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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7/04
    트랙백/[정신질환자가진단표] 에 관련된 글. (4)
    겨울철쭉
  2. 2006/11/18
    [독서일기] 우울증 스스로 극복하기
    겨울철쭉

트랙백/[정신질환자가진단표] 에 관련된 글.

imaginaire님의 [정신질환자가진단표] 에 관련된 글.

http://www.psychonews.co.kr/test/self.php3
위의 포스트에 소개된 검사.

http://www.psychonews.co.kr/psytest/psytest0.htm
고려대 임상신경심리센터 홈페이지인데, 테스트가 하나 더 있군요.

병원에서 하는 검사하고도 유사한데 축약된 형태네요. 오랜만(?)에 다시해보니, 역시 아주 좋지 않군요; ㅋ
여러분도 한 번 정신건강 검사해보시길.

첫번째 검사는 정신분열증, 우울증, 조울증, 공황 장애, 공포증, 강박증, 외상후 스트레스, 범불안 장애, 사회 공포증, 신체화 장애, 거식/폭식증, 알콜 중독, 불면증, 스트레스 등 14가지 정신질환에 대한 수치를 보여줍니다. 두번째는 우울증 검사.
제 경우에는 '정밀진단요망' 레벨이 다섯가지에, 특히 두가지가 아주 심하고, '경계경보' 레벨이 다섯가지 나오는군요. 쩝;;. 하지만 '공포증' 항목은 점수 0. 뿌듯. (말하자면 겁대가리 상실 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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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우울증 스스로 극복하기


우울증 스스로 극복하기
폴 호크 지음, 김희수.박경애 옮김 / 사람과사람
 
 
제목 그대로 우울증을 스스로 극복하도록 돕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글쓴이는 '인지-정서-행동-치료요법(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REBT;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명한 이론인 듯)'이라는 정신의학의 한 이론을 토대로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제시하고자한다. 갖가지 사례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길게 설명하기는 그렇지만, 요약하자면 이런 얘기다. 우울증에는 세가지 요인이 있는데, (1) 자기비난 (2) 자기연민 (3) 타인에 대한 연민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 세가지에 대해서 각각의 대책이 수립되어야하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전반적으로 '뻔뻔스러워지라'고 주문하는 것같다. 내용을 보자면 이렇다. 실수와 죄의식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걸로 죄의식을 가지거나 자신을 비난하지 말라는 것이다. 능력이 안되어서 실수할 수도 있는데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관대하고, 잘못된 습관으로 인해 실수할 수도 있지만 자신도 습관의 희생물일 뿐이라는 점을 이해하라는 것.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도 하나의 권리라는 것이다.
 
또 자기연민은 우울증의 요인이기 때문에 주의하라고 충고한다. 사실 많은 슬픔의 원인들이 생각해보면 별 것아닐 수도 있는데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는만큼 신경끄라는 말씀. 특히 우울증 환자들의 경우, 자기연민을 통해서 타인들의 연민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증세가 호전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만큼 주의하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타인동정.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으로서 타인동정은 위험할 수 있다는 것. 저자는 타인동정은 비합리적인 신념이며, 자신의 정신건강에 해롭지 않을 정도로 '적절한 정도'만 허용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타인동정은 타인의 '정서적 협박'에 이용당하는 경로가 될 수 있는 만큼 주의해야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타인동정은 자기동정까지 불러올 수 있어서 특히 좋지 않다.
 
이 정도가 대략의 내용이다. (잘 요약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의 전반적인 기조는 우울한 감정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서 과도한 감정의 반응을 무뎌지게 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죄의식을 약화시키고, 자기연민을 (어떤 경우에도) 방지하고, 타인동정도 쓸모없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정념의 동요를 방지하라는 것.
 
어느 정도 효과는 있을 것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안타깝게도(게다가 나에겐 책값이 아까운 일일 수도 있지만)  저자가 충고하는 대로 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다소 윤리적인 이유고, 또 하나는 현실의 효과 측면에서 문제다.
 
과연 타인에 대한 동감-이에 따른 깊은 자기연민이 없이 살수 있는가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규제하는 죄의식없이 살아가도 되는가라는 점. 이건 특히 사회운동의 활동가의 입장에서 난감한 일이다. 활동가 주체에게 있어서 운동의 정서적인 동력은 타인에 대한 연민과 자신에 대한 항상적인 규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념만으로 운동하는 활동가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이 정념을 가진 존재인 이상, 그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물론 이런 자세가 우울증의 요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본 클로저 (Closer, 2004)라는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울증 환자들은 절망적일 것을 알고 행복해지지 않으려 하고 더이상 절망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행복해 하지"

 

위의 이야기와 연관해서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사고구조 속에서 필연적으로 신경증을 유발하는 요인이 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그런가는 모르겠고 사실 운동권 얘기는 핑계인지도 모르겠지만  -.-+, 그러나 많은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가진 정신적 고통은 이런 사정과 어느정도는 관련이 있을 것이다. ) 따라서 저자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정념을 다스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방식이 활동가들에게 있어서만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에게도 일반적으로 권할 수 있는 처방은 아니라는 데 있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정념의 교통이 필수적일 텐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타인동정과 죄의식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죄의식의 경우에는 (소문자) 주체를 규제하는 (대문자) 주체의 효과일 텐데,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없이는 '사회' 자체가 유지될 수 없지 않은가. (물론 저자는 우울증 환자들이 '과도한' 그런 정념들을 제거하라는 것이지만, 이건 마치 위암을 치료하기 위해서 위 자체를 제거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치료 자체가 개인의 정념이 가지는 사회적 기능에 근본적인-영구적인 상실을 불러오게 된다.)

  
자, 여기까지는 윤리적인 이유. 그 다음은 현실의 효과의 문제. (이 밑 부분은, 내가 정신분석, 정신의학에는 무지하다는 이유때문에 엄밀하게 이론적으로는 부정확한 지적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정념을 교통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만큼 죄의식과 자기연민, 타인동정을 버릴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 문제는 윤리적일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 실효성이 의심될 수밖에. (수많은 임상 성공사례를 제시한다고 해도 말이다.)
 
게다가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저자 뿐 아니라 정신의학 일반이 가지는 문제이다. 정신의학(특히 아메리카식 심리학)은 정신적 문제에 대해 증세를 완화시키는 대증요법일 수는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다. 현실의 문제, 모순 때문에 정신적 문제가 발생할 경우 정신의학은 이를 해결할 수 없다. 물론 현실의 대상은 주체에게는 상징이나 가상으로 인식되는만큼 이를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현실의 문제와 모순으로 인해 발생한 정신적 문제에 대해서는, 그 물질적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상 정신의학이 해답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건 어느 정도는 내 경험에 입각한 이야기이다. 좋은 정신분석가나 정신과의사를 만나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의학 치료를 통해서 문제를 인식하는데까지는 이를 수 있을 지라도 그것이 문제의 해결로 곧바로 이어질 수 없다는 점.

이것은 마치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가 불가능한 이유와도 연관된다. 알튀세르는 "프로이트의 대상은 마르크스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 이 말은 정신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이트의 과학과 현실의 물질적 모순(알튀세르의 표현을 빌면 '역사의 대륙')을 대상으로 하는 마르크스의 과학이 대상이 다르다는 것, 따라서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지적했듯히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의 시도로서 라이히의 작업(<파시즘의 대중심리>)은 '정당하지만 불가능한' 작업이 된다.
 
게다가 난감한 일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처럼 (정신적) 문제의 원인을 인식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인을 단지 '인식'하더라도 문제가 발생하는 현실의 물질적 조건을 변혁하지 않고서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대상과 마르크스의 대상이 다른만큼, 조만간 다른 대상에 대한 과학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그 '과학'은 단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을 임무로하는 인식-실천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는 그런 점에서 동형적이다.) 마르크스의 노선대로,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자, 하지만 그렇다면 정신의학적인 실천은 아예 의미가 없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적 문제에 있어서도 그것이 물질적 현실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은 아닌 이상 독자적인 해결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심리치료'의 대증요법이 아닌, 혹은 이 책의 저자가 제시하는 치료요법같이 정서적 기능을 손상시키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이어야할 것이다.

 

알튀세르같은 경우도 정신분석에 정통했는데도 불구하고정신의학적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의 수준에서 정신분석을 통해서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없고, 현실의 문제가 투명한 반영으로 정신의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상징과 가상으로 정신에 존재하게 된다면 정신의학적 치유는 불가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도 믿을만한 정신의학치료자/기관이 있을 경우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떤 다른 방식들이 필요하고 또 가능할까?
나는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정념이 발생하는 방식을 인식함으로서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인식하는 것, 또 하나는 개인이 슬픈 정념에 직면했을 때(우울증) 어떤 자세를 가져야하는 지를 아는 것이다.
 
전자는 스피노자를 통해서 가능할 것같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희망과 공포와 같은 양가적 정념 때문에 정신적 동요가 발생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정념이 주체의 어떤 상태와 관련되고 어떻게 발생-작동하는지를 밝혀내는 데 있어서 스피노자가 가장 탁월하기 때문이다. ("자기존재를 파괴하려는 것은 욕망이 아니라 그런 양가적 정념 또는 정신적 동요"이다. -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윤소영) 이 때문에,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알튀세르의 현재성』, 발리바르)부터『스피노자와 정치』,발리바르/진태원 까지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저작의 원래의 용도에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 후자는? 이것은 슬픔을 표현하는 예술적 형식으로서 비극에 대해서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비극적 예술형식인 그리스 비극을 통해서 주체가 비극적인 상황에서 어떤 자세를 가지는지-혹은 가져야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오이디푸스왕」,「안티고네」와 같은 탁월한 그리스 비극을 읽을 필요가 있다. 나는 이 과정에서 매우 인상적인 책을 발견했는데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김상봉/한길사) 라는 책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별도로 소개하기 위한 글을 쓰겠지만, 그리스 비극이 위대한 이유를 통해서 슬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반성을 던져준다.
  
(이러한 접근들은 여러가능한 방식들 중 한 두가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의 나의 수준에서는 사고할 수 있는 범위가 여기까지라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

이러한 접근들을 통해서, <우울증 스스로 극복하기>라는 책의 저자가 제시한 방법대로는 아닐 지라도, 자기치유를 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조금은 열릴 수 있지 않을까? (이건 혹시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에 남은 한가지, '헛된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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