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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철쭉

[독서]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김원 외 지음 / 천권의책

 

 

"민주노조운동"의 소멸과 노동자들의 상태

 

이 책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과 현장 노동자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이미 이름만 남은 "민주노조운동"의 정치양식에 대해서 비판한다. 책이 말하는 "사라진 정치의 장소"는 더 부연하자면 "사라진 (노동자) 정치의 장소"로서의 공장과 현장, 지역을 말한다.

 

이미 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자신의 이름을 얻게된 "민주노조" 운동이 더 이상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아직도 많이 알려져있지는 않다. 민주노총-한국노총의 분할과, 또한 노동탄압 사업장, 어용노조 사업장에서 독립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실천은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노조를 만드는 것을 넘어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었던 "민주노조운동"은 결정적으로 IMF 구제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소멸했다.

 

이 책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주로 대기업노동자들은 회사와 노조에 "이중몰입"되어 있는 상태이다.(공기업에서도 마찬가지이거나 오히려 회사쪽으로 더 몰입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공기업에서 "상황의 지대"는 제조업 대공장에서 노조에 의한 것보다 오히려 회사의 성격에 의한 측면이 더욱 강하기 때문이다.)

 

실리적으로 어느 한쪽을 매순간 지지하기 때문에, 활동가들에게는 "변덕스럽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실상은 아주 합리적으로 선택한다. 제조업 대공장에서는 특히 정리해고 위기를 겪으면서 "물량 있을 때 벌자"는 의식이 팽배하고, 이것은 심지어 한 회사의 공장 간에서 물량싸움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물량을 잘 따오는 노조 대의원이 좋게 평가받는다.

 

(이런 진단은 경상대사회과학연구원의 일련의 연구작업, 예컨데 금속노동자의 생활과 의식 과 같은 책을 통해서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실리주의 타협과 그 결과

 

이런 속에서 노조(활동가)와 조합원 간에 독특한 타협이 형성된다. 노조는 실리적인 목표를 위해서 조합원을 집회, 파업에 "동원"하고 조합원은 이 동원에 응하지만 노조 활동의 평가기준(따라서 다음 집행부를 선택하는 기준)은 경제적 실리를 얼마나 쟁취하는가에 달려있다. 따라서 노조의 활동이 조합원을 대상화하거나 수동적인 동원의 대상을 삼는 것도 인정된다.

 

어차피 노조라는 조직이 임금률을 올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한 제도--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면 그것이 뭐 대수인가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일부 현장파들에게는 그 내용이 무엇이든 "전투적 투쟁"을 불러오는 것이면 무조건 정당하다는 식의 사고가 아직도 있다. 작년 현대자동차의 공장간 물량경쟁에서도 그런 시각은 드러났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상황은 역사적으로 만들어왔던 남한 노동자운동의 사회운동적, 정치적 성격을 소멸시키는 과정일 뿐 아니라, 그런 점에서 실리적인 노조운동 자체의 기반, 사회적 정당성도 침식한다. 더구나, 그 "실리"라는 것은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를 배제하면서 얻게 되는 실리, 즉 노동자 계급 분할의 대가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조합은 노동력관리의 파트너가 된다. 비정규직, 하청노동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정규직 조합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그나마 자본가들의 노동통제에 대해서 노동자 스스로의 정치 공간을 열어가던 노조운동은 스스로 또 하나의 "통치기구"가 되어간다는 것이 저자들의 지적이다. 활동가들은 이 속에서 대중들과 분할된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민주노조" 운동양식을 벗어나는 것을 생각할 수 없을 상태에서, 대중의 변화에 당혹스러워한다.

 

이런 조건에서 노조운동의 사회적 확장전략--사회운동 노조주의도 그런 주장의 하나라 할 것인데--은 무망한 이야기가 된다. 노조운동이 공장 안에 더욱 몰입하는 상황에서 그러한 노동운동 발전전략이 제기되고 확산된다는 것은, 그만큼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이기도 하다.

 

저자들은 노동조합이 민주주의, 총회(직접투표)를 통해서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무대 위에서 "시연"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러한 정당화는 노조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는 정파들의 활동과 맞물려서, 민주주의를 형해화한다.

 

저자들은 이러한 민주노조 운동 양식의 소멸 속에서, 엘리트주의적 노동문화, 가부장적 노동문화 등을 비판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현장, 정치가 발생하는 현장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다른 가능성을 찾을 것을 제안한다. 아직은 구체적인 대안보다는 제안, 그리고 그러한 사고를 열기위한 개념을 제시하는 정도의 상황이지만, 그것은 중요한 출발점이다.

 

새로운 노동자정치의 난점들

 

다만, 이 과정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우선 노동자정치의 장소는 80년대후반 이후 금융위기 이전까지의 "전형적인" 모습, 즉 (상대적을 균일한 고용형태를 가진) 제조업 대공장과 공단지역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상대화되고 오히려 각종 서비스 노동, 비공식 노동이 확산되면서 정치의 장소는 물리적으로도 분산되고 있다. 이 속에서 노동자들 사이에 통합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정치가 가능한 공간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오히려 그 공간은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의 반란이라고도 볼 수 있는 촛불집회-인터넷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는 매우 한계적이다.)

 

더 큰 문제는, (저자들도 지적하고 있지만) 남한에서는 노동자 계급문화라는 것이 형성되어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노동계급이라는 게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 이건 단지 노동자운동이 활발하지 못하고 혹은 조직률이 낮다는 문제가 아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고유한 문화(영국노동자들의 선술집pub, 축구 훌리건같은 것들, 독일 숙련노동자들의 장인문화, 이탈리아 북부 공업지대 노동자들의 "붉은 벨트")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대대적인 파괴 이후 , 근대적 노동자인구 재형성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그렇다면, 공장안에서 고유한 문화를 만드는 것도, 그것에 기반해서 노동자정치를 구상하는 것도 훨씬 힘든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노동조합의 정치만 판을 치는 상황이다.)

 

그래서, 노동자정치의 장소를 찾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일 수 있다. 그것은 노조에서 문화행사를 잘 해서 만들어내는(그럴 수도 없지만) 회사-노조 문화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장기간의 정치적-문화적 실천을 통해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장기적 실천이라고 해도, 구체적인 실천은 시급히 시작되어야한다.) 

 

가상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때

 

특히 (여러가지 이유에서) 그러한 정치의 장소를 공장 안에서만이 아니라 지역차원에서 형성하고자하는 입장에서는 그러한 정치적 실천은 매우 긴요하면서도-어려운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하지만, 이것은 어떤 노동자운동을 형성하고자하는가라는 질문과 동행해서 함께 생각해야할 문제임은 분명하다.

 

"민주노조" 운동양식의 소멸 상황, 즉 우리가 하고 이른바 "민주노조운동"이라는 대상이 이미 없는 상태에서 가상을 바라보면서 운동하는 것도 이제 더 이상은 불가능해진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그나마 "민주노총"이라는 상징으로 "민주노조운동"이라는 가상을 유지해왔지만, 이제는 그 물질적 조직 조건도 소진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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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F3일차]노동운동,정의의 무기로 부활하라

오늘(자정이 지났으니 이미 어제군) 사회운동포럼이 사회운동총회와 폐막행사로 모두 마무리되었다. 많은 사람들(워크샵들에 연인원 2500명이 했다고 한다)이 함께 했고 의미있는 쟁점들을 논의했다. 마지막날 모습과 결산은 이 다음 글에 올리는 것으로 하고, 일단 3일차 이야기를 해보자. 박래군 집행위원장이 참세상에 인터뷰한 것처럼, “안 갔으면 후회할” 행사였다고 평가.

 

[특별강연] 피터 워터만 ; 노동운동, 정의의 무기로 부활하라

 

워터만은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개념을 제기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대안세계화 운동의 일부로서 노동자운동의 미래를 생각해보자는 제안이다. 노동자운동이 보편적인 해방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급진적 사회운동, 국제적 정의운동과 동행해야한다는 점, 이 속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 등을 강연에서 언급했다.

 

워터만이 하나의 경향으로 강조한 것은 최근 우리 운동에서도 관심이 높아지는 “지역”과 관련된 부분이다.

워터만은 노동운동과 지역운동(community)과의 연대를 말한다.(community, 통역한 동지는 '지역운동'이라고 번역했지만 한편으로는 '지역공동체'라고 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중심부-주변부 모두에서 이러한 경향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가 다른 것에 종속되는 방식이 아니라 상호이익, 상호보완의 관계로서.

 

특히 남아공, 남미, 미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운동을 예로 든다. 작년 미국의 메이데이 시위를 보라, 이것은 가장 빈곤하고 소외된 이주노동자의 운동이었는데, 노조가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오히려 이주노동자 공동체들) 조직화되지 않은, 조직화 될 수 없는 노동자들이 공세적으로 진출하고 노동자운동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역시 우리나라에서도 제기되는 쟁점 ; 비공식노동자 등이 노동조합으로 조직화되는 것이 맞는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혹은 노조로 조직된 것만 노동자운동인가?) 워터만은 “노조 형태가 아니더라도 어떤 자치적인 조직방식도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취약한 층의 노동자들이 기존의 노조 조직 안에서도 억압될 수 있으며, 자신의 전략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인도의 노점상을 예로 드는데 이들은 노조 조직 안에 있기도 밖에 동시에 있기도 하다. 미국노총은 이주노동자 네트워크를 조직하기도 했다.(이주 일용직 노동자들을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한 합의)

 

이러한 고민은 불안정노동자, 이주노동자, 비공식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기존의 노조형태가 아니라도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민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만한 쟁점이다. 이랜드 비정규직노동자를 조직한 지역운동(민주노동당의 지역조직)과 이랜드 월드컵 분회가 분별되지 않은 어떤 조직형태-조직화전략도 고민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이날 저녁 지역운동 워크샵에서 논의된 주제이기도 하다.)

 

워터만은 조직화된 노동자를 넘어선 보편적 운동, 조직화 전략이 노동자운동에 필요하다고 강조하는데, 노조를 넘어서는 조직화 방식에 대한 언급은 이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기존의 노조를 넘어선 확장되고 유연한 (조직화)전략이 필요하다는 점.

 

그밖에도 세계사회포럼에서 노동자운동의 위치, 인종주의 반대운동으로서 노조의 역할 등등 쟁점이 더 있었다. 아마도 발제문이 사회운동포럼 홈페이지에는 올라갈 것같으니 참고들 하시라.

 

** 벌써 올라왔네 ; 피터 워터만 초청 강연자료 링크

 

“사회변혁적 노동운동”

 

노동자운동과 관련해서는 사회운동포럼의 중심워크샵이었던 자리. 나는 사회진보연대 토론자 역할을 맡았다. 주발제는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 김진억 국장.

 

전반적으로 노조가 경제주의적 투쟁, 기업 사업장에 갇힌 투쟁을 넘어서 사회변혁적, 사회운동적 성격을 복원하는 것의 중요성을 확인했다. 그런 점에서 노동운동의 보편적 해방운동으로서 성격을 회복해야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위한 이념적 대안, 대안세계의 이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페미니즘, 국제주의의 결합하고 또한 실천적으로, 사회공공성 운동, 사회운동의 의제로의 확장 등도 필요하다는 등의 논의가 진행되었다.


사회변혁적 노동운동이라는 개념은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라는 개념이 한노사연 류의 소개로 인해 논란이 되고 있는 측면, 정치적 지향을 보다 강조해야한다는 측면을 고려해서 선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워크샵에서는 새로운 노동자운동을 위한 조직적 대안들도 언급되었는데 토론에서 깊이 논의되지는 못했다. 이후 논의 필요한 부분일텐데, 노동자 사회운동체 혹은, 노동운동-사회운동의 안정적 지역적 네트워크(연대구조) 같은 것들.

 

한편, 내가 주로 제기한 쟁점들은 토론문을 참조할 수 있다. 다운받기;링크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여러 “의제”들을 노조에 도입하는 것인가?

 

한편, 토론 과정에서 사회운동노조주의가 마치 노조에 여러 가지 운동의 ‘의제’를 도입하자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해될 경우 사회운동적 노조운동을 제안하면 현장활동가들은 "다양한 운동을 하기에는 노조도 힘들다, 지금하는 투쟁으로도 가랑이 찢어진다"는 식의 반응이 나오게 된다.

 

심지어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제기하는 것이 민주노총 1기 집행부의 “사회개혁적 노동운동”과 같은 것 아니냐는 식의 발언도 나온 상황. 토론자였던 노동전선의 김태연 씨의 토론 중 발언인데, 대단히 불쾌한 일이다. (예를 들어 새흐름이나 사회진보연대가 “사회운동노조주의”를 주장한다고 “비판”하면서도) 정작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혹은 알면서도 왜곡한다고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것을 통해서 제기하고자하는 것은 노동자운동이, 특히 노조가 이익집단이 아니라 사회운동이어야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운동은 대안세계화운동, 워터만의 표현으로는 지구적 정의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운동이 자기 사업장의 경제적 이익을 수호하는 활동을 넘어서, 보편적인 해방운동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 반드시 노조의 이념도 혁신되어야하는데, 특히 남성노동자만을 노동자운동의 주체로 규정하고, 민족국가 안에서 타협을 추구했던 역사를 넘어서 페미니즘과 국제주의라는 보편적 요소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페미니즘과 국제주의를 제기하는 것은 노동자운동을 보편적 해방운동으로 만들기위해서, 역사적인 보편적 해방운동이었던, 그러나 현재는 실패-소진된 역사적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을 개조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좀 더 쟁점적으로 말하자면, 노조가 백화점식으로 사회단체들의 운동에 모두 결합하자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정세에 따라서 결합할 필요가 있는 공장밖 운동의제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운동에 대한 강조는 <사회공공성 투쟁을 제기하면서 많은 비노조 운동의제를 “도입”하자는 주장>과 경향적으로 혼동된다는 점을 이번 토론에서도 확인하게 된다.

 
노조들의 경제주의, 기업별 이기주의에 비판적인 활동가들은 그 돌파구를 공장밖 운동의제인 다양한 사회운동 혹은 소비자-시민으로 조합원들이 마주치는 문제들을 상대하는 ‘사회공공성’ 의제(교육, 의료, 교통 등)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다른 대안이 딱히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대안이념, 변혁전망 자체가 취약해진 현실을 반영한다.) 이러한 활동가들의 문제의식은 현재 노조운동의 문제를 지적하는 데서는 정당하지만 한걸음 더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히려 공장 안-밖에서 동시에 보편적인 해방을 위한 실천을 하는 것이 문제다. 그것은 어떤 시기에는 이랜드비정규직 지원을 위한 현장조직화 운동일 수도 있고, 평택미군기지 반대투쟁일 수도 있고 한미FTA반대 투쟁일 수도 있다.(이랜드비정규직 연대투쟁은 노조에게 사회운동이 아닌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노조 안에서도 사회"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지침"에 따라 간부들 집회참석하는 것을 넘어서 조합원들을 상대로 이랜드비정규직 지원, 연대를 위한 말그대로 "운동"을 벌여야한다.)

 

사회운동으로 노조를 개조하자는 주장을 노조 외부에서 ‘의제들의 도입’으로 생각하게 되면, 사회운동-노조운동의 관계에 있어서도 다소 도식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운동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 대중조직이 보편적 운동이라는 쟁점이 아니라 △사회운동단체라는 조직들과 노조라는 조직들의 조직간 관계의 문제로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제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대중운동 스스로 운동의 확장이라기보다는 “연대단위”를 불러오는 것으로 이해된다. (첫날 대토론회에서 제기되었던 문제가 반복되는 셈이다.) 하지만 오히려 대안세계를 만들기 위한 사회운동들을 (외부적 결합이라기 보다는) 노조운동 안에 도입하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제기하는 맥락은 노동자운동이 보편적 성격을 회복하고, 경제주의/현장주의를 넘어서 대안세계를 건설하기위한 운동에 나서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개념이 가진 어떤 한계가 있다는 생각도 하게된다.

 

용어의 성격 때문인지 다양한 운동의제들을 병렬적으로 도입하자는 식으로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특히 우리운동 지형에서는 '사회운동'이 '비노조 사회운동 단체들의 운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히다보니 더욱 그런 측면이 있다. 따라서 주장하는 바를 잘 드러내는 다른 용어를 쓸 수도 있고, 이번 워크샵에서 사용한 "사회변혁적 노동운동"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념적 대안?

 

울산에서 온 어떤 활동가는 “볼세비즘도 아니고 사민주의도 아니라면 어떤 길인가”라고 묻는다. 한편에서는 구사회주의권의 몰락과 운동이 가져왔던 역사적 한계, 한편에서는 시공간적으로 우리에게 적용불가능한 사민주의가 아닌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을 반성하면서 어떻게 새로운 보편성을 가지는 대안적 사회를 구성하는 운동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문제제기가 핵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사회공공성과 같은 쟁점을 넘어설뿐더러 “노동해방”, “사회변혁”이라는 것이 그냥 외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해야하는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 질문은 앞으로 계속 될 필요가 있다.

 

한편, 토론과정에서 플로어에서는 자본주의 위기와 체제붕괴를 예상하는 것은 (1) 몇 년 전부터 항상 하던 이야기 이거나 (2) 파국론이다라는 식의 문제제기도 있었다.


2010년대 전자본주의적 금융위기에 대한 예상은 신자유주의 경제비판을 통해서 도출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경제적 분석을 정세분석에 어떻게 반영하는가가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냥 ‘위기가 올 것이다’라고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전제로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 분석에 따른 정세예측이 ‘파국론’은 아닌데, 이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우리가 맞을 객관적 위기라는 제한조건 속에서 운동주체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 이와 관련해서는 사회운동포럼 노동운동 사전워크샵 중 2차, "세계자본주의와 한국자본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참고할 수 있다.

 

사회운동과 정치운동, 지역운동의 쟁점들


* 이 부분은 오전과 저녁에 있었던 지역운동워크샵의 내용이다. 쟁점과 내용이 좀 되는 만큼 별도의 글에서 따로 언급하는 것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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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노동자운동의 어떤 가능성들

필리핀에서 자행되고 있는 사회운동 활동가들에 대한 정치살인이 끔찍한 수준으로 계속되고 있다. 최근 노동, 사회단체들이 진행한 기자회견(필리핀의 정치살인 및 노동탄압을 규탄한다! )이 진행되었다. 필리핀 정부(그리고 군부와 지방 우익조직들)는 최근 몇 년 동안 무려 1,000여명의 사회운동 활동가들을 암살했다. 최근에는 총선을 거치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1,000명이라는 것은 쉽게 말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 나의 동료가 살해당할 수 있으며, 내일 내가 살해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필리핀의 사회운동 활동가들을 최근 태국에서의 회의를 비롯해서 서너 번밖에, 그것도 단절적이고 피상적으로 만난 적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을 생각할 때 숙연해지고, 그리고 무엇보다 부끄러워진다.
(아래는 정치살인에 항의하는 필리핀의 집회 사진, 프레시안기사 지은/'경계를 넘어' 활동가로부터 인용)


최근 태국에서의 회의에 참석한 한국 활동가 중에도, 남한의 운동이 잘나간다는 식의 거만함같은 것이 묻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내 경우에도 필리핀의 노동, 사회운동의 지형 정도가 관심대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들에 대한 연대와 지지가 있어야했던 그 자리에서 말이다. 눈앞에서 이야기하는 Lidy Nacpil(주빌리사우스-아시아태평양 코디네이터), 빛나는 활동가인 그녀도 몇 년전 이러한 살인에 남편을 잃어야했던 사람인데도.

***
필리핀의 노동자운동을 활동가들과의 간혈적인 대화나 팜플렛을 통해서 접하면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다. 자본주의적 발전이 미약하다고 해도, 오히려 그 때문에 자본주의의 극심한 모순에 불균등하게 노출되어 있고, 사회운동이 치열하게 발전하는 곳이 필리핀이다. (사회운동의 발전은, 심지어 노동자운동의 발전조차도 자본주의의 발전, 혹은 노자관계의 전면화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순의 불균등한 발전과 “계급투쟁”이, 그 함수라는 것을 필리핀을 통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필리핀의 노동자운동은 정치적 입장과 노선에 따라 여러 조직으로 분할되어 있다. 독립적인 노동조합들은 모두 공산당(CPP)계열의 KMU(노동절운동)에서 분리되어 좌파들이기는 하지만, 입장들은 상이하다. 최근 태국회의에 참가한 것은 필리핀 노동자운동조직 내에서 사회운동과 친화적인 BMP(필리핀노동자연대)APL(Alliance of Progressive Labor)이다.(둘다 전국적인 수준의 노동조합 연합단체이다. 그러나 그 규모는 KMU에 비해서는 작다.)
(필리핀 노동자운동의 지형에 대해서는 불충분하고 어떤 점에서는 왜곡도 있지만 한노사연의 기사를 참고할 수 있다. (아시아 노동운동의 현황과 과제 2. 필리핀 )

APL은 독특한 조직형태를 갖고 있다. 이들은 노동자운동의 연합단체이지만 같은 조직 안에 노조의 연맹, 산업노조, 지역노조 뿐 아니라, 협동조합, 노동자공동체/협회, 노동자 자조조직, 직업조직 등의 다양한 노동자조직형태를 포괄한다. 이것은 노동자운동의 조직형태는 노동조합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그에 비해서 민주노총에 노동자 협동조합이나 직업조직이 가입할 수 있을까?) 노동자운동을 하기에 적합한 형태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정세에서는 노조의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제되어야하는 것은 아니다.

(APL은 정치조직 중에는 AKBAYAN(시민행동당)과 경향적으로 함께하는데, 최근 총선에서는 월든 벨로가 정치살인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이 당의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APL은 자신들의 지향으로 직접 사회운동노조주의를 표방한다. 위의 한노사연 글에서 APL을 사민주의 좌파라고 소개하는 것은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한노사연 식의--우익적-- 해석이 반영된 것같다.)

이것은 마치 전노협 시기에 지노협의 조직과도 유사하다. 지노협은 노동조합만이 아니라 지역의 노동단체, 노동자 교육단체 등을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 92년 전노대의 구성부터, 95년 민주노총의 건설에 이르기까지 노동자운동은 노조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이 과정에서 노조 외의 조직형태는 모두 배제된다. 그 원인이자 결과는 무엇인가? 노조는 사업장 내의 경제투쟁, 사회-정치적인 투쟁은 사회운동-정치단체들이 하는 것으로 분할되었다. 그리고 이에 “어울리게” 노조는 사업장내의 (때로는 전투적으로) 경제투쟁에 몰두했다.(이점에 있어서는 좌우파가 다를 바가 없었다.) 전국적 총연합단체(민주노총)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기층 노조의 경제주의를 보완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사업장 단위의 경제주의가 어떻게 그 노조 외부에 있는 비정규직,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 여성노동자를 배제해왔는지 알고 있고, 사회적 합의가 얼마나 기만으로 점철되어 있는지 알고 있다.

최근 비정규직운동의 고민 중 하나는 기존의 노동조합 모델이 이 운동에 절대적인 조직형태라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안적인 조직형태가 무엇인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기존의 노동조합들은 사업장단위의 노조결성--사업장단위의 임단협교섭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이클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조들은 이러한 형태와 어긋나는 조직과 투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심지어 지역차원에서 자주 일자리를 옮기기 때문에 사업장 단위의 활동도 한계가 많다. 따라서 다른 방식의 조직화, 활동이 있을지가 고려된다. 그러나 현재 민주노총과 같은 수준에서라면 그것을 포괄하거나 연대할 수 있을까? (다만 노조조직이 전적으로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 적어도 지역노조와 산별노조는 가능성이 있다. 산별노조들은 매일 실망을 주는 중이지만 말이다.)

한편, BMP는 총연합단체가 아니다. 오히려 지역적인 투쟁연대체에 가깝다. 다른 총연합 단체에 속해있더라도 BMP와 함께 할 수 있다. (전노협도 한국노총에 가입해있거나 독립적이거나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BMP 활동가는 총연합단체를 일부러 만들지 않은 것은 아니며, 역량이 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러한 조건에서도 조직들을 관통하는 투쟁을 조직한다는 점은 인상적이다.(적어도 그게 가능하다는 사고가 전제되어야하기 때문인데, 민주노총은 연맹만 달라도 연대의 수준이 뚝 떨어진다.)

최근 BMP는 지역단위의 불안정노동자 조직화 전략을 채택하고 3개년 계획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마치 민주노총의 전략조직화와 유사한 것일 수 있겠지만 자세한 것은 물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충분히 다른 방식을 것이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을 것같다.

한편, BMP는 노조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 BMP 활동가는 대화 속에서 APL의 조직화 방식, 즉 노조를 넘어선 조직화에 대해서 “나는 실용주의자다. 그들(APL)은 자신의 노선을 현실에서 증명할 수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나는 실용주의자”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의 말도 아마도 비슷한 의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세 속에서, 노선과 실천은 검증되어야한다. 그것은 단지, 또한 전혀 실증주의가 아니라 정세에 개입하는 것의 본질이다. 정세 속에서 활동가들은 정세를 사고하고, 자신의 대응-노선을 창안하며, 그것을 정세에 기입할 수 있어야한다. 그것은 실패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다. 그것은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간지”가 정세와 그 우연성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에 달려있다. 그것의 성공은 보증이 없지만, 정세 속에서 살아남을 경우 새로운 정세를 형성하고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상상력도 필요할 것이다. 자신을 “실용주의자”라고 말하는 BMP 활동가는 조직형태들 속에서도 그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먼 곳에서 우리에도 마찬가지이다. “정세 속에서, 당신들이 실현하라.”

그리고 발리바르가 말한 대로 여기서 이렇게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11. 공산주의는 복수의 의미들로, 즉 잉여노동의 제한,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분할의 종언, 시민성과 국민성[민족성]의 구별의 종언으로 이해된다(그 외에도 다른 것들이 더 있을 것이다). 맑스가 말한 바대로 공산주의는 인류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운동이다. 우리는 여기에 이렇게 덧붙여야한다. [미래에 대한] 보증없는 [현재의] 운동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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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와 “우연성” 그리고 활동가의 포지션에 대해서는 사회운동(사회진보연대) 2007년 7-8월 합본호 “정세들: 마키아벨리에 대한 알튀세르의 우발론적 해석”을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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