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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06
    피렌체에 ‘조선족’ 아주머니(2)
    겨울철쭉
  2. 2007/10/02
    프라하,동화속 풍경?
    겨울철쭉

피렌체에 ‘조선족’ 아주머니

피렌체에 ‘조선족’ 아주머니

피렌체에서는 유스호스텔이 아니라 민박집에 묵었다. 민박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전문적으로 숙박을 할 수 있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식사가 한식이고 우리말이 숙박객들이나 주인과 통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유스호스텔과 다를 바도 없다.

피렌체에서 민박집으로 온 이유는 한편으로는 독일에서부터 거의 계속된 유스호스텔 생활의 긴장이 피곤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터넷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인 민박은 인터넷을 꼭 갖추고, 대부분 무선 인터넷까지 가능하지만 유스호스텔은 거의 대부분 유료인데다가 비싸기까지 하며, USB 메모리도 사용할 수 없는 게 많다.

피렌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숙소에서 만난 ‘조선족’ 아주머니 이야기를 하자. (‘조선족’이라는 말이 그리 좋지 않은 용법이기는 하겠지만, 그 ‘느낌’이 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따옴표를 붙여서 그냥 쓰는 것으로 하자.) 피렌체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할만한 곳이기는 하지만.

이탈리아에는 유독 민박집을 ‘조선족’분들이 많이 하신다. 내가 묵은 민박도 그런 곳이었는데, 한국인 유학생이 하는 곳보다 밥도 푸짐하고 지내기도 편하다. 인터넷 사이트를 보다보면 ’조선족‘ 분들이 하는 민박을 폄하하는 글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모종의 편견이 작용하는 것같다. 여기 주인은 ’조선족‘ 아주머니고, 일하시는 분도 ’조선족‘ 아주머니가 계신다.

남한에서 추방

이들은 이주 노동자. 저녁을 먹기 전에, 일하시는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는다.
올해 쉰넷 되신다는 이 분은 연변에서 알콜 공장에서 남편과 함께 일하셨다고 한다. 퇴직을 하고 나서 ‘배운 것이 없어서’ 남한에 일하러 오셨다고 한다. 벌써 6년전 이야기다. 역삼동 식당에서 하루를 일하고 단속이 있자, 신당동 포장마차로 옮기셨는데, 다음다음날 법무부 단속에 걸리고 말았다.

아주머니는 단속반에 하소연한다.
“내가 사람을 친 것도 아니고 물건을 훔친 것도 아니요, 그냥 일을 했을 뿐인데, 세상 어디에 일하는 게 죄가 된단 말이요?”

“불법” 이주노동자는 단지 일할 뿐이다. 자기 손으로 먹고살 돈을 버는 노동이 범죄가 되는 희안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결국 강제추방된 아주머니에게 남은 건 1500여만원(남한 원화)의 빚이었다. 아무리 일해도 갚을 수 없는 빚 때문에 아주머니는 다시 시도한다. 이번이 이탈리아였다.

이번에는 이탈리아

이탈리아로 가기 위한 브로커비 등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민박집 주인인 학교 동기생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북경에서 홍콩으로 기차를 타고, 홍콩에서 말레이시아로 넘어왔다. 말레이시아에서 다시 싱가폴로, 다시 여기저기 여러나라를 거쳐 일주일이 걸려서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아마 ‘불법적’인 신분증 같은 것도 만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거리에 장사하는 중국인들 상당수가 이용한 루트가 아니었을까.) 같이 오던 분들 중 몇몇은 단속에 걸려서 추방되는 것도 지켜봤다.

한 5년을 생각하고 오셨다는 아주머니는 중국에 가족이 있다. 한달에 두 번 정도 전화하신다는 아주머니는, 남편과 딸, 아들이 있다. 과년한 딸이 시집을 안 간다고 고집이라고 걱정이라고 한다. 지구 반대편으로, 돈을 벌기위해서 가족과 5년간 이별..

올 때 주인 아주머니가 대준 비용 때문에, 1년은 월급없이 일하신다는 아주머니는, 이제 10개월째다.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 남한에 올 때 진 빚부터 갚아나가야한다. 5년은 있어야하는데 이빨이 흔들려서 걱정이 많으시다. 이곳에서는 의료보험도 없이 치과 치료 받기가 끔찍하게 비싸다.

이주자들

주인아주머니는 거의 남한 말투의 억양을 사용하시는데, 왠지 물었더니 3년 동안 남한에 식당에서 일하셨다고 한다. 그 때 번 돈으로 이탈리아에 남편과 함께 와서 민박을 하신다. 남편은 베네치아에 가서 민박집을 하신다니 수완도 좋으시다.

왜 아주머니가 돈을 벌러 오셨냐고 하니까, 여자들이나 돈 벌 자리가 있다고 하신다. 민박집 같은 숙박시설이나 이런 저런 서비스업종에 일하시는 걸 텐데, 저임금의 여성 이주노동자를 요구하는 것은 전세계적인 현상인 것같다. 한편으로 여성, 불안정노동자로 착취하고, ‘불법’이라는 약점으로 더 착취한다. 일부러 국가가 ‘적당히’ 유지하는 불법의 현장들인 셈이다.

이곳에 온 ‘조선족’ 분들도 그렇지만 중국인들은 특유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상권을 장악한다고 한다. (마치 주인아주머니가 친구분을 불러온 것과 같이 연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방식의 연결을 통해 적어도 이탈리아에서는 민박은 대부분 ‘조선족’분들이 ‘장악’하고 계신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피렌체에 '매대‘들을 보면 대부분 중국사람들이고, 이탈리아 사람들이 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것같다는 생각도 드는 게, 이탈리아 사람들이 스스로 신뢰도를 깍아먹는 경우도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아주 개인적인 경험이라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이탈리아에 첫날 와서 식당에서 먹은 점심에는, 계산서에 메뉴에 안 씌여있는 cover fee 라는 자릿세에다가, 서비스비 별도, 게다가 먹지도 않은 음료수에, 마신 것의 2배가 되는 물을 마신 것으로 청구되었다. 실수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정황도 있는데, 뒤에 두 개는 항의하고 고치기는 했지만 매우 기분 상하는 일이다. 물론 개인적인 경험들일 뿐. 그랬다가 나폴리에서는 나서서 길을 가르쳐주는 노인들을 많이 만났는데, 나폴리노인들은 친절하다는 '편견'도 생긴다.;;)

'조선족'에 대한 편견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탈리아의 ‘조선족’분들의 민박에 대해서 편견을 가진 평가가 인터넷에 많다. 그런 평가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조선족’에 대한 편견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적어도 이번은 묵었던 어떤 곳보다 음식도 숙소도 좋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젊은 한국출신 사람이 하는 것과 같은 ‘말이 통하는’ 분위기는 없을 텐데, 아마도 그런 점도 이유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과 말하면서 느낀 것은 적어도 어떤 사람들은 '조선족'에 대해서 동질감을 느끼는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민족'이라는 게 얼마나 웃긴 건지를 다시 느낀다.(아마 앞으로 북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같은 민족'으로는 사고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주머니 이야기를 들으면서, ‘민족’이라는 희미한 끈으로 나와 연결되고 먼 이국에서 우연히 만난 그분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세계를 돌아 첩보작전을 방불케하는 방법으로, "불법“이주를 감행하고 일하고 지구반대편의 가족에게 송금하는 여성 이주노동자. 이번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분.

그리고 그녀가 중국에서도 걱정없이 살 수 있도록 세계경제는 변화될 수 있을까, 혹은 그녀가 원하는 곳에서 “불법”에 불안하지 않게, 안전하게 노동할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국경들이 민주화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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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은 글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피렌체에 가깝다는 이유로 반나절 다녀온 피사에 있는 그 유명한 "피사의 사탑"
.
나도 이 앞에서는 완전히 관광객 모드로 돌입했는데, 전세계에서 온 갖가지 모양의 사람들이 모두 기울어진 사탑에 손을 대고 서있는 포즈로 똑같은 사진을 찍는게 흥미로운 곳이다.

나는 흠.. 찍어줄 사람이 없어서 그냥 일반적인 포즈의 셀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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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동화속 풍경?

지금은  피렌체.
베를린에서, 프라하, 비엔나를 거쳐서, 스위스에 있다가, 남프랑스(아를과 아비뇽)를 지나서 막 이탈리아 도착. 한동안 인터넷이 잘 안되는 유스호스텔 숙소에 주로 있다보니 아주 늦은 여행기를 올린다. 지나간 다른 곳들은 차근차근. 일단 프라하부터.

프라하, 동화같은?

주말에 도착한 프라하에는 무척 많은 사람들이 있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온 관광객들이 많은데, 가까우면서도 물가가 상대적으로 싼 이곳에 주말이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프라하의 舊도심은 중세 건물들을 보전하면서, 마치 ‘동화 속 나라’같다. 너무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도시들의 전경

유럽의 도시들을 다니다보면 한 가지 일반적인 특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도시의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전경들이 고풍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로 뭉뜽그릴 수는 없다. 각 도시들(내가 간 주로 각 국가의 수도)은 그곳이 가장 정치적, 경제적으로 흥기할 당시의 건물들이 주로 전경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런던과 빠리는 19세기의 건물들, 암스테르담에는 17세기의 건물들, 오스트리아에는 합스부르크왕조가 융성했던 18-19세기 건물들이 주로 도시의 전경을 형성한다. 그런 점에서 프라하의 중세적인 풍광은 한때 보헤미아 왕국,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융성했다가 16세기 이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흡수된 이곳의 역사를 보여주기도 하는 것같다.

중세적인 풍광, 색감

프라하의 유명한 건물들은 주로 그런 시기에 지어진 것들이다. 프라하성, 까렐교, 화약탑 등 주요한 관광지이며 유명한 건물들이 그렇다.

그런데, 이런 풍경들은 왜 ‘동화속’처럼 보일까?
우선, 풍광자체가 미적으로 아름답다. 내가 놀라면서도 의야했던 것은, 정작 많은 곳에서 자연적인 풍경은 한반도와 그리 다르지 않은 곳들도 많은데 왜 이렇게 다른 느낌이 들까했던 점이다. 그것은 주로 그곳의 사람들이 만들어 더한 풍경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특히, 색감.
(하지만 지금 다녀온 알프스는, 자연적 풍광자체가 다르다는 점은 언급하자)

한반도의 옛 건물들은 주로 자연속에서 튀지않고, 자연과 유사한 색을 사용해서 그 속에 묻히는 방식으로 지어졌다. 그런데, 이 곳은 자연의 색과는 대비되는--주로 보색으로 건물들을 짓고, 그것은 뚜렷하게 드러나고, 풍광 속에서 나름의 미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한반도의 옛 건물들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다른 미적 효과를 만든다는 점).

녹색의 산 속에, 하얀벽과 빨간 지붕으로 만들어진 집들이 드문드문 있을 때, 그것은 뚜렷하게 드러나면서 재밌는 색감의 조화를 이룬다.



중세적인 풍광, 동화

한편,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에 더해서 '동화 속같다‘는 느낌은 이내 조금 씁쓸함?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우리가 어릴 적부터 듣고, 읽고, 영상으로 접했던 ’동화‘가 거의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다소 괴기스러운 민담들을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로 재창조한 그림형제의 영향이 크긴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이’라는 근대적인 개념을 발명하고, 어린이들에 ‘적합’하다고 판단된 관념과 관행을 만들어낸 것이 유럽이라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어린이라는 개념과 “어린이용”의 여러 가지 것이 그대로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들도 있었다. (그들은 성장기에 ‘보호’받지만 한편으로는 과소인간으로 절하되고 시민권에서 배제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프라하의 풍광이 동화스럽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프라하라는 도시의 역사와, 어린이와 동화라는 근대적 발명품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을 것같다. 이런 역사들이 만나서 “동화같은 도시 프라하”라는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이 흥미롭다.

내가 이 도시에 간 것이 주말이었기 때문이었겠지만 이곳은 마치 말그대로 “관광지”같은 느낌이다. 번잡한 기념품가게, 여행객을 상대로 뭔가 팔아보려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곳이 가장 낭만적인 도시라고 말하지만, 내 느낌은 별로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무척 아릅답다는 것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다.)

(순전히 개인적인) 내 느낌과 어느 정도는 취향으로, 오히려 낭만적인 곳은 빠리인 것같은데, 어떤 낭만적인 분위기라는 것은 건물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곳의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 보여주는 모습에서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건물들이 만드는 풍광은 어쩌면 덜 아름다울 수 있어도 빠리가 더 낭만적인 도시로 느껴진다. (빠리가 낭만적인 도시로 느껴지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원인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같다.)

여튼 프라하는 가볼만한 도시. 아름답다.

***

국립박물관 앞에 바슐라프 광장.
이곳은 1968년 ‘프라하의 봄’과 잇따른 소련군의 침공이 이루어진 곳이다. 시간이 늦어져서 박물관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 앞에 어쩌면 별로 눈에 띄지않게 거리에 놓여진 십자가를 볼 수 있었다. 바로 프라하 봉기를 촉발했던 Jan Palach, Jan Zajic 두 청년의 분신이 일어난 장소.

다시, 사회주의에 대해서 묻게 된다. 누구를 위한 누구의 사회주의? 인민을 위한, 인민 스스로의? 혹은 사회주의 조국 수호를 위한, 소련에 의한? 그러나 한편으로 두 청년이 원했을 것이 자신이 싸운 이 도시를 북적거리는 관광지로 만드는 자본주의는 아닌 다른 것이었을 수도 있을 텐데.. 지금 이 거리의 사람들은 무엇을 원할까.

이곳에 장미꽃이 놓여있다. 긴 시간이 지나서 이렇게 죽음이 기억된다. 그러고 보니, 수많은 열사들이 사리진 곳에 우리는 변변한 상징도 없구나. 겨우 남아있는 청계천, 전태일 열사의 동판 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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