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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18
    여행의 어떤 점들.
    겨울철쭉
  2. 2007/09/15
    빠리, 꼬뮌 전사들의 벽(5)
    겨울철쭉
  3. 2007/09/14
    빠리,첫번째;로댕과 모네,까미유 끌로델(2)
    겨울철쭉

여행의 어떤 점들.

여행의 어떤 점들.

 

이제 기차로 빠리를 떠난다. 예정보다 하루 더 있던 빠리를 아침 기차로 떠나는 이유는 암스테르담에 고흐 미술관이 월요일에는 열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가야 오후 반나절을 볼 수 있다.(하지만 정작 와보니 잘 못된 정보였다;; 월요일도 연다.)

 

혼자 여행하기

 

* 좋을 때

 

나의 속도대로 움직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루브르박물관에 들라클루아 앞에서 한시간 넘게 보내도 부담이 없고, 페르라세즈 묘지에서 한참을 헤메도 누구에게 미안하지 않다. 기분내키면 빠리에 하루 더 머물수도 있고.

 

내 느낌대로 움직일 수 있다. 런던에서 최근 한국인에게 인기 뮤지컬은 ‘빌리 엘리엇’이나 ‘맘마미아’. 혼자라면 시간이 허락하지 않을 때에도 ‘레미제라블’을 선택할 수 있다.

눈치보지 않고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 오르세 미술관, 미술 작품 앞에서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난다면, 그럴 수 있다. 쪽팔려서 감정을 자제할 필요가 없다.

 

셀카 찍는 재미. 특히 야경을 배경으로 타이머로 셀카찍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가 뭔가 만드는 느낌인데, 정말 재밋다.

혼잣말 하기. 같이 다니면 대화할 사람은 같이 있는 상대방 뿐이다. 하지만 혼자 다니면, 말할 수 있는 상대는 무한정. 나한데 혼잣말을 해도 되고, 누군가 맘에 내키는 상대에게 말할 수도 있다.(물론 들리진 않겠지만;;)

 

배경 음악깔기. 굳이 대화할 필요가 없을 때가 많으므로, 분위기에 적합한 음악을 mp3로 들으면서 다닐 수 있다. 음악을 깔면 주변이 아주 달라보이고, 느낌이 새롭다. 빠리 밤거리에서 쇼팽을, 퐁피두 현대미술관에서 punk rock을 들어보자.

 

대략 스릴있다. 누군가에게도 의존할 수 없고 가끔 실수하기도 하는 긴장과 스릴. 전방위적인 판단을 스스로 할 것을 요구받게 되는데, 단점이자 장점.

 

* 좋지 않을 때

 

Please, Take me a picture.. 라고 말하기 짜증날 때가 있다. 마음씨 좋아보이는 (주로 젊은 여성;;) 외국인을 찾으려고 두리번 거려야하고 귀찮을 때가 있어서 사진은 주로 등장인물 없음.

 

2인분씩 먹는 메뉴는 주문하기 힘들다. 뭐 먹으라면 먹겠지만 돈 아깝다. 중국식당의 딤섬 같은 경우가 그런데, 이런 식이다보니 그냥 샌드위치나 핫도그 먹는게 편하다. 문제는 식사는 부실하고 걷기는 많이 걷다보니 살이 너무 빠진다는 것. (아, 적당한 다이어트에는 좋으니 장점이라고 해야하나?)

 

가끔 한국어가 그립다. 하지만 장기간 유학간 분들이나 이민간 분들에게 비할 바는 아니니 패스.

 

한국에서 투쟁 소식들을 때. 어차피 한국에 있다고 도움되는 형편도 아니지만, 마음이 또 그렇지가 않고 무거워진다. 로밍한 핸드폰으로 집회 안내 문자도 몇 개씩은 오는데, 거참.

 

그밖에 단점은.. 생각보다 많이 없는 것같다. 흠, 더 생각나면 나중에 이야기하자. 나가봐야할 시간됐다.

 

빠리의 인상

 

떠나는 마당에 이야기하자면, 번잡한 대도시이지만 문화적으로 풍성한 곳이라는 것, 그리고
괜히 낭만적인 도시라고 하는게 아니라는 점도.

 

노틀담 성당에서부터 퐁네프 다리, 예술가의 다리, 루브르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길은 환상적이다.(그에 비해서 유명한 상젤리제 거리 같은 곳은 좀 번잡하다.) 곳곳에 길거리에서 키스하는 연인들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전혀 어색해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자연스럽다. ‘빠리의 연인’ 같은 드라마가 나올 만한 분위기라는 건데, 모르는 남녀라도 여기서는 며칠만 붙여놓으면 연인이 될 것같다.

 

* 에펠탑 뒤, 안경너머로 바라본 빠리의 석양

 

Sur le quai

 

Sur le quai, ‘버스, 정류장’의 OST(루시드 폴)이기도 하고, 내 핸드폰에도, 네이트온의 아이디에도 있는 문구다. ‘on the dock'이라는 뜻의 불어라고 하는데, ’on the platform'이라고 새길 수도 있다.

 

빠리의 역에는 quai 1, quai 2, quai 3.. 이렇게 플랫폼을 표시한다. 이제 sur le quai.

 

이 문구가 노래 가사에 나온 적이 있는데, 영화 “셀부르의 우산” 주제가에 이 문구가 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더욱 아련할. 잊을 수 없는 영화와 그 음악이다.
http://blog.naver.com/ydiana?Redirect=Log&logNo=80033815735

 

Ils se sont separes sur le quai d'un gare
Ils se sont eloignes dans un dernier regard
어느 역 플랫폼에서 그들은 서로 헤어졌답니다.
그들은 마지막 눈길을 건네며 서로 멀어져 갔답니다.

 

이렇게 이어진다.
빠리, 안녕.

 

 

* 좀 서둘러 가느라 빠리에서 들렸던 중요한 곳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못했다. 루브르 박물관--오르세 미술관--퐁피두 현대미술관과 프랑스 공화주의의 기념물인 팡테온 사원 등에 대한 것. 일단 여기 암스테르담을 뜨면서 정리해보자. 인터넷 환경이 너무 좋지 않은데, 그건 베를린도 만만치 않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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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리, 꼬뮌 전사들의 벽

빠리, 꼬뮌 전사들의 벽

 

페르라세즈(Pere Lachaise) 묘지에 갔다. "꼬뮌전사들의 벽“이라고 불리는,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빠리 꼬뮌 전사들이 총살당한 벽이 있는 곳이다.

 

아침부터 찾아간 이곳은 한적한 마치 한적한 공원 같다. 쇼팽, 발자크, 짐 모리슨 등 유명한 이들의 무덤도 많은 곳이라 찾는 사람들이 아침부터 드문드문 있다.


 

찾기가 쉽지 않다. 묘지입구의 이정표에는 한참을 찾아도 꼬뮌전사들의 벽은 나오지 않는다. 무작정 걸어가서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묘지 동쪽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관리사무실에 가서 안내 지도를 받아보았지만 거기에도 없다. 한시간반 정도를 언덕빼기의 묘지를 헤멘다. 오늘은 날씨가 덥다. 그리고 문득 한 구석에서 그 벽을 만났다.



 

한적한 구석. “AUX MORTS DE LA COMMUNE, 21-28 Mai 1871”이라고 씌여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꼬뮌의 죽음을 위해”라는 뜻. 불어아시는 분들, 맞나요?)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묘지 자체의 벽돌 벽이다. 앞에는 장미 꽃 다발들이 놓여있다. 벽에 손을 대본다. 슬픔이 들려오는 것같다. 벽에는 총알 자국 같은 것들도 있다. 피처럼, 혹은 혁명처럼 붉은 담쟁이가 참혹한 벽을 감싸고 있다.


어떤 순간에 우리는 역사의 “나쁜 방향”을 마주할 수도 있지만, 죽음에 도망치지 않고, 죽음도 어쩔 수 없는 주체들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역사를 어떻게 살아야할까.

 

벽 앞의 계단에서 가져온 사과를 하나 먹으면서 한참을 앉아서 바라본다. 가끔 이곳을 찾는 사람이 들렸다가고, 나처럼 사진을 찍는다.

 

벽이 보이는 맞은 편에는 프랑스공산당에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레지스탕스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가 있다. 여기에는 루이 아라공이 레지스탕스를 위해 쓴 Strophes pour se souvenir (Strophes to help you remember, 1955)라는 시의 한 구절이 새겨져있다.

 

그 옆쪽에는 “프랑스공산당의 누구누구”이런 식의 묘비명이 적힌 무덤들이 이어져있다. 프랑스의 공산주의자들도 죽으면 이 벽이 보이는 곳에 함께 있고 싶어했나보다.

 

이걸로 빠리까지 와서 꼭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거의 한 셈이다. 여행의 이제까지의 과정 중에서 가장 의미있는 시간.


가는 길에는 쇼팽의 묘지를 만났다.

 

  (혹시나 나중에 가실 분이 있다면, 이렇게 하시라. 정문에 들어서서 언덕을 약 100미터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좀 더 가면 관리사무실이 있다. 들어가면 지도를 구할 수 있다. 지도는 정문에서는 나누어주지 않는다. 꼬뮌전사들의 벽은 지도 상에서 97블럭 맞은 편, 76블럭 옆쪽에 있다. 묘지의 동쪽 끝 구석이다. 꼬뮌 시민군들이 그곳까지 몰려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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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리,첫번째;로댕과 모네,까미유 끌로델

빠리, 로댕과 모네, 까미유 끌로델

 

겨우 어제 도착했기 때문에 빠리에서 이야기는 좀 더 있다가 쓰려고 했지만, 오늘 다녀온 두 곳의 이야기는 먼저 해야할 것같다. 도착한 다음날, 다녀온 곳 중 두군데 이야기. 에펠탑이나 개선문 같은 것들도 있지만 그보다, 로댕미술관과 모네미술관.

 

로댕, 클로델

 

에펠탑에서 조금 걸어가면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는 앵발리드 군사박물관 옆에 로댕 미술관이 있다. 수수하게 보이지만, 안쪽의 정원이 멋지다. 그리고 로댕과 까미유 클로델의 작품들이 있다.

 

나는 조각은 잘 모르지만, 로댕이 인상파 화가들이 대상 속에서 “보이는 것”을 묘사하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작업을 조각에서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대상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형상으로 창조해낸다.

 

그의 작품 중에서 미술관의 앞뜰에 전시된 “칼레의 시민들”과 “지옥의 문”은 당장 눈에 띈다. “칼레의 시민들”은, 어떤 대의(포위당한 도시의 동료 시민들을 위한)를 위해서 희생하는 “시민”들을 형상화한 작품인데, 도덕적이기도 하고 자신의 결정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비극적인 것일 때, 드러나는 숭고함을 나타낸다.



 

“지옥의 문”도 잘 알려진 작품. 이 작품을 둘러보면, 이 문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영화와 같은 동적인 영상이 없을 시기에는 정지한 것 속에서 움직임을 형상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지옥의 문”은 지옥을 들어가려고 하는, 혹은 거부하려고하는 영혼들의 끔찍한 몸짓이 가득한 문을 형상화한다. 현대에 그러한 이미지를 표현하려 했다면 아마 영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댕의 작품은 그것이 비록 정지한 것이지만 사실상 움직임을 보여준다. 조금만 주의 깊은 감상자라면 그것이 청동으로 만든 고정된 물체가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로댕이 그려내는 인물들은 생생하다. 그것은 특히 그들이 살아있는 육체의 특성, 움직이는 근육들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에도, (이 작품은 단테를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생각은 근육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말하는 것같다. 생각은 단지 두뇌라는 기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육체--따라서 그것이 존재하는 물질적 관계--와 근육 속에서 존재하는 데, 로댕의 작품은 그것을 형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움직이는 것을 쉽게 표현하는 지금과는 달리 정적인 표현수단을 통해서 동적인 것을 표현하려고 할 때, 그것이 얼마나 치열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같다. 현대에는 한편으로 너무 손쉽고, 그래서 그런 치열함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미술관의 한 방은 까미유 끌로델의 작품으로 채워져있다.

 

Sentiment님의 블로그에서 인용(http://blog.naver.com/insomnia0?Redirect=Log&logNo=150021674671)

 

16세의 천재 소녀 조각가. 까미유는 그렇게 로뎅과 운명적인 만남을 시작한다.

42세의 대조각가 로뎅은,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형태는 깊이로 보아라,

주가 되는 면을 분명하게 나타내어라,

형태가 너를 향해 있는 것으로 상상하라,

모든 생명은 중심에서 나오고, 안에서 점점 밖으로 퍼져 나간다,

소묘에서 윤곽선을 보지말고, 돋을 새김을 보라,

돋을 새김이 윤곽선을 결정한다,

중요한 것은 감동하기. 사랑하기. 소망하기. 걱정하기. 살아가기이다,

예술가가 되기 전에 먼저 뜨거운 가슴을 가져라,"

 

그녀와 로댕의 관계는 영화 “까미유 끌로델”과 같은 작품을 통해서 많이 알려져있다. (나는 영화는 보지 못했다.) 작품만 보더라도, 까미유 끌로델은 훨씬 동적이고 격정적인 감정을 작품에 쏟아 붓고 형상으로 창조한다.

 

로댕의 어떤 작품에도 비할 바가 아닌 작품이 이곳 전시실에 있다. the Waltz 라는 작품. 보면서 코끝이 찡해질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남녀가 춤을 추는 모습을 묘사한 이 작품 속에서 그들은 살아있다. 특히 여성의 끌리는 치마는 대상에 움직임을 부여한다.


이 작품은 말 그대로 왈츠. 그냥 보아도 움직임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이지만, 이렇게 해보자. 작품 주위에서 내가 대신 왈츠를 춰보자. (마침 MP3 플레이어에는 쇼팽의 Waltz No.1 In E Flat Major Op.18(Grande Valse Brillante)가 있었기 때문에 들으면서) 잘 모르지만 영화든 어디서든 본 듯한 왈츠 스텝을 작품주위에서 밟아보자. 그렇게 보면 작품이 정말로 춤을 추기 시작하고, 열정적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사실, 까미유 끌로델의 감성은 왈츠같은 ‘춤곡’과는 어울리지 않아. 그런데 왜?)

 

까미유의 이 작품은 정지한 조각 속에서 움직임을 표현한다는 측면에서만 아니라, 사랑하는 남녀의 육체적 움직임을 작품 속에서 표현한다는 점에서도 탁월하다. 그러나 그 육체적 움직임은 단지 육체적인 사랑만이 아니라 예술적으로 고양된 것이다. 비록 로댕이 그것을 거부하고, 그녀는 30년 동안 정신병원에 유폐되었지만, 그녀의 조각에서는 로댕의 작품들 속에서 느낄 수 없는 진실함과 치열함이 동시에 배여난다. 그래서 가슴 아프고 코끝이 찡해진 걸까.

 

클로드 모네, 빛에 대하여

 

지도를 보고 어렵게 찾아간 모네미술관.

정작 모네의 작품은 지하 한 층에 50여점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서울의 모네展에서의 느낌을 좀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관람.

 

전시된 모네의 작품 중, “템즈강에 비친 런던의 영국의회”Londres le palerant Reflets sur la Temise(1899-1901, 불어를 모르니 한글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이라는 작품은 빛의 방향에 따라서 건물사이로 새어나오는 빛과 그림자, 물에 반사되는 빛을 그린다. 물에 비친 빛은 같은 흰색이라도 다른 곳에서는 다시는 불가능한 효과를 만들어낸다.(아래 그림은 전시된 것은 아닌데, 같은 것을 찾지는 못했다.연작시리즈 중 하나)


모네의 수련시리즈는 전에 국내전시를 보고 이야기한 포스트(http://blog.jinbo.net/rudnf/?pid=129)에서도 언급한 것이지만, 수련보다는 물에 비친 빛을 묘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역시 여기서 보이는 작품들도 그렇다. 모네의 수련시리즈에서는 물에 비친 대상에 대해서 직접 보이는 대상(수련)이 비교되면서 물에 비친 대상은 모호하게, 수련은 뚜렷하게 보인다. 모네는 이 뿐 아니라, 대상이 비추어지는 각도가 다르다는 점에 착안해서, 물에 비친 것과 직접 보이는 것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한다.

 

역시 인상적인 작품은 모네의 "장미정원". 로댕의 작품을 감상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것을 영상으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천천히 장미정원으로 걸어가자.(일본풍 다리가 있는 정원도 마찬가지다) 차츰 빛과 색채가 제각기 흔들리는 곳으로 한걸음 씩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는 형체도 없고, 다만 살아있는 색채들, 그리고 그것을 비추는 빛들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천천히 다가가면서 감상한다.)

 

모네는 형태보다 색이 우위에 있는 그림을 그리고, 점점 형태 자체는 사라져간다.(말년에 그의 시력저하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후기의 몇몇 작품은 밋밋한 느낌이다. 빛을 강조해주던, 마치 빛의 ‘보색’과 같은 형태라는 양념이 사라지면서 빛이 도드라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느낌.

 

 

빠리에서 첫날, 두 개의 미술관을 보고 나서 생각해보니, 가야할 곳들이 많다. 하루 정도 더 있어야할까. 이 곳이 맘에 드는 이유 중에 하나는 와인과 어울리는 치즈가 터무니없이 싸다는 점이다. 그리 좋은 것을 욕심내지 않는다면, 2003년 보르도産 와인 한 병이 우리돈 5000원 정도, 혼자 먹기는 부담되는 크기의 브리치즈 한 조각이 1500원 정도. 글을 쓰면서 혼자서 한 병을 다 비우고 기분좋게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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