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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만남-서경식 김상봉 대담


만남 - 서경식 김상봉 대담
서경식, 김상봉 지음 / 돌베개

나는 이런저런 '이벤트'에 응모하거나 복권을 사거나 하는 성격이 아니다.(사실 거의 해본적이 없다.) 그러나 출판사에서 이 책의 저자들과의 대화 이벤트를 한다는 공지를 보고는, 잡혀있던 회의일정을 연기하면서까지 응모하고, 또 운좋게도 당첨되었다. 아래 이야기는 책으로 만난 대화에 대한 이야기이도 하면서, 저자와의 만남 행사에서 또 한번 만난 기억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시간상의 이유"로 내 질문서는 잘렸지만 말이다 ^^;

***
김상봉은 서경식이 자신의 "걸어다니는 철학문제"라고 말한다. 앞에 <디아스포라>에 대한 포스팅의 덧글에서도 말했지만 서경식은 디아스포라라는 "상태"가 아니라 그 모순이 "작동"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김상봉은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 "걸어다니는 모순"을 사고할 수 있는 남한에서 몇 안되는 철학자 중 한명이다. 그러니, 이 만남에 어떻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

저자와의 만남에서 김상봉은 이 대담이 518 광주 이후 한세대가 끝난 시점에서, 다음 세대에게 문제를 계승하고 제기하는 과정으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괜한 공언이 아니라, 이 만남 속 대화 전체는 이제 한세대가 지나서 화석화되고 박제화된 이른바 "민주화투쟁"'의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젊은 세대들에게 제기하기 위한 철학적 일반화의 과정, 매우 치열한 과정이다.

만남의 주제를 요약할 수 있을까? 상징적으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제목이 있다. "디아스포라와 서로주체성의 만남"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의 꿈"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디아스포라라는 서경식의 문제의식과 서로주체성이라는 김상봉의 문제의식은 "새로운 공동체"에서 만나는가? 혹은 어긋나는가?

서경식이 디아스포라의 고통에 주목한다면, 김상봉은 그 고통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 새로운 주체성, 이른바 "서로주체성"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긴장이 있다. 서경식에게 그 고통은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개인들의 분투인데 비해서 김상봉에게 그것은 소통의 매개이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의 모순, 국민국가를 넘어서고 횡단하는 새로운 주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과 가장 극한의 역사적 고통에 직면한 주체라는 조건에서, 김상봉의 시도는 전자를 의미하는 것일까?



씨알, 선험적 희망?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이들은 대담에서 디아스포라의 경험을 "코스모폴리탄적 자유"라고 말하는 것은 환상이라고말하고 한편으로는 디아스포라의 경험이 일종의 "유산"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김상봉의 경우에는 오히려 디아스포라 일반보다는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고통을 한반도 민중의 경험 속에서, 함석헌의 "씨알"개념 속에서 접목하고 해석하려고 한다. 한반도에서는 절대적인 종교적/정치적 권위가 부재한 가운데 민중의 끊임없는 투쟁, 혹은 그 가능성이 존재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김상봉은 역사를 비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씨알에게 언제나 희망이, 선험적으로 있다면 비극이 어떻게 사고될 수 있다는 말인가?[김상봉이 그리스 비극에 대한 책을 썼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의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역사에 목적론이고, 그렇게 된다면 비극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게 아닐까? 그러나 나는 또 다른 디아스포라인 벤야민이 말한 "역사의 나쁜 방향"에 우리가 처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고자하는 주체의 비극적 상황--그러나 주체를 숭고하게 만드는--을 염두에 두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서경식의 말에 귀기울이면서 어떤 회의를 갖게 된다. 저자와의 만남에서, 서경식이 말한 것처럼 디아스포라의 경험, 특히 아우슈비츠의 유태인이나 팔레스타인처럼 극한의 고통 속에서는 다른 무엇이 있다. 디아스포라 주체는 그것을 증언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한편으로는 가해자를 "이해-인식"해야한다는 고통속에서 진행되고, 어떤 순간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결국 프리모 레비는 자살했다. 그렇다면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주체들 사이에서 공감하고 이러한 "고통에 참여"하는 것은 가능한가?

디아스포라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묻는 것이다. 김상봉의 '서로주체성'이 디아스포라를 예로 하거나 그들에게도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나에게는 그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그 주체들에게 조차 항상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고통이 아닌가.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디아스포라의 경험은 보편적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또한 서경식에게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러한 고통을 교통하고 공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라면, 증언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단지 언제 누구에게 닿을 지 알 수 없는 "투병통신"(병에 넣은 편지를 바다에 던지는 행위)이라면 디아스포라의 경험은 대중정치에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이 기껏, 소수의 디아스포라 자신들과, 아주 예민한 일부의 공감으로, 지식인들의 하나의 지적 유행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정치의 문제는 대중정치의 문제, 대중 이데올로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저자와의 만남에 갔던 이 날, 우연찮게도 나는 단속추방에 반대하는 이주노동자 농성단 동지들과 함께 하는 일정이 있었다. 이주노조 조합원 동지들에게 한국에서 노동자운동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진행했다.(일제시대~80년대 중반까지 1강. 전체 3강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짧은 강의였지만, 진행하면서 나 스스로 생각하게 된 점이 많다. 우리가 운동을, 사회를 바라볼 때 "이주자의 눈으로" 보아야한다는 점.(교육을 통해서 교육자인 나 스스로를 교육하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예를 들어 일제시대 조선의 노동자운동사를 말하려면 일본에 징용된 이주노동자들, 지금도 중국, 러시아, 미국에 이산되고, 다시 "조선족"으로 남한에 돌아오는 이주노동자들의 눈으로 현재를 보아야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이라는 민족국가의 역사의 시각이 아니라 적어도 아시아, 그리고 세계체제의 시각에서 남한이 처했던 위치를 인식해야하고 이러한 자본주의 세계체계 때문에 이주자가 된 노동자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한다는 것. 또 그들의 모국이 현실과 변혁의 과제와 남한에 노동자운동의 과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한다는 점.

90년대 초중반 이후의 계급구성의 변화는 비정규직의 증가만이 아니라, 그것의 필연적 일부인 이주노동자의 증가와 함께 사고해야한다. 98년 imf구제금융 이후의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양산과정에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도입확산과 통제정책을 함께 생각해야한다, 등등.(한국인 비정규직만이 아니라 이주노동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제까지 내가 얼마나 "내국인"의 시야에 갇혀있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생각할 수 있게 된 지점은, 노동자운동의 쟁점에 접근할 때 '내국인''의 시야에 갇혀서는 안되며 그래서 오히려 "이주노동자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볼 때 온전히 전체를 인식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 정도이다. 운동의 이데올로기를 바꾸어가는 끈기있는 노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전히, 그것이 어떻게 대중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는지(혹은 바꿀 수 있는지)는 아직 답이 없는 문제로 느껴진다. 여전히 노동자주체는 민족국가의 "국민"이며, 투쟁의 과정에서 항상 이 이데올로기는 회귀한다.(이것을 단지 지배 이데올로기=피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실천을 통해 가능할까. (혹은 그것은 직접적으로 디아스퍼라의 고통에 대한 참여가 아니라도 매시기 "비국민"이 되는 실천들을 통해서 가능한 것일까? 예컨데 어떤 경로, 실천으로 가능한가?)



새로운 민족국가? 철학인가 정치적 행동주의인가.

저자와의 만남에서 이들은 새로운 국가, "가장 열린 공동체"가 한반도에서 가능할지 묻는다. 김상봉은 한반도의 재통일 과정에서 새로운 민족국가의 가능성에 대해서 그러한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할 희망에 대해서 혹은 정치적 과정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사실 한반도의 재통일과 같은 현실의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 책에서나 혹은 저자와의 대화에서도 언급들은 있지만 모호하고 추상적이기 짝이 없다. 한반도의 정세, 남북이 처한 정세를 볼 때 통일 과정을 어떤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계기로 생각하는 것은 거의 비현실적이다. 오히려 그것이 현실화되는 시기는 반공주의에 대한 투쟁, 민족주의에 대한 투쟁, 북조선 인민을 이등국민으로 전락시키는 내부 식민화에 대한 투쟁의 계기가 될 것이다.(물론 공동체 간의 관계를 문제삼을 수는 있겠지만, 오히려 전체주의 북조선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가 혹은 어떤 식으로 변용될 것인가가 정치적 쟁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정작 더욱 문제라고 느꼈던 것은 저자와의 대화에 참석한 독자들의 태도였다. (철학자거나 사상가인) 저자들에게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독자들조차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은 정치적 프로젝트, 현실의 변화를 위한 실천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철학적 공론의 문제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독자들의 질의와 토론과정에서도 구체적인 정치전략의 대상이 되어야할 정치의 변혁, 공동체의 변혁이라는 과제에 대해서 추상적인 개념들만 언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철학이 어떤 순간에는 오히려 정치적 사고와 실천을 게으르게 만들 위험, 혹은 그 게으름에 변명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혹은 현실의 정치,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이 <만남>의 대화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일까? 둘 다 다른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정치적 실천에는 철학적 방향에 대한 고민이 당연히 전제되어야하지만 거기에 머물면서 정치의 영역, 그리고 실천--정치전략을 실현하는 데로 나가지 않는데서는 그것은 공문구들에 불과하다. 하다못해 디아스포라 개념을 말하면서도 이주노동자 운동에 어떤 물질적이고 실천적인 기여가 없다면 그게 무슨 현실적 의미가 있는가? 개인의 1500cc 두뇌용량 안에 같힌 사고를 넘어서 말이다.

나는 그러한 문제의식을 저자와의 대화에 참가한 독자들만이 아니라 두분 선생에게도 느낄 수밖에 없다. 김상봉 선생은 즉자적인 reaction이 아니라 정신의 유대/연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해고 50일의 GM대우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에는 정신의 유대/연대가 아니라 몸이 따라가는 실천의 연대가 필요하다. 이랜드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구정매출 제로투쟁의 집회참가가 중요하다. 그것은 서경식 선생에게도, 죄송하지만 마찬가지이다.

선생은 자신의 '외부'에 있으며 ''내부'에 참여하지 못하는 데 부채의식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선생이 서있는 곳은 김상봉 선생의 지적처럼 그 자체가 내부일 것이라는 점을 먼저 언급하자. 게다가 문제는, 정치적 교통을 위해서는, 고통의 증언을 위해서도 그를 넘어선 참여를 조직해야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그 주체(디아스포라라고 해도) 스스로가 타자의 고통에도 또 한번 먼저 참여해야한다는 것이다. (디아스포라에게 그것이 가혹한 요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디아스포라가 아닌 주체들의 책임성을 전제하는 가운데, 둘 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주노조 동지들은 한국의 비정규투쟁에 가장 열심히 연대하는 주체들 중 하나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 발언하고, 그것을 '사회운동'으로 조직하거나 참여해야한다. 서경식 선생이 전날 만났다고 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과의 연대와 같은 실천이, 주체들 사이의 교통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다.(자신의 고통을 증언하는 것으로 어떻게 연대가 만들어질 수 있는가? 연대는 말이나 사고가 아니라 서로 실천속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어떤 "희망"을 위해서

이런 모든 것을 저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철학자들에게는 그의 역할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인은 아니다. 그러나 독자들도 자신을 철학자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정치적 실천은 이른바 '정치인'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옆에 앉은 어떤 독자가 자신은 "씨알" 개념 속에서 정치적 희망을 발견했다는 요지의 말을 할 때 황당해졌던 것이다. 김상봉 선생에게 내가 가장 의문스러운 점은 민족 혹은 한반도 인민에 고유한 것으로서 "씨알"개념을 초민족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지, 그것이 단지 '선험적'--타고났다는 점에서--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하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씨알"이, 구체적인 정세에 대면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대중"을, 따라서 "정치"를 대체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여전히 그 독자들이 어떤 종류의 실천을 통해서 현실을 바꾸는 나름의 실천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이 대화의 시도는 의미있다. 저자와의 대화 마지막 부분에서 서경식 선생의 말을 주목하자. (공동체 내부의 주체인) "우리"에게 희망의 요소가 보이지 않아도 "외부와의" 소통 속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희망이 소진되어아가는 일본사회의 정세 속에서 더욱 이해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보편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공동체의 변혁을 위해서라도 다른 공동체와 교통하고, 오히려 내부에 존재하는 그들의 시각-- 이주자, 디아스포라의 시각으로 운동을 사고하고 실천해야한다는 점. 교통 자체가 실천이지만, 그것에서 또 다른 실천을 시작할 수 있다면.

김상봉 선생은 또 이렇게 말한다. 도덕, 가치, 그리고 희망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원래-당연히 있는 것이 아니다.(어떤 초월적 주체가 이런 것을 부여해준 적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에 절망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것을 만드는 것이 과제가 된다. (김상봉 선생은 그것을 "우리 역사"에서 찾자고 말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내가 썩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그 "우리"의 민족적 성격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정치적 희망을 우리는 교통 속에서, 그리고 역사적 경험 속에서 얻자는 제안이다. 그 '희망'이라는 것을 '낙관의 감정적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 실천의 방향으로 생각할 때 현실에서 진짜 희망이 될 수 있다. 두 사람의 대담을 그것을 찾는 과정으로 읽는다면 더 값질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서경식, 김상봉 두 사람의 대화는 여전히 눈부시다. 문제는, 다시 한번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그것을 수동적으로 되뇌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에서 다시 사고할 의무가 있는 것. 이정표가 길을 걸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두 다리가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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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디아스포라 기행-추방당한 자의 시선


디아스포라 기행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많은 언론에 추천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순전히 (내일 이 책에 대해서 글을 쓸 것이다) <만남>-서경식,김상봉 대담 때문이다. 그 전에는 목차를 보고는 그냥 독특한 여행책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의 첫 목차는, '마르크스의 무덤'. 나는, 마르크스의 커다란 두상이 놓여있는, 그렇게 꾸며진 마르크스의 무덤을 좋아하지 않았다. 런던에 가서도 그 곳에 가지는 않았다.

***

서경식, 서준식의 동생. 이렇게만 알고 있었다. 서준식 선생에 대해서라면, 그분을 실천과 글을 통해서 알 수 있었고, 떠나시게 된 이유를 나중에야 듣게 되었다. 그러나 존경하는 분의 형제라고 해서, "그렇구나"하는 이상의 별 생각은 가질 수 없었다. 그러다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을 읽고, 아...하고 감탄 혹은 탄식. 왜 아직까지 이런 분을 몰랐을까, 지금, 처음 읽었을까.

***

이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만남>이라는 책을 만나고, 또 길을 돌아서 다시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커다란 두상이 얹힌 무덤의 주인이 아니라, 한명의 디아스포라로 등장한다. 그도, 고향에서 뿌리뽑히고 흩어진 자, 디아스포라였던 것이다. 이 책은 말 그대로 디아스포라 기행, 여행기가 아니라 살아있거나 혹은 이미 죽은, 디아스포라들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다.

디아스포라는 어떤 이들인가,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 중에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참 한 후에, 전혀 예상치 못하게, 집에 돌아가 가스벨브를 틀거나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리는 낙관주의자들이 있다.(..) 누군가 죽으면 그 사람은 이제 어깨의 짐을 전부 내려놓았구나하고 쾌활하게 생각해보곤 한다.  - 50쪽에서 재인용, 한나 아렌트 "우리 망명자들" 중에서

서경식도 이 구절을 읽고 갑자기 자살한 유쾌한 친척을 떠 올리고, 자신도 이렇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존재 자체가 동요와 불안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저런 정치적 이유로 공동체에서 분리된 망명자들, 이주자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민족적, 문화적 근원으로부터 분리된 이주민 2,3세들 소수자들. 이들은 정도와 양상의 차이가 있지만, 자신의 존재와, 존재하는 곳에서 근원적인 불일치를 경험한다.

서경식과 같은 재일 조선인은 모어-모국어가 일치하지 않는다. 모어는 일본어이고 일본어로 사고하지만 모국어는 한국어, 그것은 오히려 생소하고 거칠게 입안에서 맴도는 언어다. 디아스포라는 조국(선조의 출신국), 고국(자신이 태어난 나라), 모국(현재 '국민'으로 속해있는 나라)가 분열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내셔널리티의 분열과, 그리고 영혼을 구성하는 언어의 분열은 개인에게 항구적인 상처와 균열을 새길 수밖에,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일지는 나와 같은 '내국인'들에게는 생각하기 힘들다.

더구나, 이런 분열이 살인적 폭력에 의한 경우에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란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여성 미술가 시린 네샤트는 어떨까, 우간다에 살던 인도 이주민의 후손으로, 이제는 영국에 망명해서 살아야하는 자리나 빔지는 어떨까. 백인 사회에서 자라난 코리언 입양아들은 어떨까. 그리고, 자신의 모어가 파시스트의 끔찍한 폭력의 언어가 되어 버린 독일계 유태인 시인, 강제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파울 첼란에게는 어떨까. 그리고 바로 지금, 재일조선인과 고향에서 쫒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이라크 사람들과 파리 방리유의 이민2세들과 르완다 난민들과 코소보 사람들과... 그리고, 우리 옆에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어떨까.

<만남>에서 김상봉은, 서경식은 타자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특이한 존재라고 말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것을 상상하기도 힘든 것이다. 영혼이 어떻게 그것들을 견딜 수 있을까. 디아스포라에게라면 그 자신의 영혼의 고통 덕분(?)에 타자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일까? 아니, 오히려 우리 모두에게 공동체의 윤리가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하려면 서경식과 같은 디아스포라의 예를 드는 것은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그래서 서경식은 솔직하게, "보편적인 고통같은 것에 저는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만남>356쪽)

그러나 서경식이, 한명의 디아스포라로서, 우리와 대화하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고통의 차이를 과시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대화하고 만나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도 오히려 만남에 나서야한다. 그/녀들의 고통이 대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해도, 상상하기 힘든 것이라고 해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녀들을 통해서 세계를 만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타자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래서 오히려 디아스포라를 만나는, 나와 같은 '내국인'에게 요구되는 윤리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에 함께 하기 위해서 "있을 수 없는 비국민"(잭 시라이)이 되는 것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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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그라나다의 처형은 자유로운 인간이라면 누구나 총부리 앞에 세워질 수 있는 시대, 시인이 총살당하는 시대가 왔음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1936년, 프랑코 파시스트 쿠데타군에 의해서 살해당한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살해되는 순간, 이 열전의 첫번째 인물에 대한 글의 한 구절이다. "시인이 총살당하는 시대", 20세기에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하지만 의외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도 많다. 서경식 선생이 일본에서 연재한 글을 모은 것이니 내가 들어보지 못한 일본인들은 등장할 수 있다고 쳐도, 로르카부터도 그렇지만 잭 시라이, 파블로 카잘스, 에른스트 톨로.. 이런 삶들을 내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아주 역설적으로, 이 책이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잘 기억되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말이다. 어떤 잘 알려진 위인들보다도 위대한 삶을 살다가, 위대하게 죽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 그리고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더 그럴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면 부끄러워지는 일이다.

이 책에 소개된 49명은 대부분, 파시스트 독재나 전쟁에 대항해서 투쟁하고, 또 상당수는 그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인물들이다. 살아남은 이나, 그렇지 않은 이나, 이들은 모두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앞에서도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살해한 자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존엄한 파시스트"란 존재할 수 없는 말, 형용모순이다.)

한명 한명의 삶과 죽음이 가지는 무게 때문에 그리 두껍지 않은 이 책에 책장 하나하나를 쉽게 넘기기 힘들다.  그 중에도 가장 강렬하게 기억되는 인물은 잭 시라이.

일본에서 고아로 자라서, 항구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미국에 밀항하여 식당노동자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 국제여단에 참전한 그는 파시스트의 총탄에 1937년7월11일 사망한다. 일본인으로 미국노동자가 되어 스페인에서 공산주의자로 죽었다.

시라이의 죽음에 대해 뉴욕주재 일본영사관은 "있을 수 없는 비국민"이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가 되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 바로 그런 "있을 수 없는 비국민"이 아닌가!

20세기는, 그런 "비국민"들을 "있을 수 없게"하기 위해서 살해하고 기억에서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겨우' 기억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
떠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오늘, 우리는 언제, 떠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 될까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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