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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세 미술관전, 밀레, 고흐(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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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내 친구 빈센트


내 친구 빈센트
박홍규 지음 / 소나무

 

 

* 불안정노동철폐연대 기관지 <질라라비> 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다소 거칠긴 하죠.

 

 

광기 혹은 예술? 빈센트 반 고흐.


보통은 중고등 학교 교과서에서 몇 번 그림을 보았거나 유명하다고 알려져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귀를 절단한 미친 화가로 기억된다. 그러나 여튼, 많이 알려져있고 그의 그림을 어떤 식으로든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의 그림을 찬찬히 보기 시작하면, 영혼의 상처들, 작열하는 태양과 대지,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하는 사람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그곳, 노동하는 사람이 가지는 어떤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 노동자들의 시선은 어느 지점에서 고흐의 눈빛과 만날 수 있게 된다. 비록 저임금과 고용불안의 고통 속에 있더라도,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행위로서의 “노동”이라는 것에서 말이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 빈센트 반 고흐는 역사상 위대한 “노동하는 사람의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광기로 소개되었던 어떻든, 그의 진실에는 노동자의 눈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빈센트의 삶

 

이 책의 제목에 “고흐”라는 그의 성이 아니라, “빈센트”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은 그가 일관되게 자신의 그림에 빈센트라는 이름만으로 서명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떤 권위적인 이름이 아니라 익명의 감상자들에게조차 친근한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한 것은 어떤 계기였을까?
바로 벨기에 탄광촌에서 선교를 하면서 비참한 탄광노동자들의 삶을 접하고부터였다. 그는 종교적 열정에 이끌려 선교를 목적으로 탄광에 갔지만, 이내 비참하게 착취당하는 탄광노동자의 삶을 접하고 충격을 받는다. 탄광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났을 때 지원하기도 하고, 탄광노동자와 똑같이 입고 굶주리고 지낸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당시에 쓴 편지는 마치 프랑스의 사실주의 걸작, 탄광노동자들의 삶과 파업투쟁을 그린 에밀졸라의 <제르미날>의 한 구절을 보는 것같다.


그 초기 시기에 가장 돋보이는 그림은 잘 알려진 <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이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

 

노동하며 거칠어진 사람들의 손, 그 손으로 캐낸 감자를 먹고 있는 가난한 농민 가족의 모습이다. 이 속에 바로 삶과 노동이 있다. 빈센트는 바로 노동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고자했다.
그의 그림이 가장 생명력을 잃은 것은 역설적으로 가장 그림그리기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 파리 거주 시기였다. 당시 유행하던 인상파 화가들의 기법을 흉내내기도 했지만, 그것은 지금 보기에도 “아, 이건 고흐의 그림이야”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가 그림을 그려야할 곳은 다른 장소였다.

 

아를, 태양의 고장에서

 

프랑스 남부의 아를은 지금도 온통 하얗게 햇빛이 가루처럼 부서지는 곳이다. 끝없이 밀밭이 펼쳐진 아를로 내려간 빈센트는 그 곳에서 풍경과 함께 농민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빈센트의 그림은 다시 태양으로 가득차고, 가난한 농민들의 삶이 등장한다. 그러나 단지 고달픈 고통으로서 노동만은 아니다. 오히려 생명이 가득한 곳에서 생명을 키우고 거두는 존재가 바로 노동하는 농민들이다.

그림의 양식 속에도 그런 점은 반영되어 있는데, 고흐의 단순한 양식은 어떤 “추상화”의 일환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단순화라고 할 수 있다. 고상한 귀족들의 생활을 묘사하는 데 거친 붓터치와 강렬한 원색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거친 손과 팔뚝,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농민을 그리기 위해서는 바로 그것이 필요하다.


고흐는 자신도 바로 그런 존재로 그렸다. 그의 잘 알려진 많은 초상화들이 그렇다. 자화상에서 그의 눈빛은 19세기 후반 부르조아 사회의 가식을 견딜 수 없었던 영혼의 고통, 그리고 강렬한 태양을 함께 담고 있다.

 

자화상(1889)

 

보통사람 빈센트

 

글쓴이 박홍규 교수는, 이 책을 통해서 보통사람으로서의 빈센트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광기”라고 평가되는 그의 강렬한 작품은 오히려 그의 노동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이해하지 못한 부르조아 미술계의 오해일 뿐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빈센트의 삶의 여정과 그의 작품이 분리될 수 없다는, 어쩌면 아주 당연하지만 대부분 잊혀지고 마는 사실을 꼼꼼히 보여준다. 그런 오해들을 벗겨내면 빈센트의 작품을 그의 삶과 함께 마주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비참하게 착취당하고, 예술이 부르조아적 가식의 장식이 되었던 시기에 고통스러웠던 예술가의 작품에 대해서 말이다. 지금이라도 그것이 크게 다른 상황일까?

그래서 마치 우리에게는 먼 어떤 다른 세계의 예술인 것처럼 생각되었던 위대한 한 예술가를, 노동자들이 자신의 시각으로 보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우리 문명의 가장 위대한 예술적 성과 중 하나를, 그 주인인 노동자들이 다가가고 이해하고 감동할 수 있는 권리를 찾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 1888>

 

반 고흐의 그림에는 유령도 없고, 환영도 없고, 환각도 없다.
그것은 오후 두 시에 내리비치는 태양의 작열하는 진실이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작가 앙토넹 아르토가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작년말과 올해초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된 “반고흐展”의 한쪽 벽면에 있던 문구이기도 하다.) 그가 본 ‘태양의 작열하는 진실’을 그림과 함께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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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


진보적인 노동법 학자이면서 인문학의 고전인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하기도 했던 박홍규 선생이 쓴 책이다. 예술가에 대한 독특한 사회과학적 분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은, 그러면서도 오히려 예술적 감상을 더욱 진실하게 만들어준다. 이 꼭지의 주제가 “내게 가장 좋은 책”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이 책은 그런 이름에 걸맞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가장 좋은 (예술에 관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같다.


이 책 외에도 본문에 언급한 앙토넹 아르토의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빈센트의 서한집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와 같은 책도 매우 감동적일 뿐 아니라 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기회가 될 때, 그의 작품을 직접 보는 것이 좋은 데 안타깝게 최근의 전시회는 올해 2월말까지 진행되었다. 당분간은 국내에서는 화보와 화면을 통해서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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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앙토넹 아르토 지음, 조동신 옮김 / 도서출판 숲


 

반 고흐의 그림에는 유령도 없고, 환영도 없고, 환각도 없다.

그것은 오후 두 시에 내리비치는 태양의 작열하는 진실이다.

 

얼마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끝난 <반 고흐 展>, 한쪽 벽에 인용된 문구다. 앙토넹 아르토, 이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63쪽)

 

그러나 그 "작열하는 진실"은 역설적으로 "광기"로 취급되었다. 아르토가 이 책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1947년 당시 파리에서 열린 전시회 직후에 한 정신과 의사(베르와 르르와)가 고흐는 광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쓴 책 때문이다. 여전히, 60여년 지난 이곳에서도 고흐는 "광인 화가"로 이해되고 있다. 그림보다, 몇몇 (그의 광기를 증명하는) 극적인 에피소드들이 잘 알려져있고, 그래서 고흐는 예술가의 "광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어떤 인물로 이해된다.

 

반 고흐는 최고의 명석함을 지닌 사람들 중 하나로서,

어떤 경우에도 앞날을 멀리, 사실들의 즉각적이고 명백한 실재성보다

멀리, 무한하고 위험할 정도로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47쪽)

 

그렇다. 그래서, 고흐는 그 눈으로 그림을 그렸고, 그림들은,

심장에 단도를 찔러넣는 것처럼, 붓으로 진실의 진실의 심장을 꺼내 보여주는 것이다. 피가 흐르는 채로,

그래서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없는 충격과 당혹스러움을 안겨준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Wheatfield with Crows, 1890,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하물며 자살의 경우라면 육체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끊는,

이 자연에 반하는 행동을 결심하기 위해서라면

나쁜 인간의 대무리가 있어야한다. (110쪽)

 

아르토가 보기에는 고흐를 "치료"하려했던 정신과 의사 가셰가 그 대무리의 앞장에 섰던 사람이다. 그는 고흐에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리"라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라니! 이 정신과의사 양반은 진실이란 것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마치 한 공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아르토는 고흐가 "까마귀들"(위의 그림 말이다.) 이후 반 고흐가 단 한점이라도 더 그림을 그렸다고 믿을 수없다고 말한다. 나도 그 그림 앞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비록 그림 밑의 해설에는 그것을 확증할 수는 없다고 쓰여있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생명으로 가득 찬 죽음이다. 고흐의 죽음은 그의 영혼에 필연적이었다기 보다는 갑작스런 중단. 그것은 그의 영혼에 "강요된" 것이다.

 

광인이라고? 반 고흐가?

언젠가 인간의 정면을 바라볼 줄 알게 된 자

반 고흐가 그린 초상화를 바라보라. (105쪽)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Autoportrait au chapeau de paille 1887,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얼마전 서울전시회에 전시되었다.


고흐의 자화상을 보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나는 이처럼 압도적인 힘으로 인간의 얼굴을 탐색하고,

반박할 수 없는 인간의 심리학마저 도마 위에 올려놓듯

해부할 줄 알 정신병 의사를 전혀 알지 못한다.

반 고흐의 눈은 대천재의 것이다. (107쪽)

 

고흐의 태양에서 직접 내려온 것같은 눈빛은 바라보는 사람의 안구를 통해 영혼에 날아 꽂힌다. 그리고는 그것을 흔들고, 따가운 햇빛 아래 드러낸다. 마치 해부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것은 잊을 수 없는 강력한 충격이다. 어떤 정신과 의사도 고흐의 자화상, 그 눈빛처럼 보는 사람의 영혼을 자신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의사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이런 이유로, 자화상 앞에서는 그 눈빛이 바라보는 각도에서 다리가 굳어지고 마는 것이다.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 해도, 어디에서 이런 경험에 또 가능하겠는가.

 

그래서 반 고흐를, 그의 작품을 보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모험이다. 이 책의 아르토에게 모두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더라도, 고흐에 대해서는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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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얼마 전 이 책을 먼저 보고 나서 며칠 후에 함께 갔던 <반 고흐 展>을 혼자서 훌쩍 한번 더 가고 말았다. 나도 서울의 전시회가 끝난 3월15일 전에 이 책을 보았더라면 한 번 더 갔었을 것이다. 땅을 칠 일이지만, 차라리 암스테르담에 언젠가는 한 번 더 가보자고 생각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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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의 마지막날들

12월31일. 잘 '기념'되지는 않는 기념일 중 하나. 어찌보면 그저 사람이 만들어놓은 날짜들의 구획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계기들이라는 점에서 그것들은 의미가 있다.

2007년의 마지막 며칠 동안. 그제는 베토벤의 '합창', 9번교향곡 연주회를 갔다. 오늘은 휴가를 내고 서울시립미술관 반고흐展에 다녀왔다. 고난에 찬 2007년을 마감하면서 나 스스로에게 두 개의 선물을 한 셈이다. 우연한 것들이었지만 그것들이 다가온 어떤 이유들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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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9번 교향곡은 흔히 보편적인 인류애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곡을 들으면 그것은 그저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속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들의 형제애, 민족(국가)을 넘어선 연대가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 느낄 수 있다.

곡의 해설에 대해서는 붉은털실님의 포스팅이 좋다.
http://blog.jinbo.net/egalia227/?pid=155
링크를 따라가면 푸르트벵글러의 1951년 공연도 들을 수 있다.

예술이 (마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자선언'처럼) 하나의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선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그렇다.

그렇다면 그것이 하나의 이념이자, 구체적인 개인들에게는 어떤 활동의 지침같은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나갔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국제주의적 연대. 너무 거창해 보이지만 마치 공산주의자선언이 그런 것처럼, 그것이 우리의 이념이라면 그것은 개인들을 '활동가'로 만들 수도 있다.(이 위대한 작품을 단지 정치적 선언으로 해석하고 긴박될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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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 당시 네덜란드 반고흐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 등지에 보고 세달만에 다시 만난 전시회.
몇몇 작품은 만난적도 있어서 괜히 반갑다.

여행에서 쓴 글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고흐의 그림에서 특징적인 것 중에 몇가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영혼의 고통을 자신의 예술로서 구원받고자한 열정.

이번 전시에서는 유럽에 갔을 때 꼭 보고 싶었지만 못봤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슬픔'이라는 제목의 석판화.

동거하던 시엔이라는 여인을 그린 1882년 작품이다. 여행을 시작할 때, 이 그림은 마치 나의 마음 속에 있는 슬픔을 이미지로 표현한 것같은 느낌이었다. 웅크리고 떨고 있는, 누군가 다독거려주기를 기다리는 절망적인.

결국 한달반 여행을 거치면서 그 누군가는 무엇보다 자기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오늘 보았을 때에서 그 슬픔을 다시 만나고 한참을 앞에 서있기도 했지만, 훨씬 덜 격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다시 만난 고흐의 다른 그림들, 자화상이라든가, 피에타(들라클루아 모작) 같은 작품들도 나에게는 지난 3개월 전과 지금을 비교해보는 리트머스시험지와 같은 것이었던 셈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는, 슬픔에도 어느정도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더 담담하게 직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개인사적인 느낌 외에도, (초기 네덜란드 시기부터 아를까지 이어지는) 고흐의 그림의 어떤 이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베토벤에 대해서 말한 것처럼, 고흐의 작품도 하나의 이념들이 포함되어 있다. 가령 <씨뿌리는 사람>같은 경우를 보라. 그것은 태양의 진실 속에 표현된, 노동하는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고흐가 그리고자 했던 "영원의 흔적을 지닌 사람들"이다.

한편으로는 영적이고, 한편으로는 정치적이기도 한 이러한 이념 역시 우리 활동에 어떤 '선언'이 될 수 있고, 활동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삶에 녹여낼 지향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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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국제주의, 형제애와 노동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영적이고 정치적인) 애정은 어쩌면 멀리 떨어져있는 것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인민의 해방을 위한 운동에 다양한 모습으로 결합되었던 이념적 근원들의 일부다.

그것들을 예술 속에서 사고할 수 있고, 또한 실천 속에서 녹여낼 수 있을까를, 올해 마지막으로 생각하게 된다. 우연찮은 계기로 나에게 선물한 두 가지의 예술적 체험은 아마도 2007년, "삶의 한가운데"(루이제 린저)를 지나온 나에게 어떤 방향을 말해주는 것같다.(목적론적인가? ^^;) 2007년이라는, 어떤 방식으로든 개인사적으로 가장 깊은 의미를 가졌던 한해를 정리하기 위해서 그런 것을 간절히 찾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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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의 하얀 햇빛

아를의 하얀 햇빛

남프랑스의 아를. 스위스를 떠나서 간 이 곳에 온 것은 순전히 고흐 때문이다. 고흐가 그림에 담았던 햇빛을 직접 보고, 피부에 담고 싶어서다.

아비뇽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아를. 남프랑스의 첫 느낌은 ‘밝다’는 것이다. 이곳의 태양은 어느 곳보다 밝게 빛난다. 이곳보다 위도가 더 낮은 동남아 같은 곳보다 더 밝은 빛을 띈다. 그 빛은 모든 것을 희게 빛나게 만든다.



모든 것에 흰색이 섞여들어간다. 왜 고흐가 유화를 그리면서 흰색 물감을 그렇게 많이 사용해야했는지 알 수 있을 것같다. 들판에도, 나무에도, 론강의 강물에도, 집들에도 흰색이 넘치고 눈부시다. 그것은 강렬하기는 하지만, 뜨겁다는 느낌보다는 ‘밝다’는 느낌.

고흐가 그렸던 몇군데 장소를 찾는다.
첫날 밤은 하늘이 흐려서, 밤늦게 까지 기다렸는데도 아쉽게 론강에 비치는 별빛을 보지는 못했다.
이튿날. 고흐가 그렸던 랑그루아 다리를 찾아간다.(이제는 아예 반 고흐 다리로 불린다.) 버스가 다닌다고는 하지만 시간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를 시내에서부터 운하를 따라 걸어가기로 했다. 지도에서는 그리 멀어보이지 않는 그곳까지 따가운 햇빛을 맞으며 40여분을 걸어서 도착했다. 자갈길을 걸으면서 벌써 발이 아프다.

고흐는 햇빛이 있는 현장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이런 곳을 매일 그림을 그리기위해서 오갔을 것이다. 마치 농부가 자신의 밭을 갈기위해서 찾아가는 것처럼, 하나의 노동처럼.



다리와, 주변의 들판을 둘러본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도 흰빛이 가득하다. 한참을 들판을 바라보았다. 어찌보면 평범하고 단조롭기 그지없는 들판에서 고흐는 어떻게 그렇게 살아있는 장면을 포착하고 그려낸걸까. 자연의 깊은 곳에 있는 본질적인 것을 고흐는 그 곳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과 함께 찾아낸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깊이 느끼고 포착해야 가능한 일이다.



천천히 걸어돌아오면서 발견한 건, 반짝거리는 무언가였다. 그것은 흔들리는 나뭇잎.
바람은 나뭇잎은 흔들고, 햇빛이 반짝거린다.
그 흔들림은 사진으로도 잡아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반짝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흐는 다소 거칠고, 역동적인 붓터치를 통해서, 정지한 화면에 반짝거리는 빛의 강렬한 움직임을 그려넣었다.

시내에 들어와서 고흐가 머물렀던 요양원과 고흐가 그렸던 ‘밤의 카페’(이제는 이름이 반 고흐 카페)를 둘러본다.



아를 시내에는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로마 시대에 갈리아 진출을 위한 전진기지였기 때문이다. 아를의 햇빛에 받아 빛나는 그 유적들도 무척 아름답다. 하지만 고흐는 고집스럽게 ‘어디에나 있는’ 밀밭과 들판, 복숭아나무, 빨래하는 여인, 추수하는 농부를 그렸다. 고흐는 평범한 것들 안에 있는 진실을 만날 수 있게 캔버스에 담았고,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그것들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다.

모든 것을 가장 밝게 빛나게 하는 아를의 햇빛 아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 방법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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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암스테르담

암스테르담, 고흐박물관

* 지금은 베를린에 있지만, 인터넷 상태가 오락가락해서 이제 겨우 암스테르담에서의 이야기. 베를린은, (인터넷만 아니면) 지내기는 편하지만, 마음은 무척 불편한 도시다. 그런데도 예정보다 이틀을 더 넘기고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 도시에 가서.

파리에서 독일로 넘어가는 길에 암스테르담을 들려 간 건 두 가지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17세기 세계자본주의 헤게모니 국가였던 네덜란드를 간단하게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이었고, 그것은 주로 암스테르담 박물관과 도시 자체를 둘러보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에 온 목적의 팔할 이상은, 고흐박물관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서둘렀는데도, 암스테르담에 도착해서 숙소를 잡고 고흐박물관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이때부터 시작한 관람은 다음날 다시 찾아가서 오후까지 있었으니, 이번 여행에서 한 장소에 있었던 것으로 따지면 오르세 미술관보다 길다. 그러나 어쩌면 평생 이 그림들을 다시는 못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떠나는 길이 아쉽기만 하다.

일단 17세기 네덜란드 작품들을 본 경험(암스테르담 박물관)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무엇보다 고흐에 대해서 말해야한다.

글쎄, 보고 나서 느낌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제까지 미술작품을 통해서 이렇게 강렬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니와, 그 깊이와 폭으로 말하자면, 이제까지 다른 장르의 예술적 경험 속에서도 이런 느낌은 없었다. 영혼을 울린다. 니체는 열정적인 감정, 도취는 음악에서만 가능하다고 하면서 디오니소스를 특권화했지만, 만약 그가 고흐를 보았다면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아폴로를 긍정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흐의 눈빛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고흐박물관 이전에 오르세미술관에 전시된 고흐의 말년의 자화상을 언급해야한다. 오르세미술관에도 두 번 찾아가면서 매번 한참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지켜본 그림이 이것이었다.

이 그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고흐와 눈이 마주치는 각도에 서서 지켜보면서 눈빛과 대화해야한다. 그러면 고흐가 자신의 자화상에 그려넣은 자신의 감정이 전달되어온다. 그것은 어떤 두려움,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슬픔과 그런 아픔이다. 누구나 영혼에 그런 것들이 있을 텐데, 고흐의 자화상은 내 안의 두려움,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슬픔과 그런 아픔에 거울처럼 직면하게 한다.

노동하는 사람의 손

이런 감동의 상당부분은 여행을 오면서 챙겨와서 읽은 책, 고흐와 동생 테오의 서간집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덕분이다. 책은 고흐가 자신의 작품과 영혼에 대해서 말하는 편지들을 담고 있다. 편지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인 이 책을 통해서 눈 앞에 보이는 그림에서 고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다.

초중기 작품을 먼저 보자. 고흐는 <감자먹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램프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 자신을 닮은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려고 했다. 그 손은,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암시하고 있다.



이 작은 사진으로도 어느 정도 볼 수 있지만, 노동하는 손의 표정을 보라. 그리고 표정굵은 얼굴을.
노동하는 사람의 손, 그 자신의 얼굴과 같은 손, 그것은 가장 신성한 모습으로 금빛 조명아래 빛나고 있다. (고흐는 서간집에서 이 그림은 진한 금색 벽에 걸어야한다고 말하는데, 고흐 박물관에는 그렇게 걸려있다. 조금 떨어져보면, 화면 전체에서 빛이 벽으로부터 배어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목사가 되기 위해 탄광촌에 있던 시절, 광부들의 파업을 지원하면서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기도 했던 고흐는, 그 표현은 달라졌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끝없이 간직한다. 아를에서도 고흐는 이렇게 말한다.

농부를 그릴 때는 파란색의 무한한 하늘에 창백한 별 하나가 신비롭게 반짝이는 것을 그리려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내가 그리려는 훌륭한 농부가 찌는 듯한 한낮의 열기 속에서 곡식을 거둬들이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빨갛게 달궈진 다리미처럼 빛나는 오렌지색과 황금색의 반짝이는 톤을 담은 그린을 그렸다.
사랑하는 동생아, 높은 양반들은 이런 과정을 봐도 단지 서투르게 모방한 탓으로 생각하겠지. 그러나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우리는 ‘대지’와 ‘제르미날’을 읽은 사람이다. 농부를 그린다면, 우리가 읽은 작품이 우리의 일부가 되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을 그리면서는 이렇게 말한다.

모델은 카페에서 일하는 여자인데, 내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면류관을 쓴 그리스도’ 같은 모습이다. 그녀는 밤새 꽤 바쁘게 일했음이 분명한 모습을 하고 나를 찾아왔다. 인상적이게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샴페인은 나를 즐겁게 해주지 않아요, 오히려 아주 슬프게 해요.”

그녀를 그린 그림은, 피곤함과 슬픔이 눈빛에 나타난다. 고흐는 그런 인상이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난스러운 것, 하지만 그럼에도 혹은 그 때문에 가장 성스러운 것. 나중에 고흐가 들라클루아의 피에타를 다시 그린 그림도 전시되어 있는데, 그림에서 성모에게 안긴 죽어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마치 고흐의 자화상과 같다. 그래서 고흐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포함해서) 하나의 개인들의 영혼에서, 성스러운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일하는 농부의 모습이 금박으로 장식한 그리스도 상보다 더 성스럽게 나타난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흔히 고흐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박물관의 설명을 보면 별로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서간집에서 언급하는 마지막 작품이 비슷한 이미지인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충분한 이유가 이 그림에는 있다.



그림에서 밀밭의 밀들은 정말 금빛으로 반짝인다. 그 위로 날아가는 까마귀들은 불행한 화가들의 영혼을 먼 행성으로 데려가는 것같다. 그들이 날아가는 하늘은 어두운데, 그곳에는 별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그리기 전해에 고흐는 <해뜰 무렵 밀밭에서 수확하는 사람>이라는 그림을 그린다. 이 작품의 영문제목은 ‘Wheatfield with a reaper’이다. ‘reaper’는 수확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죽음의 신’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수확하느라 뙤약볕에서 온 힘을 다해 일하고 있는 흐릿한 인물에서 나는 죽음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그건 그가 베어들이는 밀이 바로 인류인지도 모른다는 의미에서다. 그러므로 전에 그렸던 <씨뿌리는 사람>과 반대되는 그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죽음 속에 슬픔은 없다. 태양이 모든 것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환한 대낮에 발생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

그러나 고흐의 그림의 전반적인 정서가 죽음일까? 전혀 그렇지는 않은 것같다. 많은 그림들이 생명력으로 충만해있고 죽음은 그것을 더욱 두드러지게 대조해서 그러나게 한다. “씨뿌리는 사람들”이나 “해바라기”를 비롯한 여러 꽃 그림들을 보아도 그렇다. 잘 알려진 “해바라기”를 보면, 그 꽃이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디선가 꽃들이 말하는 것을 한번 쯤 들어본 사람이라면. 고흐가 전하는 해바라기의 말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테오는 자신의 아들에게 빈센트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그려준 그림이 “아몬드 꽃”이라는 그림인데, 빈센트 자신에게 그려준, 자화상 같아 보이는 그림도 있다. 이 흰꽃은 이렇게 이어진다.

전시의 마지막에는, 아, 고흐가 자살한 해인  1890년에 그린 ‘나비가 있는 정원’이 있다. 하얀 나비가 막핀 꽃처럼 풀밭에 있다.

지상에 머무르는 동안 지도 위에 검은 점으로 표시되어 있는 마을이나 도시에 직접 가볼 수 있는 것처럼, 어쩌면 나비가 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무수한 별이 있을지도, 그리고 죽은 후에는 우리도 그곳에 갈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 않겠나.
- 고흐가 베르나르(동료화가)에게 쓴 편지 중

고흐의 영혼은 나비(프시케)가 그림을 그리는 어느 행성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죽기 전까지 주변에서 피어나는 꽃을 그렸던 고흐는 1890년 7월 권총으로 가슴을 쏜다. 그는 이틀 후에 숨지는 데 “왜 나는 제대로 하는 것이 없을까, 총을 쏘는 것조차”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7월29일, 동생 테오의 품에 안긴채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 숨을 거둔다. 동생 테오도 고흐가 죽은 후 6개월 후에 건강이 급속히 나빠지면서 숨을 거둔다.

고흐는 노동하는 사람들 속에서 영혼을 발견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이 금박으로 치장한 어떤 성화보다도 성스럽다는 것을 자신의 그림으로 증명했다. 고흐는 자신의 강렬한 눈빛과 그림 속에서 그들의 영혼을,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만날 수 있게 한다. 이 글에서도 하나하나의 그림에 대한 느낌을 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것은 그림을 보면서 눈물이 날만큼 너무 아픈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개개인의 영혼의 상처를 더 큰 아픔들 속에서 인식할 수있게 하고 돌아볼 수 있게 한다.

이번 여행에서 느끼는 여러 가지 것들, 매일 매일 만나는 새로운 것들 속들 속에서 현기증을 느낄 정도이지만, 누군가의 강렬한, 그리고 상처입은 영혼에 직면하는 이런 특별한 기회는 다시 없을 지도 모르겠다.


*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원래 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알고 있던 "구두"나 "고흐의 의자(초가 있는 의자)"같은 작품을 보지 못했다. 다른 곳에 순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튼 무척 아쉽다.

* 고흐의 그림에 대한 감동에서 앞서 언급한 <반고흐, 영혼의 편지>라는 책을 다시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 감동적인 책이다. 특히 고흐만이 아니라 동생 테오의 글들도 그런데, 진정한 영혼의 동료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테오의 글이 어쩌면 더 가슴을 울린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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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전, 밀레, 고흐

양재동 예술의 전당에서 하고 있는 "오르세미술관전"에 다녀왔습니다.
사실은 멀지않은 기간 안에 유럽 배낭여행을 가려고 생각 중인데, 프랑스 가서도 못보고올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갔더랬습니다.(단순한 동기;;)

몇몇 작품을 소개한 것 뿐이지만, 좋더군요. (하지만 정말 '몇몇' 작품에 불과하니, 비싼 관람료가 좀 무색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도판이나 이미지들, 모작까지도 작품들의 느낌은 커녕 원래의 색조차 제대로 못살린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왜 진품을 보려고들 그러는지 알 것같더군요.)

오르세미술관은 1848년에서 1914년까지 19세기 작품을 중심으로 소장하고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번 전시회도 19세기 작품들. 산업혁명의 시기이고 프랑스에선 1848년 혁명과, 1871년 파리코뮌을 기억해야겠죠. 그래서인지 부상하는 부르조아를 묘사한 그림도 많았고(19세기 말은 부르조아지들에게는 그야말로 Belle Epoque였으니까요, 그에 비해서 어떤 그림들은 부르조아의 호사스러운 취미와는 별로 잘 맞지는 않았을 듯한.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고흐의 "아를에 고흐의 방"이라는 작품.



그림을 보는 순간, 아, 창문을 통해 들어온 남프랑스의 햇빛이 그림에서 환하게 번져오더군요.
그 햇빛에 취해서, 한참을 가까이서 멀리서 반짝거리는 그림을 바라봤습니다.
남프랑스에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저 햇빛을 봐야겠어요.

그리고 언론에 많이 소개된 밀레의 "만종".


평론가들은 이 그림에 대해서 '종교화의 새로운 경지'라는 표현도 한다는데, 굳이 성스럽고 혹은 영적인 것이 종교와 연결될 필요는 없겠죠. 그것은 오히려 종교적인 것보다 상위에 있는 개념일 겁니다.

여튼, 작품을 보면서 그런 영적인 느낌, 정말 가슴이 울리더군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철학적 인간학이라고 비판하더라도) 인간의 본질이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이성적' 존재라고, 포이에르바하처럼 '종교적' 존재라고, 푸리에처럼 '사랑하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맑스가 말하는 것처럼 노동하는 존재라는 것, 그 속에는 육체적인 것뿐아니라 지적인 것, 더구나 영적인 것까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노동하는 인간의 신성함. 작품을 보면서 더불어 경건해질 밖에요.

작품들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참 아쉬웠던 느낌, 아니 그보다 프랑스나 유럽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이 생기더군요. 어릴때부터 지척에 있는 박물관, 미술관에서 이런 작품들을 보면서 느끼고 자랄 수 있다니.. 그런 문화적 깊이를 우리가 따라가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식민지적 감상이라해도 어쩔 수없습니다. 차이가 있는 건 있는 거니까;;)

유럽여행을 정말 간다면 암스테르담에 반 고흐 미술관은 꼭 가보고 싶군요. 특히 아래 그림.  고흐의 "한짝의 구두 a Pair of Shoes"


목사가 되려던 고흐는 복음을 전하러 갔던 탄광에서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산업프롤레타리아를 만나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그리고는 곧 목사가 되려던 생각을 접고 그림을 그립니다만.) 아마 이 신발은 고흐 자신의 것이었겠지만, 그런 경험이 녹아있겠죠. 고흐는 벼룩시장에서 새로 윤을 낸 헌 구두를 사와서는 너무 윤이 난다고 생각하고 비오는 날 신고 진흙으로 더러워진 구두를 그렸다는 일화도 있으니, 노동하는 자의 구두라고 봐도 괜찮을 듯.

오늘부터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빛의 화가 모네展"을 합니다. 다음 주에는 거기로 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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