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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앙토넹 아르토 지음, 조동신 옮김 / 도서출판 숲


 

반 고흐의 그림에는 유령도 없고, 환영도 없고, 환각도 없다.

그것은 오후 두 시에 내리비치는 태양의 작열하는 진실이다.

 

얼마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끝난 <반 고흐 展>, 한쪽 벽에 인용된 문구다. 앙토넹 아르토, 이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63쪽)

 

그러나 그 "작열하는 진실"은 역설적으로 "광기"로 취급되었다. 아르토가 이 책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1947년 당시 파리에서 열린 전시회 직후에 한 정신과 의사(베르와 르르와)가 고흐는 광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쓴 책 때문이다. 여전히, 60여년 지난 이곳에서도 고흐는 "광인 화가"로 이해되고 있다. 그림보다, 몇몇 (그의 광기를 증명하는) 극적인 에피소드들이 잘 알려져있고, 그래서 고흐는 예술가의 "광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어떤 인물로 이해된다.

 

반 고흐는 최고의 명석함을 지닌 사람들 중 하나로서,

어떤 경우에도 앞날을 멀리, 사실들의 즉각적이고 명백한 실재성보다

멀리, 무한하고 위험할 정도로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47쪽)

 

그렇다. 그래서, 고흐는 그 눈으로 그림을 그렸고, 그림들은,

심장에 단도를 찔러넣는 것처럼, 붓으로 진실의 진실의 심장을 꺼내 보여주는 것이다. 피가 흐르는 채로,

그래서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없는 충격과 당혹스러움을 안겨준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Wheatfield with Crows, 1890,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하물며 자살의 경우라면 육체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끊는,

이 자연에 반하는 행동을 결심하기 위해서라면

나쁜 인간의 대무리가 있어야한다. (110쪽)

 

아르토가 보기에는 고흐를 "치료"하려했던 정신과 의사 가셰가 그 대무리의 앞장에 섰던 사람이다. 그는 고흐에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리"라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라니! 이 정신과의사 양반은 진실이란 것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마치 한 공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아르토는 고흐가 "까마귀들"(위의 그림 말이다.) 이후 반 고흐가 단 한점이라도 더 그림을 그렸다고 믿을 수없다고 말한다. 나도 그 그림 앞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비록 그림 밑의 해설에는 그것을 확증할 수는 없다고 쓰여있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생명으로 가득 찬 죽음이다. 고흐의 죽음은 그의 영혼에 필연적이었다기 보다는 갑작스런 중단. 그것은 그의 영혼에 "강요된" 것이다.

 

광인이라고? 반 고흐가?

언젠가 인간의 정면을 바라볼 줄 알게 된 자

반 고흐가 그린 초상화를 바라보라. (105쪽)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Autoportrait au chapeau de paille 1887,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얼마전 서울전시회에 전시되었다.


고흐의 자화상을 보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나는 이처럼 압도적인 힘으로 인간의 얼굴을 탐색하고,

반박할 수 없는 인간의 심리학마저 도마 위에 올려놓듯

해부할 줄 알 정신병 의사를 전혀 알지 못한다.

반 고흐의 눈은 대천재의 것이다. (107쪽)

 

고흐의 태양에서 직접 내려온 것같은 눈빛은 바라보는 사람의 안구를 통해 영혼에 날아 꽂힌다. 그리고는 그것을 흔들고, 따가운 햇빛 아래 드러낸다. 마치 해부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것은 잊을 수 없는 강력한 충격이다. 어떤 정신과 의사도 고흐의 자화상, 그 눈빛처럼 보는 사람의 영혼을 자신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의사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이런 이유로, 자화상 앞에서는 그 눈빛이 바라보는 각도에서 다리가 굳어지고 마는 것이다.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 해도, 어디에서 이런 경험에 또 가능하겠는가.

 

그래서 반 고흐를, 그의 작품을 보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모험이다. 이 책의 아르토에게 모두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더라도, 고흐에 대해서는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

동생은 얼마 전 이 책을 먼저 보고 나서 며칠 후에 함께 갔던 <반 고흐 展>을 혼자서 훌쩍 한번 더 가고 말았다. 나도 서울의 전시회가 끝난 3월15일 전에 이 책을 보았더라면 한 번 더 갔었을 것이다. 땅을 칠 일이지만, 차라리 암스테르담에 언젠가는 한 번 더 가보자고 생각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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