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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다시 발전을 요구한다(장하준)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
장하준.아일린 그레이블 지음, 이종태.황해선 옮김 / 부키
 
"장하준의 발전주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가능한가"
 
발전주의 : 진보주의자들의 시대착오
  
장하준 교수는 <나쁜 사마리아인>, <사다리 걷어차기>에 이어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발전주의를 옹호한다.
 
최근 국방부의 "불온도서" 선정으로 인해 더욱 부각되고 있지만 장하준 교수는 "진보언론"과 "진보주의자"들에게 인기있는 저자였다. 우석훈 교수는 이번 국방부 "불온도서" 보도 이후 언급에서 장하준 교수에 대해 "중도 우파 학자로 후기 케인스주의자와 제도학파, 그리고 독일 역사학파 어딘가에 있는 사람"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장하준 교수의 주장에 동조하는 진보주의자들의 경제정책, 이념적 포지션이 어디에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 비판과 더불어 발전주의 경제정책을 제안한다. 저자들이 제안하는 "구체적" 경제정책에 따라 다시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는 "장하준의 경제정책 매뉴얼"이다. 이 책을 매뉴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경제학 에세이를 "매뉴얼"이라 주장하다니 위트도 있으시다)
 
책의 핵심 주장은 "개발도상국의 성공담은 잘 설계된 국가 개입 프로그램에 따른 것이다"(24)라는 것. 이런 주장은 책 전체에 일관되게 반복된다. 내가 경제학도도 아니고 꼼꼼히 분석-비판할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이러한 핵심주장들과 언급된 내용을 중심으로 언급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장하준 교수의 주장은 신자유주의자가 아닌 좌파의 시각에서도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다.
 
개입주의 옹호
   
이런 논지에서 저자는 다양한 형태의 개입주의를 옹호한다. 이와 함께 성공한 반주변의 사례로 동아시아의 여러나라를 제시하고 있다.(그러나 상당히 선택적이라는 점은 아래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 반주변 국가의 성공담, 혹은 발전주의 시대의 이야기에서 장하준 교수는 원인과 결과를 도치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50~60년대의 세계자본주의의 호황으로 인해 케인즈주의 정책이 가능했다. 금융억압도 한편으로는 위기 탈출을 위한 브레튼우즈 체제의 선택이었지만 비금융-산업부문을 통해 충분히 이윤율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세계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지자 바로 케인즈주의 정책과 금융억압도 위기에 빠진다. 케인즈주의가 위기에 빠지고 금융이 자유화되었기 때문에 70년대의 세계자본주의의 위기가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찬반을 떠나 명백한 역사적 사실인데, 저자들은 이를 간단히 무시하고 넘어간다.
 
게다가 세계적 발전주의가 가능한 것으로 보였던 50~60년대에는 실제로 주변-반주변-중심부의 경제적 격차가 다소 축소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70년대 이후에는 다시 확산된다. 이는 주변-반주변의 발전이 세계자본주의의 동학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왜냐하면 저자들의 관심사는 오직 발전주의 정책을 수행할 대상인 주변-반주변 국가들(저자들은 비록 "개발도상국"이라는 표현을 쓰지만)이기 때문이다. 세계자본주의의 변동은 따라서 관심밖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따라서 이 지점,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동학을 무시하고 발전주의의 부활을 주장할 수 있는가에 있다. 19세기초에 영국이, 19세기말에 독일과 미국이, 50~60년대에 동아시아가 할 수 있었다고 해서 무역장벽과 개입주의가 지금도 가능한가 혹은 그것을 통해서 발전이 가능한가라는 문제다.
 
동아시아의 역사에 대한 자의적 해석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 대한 무시는 동아시아의 성공에 대한 분석에서도 드러난다. 저자들은 동아시아의 상대적 성공--우리도 인정할 수 있듯히 남한과 대만은 20세기에 서 반주변으로 상승한 매우 예외적인 케이스다--은 개입주의 경제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냉전으로 인한 요인을 지적하는 것은 오히려 신자유주의자의 주장이라고 서술한다. 동아시아의 성공은 반공발전주의의 성공이지만, 그 성공은 두가지 요인을 무시할 수 없다.
 
하나는 냉전으로 인한 미국의 역개방 정책이다. (마셜플랜의 원조 대신, 미국은 동아시아에 시장을 개방한다. 그런데 저자들은 이러한 전략으로 인한 적은 원조규모를 오히려 동아시아가 특권적이지 않았다는 논거로 사용한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에서는 수출지향 공업화가 성공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일본을 정점으로 하는 국제적 하청생산구조이다. 이는 미국처럼 법인자본이 직접 진출하지 못하는 일본 자본주의의 취약성으로 인한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동아시아 주변-반주변 국가의 산업기반 형성을 촉진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각 국의 경제정책은 일본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자는 아예 언급되지도 않는다.
 
경제발전이 순전히 민족국가의 경제정책-전략의 결과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요인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저자들에게는 이런 요인들은 거의 고려 대상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또 한편으로 이와 연괸되어서, 저자들은 개별 국가의 독자적인 금융정책이 가능하다고 전제한다. 물론 어렵지만 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기는 하지만, 과연 개별 국가의 금융정책을 "발전주의적으로" 수립하는 것으로 실제 정책효과가 가능할까? 오히려 주변-반주변은 상시적인 금융위기에 노출되어 있는데, 이는 개별국가 정책의 문제라기 보다는 국제금융정책의 문제이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무역-금융정책을 변화시켜야한다. 말하자면 WTO와 FTA를 막아내고 국제협약으로 토빈세를 도입하는 것이다.
 
물론 개별국가의 대응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예를 들어 97~98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과정에서 남한과 말레이지아의 대응방식은 크게 달랐고, 이에 따라 경제위기의 강도와 사회적 부의 유출 정도 등이 많이 달랐다. 그러나 이를 다른 영역까지 일반화해서, 이러한 개입주의를 통한 발전전략이 가능하다고 말하기에는 곤란하다.
 
단적으로, 말레이지아는 금융위기의 충격을 덜 받았지만 남한보다 경제가 더 성장했는가는 물어보아야한다. 말레이지아와 같이 금융통제를 하는 것이 의미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발전과 경제성장의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신흥시장과 금융세계화에서도 배제된 지역
   
한편, 저자들은 신흥시장emerging market의 예를 들면서 경제성장이 오히려 민간자본을 유인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금융자본의 유인정책을 사용하기 전에 생산성을 높여야한다고 지적한다. 크게 틀린 지적은 아닐 수 있지만 한 걸음 더 나가야한다. 왜 특정한 국가들만 금융투자의 대상이 되는 "신흥시장"이 되는가? 왜 어떤 나라들(아프리카와 같은)은 금융시장에서도 배제되는가?
  
그것은 신흥시장에 대한 민간자본의 투자가 단지 경제성장 정책을 옹호하는 논지로만 언급될 수는 없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신흥시장이란 상대적으로 경제활동이 활발한 반주변 국가들에 대한 금융착취 매커니즘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계화에서도 배제된 아프리카와 같은 "버려진 지역"은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른 틀에서 접근해야한다.
 
발전주의는 반복될 수 있다?
  
저자들의 지적처럼, 역사적으로 발전주의 정책을 잘 활용했던 일부 민족국가들이 성공하기도 했던 것은 사실이다. 선별적 산업정책, 금융통제, 생산유치 및 일정한 보호무역 등은 그러한 성과를 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특수한 시기(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 특수한 지역(동아시아)에서 가능했던 것이라는 점을 함께 언급해야한다. 그렇다면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여전히 그러한 정책들이 가능할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그런 시간-공간에서조차 주변-반주변-중심부의 위계를 도약하는 민족국가는 20세기 내내 거의 없었다. 주변-반주변의 공업화가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반주변의 발전이라기 보다는 공업활동의 주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위계를 흔들지 않을 뿐 아니라, 경제의 구조적 종속을 지속적으로 강화한다. ("발전주의의 환상: 반주변의 재개념화", 아리기 - <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과천연구실세미나9> 중) 그렇다면 특정 산업의 확대가 발전주의의 성공으로 언급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과 같은 접근은 마치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도 현명한 민족국가의 발전전략이 있다면 그러한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위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주장의 정치적 결론은, 주변-반주변에서 발전주의 국가를 다시 수립하는 것이 된다. 개별 민족국가들은 유능한 전략(이른바 '발전비전')을 수립하고 실행할 수 있는 정부를 구성하는데 집중해야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결론을 국제적으로는 물론 남한에서도 적용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는 "미친 경제학자들"의 독특한 발명품이 아니라 위기에 빠진 세계자본주의의 금융세계화를 위한 정책, 전략, 이데올로기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단순히 신자유주의 교리를 비판하고 대안정책을 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대응을 불러온 위기를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접근한다면, 오히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로 인해) 필연적으로 경제위기와 금융화를 불러오는 자본주의 세계체계를 변혁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주변, 반주변의 개별국가들이 현명한 경제정책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미국발 금융위기와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를 막을 수는 없다.
  
민족국가의 대응은 의미가 없는가?
 
그렇다면, 이런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체계 전체를 변혁하는 것이 난망한 마당에, 각 민족국가별로라도 대안이 있어야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주장. 그러한 금융위기가 예상될 수록 민족국가별 대안이 필요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대안을 위한 지역적이고 국가적인 경제정책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남미의 ALBA(아메리카를 위한 볼리바르 대안)와 같은 대안무역구조 구축전략은 의미가 있다. 여기서 지적하고자하는 것은 그러한 민족국가 혹은 지역적 차원의 대안을 발전주의 전략으로 부를 수도 없고, 그러한 발전주의 전략이 성공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이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필요한 것은 유능한 관료들에게 정권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정권을 민주화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남미 국가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좌파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야 지역적 대안을 논의할 수 있었다. 반주변은 급속한 공업화로 인해 노동자 인구가 형성되는 과정과 함께, 권위주의 정권의 일방적인 발전전략 추진에 반대하는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이 폭발해왔다. 따라서 반주변에서 이러한 체제변혁의 확산이 민족국가 차원에서나 지역적 차원에서나 세계적 차원에서나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막아내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오히려 대안세계화와 대안무역
  
이러한 민족국가적이고 지역적인 대안형성과 함께, 국제적 금융자본의 이동을 통제하고 무역자유화를 저지해야한다. 이러한 운동은 개별 민족국가(들)의 정책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국제적인 사회운동을 필요로 한다. 민족국가-지역-세계 각각의 차원에서 대안세계화운동이 전개되는 것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폐해를 막아내는 다소간 유일한 정치적 경로라고 할 것이다.
  
개별민족국가에서 유능한 관료들이 발전주의 정책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러한 민족국가 간의 경쟁은 결국 세계적 금융위기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개입정책을 중시하는 발전주의 정책을 운용한다고 해도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독립된 민족국가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족국가는 오히려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유기적인 구성단위이자 효과이다.)
 
덧붙이자면, 장하준 교수 등이 주장하는 발전주의 정책으로는 지구적 생태위기를 해결할 수도 없다는 점을 지적해야한다. 적어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대안무역체계의 형성과 대안세계화는 자본주의 경제구조의 생태적 모순을 폭로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공간을 열어줄 수 있다. 그러나 개별 민족국가의 발전주의는 생태위기를 더욱 심화할 뿐이다. 저자가 긍정적인 예로 드는 중국은, 산업발전과 함께 엄청난 에너지와 자원을 소비하고 생태위기를 부추기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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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발전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아래 두 권의 책을 참고하는 것이 의미있다.
  
조반니 아리기 외 지음, 이미경 외 옮김 / 공감
 
다이앤 엘슨 외 지음, 과천연구실 엮음 /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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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여 : 공공부문 구조조정과 관련하여
  
 한편, 장하준 교수는 공공부문의 사유화는 반대하지만 구조조정과 기업화된 운영방식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것은 공공부문을 발전주의 정책을 수행하는 데 활용해야하는 섹터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공공부문의 사유화와 구조조정, 그리고 노무현 정권 시기에 강화된 시장화된 운영--공기업의 경영혁신지침, 경영평가 등으로 강요된다--을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공공성과 보편성 때문이다.
  
물론, 경제정책을 수행하는 데 있어 SOC 산업의 효율화는 필요하겠지만, 여전히 발전주의의 시각에서 공공성은 부차적이며, 국가의 경제정책의 유효성을 높여주는 한에서만 사유화를 반대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장하준 교수의 주장은 그렇기 때문에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이 주장하는 공공성과는 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노조운동은 이러한 주장을 섣불리 수용해서는 안된다.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실제로 장하준 교수 식의 주장이 공식-비공식적으로 수용되는 추세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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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F3일차]노동운동,정의의 무기로 부활하라

오늘(자정이 지났으니 이미 어제군) 사회운동포럼이 사회운동총회와 폐막행사로 모두 마무리되었다. 많은 사람들(워크샵들에 연인원 2500명이 했다고 한다)이 함께 했고 의미있는 쟁점들을 논의했다. 마지막날 모습과 결산은 이 다음 글에 올리는 것으로 하고, 일단 3일차 이야기를 해보자. 박래군 집행위원장이 참세상에 인터뷰한 것처럼, “안 갔으면 후회할” 행사였다고 평가.

 

[특별강연] 피터 워터만 ; 노동운동, 정의의 무기로 부활하라

 

워터만은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개념을 제기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대안세계화 운동의 일부로서 노동자운동의 미래를 생각해보자는 제안이다. 노동자운동이 보편적인 해방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급진적 사회운동, 국제적 정의운동과 동행해야한다는 점, 이 속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 등을 강연에서 언급했다.

 

워터만이 하나의 경향으로 강조한 것은 최근 우리 운동에서도 관심이 높아지는 “지역”과 관련된 부분이다.

워터만은 노동운동과 지역운동(community)과의 연대를 말한다.(community, 통역한 동지는 '지역운동'이라고 번역했지만 한편으로는 '지역공동체'라고 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중심부-주변부 모두에서 이러한 경향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가 다른 것에 종속되는 방식이 아니라 상호이익, 상호보완의 관계로서.

 

특히 남아공, 남미, 미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운동을 예로 든다. 작년 미국의 메이데이 시위를 보라, 이것은 가장 빈곤하고 소외된 이주노동자의 운동이었는데, 노조가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오히려 이주노동자 공동체들) 조직화되지 않은, 조직화 될 수 없는 노동자들이 공세적으로 진출하고 노동자운동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역시 우리나라에서도 제기되는 쟁점 ; 비공식노동자 등이 노동조합으로 조직화되는 것이 맞는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혹은 노조로 조직된 것만 노동자운동인가?) 워터만은 “노조 형태가 아니더라도 어떤 자치적인 조직방식도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취약한 층의 노동자들이 기존의 노조 조직 안에서도 억압될 수 있으며, 자신의 전략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인도의 노점상을 예로 드는데 이들은 노조 조직 안에 있기도 밖에 동시에 있기도 하다. 미국노총은 이주노동자 네트워크를 조직하기도 했다.(이주 일용직 노동자들을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한 합의)

 

이러한 고민은 불안정노동자, 이주노동자, 비공식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기존의 노조형태가 아니라도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민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만한 쟁점이다. 이랜드 비정규직노동자를 조직한 지역운동(민주노동당의 지역조직)과 이랜드 월드컵 분회가 분별되지 않은 어떤 조직형태-조직화전략도 고민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이날 저녁 지역운동 워크샵에서 논의된 주제이기도 하다.)

 

워터만은 조직화된 노동자를 넘어선 보편적 운동, 조직화 전략이 노동자운동에 필요하다고 강조하는데, 노조를 넘어서는 조직화 방식에 대한 언급은 이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기존의 노조를 넘어선 확장되고 유연한 (조직화)전략이 필요하다는 점.

 

그밖에도 세계사회포럼에서 노동자운동의 위치, 인종주의 반대운동으로서 노조의 역할 등등 쟁점이 더 있었다. 아마도 발제문이 사회운동포럼 홈페이지에는 올라갈 것같으니 참고들 하시라.

 

** 벌써 올라왔네 ; 피터 워터만 초청 강연자료 링크

 

“사회변혁적 노동운동”

 

노동자운동과 관련해서는 사회운동포럼의 중심워크샵이었던 자리. 나는 사회진보연대 토론자 역할을 맡았다. 주발제는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 김진억 국장.

 

전반적으로 노조가 경제주의적 투쟁, 기업 사업장에 갇힌 투쟁을 넘어서 사회변혁적, 사회운동적 성격을 복원하는 것의 중요성을 확인했다. 그런 점에서 노동운동의 보편적 해방운동으로서 성격을 회복해야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위한 이념적 대안, 대안세계의 이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페미니즘, 국제주의의 결합하고 또한 실천적으로, 사회공공성 운동, 사회운동의 의제로의 확장 등도 필요하다는 등의 논의가 진행되었다.


사회변혁적 노동운동이라는 개념은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라는 개념이 한노사연 류의 소개로 인해 논란이 되고 있는 측면, 정치적 지향을 보다 강조해야한다는 측면을 고려해서 선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워크샵에서는 새로운 노동자운동을 위한 조직적 대안들도 언급되었는데 토론에서 깊이 논의되지는 못했다. 이후 논의 필요한 부분일텐데, 노동자 사회운동체 혹은, 노동운동-사회운동의 안정적 지역적 네트워크(연대구조) 같은 것들.

 

한편, 내가 주로 제기한 쟁점들은 토론문을 참조할 수 있다. 다운받기;링크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여러 “의제”들을 노조에 도입하는 것인가?

 

한편, 토론 과정에서 사회운동노조주의가 마치 노조에 여러 가지 운동의 ‘의제’를 도입하자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해될 경우 사회운동적 노조운동을 제안하면 현장활동가들은 "다양한 운동을 하기에는 노조도 힘들다, 지금하는 투쟁으로도 가랑이 찢어진다"는 식의 반응이 나오게 된다.

 

심지어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제기하는 것이 민주노총 1기 집행부의 “사회개혁적 노동운동”과 같은 것 아니냐는 식의 발언도 나온 상황. 토론자였던 노동전선의 김태연 씨의 토론 중 발언인데, 대단히 불쾌한 일이다. (예를 들어 새흐름이나 사회진보연대가 “사회운동노조주의”를 주장한다고 “비판”하면서도) 정작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혹은 알면서도 왜곡한다고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것을 통해서 제기하고자하는 것은 노동자운동이, 특히 노조가 이익집단이 아니라 사회운동이어야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운동은 대안세계화운동, 워터만의 표현으로는 지구적 정의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운동이 자기 사업장의 경제적 이익을 수호하는 활동을 넘어서, 보편적인 해방운동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 반드시 노조의 이념도 혁신되어야하는데, 특히 남성노동자만을 노동자운동의 주체로 규정하고, 민족국가 안에서 타협을 추구했던 역사를 넘어서 페미니즘과 국제주의라는 보편적 요소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페미니즘과 국제주의를 제기하는 것은 노동자운동을 보편적 해방운동으로 만들기위해서, 역사적인 보편적 해방운동이었던, 그러나 현재는 실패-소진된 역사적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을 개조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좀 더 쟁점적으로 말하자면, 노조가 백화점식으로 사회단체들의 운동에 모두 결합하자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정세에 따라서 결합할 필요가 있는 공장밖 운동의제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운동에 대한 강조는 <사회공공성 투쟁을 제기하면서 많은 비노조 운동의제를 “도입”하자는 주장>과 경향적으로 혼동된다는 점을 이번 토론에서도 확인하게 된다.

 
노조들의 경제주의, 기업별 이기주의에 비판적인 활동가들은 그 돌파구를 공장밖 운동의제인 다양한 사회운동 혹은 소비자-시민으로 조합원들이 마주치는 문제들을 상대하는 ‘사회공공성’ 의제(교육, 의료, 교통 등)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다른 대안이 딱히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대안이념, 변혁전망 자체가 취약해진 현실을 반영한다.) 이러한 활동가들의 문제의식은 현재 노조운동의 문제를 지적하는 데서는 정당하지만 한걸음 더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히려 공장 안-밖에서 동시에 보편적인 해방을 위한 실천을 하는 것이 문제다. 그것은 어떤 시기에는 이랜드비정규직 지원을 위한 현장조직화 운동일 수도 있고, 평택미군기지 반대투쟁일 수도 있고 한미FTA반대 투쟁일 수도 있다.(이랜드비정규직 연대투쟁은 노조에게 사회운동이 아닌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노조 안에서도 사회"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지침"에 따라 간부들 집회참석하는 것을 넘어서 조합원들을 상대로 이랜드비정규직 지원, 연대를 위한 말그대로 "운동"을 벌여야한다.)

 

사회운동으로 노조를 개조하자는 주장을 노조 외부에서 ‘의제들의 도입’으로 생각하게 되면, 사회운동-노조운동의 관계에 있어서도 다소 도식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운동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 대중조직이 보편적 운동이라는 쟁점이 아니라 △사회운동단체라는 조직들과 노조라는 조직들의 조직간 관계의 문제로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제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대중운동 스스로 운동의 확장이라기보다는 “연대단위”를 불러오는 것으로 이해된다. (첫날 대토론회에서 제기되었던 문제가 반복되는 셈이다.) 하지만 오히려 대안세계를 만들기 위한 사회운동들을 (외부적 결합이라기 보다는) 노조운동 안에 도입하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제기하는 맥락은 노동자운동이 보편적 성격을 회복하고, 경제주의/현장주의를 넘어서 대안세계를 건설하기위한 운동에 나서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개념이 가진 어떤 한계가 있다는 생각도 하게된다.

 

용어의 성격 때문인지 다양한 운동의제들을 병렬적으로 도입하자는 식으로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특히 우리운동 지형에서는 '사회운동'이 '비노조 사회운동 단체들의 운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히다보니 더욱 그런 측면이 있다. 따라서 주장하는 바를 잘 드러내는 다른 용어를 쓸 수도 있고, 이번 워크샵에서 사용한 "사회변혁적 노동운동"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념적 대안?

 

울산에서 온 어떤 활동가는 “볼세비즘도 아니고 사민주의도 아니라면 어떤 길인가”라고 묻는다. 한편에서는 구사회주의권의 몰락과 운동이 가져왔던 역사적 한계, 한편에서는 시공간적으로 우리에게 적용불가능한 사민주의가 아닌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을 반성하면서 어떻게 새로운 보편성을 가지는 대안적 사회를 구성하는 운동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문제제기가 핵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사회공공성과 같은 쟁점을 넘어설뿐더러 “노동해방”, “사회변혁”이라는 것이 그냥 외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해야하는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 질문은 앞으로 계속 될 필요가 있다.

 

한편, 토론과정에서 플로어에서는 자본주의 위기와 체제붕괴를 예상하는 것은 (1) 몇 년 전부터 항상 하던 이야기 이거나 (2) 파국론이다라는 식의 문제제기도 있었다.


2010년대 전자본주의적 금융위기에 대한 예상은 신자유주의 경제비판을 통해서 도출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경제적 분석을 정세분석에 어떻게 반영하는가가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냥 ‘위기가 올 것이다’라고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전제로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 분석에 따른 정세예측이 ‘파국론’은 아닌데, 이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우리가 맞을 객관적 위기라는 제한조건 속에서 운동주체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 이와 관련해서는 사회운동포럼 노동운동 사전워크샵 중 2차, "세계자본주의와 한국자본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참고할 수 있다.

 

사회운동과 정치운동, 지역운동의 쟁점들


* 이 부분은 오전과 저녁에 있었던 지역운동워크샵의 내용이다. 쟁점과 내용이 좀 되는 만큼 별도의 글에서 따로 언급하는 것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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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세계화와 노동자운동(2)-금융세계화에 대한 지역적 차원의 대응전략

태국에서 열렸던 아래 회의에 대한 이어지는 두 번째 이야기.(7월15~17)

Understanding Global Finance, Bulilding International Resistance

국제금융의 이해, 국제적 저항 건설

 

지난 번에는 주로 중국에 대한 쟁점, 이번에는 금융세계화에 대한 지역적 차원의 대응전략에 대해서 논의된 것들과 시사점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또 이와 관련해서 심상정, 권영길 등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들의 정책을 살펴봅시다.

 

변화하는 금융세계화

 

금융세계화의 정세는 변화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10년전 아시아에서 시작된 외환위기의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도 있고, IMF가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집행기구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자본주의도 변할뿐더러 신자유주의도 변화합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만드는 위기의 양상도 말이죠.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위기의 심화 속에서 무엇이 위기인지, 그것에 어떤 대응을 해야할지를 사고하는 데 중요하겠죠. 10년전 남한의 사회운동이 IMF에 대한 의미있는 반대투쟁을 “전혀” 조직하지 못했던 것을 반성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민주노총은 “민족적인 위기” 극복을 위해 노사정합의를 통해서 정리해고, 파견제와 같은 IMF의 요구조건을 자기 손으로 합의해주었고 그 후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IMF 협약이 강제된 다른 반주변 국가들의 사회운동과도 크게 다른 모습이었죠)

 

우선 IMF의 역할이 크게 약화되고 있고 “금융세계화”와 그것이 강제하는 구조조정의 주도적인 행위자도 교체되는 과정에 있다는 점들이 지적되었습니다. (물론 IMF는 애초에 브레튼우즈 체제에서는 금융자본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이기는 했지만 70년대 이후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 금융시장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정책을 국가들이 시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요구의 제안자로 역할을 전환했죠. 지금은 사실상 정책지원기관으로 변신했습니다.)

 

(아직도 아프리카나 카리브 지역에서는 영향력이 남아있지만) IMF의 악명높은 구조조정 때문에 많은 주변, 반주변 국가들이 서둘러 구제금융을 상환하고 정책적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 대중적인 저항으로 인해 신뢰성이 약화되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강제하는 주도적인 행위자는 오히려 금융시장의 법칙, 사적 금융자본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각 국가들은 금융시장의 등락에 눈치를 살피면서 정책을 ‘알아서’ 조정하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반대투쟁으로서 국제금융기구에 대한 투쟁은 다른 것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이것은 마치 다자간 무역협상--WTO, GATS 등--이 양자간 무역협상--FTA--로 전환되면서 무역자유화에 대한 투쟁의 대상이 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겠죠)

 

또 한편, 위기의 양상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금융위기가 통화위기의 형태로 발발한 이후에 지역적인 수준에서 최소한 통화위기는 막기 위한 장치들이 개발되고 강화되고 있습니다. 아시아 지역 같은 경우에도 아세안+3(중,한,일) 틀을 통해서 양자간 외환지원 장치인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가 구성되고, 최근에는 IMF의 지역판이라고 할 만한 아시아통화기금(AMF)를 구성하는 것을 합의했다고 합니다.(98년 직후에는 AMF가 IMF를 약화시킬 것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구성되지 못했는데, 2007년 현재의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을 다시 보여주는 방증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시아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달러화가 각국의 외환보유고로 쌓여있는 만큼(다른 나라들도 경쟁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죠) 다음 금융위기는 외환위기의 형태가 아닌 것으로 닥칠 수도 있다는 점. 그렇다면 그에 대응도 다른 방식일 겁니다.(다음 위기의 형태가 무엇일지는 공부를 더 해봐야할 것같네요;;) 그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같고, 그러한 위기가 운동을 수세에 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정세는 머지 않아서 다시 귀환할테니까.

 

금융세계화에 대한 지역적 대안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CMI, AMF의 창설은 아시아 지역차원에서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공동의 대응을 의미합니다. 이는 금융세계화의 파괴적인 불안정으로부터 각국의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죠. 예를 들어 98년 직후에는 운동진영의 어느 분파에서도 AMF창설이 필요하다고 요구했을 정도로(물론 당시에 김종필도 언급했던 적이 있죠;) 지역적 차원에서 의미있는 시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제어하기 위한 것으로 만들어지기 보다는 “안전한” 금융세계화를 촉진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대해서는 IMF가 했던 것처럼 주로 일본자본의 이해에 따라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강제하는 행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어떤 구체적인 대안을 내더라도 그것과 유사하거나 심지어 동일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요구할 것인지가 쟁점일 텐데, 최근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흥미로운 쟁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권영길 캠프의 정책

 

권영길 후보의 정책 중에 유사하게 살펴볼 부분이 있고, 심상정 의원의 정책이 가장 구체적입니다. 노회찬 후보 정책에는 아예 부재한 대목입니다. (국제관계에 대해서는 노회찬 후보 정책에는 언급이 없군요.)

 

심상정 후보의 경우 “동아시아 호혜경제- ‘Social Asia’를 향해”라는 제목으로 정책이 제시됩니다. “글로벌 경쟁 심화에 따른 국가양극화, 패권국가의 일방적 지배를 방지하고, 호혜적 분업체계에 기초한 지역공동체(regional community) 건설”을 중심으로 “역내평화와 호혜적 경제발전을 꾀하려면 처음부터 차이를 해소해야 하고, 이를 위해 ‘Social Asia’를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 시민사회 교류프로그램과 아시아 사회헌장(Asia Social Chapter) 채택 △ 개발과 인프라구축, 기술발전에서 국가간 공조와 지원을 강화 △ 동아시아 지역발전기금(ODA)을 조성하고, 달러 통화체제를 대신하는 아시아통화체제(AMF) 등 역내 금융체제 구축.

 

심상정 후보의 정책은 이제까지 단지 국내 혹은 대북관계 정도의 사고에 머물고 무역과 금융에 대해서 사고하지 못했던 운동진영의 한계를 넘어서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특히 단지 지역차원의 통화안정 프로그램 혹은 노무현 정권이 말하는 “동북아시대”프로젝트와 달리 민족국가 사이의 호혜평등한 관계, 사회적 교류를 강조하는 부분은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문제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앞선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것은 운동적 요구라기 보다는 국가의 전략적 정책에 가깝다는 것이죠. 이것은 대선이라는 공간의 고유한 효과일텐데, 어떤 후보도 (이미 국가의 정부를 수권하기 위한 후보로 표상된 이상) 국가전략 수준의 정책을 낼 수밖에 없다는 점. 예를 들어 AMF 구상과 같은 것인 현재 구성이 합의된 AMF와 사실상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또 노무현 정권의 동북아시대 전략이라는 것과 사실상 차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심상정 후보 쪽에 정태인씨가 관계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 그런 맥락일 겁니다.) 그것이 다른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이 아시아 지역의 “정세”가 문제가 됩니다.

 

말하자면 동아시아는 남미가 아니고 따라서 ALBA와 같은 대안이 동아시아에서 그대로 가능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남미의 경우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쿠바가 있지만, 아시아에는 그렇지 않을뿐더러 중국은 그러한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힘들죠. 게다가 아시아는 역사적 경험으로 인한 민족국가 간의 대립은 물론, 일본을 정점으로 해서 남한, 대만, 홍콩, 싱가폴과 중국과 동남아시아가 수직적으로 결합된 하청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럴 듯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대안이 가능하기 위한 운동들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어쩌면 심상정 후보 정책의 문제는 운동이 없는 상태에서 정책대안이 먼저 제시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그렇다면 오히려 운동들이 문제겠죠) 심상정 후보의 정책은, 사회운동의 주체들이 국가전략을 제시하고자할 때 처하는 위험을 드러내주고 있을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대안적인 지역협력체제, 대안적 국가 간 관계의 형성의 난점을 드러내줍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할 부분도 여전히 있습니다. 이번 회의를 주도적으로 이끈 월든 벨로는 이 회의에서 CMI, AMF 같은 것들이 지역차원의 ‘정치의 공간’을 연다는 측면에서, 그것에 개입할 수 있고/해야하기 때문에 의미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라면 달리 생각해볼 지점도 있지요.)

 

이에 비해서 권영길 후보 쪽의 정책은 더 심각합니다. 많은 부분에서 부르조아 국가전략과 사실상 아무런 구분도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북방대륙 경제권 개척으로 제4의 세계경제권 주도”라든가, 이를 위한 역내 국가들의 외환보유고 공동사용과 같은 정책이 있습니다. 주변, 반주변의 발전을 위해서 외환보유고를 사용하자는 제안이 위기에 처한 금융체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스티글리츠(리버럴들)의 것이라는 점은 지난 글에도 언급한 점이 있지만, “북방경제권”을 언급하는 것은 이미 일본 자본에 선점된 동남아가 아니라 다른 경제공간을 찾아가자는 식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최소한 민족국가간 호혜평등한 발전 지원이나 사회적 교류를 전제한 심상정 후보 쪽보다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것은 아시아 지역의 금융, 무역의 대안이라기 보다는 아제국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발전전략인데, 노무현의 동북아시대 전략에 한걸음 더 다가가 있습니다.

 

“노동중심경제체제”라는 것을 제안하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지식기반경제”를 들고 있는데는 아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식기반경제라는 것은 생산으로부터 이탈한 금융자본의 자유로운 투기운동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일 뿐 아니라, 90년대 중반 이후 팽창한 IT 산업의 이데올로기이고 따라서 남한에서 98년 이후 짧은 금융적 팽창(~2002년 경까지) 시기에 “빅뱅”을 경험한 IT 벤처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입니다. 우석훈 박사는 권영길 후보의 비전이 “벤처 사장들의 북방 개척론”이라고 비판적으로 표현하는 데 가장 적절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그 벤처사장들은 짜증나는 '디 워'의 심형래처럼 이른바 반지성주의 "신지식인"들이죠.)
* 레디앙 기사 참고 :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7148

 
지역마다 다를 분기점, 신자유주의 이후

 

그렇다면 이렇게 아시아 지역에 대해서 제시되는 대안들이 다 문제가 있다고 하면 “대안이 뭐냐” 이렇게 비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저도 대안이 없다는 것이 솔직한 말인데, 다만 대안들이 “가능한 조건”을 생각해보는 것이 지금 가능한 최대한이라고 할 수밖에요.

 

앞서 말한 대로 남미의 알바(ALBA 미주대륙 볼리바르대안)와 민중무역협정(trade treaty of people; Tratado de Commercio entre los Pueblo: TCP) 같은 대안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현재의” 동아시아 정세에서는 말하기 힘들 뿐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AMF 같은 것을 이야기해서는 지역적 수준에서도 진행되는 금융화에 대해서 무비판적으로 될 수 있다는 점은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오히려 현재 정세에서 가능한 것은, 각 민족국가의 사회운동들이 지역차원의 대안을 “합의”할 수 있는 토론이 필요하다는 점, 이를 통해서 어떤 전략들이 어떤 민족국가(들)의 발전전략이 아니라 대안적인 지역적 협력체제를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매우 취약한 (특히 남한의 사회운동에는 더욱 취약한) 아시아 지역의 사회운동의 강화된 사회운동 네트워크와 토론이 필요합니다. (아시아 지역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취약한 것은 사실인데, 지역별로 진행되는 세계사회포럼의 프로세스도 아시아가 가장 취약하죠.)

 

그리고 각 민족국가 내에서 대안적인 지역협력을 논의할 수 있을 만큼의 사회운동의 문제제기, 그리고 국가를 강제하는 실질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남미에서 ALBA나 TCP가 가능한 것은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같은 나라가 있기 때문인 것처럼, 아시아에서도 그 비슷한 뭐라도 있어야겠죠.

 

그러나 사실, 그것이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은 예상할 수 있는데, 따라서 다소 비관적이 됩니다.

 

이런 점에서는 지역차원의 대안세계화를 위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미의 조건과 상황이 각 지역마다 모두 다 다릅니다. 유럽의 경우에는 통화통합이 이미 이루어졌고 유럽연합도 신자유주의적인 헌법조약을 통해서 “신자유주의적인 지역통합”을 완성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리고 미국과 “공동지배” 체제를 이루고 있죠. 아시아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직적 분업체계가 구축되어 있고 민족국가 간의 역사적 구원으로 인해서 지역적인 통합이 쉽지 않습니다.(일각에서는 지역통합을 위해서 민족주의도 개조될 수 있다고 예상한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한반도 자본주의 발전에 긍정적이었다고 평가해서 논란이 되었던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그 징후일 수 있다는 것.)

 

아프리카는 아프리카 합중국과 같은 식의 지역적 통합도 논의되고는 있지만 만성적인 내전과 민족국가의 취약성, 민주화의 지체 등으로 인해서 지역통합이 쉽지 않습니다. 다만 중국의 자본이 그것을 촉진하는 매개가 될 수도 있지만 쉽게 예상할 수는 없는 문제. 대안세계화운동에서는 남미의 경우가 가장 희망적일 텐데,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일반화할 수 있는 정세는 아니죠.

 

그렇다면 이후에 만약 미국 헤게모니의 자본주의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붕괴하더라도 각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대안체제는 같은 형태가 아닐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으로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미가 모두 다른 형태의 체제에서 (다음 세계체계가 있다면 그 때까지) 상당 기간 경합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역사의 상이한 분기, 어떤 지역적 모델도 절대화할 수 없는 혼란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우리가 처한 지정학적 정세에 맞는 대안들, 운동의 전략들이 필요한 셈입니다. 그것은 민족국가의 변혁과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지만, 그것으로 제한되지 않는 것들이죠. 그리고 (10년전에 IMF 구제금융과 구조조정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미처 사고하기도 전에 불현듯 사활이 걸린 절박한 문제로 제기되고 사고와 실천을 강제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문제가 무엇인지라도 인식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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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F]노동운동과 사회운동, 1차 워크샵

지난 6월 19일에는 사회운동포럼의 '열쇠말keyword" 주제의 하나인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1차 사전워크샵으로 '노동운동 진단과 평가' 라는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관련된 자료와 토론 전체 내용은 아래 링크 참조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document&id=1423
 
노동운동을 사회운동적인 시각에서 평가해보자는 것이 1차 토론의 목표이기는 했는데, 썩 잘 된 것같지는 않습니다. 주발제는 노동자운동 좌파-현장파의 입장에서 평가(노동전선)이었고, 토론자들은 문제를 제기하기는 했는데, 쟁점을 뚜렷히 부각하는 논쟁이 되지는 못했던 것같습니다.

다만, 몇가지 앞으로도 쟁점이 될 수 있는 몇가지 문제는 드러났습니다.
대표적으로 '사회운동'이라는 것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노동자운동과 어떤 관계로 볼 것인가 문제.

사실 '사회운동'의 사전적 의미는 명확합니다.
"구체적인 사회 문제를 해결하거나 현존 사회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하여 대중이 자발적으로 하는, 조직적이고 집단적이며 지속적인 행위. 노동 운동, 농촌 운동, 학생 운동, 혁명 운동 따위가 있다."(네이버 국어사전)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의 분리가 장기화되면서, 노동자운동이 노조운동을 중심으로, 경제주의 투쟁에만 몰두하면서, 마치 노동자운동은 사회운동이 아닌 것처럼, 사회운동은 "사회운동단체"라는 것들이 하는 특수한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정당운동의 입장에서는 노조-당-사회운동을 삼분하는 사고(전진)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런 인식에는 다른 판본도 존재하는데, 노동자운동의 현장파들의 생각입니다. 이날 발제에서 노동전선(활동가조직) 김태연 집행위원장은, 노동운동이 잘 하면 사회운동의 의제라고 이야기되는 교육, 의료, 반전 운동 등도 모두 할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변혁운동에서 노동운동 중심성이라는 것을 (부당)전제하기 때문에 나온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노동운동이 아니라 노동자운동이, 스스로 발전하면서 그런 사회운동 과제들을 자신의 운동과제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는 말로 바꾸어 이야기할 수는 있겠죠.(그렇게 같은 취지로 이해하자는 제안이 정영섭 동지의 발언이었던 것같은데 맞나?;;)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노동자운동, 그것이 좌파라하더라도 해온 투쟁의 역사를 볼 때, 좀 심하게 말하면 "듣기좋은 말"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그러한 주장은 노동자운동"만" 있어도 된다는 사고를 전제합니다. 운동들간의 교통을 위해서도 별로 좋지않은 다소 '무례한'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토론과정에서 느낀 것은 노동자운동이 자신을 사회운동의 "하나의" 부분으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사회운동포럼을 거치면서, 다른 운동들과의 대화과 교통의 과정에서 그러한 인식을 확인할 필요도 있을 것같습니다. 물론 이 말이 노동자운동이 "노동의제"라고 불리는 것들을 하나의 부문운동으로 수행해야한다는 의미도 아니고, "노동의제"라고 불리는 것들이 부문운동의 의제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그러나 가장 중요한, 그러나 유일하지 않은─ 운동주체로서 노동자운동이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자신을 위치지워야한다는 말이겠죠.

그렇게 보면, 이탈리아 공산주의재건당의 베르티노티가 쓴 <공산주의 재건과 대안좌파의 건설>이라는 글을 꼭 권하고 싶습니다.(<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대안세계화운동>, 윤소영 엮음/공감 2003에 실림) 몇 부분만 인용하면,

사회운동들의 다원적 성격은 '또 다른 세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들과 변증법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그 자신이 새로이 구성된 정치적 주체를 요구한다. 정치의 위기는 좌파정치, 사회갈등, 시민사회 사이의 관계를 새로이 재정립함으로써 위기로부터 탈출할 것을 요구한다. 공산주의 재건은 이런 재정립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다.
...
우선적으로 대안좌파는 대안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사회운동들과 교류한다. 대안좌파의 존재이유는 집단적 행동을 또 다시 유효하게 만듦으로서 정치 자체를 부활시킨다는 의미에서 정치의 개혁에 있다. 이 때문에 새로운 정치적 주체는 당과는 다른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조직들이 당과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70쪽)
 
여기서는 정치운동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운동들 사이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 노동자운동이 사회운동들과 갖는 관계를 돌아보는 데도 좋은 글이죠. 특히 사회운동과 함께 투쟁하는 것이 정치자체의 부활을 가능하게 하기위한 조건이라는 점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또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동당과 같은, 혹은 노동자의힘과 같은 당-정치조직들이 사회운동에 어떻게 접근해야할지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줄 겁니다. 이번 사회운동포럼에도 이와 유사한 운동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박래군(사회운동포럼 집행위원장, 인권운동사랑방)님이 쓴 제안서에도 나와있으니 흥미로운 일입니다. 제안서 "새로운 사회운동, 가능합니다" 읽기

그리고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이러한 관계의 재정립의 필요조건으로 공산주의 재건을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운동간의 교통과 교류가 만능이 아니고, 대안세계를 위한 이념적 사상적 지향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을 공산주의 재건으로 지칭합니다. 이번 사회운동포럼에서도 운동간의 교통과 교류도 중요하겠지만, "공산주의 재건이 필요조건"이라는 점이 공유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대안세계의 상이 무엇인지, 대안세계화'운동'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 방식일 수도 있겠죠.

물론 "공산주의 재건"이 스탈린주의나 김일성주의처럼 구 사회주의국가들을 정당화했던 국가이데올로기의 부활은 전혀 아닐 것이고, 오히려 포스트마르크스적 공산주의이겠지만 말이죠. 그리고 포스트마르크스적, 혹은 네번째 공산주의의 형태와 가능성에 관련해서는 발리바르의 <공산주의 이후에는 어떤 공산주의가 오는가>를 참고해야할 것입니다.(<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소련 사회주의, 윤소영지음, 공감 2002에 실림. 인터넷에서는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document&id=1404 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말을 더 이어가자면, 발리바르가 지적하는 네번째 공산주의의 핵심적인 요소는 페미니즘과 국제주의입니다. 민족형태 비판이 전제되어야하는 국제주의에 대해서는 그래도 좌파들에게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 페미니즘과 관련해서는 좌파들의 인식도 좀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김태연 노동전선 집행위원장의 글에서 노동자운동의 혁신의 과제로 페미니즘 혹은 여성문제와 관련된 부분은 (그것도 관료화에 대한 문제제기 부분에서) 단 한문단이 이렇게 나옵니다.

- 노동운동 내부에도 여전히 전근대적인 성차별․가부장적 조직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이런 조직문화는 노동운동 내에서 동지적 관계를 파탄내기까지 한다. 동지들의 성차별적․가부장적 행태를 농담으로 용인하는 분위기는 이 문제해결을 가로막고 있다. 자본주의 상품문화의 찌꺼기이며, 전근대성의 잔재를 노동운동 내부에서 단호히 척결해야 한다.
 
안타깝죠. 여기에 대해선 구구절절 더 할 말도 없습니다.;;

여튼, 이 날 토론을 하면서 느낀 것은, △ 사회운동포럼이 보다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이념적 대안에 대한 논의까지 진행되거나 혹은 최소한 그것을 사회운동진영들이 공동으로 논의해야한다는 점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는 점 △ 노동자운동이 경제주의에 경도되면서 사회운동과 분리된 역사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점 △ 특히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과의 결합에 관련해서는 전체 사회운동포럼에서 중요한 결의로 취급되어야할 것이라는 점 등입니다. (쓰고 나니 모두 '과제들'이군요. 내가 할 것도 아니면서 이런;;ㅎㅎ)

앞으로 논의가 더 진행되는 만큼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 열쇠말 토론에서도 더 많은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겠죠. 어차피 사전토론이라는 것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확산하기 위한 의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의의에 맞게 활동가들의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사회운동포럼 홈페이지가 만들어졌군요 : http://sm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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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반자본주의


反자본주의
사이먼 토미 지음, 정해영 옮김 / 유토피아


반자본주의라는 제목의, 다소 초정세적인 자본주의 반대운동을 다룰 것같은 이 책은 그러나 최근의 정세에서 반자본주의라는 정치적 지향이 가지는 의미를 소개한다. 20세기 후반부터 다시 활성화된 반자본주의 정치적 실천들을 개괄한다. 초보자를 위한 안내서라고 하지만, 정작 정세에 둔감한 고참 활동가들에게도 매우매우 유용한 책이다.

이 책은 현재의 반자본주의는 반신자유주의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보다 내용을 정확히 반영하는 책의 제목은 '반신자유주의'일 수도 있다.) 이 점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대중운동은 이전 시기의 반자본주의 운동으로서 좌파 운동을 한편으로는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특징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운동들에, 하나의 새로운 경향들이 활성화된다.

저자는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신자유주의가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는 데서 시작한다. 특히 두 가지 관점이 눈에 띄는데, 하나는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내에서 모순으로 작동하던 하나의 경향-시장의 절대적 우위를 관철하려는 시도라는 관점.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 내부의 모순의 작동으로 제기하는 셈이다. 또 하나는, 신자유주의가 정치의 종말(혹은 후쿠야마식으로 역사의 종말)을 주장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은 곧이어, 신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정치 양식이 출현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정치'에 대해서 사고할 수 있게 해준다.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시애틀 전투로부터 눈에 띄게 전면화된 반자본주의/반세계화운동에서 사파티스타, 세계사회포럼으로 이어지는 운동의 출현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 이 운동들 속에 어떠한 경향이 있는지, 그 지형을 보여준다.

그것을 크게 개혁주의-근본주의로 나누고 그 아래의 여러 경향을 소개한다. 개혁주의 진영에는 이 운동 스팩트럼의 가장 오른쪽에 있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자유주의적 개입주의, 미국에서는 민주당식의 국제주의=개입주의니까.)에서부터 '민족주의적 국제주의'로서의 사민주의, 전지구적 사민주의 등이 소개된다. 근본주의에는 구좌파적 마르크스주의에서부터 자율주의, 평의회 공산주의, '비-정통'급진주의 조류들, 아나키즘, 급진적 환경주의 등이 소개된다.

다만 이 과정에서 다소 거친 분석은 이러한 분류기준을 횡단하는 사고와 입장들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점이 단점이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 좌파들이 모두 당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대안세계화라는 논리를 저자는 초국적 시민권+세계정부라는 구도의 지구적 사민주의의 것으로 설명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사민주의와 무관하게(그러나 초민족적 시민권에 대해서는 긍정할 것이지만)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대안을 세계화하는 국제주의적인 근본주의 운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2003년에 나온 이 책에 붙인 2007년, 한국어판 후기에서는 일관되게 '대안세계화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지구적 시민성'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언급한다.)

별도로 강조되는 것은 사파티스타. 사파티스타는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가 나타났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열광한다.) 저자는 사파티즘가 탈이데올로기 정치를 구현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어떤 거대담론을 운동의 지침으로 삼는다기 보다는 대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특히 이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제도들이 약속해왔지만 언제나 배신해왔던 대중의 실질적인 정치참여를 가능하게 하고 '자유민주주의'와 다른 판본의-그러나 더 민주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한다. (이 점은 '소수자'-정치의 논리와도 이어진다. 이 개념에 대해서는 아래  문단 참고. 그러나 저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제도화를 배제하는 것이 능사는 아닌데, 제도화없이는 오히려 목소리 큰 일부가 득세하는 등 비민주적인 상황이 초래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재의 반자본주의/반세계화 운동을 "운동들의 운동"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포괄하는 범위가 매우 넓으며 통일적인 이데올로기-강령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다양한 운동들이 만나고 상호 작용하면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존재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운동을 밀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 좌파 운동과 다르게 현재의 반자본부의/반세계화운동이 당적 구조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점, 각각의 운동을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단일한 정치 프로그램에 종속시키는 것을 거부한다는 특징으로 이어진다. (물론 모두가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운동의 단층선이 발생하는데, 저자는 다소 거칠게 이것을 ['다수자'-정치]의 논리, ['소수자'-정치]의 논리로 구분한다.)

정치의 위기와 새로운 정치의 부활에 대한 지적은 눈여겨볼만하다. 저자는 각국에서 제도정치가 위기에 처하는 상황을 분석하면서 이는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라고 지적한다.(월러스틴의 지적과 통하는 부분일 텐데, 여기서 저자는 새로운 대항정치로 더 나간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신의 승리라고 간주했던 이데올로기의 위기와 관련이 있다. 68년 이후, 그리고 구 사회주의권이 붕괴 이후 저항정치의 공백 속에서 대중들은 새로운 정치─능동적인 직접행동을 중심으로하는─을 재발견한다.
 
이런 지점들 요약해서 저자는 한국어판 후기(2007)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용해보자.
"새로이 거듭난 반자본주의 운동이란, 목소리와 현전의 정치이자 대화와 소통의 정치이고, 저마다의 꿈을 나누며 구체화하는 정치인 셈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낡은 간판을 달고 있지만 전에 없이 새로운 유형의 정치를 펼치고 있다. 말하자면 대표와 엘리트들의 민주주의가 아닌, 다채로운 무늬를 지닌 민중들의 민주의의다."

이렇게 '성장중인' 반자본주의/반세계화 운동은 성공할 수 있을까? 혹은 몇번의 시위 이외에는 너무 힘이 미약할 뿐인 것은 아닌가? 저자는 전자의 질문에는 답변할 수 없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한다. 이미 신자유주의와 함께 역사가 끝났다는 주장, '대안은 없다'는 주장들이 이 운동의 과정에서 시효만료되었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도 몰락 중이다. 더 많은 변화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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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 책의 말미에 왜 이재영(민주노동당 전 정책실장)씨의 글("자본주의를 넘어서-한국에서의 도전")이 실렸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재영의 글은 결론이 없는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기껏해야 현재 민주노동당의 좌충우돌과 혼란을 변명하는 논리가 될 뿐이다.
 어찌보면 <反자본주의>의 저자인 사이먼 토미도 결론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 아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 반대 속에서 대안세계화운동으로 성장한 반자본주의 운동의 고유한 양식-성격과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지적한다. 그것은 논쟁도, 운동의 새로운 양식-성격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민주노동당 내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추상수준의 문제인 것이다. 한국에서의 반자본주의, 대안세계화운동은 민주노동당을 골백번을 들여다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을 대상으로 한 글이 그런 제목을 달고 들어가다니 참.
이재영의 글은 레디앙에도 실려있다. :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5923
 
* 글을 쓰고 나서 보니, 독일에서 아셈과 G8회의에 반대하는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이 참세상 블로그에 올라왔다. 책의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매일매일, 어느곳에서나, 세상이 예전과는 다르게 돌아가는 흐름이 지하에서부터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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