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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그리고 긴급출동 SOS

 

어젯밤 집에서 우연히 SBS에서 하는 <긴급출동 SOS>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얼마 전에도 14살 짜리 아들이 엄마를 폭행하는 사건을 보도해 나에게 충격을 줬던 프로였는데, 어제 방영된 내용은 동생네 부부가 지적장애를 가진 64세의 형(방송에서 불렀던 대로 아래부터는 '김씨'로 통일)을 학대하고 폭행한 것에 관해서였다. 동네 주민들은 동생네 부부, 특히 동생 부인이 김씨의 집안 살림을 해 주는 등 장애를 가진 형을 보살펴 주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김씨에게 고물 주워오는 일을 강제로 시키고 매일 같이 그에게 폭행을 일삼고 있었다. 게다가 종이 박스같이 돈이 안되는 고물을 주워올 경우 폭력은 더 심해지고, 고철류 같이 돈이 되는 고물을 주워오도록 해 결국 그에게 절도를 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그러나 (방송이 사용했던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김씨는 제보를 받고 그를 도우려 달려온 주위의 손길(방송국, 경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같은 전문가 집단)을 피하려 했다. 여기서 심리 치료 전문가가 등장해 그의 상태를 진단한다. 결국 경찰과 '전문가'가 동행한 채 카메라는 김씨의 집에 '급습'한다.

 

흡사 삼자대면이 벌어지는 상황. PD와 '전문가'는 번갈아가면서 김씨와 동생 부인에게 폭행사실을 추궁한다. 동생부인은 길길이 날뛰고, 김씨는 카메라를 외면하려 한다. 카메라는 집안 곳곳과 김씨, 동생 부인, 그리고 뒤늦게 찾아온 동생의 얼굴을 수시로 옮겨가며 이를 전파에 담아낸다. 그러는 동안 김씨는 초조함에 손을 어디에 둘지 몰라 입고 있던 추리닝 바지를 만지작 거리고만 있는다.

 

방송은 당연하게도 동생 부부가 자행한 폭력의 잔인함과 비인간성을 드러내고 김씨의 노예와 같았던 삶에 대한 연민을 전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연민에 공감하고 김씨의 삶의 끔찍함에 경악하기 전에, 방송국 카메라가 향하는 시선들에 불편함을 먼저 느꼈다. 그런 불편함을 수시로 연발하다가 같이 TV를 보고 있던 엄마에게 심한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아마 엄마에게는 내가 동생 부부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불편함은 이와는 많이 다르다.

 

우선 왜 동생과 동생 부인의 얼굴엔 모자이크 처리를 하면서 김씨의 얼굴은 있는 그대로, 머리에 난 상처의 세세한 부분까지 다 드러내는가? 또한 김씨에 대한 여러차례 대화시도가 실패하자 방송은 진상을 파악하겠다고 김씨의 집 가까이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한다. 대체 이런 조치는 누구의 허락을 받고 하는 것인가? 방송은 심리 치료 전문가의 발언을 반복적으로 전달하지만, 김씨의 심리에 대해서는 조금의 고려도 없었던 듯 하다. 김씨 입장에서는 어디서 뭐 하던 놈인지 알 수 없는 PD가 다짜고짜 얼굴을 들이밀어 "도와주러 온 것이니 집에서 맞은 적이 있는지 말해보라"고 목청을 높인다. 내 생각엔 PD의 이런 행동은 김씨에게 동생 부인의 폭력보다 더 두렵게 느껴졌을 것 같다.

 

며칠 전에 읽었던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은 이런 상황, 즉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미지들이 범람하고 있는 현실의 기만성과 가증스러움을 낱낱이 폭로한다.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저, 이재원 역, 이후, 2004)

 

매혹적인 육체가 외부의 공격을 받는 광경을 보여주는 모든 이미지들은 어느 정도 포르노그라피이다. 그렇지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을 담은 이미지들도 매력적일 수 있다.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자동차 충돌 현장 옆을 지나칠 때 운전자들이 차의 속도를 늦추는 이유가 단지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대부분 운전자들은 뭔가 소름끼칠 만큼 섬뜩한 것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런 바람을 '병적'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이 표현이 뭔가 보기 드문 일탈 행위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끔찍한 광경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 현상은 영원히 계속될 내적인 고문의 원천이라고 할 만하다. ([타인의 고통], 144-145쪽) 

타인의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고통을 충격적인 사건 전개, 탐정과 같은 PD의 추적을 통해 '관람'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그 고통을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이는 확실히 고통과 한참 먼 '수직적' 거리를 두고,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는 행위다. 혹여나 그 시선이 연민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 한들, 그것은 무능력하기만 할 뿐이다. 그런 시선으론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어떤 개입도 불가능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고통을 해결하기 보다는 고통의 비극성을 증폭시킨다. 개인의 고통이 만인의 관람대상, 즉 포르노그라피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이른바 '고통의 사회화'인가?

 

물론 김씨의 육체가 일반적인 의미로 손택이 말한 것처럼 '매혹적인 육체'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육체가 매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방송국 카메라가 그를 향해 'Shot'(손택에 따르면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사람을 쏘는 총은 'Shot'이라는 용어가 갖는 두 가지 용법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동일한 성질을 갖는다고 말한다)을 날릴 수 있던 것이다. 윤금이씨가 미군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음부에 우산이 꽂힌채로 죽임을 당한 사진이 대중에게 여과없이 공개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육체가 매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팔루자에서 학살당한 이라크 어린이들이 팔다리가 잘리고 피를 흘리며 처량한 눈빛을 보이는 사진이 지구 반대편까지 전해질 수 있는 것도 그들이 '이라크 어린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백인이며 게다가 미국인이고, 상류계층에 속한 이었다면 이런 이미지들이 '살포'될 수 있었을까? 이런 이미지들은 폭력의 외부에 남아있는 우리(그런 폭력적 이미지를 '시청'할 여유와 권리를 가진 '시.청.자.들.')에게 폭력의 끔직함을 일깨워줘서 그런 폭력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고 하지만, 이는 오로지 '우리'의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시킬 따름이다.

 

방송에 따르면 다행히도 김씨는 동생 부부의 폭력에서 벗어나 재활원에 들어가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불편하다. 문제의 원인이 오로지 '동생 부부'에게만 있을까? 그들과 격리시키면 일은 다 해결된 것인가? 오히려 카메라의 시선이 동생부부에게 책임을 몰아가는 동안 나를 포함한 시청자들은 이 사건에 대한 면죄부를 받고, 이 사건과의 물리적 거리 뿐만 아니라 '책임감'의 거리 또한 확보한 것은 아닐까? 방송이 김씨의 생활을 그 속살까지 드러내 보인 것도 시청자들이 이 사건에 대해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씨는 우리('시청자들')에게 있어서 지극히 낯선 존재일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화려한 '스펙터클'로서 그의 삶을 편안하게 바라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희생자들, 슬픔에 빠진 친지들, 뉴스를 소비하는 사람들 -- 이들은 모두 자기들 나름대로 전쟁과 어느 정도 덜어져 있거나 근접해 있다. 전쟁을 가장 솔직하게 재현해 놓은 것, 어떤 재앙으로 부상을 입은 신체를 가장 솔직하게 재현해 놓은 것은 우리에게 지극히 낯선 존재들, 그래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피사체가 우리에게 더욱 더 친숙할수록, 사진작가는 훨씬 더 신중해지는 법이다. (98쪽)

장애를 가진 김씨와 같은 이들이 이렇게 '구경거리'로만 남게되면서, 이들의 타자화는 더욱 공공해 진다. 우리가 폭력에 노출된 그의 삶을 아무 불편한 없이 그저 '연민'만으로 보고 있다면, 이 화면을 전송해 준 전파를 통해 '나는 그런 폭력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을 느끼고 안도감을 확인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방송이 끝날 때 쯤에 자막으로 나온 광고 한마디. "다방에서 감금된 적이 있거나 그런 사실을 알고 계신 분들의 제보를 받습니다." 손택이 제시하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겹쳐지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포위되어 있을 당시의 사라예보에서는 폭격의 와중이나 저격수의 총탄이 빗발치는 와중에서도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을 호통치는 사라예보 주민들의 고함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은 목에 두른 장비 때문에 쉽게 눈에 띄었다. "시체들 사진을 찍으려고 포탄이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요?" (164쪽)

그리고 손택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다.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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