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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에 대한 생각

요즘 목수정의 『야성의 사랑학』을 읽으면서 낙태 문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페미니즘의 ‘은혜’를 입은 내 운동의 관점에서 봤을 때 낙태를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공익근무를 할 당시 읽었던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의 『에코 페미니즘』(특히 13장 “개체에서 조합으로: ‘생식대안’의 슈퍼마켓”)을 읽으면서 낙태를 둘러싼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시바와 미스는 생태주의적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낙태찬성’을 넘어서 다양한 ‘기술적 대안’(예를 들면 대리모와 같은)을 이용해 성적 접촉 없이 자녀를 만들 가능성을 옹호하는 이른바 ‘생식선택권’ 그룹의 관점을 비판한다. ‘생식선택권’ 그룹들은 여성이 자기 신체의 ‘소유주’라고 보면서, 자기 신체를 ‘사고 파는’ 것이 가능해져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에 대해 시바와 미스는 ‘사고 파는 자유’란 그들 신체의 분해에 의존하는데, 그렇게 분해되고 나면 사고 파는 주체는 도대체 누구냐고 반문한다. 여성의 신체는 여성이 주인이라는 미명하에 여성의 신체를 조각조각 나뉘어진 ‘자본’으로 이해하게 되면 역설적으로 ‘여성 주체’를 제거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시바와 미스는 또한 이러한 접근법이 결과적으로 태아도 하나의 자본으로 보아 소위 ‘결함있는 태아’에 대한 제거를 정당화한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유전자결함을 갖고 태어난 아기의 부모들이 의사와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한 사례가 있다.)

 

페미니즘의 입장에서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내세워 낙태를 인정하자는 입장이지만,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전자 감식 등을 통해 태아를 제거하는 논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야성의 사랑학 162쪽

 

 

 

생명 어쩌구 하면서 낙태 반대를 외치는 사람이 최소한 자기 주장의 논리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그가 최소한 '채식주의자'여야 한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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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는 이렇게 썼음.

 

 

 

요즘 목수정의 [야성의 사랑학]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낙태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하루 종일 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갔지만, 어쨌든 결론은... 낙태를 반대한다는 사람들(특히 진보의 이름으로)이 자기들 논리의 정당성을 최소한이라도 확보하려면 그들 스스로가 최소한 '채식주의자'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 그들 말대로 '프로라이프', 즉 생명이 우선이기에 낙태를 인정할 수 없다면 지구 생명의 근본적인 토대를 부수는 육식주의에 반대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서 낙태에 반대한다는 것은 '생명우선'을 빌미로 (원하지 않는) 임신에 따른 사회적 부담과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려는 매우 야비한 가부장제의 술책이라 생각한다.

 

 

"이명박 정부가 시도하는 저출산 극복 정책은 일찍이 1960~70년대를 풍미한 루마니아의 전설적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시도했던 그것과도 맥락상 크게 다르지 않다.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의 부국강병을 위해 인구를 늘려야겠다는 결론을 얻고, 모든 여자들에게 아이 5명을 낳을 것과 피임과 낙태를 금지할 것을 명했다. 그 결과 전국의 고아원들은 곧 아이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보모 한 명당 80명의 아이들을 돌봐야 했고, 밤에는 120명의 아이들을 한 보모가 돌봐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돌본다는 행위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아이를 '사육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이들은 그 어떤 종류의 따뜻한 스킨십도 받지 못하고 목숨만 부지하며 자랐다. 70년대 들어 이 아이들이 대거 서유럽과 북미로 입양되었는데, 입양된 아이들에게서 한결같이 자폐증 혹은 유사 자폐증 증상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야성의 사랑학], 161-2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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