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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당원 모임을 시작하며....

다시 학생운동을 고민한다

- 대전시당 학생당원 모임을 시작하며

 

 

 

 

1. 우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나를 법적인 '성인'으로 인정해 준 그 순간부터 유기체적 사회관념을 가지신 높으신 분들의 눈으로 보기에 이 사회의 암세포 같은 일들만 골라 해왔다. 주로 복무해 온 분야는 '학생운동'. 작년 이맘때쯤부터 암세포의 세포분열이 난관에 부닥치자 암세포의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2. 나는 왜 이 글을 쓰고 있는가?

 

 

얼마 전 사무처장님의 제안으로 학생당원모임의 초동주체를 하겠단 결심을 했다. 이 모임이 그냥 학생'모임'인지, 학생'운동'모임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정당에서 20대 학생당원들이 모여서 뭔가를 하겠다는 모임이라 했을 때, 그 모임의 모습이 (내가 해 왔던 암세포질과 반대되는) 정상세포의 활동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그간 내가 해 왔던 고민이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다고 생각된다. 즉 나는 여기서 학생당원모임이 학생운동을 하는 모임이라 했을 때, 그것이 가져야 할 올바른 방향성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3. '88만원세대'의 소심한 변명

 

 

작년 촛불집회 이후 전 사회적으로 세대담론이 폭발했다. 주된 화두는 역시나 '촛불소녀'로 대표되는 10대 청소년에 대한 이야기었지만, 이에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얘기는 항상 "동생들이 저렇게 고생하는데 20대 대학생은 대체 뭐하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대다수의 여론은 "몇날 며칠을 토익책을 끼고 도서관에서 씨름해야 하는 88만원세대들에겐 너무 버거운 일"이라는 소심한 항변으로 맞섰다. 즉 취업을 비롯한 경제적인 문제가 대학생들을 옥죄고 있기에 너무 힘들다는 것.

그러나 이런 변명을 '이해' 할 수는 있으나, 100% '동의'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88만원세대를 386세대와 비교 하면서, 386세대의 대학생활은 졸업이후 안정적인 취업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적인 경제문제에 매몰되지 않고 운동에 뛰어들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보다 80년대의 경제적 상황이 비교적 좋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근거에서인가? 게다가 따지고보면 386세대라고 말하는 집단은 사실 그 시절 20대 전체라기 보다는 일부 엘리트 대학 재학생을 지칭하는 것인 반면, 88만원 세대는 20대의 대부분이 대학에 진학하는 작금의 현실에 비춰봤을 때, 20대 전체라고 볼 수 있다. 흔히들 '3저호황'같은 말로 80년대의 경제적 상황을 특징짓지만, 이것도 80년대 말에 가서 나타난 특징일 뿐이고, 오히려 80년대는 79년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사실상 한국에서 최초의 신자유주의 개혁이라 할 수 있는)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의 자기장 안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에 대한 피해는 오롯이 (최근의 88만원 여성에 비견되는) 여성 노동자 등 하위계층들이 짊어졌고, (그 명칭 자체에서도 대학입학년도가 들어가 있는) 386세대는 이런 위기비용 전가를 피해간 극소수에 해당할 뿐이다.

따라서 두 집단의 단순비교는 불가능하다. 분석의 대상은 <386세대 vs 88만원세대>가 아니라 <80년대 20대 vs 2000년대 20대>로 대체되어야 한다. 분석의 대상이 바뀌었으니 당연히 질문도 바뀌어야 한다. 지금과 다를 바 없이 경제적인 불평등과 억압이 존재했던 20년 전에는 사회변화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게다가 '학생운동'의 주축이 될 수 있는 '학생'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지금, 학생운동이 이렇게 왜소한 이유가 무엇인가?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먹고 살기 힘들기는 386세대를 뺀 나머지 80년대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경쟁을 강요하는 이 사회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그 때는 경쟁 이데올로기보다 더 무시무시한 반공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이러한 모든 통속적인 설명은 항상 2%, 아니 20%는 부족하기 마련이다. 나는 이 비어있는 20%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4. 2000년대의 대학사회와 학생운동의 역사적 기원

 

 

내가 통속적인 설명이라고 부른 것들은 대부분 사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 경제적 상황, 사회적 분위기 등등. 그러나 여기서 빠진 20%는 바로 대학과 대학사회 그 자체, 또는 더욱 구체적으로 학생운동 그 자체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변화의 출발점은 당연히 80년대이다. 2000년대 대학 현실에 대한 원인을 80년대에서 찾는다고? 오해는 금물, 뭐 내가 족보를 따지고 올라가서 학생운동사의 명인들을 찾아내어 그들에게 역사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려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나는 학생운동이 전체운동의 기능적인 일부분, 즉 시스템 전체에서 하나의 부품으로서가 아니라 전체의 운영원리에 귀속받으면서도 능동적으로 그 시스템에 역반응하는 독립적인 체계라고 했을 때, 그것이 대학과 사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변화시키려 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지금 대학의 현실은 정확히 90년대 학생운동의 부정적 성과물, 그 자기장 안에 머물러 있다. 90년대 학생운동은 소멸했지만, 그 부정적 효과는 여전히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고, 그것이 지금의 학생사회를 질식하고 있는 한 축이다. 이를 굳이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반지성주의'라고 할 수 있다.

 

 

 

1) 또 다른 지식의 세계를 만들어 낸 80년대

 

 

한국이라는 공간적 특수성을 배제하고 생각해 본다면 대학이라는 공간은 이념형적으로나마 '지식'의 세계를 통해 민주주의를 약속하는 공간이다. 지식의 광대한 세계에 접근함을 통해 시민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서 존엄성을 인정받겠다는 것은 체계가 약속하는 유토피아를 실제로 획득하겠다는 각 개인들의 의지가 실현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현실속의 대학은 그러한 약속을 수시로 배반하는 공간이다. 오히려 지식의 위상을 그것을 차지하여 계층상승 욕구를 실현하려는 것으로 추락시킨다. 이러한 약속과 배반의 순환은 프랑스 혁명이 약속했던 보편적 시민권의 약속이 역사속에서 지배층에 의해 끊임없이 배반당했던 순환과 정확히 맞물린다.

대학에서 '생산'되어 사회로 '유통'되는 지식이 보편적 시민권이 부정되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때, 대학생은 지식의 보편성, 지식의 진리성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그 끊임없는 의심의 결과, 그들은 대학 그리고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지식의 세계 외부에 또 다른 지식의 세계를 만들고자 노력한다. 우리의 80년대가 바로 그랬다. 광주항쟁은 모든 대학생들에게 그들이 배우는 지식이 학살당하는 민중들의 현실을 조금도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고, 그래서 그들은 다른 지식의 세계를 만들어 갔다. 그 다른 지식의 세계의 중심에 바로 맑스-레닌주의가 있었고, 그들은 맑스-레닌주의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바꿔 나가려 했다.1)

다른 지식들은 교수가 강단에서 지휘하는 강의실에서가 아니라 학회와 써클을 통해 유통되었다. 학회가 1,2학년 학생들의 적극적인 '의식화의 장'이었다면, 써클은 3,4학년들이 또 다른 지식세계를 대중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이런 움직임의 가장 적극적인 표현이 바로 '위장취업', 즉 학출 노동자가 되는 것이었다.

80년대의 이런 활동구조에 대해서는 다양한 비판이 존재한다. 교조적인 이론체계의 답습, 폐쇄적인 조직문화,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인텔리적 습성 등등. 그러나 이런 비판을 어느 정도 수긍한다 하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사실은, 이들의 실천이 '국가공인 지식공장'인 대학에서 해방 이후 처음으로 그 지식생산에 균열을 내고자 했으며 그들 스스로 만들어냈던 독자적인 지식체계를 대중들에게 돌려주면서 민중의 힘으로 사회를 변혁 할 수 있다는 맹아적 가능성을 발굴해 냈다는 점이다. 여기서 핵심은 이들을 지탱했던 이론과 이념의 힘이다.

 

 

"저기 노동자들은 목숨을 걸고 단식하며 싸우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매일 쌀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해" (SBS드라마 <모래시계>중에서 동일방직 노동자 투쟁을 보고 흐느끼는 한 여대생의 대사)

 

 

"현장에 가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했던 일은 고등학교 때부터 써온 일기를 태우는 일이었다. 거추장스러운 것을 정리하는 것처럼 했지만, 사실 내용은 과거의 나와 결별하는 것이었다." (김원, "잊혀진 이름, 학출노동자" 중의 인터뷰 내용 발췌, <고대문화> 08년 10월호)

 

 

마음껏 쌀을 먹을 수 있다는 자신의 존재근거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결국엔 자신의 과거와 결별하고 노동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는게 개인의 순수한 마음으로 가능한 일일까? 게다가 통계로 잡히지 않을 정도로 많은 대학생들이 집단적으로 그런 결심을 한다는 것이 말이다.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준, 그들 스스로 만든 이론과 이념의 힘이 아니고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2) 90년대 운동의 몰락, 이념의 과소결정

 

 

그렇게 뜨거웠던 열기가 왜 이렇게 쉽게 냉각되어 버린 것일까? 집회와 투쟁, 자유, 행복, 정치적 충만감의 경험, 슬로건과 노래, 말의 격류 ― 누구의 말대로 ‘혁명의 마법’에 취해 있었던 이들은 왜 그렇게 빨리 마법에서 깨어났던 것일까? 이제 다시는 그 ‘광기’(狂氣)의 시대는 오지 않을 거라는 자기부정은 그들 세대를 넘어 지금의 88만원세대들에게 까지 이어져 지금의 세대에게 그런 상상의 기회조차도 거세시키고 말았다.

자기부정은 80년대 말 90년대 초 부터 시작되었다. 흔히들 사회주의권의 붕괴, 91년 투쟁 패배, 3당합당을 통한 보수 대연합 등의 이유를 들지만, 이런 것들도 다 외인론일 뿐이다. 그런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어쩌면 그렇게 쉽게 무너져 내렸단 말인가? 그것을 가능케 했던 내적인 이유가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

86-87년을 경과하면서 운동진영은 5공과의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래서 규모있는 대중동원이 가능한 학생운동의 힘에 많이 의존했다. 그래서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대중적 학생운동은 필연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86년 NL노선이 대두하여 학생운동의 주류로 성장한 것을 한국 학생운동이 왜곡되기 시작한 시점으로 보는 견해는 옳지 않다. 학생회 중심 운동이 먼저 제기되고, 사후적으로 NL의 대중노선, 사람중심 사상이 이에 적합한 운동론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의 사상 자체라기 보다는 그것이 실제로 작동해온 과정에 있다. 그 전까지 학회활동을 하던 학생들은 2학년이 되자마자 각급 학생회의 활동가들로 충원되고, 이들은 자기조직의 이데올로기에 맞춰 조합조직으로서 학생회의 임무와 정치투쟁체로서의 학생회의 임무를 동시에 책임지게 된다. 기존의 ‘학회-써클’이라는 지적공동체가 ‘학회-학생회’라는 틀로 대체되자 그들 스스로 생산해 낸 급진이념은 조직이데올로기 차원으로 제한된다. 학생회 간부가 된 활동가는 학생회의 조직 이데올로기에 충실히 봉사해야 하는 임무를 가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이념 자체의 역동성은 감소하게 된다.2)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3, 4학년 때 학생회 선거를 준비하면서 나는 90년대 초반 선배들이 만들었던 선거 자료집, 팜플렛까지 다 뒤져보곤 했다. 그 속에서 그려진 선배들의 활동 모습은 나에겐 거의 로망이었다. 첫 페이지부터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세계 재패전략’을 비판하고, 중간쯤 가면 타 선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비판이 쏟아진다. 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대학생의 정치활동이구나! ‘학우들이 무서워서’ 그런 말을 쓰는걸 두려워 했던 나를 포함한 당시 나의 동료들에게 그런 자료집을 보는 것은 매우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또 기억한다. 대략 50페이지 안팎 되는 자료집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씨뻘갰던 정치색은 조금씩 옅어지고, 등록금 투쟁, 매점과 식당 개선, 강의평가제 개선 등 학우들의 구미를 당길 공약들이 보물상자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는 것을. 그 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세계 재패전략’을 비판하는 것과 식당 밥 개선하는 것과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것이었다. 결국 요런 자료집을 맨날 끼고 앉아있던 나는 4학년때 치룬 선거에서 ‘신자유주의에 의해 가려진 성균관의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자’는 멋들어진 총기조를 뽑아놓고는(그래서 선본이름이 'Zoom In'이었다) ‘셔틀버스 무료화’라는 강력한 복지공약을 전면에 내거는 코메디를 연출했다. 이러한 지적 교조성과 정서적 대중성의 묘한 공존은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지만, 물과 기름처럼 하나가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대중 중심 사상이 불러온 기이한 역설인데, 사실 이는 대중의 지식인화가 아니라 지식인-대중의 분담 관계를 전제한 뒤 그 안에서 둘의 유대를 추구한 NL 주류 사상의 심층의 문제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를 비판한 좌파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이들은 NL에 비해 학생회 상층을 얼마나 장악하느냐에 세력재편 구상의 중심을 두었기 때문이다.3)

결국 문제는 학생회라는 자조직의 재생산을 중시하는 체계가 ‘학회-써클’이라는 지식공동체를 질식시키면서, 대항 지식인 주체 형성이 중단되고 대학내에 반지성주의의 토양이 확산되었다는 데 있다. 혹자는 80년대 이후 학생운동이 대중과 제대로 융합하지 못하고 쇠퇴한 데에는 과도한 이념에 대한 집착, 즉 이념의 과잉이 문제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념의 과소화가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외형적으로는 자조직의 이념에 집착해 그것을 확대재생산한 듯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이념 그 자체가 아니라 이념의 잉여적 결과물인 대학생 하위문화에 대한 집착이었다.4) 9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대학생 하위문화인 신세대 문화를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5)이 나온 것도 90년대 학생운동의 이념의 과소화에 따른 변종일 뿐이다. 나는 그래서 ‘이념의 시대’가 종결되었다고 선언된지도 이제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고리타분하게 다시 ‘이념’이 중요하다고 주장할 참이다.

 

 

 

3) 2000년대, 반지성주의 그리고 대중의 역습

 

 

2003년부터 2008년까지, 나는 1학년때 같이 하숙을 하던 고등학교 친구에게 조롱을 받으면서도 학생운동을 부여잡고 6년을 버텼다. 그래서 이 시절의 운동이 나에겐 너무나 소중하고 가슴아픈 기억이지만, 최대한 냉정하게 이 시절을 평가하려 한다.

自繩自縛. 2000년대 학생운동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난 망설임 없이 이 단어를 선택하겠다. 2000년대는 90년대가 만들어놓은 반지성주의라는 척박한 토양을 걷어내지 못하고 학생회라는 비료와 화학약품에 의지해 연명하다가 수시로 ‘대중의 역습’을 받은 시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기억나는 사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가 직접 보고 겪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다니던 학교에선 거의 악몽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인 ‘00년도 사태’. 2000년에 당선된 총학생회가 등록금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한 달 가까이 대학 본관을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총학생회는 여기서 학교 당국의 학생회와 비판적 성향의 교수에 대한 시찰문서를 발견하고 폭로한다. 이에 학교 당국은 점거사태가 계속되면 삼성재단이 대학에서 철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재단 철수에 반대하는 일부 학생들은 ASA(Anti Student Association)를 결성하여 총학생회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총학생회가 삼성재단 퇴진을 주장한다는 거짓선전을 하기에 이른다. 이에 학우들 여론이 뒤숭숭해지고, ASA의 총학생회 퇴진 서명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터진 총학생회 사무국장의 공금횡령사건. 결국 이 사건 이후 성균관대에선 총학생회에 운동권이 영영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었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입장은 대체로 둘로 나뉜다. 하나는 운동권 총학생회의 극렬 투쟁방식이 문제라는 입장, 그리고 다른 하나는 ASA라는 조직은 학교에서 사주한 어용단체라는 입장. 나는 두 입장에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의 원인은 이미 학생운동 내부에서 싹트고 있었다. “청년좌파여, 일어나라”라고 외치는 선본 자료집에서 쌩뚱맞게 식당 개선 공약이 튀어나올때 부터 말이다. 부실한 이념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조야한 대중성으로 대중을 현혹하여 수권한 세력(이건 어떤 특정 정파를 일컫는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운동세력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이 결국 대중과의 약속을 기만했을 때, 대중의 역습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맑스-레닌주의의 혁명적 가능성이 부정된 상황에서 여전히 그 ‘낡은’(즉 대중의 사상이 되지 못하고 그들만의 조직 이데올로기로밖에 기능하지 못하는) 사상에 기대어 학생회를 통해 자조직을 재생산하려는 세력에게 신뢰를 보내줄 대중은 어디에도 없었다. 맑스-레닌주의가 퇴각하고 생긴 일시적인 이념의 진공상태 이후 온갖 다양한 포스트주의 담론들이 자본주의 상품화와 기묘한 동맹관계를 형성해 대중의 의식을 지배해가기 시작했고, 대통령도 선거로 갈아버릴 수 있게 된 마당에 한 학교의 총학생회쯤을 권력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렇게 이념이 깨끗이 청소된 이후에 남은 것은 모든 종류의 저항적 정치행위에 대한 거부와 악무한적 비난 뿐이었다. 그렇게 학생사회는 앙상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또 하나는 버스타고 15분 거리에 있는 고려대학교의 05년 이건희 철학박사 학위 수여 반대 시위. 이 사건은 당시 워낙 언론을 많이 타서 유명한 것이긴 하지만, 요약하자면 이렇다. 05년 5월 2일, 그러니까 노동절 집회가 끝나고 바로 다음날 고려대는 삼성의 이건희 회장에게 명예철학박사학위 수여식을 진행하려 하고, 이에 반대한 운동권 학생들이 행사장 정문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인다. “노동탄압에 앞장 선 이건희가 무슨 철학박사 학위냐?” 시위는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아니 그 반응은 차가워서 더 뜨거웠다. “너희들 때문에 삼성 취직 못하면 책임질래?”, “운동권이 학교 이미지 다 깎아먹는다.”는 내용이 인터넷 게시판을 달궜고, 운동권 학생들은 당황했다. 이런 분위기로 인해 시위 참가 진영 중 일부는 “학우들과 소통이 미흡했던 점 사과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고, 이 성명 때문에 참가자들 내부에서 몇 달에 걸친 게시판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이 때 당시 우리를 괴롭혔던 가장 큰 문제는 삼성 당국과 보수언론의 역공이 아니라 대중들의 역습이었다. 대중들에게 사과성명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 노동탄압의 전도사에게 철학박사학위는 안된다는 상식적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지독한 반지성주의. 자신의 취업과 스펙쌓기에 방해되는 어떤 이념도 용서할 수 없다는 무(無)이념, 아니 반(反)이념의 이데올로기. 그렇다고 우리가 대중들의 그런 반(反)이념 공세에 어떤 분명한 이념으로 맞선 것도 아니었다. 철저한 무방비 상태에서 우리는 이념의 해체를 요구받았다.

 

 

 

4) 기이한 출현, 촛불집회

 

 

이렇게 정치와 이념 전반이 혐오의 대상이 되어가는 동안, ‘새로운 민주주의’라 불리는 것들이 출현했다.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추모 촛불집회부터 2004년 탄핵반대 촛불집회, 그리고 2008년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까지, 역사는 2000년대를 촛불의 시대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특히나 작년 광우병 촛불은 쟁점이 끝없이 확장되어 대운하, 민영화, 교육 문제까지 뻗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나 또한 촛불의 민주주의를 한껏 기대하게 되었다. 정치는 혐오받는데 민주주의는 칭송되는 기이한 현상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글이 촛불집회의 성격과 전망을 논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간단히 말하자면, 정치에 대한 혐오와 촛불의 민주주의에 대한 칭송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다. 촛불은 끊임없이 자신을 정치와는 거리를 둔 순수성의 영역에 안주시키려 했고, 그것은 ‘촛불소녀’라는 캐릭터의 이미지, 유모차 부대 등 여성적 이미지를 통해 재현되었다. 여성의 정치적 진보를 표현하는 듯이 보였던 촛불 속에서도 여전히 여성은 촛불의 비정치성, 순수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6)

나는 물론 ‘촛불’이 ‘횃불’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촛불이 꺼진 지금 촛불이 비추지 못한 ‘우리 안의 타자’들의 문제를 고민하고, 이들에게까지 빛을 비추기 위해 더 많은 촛대와 연료를 모아올 고민을 할 ‘정치’와 ‘이념’의 문제를 우리 앞에 다시 불러오는 문제가 여전히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5. 학생운동,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그래서 학생모임이 될지 아니면 그저 ‘청년학생사업’만 하다가 끝날지 알 수 없는 이 모임에 대해서 내가 너무 잔소리가 많았던 것 같다. 운동에 대한 생각과 경험이 나와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기에 이 글이 마치 나 개인의 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계적 경제위기에 청년들이 모여서 뭔가 해보겠다고 모였으면 무라도 자를 칼 정도는 갈아야 구색이 맞지 않겠나? 사업의 세부적인 아이디어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중요한 논의는 이런게 아닌가 싶어서 괜한 종이와 잉크 낭비를 해 봤다.

앞에서도 길게 이야기했지만, 결국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는 세계적 경제위기라는 초유의 사태에 적합한 정치이념을 다시 사유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고루한 이념’은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재생시켜야 하는 것이다. 학생회 중심주의라는 왜곡된 질서가 질식시켜버린 대항 지식인 주체 형성이라는 학생사회 고유의 기능을 다시금 확인하고 이를 중심으로 다시 ‘운동’을 재개해야 한다. 나는 이를 편의주의적인 방식으로 사고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를테면 대학생이라고 그들이 당면한 문제에 초점을 맞춰 등록금 투쟁이나 심지어 학자금 무이자 대출운동에 집중하자는 주장은 학생운동을 ‘중산층 운동’화 할 뿐이라고 본다.7) 학생운동은 당연히도 지식의 세계의 체계적 배반에 맞서 전후방 가릴 것 없이 억압받는 민중을 대변하는 역할을 다 해야 한다. 나는 이를 위해 필요한 이념의 무기가 바로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그리고 생태주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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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최근에 알게 되어 깜짝 놀란 사실이 있다. 요즘 대학생들이 토익이네 토플이네, 거기다가 JPT네 하면서 외국어 공부에 열을 올린다고 하지만, 사실 7-80년대 대학생들과는 비교도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외국어 공부의 목적이다. 요즘엔 취업 또는 심지어 일본 애니메이션을 자막 없이 보기 위해서 외국어 공부를 한다하지만, 옛날에는 일본어 등으로 된 자본론을 읽기 위해 외국어 공부를 했단다. 아, 너무 수준차이 나지 않나?

 

2) 장석준, 「필요한 것은 운동이다 : 90년대 학생운동의 비판적 회고와 전망」,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中, 이후, 1998

 

3) 장석준, 같은 글

 

4) 김원,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 이후, 1999

 

5) 이동연 외,『대학문화의 생성과 탈주-새로운 대학문화운동론을 제안한다』, 문화과학사, 1998

6) 이상길, 「순수성의 모랄 - 촛불시위에 나타난 ‘오염’에 관한 단상」, 『당신은 왜 촛불을 끄셨나요』中, 산책자, 2009

7) 이런 운동에 메몰되면서 어떻게 임금투쟁에만 메몰되어 조합주의화 되는 민주노총을 비판하고 혁신시킬 수 있겠는가? 특히나 그것을 자기 과제라 안고 있는 진보신당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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