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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23
    베를린,야만이냐 야만이냐
    겨울철쭉
  2. 2007/07/31
    아프칸, 남한정부의 무능과 기만(1)
    겨울철쭉

베를린,야만이냐 야만이냐

베를린/야만이냐,야만이냐

베를린에서는 마음이 불편했다. 유스호스텔은 시설이 좋아서 지내기에 편했지만, 예정보다 더 머물게 된 것은 그 때문은 아니었다.

유태인 학살과 전쟁, 불편한 기억과 대면하기

나치는 집권 이후, 2차 대전까지 유태인 600만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독일(서독)은 전후에 이에 대한 법적이고 정치적인 책임을 승계하면서 이 끔찍한 사건을 기억하는 나름의 방식을 만들어냈다. (한편,동독GDR은 독일 제3제국을 부정하면서 만들어진 국가이기 때문에 그것을 나치의 범죄로 고발하고, 연합군, 공산주의자가 분쇄한 역사로 기억한다.) 그것은, 불편한 혹은 고통스런 기억에 드러내고 대면하는 것이다.

전쟁에 대한 기억도 물질적으로 남겨두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유명한 빌 헬름 황제 기념교회(Kaiser Wilhelm-Gedaechtniskirche)는 폭격으로 부수어진 것을 그대로 남겨둔다.이런 식으로 전쟁을 도시 중심가에서 영원히 기억한다.

한 시기에 한 나라의 인민 대부분이 동조하거나 침묵한 대량학살에 대한 태도는 어떤 것이 가능할까? 그것을 부정한다면 오히려 끊임없이 그것은 억압된 무의식으로 주체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 우익들이 취하는 입장은 일종의 자기학대처럼 보일 때가 있다.) 독일인들은 그것을 드러내놓고 인정하고 기억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서 그것을 넘어서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말은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대량학살을 기억하는 것이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고, 자의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매우 진실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신들에게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념물들을 보면서, 나는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치유를 원할 뿐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서도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들의 과거를 보면서 그것을 반복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가장 무서운 공포의 장면은 “내가 바로 괴물”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때이다. 특히 이성적인 존재들에게 그런 공포는 더 강할 것인데, 독일인들의 심성이 그렇지 않을까. 따라서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매순간 확인해야 잠시 잠시나마 그 공포에서 멀어질 수 있다.



유태인 박물관, 유태인 추모관

유태인 박물관은,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이 전체가 하나의 조형예술작품처럼 느껴진다. 건축물 자체가 칼로 난자당한 듯한, 희미하게 그 틈으로만 햇빛을 볼 수 있고 절망적으로 갇혀있는 유태인의 느낌을 표현한다. 그리고 단지 표현할 뿐 아니라, 그 건물에 들어간 사람들이 그것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건축의 이러한 효과는 전에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유태인 추모관(The 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 ; 유럽에서 살해당한 유태인을 위한 추모관)도 놀랍다. 브란덴부르크문 옆에, 독일 의회 건너편에 있는 이 곳은 지상에는 2711개의 (마치 관처럼 생긴) 콘크리트 조형물이 놓여있다. 지하에는 전시관이 있는데, 그곳에 들어가면 마치 무덤 안에, 지하의 관들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 속의 전시물들은 개인들이 처한 수만은 가슴 아픈 사연들을 나열한다.

1939년에 게르트 베르링거는 스웨덴에 혼자 보내졌다. 그의 가방에는 원숭이 인형이 들어있었다. 그의 부모 파울과 소피는 베를린에 남았다. 1941년, 그들은 아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하느님이 함께하시길. 우리는 다시 합치게 될 거란다.” 1943년 폴과 소피는 아우슈비츠에 끌려가서 살해당했다.

이를 통해서, 수백만이라는 숫자가 자칫 그저 숫자일 뿐인 것으로 이해되지 않도록, 그것 하나하나가 각각의 이야기를 가진 ‘한 사람’이라는 것을 부각한다. 특히 그것들은 서사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따라서 그 사연들 하나하나가 모두 비극들인 셈이다.

유태인 박물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추방자의 정원’Garden of Exile, 그리고 ‘떨어진 낙엽’fallen leaves라는 작품.

‘추방자의 정원’Garden of Exile에는 49개의 콘크리트 기둥이 있고, 그 위에는 올리브나무가 자라고 있다. 일정한 각도로 기울어진 바닥과 기둥 속에 들어가면 균형을 잃고 걷기 힘들어진다. 막막해지고 무기력해진다. 기울어져있는 벽, 기둥들은 마치 나에게 떨어져내릴 것같다. 수직의 벽이 수평으로 떨어질 것 같은 공포.

‘떨어진 낙엽’fallen leaves이라는 작품은 쇠로 만든 수많은 얼굴이 낙엽처럼 놓여진 회랑이다. 관람객들은 직접 작품을 밟게 되는데, 수많은 얼굴들은 발밑에서 웃으면서 짤그랑거리는 소리를 낸다. 모두 다른 표정의 그 얼굴들은 그렇게 해서 죽은 자들의 영혼을 만나게 한다.

이런 기념의 공간들은 일종의 ‘백신’같다. 엄청난 공포와 슬픔을 ‘대면해도 될 만한 것’, ‘기억해도 될 만한 것’으로 재구성해낸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각자가 소화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이러한 추모의 공간들은, 덩치만 큰 콘크리트 덩어리가 기억을 짓누르는 듯한 망월동 신묘역과도 비교된다. 망각을 위한 공간과 기억을 위한 공간.



베를린 장벽과 분단의 ‘전시’

한편, 베를린은 '장벽‘으로 인해, 냉전과 분단의 상징이었던 곳이다. 이제는 그것들은 과거의 ’유물‘로 전시된다. 베를린장벽의 조각들은 아직도 관광상품으로 판매되고 있다.

베를린 장벽과 관련된 여러 가지를 전시하는 곳인 ‘벽박물관’이라는 곳은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이 역사를 회고한다. 베를린장벽을 넘어 동독을 ‘탈출’하기위한 갖가지 시도들을 보여준다. 비행기, 터널, 줄 등 기상천외한 방법들도 있다. 이를 통해서 이 박물관은 장벽의 붕괴가 하나의 예정된 역사인 것처럼 보여준다.

물론, 그것이 모든 것은 아닐 것이다. 동독 사회주의 체제가 이룩한 성과, 서독 사회의 모순도 있었다는 점에서 박물관의 시각은 불공평하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질문, 왜 그들은 목숨을 걸고 장벽을 넘으려고 했는가..라는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이 ‘이미 일어난’ 사건인 지금,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에도 우리가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다시 질문하게 만드는 ‘불편한’ 공간이다. 하지만 필수적인 질문..

작센하우젠 수용소

베를린근교에 있는 이 수용소는, 아우슈비츠 이전에 ‘수용소’라는 모델을 처음으로 실현한 곳이다. 건축가들은 중앙의 감시탑에서 전체 수용소를 감시하고, 중앙홀에서 건물을 감시할 수 있는 양식을 ‘개발’했다. 유태인을 아우슈비츠로 옮기면서 주로 동성애자와 같은 ‘민족의 질병들’이나 정치범을 수용하던 시설이다. 이곳에서 20만명 이상이 수용되었고, 5만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그 중 2만명 정도는 소련군 포로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수용되고 살해된 수용소가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시골마을이다. 그곳에 역시, 지금은 너무나 평화로워서, 그런 죽음이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그래서 더욱 끔찍한 공간들을 만나게 된다.



박물관과 수용시설, 처형장 등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보여준다.
수감자들은 개인짐을 ‘맡기고’, 연병장에서 ‘입소식’을 거친다. 매일 아침 기상후 30분 내에 세면과 용변을 마치고 연병장에서 점호를 한다. 인근의 공장 등 강제노동시설로 행진한다. 당시의 수용소 막사를 포함해서 그 공간과 일상은 마치 우리나라의 군대를 연상시킨다.. 사실 별로 다를 바도 없을 수 있는데, 국가가 ‘죄없는’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하고 강제노동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연병장에는 독일군 군화의 내구성을 실험하기 위해서 수감자에게 끊임없이 걷도록 했다는 돌밭도 있다. 유태인 박물관에 있는 작품, ‘떨어진 낙엽’fallen leaves은 이 공간에서 착상하지 않았을까..

이곳에서도 역시 무기력함과 막막함이 밀려온다. 역사의 나쁜 방향에 직면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곳에 수용되어 살해된 유럽 곳곳의 공산주의자들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동독은 이 속에서 수용소의 반란을 도모하다 체포되어 처형된 독일 공산주의자와 프랑스 레지스탕스 27명을 영웅으로 부각시킨다. 그러나 그들은 영웅으로 부각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목숨을 걸고 그렇게 했을 뿐이다..

한편, 이 공간은 전후에는 소련군이 운영하는 수용소로 50년대 초까지 계속 사용된다. 6만명이 수용되고 1만2천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이때 수용된 사람들은 나치 관료들, 소련군 탈영병 등이었다. 동독에서는 무시했던 이 역사는 통일 이후 서독정부에 의해서 신속하게 ‘발견’되고 전시된다.

2000만명 이상, 전 인민의 12%가 죽은 소련의 입장에서 나치 관료들에 대한 이런 조치(죽도록 벼려두는 것)는 이해할 수 있는 복수극일 수도 있다. 수용자들의 프로필을 보면 대부분 나치의 각종 대중조직들에서 일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치의 수용소에 소련이 그러한 행위를 반복했다는 점은 정당화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1945년의 상황에서, 내가 당시의 소련 공산당원이었다고 해도 이러한 조치를 지지했을 수 있다. 말하자면, 그런 비인간적인 판단을 강요받는, (연장된) 전쟁 상황에 처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처형장의 교수대로 걸어가는 길)

왜 기억하는가

우리가 이런 죽음들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과거에 있었던 개인들의 죽음일 뿐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에게 어떤 윤리적인 각성을 요구한다. 그들의 죽음을 보다 일반적인 것, 인간 일반의 권리와 관련된 것으로 보자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기념관들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은 또 어떨까.. 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학살을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독일인들이 유태인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그저 그들의 자기만족일 뿐일 수 있다. 매일 기억한다고 해도 현재와 전혀 무관하다는 점에서 그것은 과거에 속할 뿐이다. 나치 치하의 인종주의 학살을 기억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학살들에 대해서 반대해야한다. 그런 점에서 독일인들처럼, 이스라엘의 유태인들에게도 불편한 기억에 대면하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한편, 사회주의 몰락의 현장, 나에게 불편한 것들을 대면하는 내 자리는 어떤 것일까. 사회주의가 단지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것은 불편하지만 진실이며, 우리가 대면하고 한 걸음 더 걸어가야한다.

야만이냐, 야만이냐

이 역사들 속에서 우리는 단순하게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를 물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순간에는 오히려 “야만이냐 야만이냐”를 묻게 되지 않을까.. 그런 순간의 막막함을 베를린에서 느끼게 된다. 우리에게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 인간들이 한번 저지른 일은 ‘충분히’ 다시 저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제 프라하를 거쳐 빈으로 간다.


* 베를린의 케테 콜로비츠 미술관, 페르가몬 미술관 등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 저녁에 기차를 타고 가면서 쓰는 것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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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칸, 남한정부의 무능과 기만

세 토막의 글
1
. 아프칸 납치 사태에서 남한 정부의 무능과 기만

2. 아프칸에서의 무능과 비교되는 뉴코아-이랜드에서의 신속한 대응
3. 피해자들은 뒤에 숨는 보수-근본주의 기독교 교회에 대한 비판
 
1.
오늘 두 번째 인질이 살해되고 청와대, 외통부의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이번 사태에 대해서 정부의 대응은 하나하나가 모두 무능과 기만으로 점철되어 있다.

탈레반의 포로교환이라는 요구사항에 대해서도 오늘 '공식확인'하는 등 사태가 진행될 때 마다 '확인 중'(즉 공식적으로 확인해줄 수 없다는 말)로 일관했다. 협상에서 무능을 감추기 위한 수사도 대거 동원하는 데 언론에는 협상-타협 가능성을 흘리는 한편, 오늘은 "책임을 묻겠다"는 엄포까지. 남한 정부가 탈레반에 책임을 물어? 지나가는 미국 개가 웃을 노릇이다. 아프칸 괴뢰 '정부'에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책임전가도 시작이지만 남한 정부 자신의 무능을 드러낼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도 미국의 책임을 배제해주는 '감동적인' 충성.

아프칸 '정부'는 물론이지만 미국도 공식적으로 '협상은 없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마치 故김선일 씨 납치 때 노무현이 '철군은 없다'고 곧장 대응하면서 살해를 재촉한 것을 반복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납치 사건은 탈레반은 물론 미국도 전혀 손해볼 것이 없는 판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번 사태의 해결에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미국 정부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심지어는 피랍자 가족들까지 미국대사관에 '호소'하러 가겠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 상태에서 해결할 의지가 없는데 그것은 '테러범과 협상없다'는 공허한 원칙 때문이 아니다. (이미 곳곳의 납치 사건에서 각국 정부들의 협상은 일반적인 것이다. 미국도 선례가 있으나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현재의 갈등, 탈레반의 잔인성이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럼 탈레반은? 역시, 자신들의 건재를 전세계에 위성 TV로 매일 생중계하고 있는 마당에 아쉬울 것이 없다. 미국과 탈레반, 양 극단주의자들의 이해가 이렇게 일치하는 사건인데다가, 이들이 서태 해결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마당에 남한 정부의 무능은 구조적으로 당연한 것일 수 있다.

문제는 남한 정부가 이러한 자신의 무능에 대해서 책임지지는 않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기만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한 정부의 무능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충실한 동맹국으로 복무해온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독자적인 정치적 결정은 실종되고 미국의 전쟁전략이 곧 남한 정부의 결정사항이 되는 상황에서 남한 정부가 할 수 있는 거의 없다. 역설적으로, 남한정부는 가장 미국에 충실했기 때문에 가장 무능하다는  점. 지금의 무능은 아프칸에서의 무능이라기보다 미국에 대한 무능이라는 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청와대가 말한 정치적 수단의 한계). 따라서 정부가 기자회견을 통해서 한계를 간접적으로나마 인정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능이 노무현 정부가 자초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는 데 이르면 정부의 태도는 ''기만''이 된다. 자기 나라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지도 못하고, 그것의 해결을 요구하지도 못하는 전적인 무능. 더구나 자신의 무능을 폭로하는 자리에서조차 미국의 책임을 끝까지 배제하는 태도는 정부의 기만이 매우 "의식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에서 사태의 해결을 위해 미국이 나서야한다는 진단, 주장은 정당하다. 그러한 요구가 이 사태의 원인은 물론 해결되지 않는 원인 또한 미국의 전쟁에 있다는 것과 남한 정부의 '묻지마 한미동맹'에 있다는 점을 폭로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래는 미국의 무책임한 반응들 목록/한겨레신문)


2. 
두번째 인질이 살해되면서 곧장 정부가 한 일은 뉴코아 농성장에 공권력을 투입한 것이다. 필수공익사업장도 아닌 민간사업장, 국가기간산업도 아닌 사업장에 공권력을 두번이나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그 '신속한 집행'도 더 뚜렷하다.

남한 정부는 아프칸에서의 완전한 무능을 국내에서 '만회'라도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아프칸 피랍자들은 구할 수 없지만 비정규직을 탄압하는 이랜드-뉴코아 악질자본은 구해줄 수 있다는 뜻일까?

정부가 '인질 살해에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 황당한 공문구라는 것을 아는 대중들은, 그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공문구'를 날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는 탈레반에대해서는 (자신이 불가능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무력사용을 배제하지만,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그것을 "당장" 사용한다. 이것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전혀 해결할 능력이 없는, 오직 쉽게 사용가능한 폭력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남한 정부의 무능을 더욱 부각시킨다.

3.
마지막으로 한가지.
나는 이번 사태의 핵심적인 원인들을 명확히하는 것이 중요하고 특히 지금 시점에서는 미국의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사태해결을 위해 압박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정세적 개입이다. 따라서 피해자들이 아프칸에 간 것이 책임이라는 식(여러가지 버전의 피해자 책임론)으로, 정부의 책임을 면제하고 정부의 무능을 실천적으로 비호하는 입장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다소 논쟁적으로 말해보자.
피해자들에게 어떤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남한 보수 기독교회의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일까? 나는 피해자들과 보수 기독교회(라는 제도와 사회적 세력)은 구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피랍자들이 살아야하는 이유는 그들의 아프칸에서의 '단기선교' 혹은 '봉사'활동이 정당하거나 부당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것과 무관하게 인권으로서 정당화되어야한다.

샘물교회는 기독교 우익 NGO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기독교 뉴라이트 등과 관계를 가져왔다. 이들은 신지호 등이 주도하는 뉴라이트 단체인 '자유주의연대'와 통합을 논의하기도 했다. 강남과 신도시 중산층을 기반으로 하는 신흥 대형교회들은 적극적으로 뉴라이트 운동을 통해 정치화되고 있다. 미국에 대해 비판의식이 전무한 것은 시청앞 성조기 집회를 주도하는 선발대형교회와 다를 바 없다.

이들 기독교 보수주의 진영, 복음주의이자 근본주의자들인 이들의 행태는 비판적으로 보아야한다. 이들이 공격적인 '해외선교'에 나서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있고 이는 국내에서의 선교가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측면도 작용한다. 그리고 이들이 아프칸과 같은 곳에서 하는 '선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전쟁 이후에 남한에서 '선교'하면서 반공발전주의 기독교 교회를 '부흥'시킨 것과 같은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의 유기적인 일부, CNN과 더불어 이데올로기 전쟁의 일부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오히려 보수주의 기독교가 수행하는 '해외 선교활동''에 대한 비판은 제기될 필요가 있으며 피랍자들은 그것과 무관하게 살아 돌아와야한다는 점을 요구해야하지 않을까? 이런 비판이 없는 상황에서 사태의 원인의 일부인 보수주의 기독교 교회들은 '피해자 책임론은 안된다'는 여론, 혹은 더 정확히는 '피랍 피해당사자'  뒤에 숨어서 자신들도 '피해자'인 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보수 기독교 교회는 오히려 23명을 사지로 내몬 가해자의 유기적 일부다. 이들은 지금도 일말의 회계와 반성이 없다. 한기총에서 어떤 반성적인 입장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대중들의 이들 보수주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숨길 수 없을 정도인데, 이런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납치피해자=보수 기독교 교회"로 더욱 강하게 등치되고 있다. 또 이들은 '반-기독교 근본주의'라고 할만큼 극단적인 (상징적) 폭력을 자행하고 있고, 그 성격에 상관없이 모든 기독교 교회와 신자들를 겨냥하고 있다. 구별할 수 있는 비판, 책임묻기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중 하나이다.

지금 시점에서 이미 그러한 은폐구도, 등치구조가 공고해진 상황에서 다른 비판이 실제로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늦어서 이제는 그것을 대중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실천적으로는 너무 위험하고 불가능한 문제제기라고 해도, 사태를 이성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고에서 그것을 억압해서는 안된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동행해서 그것을 지지하는 미국의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 그리고 여기에 동조하는 남한의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는 자신들의 방식으로 '테러와의 전쟁"에 계속 복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 비극을 또 다른 방식으로 예고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런 점에서 기독교 선교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들에 대해서 그 순진함?을 의심한다. 예를 들어 "다함께"는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침략과 억압"이라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 모두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관용적인 이들이 기독교 근본주의에도 역시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까. 그러나 그 제국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그런 극단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인식해야할 것이다. 제국주의 지배 세계체제의 유기적 일부인 종교적 근본주의에게만 면죄부를 주는 방식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모든 지배체제와 같이 제국주의 역시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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