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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많은 언론에 추천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순전히 (내일 이 책에 대해서 글을 쓸 것이다)
<만남>-서경식,김상봉 대담 때문이다. 그 전에는 목차를 보고는 그냥 독특한 여행책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의 첫 목차는, '마르크스의 무덤'. 나는, 마르크스의 커다란 두상이 놓여있는, 그렇게 꾸며진 마르크스의 무덤을 좋아하지 않았다. 런던에 가서도 그 곳에 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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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서준식의 동생. 이렇게만 알고 있었다. 서준식 선생에 대해서라면, 그분을 실천과 글을 통해서 알 수 있었고, 떠나시게 된 이유를 나중에야 듣게 되었다. 그러나 존경하는 분의 형제라고 해서, "그렇구나"하는 이상의 별 생각은 가질 수 없었다. 그러다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을 읽고, 아...하고 감탄 혹은 탄식. 왜 아직까지 이런 분을 몰랐을까, 지금, 처음 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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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만남>이라는 책을 만나고, 또 길을 돌아서 다시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커다란 두상이 얹힌 무덤의 주인이 아니라, 한명의 디아스포라로 등장한다. 그도, 고향에서 뿌리뽑히고 흩어진 자, 디아스포라였던 것이다. 이 책은 말 그대로 디아스포라 기행, 여행기가 아니라 살아있거나 혹은 이미 죽은, 디아스포라들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다.
디아스포라는 어떤 이들인가,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 중에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참 한 후에, 전혀 예상치 못하게, 집에 돌아가 가스벨브를 틀거나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리는 낙관주의자들이 있다.(..) 누군가 죽으면 그 사람은 이제 어깨의 짐을 전부 내려놓았구나하고 쾌활하게 생각해보곤 한다. - 50쪽에서 재인용, 한나 아렌트 "우리 망명자들" 중에서서경식도 이 구절을 읽고 갑자기 자살한 유쾌한 친척을 떠 올리고, 자신도 이렇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존재 자체가 동요와 불안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저런 정치적 이유로 공동체에서 분리된 망명자들, 이주자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민족적, 문화적 근원으로부터 분리된 이주민 2,3세들 소수자들. 이들은 정도와 양상의 차이가 있지만, 자신의 존재와, 존재하는 곳에서 근원적인 불일치를 경험한다.
서경식과 같은 재일 조선인은 모어-모국어가 일치하지 않는다. 모어는 일본어이고 일본어로 사고하지만 모국어는 한국어, 그것은 오히려 생소하고 거칠게 입안에서 맴도는 언어다. 디아스포라는 조국(선조의 출신국), 고국(자신이 태어난 나라), 모국(현재 '국민'으로 속해있는 나라)가 분열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내셔널리티의 분열과, 그리고 영혼을 구성하는 언어의 분열은 개인에게 항구적인 상처와 균열을 새길 수밖에,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일지는 나와 같은 '내국인'들에게는 생각하기 힘들다.
더구나, 이런 분열이 살인적 폭력에 의한 경우에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란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여성 미술가 시린 네샤트는 어떨까, 우간다에 살던 인도 이주민의 후손으로, 이제는 영국에 망명해서 살아야하는 자리나 빔지는 어떨까. 백인 사회에서 자라난 코리언 입양아들은 어떨까. 그리고, 자신의 모어가 파시스트의 끔찍한 폭력의 언어가 되어 버린 독일계 유태인 시인, 강제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파울 첼란에게는 어떨까. 그리고 바로 지금, 재일조선인과 고향에서 쫒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이라크 사람들과 파리 방리유의 이민2세들과 르완다 난민들과 코소보 사람들과... 그리고, 우리 옆에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어떨까.
<만남>에서 김상봉은, 서경식은 타자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특이한 존재라고 말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것을 상상하기도 힘든 것이다. 영혼이 어떻게 그것들을 견딜 수 있을까. 디아스포라에게라면 그 자신의 영혼의 고통 덕분(?)에 타자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일까? 아니, 오히려 우리 모두에게 공동체의 윤리가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하려면 서경식과 같은 디아스포라의 예를 드는 것은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그래서 서경식은 솔직하게, "보편적인 고통같은 것에 저는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만남>356쪽)그러나 서경식이, 한명의 디아스포라로서, 우리와 대화하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고통의 차이를 과시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대화하고 만나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도 오히려 만남에 나서야한다. 그/녀들의 고통이 대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해도, 상상하기 힘든 것이라고 해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녀들을 통해서 세계를 만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타자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래서 오히려 디아스포라를 만나는, 나와 같은 '내국인'에게 요구되는 윤리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에 함께 하기 위해서 "있을 수 없는 비국민"(잭 시라이)이 되는 것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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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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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서경식과 대담을 한 적이 있는 타카하시 테츠야의 경우는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을 자크 데리다의 '책임-응답가능성'에서 찾은 적이 있었어요(서경식이 여기에 관해서 어떤 코멘트를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를 않네요(^_^;)). 데리다 자신이 이야기 하듯이 '절대적 환대'는 불가능할 것이지만, (또한 데리다 자신이 이야기 하듯이) 이런 개념이 없다면 '환대'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행동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타자의 부름에 언제나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 같아, 저는 저런 개념이나 글을 접하면 조금 무섭기도 합니다.오늘날 예술이 자본주의에 파열을 내면서 타자와의 대화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매개물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저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저는 이런 면에서 [디아스포라 기행]이 맑스로부터 시작하면서도 자본주의에 관한 직접적인 비판적 언급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 조금 이상했습니다. 특히나 근대의 디아스포라는 명백히 자본주의적 팽창과 폭력을 거론하지 않고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 책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죠(^_^)). 예술과 정치의 매개 고리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으면서 내내 고민을 했던 부분이었어요. 그나저나 이제 [만남]을 읽어 보아야 되겠네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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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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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 저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과연 (디아스포라의) 그런 고통에 "참여"(김상목은 '환대'도 아니고, '참여', 이런 개념을 사용합니다;;)한다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점입니다. 그 고통은 존재론적인 것일텐데, '참여'가 가능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너와 나의 고통의 근원이 같으니 함께 싸우자는, '연대'와도 다른 것이죠.한편, 예술에 대해서는 저도 무연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잘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예술적 체험 속에서 검증될 때에만 이야기할 수있을 텐데요, 유사한 예로는 베를린에 있는 유태인기념관을 들 수 있을 뿐입니다.(제 경험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하자면 아우슈비츠라는 인간성의 절멸에 대한 끔찍한 경험에 대한 상징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것과는 또 다르죠.(물론 그것을 연결짓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예술적 형상화는 자본주의적 착취가 다른 억압-착취-폭력과 만나는 어떤 지점, 그러니까 과잉결정되는 어떤 지점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예술에서도 자본주의적 착취의, "최종심급의 고독한 시간"은 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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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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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에 대해서라면, 이해의 폭을 좀더 넓힐 필요가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영국에서 일년동안 살면서 고향에서, 제 언어 세계에서 떠난 이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느끼게 되고 그래서 디아스포라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런데 전세계 디아스포라를 연구한 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이, 뿌리뽑혔다는 인식, 쫓겨났다는 인식이 없는 이주민들도 꽤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고통스러운 것은 분명한 현실이지만, 디아스포라는 상실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겁니다.디아스포라는 전혀 새로운 정체성 형성의 가능성도 보여줍니다. 이 정체성은 당장 국민국가라는 철저하고 견고한 경계 때문에, 경계에 서 있는 정체성, 배제된 정체성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어떤 특정 국민국가 또는 특정 국민(민족)에 의존적이지 않는 새로운 정체성의 가능성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요즘 서양, 특히 서양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주목하는 것이 바로 이런 '변화하는' '전이 상태의' 정체성입니다.
다만 이 정체성은 아직 너무나 허약하죠. 새로운 '복합적 정체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집단이 '테러와의 전쟁'의 여파로 순식간에 '위험한 이질적 집단'으로 돌변했으니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디아스포라는 '국민국가' 또는 '국민'의 폭력성, 배타성과 연결지어서 생각할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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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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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shin/서경식도 그런 측면을 언급하는 대목이 <만남>에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과 같은 가능성을 "국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말하더군요.(257쪽) 그러면서도 여전히 현재의 국가간 체계에서는 국가로부터의 추방은 곧 인권으로부터의 추방이라는 점에서 "코스모폴리탄적 자유"란 허구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네요. 그래서 marishin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이중성이 있는 것일텐데요,가능성은 가능성대로 봐야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고통도 그 나름대로 여전히 현존하는 것이라면, 각각이 한 주체 안에서 공존하면서 만드는 매우 특이한 효과(서경식과 같은)의 결과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허약함"은 물론이지만, 두 경향이 서로를 상쇄해서(서로를 중화시켜서) 어떤 허약한 정체성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모순적"이어서 그 모순이 작동하는 순간도 있는 것같아요. 그런 것이 김상봉 같은 이가 말하는 고통속의 보편성..같은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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