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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3/07
    노동자운동사, 몇가지 교훈(2)
    겨울철쭉
  2. 2008/01/20
    "현장파"의 모순
    겨울철쭉
  3. 2007/06/17
    반성, 전략조직화에 대한, 어쩌면 다소 더 근본적인(1)
    겨울철쭉
  4. 2007/04/01
    3월30일, 공공노조 대의원대회 이후
    겨울철쭉
  5. 2007/03/14
    산별노조가 뭐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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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02/19
    공공노조;선거-관료제-민주주의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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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7/02/09
    공공노조, 쟁점과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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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02/04
    당,노조 활동가들의 노동조합(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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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01/19
    새흐름,「새로운 실천을 꿈꾸며」(2)
    겨울철쭉
  10. 2007/01/12
    우리들의 미망迷妄 혹은 희망希望(2)
    겨울철쭉

노동자운동사, 몇가지 교훈

최근에 이런저런 토론과 교육을 하면서 느낀 것들. 첫번째와 두번째 것은 내가 강의를 진행하면서 생각하게 된 것인데, 역시 생산적인 노동자 교육은 일방적인  지식의 전달과정이 아니라 서로 배우기의 과정이라는 점을 느끼게 된다.

1. 이주노동자의 눈으로

이주노조 농성단 동지들에게 한국노동자운동사를 세번에 걸쳐 교육할 기회가 있었다. 의사소통이 여전히 어려운 점도 있고(중간 중간 통역도 필요하다) 한국 역사에 대한 배경 이해가 부족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역사적 과정 자체에 기입되어 있는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1. 노동자운동의 탄생과 좌절, 부활
-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기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2. 노동자운동의 폭발적 성장과 제도화
- 1980년대말 호황기 노동자운동의 폭발과 1997년 IMF 구제금융
3.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노동자운동의 도전
- 1998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 사용한 교안(link), 역시 실제 교육은 교안과는 또 다르게 진행된다.

특히 우선 반성하게 되는 것은 내용적으로더 쉽게,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도 더 쉽게 했어야한다는 것이다. 내가 워낙 개념어를 남발하기 때문에 더 어려운 점이기도 한데, 쉬운 일상의 낱말로 추상적인 개념을 표현하는 것은, 노동자 대중과 교통하는 데 꼭 필요하다는 점에서 신경써야할 부분이다.

무엇보다, 내가 느낀 것은, "이주노동자의 눈으로" 노동자운동, 운동사를 바라보아야한다는 점이다. 민족국가에 대해서도 세계노동자운동사에 대해서도 그렇다. 우리는 이미 민족적 시야에 너무나 익숙해져있다는 점, 모든 교육에서도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반복하고 강화하고 있다는 것을 반성하게 된다.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왜 남한에서 1920~30년대 노동자운동이 급진화되었나? 1945년 이후 왜 노동자운동이 폭발하는가?, 1970년대 노동자운동은 왜 부활하는가? 1980년대 후반 노동자대투쟁의 국제적 배경은 무엇인가? 1997년 총파업은, 2000년대의 비정규직확산은 어떤 의미인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민족국가 내부의 논리가 아니라 국제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이런 속에서는 또한 반주변도 아닌 주변부 국가들, 이주노동자들의 모국에서 자본주의 저발전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인식해야한다. 그래야, "근면한 한국사람"이라는 식의 민족주의적 정당화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자본주의 역사와 노동자운동사를 결합해서 인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노동자운동이 매시기 폭발하고 부활한 것은 민족적 기질이 과격해서라거나 혹은 반대로 민주적인 열망을 "타고나서"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발전과정, 정치정세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 NL은 물론 구제불능이지만--  좌파들의 노동자운동사 교육도 민족주의적인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일제시기부터 1997년까지, 매시기 노동자운동의 부활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낭만화와 근거없는 낙관, "씨알"과 같은 개념도 그렇다. 우익들이 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찬양하는 것처럼, 좌익들도 민족적 저항의 로망을 특권화하는 것을 보게 될 때, 당혹스럽다.(물론 해당 지역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 이에 따른 이데올로기적 특수성이 반영될 것이기 때문에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토대로부터만 형성될 수는 없다. 다만, 그러한 특수성을 인식하더라도 "민족적 로망"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편, 이런 맥락에서 최근의 노동자운동사를 인식함에 있어서도 이주노동자층의 형성에 대한 인식이 필수적이다. 1993년 이후 이주노동자를 입국시키는 정부와 자본의 논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만들어낸 논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 특히 이들은 80년대 말 이후 노동자운동의 투쟁 덕분에 급격하게 상승한 임금인상에 대안을 찾기 위해서 비정규직, 이주노동자를 도입했다. 역설적으로 운동의 성공이 노동자들의 분할을 만들어낸 점을 정확하게 반성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19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의 전투적 노동자운동을 아무런 반성없이 이상화하는 논리에도 마냥 동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전투적이고 변혁적이라고 했던 당시 운동의 "비사고"의 지점이 2008년 현재 우리 눈앞에 있다. 그것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혹은 눈앞에 보면서도 인식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러한 지점들이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한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자운동사 교육 등에서도 적용되어야한다. 한국인 노동자들이 이주노동자의 눈으로 자신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하고, 또 현실을 돌아볼 수 있어야한다. 그것이 노동자교육의 하나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야한다. 국제주의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곳에서부터 인종주의적 차별을 박멸해가야하기 때문이다.

2. 역사적 자본주의와 페미니즘

사회진보연대의 사회운동세미나 중 "세계노동자운동사" 부분을 맡아서 몇번째 진행하고 있다.
http://pssp.jinbo.net/bbs/view.php?board=notice&id=1134&page=3

세번째인 이번 세미나(거의 강의─.─;;)까지 진행하면서 특히 생각하게 되는 점은 역사적 자본주의의 맥락에 따른  "역사적 노동자운동"이라 할만한 것의 분석이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여기에는 필수적으로 페미니즘적 시각이 결합되어야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말하자면 역사적 자본주의론과 결합되는 역사적 가족형태의 분석이 구체적으로 진행될 필요가 있고, 이런 맥락에서 역사적 노동자운동을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비판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이 글을 볼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점을 인식할 수 있도록 비판해준 것은 세미나에 참석한 여성동지였는데, 무척 고마운 일이다.)

물론 역사적 가족형태에 대한 비판에 대한 여러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과 결합되어야하고, 이런 맥락에서 매 시기 노동자운동의 형태와 내용에 대한 비판도 함께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이다. 가족임금에 대한 요구는 언제부터 어떻게 노동자운동에 완전히 내재적으로 통합되었는가, 19세기 초반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운동에서 페미니즘적 시각이 발견되는 것은 어떤 맥락인가, 20세기 초 미숙련-반숙련 노동자의 진출과 아메리카에서 "동반자 결혼"의 발명과 유럽에서의 지체와 같은 가족형태의 변화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또 그러한 차이는 전후 자본주의 형태의 차이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19세기 후반 이후 노동자운동의 민족적 통합과 여성배제는 어떤 과정에서 결합되어 이루어지는가, (반)주변에서 자본주의 발전에서 여성의 지위, 그리고 노동자운동의 수용은 어떤가, 이런 과정은 남한의 노동자운동에서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그것은 현재의 노동자운동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등등등.. 너무나 많다.

민주노총의 2008년 임금인상요구도 철저하게 가족임금 모델에 근거해서 산출되는 것이 현실인 이상, 이러한 비판과 분석의 중요성은 전혀 무시할 수 없다.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말하면서 이런 것들을 제대로 결합해서 진행하지 못한다면 완전히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 고민되는 일이다. (내가 공부를 더 해야할 부분도 많다. 불행히도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운동을 각각 공부하는 사람은 많은데, 이 둘을 모두 공부/연구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것같다.)

3. 사소한 것에 비판적일 필요 : 노동자운동의 역사

우연치 않게 다음날 노조의 어떤 교육에 참가하게 되었다.(이번에는 피교육자) 주제는 "독일 산별노조(통합서비스노조 Ver.di)의 교섭구조"다. 강의를 해주신 박장현 교수가 매우 구체적으로 알려주신 덕분에 산별노조의 교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구체적인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우선 언급해야겠다.

그런데, 교육 내용중 흥미로운 것이 있다. 바로 내가 전날 사회진보연대에서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이야기했던 내용이 다른 방향에서 언급되었던 것이다.

독일에서 산별교섭이 안착화되는 시기는 바로 "1914년"이라는 점이다. 특히 공공부문의 경우 정부가 사용자성을 인정하면서 교섭에 나서고, 다른 산업에서도 기업별교섭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산별노조의 교섭권만 독점적으로 인정된다. 왜? 전쟁(1차 세계대전)에 노동자계급과 노조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였다는 점이다. 바로 제2인터내셔널의 배신.

그러니 말하자면, 지금 남한의 노조관료들이 부러워하는 독일 등 유럽의 산별교섭 구조는 전쟁과 혁명을 거치면서 노동자계급을 민족국가에 통합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제(양보?)의 일부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실천적 교훈은 무엇일까? 이 날 교육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매우 건조하게 전달되었다.. 역사적 사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제2인터내셔널의 배신과 역사적으로 노동자운동의 민족국가에 대한 통합과 사민주의적인 합의체제의 성립 등과 연결해서 이해되지 않을 경우에,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결론이 남을까? 역사적 위기의 상황에서 민족국가를 거부하는 투쟁이 아니라, "기회"를 활용해서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결론이 남을 수밖에 없다. 교육의 목표가 바로 "산별교섭 실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민족국가 사이의 전쟁에 충성하는 게 무엇이 문제지?

이 에피소드가 말해주는 것은 이런 점이다. 개별적인 사안에 대한 것처럼 보이는 노조교육조차도 정치적 맥락에 대한 정확한 평가에 기반해서 진행되지 않을 경우 매우 왜곡된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은 특히 남한의 산별노조가 그 모델로 독일/유럽 산별노조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우려되는 점이다. 금속노조는 독일 금속노조IG Metal, 공공노조는 독일 통합서비스노조 Ver.di를 모방하는 데 몰두한다. 민주노총은 독일식 산별노조와 북유럽식 노사정 타협체제 모방에 몰두한다. (중앙파, 좌파가 다를까? 푸훗─, 진보신당은?)

물론,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와 혁명을 배반하고 파시즘으로 결과한 민족주의화된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반복해도 된다고 생각하거나, 가능하거나 말거나 아메리카 헤게모니의 황금기에 가능했던 모델을 그 황혼기에도 주장하면서 자신과 조합원을 기만해도 된다고들 생각들하시는 거라면 더 할말은 없다.

4. "현장에서 미래를"? 노동자사회운동

민주노총 서울본부를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는 "노동운동포럼"은 노동자운동의 혁신을 현장의 실천 속에서 이루어내려는 매우 의미있는 과정이다. 최근 진행되는 어떤 노력보다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프로그램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데, 오는 3월12일에는 (19시, 총연맹서울본부) 백승욱 선생의 강연이 예정되어 있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맞서는 사회운동"이라는 제목. 이 글을 보시는 분들에게 강추)

여튼, 지난번 토론은 "신자유주의와 노동자의 삶"이라는 주제의 토론이었다.(토론 전주에 진행된 강좌는 장시복 선생이 진행했다.)

여기서 미묘한 쟁점이 발견된다.(참가자들이 모두 인식했을지는 모르겠다) 말하자면, (특히 정규직의) 노동현장에서는 더 이상 어떤 사회운동적인 쟁점을 발굴할 수 없으니 외부에서 활동가들이 도입하는 방식으로 노동자사회운동을 형성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이 있다. 그리고 이와는 미묘하게 다르게 (이건 나의 입장이라 할 것인데) 정규직 사업장의 경우 측면도 있으나, 비정규직 사업장의 경제투쟁은 여전히 다른 의미일 뿐 아니라, 정규직 사업장이라고 하더라고 현장의 쟁점을 급진화하는 실천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입장이 있다.

이런 미묘한 쟁점은 노동운동포럼에 결합하는 단체들 사이의 쟁점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사실 그보다는 나의 개인적인 쟁점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내가 보기에는 노동자운동은 여전히 자신의 노동현장의 어떤 쟁점들을 급진화된 실천으로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고, 그것은 노동자운동에 고유한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더욱 사회운동적 맥락에서 진행되고, 노동현장 바깥의 사회운동과 만나고 변화하는 과정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 최근 2~3년 동안 공공노조 사회연대연금지부(구 국민연금공단노조)는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 기업별노조에서 산별노조로 급격히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급진적인 현장활동가들의 노력은 눈부시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동의가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조합원들은 일견 경제적 이해와는 또 다른 국민연금제도의 공공성과 관련된 쟁점을 정치적으로 제기하면서 급진화되었다. 완전히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여전히 노동현장에서의 쟁점을 급진적으로 전유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래서 노동자운동이 여전히 "노동자"운동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현장 외부의 사회운동적 쟁점이 노동자운동과 결합하는 것이 당연하고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주장에는 다른 협의를 갖게 된다. 현장의 쟁점에 대한 투쟁을 상대화하기 위한 혹은 현장 쟁점에 대한 운동의 끊임없는 실패를 정당화하는 맥락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점이다. 전적으로 "현장에서 미래를"을 포기하는 근거로 사회운동이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심지어 노동시장의 이중화/분할로 인해 현장운동이 어려움에 처한다고 해도, 여전히 그것과 싸울 수 있는 어떤 계기를 조직해야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노동자사회운동을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구좌파"적이라고 할, 혹은 고루한 "현장파적"이라고 비아냥받을지도 모르는 쟁점들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고, 오히려 여전히 노동자운동에 근본적인 부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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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파"의 모순

'현장파'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노동자운동에서 '좌파'와 혼용되어 사용된다.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물론 이렇게 된데에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 사업장 단위의 경제투쟁에서 전투성과 비타협성을 좌파들이 일관되게 지지해왔고, 이것이 이러한 정서를 공유하던 현장활동가들과 결합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전노협이 약화-소멸되면서 대공장 중심의 경제투쟁은 민주노조 운동에서 더욱 중요한 위치를 갖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기업단위 경제투쟁의 전투성과 비타협성은 좌파들이 현장활동가들과 공유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경향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죄송하게도 '좌파'는 '현장파'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한 활동가가 좌파이자 현장파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좌파=현장파는 아닌 것이다. 좌파는 정치적 입장이며, 현장파는 대중운동의 한 경향이니까.(그것도 주로 대공장 현장조직들을 중심으로 하는 경향들이다.)

이런 뻔한 이야기를 다시 하는 이유는, 좌파=현장파의 도식, 좌파가 자신의 대중운동적 기반을 주장하고 확대하기 위해서 활용해왔던 이 도식의 모순이 점점 더 드러나고 있고, 그 모순을 적대적으로 전개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그 존재를 인정하고 사고할 수 있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는 생각 때문이다.

좀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류기혁 열사의 분신 이후에 민투위가 크게 비판받았던 적이 있다. 대공장 현장파운동이 비정규직 운동에 대한 태도가 문제였다. 물론 당시에 이 문제는 정파간의 비난으로 얼룩졌고, 그것을 특정 정파(말하자면 노힘)의 책임이라는 식의 비난이 많았다. 하지만 현대차 집행부의 태도가 노힘의 입장과 같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런 비난은 진정한 쟁점을 왜곡하는 효과를 낳았다. 말하자면 노힘이라는 정파의 입장이 아니라 대공장 현장파의 입장이 문제였던 것이다.(현장(파)를 '신성시'하는 이런저런 정파들의 비난이, 현장조직이 문제라는 비판이 아니라 정파(노힘)가 문제라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는 최근 공공노조나 연맹 주변의 상황을 보면서도 다시 느끼게 된다. 공공노조-연맹 안에서 좌파라는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존재한다.(본인들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하나는 산별노조를 지역조직을 중심으로 강화하고 이를 통해 비정규직노동자를 조직하고 투쟁하는 것을 주된 입장으로 하는 경향.
또 하나는 대공장의 현장투쟁을 강화하는 데 우선을 두고 따라서 산별노조로의 집중을 비판하는 경향.

경향적으로 지역운동 활동가들, 비정규직 활동가들은 전자의 입장을, 대공장 현장파 활동가들은 후자의 입장을 가진다. 이런 입장은 산별노조 안에서 대공장 조직의 발전방향, 향후 산별노조 발전방향, 지역조직과 비정규사업에 대한 예산과 인력의 배정 등에서 입장의 차이를 나타낸다. (이것은 국민파와 형성하는 산별노조에 대한 쟁점과는 또 다른 축의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어떤 현장파 간부는 이후 산별노조 내 예산배정비율을 [중앙:기업지부=3:7]로 하자고 제안한다. (현재는 4.5:5.5이며, 내년에는 5:5로 조정할 예정이니 이 현장파 활동가의 입장은 현행보다 기업별 지부의 예산을 확충하는 안인 셈이다.) 이런 입장은 사업장단위 현장에 더 큰 힘을 주어야한다는 관점에서 나온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렇게 될 경우 필연적으로 산별노조의 지역조직, 비정규직 조직화를 위한 재정과 인력은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다.

또 어떤 현장파활동가들은 '제대로된 투쟁'을 위해서 현재의 산별노조를 탈퇴해 유사업종 대공장 노조들로  새로운 산별노조를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것이 실질적인 "총파업"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산별노조의 재편단계에서 몇번씩 유사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이런 지점에서는 오히려 국민파의 "업종노조" 입장과 유사해지는 현상도 나타난다.(역설적인 현상도 아닌 것이, 양자 모두 실리주의와 경제주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양자의 입장은 상호 토론되고 합의점을 찾는 방향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적대적으로 전개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쟁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확인해야한다. 그저 범-좌파라는 입장으로 뭉개고 갈 수는 없는 상황들이 터져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정규직-대기업 사업장 운동이 어떻게 "현장에 기반하여" 사업장 경제투쟁을 넘어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노동운동으로 확장될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제기될 필요가 있다.(양자의 입장의 산술적 합, 합의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업장 단위의 전투적 경제투쟁, 구조조정 반대투쟁이 가진 의미와 한계가 모두 확인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런 문제제기는 이제까지 노동자운동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 많은 학자들의 논문과 정치/사회단체들의 입장에서 확인된 것들이다.(그래서 너무 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활동가들 사이에 충분히 동의되고 있지는 못하다는 점도 분명하다. 모두 "자신이 선 자리에서" 사고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좌파-현장파라고 불리는 경향 안에서 이런 쟁점과 모순이 확인되어야 그런 동의도 비로서 가능하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런 쟁점들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려고" 하는 입장들이 다수인 것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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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전략조직화에 대한, 어쩌면 다소 더 근본적인

또 몇개의 비정규조직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또 몇명의 조합원이 탈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며칠만에 다시 불면증이 찾아와서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불과 얼마전까지 내가 직접 담당해왔거나 총괄해왔던 사업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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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이것들은 일종의..데자뷰, 어쩌면 나에게 진정한 문제는 그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던 문제들이었다는 점..
그러나 답을 알지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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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무엇이 문제였을까?
투쟁의 전망?, 어떤 조합원의 말처럼 노조가 해준것이 없어서?
혹은 또 다른 무엇?
무엇 보다.. 그것은 대리주의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비정규직노동자를 조직하면서, 그들 스스로의 투쟁이 아니라 마치 노조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그렇기 때문에 노조를 만들거나 가입하라고 권유해왔던 경로말이다.

'전략조직화' 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특히 공공부문에서는 사업장 외부에서 조직화 사업을 (산별노조에 가입시키는 방식으로) 진행했던 것이 최근의 과정이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조직화 경로에 대한 분석에 입각한 것이었다. 공공서비스부문에 있어서는 외부접근의 용이함, 외부적인 사용자에 대한 압박의 필요성-효율성 등에 주목하면서 외부에서 활동가에 의한 현장 조직화 전략을 채택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드러나는 것은.. 사업장 외부로부터의 조직화가 갖는 한계, 대리주의의 한계.

무엇보다,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한다는 노동자운동의 주체적 측면이 전략조직화, 산별노조 건설 과정에서 점차 약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략조직화사업의 경우에, 노조로의 조직화를 우선하다보니, 일단 노조에 가입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되는 데, 이 과정에서 활동가들에게는 경향적으로 노조에 가입하면 해결된다는 식의, 말하자면 '대리주의'가 발동한다. (물론 의식적으로 그러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복귀한다.)

또 한편으로 산별노조라는 것은 어떤가. 우리는 산별적인 운영이라는 것을.. 마치 단위사업장의 문제를 산별집행부(그것이 지역본부든 업종본부든 노조 중앙이든)에서 해결해주는 것이라는 방식으로 생각했다. 산별노조의 의미라는 것이 관료기구(의 담당자)가 현장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그것은 사업장을 넘어서는 연대와 단결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말해왔지만, 정작 실제 투쟁에서는 사업장의 투쟁을 대리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또 사실, 눈에 보이는 어려운 사업장에 대해서 활동가가 할 수 있는게 또 무엇이 있겠는가? 방치? 그럴 수는 없는 것도 우리가 처한 솔직한 조건이다.)
산별노조에 대해서, 우리가 주장해왔던 것을 현장에서는, 실천으로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 처한 활동가의 선의와, 책임감에 대해서 어떻게 비난할 수 있는가..
 
그 렇다면, 가입의 조건─결의와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대안인가.. 나는 그것이 필수적으로 강조되어야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전 조건인 그것으로 미래의 일을 담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노조(혹은 그것이 아닌 어떤 조직형태라도)로 단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있고 확장되어야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당사자들의 주체적인 결의.. 분노를 조직하는 과정이 전제되어야한다. 어떠어떠한 문제를 노조에 가입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방식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공동의 분노로 단결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
 
다만, 한두명씩 흩어져있는 노동자들의 경우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여전이 어려운 점이 있다.(학교비정규직이나 보육노동자들이나..) 이런 작업장 조건에 있어서는 집단적 단결을 통한 자발적 투쟁이라는 모델은 별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업장 안에서 개별적으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을 집단적으로 해결하고자하는 요구가 발전한다. 이런 경우에는 오래된 모델이라고 하더라도, 어쩌면 그것이 지역적 단결을 당장은 지연시키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직업별노조 형태를 취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문제는, 결국 노동자들, 주체들이 스스로 투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특히, 활동가들의 대리주의가 발동하기에 최적의 조건이 형성되기 때문에 더욱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노동자들이 가장 용이하게 단결할 수 있는 최적의 형태, 그러나 대리주의가 아니라 스스로 단결하고 투쟁하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적의 형태는 어떤 것일까.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혹은 우리가 희망의 끈을 여전히 잡고 있는 노조가 그러한 것으로 전화되도록, 대안을 만들어내고 조직할 수 있을까..

문제들에는 어쩌면 답이 없거나, 내가 답하고 행동할 수 없다는 것.. 그러한 것 전체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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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30일, 공공노조 대의원대회 이후

공공노조는 회의날짜를 참 잘 못잡는다. 공공노조 출범 발기인대회를 한 11월30일은 비정규법안이 통과되어 투쟁이 있던 날이었다. 중앙위원회가 열렸던 3월8일은 여성대회 날이었다.(결국 오전 서울집회만 서울동지들 중심으로 참석했다.) 이번에 대대가 있었던 3월30일은 애초 협상시한이었을 뿐 아니라 한미FTA 막바지 투쟁이 늦게까지 진행된 날이었다. 날짜를 잡는데 불가피한 사정은 내부에 있는 나도 잘 알 고 있지만서도, 정말 정세적 긴장감, 책임감이 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가 아닌가 싶었다.

 

여튼, 대부분의 동지들이 FTA반대 투쟁으로 서울시내를 달리는 시간에 진행된, 새 집행부 구성 이후 첫번째 대의원대회는 역시 여러모로 실망스러운 점이 많았다. 직선으로 선출된 대의원들의 두드러진 책임감과 열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나마 희망이라고 할까.

 

참고로, 아래 글은 얼마전에 이 블로그에 쓴 글 "산별노조가 뭐 이래?"의 말하자면 후속편인 셈이다. 더 올라가서는 월간 사회운동에 썼던 "공공산별노조 건설의 쟁점과 전망"에 연결된 글이다. (이렇게 묶어서 노기연의 "민주노동과 대안"에 기고.)

 

대의원대회에서 규약개정과 관련된 논란

 

3월30일 진행된 대의원대회에서는 몇가지의 규약개정안이 제출되었다. 대부분은 단순한 문구조정에 불과한 것들이었지만, 의결기구의 구성과 운영과 관련된 중요한 안건이 있었다. 일상적인 운영을 논의하는 ‘중집위원회’에 2개 이상 광역지역에 걸친 1000명 이상의 대기업지부를 참가시키고 상설위원장과 실장에게 의결권을 부여하자는 내용이었다.


전자의 내용은 아직도 기업별 지부 체계가 온존하고 권력이 집중된 상황에서 효율적인 사업의 집행을 위해서는 이러한 지부 단위가 함께 결의하고 집행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제기되었다. 후자는 집행을 담당하는 상설위원회와 실장들 역시 책임있게 의결에 참여할 수 있어야한다는 점에서 상정되었다.


그러나 두 개의 개정안 모두 논란이 되었는데, 실제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집은 일상적인 조직운영의 핵심적인 단위이다. 모든 주요 회의단위의 안건 상정은 여기서 시작되고 집행도 결의된다. 대기업지부의 중집참여와 의결단위 참가가 이루어진다면, 이제까지 논의해왔던 지역본부, 업종본부를 중심으로 사업을 진행하자던 논란은 사후적으로 사실상 별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결국 기업별 지부가 주요한 의결, 운영의 골간으로 인정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업종본부의 설치기준인 3000명 이상이라는 규정보다도 훨씬 낮은 수준인 1000명 이상 조합원으로 결정되면서 조직체계의 일관성도 유지하지 못했다.


대기업지부가 사업에 결합을 해내지 못하는 이유는 앞서 조합비에 대한 문제에서 지적한 것이지만, 여전히 모든 사업을 기업별 단위에서 하려고만 하지 산별차원에서 (그것이 지역이든 업종이든) 통합해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개정안은 기업별지부를 사실상 골간으로 인정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온존시키고 만다. 왠만한 규모만 되는 지부면 이제 지역본부와 업종본부의 얼마 안 되는 예산사용을 제외하고는 주요한 권한을 지역, 업종본부와 마찬가지로 모두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안건은 불과 세표 차이로 가결되었다.


후자의 안건(상설위원장, 실장에 중집 의결권 부여)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민주노총에서 집행부가 일방적으로 의사를 관철하는 주요한 수단이 실장들의 의결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안건은 58%의 찬성에 불과해 부결된다. 하지만 예기치않은 부작용도 있는데, 애초에 1000명 이상 지부를 중집에 참석시킬 경우 기업별지부들의 의결권이 크게 확대된다는 점에서 균형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두 개의 개정안이 하나의 세트의 성격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전자만 가결되면서 기업별 지부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이후에 기업별 활동을 지양해가기 위한 노력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상설위원회, 집행부의 중집 의결권으로 산별중앙을 강화한다는) 해결방법이 잘 못되었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지 대의원들의 판단이 미숙해서 생긴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크게 부족한 산별 투쟁과 사업계획

 

대의원대회에서는 올해 사업계획도 심의 의결하게 되어있다. 사업계획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대의원들은 사업계획의 많은 부분이 부족하기 때문에 보완되어야한다는 의견들을 제시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쟁점이 형성되고 토론이 진행되지는 못했는데, 쟁점이 형성될 만큼의 구체적인 사업계획이 제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올해 공공노조 차원의 가장 중요한 투쟁 사업은 무엇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산별노조 1년차의 활동으로 산별교섭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가동해야한다. 산별교섭을 쟁취하기 위한 전단계로서 정부의 임금가이드라인, 공공기관 통제구조를 분쇄하기 위한 투쟁이 ‘산별적인 방식으로’ 준비되어야한다. 또한 비정규법안의 통과로 인한 비정규직 대량해고가 예상되는 정세에서 공세적인 비정규직 투쟁이 조직되어야한다. 작년에 함께 통과된 노사관계로드맵, 특히 공공부문 사업장의 필수유지업무 폐기를 위한 투쟁이 진행되어야한다.


이러한 투쟁과제들에 대한 정밀한 방향이나 세부적인 계획이 거의 제출되지 못했다.
산별노조가 힘을 갖지 못하는 이유가 단지 개별 사업장지부들의 조직이기주의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개별 사업장지부가 보기에도 산별적인 투쟁이 어떻게 조직될 것인지, 그것이 가능성이 있는지 확인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부별 사업과 투쟁을 놓아버리고 산별노조에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산별노조에 강화에 힘쓰지 않는다고 개별 기업별지부만 비난할 수 없다는 점.


산별노조 1년차의 투쟁은 산별노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혹은 적어도 무엇을 지향하는 조직인지를 대중적으로 확인하는 매우 중요한 계기이다. 산별노조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올해 정세에서는 힘을 모아 투쟁해야하는 과제가 산적해있다. 공공부문 노동자운동의 과제는 이제 공공운수연맹에 기댈 수도, 공공연대에 기댈 수도 없고, 공공노조가 우선 제기하고 주별을 조직해야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대의원대회 이후에라도 이러한 관점에서 산별적인 투쟁을 공공노조가 적극적으로 조직할 수 있어야한다.

 

* 노기연 "민주노동과 대안"에 기고한 원고 전체(hwp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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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별노조가 뭐 이래?

공공노조 출범 이후, 지난 2월 말 선거와 과도기 집행부 이후 제도를 정비하는 3차 중앙위원회가 지난 주 끝난 이후 나에게 특징적인 정서는 (많은 분들에게 대단히 죄송한 일이지만) "환멸"이다. 이런 낱말을 쓴다는 것이 참으로 나 자신에게도 분노스러운 일이라도 그렇다.

 

앞서 썼던 글들에도 말했던 것처럼, 공공노조의 출범과정은 대단히 문제가 많이 있었고 많은 쟁점이 '봉합'된 채로 '일단 출범'한 상태였다. 결국 선거와, 그 이후의 제도 정비과정에서 묻혀있던 여러 쟁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쟁점들은 노동자 운동의 발전을 위한 고민에 입각해서 발전적으로 정리되기보다는 기존 조직들, 특히 대공장 사업장들의 이해를 반영하는 가운데 (또한 감히 말하건데) 폭력적으로 정리되었다. 

 

선거=민주주의?

 

아래 글에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선거가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담보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이번 공공노조 선거와 그 이후의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2월말에 진행된 선거는 아래와 같았다.

(1) 공공노조 위원장-사무처장 (2) 업종본부 본부장-사무처장 (3) 지역본부 본부장-사무처장 (4) 업종선출 노조 대의원 일반 (5) 업종선출 중앙 노조 대의원 여성할당 (6) 지역선출 노조 대의원 (7) 지역선출 노조 대의원 여성할당

조합원들은 총 7장의 투표용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대의원 투표의 경우 많은 경우 16명에 이르는 후보에 대해서 투표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어떤 선거구의 조합원은 30여명에게 투표해야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3월말에도 선거가 예정되어 있는데,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가 쟁점이 되었다. 앞서의 선거에서 (1)을 제외하고 선출되지 않은 기구에 대한 보궐선거(많은 경우 6개)에다가 지역본부 대의원(일반, 여성할당), 업종본부 대의원(일반, 여성할당) 등 총 10장의 투표용지를 받아야하는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평조합원의 입장에서 불과 한달만에 이런 선거를 두 번이나 한다는 것이 어떻게 느껴질까?

 

쟁점은, 이러한 과중한 선거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3월말 선거에서 지역본부, 업종본부에 당연직 대의원제도를 임시로 운영하는 등의 방안을 도입하자는 서울본부의 제안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제안은, 조합원들이 표찍는 기계도 아니거니와, 지난 선거 경험을 통해 볼 때 이러한 규모의 선거를 진행할 경우 한달간 모든 활동이 마비된다는 점에도 있었다. 학교 비정규직 등 투쟁사안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고 산별적인 사업을 위해서 현장 순회 등으로 조직력을 정비해야할 시기에 모든 일정이 연기된다면 단위 지부의 임단협마저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

 

일부의 주장은, 완고하게 "제도에 정한 대로"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규약과 규정도 사람이 만든 것인 이상, 지난 선거 이후 모든 제도가 얼마나 탁상에서 만들어졌는지를 실제로 확인한 이상 그대로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지역본부와 업종본부 대의원 선거는 이번에는 각 단위 자율로(결국 대부분의 단위가 선거를 진행하지 않게 되는 상황이다)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돌이켜볼 때 선거는 각 집행기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과정이 되기 위해서는 사실상 노조의 활동 방향에 대해서 토론이 가능하게 되어야하는데 30여명에게 투표해야하는 선거에서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선거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선거라는 것이 민주주의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결국 과도하게(지역-업종으로 2중으로 불어난) 노조의 기구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조합원을 동원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노조 민주주의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선거를 많이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며, 조합원이 노조와 노동자 운동의 쟁점에 대해서 사고하고 발언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노조의 활동, 노동자운동의 방향에 대해서 조합원들과 교육이든 토론이든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공유하고 조합원들이 스스로 사고하도록 할 수 있어야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대리인을 선출하는 것으로 자신의 권리를 '위임'하고 노조의 방침에 따르는 수동적인 조합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능동적 조합원으로 조직해야한다. 이 과정에서 선거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과정은 민주주의에 대한 알리바이로 선거가 이용되고 있다.

 

조합비, 0.65%

 

가장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조합비와 관련된 부분이다. 많은 노조에서 보통의 조합비는 1%로 생각되어 왔다. 0.65%라는 조합비 기준은 기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임금규모가 일정하게 되고 조합원수가 어느 정도 수준을 넘는 노조들에서 총임금의 1%가 아니라 기본급의 1% 등의 방식으로 조합비를 낮게 책정해온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이 금액의 10%는 희생자구제-투쟁기금으로, 나머지의 60%는 다시 지부에 교부된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조합비 결정과정에서 많은 "유예"조항이 신설되었다. 기존 조합비가 인상되는 지부에 대해서는 1년간 이를 유보하고 이후 3년동안 점진적으로 인상한다든가, 해고자가 많은 사업장 지부에 대해서는 조합비를 감면한다든가 하는 조항이 그것이다.

 

유예조항이 도입됨에 따라 기존에 노조 활동을 열심히 하느라고 조합비를 많이 걷었던 지부들은 기존의 규모만큼 부담해야하고, 그렇지 않았던 곳은 오히려 계속 혜택을 보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열심히 하는 데만 부담이 가중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더구나 해고자 부담 등을 이유로 사회보험 지부에는 산별중앙에 할당된 금액의 50%를 감면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는데, 문제는 조합비를 감면하는 대신 해고자들이 산별노조의 각급기구에서 활동한다든가하는 조치가 함께 통과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산별노조에서 일하는 해고자에 대해서는 상근자 임금수준의 급여를 지부 대신 노조 중앙이 부담하기로 하면서 '이중혜택'논란까지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결정되는 과정에서 조직적인 공동의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 지부가 어렵다"는 것만이 모든 주장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자세는 사회보험만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사업장 규모가 클 수록, 임금이 높은 사업장일수록 그런 모습이 강했다.

 

이는 산별노조 건설 이후에 어떻게 각종 사업을 산별차원에서 함께 진행하면서 통합력을 증진할 것인가를 각 단위가 고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사업을 보전하고 산별노조(중앙과 지역, 업종본부까지 포함하여)에 납부되는 기금은 마치 어딘가 빼앗기는 것처럼 사고하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막 출범한 산별노조에 대한 신뢰에 대한 문제도 있겠지만, 애초에 산별노조를 출범하는 과정에서부터 원칙으로 천명되던 '단결의 증진과 힘의 결집'이라는 것과는 다른 사고가 팽배해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 가장 비판적이었던 것은 역시 중소영세비정규사업장 동지들이었다. 이들은 보전해야할 사업장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도 않으며 최대한 많은 사업을 산별노조 차원에서 함께 하기를 바라는 곳들이다. 결국, 조합비를 낮게 책정하고 산별노조의 기구들, 특히 지역본부를 약화시키는 것은 대공장 정규직 사업장과 중소영세비정규사업장의 관심이 충돌하는 쟁점이 되었다.

 

결국 결정된 예산안을 볼 때, 가장 예산축소에 따른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은 지역본부들이다. 원래 예산의 규모가 작은 상태에서 심지어 가장 작은 강원, 대전충남, 충북, 전북, 울산 등의 지역본부들은 월 130만원 대의 예산으로 사업을 집행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대부분의 사업을 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이 과정에서 기본에 연맹 지역본부가 설치되어 있던 지역에서는 가용한 예산이 줄어들기도 했다. 서울의 경우에는 연맹 때와는 '현상유지'를 한 정도지만 전북, 대전충남 등에서는 연맹 지역본부 시절보다 예산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지역운동을 활성화하겠다는 취지가 무색해지는 일도 발생했던 것이다. 노조 중앙이라고 상황이 나은 것은 아니어서, 현재 작성중인 예산에 따르면 중앙의 각 부서의 사업비가 총 20여만원에 불과한 상황이다. 5개 정도 실이 만들어질 경우 4만 몇천원으로 사업을 하라는 이야기다.

 

전국단위의 비정규직노조들의 상태는 심각하다. 학교비정규직, 보육, 자활, 사회복지 등 지부들은 이미 지역별로 조직을 편제하기로 하고 중앙조직을 해산하고 있는 과정이다. 이들 사업장은 어차피 임금총액이 적기 때문에 조합비 교부금을 받아도 독자적인 사업이 불가능하다. 이런 속에서 지역별로 편제할 경우에도 지역별 주체형성도 문제이거니와 노조의 지역본부가 매우 취약하게 되면서 공세적인 조직화 사업은 커녕 조직유지도 힘들어지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들 조직의 상근자들은 공공노조에 고용이 승계되면서 최소한 지역-업종본부, 중앙단위 이상으로만 인사배치가 이루어지게될 것인데, 이 경우 상근활동가가 조직을 담보하기도 힘들어지는 상황이 된다.

 

문제는 이러한 조건을 모두 아는 상태에서(회의 장소에서 조합비에 따른 각단위 사업비의 시물레이션이 즉각 공개되었다)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몰라서 그랬다"는 식의 변명은 이루어질 수 없고, 산별노조에 대한 각 단위 간부들의 솔직한 입장이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오히려 저임금 사업장, 중소영세비정규직 동지들이 조합비 인상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최저임금을 받는 사업장의 한 간부는 이런 논란이 '우습다'는 말도 했는데, 0.65%로 책정될 경우 산별중앙이 가져가는 조합비 수준은 연맹-민주노총의무금에도 미달하기 때문이다.(최저임금 조합원이 늘어날 수록 산별중앙 사업비는 줄어든다는 말이다.) 또한 이런 조건에서 지역, 중소영세비정규직 사업장에서는 오히려 "연맹 때가 좋았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너무나 역설적인 일이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결국 이 과정은 산별노조 건설의 과정이 운동적 의의를 공유하고 충분한 토론을 거쳐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 '일단 결의하고 보자'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이렇게 만들어진 이후에도 최소한의 원칙을 확인하지 못하고 "제도 정비"를 중심으로 전개된 이후 과정이 만들어낸 결과다.

 

산별노조, 어떤 활동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일이 벌어지게된 이유를 사업장 현장 간담회라든가 이런 저런 과정에서 본 것을 통해서 생각해보면, 산별노조는 여전히 명분뿐이거나 개별 기업별 사업장의 이해를 지키기위한 방편정도로 인식되는 것같다. 기업별을 넘어서 적어도 유사한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하나라는 의식, 당장 자신의 일은 아니라도 투쟁하는 노동자가 있으면 연대한다는 연대의식이라든가 중소영세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겠다는 목표들은 공문구가 된다.

 

당장 사업비가 월130여만에 불과한(추가 할당된다고 해도 170만원을 넘기는 힘들 것이다.) 지역본부에서는 운영비도 빠듯할 뿐더러 투쟁사업장이 발생할 경우 제대로 지원도 할 수 없는 조건에 이른다. 이런 조건에서 미조직비정규직 전략조직화라거나 지역 차원의 산별교섭이나 사회공공성투쟁과 같은 것은 "좋은 사업계획"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오히려 산별노조를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산별노조는 이런 것'이라는 관성이 이미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내부투쟁은 물론이지만) 제한된 자원을 활용하면서 최대한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할 수밖에. 그것은 당장은 조직적으로는 "초기업-초업종 지역지부"를 조직하는 노력과 사업으로는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 사업으로 볼 수 있다. 기존 조직 내에 조직적 근거를 확보하는 것과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노조운동의 주체를 이를 중심으로 조직하는 것이 관건이다.

 

물론, 기존의 노동조합들을 바꾸어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이번 과정을 통해서 아무리 훌륭한 관점을 갖고 있더라도 대기업 정규직 노조 간부는, 자신들의 조건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말았다.(그런 것을 확인할 때마다 느껴지는 막막함이란!)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말로 되는 것은 아니며, 새로운 실천이 기존의 운동을 압도해가도록 할 수밖에. 그것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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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노조;선거-관료제-민주주의etc.

영국 인민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의원을 선거하는 기간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돼버리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 루소, "사회계약론" 3권.

 

 

무한히 복잡한 공공노조 선거제도

 

공공노조 선거 기간이다.(투표는 21~23일 동안 진행된다.) 금속노조는 1차 선거가 끝나고 결선이 예정되어 있다. 금속노조보다는 작지만 유례없는 규모와 복잡한 조건 속에서 진행되는 선거를 보면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당장 걱정되는 것은, 이 선거가 과연 제대로 진행될 수 있겠느냐는 불안. 이것은 선거제도의 지나친 복잡성과 관련있다. 아래 공공노조에 대한 글에서, 공공노조가 지역본부-업종본부의 이중골간 체계를 인정하면서 관료조직이 두배로 확대되고 말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번 선거에서도 이러한 조직을 구성하기 위해서 선거는 두배로 진행되고 있다.

 

한명의 조합원이 투표해야하는 투표용지는, [중앙 위원장/처장], [지역본부 본부장/처장], [업종본부 본부장/처장], [지역선출 중앙대의원], [업종선출 중앙대의원]다섯개 선거에 여성할당 별도 투표용지까지 모두 7장이다. 후보는 특히 대의원의 경우 큰 선거구는 12~16명에 이르는데, 이 결과 한명의 조합원이 투표해야하는 후보자수는 무려 30여명에 이른다. 이번 선거와 지부-지회 선거를 겸하는 경우에는 그 수는 더 늘어난다. 게다가 현재 규약규정상 3월 중에 지역본부, 업종본부 대의원을 선출하기 위해서 이러한 규모의 선거를 한번 더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이쯤되면 "조합원을 표찍는 기계로 전락.."운운은 더 이상 수사가 아니라 현실이 된다. 선거를 많이 한다고 민주주의가 증진되는 것은 아닌만큼 나는 3월 선거는 하지 않도록 제도를 개정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산별노조 건설 직후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30여명의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 조합원에게 어떻게 느껴질까? 투표용지에는 얼굴도, 소속사업장도 없이 오직 성명 세 글자 뿐이다. 게다가 투표방식 역시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너무나 엄격하다. 각 종이박스로된 투표함은 모두 20곳을 봉인해야하며, 각 투표용지에 지부 선관위원의 날인이 필요하고, 각 비표는 따로 봉인해서 23일 저녁까지 개표소에 인편인든 퀵이든 박스채로 모두 보내야한다. 볼펜기표는 금지되며 반드시 인주를 사용해야하고... 나는 내가 조직하고 주로 대해왔던 환경미화, 청소, 경비 고령의 노동자들이 이걸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당장, 투표용지가 빠졌다는 전화를 받으면 어떤 경우에는 (선거구가 다르기 때문에) 단지 옆 지부와 투표용지 크기가 다를 뿐인 경우들도 있다..

 

투표에서 ; 민주주의 조건

 

이쯤되면 직선투표가 과연 '민주주의'인가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위로부터의 조직구성,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 조합원을 고문하는 수준이라는 생각까지 들 때가 있다. 30여명을 모두 투표해야하는 서울대병원분회 조합원들은 근무 중 현장에서 뛰어다니다가 이 투표를 해야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최소한 고민해야할 것들이 (그야말로) 대규모로 누락되고 있다. 아무리 선거가 복잡하더라도 선거제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원칙이 있는 법일텐데, 실무적으로 바쁘다는 이유로─다른 말로 하면 관료기구의 편의를 위해서─면밀하게 보지 않는 것들. 누구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선거제도는 가장 쉽게 구성되어야한다. 가장 지적으로 부족한 조합원의 눈높이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제도 전반은 사무전문직 조합원들의 수준, 가장 높은 수준에 맞추어져있다. 이 기준에 따라가지 못하는 비주류-교육수준이 낮고, 고령이며, 행정제도에 익숙하지 않은 여성들은 권리를 행사하는 데 곤란을 겪는다.

 

바쁘더라도 더 신경써야하는 부분도 있다. 10여명의 이름이 있는 투표용지에 최소한 사진이나 사업장같은 기초 인적 사항이 들어가지 않으면 구별할 수도 없을 정도다. 조합원 선거 공보물에는 대의원의 경우 '엑셀'로 만든 표가 그대로 건조하게 들어간 정도여서 내 선거구 후보를 찾는데 나조차 곤란을 겪을 정도다.(그나마 서울본부의 경우 사진-경력-출마의 변이 담긴 포스터를 겨우 제작했다.)

 

물론, 선거구의 크기, 후보의 크기와 같은 면에서 지역 선거구를 분할하는 과정에서 나의 경우에도 신경쓰지 못한 부분이 있다.(초기업 선거구를 만드는 것을 관건으로 보다보니 일부 선거구는 너무 비대해졌다.)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선거구도 더 분할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느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선거가 복잡해지는 것은 지역-업종 이중골간체계에다가 과도한 선거제도, 불친절한 선거행정.. 등의 복합물이다. 우리가 버려야할 것과 버리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 민주주의와 지역-현장에 밀착한 운동구조, 그리고 가장 낮은 조합원의 눈높이에 맞춘 제도의 구성을 지킨다면 버릴 수 있는 것들도 많을 텐데.

 

노조에서 대안적인 조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노조에서의 선거는 또한 지속적으로 대안적인 관계, 대안적인 조직을 실현해나가야한다는 점에서 다른 고민이 필요하다. 산별노조를 건설하자마자 관료조직이 (제대로 구성되고 작동하지도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복잡해지는 것을 보면서 그러한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말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가 행정은 이렇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국가관리들이 우리들이 위임한 사업의 단순한 집행자, 즉 책임을 지며 소환 가능하고 근소한 보수를 받는 "감독과 부기 계원"(물론 여기에는 모든 종류와 모든 등급의 기술자들이 포함된다)의 역할로 끌어내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프롤레타리트적 임무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수행하면서 먼저 시작할 수 있고 또 먼저 시작해야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 같은 시작은 대규모 생산을 토대로 하여 저절로 모든 관료제의 점진적인 "사멸"로 나갈 것이다. 또한 그러한 식은 더욱더 단순화되는 감독과 계산의 기능을 모든 사람이 순번대로 수행하여 나중에는 그것이 습관이 되는, 그리하여 결국 특수한 인간계층의 특별한 기능은 소멸되어 버리는 그러한 질서─괄호없는, 즉 임금노예제와 같은 유보조건이 없는 질서─가 점차 조성되게 할 것이다. (돌베게 판, 71쪽)

 

그러나 조건이 필요하다는 점이 또한 중요하다.

 

...왜냐하면 국가를 폐지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직무의 기능들이 주민 대다수에 의해, 나중에는 주민 모두에 의해 이해되고 수행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통제와 회계사무로 전화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05쪽)

...모든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또 실제로 사회적 생산을 관리하게 되며 독립적으로 계산을 하게될 그 때에는.. (137쪽)

 

노조기구를 전화하는 것이 사회주의에서 국가의 전화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조직에서 노동자의 자기통치를 위해서 우리가 무엇에 착목해야하는지를 발견할 수는 있다. 그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갈 사회에 미리 훈련될 것이다.

 

여기서 두개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하나는 행정이 더욱 단순해져서 누구나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 그리고 이와 함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적 차이가 감축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에 익숙해지도록 훈련되는 것이다. 이는 노조에서도 (선거제도까지 포함하여) 노조행정의 단순화, 그리고 단순히 선거를 조합원 머리위로 위해서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들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교육과 훈련─을 전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레닌의 첫번째 인용문은 하나의 논쟁점을 포함하고 있다. 노조 활동가들의 경우 억압적인 자본주의국가의 '국가관리'가 아니며 '감독과 부기계원'도 아니라는 점. 유기적 지식인이자 활동가라는 점에서 '단순한 집행자'로 끌어내려가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없다. 문제는 지적 차이를 감축하면서 대안적인 조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순번대로"

 

레닌의 첫번째 인용문중에 주목할 만한 한 단어가 있다. "순번대로".

레닌은 베른슈타인이 이러한 자신의 주장(마르크스의 주장)을 "원시적" 민주주의라고 비웃었다고 말하면서 반박한다.(62쪽) 따라서 이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 제도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하의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논의는 주로 "선거는 민주적인가/버나드 마넹"에서 참고한 것이다.)

 

아테네에서 공직은 (선출되는 것도 있었으나) 추첨에서 의해서 선발되었다. 오늘날, 대의제가 지배적인 "민주정"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지만, 그것은 간단히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모든 시민이 지배자이자 피지배자가 되어야하기 때문에 그것은 적절한 제도이다.(아리스토텔레스) 그것은  시민들이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운영에 적합하도록 교육되고 훈련될 것을 요구한다.(정체의 필수적인 유지조건으로서 시민들 사이의 지적차이의 감축) 그리고 그것은 평의회, 법정, 입법 위원회, 민회 등 다양한 기구를 구성하고 필요한 자리에는 선출제를 택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는 시민이 모두 참여하는 민회가 인민 그자체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인민의 규모의 문제, 기술적 문제는 전혀 아닌데, 충분히 대규모 조직에서도 추첨은 가능하다.(법정의 배심원제도와 같이 현재도 운영되고 있으며 충분히 가능하다.) 시민들의 평등한 권리에는 추첨이 더 적절해보인다. 추첨이 무정부적으로 아무나 고르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제도와 기구를 갖추고 있다는 점은 다시 상기해야한다.

 

(이번 공공노조 선거에서 자신이 좌파라고 주장하는 어떤 후보는 자신이 "지도자형"이며 "실무자형"과는 다르기 때문에 위원장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노조가 지향해야할 '민주정'에 대한 생각에 큰 차이가 있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조합원-노동자들은 누구나 공동체에서 지도자이자 피지도자이다. 그것을 고양하고 공동체의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선출될 후보가 특권적인 "지도자형"이 될 것을 요구하는 모델은 전혀 아니다.)

 

한편, 여기서 시민 개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민은 "일차적으로 민주정에서 존재한다." 시민은 "판결권과 집행권에 참여하는 자이다." 시민은 민주정에서만 가능할 뿐 아니라, 민주정은 판결권과 집행권을 시민에게 부여한다. 그것이 민주정.

 

레닌이 말하는 민주주의 제도에서도 그러한 순번, 혹은 추첨이 사회의 운영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묘사하는데서 나타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노조에서는 그런 것이 불가능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예를 들어 대의원 제도와 같은 경우에는 추첨을 통할 수도 있는 문제다. 아테네에서처럼,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 출마하고, 추첨하며, 다만 선출될 경우에는 회의 참가에 따르는 일급을 지급할 수 있다.(무한히 복잡한 선거제도에 돈을 쓰는 것보다는 이것이 적절한 '민주주의 비용'일 것이다.) 지금의 선거에서 20~30명이 출마한 선거구에서 기계적으로 투표하는 것보다는 민주적이다.

 

(대부분의 선거구가 미달이거나 후보자와 선출자수와 같기 때문에 선거제도가 변별력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없을 뿐더러, 경선이 된다 치더라도 대사업장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며 중소영세사업장은 불리하다. 게다가 과반수 이상 득표해야 당선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나마 정상적으로 노조 기구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간부들은 조합원들에게 "모두 투표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과제들

 

지금 진행되는 선거의 이례성─그 규모 등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새로 만든 조직의 첫선거이며 따라서 아직 '관례'가 아니고 우리에게 '낯설다'는 점─ 은 노조에서 선거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미 민주노총 직선제 주장에서도 직선제가 만능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했던 적도 있지만, 민주주의는 제도의 문제이자 그것을 넘어서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지금 문제는 관료제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조합원 사이의 민주주의를 증진할 의지와 고민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일부 정파에서 말하는 것처럼 "현장 민주주의"라는 말을 수없이 한다고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제도의 문제이자 그것을 넘어서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문제의 복잡성 속에서 끈기있게 작업할 수 있어야 겨우 가능할 수 있는 문제다. 물론 첫 시도에서 우리에게는 끈기보다는 감각과 속도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미 많이 늦었고, 당장은 이번 주의 선거, 투표-개표까지 실제로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것이 관건이다. 선거 이후 다시 평가들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그 평가가 선거의 문제들의 해결책으로 다시 한번 관료제의 편의성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증진할 수 있도록 논쟁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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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노조, 쟁점과 전망

월간 사회운동에 실릴 공공산별노조 관련 글입니다. 아직 2월호인데 아직 안 나온 것같네요. (아마 편집과정에서 조금 수정은 있겠죠)

공공노조도 현재 노조운동의 산별노조 전환과 관련해서 (금속보다는 중요성이 덜 할지도 모르겠지만) 주목해야할 과정입니다. 하지만 금속과는 또 다르게 관심 대상이 아니거나 혹은 잘 소개가 되고 있지 못합니다. 가장 큰 원인은 논쟁이 부재-과소결정되고 관료적인 건설과정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한계와 가능성을 모두가진 과정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지금 2대 직선임원, 대의원 선거가 진행중입니다. 처음하는 직선선거라 이 실무를 진행하는 입장에서도 만만치 않군요. 또 조합원들이 '직선'이라는 명분 하에서 표찍는 기계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고민도 됩니다. 어떤 선거구에서는 한 조합원이 30여명의 후보에게 투표해야하는데, 이건 거의 말 그대로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 합니다. (직선제는 어쩌면 활동가들의 편리한 알리바이. 한 조합원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30여명의 후보에게 투표하는 게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되냐는 겁니다.)

지역본부와 함께 업종본부를 골간으로 이중적으로 인정하다보니 생긴 문제이기는 하지만서도, 더 근본적인 문제는 초기업적인 활동이 개시되기도 전에 형식부터 규약-규정의 형식논리에 따라서 만드려다보니 조합원들에게 그 책임과 부담을 전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산별의 내용보다 형식을 우선 만드려다보니 생긴 문제라고 할 수 잇는데, 더 큰 문제는 조합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일 겁니다.

그걸 조금이라도 넘어보려고 아둥바둥(이런 표현이 이렇게 절실한 적이 없습니다)하고는 있지만 쉽지는 않군요. 제도의 한계에 여전히 제한됩니다. 이후, 공공노조의 지역활동을 조직하고 창출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해야할 텐데 그것 역시도 쉽지만은 않은 과정. 그래도 아래 글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의미와 한계가 모두 공존하는 상황이니, 정세의 호기를 포착해야겠죠.
 



공공연맹을 중심으로 진행된 공공부문 산별노조 건설 노력은 작년 11월30일 “전국공공서비스노조”(이하 “공공노조”)가 출범 발기인대회를 개최하면서 실질적인 조직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조합원 직선으로 선출하는 1기 집행부 선거가 준비 중에 있기 때문에, 여전히 공공노조는 ‘건설과정’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현재 약 3만5천여명의 조합원이 가입되어 있다. 공공노조는 주로 공공연맹 가맹조직을 중심으로 기업별노조 혹은 (기업별 지부를 중심으로 한) 업종노조의 조직전환을 통해 구성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기존 노조들의 조직전환을 통한 합병이라는 방식으로서, 산별 “전환”의 의미, 쟁점이 어떻게 형성될 것인가를 규정하는 조건이 된다.

산별노조 출범 이전까지의 여러 쟁점은 산별노조 출범 이후에는 변화된 조건에서 다른 방식으로 전위되고 있다. 그러나 전체 과정의 쟁점은 일관된 흐름을 갖는데, 이는 산별노조라는 하나의 조직형태를 둘러싼 서로 다른 이해를 반영한다. 특히 현재 시점은 11월30일 이후 2월 28일까지로 예정된 1기 과도기 집행부의 임기가 막바지로 접어들고, 직선제로 선출되는 2기 집행부 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이와 함께 새로운 쟁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는 산별노조 출범 이전의 쟁점들에 대해서 모두 언급하기는 힘들고, 다만 현재의 쟁점과 구체적으로 연관된 것까지만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기업별 노조의 조직전환과정이라는 특수성 혹은 한계

공공노조는 주로 기업별 노조, 혹은 기업별 조직을 골간으로 하는 업종노조(문화예술노조, 시설관리노조 등이 여기 속한다)들의 통합을 통해 건설되었다. 따라서 조직 형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들은 기존의 활동단위였던 기업별 조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재편할 것인가와 연관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산별노조 건설이란 기업별 노조를 넘어선 더 큰 단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제시되지만, 많은 ‘산별노조’들에서 실제 활동은 기업별 조직단위를 기본으로 하는 방식을 넘어서지 못해왔다. 이는 노동자 의식을 기업 내에 제약하는 것으로 이해된 기업별 조직을 넘어서는 것이 산별노조의 실질적인 목표가 아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노조의 합병을 통해 규모를 키우고 이를 통해 (결국은 기업 내부로 귀결되는)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산별노조 건설의 현실적인 이유는 기업별 조직과 활동방식을 넘어서기 위한 운동을 활성화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었다.

공공노조도 기업별 구조를 점차 극복하고 통합력을 증진하기 위한 과제를 안고 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향은 논쟁적이다. 산별노조 출범과정에서 △ 조직의 골간단위를 (광역)지역본부로 완전 재편하며, △ 200명 이하의 중소사업장은 초기업 통합지부를 구성하도록 하는 등의 방안은 3년간 유예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특히 조직의 골간단위를 (광역)지역본부로 완전히 재편하는 방안은 일부 노조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기본방침으로 ‘선언’은 되었으나 강제력은 없는 상태다. (현재 공공노조는 지역본부와 업종본부를 모두 골간으로 인정하는 이중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특히 기업별 구조를 넘어서는 산별노조를 만들기 위한 쟁점은 지역본부 강화냐, 업종본부 유지냐는 논쟁과 혼재되어 진행되었다. 장기적인 조직의 재편방향에서는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구조가 옳다는 것이 동의되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에는 큰 이견을 보였다.

특히 주로 업종본부의 유지, 활성화에 관심을 갖는 동지들은 기존에 ‘소산별노조’(업종노조)를 구성하고 있던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공공산별노조 내부에서 기존의 조직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산별노조’들이 산별노조 건설과정에서 보여준 입장은, 소산별이라는 ‘과정’을 경과하면 산별운영을 더 차근차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산별노조로 전환한 소산별노조 조직들은 여전히 기존의 조직체계를 유지하는 데만 관심을 가졌으며, 지역에서 보다 폭넓은 단결을 위해 자신을 넘어서는 데는 소극적이거나 역행했다. 또 공공연맹 내 대표적인 소산별노조였던 과학기술노조, 공공연구전문노조, 발전산업노조 등은 오히려 공공노조로 전환하지 못하거나 이를 위한 논의계획도 잡고 있지 못한 상태로 여전히 ‘소산별노조’(업종노조)로 남아있다.

지역본부와 업종본부

결국 조직형태는 절충적으로 구성되었다. 조직의 골간으로 업종본부와 지역본부를 모두 인정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다만,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을 발전시킨다는 지향을 실현하기 위해서 대의원, 사업비, 인력 등에서 지역본부에 가중치를 두는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절충’은 조직 구조를 과도하게 복잡하게 만들 뿐 아니라, 향후 운영과정에서 권한의 충돌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모든 종류의 집행기구, 대의기구의 선거를 이중으로 진행해야하며, 사업도 이중으로 진행된다. 이로 인해 노동조합 관료조직이 더 비대하게 구성되어야하는 문제도 발생한다.

논의 과정에서 업종본부는 그 규모는 크게, 개수는 적게, 지역본부는 가능한 지역에 최대한 설치하는 것을 방향으로 했다. 여기에는 가까운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사업을 활성화하고자한 의도도 반영되었다.

지역중심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시도

이러한 상황에서도 지역중심의 연대를 강화하고 이를 조직구조에도 반영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진행된다. 이러한 노력들은 산별노조 건설이 열어놓은 조직 재편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우선 초업종 지역지부를 산별노조 안에 구성하기 위한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다. 초업종 지역지부란, 조직의 구성과 활동에 있어서 기업별 활동을 넘어설 뿐 아니라 업종별 활동도 넘어서 통합조직을 구성하고 지역연대를 강화하는 것을 지향으로 한다. 한 지역에서 서로 다른 사업장, 업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라도 같은 지역 조직틀 안에서 일상활동과 투쟁을 함께 하면서 조직을 융합하는 것이다.

주로 기존에 “지역공공서비스노조” 등 지역노조들이 활동했던 광주전남, 대구경북, 전북, 서울 등에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산별노조의 활동과 조직형태가 지역을 중심으로 해야한다는 문제의식 하에서 이를 우선 실현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을 우선 함께 하는 단위들은 앞서 언급한 “(舊)지역공공서비스노조”들과 주로 보육, 자활, 사회복지시설 등 사회복지 관련 노조, 학교비정규직 단위 등 중소영세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이다. 전국에 지역별로 산재하고 있거나, 저임금, 비정규직인 경우가 많고, 지방자치단체 등과도 직간접적인 사용자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 부문의 노동자들은 지역을 중심으로 연대를 확장하는 것이 노조활동을 강화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다. 또한 이들 조직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것을 조직자체의 지향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지역을 단위로 하는 적극적인 조직화 사업으로 나타난다.*1)

주1) (舊)지역공공서비스노조 활동의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공공연맹 서울지역본부 건설과 지역 노동자 사회운동」, 박준형(월간 사회운동 2006.6)을 참고

이들 뿐 아니라 주로 보건의료노조에서 탈퇴한 병원사업장을 중심으로 구성된 (舊)의료연대노조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운동의 강화를 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다. 최소한 기업별지부를 넘어선 지역단위의 업종지부를 구성하고자하며, 각 지역에서 중소영세병원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사업을 핵심으로 배치하고 있다. 또한 장기적 전망으로는 초업종지역지부를 구성해야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각 지역에서 초업종 지역지부를 구성하고자하는 단위들(사회복지 관련 단위, 舊지역공공서비스노조, 舊의료연대노조)은 지역중심의 연대활동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별도의 업종본부 설치를 논의하게 된다. 현재 “사회연대본부”라는 이름으로 구성된 이 업종본부에는 (舊)사회보험노조(국민건강보험공단), (舊)사회연대연금노조(국민연금공단)까지 함께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이런 과정에서 애초 골간조직의 한 축으로 규정되었던 ‘업종본부’는 사회연대본부, 통합본부, 환경에너지본부, 공공시설환경본부라는 4개의 업종본부가 설치되는 것으로 논의가 정리된다. (통합본부는 독자적인 업종본부를 설치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은 단위들이 함께 구성한 것으로, 정보통신, 문화예술, 경제사회단체 등을 포괄한다.) 사회연대본부는 물론 ‘통합본부’까지 ‘초업종 업종본부’인 상황에서 이들은 전체 조직의 2/3정도를 점하고 있다.*2) 게다가 지방자치단체를 직간접 사용자로 하기 때문에 지역중심의 활동이 필수적인 공공시설환경본부까지 감안하면, 실제로 업종본부 위상에 맞게 실질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단위는 아직 1만명 미만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환경에너지본부 정도에 불과하다.

주2) ‘초업종 업종본부’라고 내가 칭한 용어 자체가 업종본부 설치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기본적으로 많은 업종의 노동자가 함께 조직을 구성할 수밖에 없는 공공부문에 있어서 ‘초업종’이라는 것은 모든 조직단위 구성의 기본적인 조건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다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조건은 결국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구조를 편제하고 활동을 배치하는 방향으로 공공노조가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고 있다.

<전국공공서비스노조 조직구성>
o 지역본부(12개) : 서울본부, 경기본부, 인천본부, 강원본부, 충북본부, 대전충남본부, 전북본부, 광전제주본부, 대구경북본부, 울산본부, 부산본부, 경남본부,
o 업종본부(4개) : 통합본부, 공공시설본부, 사회연대본부, 환경에너지본부

일정에 쫓긴 건설과 현장의 부담

한편, 건설일정을 먼저 확정하고 조직형식적인 투표 절차 등을 중심으로 구성하기 시작한 산별노조 건설은 여러 가지 지점에서 점차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산별전환 투표를 독려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논의되거나 검토되지 못한 쟁점들이 현장에 잠복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산별노조로 전환하면 조합비를 그렇게 많이 산별노조 중앙에 올리는지 몰랐다고 하면서 불만을 토로하는 현장간부도 있을 정도다.

현재 조직정비과정을 선거라는 계기를 통해 일단락하기 위한 준비가 진행 중이다. 그러나 정해진 일정을 중심으로 조직전환을 독려한 결과, 많은 무리가 나타나고 있다. 조직재편에 대해서 현장의 조합원들과 논의는커녕 이해조차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초의 직선제 선거가 준비되고 있지만, 각 집행단위, 대의원 선거를 위한 후보도 미달사태를 겪을 것이 우려된다. 이런 조건에서 2월초부터 선거일정에 돌입하면 조합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공동활동의 경험이 축적되지 않은 상황에서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생소한 조직출신의 후보들에게 투표부터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조직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각종 회의는 사업장 단위의 기본적인 노조활동을 마비시킬 정도이다. 현장간부들이 임단협 준비, 현장간담회와 같은 기본적인 일정조차 소화하기 힘들다는 목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이러한 문제는 조직을 우선 형식적으로 통합하고 내용을 만들어가는 경로를 취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더구나 내용적 준비를 하는 것은 물론 형식적인 준비를 하기에도 3개월이라는 과도기 집행부 임기는 너무 짧았다는 것도 확인되고 있다.

전망 ; 가능성과 한계의 공간으로서 산별노조

눈썰미 있는 독자들은 이러한 논쟁들을 살펴보면서, 과도하게 조직형태에 논란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공공노조에서는 금속노조와도 다르게 과연 산별노조를 통해서 어떤 투쟁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거의 제기되지 않고 있다. 하다못해 올해 산별노조의 임금요구는 어떻게 만들 것인지, 1년차 산별노조의 핵심투쟁 의제는 무엇으로 할 것인지, 산별교섭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 대한 논의가 모두 이루어지지 못하거나 혹은 쟁점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진행되는 이유는 산별노조 건설이 투쟁을 통한 단결의 확대보다는 조직 통합에 더 방점이 찍혀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우선 지적할 수 있다. 특히 2006년에 7월에 공공연맹이 집중하고자 했던 대정부 투쟁이 사실상 맥없이 마무리된 상황도 산별조직 하의 공동투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활성화되지 못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렇게 조직형태에 논란이 계속 집중되는 이유는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다. 공장단위의 조직형태를 취하는 제조업과는 달리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의 조직형태가 다양하고 복잡하다는 점, 금속노조와는 달리 산별노조의 축적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조직논의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조직형태 논의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닌데, 이를 통해서 지역을 중심으로,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중심으로 노조운동을 재편하고자하는 다양한 시도가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산별노조 건설의 하나의 ‘효과’로서 그 동안 지지부진했던 지역운동 강화를 위한 실질적인 논의가 촉발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초업종) 지역지부는 산별노조로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논의조차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대기업노조의 지역조직들을 지역사업에 결합시키는 것도 산별노조로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더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산별노조 건설을 통해서 새로운 조직적 가능성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산별노조 건설과정에서 이렇게 새로운 운동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몇몇 공간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특히 각급 집행단위, 대의기구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준비를 비롯해 산별중앙-업종/지역본부 등 상급조직을 구성하는데 많은 역량이 집중되고 있다. 이로 인해서 출범한 지 불과 2개월에 불과한 공공노조에 벌써 현장공동화, 관료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공공노조가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될 ‘건설과정’에서 몇 가지 점이 특히 강조되어야한다.

우선, 산별노조 건설 과정이 조직체계에 대한 논란을 넘어서 산별노조 차원의 투쟁과 일상활동 등 ‘사업’이 실질적으로 준비되어야한다. 조직체계를 제대로 세우기 위한 준비도 매우 중요하지만, 이러한 각급 조직의 구성이 투쟁, 사업과는 분리될 수 없다. 선거기간이라는 이유로 이들 논의가 서로 분리되고 연기된다면 조직형식주의에 빠지고 말 것이다. 지역본부라면 지역차원에서 지방자치단체를 사용자로 하는 조직들의 교섭쟁취 투쟁, 지역공동 임단투와 지역교섭단 구성에서 시작할 수 있다. 이 사업들은 지역차원에서 ‘공공성’을 쟁점으로 한 사회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야한다. 산별노조 중앙 역시 올해 임단투부터 시작하여 ‘공공성’을 쟁점으로 한 사회적 투쟁까지 나가기 위한 계획이 준비되어야한다.

두 번째로, 산별중앙, 지역본부, 업종본부 설치과정이 현장공동화 혹은 관료기구의 비대화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는 매우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이들 기구나 사업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식의 주장은 아니다. 산별노조 건설은 기업별 현장의 활동을 지역, 산업으로 확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 상급기구의 구성과 강화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각급 단위의 사업이 현장활동을 활성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집중되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일상활동과 투쟁을 함께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인 지역본부 사업과, 이 사업과 각 지부 사업의 결합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

세 번째로, 지역을 중심으로 연대활동을 활성화할 수 있는 다양한 노력이 이루어져야한다. 산별노조 안에서 지역차원의 단결을 확대하는 것은 기본이지만, 민주노총 지역본부 사업에 대한 결합력을 강화하는 등 산별노조를 넘어서는 지역차원의 단결에 기여해야한다. 또한 지역적 단결의 확장이란 지역의 노동자 운동 뿐 아니라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확장-강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지역사업을 강화하고, 지역 내 연대투쟁을 활성화하는 것을 조직적 목표로 해야한다. 이러한 과정은 조직재편 과정에서도 앞서 언급한 (초업종)지역지부의 구성, 지역본부의 강화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공공노조의 건설과정은 다른 이미 건설된 산별노조들과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주체적이고 객관적인 강력한 현실적 제약 속에 놓여있다. 따라서 이 노조는 이전의 다른 경험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기업별조직의 연합체의 역할을 반복할 수도 있으며 그럴 가능성이 오히려 높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노조는 ‘보다’ 지역에 가깝게, ‘보다’ 사회운동에 가깝게 운동을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여전히 열려있다는 점을 지적해야한다. 따라서 이미 건설된 산별노조 가 이러한 운동적 지향을 강화할 수 있는 산별노조의 사업을 수립하고 지역적 거점들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지역적 거점을 강화하는 노력은 일부 공간에서 ‘실패’하더라도 또 다른 일부에서는 운동적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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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운수산별노조와 공공-운수 4개 연맹 통합>

공공연맹, 화물통준위, 민주택시연맹, 민주버스노조 등, 4개 공공-운수 연맹 조직의 통합은 공공노조와 운수노조 건설 논의 과정의 결과이다. 애초 공공연맹 내에서 산별노조 건설의 경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쟁점은 결국 공공노조와 운수노조를 별도로 건설하고 이를 재통합하는 것으로 논의가 정리되었다. 이는 최소한 공공연맹이 포괄하는 업종을 하나의 노조로 통합해야한다는 주장과, 몇 개의 업종노조를 우선 건설하고 이를 재통합하자는 주장이 경합한 결과였다. ‘몇 개의 노조’를 공공노조와 운수노조 정도로 정리해서 합의된 셈이다.

이러한 건설경로에 관한 논쟁은 이미 금속산업에서 산별노조 건설과 관련해 벌어진 논쟁과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대산별조직을 건설하고 이를 지역중심으로 운영하고자 하는 입장과, (비록 대산별노조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업종별 조직을 활성화하고자한 입장이 서로 대립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2005년 5월, 민주버스, 민주택시, 화물통준위, 공공연맹 4조직 대표가 회합하고 ”운수노동자들의 대단결과 산별 건설을 위해 공동 노력한다“고 합의한다. 이는 공공연맹 내외의 운수조직과 산별노조 건설을 동시에 추진한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논의는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2006년 안에 공공노조와 운수노조를 별도로 건설하되 2007년 말까지 재통합한다는 합의를 만들게 된다. 이에 따라 공공노조와 운수노조는 각각 2006년 11월30일과 12월26일 창립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은 정치적 타협의 결과다. 조합원들은 오히려 ”1년 후에 합칠 조직을 왜 따로 만드냐“고 묻는다.

그러나 운수노조 출범은 공공-운수 4연맹 통합과 밀접하게 연관된 과정으로서, 연맹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출범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통합과정은 각 조직의 이견으로 인해서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민주택시연맹 등이 통합예정 1주일을 앞두고 제출한 새로운 입장은 기존의 통합관련 논의를 모두 혼란에 빠트리면서 통합대의원대회 하루 전까지도 개최 여부가 결정되지도 공지되지도 못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결국 12월26일 통합대의원대회가 진행되었지만 결국 성원미달로 회의 중간에 유회되었다. 해를 넘겨 1월23일 다시 개최되어 비로소 통합이 이루어졌지만 이 기간 동안에도 현장토론 등은 거의 진행되지 못하였다.

운동의 역사들이 서로 다른 조직들이 공동투쟁의 과정도 없이 ‘통합준비위’ 몇 명의 논의를 통해서 조직을 통합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지지부진한 논의과정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이 과정에서 조직통합에 대한 각 단위노조, 현장 논의는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 게다가 사실상 운수노조를 출범시키기 위해 진행된 연맹통합과정은 기존의 조직적 질을 상승시키는 과정이라기보다는 하향평준화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공공연맹의 지역본부는 통합연맹에서는 모두 해체되고 지역협의회 수준으로 격하되었는데, 이는 별도 의결기구, 상근자, 예산도 없다는 의미다. 기존이 연맹 기능도 대폭 축소된다.

공공-운수 4연맹 통합은 조직통합을 통해 규모를 확대하고자하는 시도가 얼마나 조직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직적 단결의 확대가 공동사업, 공동투쟁을 전제하지 않고 추진될 때에는 최소한의 민주적인 토론조차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 결과, 조직적 질을 상승시키는 효과도 만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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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노조 활동가들의 노동조합

EM님의 [상근자 노조 논쟁(?)에 부쳐] 에 관련된 글.

 

민주노동당의 상근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다는 일로 논쟁이 되고 있던 즈음, (뭐 우리밖에는 아무도 관심갖지 않았지만 ^^;) 나를 포함한 공공연맹의 상근활동가들도 공공노조의 지부형태로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의 경우에도 최종적으로 지금 진행되는 선거인 명부가 확정되는 2월18일 전에 가입절차를 마무리할 것을 상근활동가동지들에게 적극적으로 제안했고, 며칠후 '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민주노동당노동조합의 간부를 이런저런 일로 우연찮게 보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연맹의 상근활동가 동지들에게 적극적으로 공공노조에 집단 가입할 것을 제안했던 이유는, 우리가 그 운영에 함께 하는 조직에 정당한 일원으로 책임을 갖고 또한 그에 걸맞는 발언을 할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제안하고 나서 보니 주로 "전진"쪽 선배상근활동가들은 이미 각자 개별적으로 가입원서를 공공노조에 제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참.) 그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 단지 '월급받고 채용된 사람'의 위치에 남는다면 그것은 계속 관료기구의 실무자가 될 뿐이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핵심적인 것은 '멤버쉽'이었던 것이다.

 

사실, 채용 상근활동가들은 유리한 조직적 위치에서 큰 힘을 발휘할 때도 있지만  부당한 배제를 당하기도 한다. 연맹에 있는 1/3 정도의 상근활동가들은 단위 노동조합에서 직선간부의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나머지 동지들도 단위노조의 경험이 있는가의 여부를 떠나서 책임있고 훌륭한 동지들이 많다. 하지만 정당한 조직적 멤버쉽을 갖지 못한 모호한 상태에 있었다. 연맹 소속 노조의 직선 사무국장으로 있다가 사업장을 퇴직하고 연맹에 채용상근자로 올라온 동지라도 같은 상황. 민감한 정치적 문제에서는 배제되었다. 다만 (힘쓰는 정파에 속한 경우에) 정파들을 통해서 비공개적으로 개입하는, 부적절한 관행만이 그것의 결과였다.

 

나는 공공노조의 '연맹사무처지부'(일단 향후 초업종 지역지부가 구성되기 전까지는 독자적인 지부형태를 취하기로 했다. 서울지역지역지부가 구성되는대로 통합하는 것을 전제로 지부를 설치했다. 서울지역의 초업종지역지부와 관련해서는 이 블로그의 <우리들의 미망 혹은 희망>을 참조.)가 상근활동가들이 공공노조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는 점과 더불어, 일반적인 노동조합 활동과는 달라야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EM님이 위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말이다. (그에 비해서 일각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노동자가 아니라거나, 노조를 만들 수 없다거나 하는 주장의 문제점은 이미 EM님이 정리했거니와, 적어도 그것들을 쟁점으로 제기하는 수준은 넘어야 의미있는 논쟁이 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이 구조적으로 가지는 한계 때문이다. 노조에서 활동하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직하다면, 노동조합 조직은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의 1번인 '법 이데올로기'에 기초하고 있다. 그 이데올로기는 노동조합의 조직적 기반을 규정할 뿐 아니라, 매시기 활동의 모든 측면에 전방위적으로 침투한다. 우리는 매순간 그것들과 전투를 치루어야한다.

 

노동조합은 조직의 구조, 운영방식, 활동의 범위, 활동양식 등 전반을 노동관계법을 중심으로 한 부르조아 법에 의해서 규정되는 제도다. 그래서 그것은 (알튀세르가 탁월하게 지적했듯이) 역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AIE의 하나이다. 노동조합의 규약이라는 것도 사실 법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닌데, 규약으로 풀리지 않는 (내부운영 등에 대한) 쟁점이 종종 법정으로 간다는 사실은 그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 노동조합의 활동과정에서도 그것은 느낄 수 있다. 노동조합의 활동은 부르조아 국가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무해하다고 인정된 경제적 투쟁에 국한되며, 그것을 관리한다. 경제투쟁이 한계를 넘어서 법의 규제를 받는 순간까지가 노동조합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이다.

 

물론 최근의 경험에서도 80년대말과 전노협 시기에는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가장 빛나는 시기이며 항상 기억해야하는 투쟁이다. 우리가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이유라면, 그 속에서 이러한 법적 제한에 갇히지 않는/을 주체를 형성하는 계기를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때때로만 성공하지만, 지속적인 과정이다. 노동자들이 결사체인 노동조합이 법 이데올로기에만 제한되지는 않는 자신의 생명력을 갖기 때문이다. 활동가들은 그 과정에 개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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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AIE에 대해서는 (직접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알튀세르를 인용하자.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1970)」,『아미앵에서의 주장/1991,솔』에 실림, 무엇보다 전체를 직접 읽는 것이 좋겠지만.)

"계급투쟁은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적인 형태들 속에서, 따라서 AIE들의 이데올로기적 형태들 속에서 표현되고 시행된다. 그러나 계급투쟁은 이러한 형태들을 훨씬 넘어선다. 그리고 피착취계급의 투쟁이 또한 AIE들의 형태들 속에서 시행될 수 있고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라는 무기를 권력을 쥔 계급들에게로 돌릴 수 있는 것은, 계급투쟁이 그러한 형태를 넘어서기 때문이다."(각주11, 강조는 원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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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들도, 자신의 조직형태를 노조로 규정하는 순간 같은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그들의 노동조합은, 그 제도 자체의 정의에 따라 '사용자'를 누군가로 정의하고 '단체협약', '임금협약'을 요구하며,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익을 모아내려한다. 그리고 이에 걸맞게 자기 조직 구조를 형성한다. 그것이 노조 활동의 시작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굳이 만들 조직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를 묻게된다. 이러한 노조 기구의 한계를 인식하는 활동가들이라면 오히려 평의회 형태를 조직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집단적인 발언을 하기 위해서 상호 평등한 관계에서 토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조직으로서 말이다. 설사 그것이 노동조합의 형태를 취했더라도 그 운영이 기존의 노동조합과 같은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런 점에서, 사후적인 이야기이지만 만약 다른 상황이었다면, 내가 민주노동당 상근자였다면 민주노동당과 같은 경우에는 '당직자 평의회'와 같은 형태를 제안했을 것같다.(물론 조직형태만이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곳에서는 '조직이데올로기'가 작동하며, 그것은 조직의 성격자체를 규정하는 충분히 강력한 요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조합 형태를 취하는 것은 가볍게 볼,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민주노동당과 같은 조직 안에서도 노동조합 조직형태를 반복한다는 것은 그 당이 스스로도 대안적인 구조와 운영을 실현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노동당 노동조합을 만든 동지들만의 책임은 아니며, 당의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다. 그것이 당직자들에게 당지도부와 자신들의 관계가 '노사관계'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날 때 당직자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얼마나 가능할까?  다만 노동조합이라는 조직형태로 인해 부여되는 가상--부르조아 법이 제한하는 구조와 운영--에 스스로 빠지지 말아야한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미 노조형태를 취한 상황에서 어떤 방식이 가능할까? 그것은 당사자들이 우선 고민해야할 문제이지만, 만약 민주노동당노동조합이 공공노조에 가입하게 된다면 지역별로 사회복지, 비정규직 등 운동과제에 '조합원으로서' 해당 현장의 노동자들과 결합하는 방법도 있을 것같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전형적인 '노조'활동과는 또 다른 방식의 노조활동일 것이고, 노조 안에서 사회운동을 강화하는 또 다른 의미의 활동이겠지만.)

 

"연맹사무처지부" 경우는 다를까? 나의 경우에는 '멤버쉽'이 가장 문제라고 보았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참여한 상근활동가 모두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 함께 했을 것이고, 그중 다수는 기존의 노동조합 활동관행을 더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찬가지의 위험에 처해있다. 이것 역시 일차적으로는 자본주의적 노사관계에 가까운 무엇이 우리 내부에서도 실현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날 현상이다. 그러나 그것이 적어도 활동가들의 조직이라면 자본주의적 노사관계를 조직 내에서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것을 지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한다.

 

물론 민주노동당 안에서나, 공공연맹 안에서나 그것은 조직의 객관적 현실이라는 한계에 규정당하고 있다. (말하자면 조직들 자체가 다른 관계를 실현하기에는 아직 너무 "후지다".) 그러나 주체적으로도 부르조아 법이 부여한 가상에 갇힐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이러한 진술이 이제 '조합원'이 된 사람들에게 너무 과도한 기대라는 것도 알고 있다. 민주노동당에서 '노동조합'까지가 가능했던 이유는 당기구의 한계만이 아니라 주체들의 한계까지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공연맹에서도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이와 함께 주체적인 측면에서도 더욱 강조되어야할 것은, 이러한 노동조합들이 조직의 상근관료들이 조합원을 대신하는, 관료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럴 위험이 상당하다.) 그들도 발언권이 있지만, 구조적으로 그것은 과잉대표될 수밖에 없는 위험이 있다. 따라서, 상근활동가들을 직접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하려는 시도에 진실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강조되어야한다. 그것이 자신의 관료적 지위를 강화하고 권력화를 비호하는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노동조합과는 다른 조직이어야한다. 그것은 지속적이고, (모순의) 이중의 항에 대항해야하는 어려운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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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민주노동당에서 '노동조합'이 적절치 않다고 비판하는 동지들의 진술이, 일면적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동시에, 그 형태를 '노동조합'으로 결정한 동지들에게도 항상 자기비판-자기지양이 필수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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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흐름,「새로운 실천을 꿈꾸며」


'새로운 실천을 꿈꾸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는 금속노동자들" 엮음


재작년 금속연맹 임원 선거(박병규 선본)을 통해서 하나의 세력 혹은 경향(흐름)으로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새흐름"은 작년 7월에 300여 페이지 분량의 책자를 발표했다. '노동운동의 발전과 미래를 고민한 글 모음'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소책자는 그 동안에 "새흐름"의 내부에서 공유되고 간간히 외부에도 제안되곤 했던 문서들을 정리해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새흐름'은 스스로의 주장처럼 명확한 조직적 형태를 취하기 보다는, 하나의 경향성이고 네트워크 형태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경향들을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이 중에는 서로간에 매우 이질적인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만큼 정치적 방향에 있어서도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타 정파'들로부터는 이들의 비일관성이라든지, '새흐름'으로 분류된 일부의 문제점을 전체 '새흐름'의 문제인 것으로 부풀려 비난한다든지 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렇다고 해도 이들이 '새흐름'의 일부인 이상 비판이 아예 틀린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은 문서로 제출된 입장을 살펴보는 것일테다. '새흐름'은 주로 금속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 소책자는 매우 흥미롭다. '조직'의 입장을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려니 부담되는 점도 없진 않지만, 암튼, 개인적인 느낌들이다. 우선 소책자의 핵심적인 주장, 내용을 살펴보고 몇가지를 평가해보자.


현장의 정서(자동차 대공장을 중심으로)

우선, 앞 부분은 현장의 정서를 금속 자동차 공장을 중심으로 진단한다. 현장활동가들의 증언을 모았기 때문에 생생하게 제조업 대공장 노동자들의 정서를 읽을 수 있다.(금속 외부의 활동가들에게는 좋은 읽기 경험이다.) 생산의 해외이전 추세, 98년 정리해고 경험 등으로 고용불안이 극히 심화되어 있다.(2007년 위기설 등) 이와 함께  “있을 때 벌자”는 분위기가 현장에 팽배하다.  이것은 장시간 노동으로 이어지는 데 주40시간제 시행에도 불구하고 잔업을 확보하는 것이 노조의 능력으로 평가받는 것이 현실.

이  속에서 삶의 질은 오히려 지속적으로 저하된다. 그러나 잠재된 휴식에 대한 욕망은 이 이면에 팽배하다. 과도한 장시간 노동으로 인하여 가족의 위기가 발생하고 오히려 삶의 질을 저하되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불만도 잠복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노동조합의 현장 장악력은 저하되고 있다.  회사측의 일상적 회식을 통한 조직관리 등에 노동조합이 대응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조합원과 활동가의 거래’가 선거를 매개로 일어난다. 조합원은 자신의 실리를 직접 요구한다.  작업장 내부의 공동체성은 붕괴되는 중이다. ( 이는 새흐름이 노동자운동의 대안으로 ‘작업장 혁신’을 주장하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완성차와 부품사 노조의 갈등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 바이백 등에 대응하는 데에는 완성차의 지원이 필요하지만 무관심한 것이 현실이다.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대부분 무관심하지만 (사업장에 따라서는) 투쟁이 ‘과도하다’는 정서도 존재한다. 그러나 노조는 구조조정의 방패막이로 사고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노동조합 활동의 관행과 타락

현장조직, 활동가들은 노조 선거에 대한 과도하게 몰입하고 있다. 현장투쟁보다 선거 대응이 중심이며 대공장 현장조직은 사실상 선거조직이라고 볼수 있다. 이들 현장조직들은 선거 때마다 후보의 인맥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새흐름의 이런 주장만이 아니라도, 이에 대한 연구논문도 많이 나와있다.) 그러나 중소사업장에서는 간부층을 충원하기 어려워 임원선거도 힘든 조건이다.

상급단체의 정파적 대립이 이러한 현장단위의 ‘맹목적’ 대립과 선거정치를 부추기고 있다.  운동노선에 따른 현장조직의 분립은 이미 과거의 이야기이며  현장조직에 속하는 것이 작업장 배치 등에 있어서 일종의 ‘보험’을 드는 것으로 사고될 정도다.  상급단체에서도 간부의 인선이 ‘전문성’, ‘현장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줄’을 기반으로 형성되고 있다.

이  속에서 현장 조합원들 사이에는 ‘노조 도구주의’가 만연한다.("자판기 노조") 노조가 노동자 민중과 투쟁하는 기관이 아니라 자신의 협소한 이권을 지키기 위한 이익단체, 도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업별로 담합적 노사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노조가 연대를 배제하고 이권을 단위 기업별 노조 안에서 나눌 뿐이며 그렇다면 전투적이라고 해도 담합적일 수 있다고 진단한다.  이를 비판하기 보다는 득표를 위해서 담합적 노사관계를 인정하는 정파들도 함께 문제가 있다.

민주노총 평가

주로 96-97년 총파업투쟁을 평가하면서 민주노총은 가두정치를 선택하기 보다는 의회 내의 타협을 통한 재협상을 선택했다고 비판한다. 민주노총은 IMF 이후 이갑용(현장파) 집행부도 총파업을 번복하면서 동일한 한계를 반복한다.  현대자동차 등 대공장에서도 비정규직 비율 16.9%유지합의라든가 식당여성노동자 정리해고 수용과 같이 신자유주의 공세에 후퇴해왔다.

새흐름은 민주노총의 위기에 몇가지 사례를 드는데 이런 것들이다. 대의원대회 정족수 미달, 재정자립 실패(정부보조금 수령), 한국노총과 차별성 약화 등. 특히 이들은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는 상층 지도부만의 위기는 아니라는 점. 실리주의는 현장에서 더욱 만연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대공장)현장에서 사용자로부터 관리되는 대의원, 활동가, 노조간부는 한편으로는 권력화되고 한편으로는 대중과 유리된다. "노동운동은 무능을 넘어 위선으로 나가고 있다"

지도부가 문제인가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도부 교체 전술은 한계가 분명하다. 98 노사정 합의 이후, 2002 4.2파업 철회 이후 비대위와 새 집행부가 구성되었지만 역시 제대로된 투쟁은 조직하지 못했다.따라서  지도부 교체가 대안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현장이 대안이라는 주장도 한계가 있다.  현장이 실리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점에서 “깨끗한 민주노조의 근거지”로만 사고할 수는 없으며 현장을 바꿀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정정파의 문제라는 주장도 한계가 있다. 정파들은 줄서기를 통한 권력장악에 몰두해왔다.  98년 이후 현장파-중앙파-국민파가 민주노총 권력을 번갈아 교체해왔지만 어느 집행부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역사가 있다. 따라서 특정정파가 민주노총 위기의 원인이라 주장하기 힘들다는 것이 명확하다. 모두가 위기의 공범이라는 인식이 필요한 대목. 그러나 현실에서 정파들은 역설적이게도 위기를 봉합하기 위한 정파연합을 발전시킨다.

노동단체 운동도 한계가 드러났다.  단체들은 독자적인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노조와 당의 정책사업을 대리하는 정도의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다.  정파들도 민주노총 내 정치에만 몰두하는 중이다.

또한 현장주의, 조합주의의 한계도 지적한다.  산업적, 지역적, 사회적 의제를 간과하는 ‘현장제일주의’는 협소하다는 것. 조합원의 실리주의와 계급적 노동운동의 원칙 사이에 동요하다가 전투적 실리주의로 전락해왔고 이는 (민주노동당을 통한) 조합주의적 정치활동으로 연결된다. 정치/경제의 분리로 노조의 실리주의는 정당화된다.  이런 상황에서 ‘투쟁이냐 타협이냐’는 식의 (잘 못된) 대립구도는 결국 국민파의 입지만 강화시키고 있다.

각 정치운동에 대해서는 이렇게 평가한다.  민주노동당은 의회 선거정치에만 올인하고 사회운동을 외면하고 있다. 노동자의 힘은  ‘중앙파와 연합한 반국민파 결집’을 반복한다. 만약 ‘비제도적 투쟁정당’의 이상이 민노당 내에서 가능하다고만 하면 중앙파와 혹은 민주노동당 내 해방연대 등 좌파들과 차이가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의 힘은  정파운동의 방식 반복하는데, 노조 투쟁지원단체로 등장하다가 현장 셀을 꾸리고 조직원을 늘려가는 방식의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새흐름은 노힘에게 "오히려 자신의 정치계획을 제시하라"고 요구한다. 또한 비합정파들. 이들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전위’를 구성하고 대중을 지도하려 한다는 점에서 관념적이고 여전히 계몽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흐름은 "좌파 통합"은 불가능성하다고 말한다. ‘좌파’의 위치는 오직 ‘반우파’로만 확인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내 좌파, 민주노총 내 좌파들) ‘공유 지반’이 없기 때문에 ‘좌파통합’노선은 불가능하다는 것. 이제까지 노동자의 힘은 좌파 중 중간정도의 스펙트럼으로 ‘좌파 좌장’ 역할로서, 중앙파와도 연합할 수 있고 비합좌파와도 연합할 수 있는 위치에서 힘을 발휘해왔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각 정파들의 차이가 소진되는 상황에서, 좌파가 단일한 정치노선을 갖지 못하는 현실에서 노동자의 힘을 중심으로한 좌파 결집론은 불가능(’활동가 조직‘)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좌파통합’ 보다는 새로운 질의 운동을 시작할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 과제라는 주장이다.

운동적 대안

새흐름은 우선 운동의 현실, 즉 정파, 단체운동의 쇠퇴와 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재편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대안을 구성하자고 제안한다. 이 속에서  이념을 급진화하자, 신자유주의에 대항하자는 등의 주장을 하지만 이 소책자에서 그 실체는 모호하게만 나타난다. 다만  대안‘의제’를 만들자는 주장은 보다 구체적이다.

우선 "분배에서 개입과 통제로" 나가자고 제안한다.  경제투쟁으로 대공장의 임금은 인상되었지만 하청과 임금격차는 더욱 심화되었다. 노동과정에 대한 개입과 통제, 기업과 산업, 사회적 통제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기술을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위해 사용할 것인가를 제기하자는 것. 새흐름은 구조조정에 대한 개입과 통제를 통해 노동자가 작업장과 산업에 개입하는 것은 자본주의 소유관계에 대한 투쟁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제기되는 주장이 논란이 되는 사회적 합의와 관련된 것. "사회적 합의주의는 반대하지만 사회적 합의는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동자가 요구하고 정부와 자본이 받아들이는 것이 사회적 합의라면 국가차원의 교섭구조, 산업차원의 교섭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의제'를 통해 노동자를 사회적·정치적 계급으로 형성하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협소한 현장주의를 넘어서 재생산영역을 포괄하는 "계급형성"(의료, 주거 등)의 쟁점들이다.  재생산의 정치=생활의 정치=산업과 지역의 정치. 현장에서 재생산의 정치란 더 적게 더 쉽게 더 안전하게 일할 권리, 노동의 질을 추구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작업장 혁신이 제기된다. 그밖에 요구에 있어서 공세적인 투쟁, 시기에 있어서 계획된 투쟁, 투쟁형태의 혁신 등을 주장하고 사회적 연대 강화를 제기한다.

임단투도 혁신되어야하는데, 임금은 양의 문제에서 구조의 문제로 전환되어야한다. 산업연대임금을 형성하자는 제안은 여기서 나온다. 사회적 복지, 사회적 임금을 확보하자는 것. (완성차의 2004년 ‘사회기금’의 예)  단협은 경영과 산업의제에 개입할 수 있도록, 작업장 혁신을 위한 규범을 담아야한다. 대공장은 단협을 통해 경영권과 산업의제에 대한 개입과 통제의 근거를 만들고 그에 기초하여 생산과 투자계획에 대한 협상, 산업정책에 대한 협상에 주력해야한다.

이어서 임금전략, 고용전략, 노동의 질, 산업정책과 경영에 대한 개입과 통제를 요구하는 것으로 투쟁의제를 혁신하자고 제안한다. 산업적-사회적 의제란 이런 것들이다.

제조업 공동화에 대한 대응으로 산업정책에 개입. 이는 조합원의 단기 실리주의 극복의 방법이며, 노조의 사회적 고립에 대응, 노동운동의 전략적 발전 방향이다.(노동자가 사회적 주도계급으로 나선다) 이를 위해서는 임단협 수준이 아닌 운동전략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의제선점도 필요하다. 이와 함께  산업적·사회적 의제를 다루기 위한 교섭은 필요하다.(“아무런 대책없이 노사정위 불참을 주장하는 대안없는 반대를 외쳐서는 안된다.”)

새흐름의 주장 중 또한 독특한 것이 '작업장 혁신'이다. 작업장을 노동자 생애의 가장 중요한 터전으로 사고하자는 것이다.  작업장은 노동계급의 자기 훈련과 재생산의 핵심공간(작업장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응력필요)이라는 점에서 작업장 혁신은 단순히 작업현장투쟁이 아닌 자본전략에 대한 전면적 투쟁이라고 주장한다. 작업장 진단,작업장 ‘협상의 혁신’ 사업을 진행하자는 것.

조직적 대안

새흐름은 산별노조에 대해서 '널뛰기' 입장을 보여왔다. 신자유주의 시대, 산별노조 전환은 한계를 갖고 있다고 진단한다.(그래서 자동차 업종산별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어서 금속산별에서 “이중단일체계”를 제안하기도 했다.(업종과 지역 동시편제)) 그러나 이후 형성될 산별교섭과 투쟁은 (1) 산업정책⇒지역산업정책  (2) 지역적 공간적 동일성⇒지역공동체 두가지 방향이 가능하나, (1)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지역연대강화가 가지는 한계가 있다는 것.

정규직, 비정규직, 신세대 노동자, 정당 등 모두 새로운 운동 주체가 출현하기는 한계적.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활동가 네트워크 자체가 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

 

구체적인 현장감각과 노동자운동이 처한 현실 분석

새흐름의 이 소책자의 전반부가 매우 흥미로운 이유는 생생한 현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이데올로기 공간인 '현장'에 대한 진단은 구체적이고 치밀하다.

(나는 '현장' 개념에 대해서 예전 홈페이지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현장"은 어떤 신비화된 공간도 아니며, 어떤 때는 계급적 입장에 맞게 투쟁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보수적-퇴행적이기도 한 대중들의 삶의 공간 자체, 노동대중들이 노동"현장"에서 자발적으로 구성하는 하나의 "사회"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간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모순들이 관통하는 모순적인 공간이다. - "현장" 개념의 모순과 난점)

특히 자동차 대공장 노동자들이 가진 △ 대중 이데올로기, △ 그것이 형성된 배경과, 또한 △ 그것이 노동조합 활동관행, 노조운동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연결고리를 해석하는 대목은 인상깊다. 이러한 분석들을 통해서 자동차 대공장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가지는  생산과정에서의 '구조적 힘'을 자각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할지는 아직 잘 방향잡지 못한 상황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럼 그 '방향'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가이다.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운동대안

그러나 이 소책자를 읽으면서 1/2 정도의 분량을 넘어가면서부터는 물음표가 쳐지기 시작한다. 운동의 대안을 제시하는 대목에서는 현실진단에 걸맞는 깊이가 부족하다. 그래서 새흐름의 현실진단과 대안은 대단히 불균형하게 느껴진다.

대표적인 대안으로 제시하는 작업장 혁신, 산업정책 개입과 같은 것들. 이런 과제들은 (이런말 죄송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연맹급의 노조 상급단체의 정책담당자의 현실적 고민이 될 만한 문제들이다. 문제는 이런 대안은 딱 그 정도의 수준이지, 애초에 새흐름이 제시하려고 했던 "노동운동의 발전과 미래"를 말하기에는 크게 미달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문제 분석과 대안 제시가 논리적으로도 불균등하기 때문이다. 현장의 문제로 제기된 것들이 발생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과정이다. 따라서 원인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안, 투쟁방향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로 나와야한다. 그런데 정작, 작업장 혁신, 산업정책 개입과 같은 것은 중요한 정책적 과제이기는 하지만 운동의 방향으로는 부정합하다.

그러다보니 사회적 교섭과 같은 쟁점에서는 혼란이 발생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코포라티즘의 위상, 국가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쉽게 산업정책 개입을 위한 사회적 교섭을 말하기 힘들 것이다. 공장이전과 같은 문제는 국가의 산업정책 개입의 문제라기 보다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본의 생산으로부터의 철수와 금융화, 초민족화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정책실무 차원에서 국가의 산업정책에 개입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겠지만 그것은 '운동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좌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작업장 혁신'과 같은 쟁점도 신자유주의 하에서 린생산, 적기생산과 같은 자본의 전략에 대한 면밀한 비판이 없이는 위험하게 동요할 수 있다.

정책실무 차원의, 실무적 고민은 산별노조와 관련된 입장에서는 동요로 나타난다. 사회운동과의 연대 확장이 중요하다는 새흐름이 오히려 업종 산별, 자동차 대공장을 중심으로 한 업종노조를 옹호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산별이 가결된 상황에서도 지역-업종본부의 '이중단일체계'를 주장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광역지역본부'를 주장한 좌파들보다 후퇴한 안이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지역본부를 골간으로 하자는 입장으로 전환하였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이런 동요 역시, 실무적 고민이 정세 분석에 기반한 운동적 전망을 압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로 보인다. 이렇게 실무적인 단기 판단을 자주하다가는 자신의 정체성조차 혼란스러워지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이는 지역운동과의 결합, 지역중심의 운동과 같은 쟁점에 대해 '의미는 인정하지만 현실 가능하지 않다'는 접근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는 자동차 산업에 주로 기반한 인식틀 때문이기도 하다.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은 사업장 내의 구조적 힘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지역적 연대를 통한 연합적 힘 형성에 소극적이었는데, 이런 경향이 새흐름에서도 변형된 형태로 반복된다.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이 21세기에도 여전히 노동자계급의 전형일 수는 더 이상 없다는 점에서, 이런 한계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자운동의 전망을 고민하는 데 있어서 치명적일 수 있다.

넘어서야할 곳

그래서 안타깝다. 한 금속 활동가 동지는, 금속에서는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솔직한 사람'을 만나서 일을 함께 해야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적어도 새흐름은 그런 점에서 '솔직'하고 진정성이 있어 보인다.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것이 '운동'인 이상 어떤 방향으로 하는 것인지는 결정적인 문제다.(솔직한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옳은 말'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여전히 중요하다.) 새흐름은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를 인정하고, 그럴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옳은 말'만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문제들의 본질도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인식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매우 소중한 장점이다.

그러나, 운동적 대안을 내고 함께 투쟁하기 위해서는 더 나가야한다. 솔직한 것만으로 운동의 대안이 나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의 원인을 인식하고 투쟁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인식이 필요하다. 현재에 있어서 그 고갱이는 신자유주의 비판이다. 이에 대한 인식이 누락되고는 보다 일반화된 대안을 제출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 비판이란, 단지 신자유주의가 나쁘다, 그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라고 말하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새흐름의 이 소책자도 충분히 하고 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문제는, 그것이 원인은 무엇인지, 따라서 어떻게 작동하고 노동자 민중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래서 어떻게 싸워야하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새흐름의 이 소책자가 온 지점은 여기까지인 것같다. 자동차 대공장의 현실에 대한 인식,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한 정책, 운동의제 대안. 그러나 이 활동가들이 단지 자동차 업종 운동을 할 것이 아니라 사회운동, 변혁운동의 일부로서 '노동자운동'을 하고자 한다면 한 걸음 더 나가야할 것같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실천'은 요원할 것이다. 새흐름 동지들이 "새로운 실천을 꿈꾸며"라는 소책자에서 보여준 진정성을 생각해본다면, 새흐름의 그런 전진은 우리 운동에 큰 성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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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미망迷妄 혹은 희망希望

나는 산별노조 건설과 관련된 몇몇 글이나 논의에서, 산별노조 건설 자체가 노동자운동의 대안이 될 수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조직적 재편을 강제하는 정세를 창출하고 따라서 개입을 위한 열린 공간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그런 점에서 공공연맹의 산별노조 건설(전국공공서비스노조 전환) 과정 속에서 지역을 중심으로 사회운동과 친화적인 노동조합 구조를 조직하기 위한 나와 우리 동지들의 노력은 이런 계기들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속에서 기존의 고루하고 관료화된 노조 조직구조를 혁신하고 '운동'조직으로서 노동조합을 복원하기 위한 여러가지 시도가 있다.

공교롭게도 공공연맹의 임시대의원대회가 성원부족으로 개회조차 못하고 무산된 날, 산별노조의 서울지역본부를 구성하기 위한 논의와 초기업-초업종 서울지역지부를 구성하기 위한 논의는 나름대로 알차게 진행되었다. 오전에 있었던 서울지역본부 논의(산별노조 서울지역 지부-지회 대표자회의)는 지역의 운동구조를 강화하기 위한 논의를─현재 논의일정이 대단히 부실한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진행했다. 그리고 저녁에 있었던 서울지역지부 준비모임도 의미있게 진행되었다.
 
▶ 당일 대의원대회와 관련된 참세상 기사
공공연맹 임시대대 개회도 못하고 무산
토론회에 이어 임시대대도 무산, 통합연맹 빨간불

 


지역을 단위로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사회복지부문 등을 중심으로 한 (초기업, 초업종) 지역지부를 건설하는 노력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전체 산별노조 조직질서 속에서 '보장'하기 위한 초업종 "업종본부"를 구성하는 노력이 병행된다.

('전국공공서비스노조'의 조직형태는 금속노조에도 미달하는 것으로, 광역지역본부와 업종본부 양자를 모두 골간으로 인정하고 두 본부에 모두 편제되는 것을 강제하고 있다. 이 부분은 마치 금속 새흐름이 예전에 주장한 "이중단일체계"와 유사하다. 게다가 금속에서도 많은 동지들이 반대했던 '한시적 기업지부' 또한 인정된다. 더더군다나 '한시적'이라는 말은 사실 수사에 불과한데, 이 기한을 3년으로 못박자는 주장은 주로 우파들의 고집으로 인해 '3년 후 논의한다'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 덕분에 지역을 중심으로 운동하고자 하는 단위들도 의무적으로 "업종"본부에 편제되어야하는 곤란함이 발생한다. 게다가 전국단위 기업별노조에 속해있지만 지역중심의 운동을 전개하려는 동지들은 조직 내에서 구조적 제약을 받는 상황이다.)

각 지역에서 초기업, 초업종 지역지부를 구성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서울지역에서는 이날 "서울지역지부 준비위" 1차 모임을 가졌다. 대부분의 "지부"단위가 기업별로 구성되고 있고, 그나마 '나은' 단위들이 업종지부를 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시도는 지역차원에서 연대의 정신을 부활시키고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이념에 따라 조직을 구성하려 한다.  이러한 노력은 산별노조 자체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노조운동을 위한 '코어'를 형성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 단위를 중심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조직 내 '경향'을 강화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를 가능하게 하는 조직 내적이 여건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산별노조 건설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일반화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어서, 대공장 사업장 활동가들이 산별노조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세사업장, 비정규직사업장의 경우 연합적 힘을 강화하기 위한 조직적 조건으로서 산별노조가 의미가 있지만, 대공장 사업장에서는 그나마 존재했던 현장투쟁을 약화시키고 관료화를 부추길 염려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공장 현장파 활동가들의 산별부결운동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만, 자신의 사업장의 현장주의에 갖혀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하게' 지적하고 싶다. 노동자운동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공간은 대공장의 '사업장'이라는 현장보다는 오히려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지역'이라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각 지역에서 이러한 형태의 조직을 구성하는데 각 지역에서 주로 우선 나서는 조합원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방자치단체 비정규직 노동자, 용역-외주위탁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 시설관리노동자, 영세사업장 노동자, 학교비정규직노동자, 사회복지부문 노동자(보육, 자활기관, 사회복지시설 등)와 같은 사람들이다. 지역을 근간으로 해서 "연합적 힘"을 형성해야하는 노동자들이다.(이 '연합'의 대상이 노동조합으로만 제한되지 않으며 지역차원에서 사회운동도 그 대상이라는 점에서, 사회운동적 노조주의 경향을 가질 수 있는 조직적 여건이 형성되기도 한다.)

모임을 갖고 간단한 뒤풀이. 회의를 하면서 모두 어려운 상황에서 노조운동을 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함께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들을 확인했다. 뒤풀이를 하면서는 각자의 조건을 대화 속에서 확인하면서 어려움도 있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탐색했다. 학교비정규직 동지들은 새롭게 조직되는 학교내 시설관리 노동자들과, 기존에 시설관리 용역 노동자를 조직했던 동지들이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발견한다. 자활지부에서 조합원들이 만나는 청소용역, 사회서비스부문의 비정규직노동자들을 함께 조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한다. 청소용역, 학교비정규직, 보육 등 여성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역에서 함께 만나고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한다. 사회복지, 사회서비스, 빈곤이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지역에서 여러 사회운동들과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이것은 공공부문 노조운동 안에서는 "사회공공성"이라고 불린다. 나는 이 개념에 다소 불만이 있지만 ^^;) 이렇게 가능성들을 찾아갔다.

(일전에 자활기관에서 일하는 블로거인 체게바라님과 사회서비스업무를 자활기관이 위탁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논쟁한 적이 있다. "근데 왜 굳이 청소용역입니까" 등. 이날 회의 뒤풀이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하는 과정에서 참여주민을 조직하고 함께 투쟁할 수 있다는 점을, 이 과정에서 각각의 주체들이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어려운 문제에 대한 현실의 답을 찾은 셈이다.)

이렇게 해서, 산별노조 내에서 우리가 새롭게 만드려고 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초업종, 초기업 조직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작은 감동도.

하지만, 그것이 희망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지난 6월에 같은 방식으로  이미 조직해왔던  "지역공공서비스노조"에 대한 평가토론 워크샵을 진행하면서 한계를 너무나 분명하게 확인했던 것이다. 지역연대확장과 강화, 비정규직 조직화, 조합원의 주체화, 사회운동과의 연대의 가능성을 확인했지만 마찬가지로 (아니, 오히려 더 심각하게)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기업별 조직구조, 취약한 조직역량, 조직확대의 한계를 뼈져리게 평가했다. 따라서 지난 2~3년 동안의 각 지역에서의 실천에 대차대조표를 그려본다면 결코 좋은 성적을 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엊그제 있었던 초기업-초업종 지역지부를 구성하기 위한 모임도 지난 몇년간의 지역공공서비스노조 운동을 좀더 규모가 큰 서울지역에서, 산별노조 건설 이후라는 조건에서 반복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한계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확인한 희망希望은 어쩌면 미망迷妄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우리는 서울지역에서도 이제 처음 모여서, 지역을 중심으로, 사업장과 업종을 넘어선 노동자의 연대, 사회운동과의 연대, 비정규직 조직화라는 이념으로 만나지만 그것을 온전히 실현하는 조직을 만들 수 있을 지 솔직히 장담하지 못한다. 우리가 엊그제 잠시 서로 확인한 가능성들은, 지난 몇년간의 각 지역에서 실천에 대한 평가에 비해서는 너무나 연약하고 취약하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것은 희망이라기보다 미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현재의 조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그것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고, 어쩌면 성공한 대차대조표를 만들지 못할 가능성이 더 많을지 모르지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최대한.
몇 년 동안의 (비록 부정적인 부분들이 많이 지적되었다고 하더라도) 평가가 있고 교훈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실천을 함께 고민하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자. 각 지역 동지들의  몇년 동안의 어려운 실천과 실패 덕분에 우리는 좀 더 나갈 수 있다.(그 실천들에 경의를!)

그래서, 그것의 모든 가능성들을 사고해야하겠지만, 다만, 희망하는 자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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