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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조운동"의 소멸과 노동자들의 상태
이 책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과 현장 노동자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이미 이름만 남은 "민주노조운동"의 정치양식에 대해서 비판한다. 책이 말하는 "사라진 정치의 장소"는 더 부연하자면 "사라진 (노동자) 정치의 장소"로서의 공장과 현장, 지역을 말한다.
이미 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자신의 이름을 얻게된 "민주노조" 운동이 더 이상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아직도 많이 알려져있지는 않다. 민주노총-한국노총의 분할과, 또한 노동탄압 사업장, 어용노조 사업장에서 독립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실천은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노조를 만드는 것을 넘어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었던 "민주노조운동"은 결정적으로 IMF 구제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소멸했다.
이 책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주로 대기업노동자들은 회사와 노조에 "이중몰입"되어 있는 상태이다.(공기업에서도 마찬가지이거나 오히려 회사쪽으로 더 몰입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공기업에서 "상황의 지대"는 제조업 대공장에서 노조에 의한 것보다 오히려 회사의 성격에 의한 측면이 더욱 강하기 때문이다.)
실리적으로 어느 한쪽을 매순간 지지하기 때문에, 활동가들에게는 "변덕스럽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실상은 아주 합리적으로 선택한다. 제조업 대공장에서는 특히 정리해고 위기를 겪으면서 "물량 있을 때 벌자"는 의식이 팽배하고, 이것은 심지어 한 회사의 공장 간에서 물량싸움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물량을 잘 따오는 노조 대의원이 좋게 평가받는다.
(이런 진단은 경상대사회과학연구원의 일련의 연구작업, 예컨데 금속노동자의 생활과 의식 과 같은 책을 통해서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실리주의 타협과 그 결과
이런 속에서 노조(활동가)와 조합원 간에 독특한 타협이 형성된다. 노조는 실리적인 목표를 위해서 조합원을 집회, 파업에 "동원"하고 조합원은 이 동원에 응하지만 노조 활동의 평가기준(따라서 다음 집행부를 선택하는 기준)은 경제적 실리를 얼마나 쟁취하는가에 달려있다. 따라서 노조의 활동이 조합원을 대상화하거나 수동적인 동원의 대상을 삼는 것도 인정된다.
어차피 노조라는 조직이 임금률을 올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한 제도--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면 그것이 뭐 대수인가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일부 현장파들에게는 그 내용이 무엇이든 "전투적 투쟁"을 불러오는 것이면 무조건 정당하다는 식의 사고가 아직도 있다. 작년 현대자동차의 공장간 물량경쟁에서도 그런 시각은 드러났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상황은 역사적으로 만들어왔던 남한 노동자운동의 사회운동적, 정치적 성격을 소멸시키는 과정일 뿐 아니라, 그런 점에서 실리적인 노조운동 자체의 기반, 사회적 정당성도 침식한다. 더구나, 그 "실리"라는 것은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를 배제하면서 얻게 되는 실리, 즉 노동자 계급 분할의 대가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조합은 노동력관리의 파트너가 된다. 비정규직, 하청노동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정규직 조합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그나마 자본가들의 노동통제에 대해서 노동자 스스로의 정치 공간을 열어가던 노조운동은 스스로 또 하나의 "통치기구"가 되어간다는 것이 저자들의 지적이다. 활동가들은 이 속에서 대중들과 분할된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민주노조" 운동양식을 벗어나는 것을 생각할 수 없을 상태에서, 대중의 변화에 당혹스러워한다.
이런 조건에서 노조운동의 사회적 확장전략--사회운동 노조주의도 그런 주장의 하나라 할 것인데--은 무망한 이야기가 된다. 노조운동이 공장 안에 더욱 몰입하는 상황에서 그러한 노동운동 발전전략이 제기되고 확산된다는 것은, 그만큼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이기도 하다.
저자들은 노동조합이 민주주의, 총회(직접투표)를 통해서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무대 위에서 "시연"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러한 정당화는 노조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는 정파들의 활동과 맞물려서, 민주주의를 형해화한다.
저자들은 이러한 민주노조 운동 양식의 소멸 속에서, 엘리트주의적 노동문화, 가부장적 노동문화 등을 비판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현장, 정치가 발생하는 현장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다른 가능성을 찾을 것을 제안한다. 아직은 구체적인 대안보다는 제안, 그리고 그러한 사고를 열기위한 개념을 제시하는 정도의 상황이지만, 그것은 중요한 출발점이다.
새로운 노동자정치의 난점들
다만, 이 과정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우선 노동자정치의 장소는 80년대후반 이후 금융위기 이전까지의 "전형적인" 모습, 즉 (상대적을 균일한 고용형태를 가진) 제조업 대공장과 공단지역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상대화되고 오히려 각종 서비스 노동, 비공식 노동이 확산되면서 정치의 장소는 물리적으로도 분산되고 있다. 이 속에서 노동자들 사이에 통합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정치가 가능한 공간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오히려 그 공간은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의 반란이라고도 볼 수 있는 촛불집회-인터넷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는 매우 한계적이다.)
더 큰 문제는, (저자들도 지적하고 있지만) 남한에서는 노동자 계급문화라는 것이 형성되어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노동계급이라는 게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 이건 단지 노동자운동이 활발하지 못하고 혹은 조직률이 낮다는 문제가 아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고유한 문화(영국노동자들의 선술집pub, 축구 훌리건같은 것들, 독일 숙련노동자들의 장인문화, 이탈리아 북부 공업지대 노동자들의 "붉은 벨트")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대대적인 파괴 이후 , 근대적 노동자인구 재형성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그렇다면, 공장안에서 고유한 문화를 만드는 것도, 그것에 기반해서 노동자정치를 구상하는 것도 훨씬 힘든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노동조합의 정치만 판을 치는 상황이다.)
그래서, 노동자정치의 장소를 찾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일 수 있다. 그것은 노조에서 문화행사를 잘 해서 만들어내는(그럴 수도 없지만) 회사-노조 문화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장기간의 정치적-문화적 실천을 통해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장기적 실천이라고 해도, 구체적인 실천은 시급히 시작되어야한다.)
가상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때
특히 (여러가지 이유에서) 그러한 정치의 장소를 공장 안에서만이 아니라 지역차원에서 형성하고자하는 입장에서는 그러한 정치적 실천은 매우 긴요하면서도-어려운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하지만, 이것은 어떤 노동자운동을 형성하고자하는가라는 질문과 동행해서 함께 생각해야할 문제임은 분명하다.
"민주노조" 운동양식의 소멸 상황, 즉 우리가 하고 이른바 "민주노조운동"이라는 대상이 이미 없는 상태에서 가상을 바라보면서 운동하는 것도 이제 더 이상은 불가능해진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그나마 "민주노총"이라는 상징으로 "민주노조운동"이라는 가상을 유지해왔지만, 이제는 그 물질적 조직 조건도 소진되는 중이다.
* 불안정노동철폐연대 기관지 <질라라비> 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다소 거칠긴 하죠.
광기 혹은 예술? 빈센트 반 고흐.
보통은 중고등 학교 교과서에서 몇 번 그림을 보았거나 유명하다고 알려져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귀를 절단한 미친 화가로 기억된다. 그러나 여튼, 많이 알려져있고 그의 그림을 어떤 식으로든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의 그림을 찬찬히 보기 시작하면, 영혼의 상처들, 작열하는 태양과 대지,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하는 사람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그곳, 노동하는 사람이 가지는 어떤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 노동자들의 시선은 어느 지점에서 고흐의 눈빛과 만날 수 있게 된다. 비록 저임금과 고용불안의 고통 속에 있더라도,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행위로서의 “노동”이라는 것에서 말이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 빈센트 반 고흐는 역사상 위대한 “노동하는 사람의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광기로 소개되었던 어떻든, 그의 진실에는 노동자의 눈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빈센트의 삶
이 책의 제목에 “고흐”라는 그의 성이 아니라, “빈센트”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은 그가 일관되게 자신의 그림에 빈센트라는 이름만으로 서명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떤 권위적인 이름이 아니라 익명의 감상자들에게조차 친근한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한 것은 어떤 계기였을까?
바로 벨기에 탄광촌에서 선교를 하면서 비참한 탄광노동자들의 삶을 접하고부터였다. 그는 종교적 열정에 이끌려 선교를 목적으로 탄광에 갔지만, 이내 비참하게 착취당하는 탄광노동자의 삶을 접하고 충격을 받는다. 탄광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났을 때 지원하기도 하고, 탄광노동자와 똑같이 입고 굶주리고 지낸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당시에 쓴 편지는 마치 프랑스의 사실주의 걸작, 탄광노동자들의 삶과 파업투쟁을 그린 에밀졸라의 <제르미날>의 한 구절을 보는 것같다.
그 초기 시기에 가장 돋보이는 그림은 잘 알려진 <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이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
노동하며 거칠어진 사람들의 손, 그 손으로 캐낸 감자를 먹고 있는 가난한 농민 가족의 모습이다. 이 속에 바로 삶과 노동이 있다. 빈센트는 바로 노동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고자했다.
그의 그림이 가장 생명력을 잃은 것은 역설적으로 가장 그림그리기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 파리 거주 시기였다. 당시 유행하던 인상파 화가들의 기법을 흉내내기도 했지만, 그것은 지금 보기에도 “아, 이건 고흐의 그림이야”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가 그림을 그려야할 곳은 다른 장소였다.
아를, 태양의 고장에서
프랑스 남부의 아를은 지금도 온통 하얗게 햇빛이 가루처럼 부서지는 곳이다. 끝없이 밀밭이 펼쳐진 아를로 내려간 빈센트는 그 곳에서 풍경과 함께 농민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빈센트의 그림은 다시 태양으로 가득차고, 가난한 농민들의 삶이 등장한다. 그러나 단지 고달픈 고통으로서 노동만은 아니다. 오히려 생명이 가득한 곳에서 생명을 키우고 거두는 존재가 바로 노동하는 농민들이다.
그림의 양식 속에도 그런 점은 반영되어 있는데, 고흐의 단순한 양식은 어떤 “추상화”의 일환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단순화라고 할 수 있다. 고상한 귀족들의 생활을 묘사하는 데 거친 붓터치와 강렬한 원색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거친 손과 팔뚝,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농민을 그리기 위해서는 바로 그것이 필요하다.
고흐는 자신도 바로 그런 존재로 그렸다. 그의 잘 알려진 많은 초상화들이 그렇다. 자화상에서 그의 눈빛은 19세기 후반 부르조아 사회의 가식을 견딜 수 없었던 영혼의 고통, 그리고 강렬한 태양을 함께 담고 있다.
자화상(1889)
보통사람 빈센트
글쓴이 박홍규 교수는, 이 책을 통해서 보통사람으로서의 빈센트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광기”라고 평가되는 그의 강렬한 작품은 오히려 그의 노동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이해하지 못한 부르조아 미술계의 오해일 뿐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빈센트의 삶의 여정과 그의 작품이 분리될 수 없다는, 어쩌면 아주 당연하지만 대부분 잊혀지고 마는 사실을 꼼꼼히 보여준다. 그런 오해들을 벗겨내면 빈센트의 작품을 그의 삶과 함께 마주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비참하게 착취당하고, 예술이 부르조아적 가식의 장식이 되었던 시기에 고통스러웠던 예술가의 작품에 대해서 말이다. 지금이라도 그것이 크게 다른 상황일까?
그래서 마치 우리에게는 먼 어떤 다른 세계의 예술인 것처럼 생각되었던 위대한 한 예술가를, 노동자들이 자신의 시각으로 보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우리 문명의 가장 위대한 예술적 성과 중 하나를, 그 주인인 노동자들이 다가가고 이해하고 감동할 수 있는 권리를 찾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 1888>
반 고흐의 그림에는 유령도 없고, 환영도 없고, 환각도 없다.
그것은 오후 두 시에 내리비치는 태양의 작열하는 진실이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작가 앙토넹 아르토가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작년말과 올해초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된 “반고흐展”의 한쪽 벽면에 있던 문구이기도 하다.) 그가 본 ‘태양의 작열하는 진실’을 그림과 함께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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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
진보적인 노동법 학자이면서 인문학의 고전인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하기도 했던 박홍규 선생이 쓴 책이다. 예술가에 대한 독특한 사회과학적 분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은, 그러면서도 오히려 예술적 감상을 더욱 진실하게 만들어준다. 이 꼭지의 주제가 “내게 가장 좋은 책”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이 책은 그런 이름에 걸맞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가장 좋은 (예술에 관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같다.
이 책 외에도 본문에 언급한 앙토넹 아르토의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빈센트의 서한집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와 같은 책도 매우 감동적일 뿐 아니라 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기회가 될 때, 그의 작품을 직접 보는 것이 좋은 데 안타깝게 최근의 전시회는 올해 2월말까지 진행되었다. 당분간은 국내에서는 화보와 화면을 통해서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반 고흐의 그림에는 유령도 없고, 환영도 없고, 환각도 없다.
그것은 오후 두 시에 내리비치는 태양의 작열하는 진실이다.
얼마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끝난 <반 고흐 展>, 한쪽 벽에 인용된 문구다. 앙토넹 아르토, 이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63쪽)
그러나 그 "작열하는 진실"은 역설적으로 "광기"로 취급되었다. 아르토가 이 책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1947년 당시 파리에서 열린 전시회 직후에 한 정신과 의사(베르와 르르와)가 고흐는 광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쓴 책 때문이다. 여전히, 60여년 지난 이곳에서도 고흐는 "광인 화가"로 이해되고 있다. 그림보다, 몇몇 (그의 광기를 증명하는) 극적인 에피소드들이 잘 알려져있고, 그래서 고흐는 예술가의 "광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어떤 인물로 이해된다.
반 고흐는 최고의 명석함을 지닌 사람들 중 하나로서,
어떤 경우에도 앞날을 멀리, 사실들의 즉각적이고 명백한 실재성보다
멀리, 무한하고 위험할 정도로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47쪽)
그렇다. 그래서, 고흐는 그 눈으로 그림을 그렸고, 그림들은,
심장에 단도를 찔러넣는 것처럼, 붓으로 진실의 진실의 심장을 꺼내 보여주는 것이다. 피가 흐르는 채로,
그래서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없는 충격과 당혹스러움을 안겨준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Wheatfield with Crows, 1890,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하물며 자살의 경우라면 육체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끊는,
이 자연에 반하는 행동을 결심하기 위해서라면
나쁜 인간의 대무리가 있어야한다. (110쪽)
아르토가 보기에는 고흐를 "치료"하려했던 정신과 의사 가셰가 그 대무리의 앞장에 섰던 사람이다. 그는 고흐에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리"라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라니! 이 정신과의사 양반은 진실이란 것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마치 한 공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아르토는 고흐가 "까마귀들"(위의 그림 말이다.) 이후 반 고흐가 단 한점이라도 더 그림을 그렸다고 믿을 수없다고 말한다. 나도 그 그림 앞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비록 그림 밑의 해설에는 그것을 확증할 수는 없다고 쓰여있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생명으로 가득 찬 죽음이다. 고흐의 죽음은 그의 영혼에 필연적이었다기 보다는 갑작스런 중단. 그것은 그의 영혼에 "강요된" 것이다.
광인이라고? 반 고흐가?
언젠가 인간의 정면을 바라볼 줄 알게 된 자
반 고흐가 그린 초상화를 바라보라. (105쪽)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Autoportrait au chapeau de paille 1887,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얼마전 서울전시회에 전시되었다.
고흐의 자화상을 보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나는 이처럼 압도적인 힘으로 인간의 얼굴을 탐색하고,
반박할 수 없는 인간의 심리학마저 도마 위에 올려놓듯
해부할 줄 알 정신병 의사를 전혀 알지 못한다.
반 고흐의 눈은 대천재의 것이다. (107쪽)
고흐의 태양에서 직접 내려온 것같은 눈빛은 바라보는 사람의 안구를 통해 영혼에 날아 꽂힌다. 그리고는 그것을 흔들고, 따가운 햇빛 아래 드러낸다. 마치 해부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것은 잊을 수 없는 강력한 충격이다. 어떤 정신과 의사도 고흐의 자화상, 그 눈빛처럼 보는 사람의 영혼을 자신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의사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이런 이유로, 자화상 앞에서는 그 눈빛이 바라보는 각도에서 다리가 굳어지고 마는 것이다.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 해도, 어디에서 이런 경험에 또 가능하겠는가.
그래서 반 고흐를, 그의 작품을 보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모험이다. 이 책의 아르토에게 모두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더라도, 고흐에 대해서는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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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얼마 전 이 책을 먼저 보고 나서 며칠 후에 함께 갔던 <반 고흐 展>을 혼자서 훌쩍 한번 더 가고 말았다. 나도 서울의 전시회가 끝난 3월15일 전에 이 책을 보았더라면 한 번 더 갔었을 것이다. 땅을 칠 일이지만, 차라리 암스테르담에 언젠가는 한 번 더 가보자고 생각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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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무시무시하지만 재밌는 만화군여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