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독서]내 친구 빈센트


내 친구 빈센트
박홍규 지음 / 소나무

 

 

* 불안정노동철폐연대 기관지 <질라라비> 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다소 거칠긴 하죠.

 

 

광기 혹은 예술? 빈센트 반 고흐.


보통은 중고등 학교 교과서에서 몇 번 그림을 보았거나 유명하다고 알려져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귀를 절단한 미친 화가로 기억된다. 그러나 여튼, 많이 알려져있고 그의 그림을 어떤 식으로든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의 그림을 찬찬히 보기 시작하면, 영혼의 상처들, 작열하는 태양과 대지,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하는 사람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그곳, 노동하는 사람이 가지는 어떤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 노동자들의 시선은 어느 지점에서 고흐의 눈빛과 만날 수 있게 된다. 비록 저임금과 고용불안의 고통 속에 있더라도,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행위로서의 “노동”이라는 것에서 말이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 빈센트 반 고흐는 역사상 위대한 “노동하는 사람의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광기로 소개되었던 어떻든, 그의 진실에는 노동자의 눈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빈센트의 삶

 

이 책의 제목에 “고흐”라는 그의 성이 아니라, “빈센트”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은 그가 일관되게 자신의 그림에 빈센트라는 이름만으로 서명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떤 권위적인 이름이 아니라 익명의 감상자들에게조차 친근한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한 것은 어떤 계기였을까?
바로 벨기에 탄광촌에서 선교를 하면서 비참한 탄광노동자들의 삶을 접하고부터였다. 그는 종교적 열정에 이끌려 선교를 목적으로 탄광에 갔지만, 이내 비참하게 착취당하는 탄광노동자의 삶을 접하고 충격을 받는다. 탄광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났을 때 지원하기도 하고, 탄광노동자와 똑같이 입고 굶주리고 지낸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당시에 쓴 편지는 마치 프랑스의 사실주의 걸작, 탄광노동자들의 삶과 파업투쟁을 그린 에밀졸라의 <제르미날>의 한 구절을 보는 것같다.


그 초기 시기에 가장 돋보이는 그림은 잘 알려진 <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이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

 

노동하며 거칠어진 사람들의 손, 그 손으로 캐낸 감자를 먹고 있는 가난한 농민 가족의 모습이다. 이 속에 바로 삶과 노동이 있다. 빈센트는 바로 노동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고자했다.
그의 그림이 가장 생명력을 잃은 것은 역설적으로 가장 그림그리기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 파리 거주 시기였다. 당시 유행하던 인상파 화가들의 기법을 흉내내기도 했지만, 그것은 지금 보기에도 “아, 이건 고흐의 그림이야”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가 그림을 그려야할 곳은 다른 장소였다.

 

아를, 태양의 고장에서

 

프랑스 남부의 아를은 지금도 온통 하얗게 햇빛이 가루처럼 부서지는 곳이다. 끝없이 밀밭이 펼쳐진 아를로 내려간 빈센트는 그 곳에서 풍경과 함께 농민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빈센트의 그림은 다시 태양으로 가득차고, 가난한 농민들의 삶이 등장한다. 그러나 단지 고달픈 고통으로서 노동만은 아니다. 오히려 생명이 가득한 곳에서 생명을 키우고 거두는 존재가 바로 노동하는 농민들이다.

그림의 양식 속에도 그런 점은 반영되어 있는데, 고흐의 단순한 양식은 어떤 “추상화”의 일환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단순화라고 할 수 있다. 고상한 귀족들의 생활을 묘사하는 데 거친 붓터치와 강렬한 원색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거친 손과 팔뚝,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농민을 그리기 위해서는 바로 그것이 필요하다.


고흐는 자신도 바로 그런 존재로 그렸다. 그의 잘 알려진 많은 초상화들이 그렇다. 자화상에서 그의 눈빛은 19세기 후반 부르조아 사회의 가식을 견딜 수 없었던 영혼의 고통, 그리고 강렬한 태양을 함께 담고 있다.

 

자화상(1889)

 

보통사람 빈센트

 

글쓴이 박홍규 교수는, 이 책을 통해서 보통사람으로서의 빈센트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광기”라고 평가되는 그의 강렬한 작품은 오히려 그의 노동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이해하지 못한 부르조아 미술계의 오해일 뿐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빈센트의 삶의 여정과 그의 작품이 분리될 수 없다는, 어쩌면 아주 당연하지만 대부분 잊혀지고 마는 사실을 꼼꼼히 보여준다. 그런 오해들을 벗겨내면 빈센트의 작품을 그의 삶과 함께 마주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비참하게 착취당하고, 예술이 부르조아적 가식의 장식이 되었던 시기에 고통스러웠던 예술가의 작품에 대해서 말이다. 지금이라도 그것이 크게 다른 상황일까?

그래서 마치 우리에게는 먼 어떤 다른 세계의 예술인 것처럼 생각되었던 위대한 한 예술가를, 노동자들이 자신의 시각으로 보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우리 문명의 가장 위대한 예술적 성과 중 하나를, 그 주인인 노동자들이 다가가고 이해하고 감동할 수 있는 권리를 찾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 1888>

 

반 고흐의 그림에는 유령도 없고, 환영도 없고, 환각도 없다.
그것은 오후 두 시에 내리비치는 태양의 작열하는 진실이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작가 앙토넹 아르토가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작년말과 올해초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된 “반고흐展”의 한쪽 벽면에 있던 문구이기도 하다.) 그가 본 ‘태양의 작열하는 진실’을 그림과 함께 만나보자.


----

덧붙여 :


진보적인 노동법 학자이면서 인문학의 고전인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하기도 했던 박홍규 선생이 쓴 책이다. 예술가에 대한 독특한 사회과학적 분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은, 그러면서도 오히려 예술적 감상을 더욱 진실하게 만들어준다. 이 꼭지의 주제가 “내게 가장 좋은 책”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이 책은 그런 이름에 걸맞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가장 좋은 (예술에 관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같다.


이 책 외에도 본문에 언급한 앙토넹 아르토의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빈센트의 서한집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와 같은 책도 매우 감동적일 뿐 아니라 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기회가 될 때, 그의 작품을 직접 보는 것이 좋은 데 안타깝게 최근의 전시회는 올해 2월말까지 진행되었다. 당분간은 국내에서는 화보와 화면을 통해서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