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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6/10
    노무현추모 비판과 반비판들
    겨울철쭉
  2. 2008/07/15
    촛불에 대한 까질한 그러나 흥미로운 인용
    겨울철쭉
  3. 2008/07/15
    [펌-김원]아직도 진보정당 실험할 게 남아있나 + 덧붙여 (1)
    겨울철쭉

노무현추모 비판과 반비판들

 
<노무현 추모 비판에 대한 최원씨의 반비판에 대한 답변
>


참세상에 기고한 <사회운동, 노무현의 그림자에 안녕을>이라는 글에 대해서 최원씨가 논쟁을 제기하셨군요. 글들의 순서는 이렇습니다.

(1) 참세상에 기고한 글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renewal_col&id=1629&page=1
 
(2) 최원씨의 비판 (및 댓글에 저의 답변, 이에 대한 최원씨의 반비판-질의)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ers_news&nid=53282
 
(3) 최원씨의 저의 댓글에 대한 반비판-질의
http://blog.aladdin.co.kr/trackback/droitdecite/2888296

답변을 요청하시지만, 제가 깊이 논쟁할 사정은 되지 못해서 몇가지만 간단히 적겠습니다. (3) 글에 트랙백을 겁니다.

첫째.

최원씨가 저에게 묻기 전에 먼저 답해야할 것이 있을 겁니다.

제가 (2)에 대한 댓글 답변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말이죠. 저는 노무현 추모동참이 정신분석학적 의미에서 "애도"라고 등치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둘을 혼재해서 쓰시는 것으로 보이는데, 제가 보기에는 다른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김진숙 지도위원은 노무현을 "애도"하고 있지만 "추모"에 동참하는 정치적 실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 둘을 어떤 근거로 연결할 수 있는지 오히려 궁금하군요.

둘째,

제가 쓴 글중에 가장 문제제기하시는 부분이 "정세에 대해서 정치철학적 혹은 정신분석학적 비판과 정치적 분석은 하나의 실체에 대해서이지만, 사실상 다른 대상을 다루는 작업일 겁니다"라는 대목입니다.

"정치철학적 혹은 정신분석학적 비판"에서 <혹은>이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한 이유는 최원씨의 논평이 양자의 경계에 있거나 혹은 그 경계를 흐리는 방식의 작업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데리다의 "유령론"이 과연 학제상 정치철학에 속하는지 정신분석학에 속하는지 모르겠지만, 최원씨가 사용하는 논거의 하나가 아닌가요?) 첫번째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마치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처럼 가능하지 않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최원씨는 글에서 "노선 차이이지, 정치철학 대 정치의 대상 차이라고 보이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는데요, 문제는 노선상의 차이를 드러내는 최원씨의 논거가 정세분석보다는 주로 정신분석학이나 정치철학에 근거해있다는 점입니다.

세째,

이에 대해서 "노무현 사망이라는 사건 이후 어떻게 변했길래, '하던 거 계속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시는지" 물으셨습니다.

제 글 중에 "노무현을 상대화하고 다른 쟁점들을 부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민주주의의 문제와 분리되어있다거나 혹은 하던것 계속하자는 식에 불과한 것(따라서 기존의 실천과 다른 효과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는 뉘앙스가 깔려있는)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죠"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던 거 계속하자는 거 맞습니다. 하지만, 대중의 분노가 노무현 사망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가시화"되는 이상, 오히려 하던 거 잘 하는게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 분노를 노무현 사망을 "매개"로 자신들에 대한 정치적 지지로 조직하려는 또다른 신자유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경합한다는 것입니다.

네째,

질의하신 "3번"은 말 그대로 노선상의 입장차이이겠죠. 그에 대해서는 별도로 글을 쓸 생각이니 간단하게만 언급하자면,

6.10 집회(저는 2부 노무현 추모문화제 시작될 때에는 자리를 떳습니다만)에서 주된 구호는 (오마이뉴스의 헤드라인을 인용하자면)
"민주개혁 세력 하나됐다, 2012년 정권을 바꾸자"
라는 겁니다.

민주당이 주도하는 6.10준비위를 상설연대체로 전환하자는 것은 확정되어 있고, 이후 내년 6월 지자체선거, 2012년 총선, 대선을 공동대응하자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결국 87년 "국본"처럼 보수야당의 주도아래 전선이 형성되고, 민중운동이 여기에 복무하는 판인 셈입니다. 오마이뉴스의 저 헤드라인, 그리고 집회 현장에서 사회자와 연사들의 발언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지난 10여년간 사회운동이 제기해온, 보수야당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운동의 형성과정이, 한순간에 22년 전으로 후퇴하는 것이죠. 이명박이 20년전으로 후퇴했으니 우리 대응도 그러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어쩔 수 없겠습니다. 이런 정세에서 민주주의 제기를 중심으로 실천하자는 주장의 정세적 의미도 명확합니다.

---
충분한 답변은 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노선 상"의 입장차이에 대해서라면 몇번의 트랙백 토론으로 생산적인 무엇이 있을까도 싶군요. 당장 운동판에서 "실용주의"를 빙자한(이명박 당선후에 운동판에도 "실용주의"가 유행이죠.ㅋ) 기회주의와 싸우기에도 정신없는 상황이기도 하니까요.

최원씨의 주장이 그런 정치적 기회주의와 같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의 정세에 개입하는 순간 같은 효과를 낳는 것으로, 심지어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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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에 대한 까질한 그러나 흥미로운 인용

촛불집회에 대해서 아래 남긴 글의 맥락에서, 촛불집회의 긍정성과 함께 다른 면, 양면성을 보아야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사고와 정치적 행동이 전진할 수 있지요.

그런 점에서 흥미로운 글이 떠올라서 일부를 인용해봅니다.
문화연구 시월의 신병현 교수님이 쓴 <“새로운 자본주의” 담론구성체>라는 글의 일부입니다. 자율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글입니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촛불에 대한 자율주의자들의 시각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해당 논문은 문화연구 시월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http://www.siwall.net/main/openDB_1.htm   게시판의 28번 글입니다.)

특히 신자유주의로 전향한 NGO들에 대한 언급은 2기 범국민 대책회의를 "주도"하고 있는 일부 NGO들을 상기하도록 합니다. 아울러 Netwar에 대한 부분은 현재의 촛불집회를 직접 지칭하는 듯하지요.

인용을 읽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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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담론들에서 NGO들은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조응하면서 ‘유능한 통치’(good governance)의 수단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Netwar에 대한 미군 협력 연구소인 Rand Arroyo 센터의 관심이 매우 흥미롭다. ‘정보화 시대’에 동조된 “네트워크적 조직형태, 신조, 전략, 기술에 의거한 범죄 및 갈등”으로서 Netwar는 인터넷과 같은 새로운 통신기술을 사용한다는 점뿐 아니라, NGO와 같은 수평적 네트워크를 동원하는 것에 의해 특징지어지며, 이런 운동들에서 NGO는 “변혁운동의 낡은 위계구조를 대체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아로요 센터의 보고서에서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사회운동체들의 초국적 운동들은 그렇게 위협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사회 및 정치적 개혁에 박차를 가하도록 하는 긍정적인 결과도 갖고 있으며”, “미국은 심지어 Netwar를 조장하거나 그로부터 이득을 취할 수도 있고” NGO와의 관계 조율을 통해 Netwar의 경로와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조언한다.((Morris-Suzuki, 2000, 63-4)

 이 예는 “정보화 시대‘에 변화의 핵심적인 행위자들이 유연하고 네트워크화 되고 초국적인 사회운동체들이라는 이미지가 광범하게 수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NGO나 네트워크화된 사회운동체들이 더 이상 전 세계적 자본운동의 힘에 저항하는 해방적 잠재력을 가진 진보세력으로 보는데 의구심을 갖도록 한다. 그 뿐 아니라, 기금공여자들에 의한 감사 기준이나 성과 표준을 충족시킴으로서 지속적인 기금수혜자로 남기 위해 더욱 공식화되고 소수 엘리트의 역량에 의존해 가야하는 NGO 활동에 대한 실천가들의 많은 고민이 표출되고 있기도 하다.(Wallace, 2004; Hawkesworth,2002)

 이러한 담론들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기 전 세계적 범위에서 통치 기법에 대한 탐색과 적용이 일반화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원격적이고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통제를 위한 기법을 찾으려는 공명하는 담론 계열들에 관한 푸코주의적 논의를 생각하게 한다.(Barry et al,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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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twar는 위키에서는 이렇게 설명하네요.

Netwar
is a term developed by RAND researchers John Arquilla and David Ronfeldt to describe an emergent form of low intensity conflict, crime, and activism waged by networked actors. Typical netwar actors might include transnational terrorists, criminal organizations, activist groups and social movements that employ decentralized, flexible network structures.

테러리즘만이 아니라 최근의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이러한 방식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특히 탈중회되고 유연화 네트워크 구조라는 언급은 이번 촛불과도 닮았습니다. 문제는 본문의 지적처럼, 이것이 권력에 의해서 통제될 수도 있다는 것, 그 매개는 신자유주의적인 NGO들이라는 점입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netwar에 개입할 수도 있죠. 그리고 그것이 사회운동의 방식으로는 위협적이지 않다고 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관련해서는 <네트워크 전쟁>이라는 책이 여기서 지적하는 랜드 연구소의 보고서인 것같군요, 주문했는데 오면 읽어볼 생각)


네트워크 전쟁 - 테러범죄 사회적 갈등의 미래
존 아퀼라 (지은이), 한세희 (옮긴이)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5년 11월

여튼, 이런 점에서 현재의 촛불집회에 의미있게 결합하면서도 그 양면성을 사고할 수 있어야 우리가 과연 어디로 가야할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폭발하는 대중운동 속에서 지성에게도 모종의 역할이 있다면 그런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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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김원]아직도 진보정당 실험할 게 남아있나 + 덧붙여

김원 선생의 인터뷰가 오마이뉴스에 실렸군요.
 
 
문제의식에 많이 공감합니다. 마침 지난 주말에 김원 선생 등이 신병현 선생 등과 작업해서 발간했던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을 읽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던 상황에서 반갑기도 합니다.(오랜만이 리뷰라도 써야할 것같다는;;)
 
 
 
글을 읽고 나서 찾아보니, <지행네트워크>라는 곳에 관련된 글을 이미 쓰신 적이 있군요.
 
http://jihaeng.net/blog/111 (촛불은 계속 타오를 것인가)
 
 
 
한달 넘은 글이긴 하지만, "긴박한" 정세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사점이 생생한 글입니다.
 
 
한편, 아래 제가 쓴 참세상 기고와 관련해서 사회진보연대 게시판에 이런 글을 썼었습니다. 또 보니, 김원 선생의 글을 보면서 한번 더 생각하게 되는군요.
 
 
다만 저는 여전히 활동가입장인지라, 현재 정세에 사회운동이 어떻게 "전술적으로" 개입해야하는지가 더 고민이긴 합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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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나서 생각해보니, 자연스럽게 참세상에 올라온 다른 기고문들과 모종의 쟁점을 형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원영수(노힘)씨의 글
그리고
 
김강기명 씨의 글
과 그렇습니다.
 
후자는 자율주의에 가까운 입장이라면 전자는 (원영수씨의 원래 포지션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신좌파적 입장일텐데,  둘다 촛불의 승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보다는 촛불 안에 있는 모순적 요소를 봐야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운동이 자신의 역할을 가진다는 입장입니다. 역설적으로 좌파들이 완전히 무관심하거나 혹은 이런 방식으로 열광하거나하는 사이에 가장 영리한 대응을 하는 것은 여연 등의 NGO들입니다. 자신들이 어느 지점에 개입해야하는지 알고 있지요.
 
그래서, 이번 촛불국면에서 충분히 배워야하고 싸움에 최선을 다해야하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이어선 안될 것이고, 무엇보다 사태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열광보다는 과학적 분석과 이해)
 
이런 식으로 말하면 뻔하게 "좌파 먹물들 운운"하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겠군요. ㅋㅋ
하지만, 참여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참여"가 더 중요하게되는 시점이니, 좀 봐주시면 좋겠습니다.ㅎ
 
여튼간에 자율주의자들의 반응은 뻔하다고 치고, 다소 놀라운 것은 (이미 리보위츠의 글[21세기 사회주의]을 번역할 때부터 그랬던 것같기는 하지만) 원영수씨의 이런 입장은 좀 놀랍기도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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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좀 긴 사설.
 
 
 
아래는 퍼온 글입니다.
 
 


  아직도 진보정당 실험할 게 남아있나
  [촛불논쟁-거리정치인가 정당정치인가?⑥] <여공 1970…>의 저자 김원 박사
    
촛불에 상찬을 늘어놓은 다른 지식인들에 비해 그는 차분했다.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2006년)>란 책으로 주목받았던 김원 박사(정치학)는 6월 중순께 발표한 글에서 "아이들의 촛불을 보며 지나치게 부끄러워하거나 환호해서는 안된다"며 침착하고 냉정한 시선을 주문했다.
 
"우리는 이미 2002년 촛불이 어떻게 잦아들었으며, 당시 촛불을 든 아이들이 88만원세대가 되어 고용불안 속에서 '경제를 살려준다'는 보수정당에 투표하는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김 박사는 '촛불이 일상으로 들어왔을 때'를 언급하며 비판적 시각을 이어갔다.
 
"한달 전 뉴타운 건설에 열광했던 집단이 갑자기 촛불 속에 자신을 불태울 수 있을까? 한국정치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거리의 정치가 순간 잦아들면서 일상으로 대중들이 돌아갈 때, 시민사회의 '풀뿌리 보수주의'는 다시 강력한 흡인력을 보이며 대중을 빨아들였다. 이 점에서 촛불로 한국 시민사회의 풀뿌리 보수주의가 변화했다고 판단한 것은 경솔한 판단이다."
 
심지어 김 박사는 "(2002년 촛불에 이어) 2008년 촛불에도 '민족주의'는 지속적으로 존재하며 힘을 발휘하고 있다"며 이를 "민족적 자존심에 기초한 멘탈리티의 재생"이라고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촛불 독자성은 강화되고, 사회운동 영향력은 약해져"
 
그동안 미시사의 관점에서 사회운동을 연구해온 김원 박사는 11일 오후 <오마이뉴스>와 만나서도 "촛불시위를 주도한 중고생들을 '촛불세대'로 규정하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촛불시위의 양상·분위기·아우라가 과거 거리정치와는 분별되는 측면이 있다. 가족단위로 촛불시위에 나오는 경우가 많지 않았나? 전선을 쳐놓고 미느냐 밀리느냐는 문제로 치환되지 않고 잔치 혹은 페스티벌 성격이 상당부분 더해졌다.
 
중고생들이 인터넷 등을 통해 초기에 주도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은 더 두고 봐야 한다. 세대라기보다는 광우병 문제와 자신의 교육현실이 겹치고, 문자세대와는 다른 인터넷세대의 감수성이 결합돼 초기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김 박사는 중고생들의 촛불시위 참여 양상이 기성세대에게 충격을 주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신자유주의적·시장주의적 교육에 복종하는 애들로만 알았는데 스스로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 기성세대에게는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이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사유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성찰한 것이다."
 
이어 김 박사는 민족주의의 재현이라는 '촛불의 낡음'에 대비되는 '촛불의 새로움'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회운동의 영향력이 더욱 더 약해졌다. 2002년 촛불시위 때는 사회운동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2008년 촛불시위 현장에는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깃발을 만들어 나왔다. 거리정치에 대한 사회운동의 영향력이 퇴조한 것이다. 2002년과 대비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점이다."
 
즉 "촛불의 독자성은 한층 더 강화되고 사회운동의 무능력함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와 함께 김 박사는 "이는 2002년 촛불을 경험하면서 운동진영이 학습효과를 가진 결과이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더 이상 깃발을 내세워 일방통행적인 주장을 관철하는 것이 대중운동으로 전화하는 데 근본적 한계가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오히려 대중의 바다에 뛰어 들어가 거기서 토론하고 결정하는 것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 정치적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진보정당 실험할 게 더 남아있나"
  
또한 김 박사는 "사회운동과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이 촛불시위로 분출됐다"며 촛불시위가 한국사회에 '두 가지 성찰'을 가져다 주었다고 말했다.
 
 "하나는 더 이상 한국사회의 변화는 기존의 제도화된 정당이나 정당정치를 통해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촛불은 촛불이고 제도정치가 시민사회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앞으로 한국사회의 변화는 촛불시위든 거리정치든 대중지성이든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질 것이다.
 
 다른 하나는 더 이상 기존의 사회운동 패러다임을 고집했을 때 사회운동이 대중과 소통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대중의 호민관'이라는 패러다임으로는 대중을 이해할 수도 없고, 대중이 복무할 수 있는 언어공간도 확보할 수 없고, 그들을 사회적·정치적 변화의 장으로 끌어올 수도 없을 것이다. 이제 사회운동은 대중의 호민관으로서 역할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다. 사회운동 활동가들도 이번 촛불시위에서 그런 점을 학습했다고 본다." 
 
이런 분석의 연장선상에서 김 박사는 최근 촛불논쟁의 단초를 제공한 최장집 전 고려대 교수의 '대의제 민주주의론'과 관련 "현상 유지적인 생각"이라고 비판했다.   
 
"최장집 선생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최대치는 친노동자정당의 집권인 것 같다. 국가권력이나 정부행태의 변화·집권 등을 통해서만 좀더 풍부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친노동자정당의 집권을 돕는 시간에 상상력을 발휘해 다른 다양한 가능성을 사회 각 부분에서 추진하는 게 (새로운)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대의제 민주주의는 대중의 판단과도 부딪친다. 대중들이 투표와 선거에 참여해 자신의 이익을 반영할 수 있느냐?"
 
이 대목에서 김 박사는 "정당정치는 대안으로 쓸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다"라며 '진보정당 무용론' 혹은 '정당정치 무용론'으로 비칠 수 있는 도전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이미 "촛불집회에 대한 많은 해석들을 보면, 진보정당과 노동운동이 필요없는 이론들"(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작년이 87년이 20년 되는 해였다. 좋은 정당, 진보정당의 실험을 더 할 게 남았나? 더 이상 거기에 목을 매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파산 선고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히 한계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나? 대중들이 자신들의 일상적 문제를 자기문제로 표출하기에는 정당은 너무 낡았다. 그런 것들이 명백한데 계속 (진보)정당에 목을 매야 하느냐? (진보) 전당이 대안이라고 얘기해야 하느냐?"
 
이어 김 박사는 "대중의 우발성과 예측불가능성이 한국정치를 관통하는 특징이 아닌가 싶다"며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아래로부터 대중투쟁에 근거했을 때 형식적 민주주의가 실질적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계기가 마련된다"고 주장했다.
 
김 박사는 "대중의 우발성과 예측불가능성을 제도정치로 통제할 때 민주주의가 공고화된다는 주장은 현상유지적이고 보수적"이라며 거듭 '최장집 사단'의 견해를 비판했다. 
 
"대공장 남성 정규직 중심의 진보정당 노선을 재검토해야"
 
김 박사의 도전적인 주장은 '진보정당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핵심사업장인 대공장 노조  조합원들은 이랜드 투쟁은 물론이고 촛불시위에도 관심이 없다. 현재 노동운동의 상태가 이러하기 때문에 민주노조운동이 얼마나 생명력을 갖고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대공장 정규직 (남성)노동자들은 비정규직·여성·실업 등의 문제를 수수방관하고 있다. 진보정당은 대공장 남성 생산직 노동자를 주요한 조직대상으로 하는 현재의 정당운동의 패러다임을 재검토해야 한다. 노조운동이 지역·산업·계층을 달리하는 소수자와의 연대를 통해 사회적 변화를 꾀해야 한다."
 
김 박사는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생산직 노동자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이들의 지지가 취약하기 그지없다"며 '지지층 외연의 확장'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진보정당 원내 진입) 초기에는 '거대한 소수'를 운운했지만 지금은 지지기반이 얇아졌고 노동자층의 적극 지지도 사라졌다. 그래서 기존 기지층의 외연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촛불에서 제기된 이슈들을 중심으로 지구당 차원이든 지역투쟁 사례를 통해 촛불시위에 참여한 다양한 층들을 지지층으로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밑으로부터 지지층을 확산하고, 정당의 일상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채널과 소통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그런 작업이 사회운동과 진보정당 양쪽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특히 김 박사는 "지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풀뿌리 보수주의를 깨지 않으면 진보정치를 할 수 없다"며 "수도권이든 비수도권이든 아래로부터 풀뿌리 보수주의를 일상에서 깨는 노력과 실험을 하지 않는다면 보수가 주도하는 한국적 정당체제 속에서 진보정당이 장기적인 생존력을 갖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김 박사는 "촛불이 잦아들고 다시 일상이 조성됐을 때 촛불을 지지한 사람들은 자기 일상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와 관련, 그는 새로운 대안으로 검토할 만한 사례로 '이랜드 투쟁'을 언급했다.
 
"이랜드 파업이라는 비정규직 파업이 지역을 중심으로 소비자·노조·정당·사회운동과 동시에 결합됐다. 그래서 이랜드 투쟁은 지역화·집중화·전국화될 수 있었다. 이랜드 투쟁을 거치면서 '시민·비정규직·소수자 등의 일상적 정치활동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깨달은 것 같다. 촛불도 그런 활동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 박사는 "촛불만 따라다닐 것이 아니라 촛불이 던진 변화를 읽으면서 대중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정치활동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며 "그런 게 없는 상태에서 매주 촛불시위 하러 나가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꼬집었다.
 
"촛불은 대중투쟁의 정형화된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이명박 정권이 악수를 두면 촛불시위는 5년 내내 계속될 수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자기 생각을 사회운동과 결합하고 의식을 끌어올릴 때 (촛불시위처럼) 사회운동을 강화시키는 대중투쟁이 제자리를 잡을 수 있다. 기존의 사고를 바꾸고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실험을 이명박 정권 내내 계속 한다면 '진지를 갖는 사회운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원 박사는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 정치외교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공회대 사회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집위원, 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 한국 대학생의 하위문화와 대중정치>,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김진균학술상 수상작) 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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