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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26
    [애니] 최종병기그녀(1)
    겨울철쭉
  2. 2008/10/20
    [독서]연금술사, 불한당들의 세계사
    겨울철쭉
  3. 2008/08/12
    [독서]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겨울철쭉
  4. 2008/08/07
    [독서]다시 발전을 요구한다(장하준)(2)
    겨울철쭉
  5. 2008/08/06
    [독서] 네트워크 전쟁(1)
    겨울철쭉
  6. 2008/08/04
    [독서]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5)
    겨울철쭉
  7. 2008/07/30
    [독서]내 친구 빈센트 (2)
    겨울철쭉
  8. 2008/03/28
    [애니]브레이브 스토리
    겨울철쭉
  9. 2008/03/22
    [독서]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2)
    겨울철쭉
  10. 2008/03/21
    고양이에 대해 읽지 않은 책
    겨울철쭉

[애니] 최종병기그녀



금융위기가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는 시기에, 블로그에 글을 잘 올리지는 않고 있지만 가장 몰두하게 되는 독서는 역시 금융위기와 공황,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관련된 책들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상하게도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이런 위기와는 상관없어 보일지도 모르는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최종병기그녀(最終兵器彼女).

자세한 설정을 여기서 소개할 여유는 없지만, 세계가 멸망해가는 전쟁통에 "최종병기"가 된 치세와, 그녀의 남자친구 슈지의 이야기다. 한편으로, 여성의 신체를 군사무기로 전유하는 설정에 대해서 페미니즘적 비판이 있기도 하고, 군국주의적인 설정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렇게 비판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정작 "최종병기그녀"가 보여주는 세계는 전혀 가상적이다. 말하자면 전혀 있을법하지 않고, 그래서 일종의 판타지.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는 매우 현실적이라고, 혹은 현실과 닮았다고 말할 수 있다.

둘이 사랑하던 말던, 아파하던 말던, 세상은 전쟁으로 멸망할 예정이다.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당연히 희망도 별로 없다. 마지막편에서는, 주인공들이 있던, 후카이도에  마지막 남은 마을마저 폭격과 해일로 사라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금융위기의 시작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뒤메닐-레비나 윤소영선생의 분석처럼 2012/13년 경에 최종적 위기를 경험하게 될까, 혹은 지금일까, 혹은 더 먼 언젠가일까,

여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우리의 주관적 희망과는 무관하게 점점 더 최악으로 상황으로 전개되어갈 것이다. (하지만 치세와 슈지가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그러나 끝까지 사랑하고 살아남고자 했던 것처럼)

***
너희들이 무슨 점쟁이냐는, 혹은 너희가 뭔데 그렇게 오만하게 예상하냐는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아마 그렇게 말하는 운동권들의 심리는 순전히 사태의 진실을 믿고싶지 않은 주관적 희망 때문일 것이다. 희망이 무지의 근거가 될 수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니면 어떤 선의에 기반한 희망들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세상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래도 최후의 희망은 노동자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혹은 구하는 것일테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어떤 준비라도 다 할 것이다. 이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있는 이상, 우리는 적어도 5년 후의 시각에서 현재를 보아야한다. 매순간 그렇다. 5년후에 지금을 돌아본다면, 그 때 무엇을 했어야한다라고 생각하게 될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상황을 인식하는 우리 모두는 전혀 다른 책임감으로 행동해야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결과가 만들어질지는 전혀 알수 없다.
다만 시간은 그저 '역사의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최종병기그녀"의 시간대, 그 시간대에 살아가는 치세와 슈지의 시간대는 현실과 너무나 닮아있다. 무엇에 최선을 다하는지는 치세와 슈지와는 다르겠지만(이건 연애얘기는 아니니까), 그/녀들의 말처럼, 살아남아야한다.

하지만 어쨋든, 결과가 세상이 망하는 것이거나 혹은 아니거나, 알 수 없으니 우리는 치세와 슈지처럼,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적어도 아직은 그/녀들 보다는 좀 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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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연금술사, 불한당들의 세계사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사실, 내가 제목에 적은 두 책은 일종의 판타지들(환상문학)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그리 큰 상관은 없어보인다. <연금술사>는 게다가 판타지라기 보다는 일종의 "처세술" 혹은 "자기계발서"로 이해되는 분위기가 있는 것같다. (덕분에 책은 아주 많이 팔린 것으로 안다.)

코엘료도 남미 문학가이니, 그리 보면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닌 것같다. 어쨋든 보르헤스가 쓴 언어로 읽고 쓰는 사람이니까.


불한당들의 세계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최근에 보르헤스 연작을 읽는 중인데, 모두 다섯권 짜리다.
첫째 권인 <불한당들의 세계사>에는 천일야화의 한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꿈을 꾸었던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는 제목이다. 천일야화 351째 밤의 이야기. (이 대목만은 "뻥"이 심한 보르헤스에게도 "예외적으로" 진짜인데, 실제로 천일야화 351째 밤의 에피소드는 비슷한 내용이다.)

이 짧은 에피소드는 코엘료의 <연금술사>의 전체 구조와 같은 내용이다. 아마도 코엘료는 보르헤스의 글을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코엘료는 어디에도 보르헤스도, 심지어는 천일야화도 언급하지 않는다.(물론 번역된 책이 아닌 다른 글에서 언급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어판에는 언급이 없다.)

그렇게 보면, 참 실망스러울 수 밖에.
적어도 소재의 출처는 밝혀주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한편, 앞서 말한 것처럼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어느 정도는 유행하는 자기계발서들의 맥락에서 소비되는 것같기 때문에 더 그렇다. 예를 들어 베스트셀러로 역시 대박을 터뜨린 <시크릿> 같은 책이 유행하는 맥락, 모든 것을 "자아"의 문제로 환원하는 식의 사고방식. (종교적으로는 80년대 이후 미국의 뉴에이지 운동, 신사상 New Thought운동 등과 관련되어 있다. 기존 종교의 위기에 대한 대응의 하나인 셈인데, 이에 반대하는 극단은 종교적 근본주의다.)

뭐, 어찌 보면 천여년 전의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재현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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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모티브북
 
 
 
미국의 잘 알려진 흑인 페미니스트 벨 훅스는 성-인종-계급적 차별이 서로 분리된 것처럼 인식되는 현실을 비판한다. 현실에서 억압은 이런 모순들의 복합체이고, 성과 인종적 차별은 이제 이야기되고 있지만 여전히 계급적 차별의 문제는 미국의 언론과 학문공간의 담론에서 금기시되어 있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간과된다.
 
흑인이자, 노동계급 출신이자, 여성인 벨 훅스는 이러한 모순이 종합적으로 사고되어야하고, 또한 계급적 불평등의 문제 해결이라는 지점에서 이 모순들의 해결책이 만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신지어 베티 프리던의 "이름 없는 문제" 조차도 상류계급의 백인여성들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한다. 백인 상류계급-중산층 여성들이 가정 안에서 그러 문제를 겪는 동안 대부분의 엿어들은 장시간 저임금으로 노동시장에 있었다. 그러한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말해서는 안되겠지만 페미니즘의 역사를 말할 때 그  한계 또한 말하지 않는다면 공정하지 않다.
  
"이름없는 문제"의 제기에서 시작된 백인 특권 계급이 주도하는 페미니즘 운동은 개량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을 뿐이다. (벨 훅스는 이 지점에서 차라리 남성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레즈니언 페미니즘-급진주의 페미니즘을 옹오하는 데, 이러한 입장이 계급적 분석과 융합될 수 있을 것인지는 쟁점이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페미니즘은 대학의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유폐되어 가거나 혹은 인종차별문제와 결합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도 여전히 계급이라는 문제는 배제되고 있다. 이런 동안, 여성의 평등은 특정한 권리--특권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게 되고, 특권층 여성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상황에서 배제된 여성들과 노동계급이 페미니즘을 적대시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마치 특권층 여성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이념인 것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일부 흑인 특권 층도 여기에 가세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문제는 더욱 인종적인 것이 아니라 계급적인 것이 되어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점에서 하층계급이 가지는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에 관해서는, 비난만이 아니라 비판, 분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과연 여성운동이 누구의 이익을 보장하려고 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리천장' 문제에 집중하는 여성운동은 청소용역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직면한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의 여성화, 여성노동의 불안정화를 사고할 수 있는가? 노동계급은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빈곤은 그나마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던 흑인공동체마저도 파괴해가기 시작한다. 자본주의 소비문화와 결합해가기 때문이다. 빈곤한 흑인들은 빵을 위해서는 강도질을 하지 않았지만, 이제 마약을 위해서 강도와 살인을 한다. 흑인 공동체는 파괴되어가는데, 이것은 흑인들의 저항을 분쇄하고 지배하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
  
한편, 미국에서 빈곤의 문제를, 따라서 계급의 문제를 사고하는데 있어서 인종문제와 결합하는 것이 가지는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흑인들이 빈곤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절대화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인구수의 비율로 따지면 빈곤층의 다수는 백인 빈곤층이다. (흑인은 인구비율이 적다)
  
그런데도 빈곤을 흑인들만의 문제로 상징화하는 것은 백인 빈곤층을 보이지않는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인종 사이의 계급적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빈곤의 문제를 인종과 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계급의 문제로 사고하고 연대를 복원하는 것이 시급하다.
  
벨 훅스의 이 책은, 이러한 주장은 노동계급이며, 흑인이며, 여성인 자신의 출신배경의 개인적인 경험을 곁들여 말하면서 설득력을 갖는다.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그러한 모순들이 현실에서는 별개의 추상적인 개념들이 아니라 상호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하나하나의 개인들에게 말이다.
  
하지만, 한가지를 마지막으로 지적하자.
벨 훅스는 계급적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미국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어떻게"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녀가 제시하는 것은 "연대"정도이다. 그러나 누구와 누구가, 무엇을 위해서?
  
벨 훅스의 문제제기에는 "계급"은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계급투쟁"은 없다는 것이 분명해보인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책개혁으로 충분할까? 오히려 계급문제의 해결은 그/녀들이 자신의 계급적 조건을 인식하고 투쟁할 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미국사회에서 계급이 가시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특권층의 "나쁜 의도" 때문이기 이전에 계급투쟁이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이 계급을 형성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미국는 계급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이 간과되는 현실은 당연할 수 있다. 도덕적 비판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계급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계급투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그녀에게,
보다 체제에 위험해지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적어도 흑인 공동체를 파괴하는 마약 밀매보다 계급투쟁이 체제에 더 위험할 수 있어야 그 지배를 무너뜨릴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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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는 <행복한 페미니즘>이라는 인상적인 책을 쓴 바 있다.
 
 

행복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박정애 옮김 / 큰나(백년글사랑,시와시학사)
 
 
이 책에 대한 리뷰는 아래 참고 (예전 홈페이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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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다시 발전을 요구한다(장하준)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
장하준.아일린 그레이블 지음, 이종태.황해선 옮김 / 부키
 
"장하준의 발전주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가능한가"
 
발전주의 : 진보주의자들의 시대착오
  
장하준 교수는 <나쁜 사마리아인>, <사다리 걷어차기>에 이어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발전주의를 옹호한다.
 
최근 국방부의 "불온도서" 선정으로 인해 더욱 부각되고 있지만 장하준 교수는 "진보언론"과 "진보주의자"들에게 인기있는 저자였다. 우석훈 교수는 이번 국방부 "불온도서" 보도 이후 언급에서 장하준 교수에 대해 "중도 우파 학자로 후기 케인스주의자와 제도학파, 그리고 독일 역사학파 어딘가에 있는 사람"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장하준 교수의 주장에 동조하는 진보주의자들의 경제정책, 이념적 포지션이 어디에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 비판과 더불어 발전주의 경제정책을 제안한다. 저자들이 제안하는 "구체적" 경제정책에 따라 다시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는 "장하준의 경제정책 매뉴얼"이다. 이 책을 매뉴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경제학 에세이를 "매뉴얼"이라 주장하다니 위트도 있으시다)
 
책의 핵심 주장은 "개발도상국의 성공담은 잘 설계된 국가 개입 프로그램에 따른 것이다"(24)라는 것. 이런 주장은 책 전체에 일관되게 반복된다. 내가 경제학도도 아니고 꼼꼼히 분석-비판할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이러한 핵심주장들과 언급된 내용을 중심으로 언급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장하준 교수의 주장은 신자유주의자가 아닌 좌파의 시각에서도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다.
 
개입주의 옹호
   
이런 논지에서 저자는 다양한 형태의 개입주의를 옹호한다. 이와 함께 성공한 반주변의 사례로 동아시아의 여러나라를 제시하고 있다.(그러나 상당히 선택적이라는 점은 아래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 반주변 국가의 성공담, 혹은 발전주의 시대의 이야기에서 장하준 교수는 원인과 결과를 도치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50~60년대의 세계자본주의의 호황으로 인해 케인즈주의 정책이 가능했다. 금융억압도 한편으로는 위기 탈출을 위한 브레튼우즈 체제의 선택이었지만 비금융-산업부문을 통해 충분히 이윤율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세계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지자 바로 케인즈주의 정책과 금융억압도 위기에 빠진다. 케인즈주의가 위기에 빠지고 금융이 자유화되었기 때문에 70년대의 세계자본주의의 위기가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찬반을 떠나 명백한 역사적 사실인데, 저자들은 이를 간단히 무시하고 넘어간다.
 
게다가 세계적 발전주의가 가능한 것으로 보였던 50~60년대에는 실제로 주변-반주변-중심부의 경제적 격차가 다소 축소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70년대 이후에는 다시 확산된다. 이는 주변-반주변의 발전이 세계자본주의의 동학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왜냐하면 저자들의 관심사는 오직 발전주의 정책을 수행할 대상인 주변-반주변 국가들(저자들은 비록 "개발도상국"이라는 표현을 쓰지만)이기 때문이다. 세계자본주의의 변동은 따라서 관심밖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따라서 이 지점,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동학을 무시하고 발전주의의 부활을 주장할 수 있는가에 있다. 19세기초에 영국이, 19세기말에 독일과 미국이, 50~60년대에 동아시아가 할 수 있었다고 해서 무역장벽과 개입주의가 지금도 가능한가 혹은 그것을 통해서 발전이 가능한가라는 문제다.
 
동아시아의 역사에 대한 자의적 해석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 대한 무시는 동아시아의 성공에 대한 분석에서도 드러난다. 저자들은 동아시아의 상대적 성공--우리도 인정할 수 있듯히 남한과 대만은 20세기에 서 반주변으로 상승한 매우 예외적인 케이스다--은 개입주의 경제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냉전으로 인한 요인을 지적하는 것은 오히려 신자유주의자의 주장이라고 서술한다. 동아시아의 성공은 반공발전주의의 성공이지만, 그 성공은 두가지 요인을 무시할 수 없다.
 
하나는 냉전으로 인한 미국의 역개방 정책이다. (마셜플랜의 원조 대신, 미국은 동아시아에 시장을 개방한다. 그런데 저자들은 이러한 전략으로 인한 적은 원조규모를 오히려 동아시아가 특권적이지 않았다는 논거로 사용한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에서는 수출지향 공업화가 성공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일본을 정점으로 하는 국제적 하청생산구조이다. 이는 미국처럼 법인자본이 직접 진출하지 못하는 일본 자본주의의 취약성으로 인한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동아시아 주변-반주변 국가의 산업기반 형성을 촉진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각 국의 경제정책은 일본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자는 아예 언급되지도 않는다.
 
경제발전이 순전히 민족국가의 경제정책-전략의 결과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요인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저자들에게는 이런 요인들은 거의 고려 대상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또 한편으로 이와 연괸되어서, 저자들은 개별 국가의 독자적인 금융정책이 가능하다고 전제한다. 물론 어렵지만 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기는 하지만, 과연 개별 국가의 금융정책을 "발전주의적으로" 수립하는 것으로 실제 정책효과가 가능할까? 오히려 주변-반주변은 상시적인 금융위기에 노출되어 있는데, 이는 개별국가 정책의 문제라기 보다는 국제금융정책의 문제이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무역-금융정책을 변화시켜야한다. 말하자면 WTO와 FTA를 막아내고 국제협약으로 토빈세를 도입하는 것이다.
 
물론 개별국가의 대응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예를 들어 97~98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과정에서 남한과 말레이지아의 대응방식은 크게 달랐고, 이에 따라 경제위기의 강도와 사회적 부의 유출 정도 등이 많이 달랐다. 그러나 이를 다른 영역까지 일반화해서, 이러한 개입주의를 통한 발전전략이 가능하다고 말하기에는 곤란하다.
 
단적으로, 말레이지아는 금융위기의 충격을 덜 받았지만 남한보다 경제가 더 성장했는가는 물어보아야한다. 말레이지아와 같이 금융통제를 하는 것이 의미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발전과 경제성장의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신흥시장과 금융세계화에서도 배제된 지역
   
한편, 저자들은 신흥시장emerging market의 예를 들면서 경제성장이 오히려 민간자본을 유인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금융자본의 유인정책을 사용하기 전에 생산성을 높여야한다고 지적한다. 크게 틀린 지적은 아닐 수 있지만 한 걸음 더 나가야한다. 왜 특정한 국가들만 금융투자의 대상이 되는 "신흥시장"이 되는가? 왜 어떤 나라들(아프리카와 같은)은 금융시장에서도 배제되는가?
  
그것은 신흥시장에 대한 민간자본의 투자가 단지 경제성장 정책을 옹호하는 논지로만 언급될 수는 없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신흥시장이란 상대적으로 경제활동이 활발한 반주변 국가들에 대한 금융착취 매커니즘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계화에서도 배제된 아프리카와 같은 "버려진 지역"은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른 틀에서 접근해야한다.
 
발전주의는 반복될 수 있다?
  
저자들의 지적처럼, 역사적으로 발전주의 정책을 잘 활용했던 일부 민족국가들이 성공하기도 했던 것은 사실이다. 선별적 산업정책, 금융통제, 생산유치 및 일정한 보호무역 등은 그러한 성과를 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특수한 시기(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 특수한 지역(동아시아)에서 가능했던 것이라는 점을 함께 언급해야한다. 그렇다면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여전히 그러한 정책들이 가능할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그런 시간-공간에서조차 주변-반주변-중심부의 위계를 도약하는 민족국가는 20세기 내내 거의 없었다. 주변-반주변의 공업화가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반주변의 발전이라기 보다는 공업활동의 주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위계를 흔들지 않을 뿐 아니라, 경제의 구조적 종속을 지속적으로 강화한다. ("발전주의의 환상: 반주변의 재개념화", 아리기 - <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과천연구실세미나9> 중) 그렇다면 특정 산업의 확대가 발전주의의 성공으로 언급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과 같은 접근은 마치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도 현명한 민족국가의 발전전략이 있다면 그러한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위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주장의 정치적 결론은, 주변-반주변에서 발전주의 국가를 다시 수립하는 것이 된다. 개별 민족국가들은 유능한 전략(이른바 '발전비전')을 수립하고 실행할 수 있는 정부를 구성하는데 집중해야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결론을 국제적으로는 물론 남한에서도 적용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는 "미친 경제학자들"의 독특한 발명품이 아니라 위기에 빠진 세계자본주의의 금융세계화를 위한 정책, 전략, 이데올로기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단순히 신자유주의 교리를 비판하고 대안정책을 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대응을 불러온 위기를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접근한다면, 오히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로 인해) 필연적으로 경제위기와 금융화를 불러오는 자본주의 세계체계를 변혁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주변, 반주변의 개별국가들이 현명한 경제정책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미국발 금융위기와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를 막을 수는 없다.
  
민족국가의 대응은 의미가 없는가?
 
그렇다면, 이런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체계 전체를 변혁하는 것이 난망한 마당에, 각 민족국가별로라도 대안이 있어야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주장. 그러한 금융위기가 예상될 수록 민족국가별 대안이 필요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대안을 위한 지역적이고 국가적인 경제정책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남미의 ALBA(아메리카를 위한 볼리바르 대안)와 같은 대안무역구조 구축전략은 의미가 있다. 여기서 지적하고자하는 것은 그러한 민족국가 혹은 지역적 차원의 대안을 발전주의 전략으로 부를 수도 없고, 그러한 발전주의 전략이 성공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이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필요한 것은 유능한 관료들에게 정권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정권을 민주화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남미 국가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좌파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야 지역적 대안을 논의할 수 있었다. 반주변은 급속한 공업화로 인해 노동자 인구가 형성되는 과정과 함께, 권위주의 정권의 일방적인 발전전략 추진에 반대하는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이 폭발해왔다. 따라서 반주변에서 이러한 체제변혁의 확산이 민족국가 차원에서나 지역적 차원에서나 세계적 차원에서나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막아내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오히려 대안세계화와 대안무역
  
이러한 민족국가적이고 지역적인 대안형성과 함께, 국제적 금융자본의 이동을 통제하고 무역자유화를 저지해야한다. 이러한 운동은 개별 민족국가(들)의 정책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국제적인 사회운동을 필요로 한다. 민족국가-지역-세계 각각의 차원에서 대안세계화운동이 전개되는 것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폐해를 막아내는 다소간 유일한 정치적 경로라고 할 것이다.
  
개별민족국가에서 유능한 관료들이 발전주의 정책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러한 민족국가 간의 경쟁은 결국 세계적 금융위기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개입정책을 중시하는 발전주의 정책을 운용한다고 해도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독립된 민족국가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족국가는 오히려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유기적인 구성단위이자 효과이다.)
 
덧붙이자면, 장하준 교수 등이 주장하는 발전주의 정책으로는 지구적 생태위기를 해결할 수도 없다는 점을 지적해야한다. 적어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대안무역체계의 형성과 대안세계화는 자본주의 경제구조의 생태적 모순을 폭로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공간을 열어줄 수 있다. 그러나 개별 민족국가의 발전주의는 생태위기를 더욱 심화할 뿐이다. 저자가 긍정적인 예로 드는 중국은, 산업발전과 함께 엄청난 에너지와 자원을 소비하고 생태위기를 부추기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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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발전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아래 두 권의 책을 참고하는 것이 의미있다.
  
조반니 아리기 외 지음, 이미경 외 옮김 / 공감
 
다이앤 엘슨 외 지음, 과천연구실 엮음 /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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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여 : 공공부문 구조조정과 관련하여
  
 한편, 장하준 교수는 공공부문의 사유화는 반대하지만 구조조정과 기업화된 운영방식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것은 공공부문을 발전주의 정책을 수행하는 데 활용해야하는 섹터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공공부문의 사유화와 구조조정, 그리고 노무현 정권 시기에 강화된 시장화된 운영--공기업의 경영혁신지침, 경영평가 등으로 강요된다--을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공공성과 보편성 때문이다.
  
물론, 경제정책을 수행하는 데 있어 SOC 산업의 효율화는 필요하겠지만, 여전히 발전주의의 시각에서 공공성은 부차적이며, 국가의 경제정책의 유효성을 높여주는 한에서만 사유화를 반대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장하준 교수의 주장은 그렇기 때문에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이 주장하는 공공성과는 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노조운동은 이러한 주장을 섣불리 수용해서는 안된다.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실제로 장하준 교수 식의 주장이 공식-비공식적으로 수용되는 추세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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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네트워크 전쟁



네트워크 전쟁 - 테러.범죄.사회적 갈등의 미래
존 아퀼라, 데이비드 론펠트 지음 / 한울



네트워 : 우리가 마주친 저항운동의 새로운 양식

촛불집회는 예전의 사회운동의 투쟁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그 의미를 분석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남한에서나 국제적으로나) 아주 새로운 현상만은 아니며, 이미 상당한 정도의 연구도 이루어져 있는 상태다. 이를 참고하는 것은 현재의 촛불집회와 새로운 사회운동의 폭발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세계화 시대에는 최근 우리나라의 촛불집회만이 아니라  범죄-테러조직, 사회운동 등에서 새로운 조직화 방식이 나타난다. 이를 분석하고 그 대책(대응전술)을 검토하는 책.
미국의 보수적인 싱크탱크인 RAND연구소에서 낸 책이니 만큼 '적들의 계산법'이랄까.

이 책은 부제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테러.범죄.사회적 갈등(사회운동)의 새로운 양상을 다룬다. 저자들은 세계화 시대에서 새로운 저항의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네트워Netwar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테러와 범죄, 사회운동이 같이 취급될 수는 없을 지 모르고, 저자들도 명시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의 개념, 네트워라는 것으로 설명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교리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저자들의 연구에서는 '강도'와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갱, 훌리건, 무정부주의자들--예를 들어 "블랙블록"--은 같은 틀에서 분석된다.)

네트워를 수행하는 조직의 특성이 SPIN 이라고 하는데, 분절되고 segmented 다중심적이며 polycentric 이데올로기로 통합된 ideologically integrated 네트워크 network 조직이라는 뜻이다. 이 조직들은 과거의 마르크스주의 조직들(당?)과 같이 중앙집중적인 위계제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폭발적인 힘을 가진다. 이들의 전략이 사회운동에서는 주로 스워밍swarming(무리지어 모이기)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같은 기기를 이용해서 미리 정해진 전술없이도 확 모이고 또 흩어지기 때문에 진압도 힘들다.

대표적으로 예를 드는 것이 사회운동에 있어서는 99년 WTO 반대 시애틀 전투와, 사파티스타. (그러니, 우리 촛불 집회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테러조직으로서는 알카에다(이 책이 911테러 이전에 나왔음을 상기해야한다), 하마스, 범죄조직으로서는 홍콩의 삼협회, 러시아 마피아 같은 조직들이다.

이들은 그래서, 네트워에 대응하기위해서는 역네트워counter-netwar가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이런 저런 전술을 언급한다. 일단 경찰이나 군대, 정보조직도 SPIN 형태를 응용해서 진화시켜야한다는 것. 그리고 정보 흐름에 개입하면서 허위 정보를 끼워넣거나, 사회운동일 경우에는 온건한 NGO를 개입시키는 방안, 네트워크의 노드를 이완시키는 방안 등등이 제시된다.

사회운동과 네트워

참세상 사진그러면서, 네트워에 적합한 사회운동 조직 형태도 소개하는데 그것도 흥미롭다. 위에서 말한 SPIN 속성을 가진 것은 물론이지만, 일종의 허브와 지도자들이 필요하다는것이다. 이들은 네트워크의 운용이 다섯가지 분석수준에서 좌우된다고 지적한다.

- 조직적 수준 : 네트워크의 조직적 구조
- 서사적 수준 : 이야기
- 교리적 수준 : 협력 전략과 방법
- 기술적 수준 : 정보 체계
- 사회적 수준 : 신뢰와 충성을 보장하는 개인적 유대

각각의 분석수준에서 보면, 사회운동에 있어서는 조직적 수준에서는 허브hub로서의 조직가, 서사적 수준에서는 "교리적 지도자"를 요구한다. 이를 통해서 오히려 "지도자 없는" 네트워크 형태의 운동이 가능해진다. 네트워에 적합한 지도자는 위계구조에서 카리스마를 갖는 사람보다는 "서사적 교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운동들과 사람들이 이어지는 것이 여러 방향으로 이어진 네트워크는 물론이지만, 운동들이 사슬처럼 연결되는(이걸 "노드"라고 하는데) 때에 그걸 연결하는 축, 허브hub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허브는 운동을 조직자이자 지도자의 역할을 해야 더 크게 조직화가 된다는 것. 이 때의 조직자-지도자는 예전처럼 카리스마적인 사람이라기 보다는,운동-운동을 연결하는 인맥-조직력을 갖고,(사회적 수준), "서사적인 교리"를 만드는 능력이 있어야한다(서사적 수준). 사람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통합하기 위해서 "승리하는 길로 가는" 이야기를 만들어주야한다. 이 지도자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서 운동에 참여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런 역할을 잘 수행한 사람은 알카에다의 빈 라덴, 사파티스타의 마르코스 부사령관 같은 이들이 있다. 촛불집회에서는 강기갑, 우석균, 진중권과 같은 이들을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성격을 가진 지도자-조직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파티스타의 경우는 책에서 한개의 챕터로 따로 분석하기도 한다. 특히 이들이 형성한 국제적인 사회운동의 네트워크는 이후에 세계사회포럼으로 발전하면서 "대안세계화운동"을 강력한 사회운동으로 제기하기도 했다. 자본주의 이후 대안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운동에서도 네트워는 단지 사회운동의 "기술적인 측면"으로만 폄하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네트워의 한 측면으로 사이버테러나 해팅과 같은 것도 언급되지만, 그러한 기술적 측면은 오히려 부차적이다.(네트워는 인터넷 네트워크에서 하는 전쟁이란 뜻은 아니다.) 인터넷과 무선통신의 발달이 네트워를 활성화하기는 하지만, 가장 낮은 수준의 기술적 도구를 이용해서도 네트워는 조직될 수 있다. 따라서 네트워는 기술적 발전에 의존하는 전술교리의 변화라기 보다는, 운동들의 조직화 방식의 진화다.

(그러한 변화의 원인을 이 책이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기술적 발전은 중요한 요인이다. 네트워크를 형항하는 데 있데 비용과 속도가 크게 절감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자본주의의 지배조직이 위계적이라기 보다는 신자유주의-금융세계화 과정에서 자신을 유연하게 재편해가는 것이 이에 대한 저항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공장에서 노동력의 조직화 방식은 물론이고 사회의 지배방식, 주변-반주변의 지배방식에서 있어서도 그렇다. 예전과 같이 제국주의 국가 총독을 두고 위계적으로 지배하는 체제가 아닌 것이다.)

촛불집회 : 2008년 남한의 네트워

최근의 촛불집회와 관련해서 보자면, 이러한 일반적인 분석과 함께 99년의 WTO 각료회담 반대 시애틀 전투에 대한 분석이 흥미롭다. 몇가지를 이런 틀에서 언급해보자.

촛불집회는 전형적으로 인터넷으로 조직되었다. 다음 아고라라는 공간에서 제안되고 조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브가 없었던 것은 아니며, 2MB탄핵연대와 같은 (이미 효순미선 살해규탄, 노무현탄핵반대 운동 등으로) 경험있는 너트워크 조직들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이미 존재하는 사회운동의 연대틀과 결합하여 네티즌들을 촛불집회에 결합시킨다.

한편, 집회의 진행에서도 스워밍이 전형적이다. 참가자들은 인터넷을 통한 정보와, 인터넷 동영상 중계, 문자메시지, 핸드폰 등을 이용해 이동방향을 파악하고 신속하게 이동한다. 전투경찰은 항상 뒤에서 따라오게 되지만 이미 늦다. 물론, 이러한 스워밍은 조직된 운동보다는 일반 시민들의 참여에서 더욱 활성화된다. 경험적으로 볼 때, 학생회나 노조와 같은 조직대오가 많은 집회에서는 오히려 기동력이 크게 저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위계적 조직형태로 인해 신속하게 판단하고 이동하지 못한다.

(특히 조직력이 크게 이완된 노동조합보다도 조직력이 살아있다는 점에서 학생조직들이 문제다. 이들은 대오의 이동을 오히려 고착시키기도 하는 경우가 많다. 신속하게 스워밍을 해야할 때 그냥 앉아서 총학생회장 발언을 듣고 있거나 자족적인 구호를 외치고 있을 때가 많다. 이런 식으로 조직된 대오가 특정 장소에 고착되면 다른 참가자들도 움직일 수없게 된다. 시애틀 전투에서는 경찰과 AFL-CIO의 지도부가 합작해서 조직된 조합원들의 집회로 자발적인 거리시위를 "쓸어버리려"했지만 오히려 집회 대오를 더욱 확대시키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종로거리에서는 이런 일은 불가능하지만 조직된 대오가 전체를 "고착"시키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사진:참세상] 5월29일 집회

한편, 집회가 진행되면서 일부 참가자들은 휴대전화 외에 TRS(주파수공용무선통신시스템, 비교적 작은 지역에서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서로간에 의사소통을 하는데 유리하다.)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대오의 이동을 파악하고 선두에서 대오의 이동에 대해서 정보를 제공한다. 이들이 아니라도 참가자들은 서로 휴대전화로 대오의 이동경로를 파악하고 움직인다.

그러나 대오의 이동, 전술을 결정하는 것은 이들, 휴대전화나 TRS로 연결된 일부라기 보다는 참가자들의 토론이다. 집회 대오의 이동 방향을 결정해야할 때와 같이 공동의 판단이 필요한 경우 일부 단체가 리더십을 발휘하여 이른바 "깃발회의"를 소집한다. 각 참가단위의 공식성을 갖는다고 판단되는 깃발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진로를 결정한다. 완전한 네트워크 방식의 결정이다.

집회만이 아니라 함께 진행된 여러 사회운동의 방식도 이미 전례가 있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예를 들어 가장 성공적인 켐페인의 하나였던 조중동 광고주 압박 운동이 있다. 직접적으로 기업을 공격해서 정치적 성과를 얻는 방식이다. 이는 이미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던 사회운동들이 미국에서 시도하고 일정한 성과를 얻은 운동방식이다. 이들은 매사추세츠주를 압박해서 미얀마 군부정권과 거래하는 기업이 주정부와 거래하지 못하도록 하는 "선택적 구매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위계제 조직인 노조, 정당, 학생회 등의 무능이 두드러진다는 점도 연관지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지침을 기다리면서 판단하는 조직인 이들은 순발력있게 스워밍을 하지도 못하고 위계구조에 대한 집중적인 탄압에 취약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지도구심"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노동자의 눈으로"신문] ‘지도’문제 해결 없이 운동의 전진은 없다!!,
[주간 변혁산별 17호] 총체적 부실정권 이명박 퇴진
이러한 주장들은 위계적 조직의 일사분란한 지도-집행이 강력했다는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네트워에서는 그러한 위계적 조직, 지도-집행이 오히려 운동을 후퇴시킬 수도 있다는 것도 인식해야한다. 과거의 경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경험에서 배워야한다.

정권의 역-네트워

정권의 탄압은 최근 점점 강도를 높이고 있다. 집회 참가자에 대한 가혹한 벌금, 인터넷을 통해서 의견을 개진한 시민들에 대한 감청과 구속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위 현장에서는 강력한 폭력을 행사하는 체포전담조가 등장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여대생 사망설" 진상규명을 위한 신문광고에 대해서 "청년의 눈빛"이라는 네티즌을 공금유용이니 퇴폐업소 출입이니하는 식으로 공격한다.("청년의 눈빛" 본인은 경찰의 허위 사실유포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일종의 역-네트워를 실행하고 있다. 특히 네트워의 기반이 되는 인터넷 기술과 다음 아고라에 대한 공격에 집중한다. (다음은 이미 가혹한 세무조사에 시달리고 있으며 한메일은 거의 임의로, 경찰에 의해서 감청되고 있다.) 이들은 이데올로기적 공격을 가하고, 핵심적인 네티즌들과 카페운영진을 구속함으로써 운동의 허브를 타격하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쉽지는 않다. 이 운동은 책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네트워의 강점, 고전적인 방식으로 지도부를 타격해서는 진압되지 않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경찰은 최근 "적절한" 반-네트워 전술을 도입하려는 것으로 보이지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책의 저자들의 희망과는 달리 억압적 국가장치인 경찰 등은 쉽사리 네트워크 조직형태를 수용하는 것으로 변모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네트워에 대응하기 위한 지배조직의 진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조직에 자율성을 부과하는 데 한계적이고, 위계적 조직형태는 네트워에 대응하는 데 적절치 않다.


△ [사진:참세상] 경찰의 8월5일 시민연행장면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가능한 최고의 모든 물리적 수단을 동원해서 촛불집회라는 2008년 남한의 네트워를 진압하려고 할 것이다. 그럴 수록 더더욱 억압적인 수단에 의존하게 될 것인데, 이는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을 더욱 침식할 것이다.

네트워의 미래, 사회운동의 미래

이 책은 미군과 미국 정부의 전술교리 수립을 위한 연구인만큼, 모두 수용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운동의 수행전략(이를 군사적 용어로는 '교리"라고 하고 이 책은 이 용어를 쓴다)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사점들을 제공한다. 또한 촛불집회의 전술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8월5일 부시방한 반대집회는 적절한 스위밍이 실패하면서 위력적으로 진행되지 못한 측면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운동에 대해서는 그 조직화에 있어서 고전적인 방식의 위계제로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해준다. 네트워라는 강력한 운동방식을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회운동의 내부 조직자체와 운동 조직화 방식이 달라져야한다. 저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 강력한 조직형태는 핵심의 일정한 위계제와 네트워크 형태를 결합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런 방식을 고려할 수도 있다. 특히 이번 촛불집회를 경과하면서 가장 한계를 보여왔던 조직들은 가장 위계적으로 구성된 조직들이었다는 점을 상기해야할 것이다.

한편, 정권의 역-네트워 전술도 고려해볼 때, 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여러가지 조건을 함께 만들기 위한 노력이 병행되어야한다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저자들이 말하는 네트워크 운용의 다섯가지 분석수준을 참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네트워의 한계-혹은 오해에 대해서도 잊지 말아야한다. 이번 정세에서 크게 당원을 확대한 진보신당의 경우가 반면교사라 할것이다.

촛불정세를 지나면서 진중권 팬클럽 성격의 당원이 대거 입당했다. (약 3천여명 추산) 그런데 최근 <전진>이 자기들 총노선을 진보신당 게시판에 올렸다가 난리가 난 상황이다.
[관련기사 링크: 레디앙]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0596

사회주의 이념복원, 계급형성, 지역운동 등의 내용인데, 네티즌 당원들이 이게 뭐냐, 이런 반응인데다가 진중권은 <전진>을 "사회주의 찌질이"라는 식으로 비난한다. 해산하고 동아리 활동이나 하라는 식으로 선동하고 있다. 이는 촛불 이후에 급진적 사회운동을 조직하는 과정이 참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네트워를 통해 조직된 대중들을 하나의 "정치적 주체"로 형성하는 것이 자동적이지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정치적인 조직형태인 "정당"의 당원마저도 정치적 주체로 형성되지 않는다면, "정치"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렇게 되면 정치적 주체는 부재한 가운데 정부 정책과 미디어-인터넷 여론만이 존재하는 일종의 "반정치"의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좌파 운동이 이런 대중들에게도 호소력을 가질 수 있게 내용을 재구성해야하는 측면이 필요하다는 점도 인정해야겠지만, 계급성이라든가 변혁성, 그런 것들을 대중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새로운 운동주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지도 더 생각할 일이다. 그것은 네트워라는 운동양식에 대한 고려와 연관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것을 초과한다.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 강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운동이 강력한 조직형태를 갖추고 활동가들의 헌신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가들은 무정부주의자들이나 생디칼리스트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효율적인 조직가들이었기 때문에 많은 곳에서 예전의 운동을 대체하면서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적인 조직들이 네트워에 적응하면서 여전히 새로운 운동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인가는 과제로 남는다. 반대로 블랙블록같은 무정부주의자들이 다시 확산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가역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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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
글을 쓴 후에 인터넷 기사를 보니, 대책회의의 일부단체들이 815집회 이후 가두집회를 중단하고 불매운동, 인터넷 운동으로 전환하자는 입장을 관철하려 하고 있는 것같다.
관련기사 : 광복절 `마지막 거리촛불' 되나

언론플레이까지 하는 고도의 정치적 개입인데, 역-네트워의 일환으로 온건한 NGO들을 동원하는 전략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지난 6월20일 집회 당시, 청와대 면담을 추진하면서 촛불집회 축소-중단을 걸었던 일부단체들의 행태를 생각해볼 때 이러한 예상에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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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김원 외 지음 / 천권의책

 

 

"민주노조운동"의 소멸과 노동자들의 상태

 

이 책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과 현장 노동자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이미 이름만 남은 "민주노조운동"의 정치양식에 대해서 비판한다. 책이 말하는 "사라진 정치의 장소"는 더 부연하자면 "사라진 (노동자) 정치의 장소"로서의 공장과 현장, 지역을 말한다.

 

이미 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자신의 이름을 얻게된 "민주노조" 운동이 더 이상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아직도 많이 알려져있지는 않다. 민주노총-한국노총의 분할과, 또한 노동탄압 사업장, 어용노조 사업장에서 독립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실천은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노조를 만드는 것을 넘어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었던 "민주노조운동"은 결정적으로 IMF 구제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소멸했다.

 

이 책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주로 대기업노동자들은 회사와 노조에 "이중몰입"되어 있는 상태이다.(공기업에서도 마찬가지이거나 오히려 회사쪽으로 더 몰입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공기업에서 "상황의 지대"는 제조업 대공장에서 노조에 의한 것보다 오히려 회사의 성격에 의한 측면이 더욱 강하기 때문이다.)

 

실리적으로 어느 한쪽을 매순간 지지하기 때문에, 활동가들에게는 "변덕스럽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실상은 아주 합리적으로 선택한다. 제조업 대공장에서는 특히 정리해고 위기를 겪으면서 "물량 있을 때 벌자"는 의식이 팽배하고, 이것은 심지어 한 회사의 공장 간에서 물량싸움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물량을 잘 따오는 노조 대의원이 좋게 평가받는다.

 

(이런 진단은 경상대사회과학연구원의 일련의 연구작업, 예컨데 금속노동자의 생활과 의식 과 같은 책을 통해서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실리주의 타협과 그 결과

 

이런 속에서 노조(활동가)와 조합원 간에 독특한 타협이 형성된다. 노조는 실리적인 목표를 위해서 조합원을 집회, 파업에 "동원"하고 조합원은 이 동원에 응하지만 노조 활동의 평가기준(따라서 다음 집행부를 선택하는 기준)은 경제적 실리를 얼마나 쟁취하는가에 달려있다. 따라서 노조의 활동이 조합원을 대상화하거나 수동적인 동원의 대상을 삼는 것도 인정된다.

 

어차피 노조라는 조직이 임금률을 올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한 제도--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면 그것이 뭐 대수인가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일부 현장파들에게는 그 내용이 무엇이든 "전투적 투쟁"을 불러오는 것이면 무조건 정당하다는 식의 사고가 아직도 있다. 작년 현대자동차의 공장간 물량경쟁에서도 그런 시각은 드러났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상황은 역사적으로 만들어왔던 남한 노동자운동의 사회운동적, 정치적 성격을 소멸시키는 과정일 뿐 아니라, 그런 점에서 실리적인 노조운동 자체의 기반, 사회적 정당성도 침식한다. 더구나, 그 "실리"라는 것은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를 배제하면서 얻게 되는 실리, 즉 노동자 계급 분할의 대가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조합은 노동력관리의 파트너가 된다. 비정규직, 하청노동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정규직 조합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그나마 자본가들의 노동통제에 대해서 노동자 스스로의 정치 공간을 열어가던 노조운동은 스스로 또 하나의 "통치기구"가 되어간다는 것이 저자들의 지적이다. 활동가들은 이 속에서 대중들과 분할된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민주노조" 운동양식을 벗어나는 것을 생각할 수 없을 상태에서, 대중의 변화에 당혹스러워한다.

 

이런 조건에서 노조운동의 사회적 확장전략--사회운동 노조주의도 그런 주장의 하나라 할 것인데--은 무망한 이야기가 된다. 노조운동이 공장 안에 더욱 몰입하는 상황에서 그러한 노동운동 발전전략이 제기되고 확산된다는 것은, 그만큼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이기도 하다.

 

저자들은 노동조합이 민주주의, 총회(직접투표)를 통해서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무대 위에서 "시연"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러한 정당화는 노조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는 정파들의 활동과 맞물려서, 민주주의를 형해화한다.

 

저자들은 이러한 민주노조 운동 양식의 소멸 속에서, 엘리트주의적 노동문화, 가부장적 노동문화 등을 비판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현장, 정치가 발생하는 현장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다른 가능성을 찾을 것을 제안한다. 아직은 구체적인 대안보다는 제안, 그리고 그러한 사고를 열기위한 개념을 제시하는 정도의 상황이지만, 그것은 중요한 출발점이다.

 

새로운 노동자정치의 난점들

 

다만, 이 과정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우선 노동자정치의 장소는 80년대후반 이후 금융위기 이전까지의 "전형적인" 모습, 즉 (상대적을 균일한 고용형태를 가진) 제조업 대공장과 공단지역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상대화되고 오히려 각종 서비스 노동, 비공식 노동이 확산되면서 정치의 장소는 물리적으로도 분산되고 있다. 이 속에서 노동자들 사이에 통합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정치가 가능한 공간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오히려 그 공간은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의 반란이라고도 볼 수 있는 촛불집회-인터넷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는 매우 한계적이다.)

 

더 큰 문제는, (저자들도 지적하고 있지만) 남한에서는 노동자 계급문화라는 것이 형성되어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노동계급이라는 게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 이건 단지 노동자운동이 활발하지 못하고 혹은 조직률이 낮다는 문제가 아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고유한 문화(영국노동자들의 선술집pub, 축구 훌리건같은 것들, 독일 숙련노동자들의 장인문화, 이탈리아 북부 공업지대 노동자들의 "붉은 벨트")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대대적인 파괴 이후 , 근대적 노동자인구 재형성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그렇다면, 공장안에서 고유한 문화를 만드는 것도, 그것에 기반해서 노동자정치를 구상하는 것도 훨씬 힘든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노동조합의 정치만 판을 치는 상황이다.)

 

그래서, 노동자정치의 장소를 찾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일 수 있다. 그것은 노조에서 문화행사를 잘 해서 만들어내는(그럴 수도 없지만) 회사-노조 문화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장기간의 정치적-문화적 실천을 통해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장기적 실천이라고 해도, 구체적인 실천은 시급히 시작되어야한다.) 

 

가상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때

 

특히 (여러가지 이유에서) 그러한 정치의 장소를 공장 안에서만이 아니라 지역차원에서 형성하고자하는 입장에서는 그러한 정치적 실천은 매우 긴요하면서도-어려운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하지만, 이것은 어떤 노동자운동을 형성하고자하는가라는 질문과 동행해서 함께 생각해야할 문제임은 분명하다.

 

"민주노조" 운동양식의 소멸 상황, 즉 우리가 하고 이른바 "민주노조운동"이라는 대상이 이미 없는 상태에서 가상을 바라보면서 운동하는 것도 이제 더 이상은 불가능해진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그나마 "민주노총"이라는 상징으로 "민주노조운동"이라는 가상을 유지해왔지만, 이제는 그 물질적 조직 조건도 소진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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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내 친구 빈센트


내 친구 빈센트
박홍규 지음 / 소나무

 

 

* 불안정노동철폐연대 기관지 <질라라비> 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다소 거칠긴 하죠.

 

 

광기 혹은 예술? 빈센트 반 고흐.


보통은 중고등 학교 교과서에서 몇 번 그림을 보았거나 유명하다고 알려져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귀를 절단한 미친 화가로 기억된다. 그러나 여튼, 많이 알려져있고 그의 그림을 어떤 식으로든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의 그림을 찬찬히 보기 시작하면, 영혼의 상처들, 작열하는 태양과 대지,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하는 사람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그곳, 노동하는 사람이 가지는 어떤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 노동자들의 시선은 어느 지점에서 고흐의 눈빛과 만날 수 있게 된다. 비록 저임금과 고용불안의 고통 속에 있더라도,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행위로서의 “노동”이라는 것에서 말이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 빈센트 반 고흐는 역사상 위대한 “노동하는 사람의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광기로 소개되었던 어떻든, 그의 진실에는 노동자의 눈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빈센트의 삶

 

이 책의 제목에 “고흐”라는 그의 성이 아니라, “빈센트”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은 그가 일관되게 자신의 그림에 빈센트라는 이름만으로 서명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떤 권위적인 이름이 아니라 익명의 감상자들에게조차 친근한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한 것은 어떤 계기였을까?
바로 벨기에 탄광촌에서 선교를 하면서 비참한 탄광노동자들의 삶을 접하고부터였다. 그는 종교적 열정에 이끌려 선교를 목적으로 탄광에 갔지만, 이내 비참하게 착취당하는 탄광노동자의 삶을 접하고 충격을 받는다. 탄광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났을 때 지원하기도 하고, 탄광노동자와 똑같이 입고 굶주리고 지낸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당시에 쓴 편지는 마치 프랑스의 사실주의 걸작, 탄광노동자들의 삶과 파업투쟁을 그린 에밀졸라의 <제르미날>의 한 구절을 보는 것같다.


그 초기 시기에 가장 돋보이는 그림은 잘 알려진 <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이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

 

노동하며 거칠어진 사람들의 손, 그 손으로 캐낸 감자를 먹고 있는 가난한 농민 가족의 모습이다. 이 속에 바로 삶과 노동이 있다. 빈센트는 바로 노동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고자했다.
그의 그림이 가장 생명력을 잃은 것은 역설적으로 가장 그림그리기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 파리 거주 시기였다. 당시 유행하던 인상파 화가들의 기법을 흉내내기도 했지만, 그것은 지금 보기에도 “아, 이건 고흐의 그림이야”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가 그림을 그려야할 곳은 다른 장소였다.

 

아를, 태양의 고장에서

 

프랑스 남부의 아를은 지금도 온통 하얗게 햇빛이 가루처럼 부서지는 곳이다. 끝없이 밀밭이 펼쳐진 아를로 내려간 빈센트는 그 곳에서 풍경과 함께 농민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빈센트의 그림은 다시 태양으로 가득차고, 가난한 농민들의 삶이 등장한다. 그러나 단지 고달픈 고통으로서 노동만은 아니다. 오히려 생명이 가득한 곳에서 생명을 키우고 거두는 존재가 바로 노동하는 농민들이다.

그림의 양식 속에도 그런 점은 반영되어 있는데, 고흐의 단순한 양식은 어떤 “추상화”의 일환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단순화라고 할 수 있다. 고상한 귀족들의 생활을 묘사하는 데 거친 붓터치와 강렬한 원색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거친 손과 팔뚝,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농민을 그리기 위해서는 바로 그것이 필요하다.


고흐는 자신도 바로 그런 존재로 그렸다. 그의 잘 알려진 많은 초상화들이 그렇다. 자화상에서 그의 눈빛은 19세기 후반 부르조아 사회의 가식을 견딜 수 없었던 영혼의 고통, 그리고 강렬한 태양을 함께 담고 있다.

 

자화상(1889)

 

보통사람 빈센트

 

글쓴이 박홍규 교수는, 이 책을 통해서 보통사람으로서의 빈센트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광기”라고 평가되는 그의 강렬한 작품은 오히려 그의 노동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이해하지 못한 부르조아 미술계의 오해일 뿐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빈센트의 삶의 여정과 그의 작품이 분리될 수 없다는, 어쩌면 아주 당연하지만 대부분 잊혀지고 마는 사실을 꼼꼼히 보여준다. 그런 오해들을 벗겨내면 빈센트의 작품을 그의 삶과 함께 마주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비참하게 착취당하고, 예술이 부르조아적 가식의 장식이 되었던 시기에 고통스러웠던 예술가의 작품에 대해서 말이다. 지금이라도 그것이 크게 다른 상황일까?

그래서 마치 우리에게는 먼 어떤 다른 세계의 예술인 것처럼 생각되었던 위대한 한 예술가를, 노동자들이 자신의 시각으로 보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우리 문명의 가장 위대한 예술적 성과 중 하나를, 그 주인인 노동자들이 다가가고 이해하고 감동할 수 있는 권리를 찾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 1888>

 

반 고흐의 그림에는 유령도 없고, 환영도 없고, 환각도 없다.
그것은 오후 두 시에 내리비치는 태양의 작열하는 진실이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작가 앙토넹 아르토가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작년말과 올해초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된 “반고흐展”의 한쪽 벽면에 있던 문구이기도 하다.) 그가 본 ‘태양의 작열하는 진실’을 그림과 함께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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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


진보적인 노동법 학자이면서 인문학의 고전인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하기도 했던 박홍규 선생이 쓴 책이다. 예술가에 대한 독특한 사회과학적 분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은, 그러면서도 오히려 예술적 감상을 더욱 진실하게 만들어준다. 이 꼭지의 주제가 “내게 가장 좋은 책”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이 책은 그런 이름에 걸맞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가장 좋은 (예술에 관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같다.


이 책 외에도 본문에 언급한 앙토넹 아르토의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빈센트의 서한집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와 같은 책도 매우 감동적일 뿐 아니라 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기회가 될 때, 그의 작품을 직접 보는 것이 좋은 데 안타깝게 최근의 전시회는 올해 2월말까지 진행되었다. 당분간은 국내에서는 화보와 화면을 통해서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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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브레이브 스토리

아래 포스터에 겁먹은 표정의 소년이 와타루 미타니, "브레이브 스토리"라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다. (네권짜리 원작소설도 있고 열몇권짜리 만화책도 있는 데 우리나라에도 출간되어 있다.) 몇몇 극장에서 상영중.

RPG게임의 전개방식을 차용하기도 한 이 작품은,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지난번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볼 때처럼, 내가 여전히 하나의 소녀이거나 소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어른이 되기는 아직 좀 먼 것일까. 하지만 늦게 어른이 되어가서 좋은 점도 있다. 여전히 영화를 보고, 울기도 하면서 좀 더 클 수 있다. 그리고 좀 다른 측면에서는 작품 속의 상징들을 더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점이랄까.



"용기는 빵점, 체력은 평균"
포스터에 나온 이 구절은 와타루에게 환계(幻界)의 도사가 한 말이다. 굳이 이런 말이 아니라도, 보는 내내, 와타루, 넌 참 나와 비슷하구나, 생각한다. 아버지는 집을 나가서 이혼하고 어머니는 아파서 쓰러진 와타루는, 성공하면 자신이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여행-모험을 환계(환상계, 따라서 상상계)로 떠난다. 실패하면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모든 것을 걸어야하는 모험이다. 와타루의 소원은 가족의 복원.

이건, 부모가 이혼한 소년의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이혼한 어른들을 위한 영화이기도 한 것같다. 그 결정적인 모험이 하나의 여행이고, 그 장소가 상상계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현실(세)계로 돌아올 수 없는 위험이 있는 장소다. 사실 내가 작년에 헤어지고 떠난 여행의 장소는, (물리적으로는 유럽대륙이었지만) 바로 그 상상계였던 셈이다. (제대로 돌아왔는지는 솔직히 말해서, 전혀 확실치 않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제는 실재계로 "어떻게 돌아와야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하게됐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여행을 떠난 와타루가 만난 것은 어떤 것들일까? 구체적인 형상을 띠고 인격을 갖춘 온갖 상징들이다. 먼저 여행을 떠난 친구 미츠루는 외롭지만 내면이 강하다. 중간중간, 그리고 마지막 장면들에서 작가는, 무엇이 강한 것인지를 다시 묻는다.

원하는 대로 운명을 바꾸어 준다는, 운명의 여신을 만나기 위한 마지막 시험에서, 와타루와 미츠루는 또 다른 자신을 만난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부정적인 면, 아니 그 보다 슬퍼하는 자신을 만나고 싸운다.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와타루가 그 자신을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보듬어 안아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신과 싸우고, 결국 그 가슴에 칼을 꽂는 미츠루와 다른 점이다.) 무엇보다 작년, 가장 힘들었던 어떤 시점에 나는 일기에 이렇게 썼던 것이다. "내가 나를 보듬어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야", 라고.



그것이 자신과 싸우는 "또다른 자신을 살해하는", 그래서 결국  "자신"을 살해하는 미츠루와 다르다. 그러나 나는 또 한편으론 그 동안 내 마음을 얼마나 살해하려고 했는지 생각한다.(그래서 나는 혹은 우리 모두는 와타루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어느 정도는 미츠루이기도 한 것이다.) 백무산 시인은 <인간의 시간>에 실린 시, "마음을 살해하다"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러면 죄악이란 무엇이겠느냐
눈에 보이는 것들 살아있는 것들
다 쏴죽이고서
그 시체들이나 잔뜩 쌓아두고 있는
마음이여
너를 살해한다

백무산 시인에겐 죄송하지만, 나를 살해하는 대신, 품어주고 싶다고, 위로해주고 싶다고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나서 만난 운명의 여신에게, 와타루가 말한 소원은 애초에 생각했던 그것이 아니었다. (나도 작년에 얼마나 그 운명의 여신 Fortuna에 몰두했었는지, 심지어 유럽 여행지에 유명한 박물관에서 마다 그리스 조각상에서 Fortuna를 일부러 찾았던 것이다.) 그 대신, 억지로 바꾸려고 했던 운명 때문에 다른 이들이 고통받는 상황을 끝내달라고 이야기한다.(환상계의 친구들을 위한 소원이다) 운명(의 여신)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던 거다. 자신의 운명에 스스로 대면하는 것. 바로 나의 운명에.

그래서, 용기는 빵점인 소년 와타루의 이야기에 제목이 브레이브 스토리 Brave Story가 된 사정을 이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용기란, 무서운 괴물, 적들을 대면하는 것만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을 대면할 수 있는 것, 품어줄 수 있는 것, 자신의 운명에 스스로--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것, 그리고 타자를 만나고 고통을 공감할 줄 아닌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운명에 마주했을 때, 비로소 와타루는 환계(상상계)를 구하고, 그곳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원했던 것, (정상)가족의 복원이 아니라도, 여전히 살아갈 수 있다.

(상상계에서 오히려 실재계에서 보다 더 진실한 자신을 만날 수 있다는 역설이란! 주체들은 사실 실재계보다는 상상계 속에 있기 때문일까?, 또는 진정한 용기는 상상계를 추악한 마물들로부터 구하는 그 행위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자신의) 상상계를 구하는 와타루의 행위는 자신을 보둠어주는 행위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렇게 난삽하게 이야기하다보니, 오히려 맥빠지고 밋밋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애니에는 이런 얘기들은 안 나오니 안심들 하시길, 쓰고 나서 보니, 이 글은 애니의 구체적인 장면들을 증류시키면 이렇게 김빠진 술처럼 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랄까. 생생하게 살아있는 와타루의 모험을 함께 하다보면, 내가 굳이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생각하게 될 내용이다.


* 주제곡도 좋다.
動かせる足があるなら 向かいたい場所があるなら
움직일 수 있는 다리가 있다면 가고 싶은 장소가 있다면
この足で歩いてゆこう
이 다리로 걸어 가자





決意の朝に
(결심의 아침에)

Artist : Aqua Timez

作詩:太志 作曲:太志

どうせならもう ヘタクソな夢を描いていこうよ
기왕이면 서투른 꿈을 꾸면서 가자
どうせならもう ヘタクソで明るく愉快な愛のある夢を
기왕이면 서투르고 밝고 즐거운 사랑이 있는 꿈을
「気取んなくていい かっこつけない方がおまえらしいよ」
「신경 안써도 돼. 폼 안잡는 쪽이 너 다워서 좋아」

一生懸命になればなる程 空回りしてしまう僕らの旅路は
열심히 하면 할 수록 헛도는 우리들의 여행은
小学生の 手と足が一緒に出ちゃう行進みたい
초등학생 때 손과 발이 동시에 나가는 행진 같아
それもまたいいんじゃない? 生きてゆくことなんてさ
그것도 좋지 않아? 살아 간다는 건
きっと 人に笑われるくらいがちょうどいいんだよ
분명, 다른 사람에게 비웃음당할 정도가 딱 좋아

心の奥の奥 閉じ込めてた本当の僕
마음의 안의 나. 가둬 두었던 진짜 나
生身の36度5分 飾らずにいざwe don't stop
몸의 36도 5부. 허세 부리지 말고 we don't stop
けどまだ強がってるんだよ まだバリアを張ってるんだよ
하지만 또 강한 척 하고 있어. 또 방어막을 치고 있어
痛みと戦ってるんだよ
아픔과 싸우고 있어

辛い時 辛いと言えたらいいのになぁ
괴로울 때 괴롭다고 말하면 될 텐데 말야
僕達は強がって笑う弱虫だ
우리들은 강한 척하며 웃는 겁쟁이야
淋しいのに平気な振りをしているのは
외로운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것은
崩れ落ちてしまいそうな自分を守るためなのさ
무너질 것 같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야

僕だけじゃないはずさ 行き場のないこの気持ちを
나 뿐만이 아닐거야. 갈 곳이 없는 이 기분을
居場所のないこの孤独を
있을 곳이 없는 이 고독을
抱えているのは…
안고 있는 것은…

他人の痛みには無関心
다른 사람의 고통에는 무관심
そのくせ自分の事となると不安になって
그런 주제에 자신의 일이 되면 불안해 하고
人間を嫌って 不幸なのは自分だけって思ったり
인간을 싫어해. 불행한 것은 자신뿐이라 생각해
与えられない事をただ嘆いて 三歳児のようにわめいて
가지지 못한 것을 단지 한탄하면서 3살짜리처럼 우는
愛という名のおやつを座って待ってる僕は
사랑이라는 이름의 과자를 앉아서 기다리는 나는
アスファルトの照り返しにも負けずに
아스팔트의 열에도 지지 않고
自分の足で歩いてく人達を見て思った
자신의 다리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깨달았어
動かせる足があるなら 向かいたい場所があるなら
움직일 수 있는 다리가 있다면 가고 싶은 장소가 있다면
この足で歩いてゆこう
이 다리로 걸어 가자

もう二度とほんとの笑顔を取り戻すこと
이제 두번 다시는 진정한 웃는 얼굴을 되찾을 수는
できないかもしれないと思う夜もあったけど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밤도 있었지만

大切な人達の温かさに支えられ
소중한 사람들의 따뜻함에 도움 받아
もう一度信じてみようかなと思いました
다시 한번 믿어 볼까 하고 생각 했어
                     
辛い時 辛いと言えたらいいのになぁ
괴로울 때 괴롭다고 말하면 될 텐데 말야
僕達は強がって笑う弱虫だ
우리들은 강한 척하며 웃는 겁쟁이야
淋しいのに平気な振りをしているのは
외로운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것은
崩れ落ちてしまいそうな自分を守るためだけど
무너질 것 같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지만

過ちも傷跡も 途方に暮れ べそかいた日も
잘못도 상처도 어찌할 바 모르고 울상 짓고 있던 날도
僕が僕として生きてきた証にして
내가 나로서 살아간 증거로서
どうせなら これからはいっそ誰よりも
기왕이면 이제부터 아예 누구보다도
思い切りヘタクソな夢を描いてゆこう
마음껏 서투른 꿈을 꾸며 가자
言い訳を片付けて 堂々と胸を張り
변명을 정리해버리고 당당히 가슴을 펴고
自分という人間を 歌い続けよう
자신이라는 인간을 계속 노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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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앙토넹 아르토 지음, 조동신 옮김 / 도서출판 숲


 

반 고흐의 그림에는 유령도 없고, 환영도 없고, 환각도 없다.

그것은 오후 두 시에 내리비치는 태양의 작열하는 진실이다.

 

얼마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끝난 <반 고흐 展>, 한쪽 벽에 인용된 문구다. 앙토넹 아르토, 이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63쪽)

 

그러나 그 "작열하는 진실"은 역설적으로 "광기"로 취급되었다. 아르토가 이 책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1947년 당시 파리에서 열린 전시회 직후에 한 정신과 의사(베르와 르르와)가 고흐는 광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쓴 책 때문이다. 여전히, 60여년 지난 이곳에서도 고흐는 "광인 화가"로 이해되고 있다. 그림보다, 몇몇 (그의 광기를 증명하는) 극적인 에피소드들이 잘 알려져있고, 그래서 고흐는 예술가의 "광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어떤 인물로 이해된다.

 

반 고흐는 최고의 명석함을 지닌 사람들 중 하나로서,

어떤 경우에도 앞날을 멀리, 사실들의 즉각적이고 명백한 실재성보다

멀리, 무한하고 위험할 정도로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47쪽)

 

그렇다. 그래서, 고흐는 그 눈으로 그림을 그렸고, 그림들은,

심장에 단도를 찔러넣는 것처럼, 붓으로 진실의 진실의 심장을 꺼내 보여주는 것이다. 피가 흐르는 채로,

그래서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없는 충격과 당혹스러움을 안겨준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Wheatfield with Crows, 1890,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하물며 자살의 경우라면 육체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끊는,

이 자연에 반하는 행동을 결심하기 위해서라면

나쁜 인간의 대무리가 있어야한다. (110쪽)

 

아르토가 보기에는 고흐를 "치료"하려했던 정신과 의사 가셰가 그 대무리의 앞장에 섰던 사람이다. 그는 고흐에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리"라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라니! 이 정신과의사 양반은 진실이란 것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마치 한 공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아르토는 고흐가 "까마귀들"(위의 그림 말이다.) 이후 반 고흐가 단 한점이라도 더 그림을 그렸다고 믿을 수없다고 말한다. 나도 그 그림 앞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비록 그림 밑의 해설에는 그것을 확증할 수는 없다고 쓰여있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생명으로 가득 찬 죽음이다. 고흐의 죽음은 그의 영혼에 필연적이었다기 보다는 갑작스런 중단. 그것은 그의 영혼에 "강요된" 것이다.

 

광인이라고? 반 고흐가?

언젠가 인간의 정면을 바라볼 줄 알게 된 자

반 고흐가 그린 초상화를 바라보라. (105쪽)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Autoportrait au chapeau de paille 1887,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얼마전 서울전시회에 전시되었다.


고흐의 자화상을 보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나는 이처럼 압도적인 힘으로 인간의 얼굴을 탐색하고,

반박할 수 없는 인간의 심리학마저 도마 위에 올려놓듯

해부할 줄 알 정신병 의사를 전혀 알지 못한다.

반 고흐의 눈은 대천재의 것이다. (107쪽)

 

고흐의 태양에서 직접 내려온 것같은 눈빛은 바라보는 사람의 안구를 통해 영혼에 날아 꽂힌다. 그리고는 그것을 흔들고, 따가운 햇빛 아래 드러낸다. 마치 해부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것은 잊을 수 없는 강력한 충격이다. 어떤 정신과 의사도 고흐의 자화상, 그 눈빛처럼 보는 사람의 영혼을 자신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의사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이런 이유로, 자화상 앞에서는 그 눈빛이 바라보는 각도에서 다리가 굳어지고 마는 것이다.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 해도, 어디에서 이런 경험에 또 가능하겠는가.

 

그래서 반 고흐를, 그의 작품을 보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모험이다. 이 책의 아르토에게 모두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더라도, 고흐에 대해서는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

동생은 얼마 전 이 책을 먼저 보고 나서 며칠 후에 함께 갔던 <반 고흐 展>을 혼자서 훌쩍 한번 더 가고 말았다. 나도 서울의 전시회가 끝난 3월15일 전에 이 책을 보았더라면 한 번 더 갔었을 것이다. 땅을 칠 일이지만, 차라리 암스테르담에 언젠가는 한 번 더 가보자고 생각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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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에 대해 읽지 않은 책

겨울철쭉님의 [[독서]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에 관련된 글.

그래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용기를 얻어,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한다.
물론, 들어는 본 책(Heard Book ; HB)이라 할 것인데, 그 들어본 곳도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인 만큼 여러모로 궁합이 맞는다고나할까.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책이다.  이렇게 생겼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상수 옮김, 배미정 그림 / 신세계북스

바야르에 따르면, 이 책은 진짜 책보다 오히려 더 창조적인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유령 책"의 존재를 보여준다. 주인공인 고양이가 바라보는 인물 중 '금테안경을 쓴 미학자'는 '신경성 위염인 주인'에게 과감하고 뻔뻔스러우면서도 사실은 그리 거짓말이라 할 수도 없을 이야기를,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대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런 "유령책"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고양이가 나오는 다른 작품이다. 사실 소세키의 책과 별로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고양이가 주인공이면서 어떤 "사람"인 주인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고양이 주인공은 여전히 고양이들의 사회와 단절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아마 이 작품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그 나라의 작품이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아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설정을 "창조적으로" 애니에서 반복하는 것이랄까. (역시 신카이 마코토에게도 이 책은 FB이거나 SB였을 것이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彼女と彼女の猫

(불과 5분도 안되는 길이의 애니다.)

다시 보니, 생각했던 것처럼 신카이 마코도 감독은 익숙한 소재들--소나기위, 핸드폰, 여름의 냄새와 햇빛, 전철, 심지어 이별과, 초조한 상태를 나타내는 그 배경음악까지--을 다음 작품(별의 목소리), 다음다음다음 작품(초속5Cm)에까지 다시 등장시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역시,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 작품이 유일하다.

그러면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을 보거나 그 이야기를 듣는 주인을 갖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그녀의 고양이"가 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뭐, "그녀의 고양이"조차도 썩 가망이 없다면  고양이가 되는 것은 별로 매력적이지도 않는 일인 것같으니, 차라리 내가 직접 이렇게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나은 것같다.

여튼, 이렇게 읽지 않은 책을 통해서 전혀 다른 종류의 텍스트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읽지 않은 책이라도 충분히 유익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된다. 뭐, 믿거나 말거나. 이상,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대한 심심풀이 짧은 임상실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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