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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02
    촛불행진 속에서, 새로운 운동, 좌파를 "조직"하자
    겨울철쭉

촛불행진 속에서, 새로운 운동, 좌파를 "조직"하자

예전에 사회진보연대 <삶의 소리>게시판에 썼던 글입니다.

 

다만, 최근에는 전적으로 새로운 좌파가 형성될 것이라고만 보는 것은 다소 안이한 판단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래 인용한 김원 선생의 글과 같은 측면도 있지만, 또한 최근 <전진>과 관련해서 진보신당 내의 논쟁을 봐도 그는 느낌입니다.

 

[참고 : 레디앙]'전진' 논쟁 중요하다, 제대로 하자

 

어디로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대해서 더 깊은 고민이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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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저런 글(특히 월간 사회운동 다음호에 실릴 글)에서 기존의 사회운동-좌파들-이 촛불집회/행진이라는 거대한 운동의 결과를 “조직”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조직”하고 따라서 이 운동의 성과를 계승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 기존의 사회운동이 무엇을 해야할지가 관심사다. (입장에서부터 구체적인 활동과 사업까지)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를 찾을 수 있겠지만, 현재의 운동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대안좌파가 (일정한 임계질량 이상으로) 구성되지 않는다면 반정치에 하나의 순환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홍세화 씨가 인터뷰에서 밝히는 것처럼) 이명박 정권 시기에 계속 반복될 수 있지만, 또는 심지어 정권을 바꿀 수도 있지만 동일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런 점은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대안좌파”에 실린 베르티노티의 인터뷰, <정치의 위기와 반정치의 위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소간의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넘어서 베르티노티의 인터뷰 한문장 한문장은 정확히 여기, 놀랍게도 2008년의 한국, 시청과 광화문 거리의 정치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정세 속에서 좌파, 사회운동이 임계질량을 구성하기 위한 실천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무엇보다 기존의 좌파들의 연합보다는 이 운동에 참여하는 대중의 새로운 조직화에서 찾아야한다고 생각한다.(사람들의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을 기본으로, 현재의 사회운동에서도 연대할 대상을 찾아야한다. (우리는 이 운동 속에서 노조와 정당의 관료주의, 활동가들의 현장주의의 한계를 보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회운동의 가능성도 찾을 수 있다. 예컨대, “명박산성”을 넘기위해 연단을 쌓고 발언을 조직한 인권활동가들, 매일 촛불행진에 결합하는 새로운 세대의 기층 노조활동가들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이러한 방향은 그저 하나의 ‘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실천으로 연결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조직’은 ‘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의 위기와 반정치의 위험>, 파우스토 베르티노티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대안좌파, 72~74쪽, 강조는 인용자)

 

- 반론이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20세기에 유래했던 광범위한 여론은 두 가지 강력한 대조적인 믿음으로 구성됩니다. 첫째는 정부가 아주 혐오스럽다는 것이고, 둘째는 정부가 정치에서 유일하게 중요하며 정치는 정부 그 자체를 구성하기 위한 경쟁일 따름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사실 아닙니까? 그기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부 참여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오류가 아니겠습니까?

 

- 나는 당신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사태에 대한 관찰일 빠름이지요. 이제 우리는 그런 사태의 원인에 대해 인식해야합니다. 정부가 여론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정치의 취약성의 결과입니다. 오늘 유럽은 정치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위기 속에 좌파적 정치의 위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좌파의 이런 위기는 훨씬 더 큰 위기, 즉 민주주의의 위기의 일부일 따름입니다. 정당 및 노조같은 대중정치의 거대한 주체, 말하자면 거대한 사회·정치적인 연합, 이념 및 공동체의 연합의 약화는 거의 사막화된 공적 영역에 여론과 정부라는 두 행위자만을 남겨놓았지요. 그들은 서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영역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떤 매개, 어떤 경험, 요구와 갈등을 정치로 전환함으로써 정치를 생산할 수 있는 어떤 집단적 조직도 없이 말입니다. 현 단계에서 정부는 더 이상 ‘일자리 생산자’로서 중요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은 정치의 다른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덕분에 자신의 이미지와 비중을 확대합니다. 인민 앞에 홀로 남은 정부가 정치의 주체를 대체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런 사태를 용납한다면, 반(反)정치의 승리를 용인하는 셈이지요.

 

- 왜 정부의 중심성이 반정치를 의미하지요?

 

- 정치가 부재할 때, 반정치가 여론과 정부를 관계짓는 매커니즘이 됩니다. 거의 산술적인 증명을 해볼까요? 최근 몇 년간 유럽의 선거 경쟁에서 모든 여당이 패배했습니다. 블레어만이 예외였는데, 그러나 이 경우에도 득표율은 크게 하락했지요. 선거 전의 [스페인 총리] 아스나르를 기억하세요? 그는 무적인 것처럼, 거의 신처럼 보였지요. 그는 승리한 현대적 통치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거에서 패배했어요. 슈뢰더를 기억하세요? 그는 아주 경력했고, 거대한 권력을 갖고 통치했지요. [사민당 당수였던] 라퐁텐이 자신의 행동을 교란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를 정부에서 축출했지요. 그 후 그는 선거에서 패배했어요. 조스팽, 베를루스코니, 기타 등등,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왜일까요? 정치조직이 부재할 때 [정부에의] 위임과 반정치가 성장하는 데, 그것들은 동일한 불안정한 균형의 양면이지요. 그런 균형은 이미 정해진 세 국면, 즉 위임·사임·붕괴라는 국면으로 구성됩니다. 그것은 실제로 매우 위험한 균형인데, 민주주의를 제거하고 배제하기 때문이지요. 이제 정치에 침투하여 확산되는 반정치가 정치를 정복하기 시작합니다.

 

- 예를 들어 베를루스코니주의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인가요?

 

- 그래요, 베를루스코니주의는 분명한 사례입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반정치가 중도좌파에도 마찬가지로 침투하고 있습니다. ‘외교적’인 이유로 이탈리아[좌파민주당]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기로 하지요. 프랑스를 보면, [2007년 대선에서 사회당 후보인] 루아얄의 선거운동에는 수많은 반정치가 있습니다. 아첨하는 인민주의 말이지요. 루아얄은 반정치의 요구와 비판을 수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지요. 이해가 되십니까? 반정치는 그것이 정치에 대한 몇가지 비판적 요소를 획득했다는 이유로 인해 더욱 발전하는데, 완전히 정당한 이런 새로운 요소는 정치 그 자체의 위기의 결과입니다. 이런 조건이 민주주의의 전진적 위기를 생산하는 것이지요.

 

- 반정치가 이렇게 확산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나는 정의롭지 못한 이 사회가 갈등을 생산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확증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같이 보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사회는 다수의 갈등을 생산하지요. 모든 종류의 갈등, 노동·숙련·코퍼레이션·젠더·지방공동체·동일성 등등에서의 갈등 말입니다. 이런 갈등들은 어떤 정부인가에 따라 승리하거나 패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갈등과 정부 사이에는 자율성이 존재합니다. 어떤 운동의 승리와 패배는 이것이 그 속에서 작동하는 정부의 조건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운동은 어떤 정복[봉기]도 안정화[구성]도 할 수 없습니다. 즉 문제는 승리할 때조차 운동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방할’ 따름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운동은 자신의 승리를 통해 민주주의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운동은 민주주의의 위기 속에서 작동하고,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상하지만, 그러나 운동은 그것에 대항하는 조직을 생산하지 않습니다. 즉 운동은 이전의 순환과 동일한 정치적 결과를 생산할 수 없지요. 지난 세기의 운동은 ‘토치카’를 정복했고 여론의 안정적인 전환을 생산했습니다. 오늘 운동은 아주 강력할 수 있고, 강력한 적을 패퇴시킬 수 있지만, 그러나 대중적 상식과 동의를 건설하지는 못합니다. 이제 이해하시겠지요? 민주주의의 결여가 중요하고, 이런 요구와 이런 압력, 게다가 이런 ‘예방적’ 정복을 결집시킬 수 있는 주체의 부재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 전적인 부재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군요. 급진적 좌파가 있고, 공산주의 재건당이 존재하니까요..

 

- 그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들은 수많은 성공을 달성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임계질량’(critical mass, 핵분열의 연쇄반응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질량), 즉 경향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말해야합니다. 급진적 좌파는 이런 차원에서 자기를 시험할 수 있는, 즉 임계질량에 도달할 수 있는 주체를 여전히 결여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내가 설명하려는 또 다른 종류의 결과가 발생합니다. 즉 유럽에서 전통적 갈등은 두 가지로 분열되고 또 그 성격이 변화합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 갈등을 관찰합니다. 하나는 좌파와 우파의 차이에 관한 것인데, 이런 차이는 좌파가 야당일 때 아주 분명하고 아주 인화성이 높습니다. 또 하나는 사회의 ‘상층’과 ‘하층’, 말하자면 통치계급[엘리트]과 기층[인민대중]의 대조에 관한 것인데, 이런 갈등은 좌파가 여당일 때 훨씬 더 강력합니다. 이 두 가지 갈등은 서로 교차합니다. 상층과 하층의 갈등은 [인민주의적] 반정치의 매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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