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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스포츠화? - 대중정치에 대한 소고

좀 전에 저녁을 먹으면서 TV를 보는데, <무한도전>에서 '전국 돌+아이 선발대회'라는 걸 하더라. 얼마 전에 1차 예선을 했고, 오늘은 본선이라던가? 여튼 뭐 전국에 노홍철틱한 사람들 다 모아놓고, 그야말로 '또라이'들의 축제를 벌이더라.

 

나도 거의 정신을 놓고 국가대표 또라이들의 '또라이짓'을 넋놓고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저 넋을 넣고 볼 수만은 없는 장면들이 보였다. 약간 쌩뚱맞지만 이 얘기를 시작으로 오늘 날 남한사회에서의 대중정치의 의미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한바탕 또라이짓이 끝나고 장면이 방송국 스튜디오로 바뀌더니 이제 '전국 돌+아이 연합회 창립총회'를 하겠단다. 총재는 노홍철. 양 측면에 연합회의 전국회원들이 각자의 개성에 따라 '돌+아이'짓을 하며 총재님을 연호한다. 창립총회의 사회를 보던 유재석은 총재님의 기념사가 끝나자 귀빈으로 초대된 박명수에게 축사를 부탁한다. 그런데 박명수 왈, "저는 지금 이 행사가 맘에 들지 않아요. 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도저히 이런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네요. 이런 1%의 사람들을 위해서 전파를 낭비해서 되나요? 이 1%를 제외한 대다수의 저와 비슷한 보수층들은 이 행사를 원치 않아요!" 박명수식 호통개그로 받아친다. 이에 노홍철 총재는 회원들에게 야유를 선동한다. 일순간 모든 회원들은 보수논객 박명수를 향해 팔뚝질을 하며 "물러가라"를 외친다.

 

그리고 이어진 전진과 정형돈의 축사. 우선 전진이 선빵을 날린다. "저는 박명수 의원(?)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이 행사는 참 뜻깊은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톤을 이어받은 정형돈 왈, "저는 여러분들이 진정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발언에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진다.

 

물론 다 웃자고 하는 짓인거 안다. 덕분에 나도 주말 저녁에 밥먹다 말고 실컷 웃었다. 그런데 위에서 보여진 장면에서 출연자들이 얼핏 드러낸 보수와 진보(='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가 (물론 출연자들이야 별 뜻 없이 한 소리겠지만) 나에게 밥 숟가락을 놓을 때까지 밥알을 씹는 횟수만큼 '정치'의 의미를 곱씹게 만들었다. (우선 미리 전제를 깔아두자면, 여기서 내가 주장하는 위 장면에 대한 해석은 그저 상징분석일 뿐이다. 그러므로 <무한도전> 출연자들의 발언 의도 같은거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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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돌+아이 연합회 회원들은 노홍철에게 광기어린 신앙을 보여준다. 정형돈은 이들을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라고 찬사를 전한다. 그리고 박명수는 이들은 단지 1%에 불과한 소수일 뿐이라고 한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 듯 하다. 작년 5월, 수십만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이명박 탄핵을 외쳤고, 이명박은 이들은 그저 소수의 사람들, 또는 그들에 의해 선동된 '정신나간' 사람들로 보았다. 아마도 이명박 눈에는 군중의 행동이 마치 노홍철과 그의 신도들이 벌이는 것과 같은 '돌+아이'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한 마디로 '집단광기'라고 말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정형돈이 그런 것처럼 이 집단광기에 찬사를 보냈다.

 

물론 작년 그 찬란했던 촛불에 대해 '집단광기'라는 말로 일갈해 버린다면, 조갑제 일당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 둘 것은 나는 '집단 광기'라는 말에 대해 별로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물론 '돌+아이'짓 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 내가 좋아하는 연구자 중 한 사람인 김원씨는 그의 책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에서 졸버그의 표현을 빌어, 80년대 남한 대학생들의 학생운동을 '광기의 역사'였다고 표현한 바 있는데, 나는 그 표현에 잠시나마 전율을 느낄만큼 감동했었다. 뭐 더 고상한 표현을 찾자면야 그 당시 대학생들만이 공유했던 집단 지성의 문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 또한 분명히 폭압적 근대로의 전환을 겪었던 8년대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던 '이성'의 스케일로는 도저히 포용 불가능한 비이성의 사건, 즉 '광기의 역사'였던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종류의 광기에서건 '광기와의 거리두기'가 요구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비록 지나간 역사이지만 80년대 학생운동에 대해 찬사만이 존재하지 않고, 반성적 거리두기 또한 존재하는 것일테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런 반성적 거리두기가 지나간 역사에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이 곳에서의 대중운동이 그저 '광기'로만 남지 않기 위해서도 '광기'와의 아슬아슬한 거리가 요구된다. 그 팽팽한 긴장의 간격을 유지해 주는 것이 바로 지성과 이론의 힘일 것이다. 그 지성과 이론의 인력이 혼돈의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려는 광기의 관성의 힘을 끄잡아내어 '역사의 정방향'을 찾아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 나가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우리의 80년대 이후의 역사가 비록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수줍게라도 '민주주의'라는 말을 꺼낼 수 있게 한 것일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년 5월은 물론이고, 아직 촛불의 자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지금에도 이런 '비판적 거리두기'의 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광기의 귀환'만을 목을 놓아 기다리고 있을 뿐이고, 반대로 이명박과 그의 일당들은 충격요법으로 머리를 백지상태로 만들어 버려 정신병을 치료한다는 미국의 한 정신과 의사마냥 양 손에 전기충격기를 들고 항시대기하고 있을 뿐이다. '광기'와 그것에 반대하는 '광기'의 대립.

 

그런데 여기, 이 두 '광기' 사이를 비집고 욕먹을 각오하고 이론의 얼굴을 내민 자들이 있다. 저자들에게 들은 바는 없지만, 이들은 분명 '욕먹을 각오'를 했음이 틀림없다. 원래 흥분한 상태에서 싸우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잰채하며 깍쟁이마냥 바른 소리 하는 사람들은 양쪽으로부터 모두 공격받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 그런 말을 한다. 쫌 용감하다. 바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산책자, 2009)의 저자들이다.

 

 

 

 

당대비평 기획위원회의 주도로 출간된 이 책에서 저자들은 "촛불을 통해 '지금 우리는 어떤 식으로 정치를 사유하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조망"하고자 한다. 그래서 " '웹2.0세대의 민주주의', '다중과 직접민주주의의 장엄한 출현'등 인상적 비평과 비난에서 벗어나, '기억의 자리'로 물러난 듯 보이는 촛불을 다시 혹은 전혀 새롭게 반성"하자고 말한다.

이 책에서 앞서 언급한 나의 주장과 가장 일맥상통하는 것은 바로 백승욱 교수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다.

 

“…촛불집회를 분석하는 이론들이 보여주는 ‘낙관주의’는 매우 우려스럽다. 이론은 촛불집회에서 나타나는 대중의 자율성의 낙관적 측면을 강조하기보다, 그 자율성이 넘어서지 못하는 경계들을 적극적으로 지적하고 그 한계를 드러내는 입장을 채택했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이론은 늘 오히려 ‘비관주의적’이어야 하며, 대중에 대한 상찬으로 가득한 이론적 낙관주의는 결국 대중 스스로 환상에 빠져들게 하고 정세의 엄혹함을 회피하게 만드는 알리바이에 불과할 수 있다. 더욱이, 정세에 대한 잘못된 판단에 기초해, 절망 속의 대중들이 표출하는 탈정치화의 전망을 대중적 봉기로 오해해서는 안 되는 시점에 등장하는 이론적 오해는 대중에게 독이 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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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욱 교수의 이 발언이 담긴 글의 제목은 "경계를 넘어서 연대로 나아가지 못하다"이다. 그런데 나는 '경계를 넘어 연대로 나아가는' 문제는 일단 살짝 미뤄두고 생각해 보고 싶은 문제가 따로 있다. 그가 여기서 말한 '경계'라는 것은 촛불 내부에 그어진 경계, 그러니까 촛불을 든 순수한 시민과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또는 운동권을 비롯한 온갖 단체 회원 등을 가르는 경계를 말한다. 만약 그 경계를 꼭 넘어서야만 하는 것이라면,  촛불은 왜 그것을 넘어서지 못했는지를 밝혀내야 한다. 그래서 다음 기회에는 꼭 그 경계를 넘어서도록 디딤돌을 놓아주어야 한다. (혹시라도 촛불은 그 경계넘기에 실패했으므로 앞으로 벌어질 경제위기에 맞선 대중운동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촛불에게 안녕을 고한다면 이보다 더 무책임한 행동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소위 '대중없는 사회주의자'의 전형적인 태도이다.)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여기서 딱 한가지, 한국사회의 아주 '개성있는' 정치문화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여기서 내가 겪은 사례 하나를 더 얘기해야 겠다.

약 두 달 전 쯤인가? 미네르바가 체포되고 사회 전체가 들썩일 당시, 나 또한 이 문제에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MBC <100분토론>에서  이 문제를 다뤘고, 나는 근무하는 중에 한가한 틈을 타 인터넷 다시보기로 방송을 보고 있었다. 그 때 내 옆을 지나가던 나보다 나이가 3살 어린 동생이 지나가면서 뭐 보냐고 묻는다. 나는 어제 방송했던 <100분토론>이라고 말해 줬는데... 그 아이 하는 말 왈, "누가 이겼어요?" 나는 이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순간 당황했지만, 차분하게 대답해줬다. "야, 토론에서 이기고 지는게 어딨어? 다 서로 다른 의견 주고받는 건데..." 그러나 그 놈은 또 말한다. "에이, 그래도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나는 며칠동안 생각했다. 분위기? 대체 이 놈이 말한 분위기라는게 뭘까? 궁리 끝에 내가 내린 답은 이렇다. 그것은 "누가 말빨이 더 쌨냐"는 거다. 분위기 상으로 누가 더 상대방에게 맹공을 퍼붓고, 누가 더 선정적인 용어 사용으로 상대를 압도하는지, 그래서 누가 더 카메라에 얼굴을 더 많이 비춰 분위기를 '주도'하는지가 이런 방송용 정치토론에 관전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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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현상을 일종의 '정치의 스포츠화'라고 명명한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100분토론 같은 프로그램 보는 것이 마치 WBC 생중계를 보는 것과 별 다른 점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잠깐 방향을 틀어서 '정치의 상품화'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자.

 

87년 항쟁이 낳은 미완의 성과인 '직선제 개헌'은 많은 후과를 남겼다. 여기서 주목해 볼 후과 중에 하나가 바로 정치적 주체의 무게추가 군부세력에서 대중 그 자체로 옮겨진게 아니라 오히려 미디어로 옮겨진 것이다. 특히 2000년도 이후 선거에서는 옥회 연설회가 금지되고 미디어를 통한 선거광고가 대폭 허용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 증폭되었다. 그리고 대략 97년 대통령 선거에서 DJ가 'DJ와 함께 춤을'로 재미를 본 이후, 대중가요나 유명 연예인들의 얼굴이 선거에 적극적으로 이용되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 선거에서 대중의 능동적 참여가 배제되고 단지 표 찍는 기계가 되어버리면서, 선거운동은 갈수록 더 많은 표를 '벌기 위한' 판촉행사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런데 상품화라는게 어딜가나 그렇듯이, 전국의 어떤 편의점에 가도 똑같은 상품이 진열되어 있는 것처럼, '정치의 상품화'로 인해 전국에 어떤 선거구에 가더라도 정책이라는 것은 어딜가나 고만고만하다. 그렇게 4년에 한번, 또는 5년에 한번 열리는 장날마다 불티나게 팔리는 상품이라는게 고작 '개발'과 '성장'이라는 신기루 같은 것 뿐이라는게 비극적인 사실이지만...

 

이로써 한국사회에서 정치참여의 가장 기본적 주체로 여겨졌던 '유권자'는 정치에 대한 '소비자'로 재포장된다. 물론 소비자라고 해도 보통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상품사회의 소비자와는 다른 점이 있다. 어찌되었던 정치상품 시장에서는 '1인1표'의 원칙, 즉 평등선거의 원칙이 지켜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도 따지고 보면 교과서 상에서만 통하는 얘기고, 선거날에도 일하지 않으면 생계가 위태로운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투표권은 사실상 박탈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작년 서울시 교육감 선거 때 공정택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휴일도 아닌 날에 시간내서 투표할 여유 있는 사람이 강남 부자들 말고는 별로 없었기 때문 아닐까?

 

이렇게 정치적 권리를 가진 시민이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행동권이 '투표권' 밖에 없고, (이제  1인 시위도 맘대로 못하게 하니 뭐...) 이것 마저도 행사할 수 없는 사람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관전'하는 것 뿐이다. 내가 직접 배트를 잡아보진 못해도, 내가 동일시 하는 대상이 배트를 잡고 홈런을 치면 미친듯이 열광할 권리는 있는거다. 그러나 경기는 관중이 아니라 감독과 선수가 하는 거다. 관중이 열심히 응원하면 선수들이 어느정도 힘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건 그야말로 '어느정도'까지 인 거고, 그걸 넘어서는 범위에서는 관중의 역할은 없다.

 

그렇게  관전에 매몰된 관중들이 승패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 장 안에서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의 최대치일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진중권, 신해철 등 소위 '말빨 되는' 논객들의 등장은 게임의 열기를 달궈준다. 그러나 이들과 같은 스타플레이어들의 등장이 결국엔 관중들에겐 펜스 너머 필드에 더욱 목매게 하고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관중석의 부실한 정치적 토양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지는 것에 일조한다는 면에서 대중정치 발전에는 독(毒)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의 가장 부정적 인 효과는 사람들을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 가둬 놓는다는 것이다. 손석희를 중심으로 양 편으로 갈라진 패널과 방청객은 진보 아니면 보수, 그 외엔 없다. 이런 게임 속에서 사람들이 정치적 문제를 다양하게 사고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봉쇄되는 것이다. 그나마 <100분토론>은 양반이다. <100분토론>을 따라잡겠다고 SBS에서 만든 토론 프로그램을 보니까 뒤에 방청객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상대편 패널의 발언이 맘에 안들면 야유도 퍼붓고 갑자기 일어나 자기 얘기 막하고 그러더라. 경기를 자기 뜻대로 움직일 권한이 없는 관중들이 '훌리건'으로 변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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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으로 말하면 소위 아고라 폐인들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집단광기를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금과 같은 한국사회에서 집단 광기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80년대 남한 학생운동이 보여준 광기와 야구장의 훌리건들이 보여주는 광기는 분명 다른 것이다. 우리가 훌리건의 광기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결국 노홍철을 교주로 삼는 '돌+아이'식의 종교적 광기로 수렴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즉 정치가 코메디화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전혀 웃기지도 않고 그런걸로 웃는데 시간 보내기에는 세상 살기가 너무 팍팍한 사람들은 어쩌나? 한판의 코메디가 끝나고 들려오는 것은 학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목숨을 끊은 어느 대학생의 이야기와 같은 것들 뿐이다. 진중권이 '집단적 유희'로 가둬지길 원했던 그 촛불이 꺼지고 난 바로 직후에 말이다. 어차피 촛불이 집단적 유희로 해소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으니 이미 예상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1848년 프랑스에서의 혁명이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시험무대였고, 1968년 5월 혁명이 1990년대 초 현실사회주의 몰락의 예행연습"(김정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중에서) 이었던 것처럼, 촛불항쟁도 전례없는 경제위기에 맞선 대중운동의 새로운 순환의 출발점이 되려면 이 희극인지 비극인지 모를 상황을 넘어서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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