 자기들 나름대로 전쟁과 어느 정도 덜어져 있거나 근접해 있다. 전쟁을 가장 솔직하게 재현해 놓은 것, 어떤 재앙으로 부상을입은 신체를 가장 솔직하게 재현해 놓은 것은 우리에게 지극히 낯선 존재들, 그래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피사체가 우리에게 더욱 더 친숙할수록, 사진작가는 훨씬 더 신중해지는 법이다. (98p)

 

 

 

 

 

1991년의 걸프 전쟁 당시 미국의 정부 관료들이 촉진했던 것은 테크노 전쟁의 이미지였다. 죽어 가는 병사들의 머리 위로 미사일들과 포탄들이 날아가며 그려낸 섬광의 흔적으로 가득 찬 하늘, 이것이야말로 미국이 적보다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미지였다. 미국의 텔레비전 시청자들을 NBC가 획득한 영상, 즉 미국의 이런 군사적 우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수 있는지 보여준 영상을 볼 수 없었다(그 때 당시 이 텔레비전 네트워크는 방영을 거부했다). 전쟁 막바지인 2월 27일, 호송선을 타거나 걸어서 쿠웨이트를 빠져나와 북쪽으로 도망치던 중 이라크의 바스라와 연결되어 있는 도로에서 네이팜탄, 방사능 무기(열화우라늄탄), 집속탄 같은 각종 폭발물의 융단 폭격을 받게 된 이라크 징집병들 수천 명의운명, 미국의 어느 정부관료가 '칠면조 사격'이라고 묘사한 바 있던 저 악랄한 살육의 장면을. 게다가 2001년 말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수행한 대부분의 작전도 보도 사진작가들의 접근이 금지됐다.

 

전쟁이 점점 더 적을 추적하는 정밀한 광학 장치들로 수행되는 행위가 되어갈수록, 전선에서 비군사적인 목적으로 카메라를 사용할수 있는 조건도 점점 더 엄격해졌다. 사진 없는 전쟁, 즉 1930년 에른스트 윙거가 관찰했듯이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메라와 총, 그러니까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위거는 이렇게 썼다. "위대한 역사적 사건을 매우 꼼꼼히 보존하려는 행위와 자신이 지닌 무기로 적들의 위치를 정확히 몇 초, 몇 미터 단위까지 추적해 그들을 섬멸하려는 행위는 모두 똑같은 사고방식에서 수행된다." (102-104pp)

 

 

 

 

 

사진 배경이 되는 장소가 될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 있고 이국적이면 이국적일수록, 우리는 죽은 자들이나 죽어 가는 자들의 정면 모습을 훨씬 더 완전하게 볼 수 있다. 따라서 신식민지화된 아프리카는 부유한 나라에 살고 있는 일반 대중들의 의식 속에 (그곳의 육감적인 음악을 제외한다면) 주로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는 희생자들의 모습이 담긴 일련의 잊지 못할 사진들로 존재한다. (... ...) 이런 사진들이 보여주는 광경에는 이중의 메시지가 있다. 이 사진들은 잔악하고 부당한 고통, 반드시 치유해야만 할 고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믿게 만든다. 곳곳에 존재하는 이런 사진들, 이처럼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은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뒤떨어진 곳(간단히 말해서 가난한 나라들)에서야 이런 비극이 빚어진다는 믿음을 조장할 수밖에 없다.

(... ...)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다시 말해서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 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16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인들, 그리고 머나먼 아시아 국가에 살던 외래인들은 런던, 파리, 그밖에 유럽 수도들에서 개최된 인종 전시회에서 마치 동물원의 동물처럼 대중에게 공개되곤 했다. (109-112pp)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전시회와 책들을 뒤덮고 있는 그의 기교, 즉 독실한 신자 가족의 일원인 척하는 그의 스타일은 그가 찍은 사진들에 오히려 해가 됐다. 살가도의 사진들은 특히 그가생생하게 묘사해 놓은 비참함이 대중들에게 공개되는 상업적인 맥락 때문에도 심술궂은 대접을 받았다. 그렇지만 정작 문제는 그의 사진이 어떻게 어디에서 전시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닐, 사진 자체에 있다.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진들의 초점, 모든 것을 그들의 무능함으로 환원하는 그 초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의 사진들에 달려 있는 설명에 그가 찍은 무력한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아무리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피사체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인물 사진은 이와 정반대 형태의 사진을 무절제하게 탐닉하도록 만들어 왔던 유명인 숭배 풍종의 공범이 되어버린다. 간단히 말해서, 오직 유명인들만 그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나머지 사람들을 그들의 직업, 인종, 곤경을 상징하는 일종의 본보기로 환원하는 셈이되는 것이다. 39개국에서 이주민들의 못브을 직은 살가도의 사진은 이런 단일한 방향 아래에서, 그 이주민들이 겪고 있는상이한 고난과 그 고난을 불러온 상이한 원인을 한데 뭉그러뜨려 버린다. (120-122pp)

 

 

 

 

 

 

1890년대와 1930년대 사이에 미국의 소도시들에서 린치를 당한 흑인 희생자의 사진들이 좋은 사례이다. 이 사진들은 지난 2000년 뉴욕의 한 미술관에서 그것을 본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충격적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계시 같은 경험을 던져줬다. 린치 장면을 담은 이 사진들은 인간의 사악함과 비인간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사진들을 보고 난다면 우리는 인종주의가 악을 어느 정도까지 풀어헤쳐 놓았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악이 저지른 범죄의 한가운데에는 이런 범죄를 사진으로 찍은 것 같은 파렴치함이 존재한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일종의 기념품으로 간직하기 위해서 이 사진들을 찍었으며, 그 중 몇 장을 우편 엽서로 만들기도 했다. 상당수 사진들에는 이 장면을 보면서 히죽 웃고 있는 구경꾼들의 모습이 찍혀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규칙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선량한 사람들이 틀림없을 테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은 뒤 벌거벗긴 채로 나무에 목매달려 까맣게 타버린 린치의 희생자들을 배경으로 삼아 카메라 쪽으로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이 사진들이 전시됨으로써 우리도 이들과 똑같은 구경꾼이 되어버린 셈이다.

(... ...)

전시회가 끝난 직후 [성역 없이]라는 제목으로 이 전시회에 전시됐던 사진들이 책으로 묶여 나오면서 위와 같은 질문들이 제기됐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듯 소름끼치는 사진을 전시할 필요가 있었는가 반문하며, 이런 전쇠가 흑인 희생자들의 이미지를 둘러싼 대중들의 관음증적 욕구를 부추기고 영속화하지 않을까, 혹은 사람들을 이런 의미지에 무뎌지게 만들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렇지만 이 사진들을 "꼼꼼히 검토해 볼" 의무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더 나아가서는 이런 사진을 보게된 시련을 달게 받을 때에야, 이와 같은 잔악 행위를 그저 '야만인들'의 행위라고 이해하기보다는 인종주의 같은 일종의 신념 체계, 즉 어떤 인종을 열등하다고 규정해 그 인종을 고문하고 살인해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신념 체계가 반영된 행위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 ...)

만약 미국인들이라면, 원자폭탄의 화염에 타버린 희생자들이나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 중 네이팜탄에 맞아 육체가 갈가리 찢긴 민간인 희생자들의 사진을 보려고 출타하는 행위를 병적인 행위라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미국인들은 린치를 당한 흑인들의 사진을 보는 행위는 의무라고 생각한다.  (138-142pp)

 

 

 

 

 

 

매혹적인 육체가 외부의 공격을 받는 광경을 보여주는 모든 이미지들은 어느 정도 포르노그라피이다. 그렇지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을 담은 이미지들도 매력적일 수 있다. 고속도레엇 발생한 끔찍하기 이럴 데 없는 자동차 충돌 현장 옆을 지나칠 때 운전자들이 차의 속도를 늦추는 이유가 단지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대부분 운전자들은 뭔가 소름끼칠 만큼 섬뜩한 것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런 바람을 '병적'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이 표현이 뭔가 보기 드문 일탈 행위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끔찍한 광경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 현상은 영원히 계속될 내적인 고문의 원천이라고 할 만하다. (144-145pp)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비록 우리가 권력과 맺고 있는 실제 관계를 또 한번 신비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154p)

현실이 일종의 스펙터클이 되어가고 있다는 주장은 깜짝 놀랄 만큼 지역성을 띠고 있다. 이런 주장은 이 세계의 부유한 곳, 그것도 뉴스가 오락으로 뒤바뀌어 버린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극소수 교육받은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습관을 보편화하고 있는 셈이다. (...) 모든 사람들을 일종의 구경꾼으로 보는 것이 바로 이들의 방식이다. (...) 마찬가지로 전쟁, 엄청난 불의, 테러리즘 등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아는 바가 아무것도 없는 뉴스 소비자들의 사고방식에 근거해 타인의 고통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일반화하는 것도 우스꽝스럽다. 자신들이 텔레비전 상에서 보는 것들에 전혀 단련되어 있지 못한 텔레비전 시청자들도 수십억이 넘는다. 이런 사람들은 현실에 선심을 베푸는  호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162-163pp)

 

 

 

 

 

 

포위되어 있을 당시의 사라예보에서는 폭격의 와중이나 저격수의 총탄이 빗발치는 와중에서도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을 호통치는 사라예보 주민들의 고함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은 목에 두른 장비 때문에 쉽게 눈에 띄었다. "시체들 사진을 찍으려고 포탄이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요?"

(... ...)

희생자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재현되는 데에 관심을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뭔가 유일무이한 것으로 보여지기를 원한다. 1994년 초, 포위 상태에 놓여 있던 사라예보에서 일 년 이상 거주해 왔던 영국의 포토저널리즘 작가 폴 로우는 절반 이상이 파괴되어 버린 어느 미술관을 빌려 자신이 찍어 왔던 사진들을 전시했다. 그 당시까지도 파괴되어 가고 있던 자신들의 도시를 찍은 새로운 사진을 간절히 보고싶어 했던 사라예보 주민들은 소말리아의 사진들이 포함된 데에 적잖이 언짢아했다. 로우는 소말리아의 사진들을 포함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전문 사진작가이며, 그저 자신이 자랑스러워하느 두 개의 작품을 전시했을 따름이었던 것이다. 사라예보 주민들로서도 언짢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다.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타인들의 고통과 나란히 보여준다는 것은, 사라예보가 겪은 수난을 그저 [잔악행위의] 또 다른 사례일 뿐이라고 일축하면서, 양자의 고통을 비교하는 것 (어느 지옥이 더 나쁜가?)이었다. (164-166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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