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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04
    스위스, ‘서쪽숲’을 만나다(4)
    겨울철쭉

스위스, ‘서쪽숲’을 만나다

스위스, ‘서쪽숲’을 만나다

사실 스위스를 일정에 잡으면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산이 뭐 어딜가나 똑같지”라는 게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이내 알게되었다.



스위스에서 닷세를 보내는 동안 하루는 이래저래 이동하는 날이었고, 사흘은 날씨가 흐렸다. 알프스의 깊은 산은 항상 구름을 만들어내서 흐린날이 더 많다. 그렇지만 그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인상적이다.

수만년 동안 빙하가 만들어낸 U자형 계곡(나는 이게 교과서에만 나오는 개념인 줄 알았다)은, 목축을 하는 마을 바로 뒤편에 3000-4000 미터짜리 절벽을 만들어놓는다. 그 밑에는 빙하가 녹은 자리에 호수가 만들어지고, 석회질의 흰빛이 섞인 물은 청록색으로 빛난다. 이제까지 자연에 대한 내 관념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규모의 경관이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서부터 펼쳐진다.

그 자연은 이제까지 인상적으로 보았던, 인간이 만든 모든 건축물들을 왜소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에펠탑이든, 빅벤이든, 브란덴부르크문이든, 어떤 것을 그 근처에 가져다 놓아도 장난감처럼 보일 수밖에 없을 테고, 아름다움에 있어서도 비교할 거리가 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자연만이 만든 풍광은 아니다. 사람들이 만든 건물은 자연의 거대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고, 목축업이 만든 푸른 초원은 더 넓게 시야를 확장시킨다.)



거대하다는 느낌을 넘어 그것은 숭고함을 느끼게한다. 자연에서 느끼는 숭고함이란 감정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걸까. 사람에 대해서라면, 그것은 전에 ‘레미제라블’에 공연에 대한 느낌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의 내면에 진실로 충실하고, (그것이 비극일지라도) 운명에조차 맞설 때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자연의 숭고함은 그와 같지는 않다. 그것은, 압도적인 어떤 힘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거역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고, 그 앞에서는 자신의 운명에 대면할 때 가지는 감정을 갖게 한다. 그 안에서도 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자연의 위대한 힘을 또한 인정한다는 것. 또는 온갖 운명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지켜낸 위대한 인간과도 같이, 수만년 동안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온 위대함에 대한 감정이랄까.



다시,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 숭고함 앞에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내가 충실해야할 나의 내면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스위스에서의 여행이 좋았던 것은 단지 그러한 자연이 그곳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의 여행은, 여행자를 ‘생각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새로운 볼거리를 쉼없이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산을 오르거나 내리면서, 한걸음 한걸음 계속 변화하는 광경은 끊임없이 새롭다.) 오히려 그냥 그것을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그 속에서 그 자연은 눈앞 시야에 틈을 벌여준다. 그곳 뒤에서 ‘나’를 만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내가 충실해야할 나는 누구인가. 내가 가졌던 사고와 이념, 감정들은 무엇이고, 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제까지 살면서, 나 자신보다는 오히려 나의 어떤 의무감, 책임감 같은 것들이 나를 대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자신을 지워가거나 억압하면서.

심지어 운동에 대해서도 그렇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그것은 어떤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먹을거리를 만들고 자신의 노동으로 세상을 만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그들의 권리를 위한 정의가, 어떤 대의명분 이전에 “내가” 운동하게 하는 근원적인 동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고흐의 그림 ‘감자먹는 사람들’과 막 추수가 끝난 남프랑스 아를의 들판에서도 그것을 다시 생각한다.)

스위스에서 마지막 일정을 보낸 루체른. 운좋게도 그날 날씨만은 맑았다.
그날 오른, 알프스 봉우리들이 보이는 ‘리기쿨룸’이라는 산을 천천히 걸어내려오다가 문득 산속 마을의 벤치에 앉았다. 날씨가 흐려서 정작 그곳에 갔을 때에는 눈보라만 보았던 알프스 최고봉이라는 융프라요흐와 그 밑의 숲이 보이는 곳. 그리고 MP3 플레이어에서 이적의 ‘서쪽숲’이라는 노래가 흘러 나온다.



나 어릴 적 어머니는 말했죠
저기 멀리 서쪽 끝엔 숲이 있단다
그곳에선 나무가 새가 되어
해질 무렵 넘실대며 지평선 너머로 날아오른단다
오, 내 어머니, 오, 난 가지 못했죠
오, 난 여기서 언젠가 언덕을 넘어 떠나고 말리라 노래만 부르죠

커갈수록 사람들은 말했죠
어디에도 서쪽 숲같은 건 없단다
너는 여기 두발을 디딘 곳에
바위틈에 잡초처럼 굳건히 견디며 버텨야한단다
오, 내 어머니, 오, 난 가지 못했죠
오, 난 여기서 언젠가 언덕을 넘어 떠나고 말리라 노래만 부르겠죠


노래를 듣다가 뭉클해서 울어버리고 말았다.
먼길을 떠나 바로 여기서 서쪽 숲 앞에 선 느낌이었고,
천천히 자리를 일어나면서 다시 조금 커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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