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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15
    [독서]성경을 해방시켜라
    겨울철쭉

[독서]성경을 해방시켜라


성경을 해방시켜라
존 쉘비 스퐁 지음, 한성수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기독교 성경을 몇번이고 읽어보려고 했지만 나에게는 사실 몇장을 넘기기가 고역스럽다. 구약부터 읽으려면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고, 신약부터 읽으려고 해도 도대체 "그래서 말하려는 게 뭐지?"라는 생각이 이내 들기 시작한다. 생각해보면 구약은 다른 민족들의 그것처럼 '신화'일 뿐이고, 그런 측면에서 읽으면 될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것이 문자 그대로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나조차 그 프레임에 갖혀있는 셈이다. 신약에 대해서라면 ("무조건 믿어라"가 아니라) "어떻게 읽어야할지" 알려줄 사람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다.(그것을 정직하게 '신화'로 읽는다면 우리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상징들과 무의식을 사고할 수 있는 것처럼, 성경에서도 그런 소득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 개신교 교회의 추악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기독교라는 종교에 무엇인가 배울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성경에 다가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화와 잠언 속에 어떤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는 이가 필요하다. 천지창조와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문자 그대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그런 억지 말고.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같은 무신론자도 기독교를 비로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고, 존중할 수 있게 만든다. "머리가 거부하는 것은 결코 가슴이 예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저자는 종교적 교의도 맹신의 대상이 아니라 사고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온갖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가득한 것으로 보이는 성경을 어떻게 머리가 거부하지 않게 할 수 있단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문자 그대로 성경을 이해할 경우 그런 허무맹랑함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구약 안에는 상이한 성격의 신화들이 섞여있고 따라서 대표적인 이야기인 창세기와 아담과 이브 신화는 서로가 일치하지도 않는다. 구약은 기원전 900여년 경부터 문자로 고정되기 전까지 수개의 서로 다른 신화가 융합되면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고대 유대민족의 상이한 기원과 역사적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약은 "역사적 문서"다.

한편, 신약의 기원도 복잡하다. 그것들은 적어도 예수 사후 30년이 지나서야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고, 그나마 상이한 분파들이 다른 뉘앙스를 갖고 기록했다. 입에서 입으로, 분할된 종파들 안에서 전해진 예수의 가르침이 일관되게 제시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심지어 예수탄생과 부활의 에피소드도 각각의 복음서가 전혀 상이하게 전하고 있다.) 신약은 예수라는 하나의 기원에서 출발했지만 상이한 집단에서 다른 성격으로 발전한 종교운동의 기록을 모은 것이다. 유대인 기독교도에게(마태복음), 소아시아의 비유대인 기독교도에게(누가복음), 로마라는 세계도시의 기독교도에게(바울) 예수의 가르침은 다르게 변용될 수밖에.

그렇다면 '역사적 문서'인 성경의 가르침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고대문서의 꾸러미에 불과할까?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성경, 예수의 가르침이 가지는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각자의 입장에서, 역사적 경험에서 변용되지만 여전히 보전되는, 오히려 그러한 역사적 경험에 따라 확장될 수 있는 예수의 가르침이 있으며, 따라서 2000년이 지난 우리에게도 예수는 여전히 현재적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현재적인가? 저자에 따르면 예수가 당대에 그렇게 많은 추종자를 모았으면서도 동시에 증오받고 살해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는 것, 그것은 제도적이고 관습적이며 종교적인 안전장치들을 무장해제시키면서 제기되는 것, 어떤 이도 배제하지 않는 보편적인 사랑-인류애, 보편적 공동체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이였던 것이다. 그것은 이방인들, 문둥병자, 창녀, 세금징수원, 도둑들에게도 열린 것이다.(현대라면 이주노동자, AIDS감염인, 성노동자 같은 하위계급-소수자들일 것이다. 물론, 현재의 한국 교회는 이들을 '절멸'하고자 할 것이다. 이들의 '근본주의'는 얼마나 反-그리스도적인가!) 따라서 그것은 지배자들에게 격렬한 증오를 받고, 또 그런 소외된 자들에게 수용되고 확산된다. (이런 내용을 통해서 예상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인식은  정치적으로 좌파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유대신화의 인격적이고 부족적인 신이 아니라 보편적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무한하고 영원한 정신, 누구나 만날 수 있고 어디에나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된다. 그것은 인격적인 신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스피노자의 신, 세계 자체에 가깝다. 각자의 정신이 고양되고 무한히 확장될 때 만날 수 있는 우주-존재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신을 만나는 경험은 "존재의 심리학"에서 매슬로가 말하는 "절정경험"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자신을 대면함을 통해서 세계를 만나고 고양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매슬로 역시 절정경험의 하나로 종교적 경험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영지주의적이기도 하다. 물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이단'이라고 펄펄 뛸 일이다.)

저자 스퐁의 시도는 이런 점에서 어찌보면 위험하다. 그것은 나같은 무신론자가 성경을 역사적 문서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종교를 강력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구조--신비적 외양을 벗겨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문자주의를 거부한다는 것 뿐 아니라, 이런 점에서서도 기존 교회의 강력한 거부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역설적인 것은, 예수의 가르침은 이렇게 합리적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신비화될 때 물질적-이데올로기적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예수의 가르침과는 별로 상관없는 주장을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여전히 스퐁의 저작에도 불구하고 문자주의-근본주의 기독교 보수세력들은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명박이 소망교회 신도들을 청와대로 불러들이고 있는 마당에 그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이 무슨 상관이람!)

그러나 스퐁과 같은 방식으로 기독교를 이해한다면, 위대한 예술가들의 종교적 색채를 갖는 걸작들이 왜 "영적인" 감동을 주는 지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허무맹랑한 신화에 빠지지 않더라도 그러한 숭고한 경험들을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미신적인 기복신앙이 아니라도 다른 종교적 경험이 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아마도 나 같은 무신론자들은) 앞으로도 교회 신도들처럼 신이나 종교를 여전히 믿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예수에게서 시작된 2000년의 가르침에 대해서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다. (2000년 전에 단 한번 발생했을 뿐 아니라 위대한 예술가들이 재현해온 것들까지.) 그리고 덕분에 문자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이며 미신적인 신자들이 아닌 기독교 신자들과는 열린 대화를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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