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디워현상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8/11
    "영구없다~"진중권의 유머?심형래의 유머?(6)
    겨울철쭉
  2. 2007/08/11
    디워, MBC100분 토론이 진미군. (5)
    겨울철쭉

"영구없다~"진중권의 유머?심형래의 유머?

'디워'에 대한 포스팅을 한 번 더하게 되네.

100분 토론에서 진중권이 한 비유 중에 "영구 없다~"가 있다. 이게 아주 재밌는 말인데, 언론이 이상하게 보도하는 바람에 괜한 욕설로 알려지는 중이다. 여튼, 심형래 개그의 본질을 진중권이 패러디한 셈.

대부분의 언론이 "스토리가 없는 것이 ‘영구 없다’와 다를 바가 없다” 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한다. 엥? 황당한 얘기다. 신문마다 100이면 100 기사들이 다 이런데, 기자들이 멀쩡한 말을 전혀 이해할 능력이 안되거나 멍청하게 처음 쓴 남의 기사를 배껴쓴다고 밖에 볼 수없게 만드는 대목. 물론 이 말이 '디워' 영화 욕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핏대올리는 '디워'광팬들도 마찬가지고.

토론 중에 진중권이 한 말은 이렇다.(오마이뉴스의 토론 지상중계만 정확하더만.)

(관객들이) '아리랑' 나와서 눈물 흘렸다. 엔딩 크레디트 올라갈 때 '인생극장'이라 찡하다. CG 볼만하다. 이것 빼곤 없다"며, "문제는 그러면서도 애국 코드가 아니다, 민족 코드가 아니라고 하니 황당하다. 영구가 '영구 없다' 하는 것과 똑같다"

'디워' 광팬들이 민족주의, 애국주의 논리로 말하면서도 곧바로 그게 아니라고 핏대를 올리는 모습에 대한 언급이다.

심형래의 "영구 없다~"개그가 재밌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영구가, "영구 없다~"라고 말한다. 관객들은 영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영구는 단지 "말"로 그것을 부정할 수 있다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 모순을 우리 모두 알지만 영구만 모른다.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것과 말의 불일치가 일어나고 그것을 모르는 영구를 우습게 만든다.

지금 벌어지는 일이 바로 그것인데, '디워'광팬들이 "영구 없다~"로 집단 개그를 해주고 있는 시추에이션.
그러니 그것을 보는 관객들은 웃을 수밖에 없지 않나.

심형래의 위트있는 개그를 그의 광팬들이 (충실한 팬들답게?) 따라하는 셈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 심형래가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들을 광팬들은 정말로 모른다는데 있다. 그러니 이제는 그것이 그냥 코메디가 아니라 블랙코메디가 될 수밖에. (여기선 역사가 한번은 희극으로 한번은 비극으로 반복되는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디워, MBC100분 토론이 진미군.

영화 '디워 ' 광풍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길게 덧붙일 것은 없지만,
다시 논란이 되는 MBC 100분 토론, " '디-워'(D-WAR) 과연 한국영화의 희망인가 "을 봤다. (MBC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그 영화를 볼 생각은 없지만 이번 100분 토론은 지대로 재밋더만. 강추! (사실 하도 광들이라 호기심에 영화도 볼까하는 생각을 해본적도 있지만, 지금 더 흥미로운 건 영화가 아니라 영화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니 보지 않기로.) 진중권은 역시 예의 그 날카로운 입담을 발휘한다. 순발력도 죽이고 논쟁 중에 상대의 약점을 잡는 방법도--다소 비열할 정도로--잘 알고 있다.(언론에 다소 엉뚱하게 소개된 "영구 없다" 발언은, 맥락을 보면 통괘할 정도로 예리하다.) 진중권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디워' 광풍에 대해서 대중의 반응, 영화 자체에 대해서 비판할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비판한 셈이다.

정말로 재밋다. 자, 여기.
100분 토론 홈페이지 : http://www.imbc.com/broad/tv/culture/toron/index.html


진중권의 이야기 중에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대중들이 애국주의, 민족주의 논리로 말하고 있으면서 곧바로 자신들은 그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주여,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누가복음)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비밀. 자신이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아예 인식하지 않을 때/거부할 때 그것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바로 앞에서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도 부정할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힘이 작동한다. 논리와 이성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비판은 불필요해진다.

'디워'를 광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이 심지어 스크린쿼터 폐지를 위한 서명운동을 하겠다고한다. 결국, 이번 소동을 겪으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컴플렉스는 헐리우드와 같은 것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나가는 셈이다. 자기 파괴적으로.

그러나 그것은 결코 가능한 대안이 아닌데, SF는 아메리카에 고유한 (문학)양식일 뿐 아니라, 그것을 영상으로 재현할 수 있는(즉 SF를 영화로 제작할 수있는) 자본과 기술은 미국이 아닌 곳에서도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가 아메리카 헤게모니의 문화적 양식이라는 점, 헐리웃 영화산업이 아메리카 헤게모니의--아마도 매우 불충분할-- 새로운 이윤의 원천 중 하나라는 점을 상기하자.)

이러한 요구는 결국, 한국영화가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장점들마저 모조리 파괴하고 말 것이다. 헐리웃 영화의 문법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헐리웃 영화일 뿐이다. 그것은 심지어 심형래도 아니고 말이다.(따라서 100분 토론에 나와서 "한국영화를 위해서" '디워'를 옹호하는 하재근 씨는 오히려 자신이 그 "한국영화"가 불가능한 어떤 곳으로 가는 대중들을 정당화한다.) 젠장, 영화관에 헐리웃 영화만 깔리는 것도 짜증나지만, 헐리웃 영화 + 헐리웃 영화와 구분이 안되는 한국영화들(그것도 수명이 얼마 안 남을 테지만)로만 깔리는 것도 짜증나기는 마찬가지다.

심지어 토론에서 '디워'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던 하재근 씨마저, 진중권의 주장이 옳고, 존중해야한다고 말하자 마자 여기에 대해서조차 디워 광펜들은 광분하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 정도의 포지션도 용납이 안되는 상황인 것이다. "같은 편"이라도 "비둘기파'는 테러의 대상이 된다. 아주 웃기고들 계시다.

한편, 대표적인 친노 사이트인 서프라이즈에는 '디워'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글들이 "컬럼"이라는 이름으로 게시되고, 전화 인터뷰이 중에서 '디워'옹호자는 오마이뉴스 기자. 그리고 토론 중에 진중권이 인용한 "디워, 전쟁이 시작되었다. 충무로를 타격하라."라는 정신나간 컬럼은 데일리서프라이즈에 실렸고 하재근 씨도 여기 컬럼을 쓴다. 모두 노사모 계열의 사이트들인데, 신자유주의 포퓰리즘이 이런 점에서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다. 그들은 의사-비주류, 반지성주의 전략으로 신자유주의를 옹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을 읽어야한다. '디워'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고통받고 소외당한, 희망이 갈 곳없는 대중들이 열망하는, 그러나 "텅빈 자리"다. 대중의 민족주의적인 열등감의 다른 면, 잘나가는 '전문가'들에 반대하는 다른 면, 충무로로 상징된 주류에 소외된 다른 면,  헐리우드 영화자본의 화려한 영상에 대한 열등감의 다른면.. 모두 "부정적인 것"들이고, 욕망의 이면. 따라서 그것은 사실상 아무 내용이 없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텅빈 욕망의 장소이자, 그것에 걸맞게 영화 자체에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열망하는 것은 아닐까.

'부정적인 것'들--무엇에 반대하는--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번 '디워' 광풍에서도 그에 어울리는 모습이 나타난다. 인터넷의 '디워' 광팬들은 처음에는 평론가들에 대한 반대, 그 다음에는 이송희일 감독에 대한 반대, 이제는 진중권에 대한 반대를 통해서 '디워'에 열광한다. 그것은 부정적인 것들이면서, 또한 계속 미끄러져간다. 그래서 토론에서 김조광수 청년필름 대표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비판을 할 수록 역설적으로 '디워'마케팅에 도와주는 것이 되기 때문에 출연하기가 꺼려졌다는 발언은 매우 정확한 지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마치 한 때는 그것이 노무현이었고, 한때는 황우석이었을 때처럼) 다음번에는 또 무엇인가, 누군가가 그 자리에 또 위치할 것이다.(어떤 노련한 인민주의자 정치인? 그게 수준미달이라고들 하는 이 괴수 영화와 관련된 현상을 "정치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디워' 현상에 비판적인 전화인터뷰이였던 서대원 무비스트편집장이 이야기한 것처럼,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반복되고, 계속될 것이다. (진중권이 놓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다. 그리고 여기 '텅빈 자리'에 어떤 다른 상징, 대안적인 세계상이 자리할 때에야 대중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다.)

그밖에도 평론과 대중, 미학 등과 관련해서 여러가지 흥미로운 쟁점들이 많이 있으니, 이번 MBC 100분 토론은 한번들 보시길.


* 논란이 되었던 이송희일 감독의 '디워 현상'에 대한 비판 글을 우연히 찾았다. 아래 펼침. 이 양반 글도 정말 맛깔나게 잘 쓰는구만.
 


 1.
막 개봉한 <디 워>를 둘러싼 요란한 논쟁을 지켜보면서 최종적으로 느낀 것은 막가파식으로 심형래를 옹호하는 분들에게 <디 워>는 영화가 아니라 70년대 청계천에서 마침내 조립에 성공한 미국 토스터기 모방품에 가깝다는 점이다. '헐리우드적 CG의 발전', '미국 대규모 개봉' 등 영화 개봉 전부터 <디 워>를 옹호하는 근거의 핵심축으로 등장한 이런 담론들과 박정희 시대에 수출 역군에 관한 자화자찬식 뉴스릴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여기는 여전히 70년대식 막가파 산업화 시대이고, 우리의 일부 착한 시민들은 종종 미국이란 나라를 발전 모델로 삼은 신민식지 반쪽 나라의 훌륭한 경제적 동물처럼 보일 뿐이다. 이야기는 엉망인데 현란한 CG면 족하다고 우리의 게임 시대 아이들은 영화와 게임을 혼동하며 애국심을 불태운다. 더 이상 '영화'는 없다. 이 영화가 참 거시기하다는 평론가들 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악다구니를 쓰는 애국애족의 벌거숭이 꼬마들을 지켜보는 건 정말 한 여름의 공포다.

2.
그 놈의 열정 좀 그만 이야기 해라. <디 워>의 제작비 700억이면 맘만 먹으면, 난 적어도 350개, 혹은 컬리티를 높여 100개의 영화로 매번 그 열정을 말할 수 있겠다. 제발, 셧업 플리스. 밥도 못 먹으면서 열정 하나만으로 영화 찍는 사람들 수두룩하다. 700억은 커녕 돈 한 푼 없이 열정의 쓰나미로다 찍는 허다한 독립영화들도 참 많다는 소리다. 신용불량자로 추적 명단에 오르면서 카드빚 내고 집 팔아서 영화 찍는, 아주 미친 열쩡의 본보기에 관한 예를 늘어놓을 것 같으면 천일야화를 만들겠다. 언제부터 당신들이 그런 열정들을 챙겼다고... 참나.

심형래씨는 700억 영화짜리 말미에 감동의 다큐와 감동의 아리랑을 삽입하고, TV 프로그램마다 나와서 자신의 열정을 무시하지 말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아예 그럴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이 고지깔 안 보태고 영화판에 몇 만 명은 족히 존재할 게다.

지구가 존재한 이래 충무로에서 가장 많은 돈을 받아서 영화를 찍어놓고, 누가 누구를 천대했다는 건지, 참나.

3.
충 무로가 심형래를 무시한다고? 정작 심형래를 '바보'로 영구화하고 있는 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다. 충무로라는 영화판은 대중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소비자들에게 애증의 욕망 대상이다. 스타들을 좋아하지만, 반면 끊임없이 스타들을 증오하는 두 가지 배반된 욕망의 투영물인 셈. 이는 스펙타클화되어 있는 정당 정치에 대해 시민들이 갖는 이중의 배리되는 시선과 닮아 있다.

예를 들어 기존 정당 정치에서 배제된 듯 보이는 '바보' 노무현은 잘 살고 거짓말을 일삼는 기존 정치인들에 대한 유일한 대항점으로 시민들에게 비춰지면서 대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심형래는 이와 다르지 않다. 충무로에서 지속해서 배척된다고 가정된 바보 심형래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는 심형래의 아우라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그저 기존 충무로에 대한 환멸이 투영되어 있으며, 바보는 여전히 바보로서 시민들에게 충무로에 대한 환멸의 근거를 제공할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바보 전략'은 바보 아닌 것들을 비난하며, 서로를 바보, 바보 애정스럽게 부르다가 끝내는 정말 바보가 되어 선거함에 투표 용지를 몰아 넣거나 친절하게 호주머니를 털어 영화 티켓값으로 교환해주는 바보 놀이, 즉 아주 수완 좋은 훌륭한 마케팅이라는 것이다.

4.
심형래와 기타노 다케시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코메디언 출신이면서 B급 영화들을 만들어낸 두 사람의 차이 말이다. 열정의 차이? CG의 기술력의 차이? 애국심의 차이? 헐리우드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의 차이? 딱 하나 있다. 영화를 영화적 시간과 공간 내에서 사유하는 방식에 대한 차이다.

CG 가 중요한 것도, 와이어 액션이 중요한 것도, 단검술과 권격술의 합의 내공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스스로조차 정리가 안 되어 있다면, 그 아무리 입술에 때깔 좋고 비싼 300억짜리 루즈를 발랐다고 해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5.
좀 적당히들 했으면 좋겠다. 영화는 영화이지 애국심의 프로파겐다가 아니다. 하긴 도처에 난립하고 있는 온갖 징후들로 추측해 보면, 이 하수상한 민족주의 프로파겐다의 계절은 꽤나 유의미한 악몽의 한 철로 역사의 페이지에 기록될 게 분명하다. 아, 덥다 더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