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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23
    베를린,야만이냐 야만이냐
    겨울철쭉

베를린,야만이냐 야만이냐

베를린/야만이냐,야만이냐

베를린에서는 마음이 불편했다. 유스호스텔은 시설이 좋아서 지내기에 편했지만, 예정보다 더 머물게 된 것은 그 때문은 아니었다.

유태인 학살과 전쟁, 불편한 기억과 대면하기

나치는 집권 이후, 2차 대전까지 유태인 600만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독일(서독)은 전후에 이에 대한 법적이고 정치적인 책임을 승계하면서 이 끔찍한 사건을 기억하는 나름의 방식을 만들어냈다. (한편,동독GDR은 독일 제3제국을 부정하면서 만들어진 국가이기 때문에 그것을 나치의 범죄로 고발하고, 연합군, 공산주의자가 분쇄한 역사로 기억한다.) 그것은, 불편한 혹은 고통스런 기억에 드러내고 대면하는 것이다.

전쟁에 대한 기억도 물질적으로 남겨두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유명한 빌 헬름 황제 기념교회(Kaiser Wilhelm-Gedaechtniskirche)는 폭격으로 부수어진 것을 그대로 남겨둔다.이런 식으로 전쟁을 도시 중심가에서 영원히 기억한다.

한 시기에 한 나라의 인민 대부분이 동조하거나 침묵한 대량학살에 대한 태도는 어떤 것이 가능할까? 그것을 부정한다면 오히려 끊임없이 그것은 억압된 무의식으로 주체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 우익들이 취하는 입장은 일종의 자기학대처럼 보일 때가 있다.) 독일인들은 그것을 드러내놓고 인정하고 기억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서 그것을 넘어서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말은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대량학살을 기억하는 것이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고, 자의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매우 진실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신들에게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념물들을 보면서, 나는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치유를 원할 뿐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서도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들의 과거를 보면서 그것을 반복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가장 무서운 공포의 장면은 “내가 바로 괴물”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때이다. 특히 이성적인 존재들에게 그런 공포는 더 강할 것인데, 독일인들의 심성이 그렇지 않을까. 따라서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매순간 확인해야 잠시 잠시나마 그 공포에서 멀어질 수 있다.



유태인 박물관, 유태인 추모관

유태인 박물관은,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이 전체가 하나의 조형예술작품처럼 느껴진다. 건축물 자체가 칼로 난자당한 듯한, 희미하게 그 틈으로만 햇빛을 볼 수 있고 절망적으로 갇혀있는 유태인의 느낌을 표현한다. 그리고 단지 표현할 뿐 아니라, 그 건물에 들어간 사람들이 그것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건축의 이러한 효과는 전에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유태인 추모관(The 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 ; 유럽에서 살해당한 유태인을 위한 추모관)도 놀랍다. 브란덴부르크문 옆에, 독일 의회 건너편에 있는 이 곳은 지상에는 2711개의 (마치 관처럼 생긴) 콘크리트 조형물이 놓여있다. 지하에는 전시관이 있는데, 그곳에 들어가면 마치 무덤 안에, 지하의 관들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 속의 전시물들은 개인들이 처한 수만은 가슴 아픈 사연들을 나열한다.

1939년에 게르트 베르링거는 스웨덴에 혼자 보내졌다. 그의 가방에는 원숭이 인형이 들어있었다. 그의 부모 파울과 소피는 베를린에 남았다. 1941년, 그들은 아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하느님이 함께하시길. 우리는 다시 합치게 될 거란다.” 1943년 폴과 소피는 아우슈비츠에 끌려가서 살해당했다.

이를 통해서, 수백만이라는 숫자가 자칫 그저 숫자일 뿐인 것으로 이해되지 않도록, 그것 하나하나가 각각의 이야기를 가진 ‘한 사람’이라는 것을 부각한다. 특히 그것들은 서사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따라서 그 사연들 하나하나가 모두 비극들인 셈이다.

유태인 박물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추방자의 정원’Garden of Exile, 그리고 ‘떨어진 낙엽’fallen leaves라는 작품.

‘추방자의 정원’Garden of Exile에는 49개의 콘크리트 기둥이 있고, 그 위에는 올리브나무가 자라고 있다. 일정한 각도로 기울어진 바닥과 기둥 속에 들어가면 균형을 잃고 걷기 힘들어진다. 막막해지고 무기력해진다. 기울어져있는 벽, 기둥들은 마치 나에게 떨어져내릴 것같다. 수직의 벽이 수평으로 떨어질 것 같은 공포.

‘떨어진 낙엽’fallen leaves이라는 작품은 쇠로 만든 수많은 얼굴이 낙엽처럼 놓여진 회랑이다. 관람객들은 직접 작품을 밟게 되는데, 수많은 얼굴들은 발밑에서 웃으면서 짤그랑거리는 소리를 낸다. 모두 다른 표정의 그 얼굴들은 그렇게 해서 죽은 자들의 영혼을 만나게 한다.

이런 기념의 공간들은 일종의 ‘백신’같다. 엄청난 공포와 슬픔을 ‘대면해도 될 만한 것’, ‘기억해도 될 만한 것’으로 재구성해낸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각자가 소화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이러한 추모의 공간들은, 덩치만 큰 콘크리트 덩어리가 기억을 짓누르는 듯한 망월동 신묘역과도 비교된다. 망각을 위한 공간과 기억을 위한 공간.



베를린 장벽과 분단의 ‘전시’

한편, 베를린은 '장벽‘으로 인해, 냉전과 분단의 상징이었던 곳이다. 이제는 그것들은 과거의 ’유물‘로 전시된다. 베를린장벽의 조각들은 아직도 관광상품으로 판매되고 있다.

베를린 장벽과 관련된 여러 가지를 전시하는 곳인 ‘벽박물관’이라는 곳은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이 역사를 회고한다. 베를린장벽을 넘어 동독을 ‘탈출’하기위한 갖가지 시도들을 보여준다. 비행기, 터널, 줄 등 기상천외한 방법들도 있다. 이를 통해서 이 박물관은 장벽의 붕괴가 하나의 예정된 역사인 것처럼 보여준다.

물론, 그것이 모든 것은 아닐 것이다. 동독 사회주의 체제가 이룩한 성과, 서독 사회의 모순도 있었다는 점에서 박물관의 시각은 불공평하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질문, 왜 그들은 목숨을 걸고 장벽을 넘으려고 했는가..라는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이 ‘이미 일어난’ 사건인 지금,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에도 우리가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다시 질문하게 만드는 ‘불편한’ 공간이다. 하지만 필수적인 질문..

작센하우젠 수용소

베를린근교에 있는 이 수용소는, 아우슈비츠 이전에 ‘수용소’라는 모델을 처음으로 실현한 곳이다. 건축가들은 중앙의 감시탑에서 전체 수용소를 감시하고, 중앙홀에서 건물을 감시할 수 있는 양식을 ‘개발’했다. 유태인을 아우슈비츠로 옮기면서 주로 동성애자와 같은 ‘민족의 질병들’이나 정치범을 수용하던 시설이다. 이곳에서 20만명 이상이 수용되었고, 5만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그 중 2만명 정도는 소련군 포로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수용되고 살해된 수용소가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시골마을이다. 그곳에 역시, 지금은 너무나 평화로워서, 그런 죽음이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그래서 더욱 끔찍한 공간들을 만나게 된다.



박물관과 수용시설, 처형장 등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보여준다.
수감자들은 개인짐을 ‘맡기고’, 연병장에서 ‘입소식’을 거친다. 매일 아침 기상후 30분 내에 세면과 용변을 마치고 연병장에서 점호를 한다. 인근의 공장 등 강제노동시설로 행진한다. 당시의 수용소 막사를 포함해서 그 공간과 일상은 마치 우리나라의 군대를 연상시킨다.. 사실 별로 다를 바도 없을 수 있는데, 국가가 ‘죄없는’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하고 강제노동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연병장에는 독일군 군화의 내구성을 실험하기 위해서 수감자에게 끊임없이 걷도록 했다는 돌밭도 있다. 유태인 박물관에 있는 작품, ‘떨어진 낙엽’fallen leaves은 이 공간에서 착상하지 않았을까..

이곳에서도 역시 무기력함과 막막함이 밀려온다. 역사의 나쁜 방향에 직면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곳에 수용되어 살해된 유럽 곳곳의 공산주의자들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동독은 이 속에서 수용소의 반란을 도모하다 체포되어 처형된 독일 공산주의자와 프랑스 레지스탕스 27명을 영웅으로 부각시킨다. 그러나 그들은 영웅으로 부각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목숨을 걸고 그렇게 했을 뿐이다..

한편, 이 공간은 전후에는 소련군이 운영하는 수용소로 50년대 초까지 계속 사용된다. 6만명이 수용되고 1만2천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이때 수용된 사람들은 나치 관료들, 소련군 탈영병 등이었다. 동독에서는 무시했던 이 역사는 통일 이후 서독정부에 의해서 신속하게 ‘발견’되고 전시된다.

2000만명 이상, 전 인민의 12%가 죽은 소련의 입장에서 나치 관료들에 대한 이런 조치(죽도록 벼려두는 것)는 이해할 수 있는 복수극일 수도 있다. 수용자들의 프로필을 보면 대부분 나치의 각종 대중조직들에서 일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치의 수용소에 소련이 그러한 행위를 반복했다는 점은 정당화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1945년의 상황에서, 내가 당시의 소련 공산당원이었다고 해도 이러한 조치를 지지했을 수 있다. 말하자면, 그런 비인간적인 판단을 강요받는, (연장된) 전쟁 상황에 처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처형장의 교수대로 걸어가는 길)

왜 기억하는가

우리가 이런 죽음들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과거에 있었던 개인들의 죽음일 뿐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에게 어떤 윤리적인 각성을 요구한다. 그들의 죽음을 보다 일반적인 것, 인간 일반의 권리와 관련된 것으로 보자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기념관들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은 또 어떨까.. 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학살을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독일인들이 유태인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그저 그들의 자기만족일 뿐일 수 있다. 매일 기억한다고 해도 현재와 전혀 무관하다는 점에서 그것은 과거에 속할 뿐이다. 나치 치하의 인종주의 학살을 기억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학살들에 대해서 반대해야한다. 그런 점에서 독일인들처럼, 이스라엘의 유태인들에게도 불편한 기억에 대면하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한편, 사회주의 몰락의 현장, 나에게 불편한 것들을 대면하는 내 자리는 어떤 것일까. 사회주의가 단지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것은 불편하지만 진실이며, 우리가 대면하고 한 걸음 더 걸어가야한다.

야만이냐, 야만이냐

이 역사들 속에서 우리는 단순하게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를 물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순간에는 오히려 “야만이냐 야만이냐”를 묻게 되지 않을까.. 그런 순간의 막막함을 베를린에서 느끼게 된다. 우리에게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 인간들이 한번 저지른 일은 ‘충분히’ 다시 저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제 프라하를 거쳐 빈으로 간다.


* 베를린의 케테 콜로비츠 미술관, 페르가몬 미술관 등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 저녁에 기차를 타고 가면서 쓰는 것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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