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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 금융위기,사회운동들도 긴장해야.

미국에서 리먼 파산 신청 이후 불어닥치는 금융위기는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국내 금융시장에 대한 파급은 더 엄청난데, 한국 경제의 금융화, 그리고 세계화(미국에 대한 금융종속)의 심각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죠.

이명박 정권과 지배계급의 대응을 보면, 과연 이들이 "국민경제"를 책임질 수 있는 세력인지 조차도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산업은행의 민영화(투자은행화) 프로세스의 일환으로 리먼 인수를 추진해오고 있었고, 까딱했으면 국가 전체를 말아먹을 뻔 했습니다. (산업은행 총재인 민유성은 리먼 서울지사장이었죠.)

그뿐은 아닙니다. 페니메이와 프레디맥에 대한 한은의 400조 투자는 얼마를 회수할 수 있을지 전혀 장담할 수 없고, 한은은 이미 잘못된 환율정책의 설겆이에 200억달러 (22조)를 털어먹은 바 있습니다. 한국투자공사KIC는 이번에 부실위기로 BoA에 인수된 메릴린치에 20억달러(2조)를 투자했었는데, 그것도 큰 폭의 손실로 이어질 전망.

일부에서는 이런 이명박 정권 경제팀의 행태를 보면서, 이들이 몰라서 그런게 아니라, 일부러 한국 경제위기를 도발하고 있고, 제2의 IMF같은 사태를 통해서 개인적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강만수 같은 자야 이미 98년 IMF 협상팀을 이끌면서 IMF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던 자입니다. 그 과정에서 공기업 매각과 같은 엄청난 국부유출이 일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엄청난 리베이트가 오갔을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고 있습니다. 최근 금융위기 과정에서도 IMF는 일관되게 강만수 경제팀을 옹호했는데, 말이 안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쯤되니 사람들 가운데서는 강만수는 사실 IMF의 스파이가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정부 고위관료들이나 특히 경제관료, 금융계 고위인사들은 자녀들이 미국국적을 갖고 있는 등 거의 한국인이라고 볼 수 없는 자들이 다수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어떤 종류의 '상식적인' 애국심을 요구하는 것도 우스운 일일 수 있습니다.

한편, 이 과정에서 정부는 국민연금을 조기에 폭락 증시에 투자한다고 합니다. 이쯤되면 정말 막가자는 것이지요. 상식적으로도 이런 투자는 없습니다. 폭락증시를 무턱대고 몸으로 막겠다는 것인데.. 230조 규모인 연금이 올해 무리한 주식투자로 6조3천억원의 손실을 기록했습니다. 방금 나온 뉴스를 보니 국민연금공단이 파산신청을 한 리먼브라더스와 매각된 메릴린치, 긴급자금 지원을 요청한 AIG에 7000만 달러가 넘는 투자했다고 하는데 엄청난 손실로 이어지겠죠.(관련기사 : http://www.ytn.co.kr/_ln/0102_200809161801471729)

전체 규모에 비해서도, 단기간 손실로 보면 엄청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추가적인 손실은 국민연금에 대한 국민적인 불신도 가속화할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위험합니다.

(이미 연기금의 금융화를 촉진할 기금운용공사 설립이 구체적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에서, 공공노조, 사회연대연금지부를 비롯한 사회운동의 대응이 중요합니다.)

이번 위기가 아마 미국 헤게모니의 최종적 위기는 아닐 것이라는 전망이 아직은 우세할 것같습니다. 그러나 금융위기의 위험에 대해서 사람들이 체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겠죠. 환율 폭등으로 이후 물가도 엄청나게 오르고, 경기후퇴도 심각해질 것인데, 자영업자의 대거 몰락을 중심으로 큰 사회적 문제가 될 것입니다.

당장 생계가 문제가 되는  빈곤가구가 크게 늘 텐데, 사회운동의 비상한 대응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요구를 어떻게 제기할 것인가..

특히 이 과정에서 당면한 생계의 어려움에 대한 항의를 넘어서 금융세계화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인가, 대중의 불만을 어떤 정치적 지향으로 모아낼 것인가..와 같은 문제들. 이를 위해서는 긴박한 정세에 맞는 정세토론-분석과 대응, 정치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순발력이 다시, 요구되는 타이밍. (상반기 촛불 정세의 무기력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미국 헤게모니의 최종적 위기는 아마 몇년후(5년 정도?)로 예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때까지 시간이 별로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대안사회를 위한 이념과 운동, 조직을 재건하지 못한다면, 미래는 야만일 수밖에 없겠죠.

그런 점에서 이번 금융위기는 사회운동이 이후 미국헤게모니의 최종적 위기--그것도 금융위기의 형태를 취할 텐데--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를 테스트할 수 있는 장일 뿐 아니라, 자신을 재구성할 수있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합니다. 상반기의 촛불행진에 이어서 이런 정세에서, 사회운동의 긴장감, 그리고 순발력과 행동이 더욱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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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운동과 정당운동 어떻게 만날 것인가?

"진보정치포럼"의 워크샵(8/2, 민주노총서울본부)에서 발표한 발제문입니다. 토론과정에서 의미있는 문제제기, 토론들이 있었는데, 나중에 정리하는 대로 붙이기로 하죠.
참세상에 기고했던 기고문의 맥락에서 추가로 내용을 보완하여 작성한 글입니다.(아래 링크)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renewal_col&nid=47496
내용적인 쟁점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인데, 그것도 나중에 더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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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운동과 정당운동 어떻게 만날 것인가?
- 노동자정당 건설운동, 대중운동의 분할인가 재건인가?


1. 촛불정세와 진보정당 운동의 시사점

o 사회운동과 정당의 관계

- 촛불정세를 지나면서 대의정치로 수렴되지 않는 사회운동과 정당운동의 관계라는 문제가 제기
- 사회운동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진보정당 운동은 일반적으로 (좋게 말해서) 사회운동을 의회에서 대변(대리)하거나 (좋지 않게 말해서) 의회 내 정치활동을 위해 사회운동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활동 (대중운동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 정당운동의 본령을 의회 활동으로 설정, 이는 결국 촛불정세에서 드러난 것처럼 (자신이 동원하거나 대변할 기회가 없는) 사회운동에 대해서는 수동적인 대응을 할 수밖에 없도록 함
- 따라서 오히려 사회운동을 위한 기관으로서 정당의 상을 설정하고 관계를 가져나갈 필요가 있음.(사회운동적 정당 혹은 사회운동을 위한 정당)

o “정치(적 주체)”의 실종

- 촛불집회 대응과정에서 남은 행위자는 “여론”과 “정부”일 뿐이며, 다양한 사회운동(정치운동과 대중조직을 포함하여)은 부차화됨. 인터넷과 일부 언론을 통한 직접적인 여론의 호소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함
- 이는 “정치의 주체”가 부재한 상황을 낳고, 정치 자체가 불가능한 조건, 즉 “반정치”의 조건을 창출하게 됨
- 그렇다면 이 정세에서 여러 사회운동들은 자신을 정치의 행위자로 드러내고 새로운 대중정치주체를 조직하는 역할을 했어야함. 조직의 위상 등을 보았을 때 정당운동은 이를 추동하고 조직하기에 가장 유리하지만, 오히려 촛불집회 정세에서 대중의 반정치 정서, 대응과정의 무능력 등으로 인하여 의미있는 역할을 하지 못했음. (다른 사회운동들과 대중조직도 마찬가지임)
- 정당, 대중조직, 사회단체 등 기존의 사회운동이 이들 대중을 조직하지 못할 때, 대중들은 (주로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느슨한 인터넷 네트워크로만 연결되고 지속적인 정치적 주체로 형성되지 못함

o 진보신당, 민주노동당의 난점

- 현재의 진보신당은 그러한 방식으로 활동하기에는 여러 난점이 있음
 : 의회 내에서 부각된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리더십, 미디어 정치에 대한 몰두와 이를 통한 당원모집, 노동자운동과 거리두기 (신사회운동, 의제별 운동과의 결합과 노동자운동과의 결합에서 어정쩡한 입장), (포지티브한) 조직이데올로기 혹은 운동이념의 부재(혹은 이념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 자체의 부재)
- 진보신당이 새로운 대안적 정치운동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제2창당”이 의미있게 진행되어야함. 그러나 현재와 같이 “특정정파들의 연합을 확대하는 방식 + 미디어(스타)를 통한 당원확충 + 당 운영과 조직체계의 개편”으로 이루어지는 제2창당은 분명한 한계가 있을 것. (이는 다른 좌파세력이 “더 많이” 결합하는 “제2창당”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방식으로는 대안적 정치주체 구성에 실패할 것이라는 의미)
- 민주노동당은 특정정파를 중심으로 국회의원을 통해 대중조직과 사회운동을 동원/대리하는 경향 심화. 사회운동적 성격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음

o 조직노동자운동의 한계

-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조직노동자운동은 각종 “입장”을 통해서 촛불집회에 결합했지만 실질적으로 현장의 참여를 조직하지는 못함 (7/2 총파업의 사실상 무산)
- 사유화 반대 등 쟁점이 제기되면서 유리한 국면이 조성되었으나 공공부문 노동조합들 역시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 노조 집행부들은 물론이지만 현장에서부터 사회운동적인 매우 약화되었다는 것을 확인
- 비정규직 문제 등 노조운동이 주로 제기할 수 있는 사회적 의제에 대한 활동도 잘 이루어지지 않음. 비정규직노조 단위들이 이를 시도했으나 “비정규직철폐 촛불문화제”에서도 보이듯이 조직노동자운동이 사실상 방기하면서 확산되지 못했음
- 현장주의적인 운동들은 경우 촛불집회에 거의 결합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음. 노동자운동의 건강성의 지표로 생각되어온 “현장성”에 대한 비판과 재구성이 필요하다는 점이 확인됨


2. 정당운동의 분열과 대중운동

o 정당운동의 분열과 대중운동의 분할

-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분열은 민주노총 내 현장 활동가들의 분열로 이어지고 있음
- 한편 노동자의 힘, 사회주의노동자연합 등 여러 사회주의 운동 세력들은 “노동자 계급정당(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을 각각 제안하고 있음. 그러나 이 역시 하나의 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수렴한다기 보다는 현장활동가들을 분할하는 중에 있음
- 현재는 대중조직의 활동가들의 정치적 전망이 분열되는 수준이나, 일각에서 예상하는 것처럼 이후 복수노조, 정파적 대립의 격화, 민주노총 직선제 등과 맞물려 대중조직 자체의 분열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음

o 정당 분할의 부정적 효과

- 사회운동, 대중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정당이라면, 정치적으로 분할을 가속화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임
- 어떤 정치활동인가에 대해서 논쟁이 충분히 필요하지만, 정당운동이 사회운동과 대중운동 전반을 분열시킴으로서 운동을 약화시키는 것은 문제. 특히 정당운동이 의회 내 활동을 위해 사회운동을 동원하거나 대변하려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에서 “줄세우기”로 귀결될 위험


3. 다른 가능성

o 정파들의 분할이 아니라 사회운동, 대중운동의 통합

-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진보신당의 한계와는 반대로, “운동주체”를 형성하는 방식의 정당운동도 불가능한 것은 아님
- 대표적으로 마포지역의 (구)민주노동당 지역위원회(현재 다수는 진보신당 당원) 활동 사례
 : △월드컵 상암점 조직화와 같이 대중적 운동주체를 직접 조직하고, △이를 위한 “운동들의 운동”을 조직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 △“민중의 집”과 같이 지역에서 노조-정당-사회운동단체-기층 민중단체들이 결합하는 운동모델 형성
- 그렇다면 어떤 정당에서 활동할 것인가 이전에 어떤 운동을 실현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한 쟁점일 수 있음. 통합적 대중운동, 사회운동을 기획하고 조직하는 실천 활동.
- 사회운동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의회 내 활동을 축으로 사회운동을 동원/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역할을 오히려 자임할 수 있음
- 이 과정에서 정당, 정파, 노조, 사회단체, 대중운동 등을 관통하는 운동주체가 형성되고 상호 강화할 수 있을 것임 (예를 들어 촛불집회가 만든 정세 속에서 이러한 운동을 조직해나가는 방법을 고민해볼 수 있을 것)
- 이러한 대중운동의 통합을 위해서는 이를 추진하는 정당주체만 필요한 것은 아니며, 이 운동의 “파트너”가 될 수 있는 노동자운동 주체가 필요할 것임. 현장주의, 정파주의를 지양하는 것은 물론, 정당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에 열려있는 대안노조의 구성.

o 대안사회 운동 이념의 재건 없는 대안좌파 재구성의 불가능성

- 진보신당과 같은 조직(형태와 활동방식)만이 문제인가? 그렇지 않음
- 오히려 좌파(정치활동)의 재구성을 위해서는 그에 적합한 대안사회 이념이 재건되어야할 것임
- 새로운 운동주체 형성의 과정은 특정한 조직(정당이거나 연대체이거나)을 건설하는 과정만이 아니라 대안이념을 구성하기 위한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이 되어야함

o 그밖의 고려사항

- 새로운 운동주체를 조직을 위한 “임계질량”(critical mass, 핵분열의 연쇄반응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질량) 형성의 문제 (경향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


“사회운동들의 다원적 성격은 '또 다른 세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들과 변증법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그 자신이 새로이 구성된 정치적 주체를 요구한다. 정치의 위기는 좌파정치, 사회갈등, 시민사회 사이의 관계를 새로이 재정립함으로써 위기로부터 탈출할 것을 요구한다. 공산주의 재건은 이런 재정립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다. ... 우선적으로 대안좌파는 대안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사회운동들과 교류한다. 대안좌파의 존재이유는 집단적 행동을 또 다시 유효하게 만듦으로서 정치 자체를 부활시킨다는 의미에서 정치의 개혁에 있다. 이 때문에 새로운 정치적 주체는 당과는 다른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조직들이 당과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 베르티노티(이탈리아 공산주의재건당), <공산주의 재건과 대안좌파의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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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네트워크 전쟁



네트워크 전쟁 - 테러.범죄.사회적 갈등의 미래
존 아퀼라, 데이비드 론펠트 지음 / 한울



네트워 : 우리가 마주친 저항운동의 새로운 양식

촛불집회는 예전의 사회운동의 투쟁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그 의미를 분석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남한에서나 국제적으로나) 아주 새로운 현상만은 아니며, 이미 상당한 정도의 연구도 이루어져 있는 상태다. 이를 참고하는 것은 현재의 촛불집회와 새로운 사회운동의 폭발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세계화 시대에는 최근 우리나라의 촛불집회만이 아니라  범죄-테러조직, 사회운동 등에서 새로운 조직화 방식이 나타난다. 이를 분석하고 그 대책(대응전술)을 검토하는 책.
미국의 보수적인 싱크탱크인 RAND연구소에서 낸 책이니 만큼 '적들의 계산법'이랄까.

이 책은 부제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테러.범죄.사회적 갈등(사회운동)의 새로운 양상을 다룬다. 저자들은 세계화 시대에서 새로운 저항의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네트워Netwar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테러와 범죄, 사회운동이 같이 취급될 수는 없을 지 모르고, 저자들도 명시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의 개념, 네트워라는 것으로 설명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교리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저자들의 연구에서는 '강도'와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갱, 훌리건, 무정부주의자들--예를 들어 "블랙블록"--은 같은 틀에서 분석된다.)

네트워를 수행하는 조직의 특성이 SPIN 이라고 하는데, 분절되고 segmented 다중심적이며 polycentric 이데올로기로 통합된 ideologically integrated 네트워크 network 조직이라는 뜻이다. 이 조직들은 과거의 마르크스주의 조직들(당?)과 같이 중앙집중적인 위계제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폭발적인 힘을 가진다. 이들의 전략이 사회운동에서는 주로 스워밍swarming(무리지어 모이기)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같은 기기를 이용해서 미리 정해진 전술없이도 확 모이고 또 흩어지기 때문에 진압도 힘들다.

대표적으로 예를 드는 것이 사회운동에 있어서는 99년 WTO 반대 시애틀 전투와, 사파티스타. (그러니, 우리 촛불 집회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테러조직으로서는 알카에다(이 책이 911테러 이전에 나왔음을 상기해야한다), 하마스, 범죄조직으로서는 홍콩의 삼협회, 러시아 마피아 같은 조직들이다.

이들은 그래서, 네트워에 대응하기위해서는 역네트워counter-netwar가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이런 저런 전술을 언급한다. 일단 경찰이나 군대, 정보조직도 SPIN 형태를 응용해서 진화시켜야한다는 것. 그리고 정보 흐름에 개입하면서 허위 정보를 끼워넣거나, 사회운동일 경우에는 온건한 NGO를 개입시키는 방안, 네트워크의 노드를 이완시키는 방안 등등이 제시된다.

사회운동과 네트워

참세상 사진그러면서, 네트워에 적합한 사회운동 조직 형태도 소개하는데 그것도 흥미롭다. 위에서 말한 SPIN 속성을 가진 것은 물론이지만, 일종의 허브와 지도자들이 필요하다는것이다. 이들은 네트워크의 운용이 다섯가지 분석수준에서 좌우된다고 지적한다.

- 조직적 수준 : 네트워크의 조직적 구조
- 서사적 수준 : 이야기
- 교리적 수준 : 협력 전략과 방법
- 기술적 수준 : 정보 체계
- 사회적 수준 : 신뢰와 충성을 보장하는 개인적 유대

각각의 분석수준에서 보면, 사회운동에 있어서는 조직적 수준에서는 허브hub로서의 조직가, 서사적 수준에서는 "교리적 지도자"를 요구한다. 이를 통해서 오히려 "지도자 없는" 네트워크 형태의 운동이 가능해진다. 네트워에 적합한 지도자는 위계구조에서 카리스마를 갖는 사람보다는 "서사적 교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운동들과 사람들이 이어지는 것이 여러 방향으로 이어진 네트워크는 물론이지만, 운동들이 사슬처럼 연결되는(이걸 "노드"라고 하는데) 때에 그걸 연결하는 축, 허브hub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허브는 운동을 조직자이자 지도자의 역할을 해야 더 크게 조직화가 된다는 것. 이 때의 조직자-지도자는 예전처럼 카리스마적인 사람이라기 보다는,운동-운동을 연결하는 인맥-조직력을 갖고,(사회적 수준), "서사적인 교리"를 만드는 능력이 있어야한다(서사적 수준). 사람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통합하기 위해서 "승리하는 길로 가는" 이야기를 만들어주야한다. 이 지도자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서 운동에 참여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런 역할을 잘 수행한 사람은 알카에다의 빈 라덴, 사파티스타의 마르코스 부사령관 같은 이들이 있다. 촛불집회에서는 강기갑, 우석균, 진중권과 같은 이들을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성격을 가진 지도자-조직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파티스타의 경우는 책에서 한개의 챕터로 따로 분석하기도 한다. 특히 이들이 형성한 국제적인 사회운동의 네트워크는 이후에 세계사회포럼으로 발전하면서 "대안세계화운동"을 강력한 사회운동으로 제기하기도 했다. 자본주의 이후 대안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운동에서도 네트워는 단지 사회운동의 "기술적인 측면"으로만 폄하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네트워의 한 측면으로 사이버테러나 해팅과 같은 것도 언급되지만, 그러한 기술적 측면은 오히려 부차적이다.(네트워는 인터넷 네트워크에서 하는 전쟁이란 뜻은 아니다.) 인터넷과 무선통신의 발달이 네트워를 활성화하기는 하지만, 가장 낮은 수준의 기술적 도구를 이용해서도 네트워는 조직될 수 있다. 따라서 네트워는 기술적 발전에 의존하는 전술교리의 변화라기 보다는, 운동들의 조직화 방식의 진화다.

(그러한 변화의 원인을 이 책이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기술적 발전은 중요한 요인이다. 네트워크를 형항하는 데 있데 비용과 속도가 크게 절감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자본주의의 지배조직이 위계적이라기 보다는 신자유주의-금융세계화 과정에서 자신을 유연하게 재편해가는 것이 이에 대한 저항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공장에서 노동력의 조직화 방식은 물론이고 사회의 지배방식, 주변-반주변의 지배방식에서 있어서도 그렇다. 예전과 같이 제국주의 국가 총독을 두고 위계적으로 지배하는 체제가 아닌 것이다.)

촛불집회 : 2008년 남한의 네트워

최근의 촛불집회와 관련해서 보자면, 이러한 일반적인 분석과 함께 99년의 WTO 각료회담 반대 시애틀 전투에 대한 분석이 흥미롭다. 몇가지를 이런 틀에서 언급해보자.

촛불집회는 전형적으로 인터넷으로 조직되었다. 다음 아고라라는 공간에서 제안되고 조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브가 없었던 것은 아니며, 2MB탄핵연대와 같은 (이미 효순미선 살해규탄, 노무현탄핵반대 운동 등으로) 경험있는 너트워크 조직들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이미 존재하는 사회운동의 연대틀과 결합하여 네티즌들을 촛불집회에 결합시킨다.

한편, 집회의 진행에서도 스워밍이 전형적이다. 참가자들은 인터넷을 통한 정보와, 인터넷 동영상 중계, 문자메시지, 핸드폰 등을 이용해 이동방향을 파악하고 신속하게 이동한다. 전투경찰은 항상 뒤에서 따라오게 되지만 이미 늦다. 물론, 이러한 스워밍은 조직된 운동보다는 일반 시민들의 참여에서 더욱 활성화된다. 경험적으로 볼 때, 학생회나 노조와 같은 조직대오가 많은 집회에서는 오히려 기동력이 크게 저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위계적 조직형태로 인해 신속하게 판단하고 이동하지 못한다.

(특히 조직력이 크게 이완된 노동조합보다도 조직력이 살아있다는 점에서 학생조직들이 문제다. 이들은 대오의 이동을 오히려 고착시키기도 하는 경우가 많다. 신속하게 스워밍을 해야할 때 그냥 앉아서 총학생회장 발언을 듣고 있거나 자족적인 구호를 외치고 있을 때가 많다. 이런 식으로 조직된 대오가 특정 장소에 고착되면 다른 참가자들도 움직일 수없게 된다. 시애틀 전투에서는 경찰과 AFL-CIO의 지도부가 합작해서 조직된 조합원들의 집회로 자발적인 거리시위를 "쓸어버리려"했지만 오히려 집회 대오를 더욱 확대시키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종로거리에서는 이런 일은 불가능하지만 조직된 대오가 전체를 "고착"시키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사진:참세상] 5월29일 집회

한편, 집회가 진행되면서 일부 참가자들은 휴대전화 외에 TRS(주파수공용무선통신시스템, 비교적 작은 지역에서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서로간에 의사소통을 하는데 유리하다.)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대오의 이동을 파악하고 선두에서 대오의 이동에 대해서 정보를 제공한다. 이들이 아니라도 참가자들은 서로 휴대전화로 대오의 이동경로를 파악하고 움직인다.

그러나 대오의 이동, 전술을 결정하는 것은 이들, 휴대전화나 TRS로 연결된 일부라기 보다는 참가자들의 토론이다. 집회 대오의 이동 방향을 결정해야할 때와 같이 공동의 판단이 필요한 경우 일부 단체가 리더십을 발휘하여 이른바 "깃발회의"를 소집한다. 각 참가단위의 공식성을 갖는다고 판단되는 깃발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진로를 결정한다. 완전한 네트워크 방식의 결정이다.

집회만이 아니라 함께 진행된 여러 사회운동의 방식도 이미 전례가 있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예를 들어 가장 성공적인 켐페인의 하나였던 조중동 광고주 압박 운동이 있다. 직접적으로 기업을 공격해서 정치적 성과를 얻는 방식이다. 이는 이미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던 사회운동들이 미국에서 시도하고 일정한 성과를 얻은 운동방식이다. 이들은 매사추세츠주를 압박해서 미얀마 군부정권과 거래하는 기업이 주정부와 거래하지 못하도록 하는 "선택적 구매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위계제 조직인 노조, 정당, 학생회 등의 무능이 두드러진다는 점도 연관지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지침을 기다리면서 판단하는 조직인 이들은 순발력있게 스워밍을 하지도 못하고 위계구조에 대한 집중적인 탄압에 취약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지도구심"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노동자의 눈으로"신문] ‘지도’문제 해결 없이 운동의 전진은 없다!!,
[주간 변혁산별 17호] 총체적 부실정권 이명박 퇴진
이러한 주장들은 위계적 조직의 일사분란한 지도-집행이 강력했다는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네트워에서는 그러한 위계적 조직, 지도-집행이 오히려 운동을 후퇴시킬 수도 있다는 것도 인식해야한다. 과거의 경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경험에서 배워야한다.

정권의 역-네트워

정권의 탄압은 최근 점점 강도를 높이고 있다. 집회 참가자에 대한 가혹한 벌금, 인터넷을 통해서 의견을 개진한 시민들에 대한 감청과 구속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위 현장에서는 강력한 폭력을 행사하는 체포전담조가 등장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여대생 사망설" 진상규명을 위한 신문광고에 대해서 "청년의 눈빛"이라는 네티즌을 공금유용이니 퇴폐업소 출입이니하는 식으로 공격한다.("청년의 눈빛" 본인은 경찰의 허위 사실유포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일종의 역-네트워를 실행하고 있다. 특히 네트워의 기반이 되는 인터넷 기술과 다음 아고라에 대한 공격에 집중한다. (다음은 이미 가혹한 세무조사에 시달리고 있으며 한메일은 거의 임의로, 경찰에 의해서 감청되고 있다.) 이들은 이데올로기적 공격을 가하고, 핵심적인 네티즌들과 카페운영진을 구속함으로써 운동의 허브를 타격하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쉽지는 않다. 이 운동은 책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네트워의 강점, 고전적인 방식으로 지도부를 타격해서는 진압되지 않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경찰은 최근 "적절한" 반-네트워 전술을 도입하려는 것으로 보이지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책의 저자들의 희망과는 달리 억압적 국가장치인 경찰 등은 쉽사리 네트워크 조직형태를 수용하는 것으로 변모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네트워에 대응하기 위한 지배조직의 진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조직에 자율성을 부과하는 데 한계적이고, 위계적 조직형태는 네트워에 대응하는 데 적절치 않다.


△ [사진:참세상] 경찰의 8월5일 시민연행장면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가능한 최고의 모든 물리적 수단을 동원해서 촛불집회라는 2008년 남한의 네트워를 진압하려고 할 것이다. 그럴 수록 더더욱 억압적인 수단에 의존하게 될 것인데, 이는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을 더욱 침식할 것이다.

네트워의 미래, 사회운동의 미래

이 책은 미군과 미국 정부의 전술교리 수립을 위한 연구인만큼, 모두 수용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운동의 수행전략(이를 군사적 용어로는 '교리"라고 하고 이 책은 이 용어를 쓴다)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사점들을 제공한다. 또한 촛불집회의 전술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8월5일 부시방한 반대집회는 적절한 스위밍이 실패하면서 위력적으로 진행되지 못한 측면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운동에 대해서는 그 조직화에 있어서 고전적인 방식의 위계제로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해준다. 네트워라는 강력한 운동방식을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회운동의 내부 조직자체와 운동 조직화 방식이 달라져야한다. 저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 강력한 조직형태는 핵심의 일정한 위계제와 네트워크 형태를 결합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런 방식을 고려할 수도 있다. 특히 이번 촛불집회를 경과하면서 가장 한계를 보여왔던 조직들은 가장 위계적으로 구성된 조직들이었다는 점을 상기해야할 것이다.

한편, 정권의 역-네트워 전술도 고려해볼 때, 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여러가지 조건을 함께 만들기 위한 노력이 병행되어야한다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저자들이 말하는 네트워크 운용의 다섯가지 분석수준을 참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네트워의 한계-혹은 오해에 대해서도 잊지 말아야한다. 이번 정세에서 크게 당원을 확대한 진보신당의 경우가 반면교사라 할것이다.

촛불정세를 지나면서 진중권 팬클럽 성격의 당원이 대거 입당했다. (약 3천여명 추산) 그런데 최근 <전진>이 자기들 총노선을 진보신당 게시판에 올렸다가 난리가 난 상황이다.
[관련기사 링크: 레디앙]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0596

사회주의 이념복원, 계급형성, 지역운동 등의 내용인데, 네티즌 당원들이 이게 뭐냐, 이런 반응인데다가 진중권은 <전진>을 "사회주의 찌질이"라는 식으로 비난한다. 해산하고 동아리 활동이나 하라는 식으로 선동하고 있다. 이는 촛불 이후에 급진적 사회운동을 조직하는 과정이 참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네트워를 통해 조직된 대중들을 하나의 "정치적 주체"로 형성하는 것이 자동적이지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정치적인 조직형태인 "정당"의 당원마저도 정치적 주체로 형성되지 않는다면, "정치"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렇게 되면 정치적 주체는 부재한 가운데 정부 정책과 미디어-인터넷 여론만이 존재하는 일종의 "반정치"의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좌파 운동이 이런 대중들에게도 호소력을 가질 수 있게 내용을 재구성해야하는 측면이 필요하다는 점도 인정해야겠지만, 계급성이라든가 변혁성, 그런 것들을 대중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새로운 운동주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지도 더 생각할 일이다. 그것은 네트워라는 운동양식에 대한 고려와 연관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것을 초과한다.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 강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운동이 강력한 조직형태를 갖추고 활동가들의 헌신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가들은 무정부주의자들이나 생디칼리스트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효율적인 조직가들이었기 때문에 많은 곳에서 예전의 운동을 대체하면서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적인 조직들이 네트워에 적응하면서 여전히 새로운 운동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인가는 과제로 남는다. 반대로 블랙블록같은 무정부주의자들이 다시 확산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가역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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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
글을 쓴 후에 인터넷 기사를 보니, 대책회의의 일부단체들이 815집회 이후 가두집회를 중단하고 불매운동, 인터넷 운동으로 전환하자는 입장을 관철하려 하고 있는 것같다.
관련기사 : 광복절 `마지막 거리촛불' 되나

언론플레이까지 하는 고도의 정치적 개입인데, 역-네트워의 일환으로 온건한 NGO들을 동원하는 전략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지난 6월20일 집회 당시, 청와대 면담을 추진하면서 촛불집회 축소-중단을 걸었던 일부단체들의 행태를 생각해볼 때 이러한 예상에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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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행진 속에서, 새로운 운동, 좌파를 &quot;조직&quot;하자

예전에 사회진보연대 <삶의 소리>게시판에 썼던 글입니다.

 

다만, 최근에는 전적으로 새로운 좌파가 형성될 것이라고만 보는 것은 다소 안이한 판단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래 인용한 김원 선생의 글과 같은 측면도 있지만, 또한 최근 <전진>과 관련해서 진보신당 내의 논쟁을 봐도 그는 느낌입니다.

 

[참고 : 레디앙]'전진' 논쟁 중요하다, 제대로 하자

 

어디로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대해서 더 깊은 고민이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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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저런 글(특히 월간 사회운동 다음호에 실릴 글)에서 기존의 사회운동-좌파들-이 촛불집회/행진이라는 거대한 운동의 결과를 “조직”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조직”하고 따라서 이 운동의 성과를 계승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 기존의 사회운동이 무엇을 해야할지가 관심사다. (입장에서부터 구체적인 활동과 사업까지)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를 찾을 수 있겠지만, 현재의 운동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대안좌파가 (일정한 임계질량 이상으로) 구성되지 않는다면 반정치에 하나의 순환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홍세화 씨가 인터뷰에서 밝히는 것처럼) 이명박 정권 시기에 계속 반복될 수 있지만, 또는 심지어 정권을 바꿀 수도 있지만 동일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런 점은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대안좌파”에 실린 베르티노티의 인터뷰, <정치의 위기와 반정치의 위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소간의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넘어서 베르티노티의 인터뷰 한문장 한문장은 정확히 여기, 놀랍게도 2008년의 한국, 시청과 광화문 거리의 정치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정세 속에서 좌파, 사회운동이 임계질량을 구성하기 위한 실천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무엇보다 기존의 좌파들의 연합보다는 이 운동에 참여하는 대중의 새로운 조직화에서 찾아야한다고 생각한다.(사람들의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을 기본으로, 현재의 사회운동에서도 연대할 대상을 찾아야한다. (우리는 이 운동 속에서 노조와 정당의 관료주의, 활동가들의 현장주의의 한계를 보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회운동의 가능성도 찾을 수 있다. 예컨대, “명박산성”을 넘기위해 연단을 쌓고 발언을 조직한 인권활동가들, 매일 촛불행진에 결합하는 새로운 세대의 기층 노조활동가들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이러한 방향은 그저 하나의 ‘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실천으로 연결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조직’은 ‘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의 위기와 반정치의 위험>, 파우스토 베르티노티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대안좌파, 72~74쪽, 강조는 인용자)

 

- 반론이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20세기에 유래했던 광범위한 여론은 두 가지 강력한 대조적인 믿음으로 구성됩니다. 첫째는 정부가 아주 혐오스럽다는 것이고, 둘째는 정부가 정치에서 유일하게 중요하며 정치는 정부 그 자체를 구성하기 위한 경쟁일 따름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사실 아닙니까? 그기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부 참여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오류가 아니겠습니까?

 

- 나는 당신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사태에 대한 관찰일 빠름이지요. 이제 우리는 그런 사태의 원인에 대해 인식해야합니다. 정부가 여론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정치의 취약성의 결과입니다. 오늘 유럽은 정치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위기 속에 좌파적 정치의 위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좌파의 이런 위기는 훨씬 더 큰 위기, 즉 민주주의의 위기의 일부일 따름입니다. 정당 및 노조같은 대중정치의 거대한 주체, 말하자면 거대한 사회·정치적인 연합, 이념 및 공동체의 연합의 약화는 거의 사막화된 공적 영역에 여론과 정부라는 두 행위자만을 남겨놓았지요. 그들은 서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영역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떤 매개, 어떤 경험, 요구와 갈등을 정치로 전환함으로써 정치를 생산할 수 있는 어떤 집단적 조직도 없이 말입니다. 현 단계에서 정부는 더 이상 ‘일자리 생산자’로서 중요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은 정치의 다른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덕분에 자신의 이미지와 비중을 확대합니다. 인민 앞에 홀로 남은 정부가 정치의 주체를 대체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런 사태를 용납한다면, 반(反)정치의 승리를 용인하는 셈이지요.

 

- 왜 정부의 중심성이 반정치를 의미하지요?

 

- 정치가 부재할 때, 반정치가 여론과 정부를 관계짓는 매커니즘이 됩니다. 거의 산술적인 증명을 해볼까요? 최근 몇 년간 유럽의 선거 경쟁에서 모든 여당이 패배했습니다. 블레어만이 예외였는데, 그러나 이 경우에도 득표율은 크게 하락했지요. 선거 전의 [스페인 총리] 아스나르를 기억하세요? 그는 무적인 것처럼, 거의 신처럼 보였지요. 그는 승리한 현대적 통치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거에서 패배했어요. 슈뢰더를 기억하세요? 그는 아주 경력했고, 거대한 권력을 갖고 통치했지요. [사민당 당수였던] 라퐁텐이 자신의 행동을 교란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를 정부에서 축출했지요. 그 후 그는 선거에서 패배했어요. 조스팽, 베를루스코니, 기타 등등,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왜일까요? 정치조직이 부재할 때 [정부에의] 위임과 반정치가 성장하는 데, 그것들은 동일한 불안정한 균형의 양면이지요. 그런 균형은 이미 정해진 세 국면, 즉 위임·사임·붕괴라는 국면으로 구성됩니다. 그것은 실제로 매우 위험한 균형인데, 민주주의를 제거하고 배제하기 때문이지요. 이제 정치에 침투하여 확산되는 반정치가 정치를 정복하기 시작합니다.

 

- 예를 들어 베를루스코니주의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인가요?

 

- 그래요, 베를루스코니주의는 분명한 사례입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반정치가 중도좌파에도 마찬가지로 침투하고 있습니다. ‘외교적’인 이유로 이탈리아[좌파민주당]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기로 하지요. 프랑스를 보면, [2007년 대선에서 사회당 후보인] 루아얄의 선거운동에는 수많은 반정치가 있습니다. 아첨하는 인민주의 말이지요. 루아얄은 반정치의 요구와 비판을 수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지요. 이해가 되십니까? 반정치는 그것이 정치에 대한 몇가지 비판적 요소를 획득했다는 이유로 인해 더욱 발전하는데, 완전히 정당한 이런 새로운 요소는 정치 그 자체의 위기의 결과입니다. 이런 조건이 민주주의의 전진적 위기를 생산하는 것이지요.

 

- 반정치가 이렇게 확산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나는 정의롭지 못한 이 사회가 갈등을 생산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확증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같이 보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사회는 다수의 갈등을 생산하지요. 모든 종류의 갈등, 노동·숙련·코퍼레이션·젠더·지방공동체·동일성 등등에서의 갈등 말입니다. 이런 갈등들은 어떤 정부인가에 따라 승리하거나 패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갈등과 정부 사이에는 자율성이 존재합니다. 어떤 운동의 승리와 패배는 이것이 그 속에서 작동하는 정부의 조건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운동은 어떤 정복[봉기]도 안정화[구성]도 할 수 없습니다. 즉 문제는 승리할 때조차 운동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방할’ 따름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운동은 자신의 승리를 통해 민주주의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운동은 민주주의의 위기 속에서 작동하고,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상하지만, 그러나 운동은 그것에 대항하는 조직을 생산하지 않습니다. 즉 운동은 이전의 순환과 동일한 정치적 결과를 생산할 수 없지요. 지난 세기의 운동은 ‘토치카’를 정복했고 여론의 안정적인 전환을 생산했습니다. 오늘 운동은 아주 강력할 수 있고, 강력한 적을 패퇴시킬 수 있지만, 그러나 대중적 상식과 동의를 건설하지는 못합니다. 이제 이해하시겠지요? 민주주의의 결여가 중요하고, 이런 요구와 이런 압력, 게다가 이런 ‘예방적’ 정복을 결집시킬 수 있는 주체의 부재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 전적인 부재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군요. 급진적 좌파가 있고, 공산주의 재건당이 존재하니까요..

 

- 그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들은 수많은 성공을 달성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임계질량’(critical mass, 핵분열의 연쇄반응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질량), 즉 경향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말해야합니다. 급진적 좌파는 이런 차원에서 자기를 시험할 수 있는, 즉 임계질량에 도달할 수 있는 주체를 여전히 결여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내가 설명하려는 또 다른 종류의 결과가 발생합니다. 즉 유럽에서 전통적 갈등은 두 가지로 분열되고 또 그 성격이 변화합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 갈등을 관찰합니다. 하나는 좌파와 우파의 차이에 관한 것인데, 이런 차이는 좌파가 야당일 때 아주 분명하고 아주 인화성이 높습니다. 또 하나는 사회의 ‘상층’과 ‘하층’, 말하자면 통치계급[엘리트]과 기층[인민대중]의 대조에 관한 것인데, 이런 갈등은 좌파가 여당일 때 훨씬 더 강력합니다. 이 두 가지 갈등은 서로 교차합니다. 상층과 하층의 갈등은 [인민주의적] 반정치의 매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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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에 대한 까질한 그러나 흥미로운 인용

촛불집회에 대해서 아래 남긴 글의 맥락에서, 촛불집회의 긍정성과 함께 다른 면, 양면성을 보아야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사고와 정치적 행동이 전진할 수 있지요.

그런 점에서 흥미로운 글이 떠올라서 일부를 인용해봅니다.
문화연구 시월의 신병현 교수님이 쓴 <“새로운 자본주의” 담론구성체>라는 글의 일부입니다. 자율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글입니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촛불에 대한 자율주의자들의 시각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해당 논문은 문화연구 시월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http://www.siwall.net/main/openDB_1.htm   게시판의 28번 글입니다.)

특히 신자유주의로 전향한 NGO들에 대한 언급은 2기 범국민 대책회의를 "주도"하고 있는 일부 NGO들을 상기하도록 합니다. 아울러 Netwar에 대한 부분은 현재의 촛불집회를 직접 지칭하는 듯하지요.

인용을 읽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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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담론들에서 NGO들은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조응하면서 ‘유능한 통치’(good governance)의 수단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Netwar에 대한 미군 협력 연구소인 Rand Arroyo 센터의 관심이 매우 흥미롭다. ‘정보화 시대’에 동조된 “네트워크적 조직형태, 신조, 전략, 기술에 의거한 범죄 및 갈등”으로서 Netwar는 인터넷과 같은 새로운 통신기술을 사용한다는 점뿐 아니라, NGO와 같은 수평적 네트워크를 동원하는 것에 의해 특징지어지며, 이런 운동들에서 NGO는 “변혁운동의 낡은 위계구조를 대체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아로요 센터의 보고서에서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사회운동체들의 초국적 운동들은 그렇게 위협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사회 및 정치적 개혁에 박차를 가하도록 하는 긍정적인 결과도 갖고 있으며”, “미국은 심지어 Netwar를 조장하거나 그로부터 이득을 취할 수도 있고” NGO와의 관계 조율을 통해 Netwar의 경로와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조언한다.((Morris-Suzuki, 2000, 63-4)

 이 예는 “정보화 시대‘에 변화의 핵심적인 행위자들이 유연하고 네트워크화 되고 초국적인 사회운동체들이라는 이미지가 광범하게 수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NGO나 네트워크화된 사회운동체들이 더 이상 전 세계적 자본운동의 힘에 저항하는 해방적 잠재력을 가진 진보세력으로 보는데 의구심을 갖도록 한다. 그 뿐 아니라, 기금공여자들에 의한 감사 기준이나 성과 표준을 충족시킴으로서 지속적인 기금수혜자로 남기 위해 더욱 공식화되고 소수 엘리트의 역량에 의존해 가야하는 NGO 활동에 대한 실천가들의 많은 고민이 표출되고 있기도 하다.(Wallace, 2004; Hawkesworth,2002)

 이러한 담론들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기 전 세계적 범위에서 통치 기법에 대한 탐색과 적용이 일반화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원격적이고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통제를 위한 기법을 찾으려는 공명하는 담론 계열들에 관한 푸코주의적 논의를 생각하게 한다.(Barry et al,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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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twar는 위키에서는 이렇게 설명하네요.

Netwar
is a term developed by RAND researchers John Arquilla and David Ronfeldt to describe an emergent form of low intensity conflict, crime, and activism waged by networked actors. Typical netwar actors might include transnational terrorists, criminal organizations, activist groups and social movements that employ decentralized, flexible network structures.

테러리즘만이 아니라 최근의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이러한 방식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특히 탈중회되고 유연화 네트워크 구조라는 언급은 이번 촛불과도 닮았습니다. 문제는 본문의 지적처럼, 이것이 권력에 의해서 통제될 수도 있다는 것, 그 매개는 신자유주의적인 NGO들이라는 점입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netwar에 개입할 수도 있죠. 그리고 그것이 사회운동의 방식으로는 위협적이지 않다고 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관련해서는 <네트워크 전쟁>이라는 책이 여기서 지적하는 랜드 연구소의 보고서인 것같군요, 주문했는데 오면 읽어볼 생각)


네트워크 전쟁 - 테러범죄 사회적 갈등의 미래
존 아퀼라 (지은이), 한세희 (옮긴이)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5년 11월

여튼, 이런 점에서 현재의 촛불집회에 의미있게 결합하면서도 그 양면성을 사고할 수 있어야 우리가 과연 어디로 가야할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폭발하는 대중운동 속에서 지성에게도 모종의 역할이 있다면 그런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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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김원]아직도 진보정당 실험할 게 남아있나 + 덧붙여

김원 선생의 인터뷰가 오마이뉴스에 실렸군요.
 
 
문제의식에 많이 공감합니다. 마침 지난 주말에 김원 선생 등이 신병현 선생 등과 작업해서 발간했던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을 읽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던 상황에서 반갑기도 합니다.(오랜만이 리뷰라도 써야할 것같다는;;)
 
 
 
글을 읽고 나서 찾아보니, <지행네트워크>라는 곳에 관련된 글을 이미 쓰신 적이 있군요.
 
http://jihaeng.net/blog/111 (촛불은 계속 타오를 것인가)
 
 
 
한달 넘은 글이긴 하지만, "긴박한" 정세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사점이 생생한 글입니다.
 
 
한편, 아래 제가 쓴 참세상 기고와 관련해서 사회진보연대 게시판에 이런 글을 썼었습니다. 또 보니, 김원 선생의 글을 보면서 한번 더 생각하게 되는군요.
 
 
다만 저는 여전히 활동가입장인지라, 현재 정세에 사회운동이 어떻게 "전술적으로" 개입해야하는지가 더 고민이긴 합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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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나서 생각해보니, 자연스럽게 참세상에 올라온 다른 기고문들과 모종의 쟁점을 형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원영수(노힘)씨의 글
그리고
 
김강기명 씨의 글
과 그렇습니다.
 
후자는 자율주의에 가까운 입장이라면 전자는 (원영수씨의 원래 포지션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신좌파적 입장일텐데,  둘다 촛불의 승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보다는 촛불 안에 있는 모순적 요소를 봐야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운동이 자신의 역할을 가진다는 입장입니다. 역설적으로 좌파들이 완전히 무관심하거나 혹은 이런 방식으로 열광하거나하는 사이에 가장 영리한 대응을 하는 것은 여연 등의 NGO들입니다. 자신들이 어느 지점에 개입해야하는지 알고 있지요.
 
그래서, 이번 촛불국면에서 충분히 배워야하고 싸움에 최선을 다해야하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이어선 안될 것이고, 무엇보다 사태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열광보다는 과학적 분석과 이해)
 
이런 식으로 말하면 뻔하게 "좌파 먹물들 운운"하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겠군요. ㅋㅋ
하지만, 참여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참여"가 더 중요하게되는 시점이니, 좀 봐주시면 좋겠습니다.ㅎ
 
여튼간에 자율주의자들의 반응은 뻔하다고 치고, 다소 놀라운 것은 (이미 리보위츠의 글[21세기 사회주의]을 번역할 때부터 그랬던 것같기는 하지만) 원영수씨의 이런 입장은 좀 놀랍기도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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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좀 긴 사설.
 
 
 
아래는 퍼온 글입니다.
 
 


  아직도 진보정당 실험할 게 남아있나
  [촛불논쟁-거리정치인가 정당정치인가?⑥] <여공 1970…>의 저자 김원 박사
    
촛불에 상찬을 늘어놓은 다른 지식인들에 비해 그는 차분했다.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2006년)>란 책으로 주목받았던 김원 박사(정치학)는 6월 중순께 발표한 글에서 "아이들의 촛불을 보며 지나치게 부끄러워하거나 환호해서는 안된다"며 침착하고 냉정한 시선을 주문했다.
 
"우리는 이미 2002년 촛불이 어떻게 잦아들었으며, 당시 촛불을 든 아이들이 88만원세대가 되어 고용불안 속에서 '경제를 살려준다'는 보수정당에 투표하는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김 박사는 '촛불이 일상으로 들어왔을 때'를 언급하며 비판적 시각을 이어갔다.
 
"한달 전 뉴타운 건설에 열광했던 집단이 갑자기 촛불 속에 자신을 불태울 수 있을까? 한국정치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거리의 정치가 순간 잦아들면서 일상으로 대중들이 돌아갈 때, 시민사회의 '풀뿌리 보수주의'는 다시 강력한 흡인력을 보이며 대중을 빨아들였다. 이 점에서 촛불로 한국 시민사회의 풀뿌리 보수주의가 변화했다고 판단한 것은 경솔한 판단이다."
 
심지어 김 박사는 "(2002년 촛불에 이어) 2008년 촛불에도 '민족주의'는 지속적으로 존재하며 힘을 발휘하고 있다"며 이를 "민족적 자존심에 기초한 멘탈리티의 재생"이라고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촛불 독자성은 강화되고, 사회운동 영향력은 약해져"
 
그동안 미시사의 관점에서 사회운동을 연구해온 김원 박사는 11일 오후 <오마이뉴스>와 만나서도 "촛불시위를 주도한 중고생들을 '촛불세대'로 규정하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촛불시위의 양상·분위기·아우라가 과거 거리정치와는 분별되는 측면이 있다. 가족단위로 촛불시위에 나오는 경우가 많지 않았나? 전선을 쳐놓고 미느냐 밀리느냐는 문제로 치환되지 않고 잔치 혹은 페스티벌 성격이 상당부분 더해졌다.
 
중고생들이 인터넷 등을 통해 초기에 주도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은 더 두고 봐야 한다. 세대라기보다는 광우병 문제와 자신의 교육현실이 겹치고, 문자세대와는 다른 인터넷세대의 감수성이 결합돼 초기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김 박사는 중고생들의 촛불시위 참여 양상이 기성세대에게 충격을 주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신자유주의적·시장주의적 교육에 복종하는 애들로만 알았는데 스스로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 기성세대에게는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이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사유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성찰한 것이다."
 
이어 김 박사는 민족주의의 재현이라는 '촛불의 낡음'에 대비되는 '촛불의 새로움'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회운동의 영향력이 더욱 더 약해졌다. 2002년 촛불시위 때는 사회운동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2008년 촛불시위 현장에는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깃발을 만들어 나왔다. 거리정치에 대한 사회운동의 영향력이 퇴조한 것이다. 2002년과 대비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점이다."
 
즉 "촛불의 독자성은 한층 더 강화되고 사회운동의 무능력함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와 함께 김 박사는 "이는 2002년 촛불을 경험하면서 운동진영이 학습효과를 가진 결과이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더 이상 깃발을 내세워 일방통행적인 주장을 관철하는 것이 대중운동으로 전화하는 데 근본적 한계가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오히려 대중의 바다에 뛰어 들어가 거기서 토론하고 결정하는 것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 정치적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진보정당 실험할 게 더 남아있나"
  
또한 김 박사는 "사회운동과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이 촛불시위로 분출됐다"며 촛불시위가 한국사회에 '두 가지 성찰'을 가져다 주었다고 말했다.
 
 "하나는 더 이상 한국사회의 변화는 기존의 제도화된 정당이나 정당정치를 통해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촛불은 촛불이고 제도정치가 시민사회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앞으로 한국사회의 변화는 촛불시위든 거리정치든 대중지성이든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질 것이다.
 
 다른 하나는 더 이상 기존의 사회운동 패러다임을 고집했을 때 사회운동이 대중과 소통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대중의 호민관'이라는 패러다임으로는 대중을 이해할 수도 없고, 대중이 복무할 수 있는 언어공간도 확보할 수 없고, 그들을 사회적·정치적 변화의 장으로 끌어올 수도 없을 것이다. 이제 사회운동은 대중의 호민관으로서 역할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다. 사회운동 활동가들도 이번 촛불시위에서 그런 점을 학습했다고 본다." 
 
이런 분석의 연장선상에서 김 박사는 최근 촛불논쟁의 단초를 제공한 최장집 전 고려대 교수의 '대의제 민주주의론'과 관련 "현상 유지적인 생각"이라고 비판했다.   
 
"최장집 선생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최대치는 친노동자정당의 집권인 것 같다. 국가권력이나 정부행태의 변화·집권 등을 통해서만 좀더 풍부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친노동자정당의 집권을 돕는 시간에 상상력을 발휘해 다른 다양한 가능성을 사회 각 부분에서 추진하는 게 (새로운)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대의제 민주주의는 대중의 판단과도 부딪친다. 대중들이 투표와 선거에 참여해 자신의 이익을 반영할 수 있느냐?"
 
이 대목에서 김 박사는 "정당정치는 대안으로 쓸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다"라며 '진보정당 무용론' 혹은 '정당정치 무용론'으로 비칠 수 있는 도전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이미 "촛불집회에 대한 많은 해석들을 보면, 진보정당과 노동운동이 필요없는 이론들"(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작년이 87년이 20년 되는 해였다. 좋은 정당, 진보정당의 실험을 더 할 게 남았나? 더 이상 거기에 목을 매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파산 선고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히 한계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나? 대중들이 자신들의 일상적 문제를 자기문제로 표출하기에는 정당은 너무 낡았다. 그런 것들이 명백한데 계속 (진보)정당에 목을 매야 하느냐? (진보) 전당이 대안이라고 얘기해야 하느냐?"
 
이어 김 박사는 "대중의 우발성과 예측불가능성이 한국정치를 관통하는 특징이 아닌가 싶다"며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아래로부터 대중투쟁에 근거했을 때 형식적 민주주의가 실질적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계기가 마련된다"고 주장했다.
 
김 박사는 "대중의 우발성과 예측불가능성을 제도정치로 통제할 때 민주주의가 공고화된다는 주장은 현상유지적이고 보수적"이라며 거듭 '최장집 사단'의 견해를 비판했다. 
 
"대공장 남성 정규직 중심의 진보정당 노선을 재검토해야"
 
김 박사의 도전적인 주장은 '진보정당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핵심사업장인 대공장 노조  조합원들은 이랜드 투쟁은 물론이고 촛불시위에도 관심이 없다. 현재 노동운동의 상태가 이러하기 때문에 민주노조운동이 얼마나 생명력을 갖고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대공장 정규직 (남성)노동자들은 비정규직·여성·실업 등의 문제를 수수방관하고 있다. 진보정당은 대공장 남성 생산직 노동자를 주요한 조직대상으로 하는 현재의 정당운동의 패러다임을 재검토해야 한다. 노조운동이 지역·산업·계층을 달리하는 소수자와의 연대를 통해 사회적 변화를 꾀해야 한다."
 
김 박사는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생산직 노동자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이들의 지지가 취약하기 그지없다"며 '지지층 외연의 확장'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진보정당 원내 진입) 초기에는 '거대한 소수'를 운운했지만 지금은 지지기반이 얇아졌고 노동자층의 적극 지지도 사라졌다. 그래서 기존 기지층의 외연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촛불에서 제기된 이슈들을 중심으로 지구당 차원이든 지역투쟁 사례를 통해 촛불시위에 참여한 다양한 층들을 지지층으로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밑으로부터 지지층을 확산하고, 정당의 일상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채널과 소통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그런 작업이 사회운동과 진보정당 양쪽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특히 김 박사는 "지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풀뿌리 보수주의를 깨지 않으면 진보정치를 할 수 없다"며 "수도권이든 비수도권이든 아래로부터 풀뿌리 보수주의를 일상에서 깨는 노력과 실험을 하지 않는다면 보수가 주도하는 한국적 정당체제 속에서 진보정당이 장기적인 생존력을 갖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김 박사는 "촛불이 잦아들고 다시 일상이 조성됐을 때 촛불을 지지한 사람들은 자기 일상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와 관련, 그는 새로운 대안으로 검토할 만한 사례로 '이랜드 투쟁'을 언급했다.
 
"이랜드 파업이라는 비정규직 파업이 지역을 중심으로 소비자·노조·정당·사회운동과 동시에 결합됐다. 그래서 이랜드 투쟁은 지역화·집중화·전국화될 수 있었다. 이랜드 투쟁을 거치면서 '시민·비정규직·소수자 등의 일상적 정치활동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깨달은 것 같다. 촛불도 그런 활동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 박사는 "촛불만 따라다닐 것이 아니라 촛불이 던진 변화를 읽으면서 대중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정치활동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며 "그런 게 없는 상태에서 매주 촛불시위 하러 나가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꼬집었다.
 
"촛불은 대중투쟁의 정형화된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이명박 정권이 악수를 두면 촛불시위는 5년 내내 계속될 수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자기 생각을 사회운동과 결합하고 의식을 끌어올릴 때 (촛불시위처럼) 사회운동을 강화시키는 대중투쟁이 제자리를 잡을 수 있다. 기존의 사고를 바꾸고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실험을 이명박 정권 내내 계속 한다면 '진지를 갖는 사회운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원 박사는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 정치외교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공회대 사회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집위원, 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 한국 대학생의 하위문화와 대중정치>,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김진균학술상 수상작) 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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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기고] 촛불집회, 벌써 횟수를 줄일지를 고민할 때?


촛불집회, 벌써 횟수를 줄일지를 고민할 때?

[기고] 7월5일 ‘국민승리’ 선언했지만, 승리한 항목은 없다



지난 7일,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촛불 집회 주최 횟수를 줄인다"라고 발표했다. 대책회의가 주최하지 않는 날은 다른 단체들이 할 수 있도록 하고, 불매운동이나 국민투표 요구와 같이 다양한 운동방식을 병행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런 결정은 대책회의 내부 논의 과정에서 촛불집회의 방향과 관련된 진통이 있은 후 발표되었다. 촛불집회를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장기화하고 완강하게 진행하는 방식은 아니라는 입장이 있었다. 통합민주당을 참여시키고 국민투표를 제안하는 등 제도정치권 안에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집회와 행진이라는 집단적인 정치행위와는 다른 방식의 운동으로 전환해야한다는 일부 시민단체들의 입장이 반영된 결과다.

7월 5일 집회를 통해 촛불 운동의 승리를 선언했으니 이제는 좀 여유 있게 가도 된다는 뜻이었을까? 하지만 정작 상황은 더 녹록지 않다. 시청 앞 집회는 폭력적으로 원천봉쇄되고 있으며, 대책회의 실무진들은 수배자가 되어 조계사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집회 전단을 붙이던 시민이 연행되어 구속영장 청구를 받고, 조중동 불매운동에 동참한 네티즌들은 출국금지를 당하는 황당한 상황이다. 때마침 통합민주당은 국회 등원을 선언했다. 이런 국면을 지칭할 때에는 "승리했다"라는 말보다는 "역공당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해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이 과연 촛불집회 횟수를 줄이고 운동방식을 전환할 것을 고민할 때일까.

모든 개혁언론들과 대책회의조차도 "촛불분열"로 비추어질까 우려해서 부각하지 않고 있지만, 사실 촛불은 심각하게 "논쟁 중"이다. 진행 중인 논쟁을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말할 때, 오히려 진정한 쟁점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입장으로 결정되기 쉽다. 촛불집회의 방향에 대한 대중적인 토론이 지난 6월10일 대회 이후 이루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훨씬 더 심각한 방향전환이 이루어지는 이 순간에 논의는 오히려 대중적인 공간이 아니라 대책회의 운영위에서만 논의되고 있다. "대표성"도 불분명한 공간에서 말이다.


▲  7월 5일 촛불 집회/ 참세상 자료사진

시민들의 지지

모 인터넷 신문에 실린 박원석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의 최근 인터뷰를 보자. “촛불집회의 주장에는 공감하지만 집회를 지속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도 많은 만큼, 운동의 방식을 다양하게 만들어갈 필요가 있었다”는 언급이 있다. 개인의 입장이라기보다는 대책회의 안에서 진행된 논의의 결론을 소개하는 발언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지금의 상황을 보자. 다른 운동방식이 나오기도 전에 촛불집회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집회를 지속하려는 조직된 노력이 사라지는 사이에, 자발적으로 모이는 소수의 시민들은 고립되고 있는 상황이다. 시청광장에서 이루어지는 시민들의 고립이 그 "다양한 운동방식"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이제까지 촛불 운동이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왔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야 할 때다. 그리고 이 운동이 완강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생각할 때다. 그것은 "촛불집회"라는 집회의 독특한 양식 --아마도 "평화로울" 것이라고 기대되는--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요구 사항에 시민들이 공감했기 때문임을 기억하자. 오히려 집회의 양식은 "촛불"이라는 상징만 일관되게 유지되었을 뿐, 시기에 따라 꾸준하게 변화해왔다.

특히 그 요구라는 것은 비록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로 촉발되었지만, 공기업, 의료 등 공공서비스 민영화 반대, 대운하 반대, 정권의 교육정책 반대 등으로 확장되어 온 것이 이제까지 과정이다. 이 촛불 공간 속에서 시민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불만을 자신의 언어로 발견하고 발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집회는 매순간 문화제에서 침묵시위로, 가두행진으로, 전경차 끌어내기로, 그 양식의 다양한 변화를 겪으면서도 요구를 꾸준히 확대해왔다. 대책회의가 머뭇거리는 사이에도 "정권퇴진"을 외치는 상황에 이르렀다.

대책회의 내 일부단체들이 촛불집회 축소의 대안으로 제시한 쇠고기 재협상을 의제로 한 국민투표라든가, 미국산 쇠고기 불매운동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요구가 이미 시민들의 목소리로 분출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부 시민단체들이 신자유주의 반대로 촛불을 확장해가는 시민들을 오히려 뒤에서 발목을 잡고 후진하려는 상황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시민들의 대표를 자임할 근거가 있을지, 아니면 대책회의 기존 집행위가 구속, 수배된 이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이들이 적어도 지금까지 진행된 촛불집회에 어떤 발언권을 요구할 수 있는지까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 반대, 요구를 더 확대하고, 밀고갈 때

여전히 문제는 시민들이 외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대를 더 확장하고 구체화하고, 일관되게 전선으로 모아내는 일이다. 공기업, 의료 등 공공서비스 민영화 반대, 대운하 반대, 정권의 교육정책 반대와 같은 것들이 단지 이명박 대통령이 "미친" 놈이기 때문에 하는 정책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일관성을 가진 사회, 경제 정책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하고 싸워가도록 투쟁을 지속하는 일이다. 비록 대책회의는 "국민승리"를 선언했지만 정작 승리한 항목은 어느 것도 없기 때문이다.

공기업 민영화는 이름만 "선진화"라고 바꾸어 추진되고 있다. 정부가 7월2일 발표한 "경제안정 종합대책"(2008년 하반기 경제운용방향)에서는 여전히 공공부문 구조조정과 민영화를 추진하겠다는 내용을 "공기업 선진화 방안" 항목 안에서 제시하고 있다. 정책발표 시기만 두어달 늦추어서, (아마도 정세가 반전되리라 기대되는) 8~9월에 할 뿐이다. 대운하만 하더라도, 촛불집회가 사그라든다고 판단할 때 언제든지 다른 이름으로 부활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3일 대운하와 관련해서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그룹의 검토가 있었으면 좋겠고, 이것을 국민들이 한 번 더 들어보고 판단하는 게 어떻겠냐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다시 추진할 의사도 있음을 밝히고 있다.

운동의 방식을 다양하게 확장하는 것도 의미 있다. 각자가 할 수 있는 것을 더 잘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핑계로 촛불집회로 상징되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정권반대 투쟁을 고립시키는 것은 정권이 원하는 것일 뿐이다. 이미 청와대는 7월5일 대책회의의 청와대 면담과 관련하여 "촛불집회 중단"이 조건이었다고 밝히지 않았는가? 그것은 현재 국면을 정리하려면 우선 시청광장의 촛불집회라는 상징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먼저 알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히려 더 완강하고 끈질긴 싸움과 요구의 확장이다.

노동운동의 계속된 무능

한편, 이러한 과정에서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의 대응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노조운동은 이 국면에서 거의 중요한 쟁점들에 대해서 "거저먹은" 셈이다. 특히 공공부문이 그런데, 촛불집회의 과정에서 여론악화를 우려한 정부가 가스, 전기 등 기간산업과 건강보험의 민영화 포기 등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물론, 공기업 민영화가 아니라 "선진화"라든가 건강보험 민영화 포기라는 것은 영리병원 허용과 같은 의료민영화 정책이 계속 추진되는 한 말장난일 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애초에 이명박 정권의 주요관료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올해 안에 끝내는" 상황은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노동운동은 자신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고유한 요구를 제대로 촛불집회에 결합시켜오지 못했다. 예컨대, 의료, 교육, 공기업사유화 등 다양한 곳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대가 결합하는 와중에도 왜 신자유주의 문제의 결정판인 "비정규직 문제"는 거의 언급하지도 못했을까? 불안정노동철폐연대와 같은 일부 단체들이나 비정규직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고, 이주노조 캠페인도 벌어졌으며 이랜드, 뉴코아,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촛불집회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결합하긴 했다. 그러나 너무 미약한 시도였다. 정작 광우병 대책위 안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라면 가장 "정통할" 민주노총이 제기하지 않는 마당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저임금 노동자의 생존권이라고 할 최저임금 현실화와 같은 쟁점을 광장에서 결합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노조운동은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에 노조가 관련된 주요한 과제 중 하나(공공부문 사유화 저지)에 대해서는 단지 무임승차했으며, 또 다른 하나(비정규직 철폐)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못한 셈이다. 비록 운수노조를 중심으로 한 미국산 쇠고기 반출 저지 투쟁, 총파업이 있기는 했지만 노동자들의 요구가 시민들의 다른 요구와 다르지 않음을 시민들에게 말하고 함께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이 거대한 싸움이 진행된 과정에서도 노동운동은 여전히 광장의 시민들에게는 "손님"에 불과한 상황이다.



촛불의 양면성 속에서 우리는 어디로 더 전진할까

굳이 노동운동 이야기를 꺼낸 것은, 촛불 행진이 어디로 더 확장되어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다. 지금의 촛불집회는 여전히 양면적 혹은 복합적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대중이 모인 것을 기억한다. 그 기억 속에서 미선이, 효순이 살인미군 규탄 촛불도 있지만 노무현 탄핵반대 촛불, 월드컵의 붉은 악마라든가, 군 가산점 논쟁, 황우석 논쟁, 영화 디 워 논쟁과 같은 것도 있다. 정치적 불만이 표현되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인터넷과 미디어 문화 속에서 형성되고 강화된 맹목(그것이 불과 직전에는 민족주의적이거나 발전주의 같은 것이기도 했다)이 확산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2008년 촛불은 어딘가에서 돌출한 사건이 아니라 이런 맥락에서 형성되어온 현상이라는 점에서, 이 유례없이 완강한 촛불집회도 여전히 복합적인 성격을 그 안에 갖고 있다.

이 속에 있는 어떤 경향은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것처럼 신자유주의 반대를 위한 운동으로, 일상의 민주화와 문화혁명으로 발전해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또 어떤 경향은 운동의 부정적 수렴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도록 한다. 따라서 촛불집회의 요구를 쇠고기 수입문제에 가두지 말고 더 열어가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촛불 안에서도 사회운동들의 역할이 여전히 존재한다.

또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여러 주체가 이 운동 속에서 만나고 결합하면서 하나의 방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여성도 시민이라는 것을 촛불 광장에서 확인하는 일도 그래서 중요하다. 촛불집회에서 "시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노동자=시민", "이주노동자=시민", "여성=시민"들이기도 하다. 그것을 광장에서 "국민"으로 불리는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대화하고 논쟁하면서 주체와 쟁점을 열어가야 한다. (그럴 때, 사회운동도 광장의 시민들로부터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운동을 결산할 때 인터넷 카페나 다음 '아고라'만은 아닌 다른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운동의 조직화"를 사고할 수 있다.)

대책회의가 말한 것처럼 촛불집회가 가야 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임은 분명하다. 이 운동이 퇴행하지 않고 더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촛불집회와 행진에 참여했던 모든 시민들이 함께 고민해야할 시점인 것이다. 더구나 대책회의를 통해 시민들의 대표를 자임하고 있는 사회운동들이라면 이 논의에 참가하는 책임은 더 엄중하다는 점을 명심해야한다.(그 대표성을 비록 아무도 인정해준 적은 없지만 그 현실적 영향력이란 것이 어쨌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렇다.)

이미 해왔던 것처럼 이명박 정권은 자신들의 경제정책으로 인한 물가폭등, 민생파탄의 책임을 촛불집회에 물으면서 정세를 역전시키려할 것이다. 정권도 이제 쇠고기 협상 문제없었다는 말만 되뇌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쟁점이 이미 그것만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록 전술적으로만 생각하더라도, 이때 필요한 일은 광장에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광장을 지키고 넓혀가는 것이다. 정세의 쟁점은 정권 스스로에 의해서도 이미 광우병 쇠고기 수입만이 문제가 아닌 것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고, 시민들이 먼저 모든 방면에서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신의 요구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쟁점들에 대해서 시민들과 사회운동이, 다시 광장에서 촛불의 방향을 토론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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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박한 정세가 공공노조에 요구하는 것들을 합시다!

이 상황에 대한 책임있는 결합논의가 하도 지지부진하여 답답한 마음에 새벽에 써서 임원 사무처 동지들에게 메일로 뿌린 글입니다.

각급 대중조직 단위가 굼뜨기 그지 없는 상황에서 모든 방면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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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투쟁 정세에 대한 대응과 관련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공공노조 임원 사무처 동지들에게 드립니다.

그 저 사무처 한명으로서 발언에 무게도 없고, 내부 조직화의 실력도 없고, 다음 사무처 전체 회의는 담주나 되는데, 정세는 너무나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소 염치 불구하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뭘까 생각하다가 동지들에게 메일을 한 통 띄웁니다.

운동권 앞에 멀찍이 앞서가는 대중들 : 공공성으로, 이명박 반대로 확산되는 쟁점

오늘도 촛불집회와 거리 행진을 다녀와서 집에오는 새벽 세시입니다. 오늘도 경찰의 집회 완전봉쇄를 뚧고 거리로 진출, 가두시위를 진행했습니다.
며칠동안 계속 매일의 야간 집회, 가두행진에 참석하면서, 매일 점점 달라지는 하나의 추세를 느낍니다.
광 장에 갇혀있던 시민들이 거리로 나가기 시작한 지난 토요일 이후, 대중들은 더더욱 운동권들보다 멀리 나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지금 정세에서 가장 주도적인 대응을 하고 있는 정파인 '다함께'에 대해서 조차 대중들이 더 나갈 것을 요구하고, 통제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 오마이뉴스 기사 참고 : 촛불들을 '지도'하지 마세요 촛불시위 참가자가 운동그룹 '다함께'에 보내는 공개편지)

대 중들은 이제 광우병 쇠고기를 넘어 이명박의 퇴진/탄핵/하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명박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대중의 반대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서명운동을 선전하면서 그냥 "가스 민영화, 의료 민영화를 반대하는 서명입니다"가 아니라 앞에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는"이라는 한 구절만 더 들어가면 대중들의 반응이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그냥 지나쳤을 시민들입니다. 이 시민들이 서명을 하면서 "의료 민영화는 절대 안되", "가스도 팔아먹어?" 라고 혼잣 말을 하면서 서명합니다.

자, 이제 대중들은 파편적으로만 느끼고 있던 삶의 불만들---의료 민영화에 대한 불안, 물가인상, 교육문제, 광우병 쇠고기와 식품안전.. 등과 같은 문제를 그 본질 "이명박 정권"의 문제로 연결해서 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명박에 대한 반대와 공공부문 사유화/시장화에 대한 반대가 굳건히 결합한 만큼, 이명박 반대 투쟁의 성패는 공공성 투쟁의 성패와 직결됩니다. 이것이 우리노조가 특히 인식해야할 핵심적인 정세의 한 부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그렇게 평상시에 선전하고 알리려고 했던 것들, 신자유주의 정책의 폐해, 민영화/시장화의 문제점에 대해서 대중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의 문제이자 정치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기업 투쟁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걱정하던 때는 갑자기 너무나 오래전으로 느껴집니다.

조합원의 분신항거, 그러나 다른 3년의 차이 : 이용석과 이병렬 사이

그리고 우리 조합원 동지가 분신했습니다. 지난 이용석 열사 분신 때를 생각합니다. 불과 3년여 전입니다.
당 시 연맹은 신속하게 비상중집, 단위노조 대표자 회의를 신속하게 소집하고 투쟁방침을 결의하고 매일 집회를 조직하고 투쟁했습니다. 비정규직문제에 대한 관심이 이제 막 형성되던 어려운 시기였지만 우리는 이 투쟁을 민주노총 전체의 투쟁으로 만들어갔습니다.

지금, 우리의 대응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전 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쟁점인 쇠고기 수입반대, 이명박 반대 투쟁의 요구로 분신한 이병렬 조합원의 분신항거에 대해서 우리 조직이 가지는 긴장감이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전조직적인 긴장을 걸고 조직하는 노력도 저 스스로도 너무나 부족합니다. 조직동원, 문안동원 등 모든 측면에서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 집행되고 있지 못합니다. (물론 분신조합원의 진정한 "뜻"에 따르는 조직동원은 청계광장 집회 조직화일 것입니다.)

이제 조합원을 조직해야할 시기

비 상한 시기입니다. 대중들이 공공서비스의 문제를 남의 일이 아니라고 느끼고 있고, 정세를 운동권들보다 더 정확하게 "총체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더 멀리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주노총 지도부가 청계광장에 주저앉아 '재협상'을 외치는 순간에, 대중은 청계광장을 박차고 거리고 나가서 "이명박 탄핵/퇴진"을 외치고 있습니다. 전체 운동의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노조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 시기가 바로 투쟁해야할 시기이고 이명박의 공공부문 사유화 시장화를 막을 수 있는 동맹군을 거리에서 직접, "공짜로" 찾을 수 있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정세에서 노조가 보다 주도적으로 조합원들을 집회에 조직하고 투쟁이 더 강력하게 더 길게 전개될 수 있도록 결합해야합니다. 집회에 나가서 거리를 행진한 동지들은 말합니다. 마치 87년이다!라고 말입니다. "민주시민 함께 해요"라는 구호에 시민들이 동참하고 순식간에 수배로 행진 대오가 불어납니다. 그러나 장관 고시가 이루어진 이후에 상황은 장담할 수 없고, 거리에서 행진은 여전히 혼란스럽습니다. 보다 안정적인 대오가 일종의 "코어"를 형성하고 대중들이 모일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30일 장관고시 이후 이명박이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무기로 하여 반격하지 못하도록, 현재의 이명박 반대 정세를 계속 밀고 가야합니다.이명박  정권의 정치적 신뢰성을 완전히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아예 공공부문 사유화/시장화는 말도 꺼낼 수 없게 쐐기를 박아나가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새 정세는 (특히 우리 공공부문 노조운동에 매우 불리하게) 역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직된 기본대오가 투쟁에 결합해야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집회 참여를 통해서 조합원들도 관성화된 동원식 집회가 아니라 직접 나서는 "민주시민"의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조합원들에게 놀라운 정치적 경험의 공간을 열어줍시다.

물론 어렵습니다. 공공부문 구조조정, 사유화, 시장화에 대한 현장의 긴장이 아직도 충분치 않습니다. 노조의 활동시간도 부족하고 조직력도 취약합니다.
그 러나 그 때문에 오히려 노조 중앙으로부터 적극적인 결의와 조직화가 필요합니다. 필연적으로 단위사업장의 시야게 갇일 수밖에 없는 기업별지부의 집행부보다 전체 운동과 정세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위치게 있는 것이 산별 중앙입니다. 우리가 먼저 현장을 조직해야합니다.

잊어서는 안될 역사의 교훈 : 1968년과 1987년

어찌 보면 지금의 행진은 철없는 10대, 20대의 냄비현상으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실제로 어떤 분은 그런 말씀도 하시더군요.)
그러나 87년 항쟁도 20대 초반 대학생들이 주축이었습니다. 1968년 세계혁명은 10대후반 20대 초반의 대학생의 투쟁이 촉발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운동의 새로운 세대입니다. 그들의 진출을 엄호하고 함께 해야합니다.

지금은 마치 40년전 1968년 혁명을 똑같이 떠올리게 합니다. 좀 장황하지만 역사를 돌아봅시다.
프 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미국, 중국, 동유럽 등에서 벌어진 혁명들말입니다. (프랑스, 독일에서 배워야할 것은 산별조직모형이나 협약적용률 이전에 이러한 투쟁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에서 그해 5월3일 폭발한 학생반란은 바리케이트를 쌓고 시가전을 벌이면서 빠리에서 1000여명이 부상하고 500명 가까이 연행되는 사태로 발전합니다. "우리의 꿈은 그들의 악몽이다"라는 구호가 현실화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프랑스 공산당은 '사이비 혁명가', '젊은 치기'라며 냉소적인 반응으로 일관했고, 노동총연맹CGT도 남의 일로 치부하고 관망했습니다. 뒤늦게 노동총동맹이 항의파업을 선언했을 때, 오히려 지도부의 예상을 넘어 기층의 노동자 80만명이 시위에 참석합니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 공산당과 노조는 끝까지 "공화국 수호"와 "임금인상""만을 요구하면서 거리시위의 대중운동과 자신을 분리시킵니다. 결과는? 불과 며칠 후에 드골은 반격하고 정세는 급변합니다. 우익의 대규모 시위가 조직되고 파업은 경찰의 공격으로 파괴됩니다. 이어진 총선거에서 우익 드골이 압승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광범위하게 후퇴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단지 한 달여 동안의 일입니다. (5월3일의 봉기로부터 5월30일 드골의 반격) 이후 프랑스 노동운동은 갈갈히 분열되어갑니다.

먼 나라 이야긴가요? 집회 행진 대오의 분위기가 87년 같다는 말을 이구동성으로 합니다. 87년 우리 역사는 또 어떻습니까? 비록 6.29 항복 선언 이후 일주일여만에 7월6일 현대엔진 노조결성으로 시작된 7,8,9 노동자 대투쟁. 그러나 6월 항쟁과 분리된 시간 속에서 진행되면서 이 투쟁이 정치체제 자체를 바꾸어내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거꾸로 이미 조직된 노동자 대중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87년 6월 항쟁과는 또 다른 결과를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대중들의 진출에 조직된 노동자들이 어떻게 결합하는가는 지금 정세가 어디로 어어질 것인가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민주노총이 이제까지 "이익집단"이라는 (상당히 근거있는) 비판을 벗어나 대중의 이익을 위해 싸운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시기입니다. "사회공공성"을 말하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경제적 요구를 넘어서 사회적 이익을 위해 진심으로 싸우자고 말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 입니다. 지금같은 시기가 아니면 언제가 그 시기겠습니까?

"준비되면 언젠가"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 우리의 요구로 투쟁할 정세

조 직적으로 조합원이 결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침, 과감한 조직동원도 필요할 것입니다. 다소간의 희생은 감수하고라도 교섭결렬-조정결렬-찬반투표 일정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민주노총, 연맹, 산별노조 차원의 몇시간 총파업이라도 나중에 "준비되면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조직합시다. 구체적인 조직동원 지침을 매일의 집회에 내립시다. 그리고 특히 30, 31일 집회에는 조직을 총동원해서 결합합시다. 이를 위한 논의공간을 만들고 조직적 결의를 만들어내야합니다. 지금 정세에서 대중들이 패배하면 우리가 싸울 공간은 아예 없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거리에서 한명 한명의 시민들이 능동적인 역사의 행위자들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단지 노조간부이기 이전에 노동운동, 사회운동의 활동가로서 임무가 있습니다. 아니, 노조간부로서의 역할만으로 "실리적"으로만 보더라도 우리노조의 투쟁요구를 관철할 수 있는 최적의 투쟁시기입니다. 현장의 조합원들도 이런 정세를 느끼고 있습니다. 노조 외부의 사회적 정세가 오히려 조합원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간부들은 조합원들이 진출할 수 있는 "판"을 만들 의무가 있을 것입니다.
보다 과감하게 투쟁을 조직할 것을 호소합니다.

너무 주제넘게 일개 사무처 활동가가 글을 드렸습니다. 주제넘다고 생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주제'보다는 운동이 중요하니 고민고민 끝에 동지들에게 개인적으로 글을 드립니다. 장황한 글이다보니 오히려 동지들의 시간과 열의만 빼앗은게 아닌지 걱정입니다. 저보다 이 정세에 대한 고민이 훨씬 더 넓고 깊은 동지들도 많이 계신것을 보기도 했으니 더 그렇습니다.

관심있게 보셨든 아니든, 많이 동의하시든 조금만 동의하시든, 다만 고민의 계기라도 되었으면 합니다. 많은 동지들이 집회 장소에서, 뒤풀이 술자리에서, 삼삼오오 담배피면서, 옆자리 동료들과 이런 쟁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고민들을 구체적이고 조직적인 실천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을 함께 할 것을 또한 호소드립니다.

부족하고 산만한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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