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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31일. 잘 '기념'되지는 않는 기념일 중 하나. 어찌보면 그저 사람이 만들어놓은 날짜들의 구획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계기들이라는 점에서 그것들은 의미가 있다.
2007년의 마지막 며칠 동안. 그제는 베토벤의 '합창', 9번교향곡 연주회를 갔다. 오늘은 휴가를 내고 서울시립미술관 반고흐展에 다녀왔다. 고난에 찬 2007년을 마감하면서 나 스스로에게 두 개의 선물을 한 셈이다. 우연한 것들이었지만 그것들이 다가온 어떤 이유들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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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9번 교향곡은 흔히 보편적인 인류애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곡을 들으면 그것은 그저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속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들의 형제애, 민족(국가)을 넘어선 연대가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 느낄 수 있다.
곡의 해설에 대해서는 붉은털실님의 포스팅이 좋다.
http://blog.jinbo.net/egalia227/?pid=155링크를 따라가면 푸르트벵글러의 1951년 공연도 들을 수 있다.
예술이 (마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자선언'처럼) 하나의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선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그렇다.
그렇다면 그것이 하나의 이념이자, 구체적인 개인들에게는 어떤 활동의 지침같은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나갔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국제주의적 연대. 너무 거창해 보이지만 마치 공산주의자선언이 그런 것처럼, 그것이 우리의 이념이라면 그것은 개인들을 '활동가'로 만들 수도 있다.(이 위대한 작품을 단지 정치적 선언으로 해석하고 긴박될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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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 당시 네덜란드 반고흐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 등지에 보고 세달만에 다시 만난 전시회.
몇몇 작품은 만난적도 있어서 괜히 반갑다.
여행에서 쓴 글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고흐의 그림에서 특징적인 것 중에 몇가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영혼의 고통을 자신의 예술로서 구원받고자한 열정.
이번 전시에서는 유럽에 갔을 때 꼭 보고 싶었지만 못봤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슬픔'이라는 제목의 석판화.
동거하던 시엔이라는 여인을 그린 1882년 작품이다. 여행을 시작할 때, 이 그림은 마치 나의 마음 속에 있는 슬픔을 이미지로 표현한 것같은 느낌이었다. 웅크리고 떨고 있는, 누군가 다독거려주기를 기다리는 절망적인.
결국 한달반 여행을 거치면서 그 누군가는 무엇보다 자기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오늘 보았을 때에서 그 슬픔을 다시 만나고 한참을 앞에 서있기도 했지만, 훨씬 덜 격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다시 만난 고흐의 다른 그림들, 자화상이라든가, 피에타(들라클루아 모작) 같은 작품들도 나에게는 지난 3개월 전과 지금을 비교해보는 리트머스시험지와 같은 것이었던 셈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는, 슬픔에도 어느정도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더 담담하게 직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개인사적인 느낌 외에도, (초기 네덜란드 시기부터 아를까지 이어지는) 고흐의 그림의 어떤 이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베토벤에 대해서 말한 것처럼, 고흐의 작품도 하나의 이념들이 포함되어 있다. 가령 <씨뿌리는 사람>같은 경우를 보라. 그것은 태양의 진실 속에 표현된, 노동하는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고흐가 그리고자 했던 "영원의 흔적을 지닌 사람들"이다.
한편으로는 영적이고, 한편으로는 정치적이기도 한 이러한 이념 역시 우리 활동에 어떤 '선언'이 될 수 있고, 활동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삶에 녹여낼 지향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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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국제주의, 형제애와 노동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영적이고 정치적인) 애정은 어쩌면 멀리 떨어져있는 것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인민의 해방을 위한 운동에 다양한 모습으로 결합되었던 이념적 근원들의 일부다.
그것들을 예술 속에서 사고할 수 있고, 또한 실천 속에서 녹여낼 수 있을까를, 올해 마지막으로 생각하게 된다. 우연찮은 계기로 나에게 선물한 두 가지의 예술적 체험은 아마도 2007년, "삶의 한가운데"(루이제 린저)를 지나온 나에게 어떤 방향을 말해주는 것같다.(목적론적인가? ^^;) 2007년이라는, 어떤 방식으로든 개인사적으로 가장 깊은 의미를 가졌던 한해를 정리하기 위해서 그런 것을 간절히 찾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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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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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9번]의 경우에는 확실히 그의 다른 교향곡과는 다른 고양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낭만주의적 파열이 4악장에서 감지되기 때문인지, 아도르노 식으로 말하면) 그의 다른 교향곡들에서 나타나는 통상적인 의미의 헤겔적 총체성의 닫힌 형태같은 느낌이 들지 않거든요. 물론 곡에 쓰인 쉴러의 시도 틀림없이 한 몫을 했을 것입니디만, 가끔은 [교향곡 9번]의 정서가 진정한 국제연대라기보다는 사해동포주의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합니다(^_^)......빌헬름 푸르트벵글러라는 이름 자체를 정말로 오랜 만에 보게 되었네요. 푸르트벵글러의 베토벤 [교향곡 9번] 연주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실황도 좋습니다만 (혹시 아직 들어보시지 않으셨다면) 루체른 페스티벌 실황 녹음도 무척 좋습니다(아마 1954년 녹음인가 그럴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재수 없는 인물이기는 합니다만) 카라얀의 1970년대 연주나 제가 애지중지하는 지휘자인 아바도의 연주를 더 편애합니다만.
에고, 오랜 만에 반가운 이름을 보게 되었다고 포스팅과 별 관계가 없는 덧글을 주저리주저리 남긴 것 같네요(^_^;).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시간이 허락된다면, 올해는 '독서일기' 좀 더 자주 올려주시고요. 헤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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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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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그렇군요, 듣고보니 사해동포주의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도 드네요.^^; 게다가, 흠.. 낭만적이라는 것두요. 피아노소타나 '열정' 정도를 제외하면 가장 그런 느낌이 드는 것같습니다.푸르트뱅글러는 51년 앨범만 들어봤습니다. 다른 시기의 연주와는 비교해보지는 못했네요. 하지만 그리 잘 가려듣지는 못하는 편이라, 카라얀 연주, 그리고 최근에 싸게 산 베토벤 전집에서 데이비드 진만과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고 있는데, 듣기가 더 편하더군요. 전집을 계속 듣다보니까 그런진 모르겠지만 말이죠. (사실 녹음 음질도 좋구;;)
아, 올해는 글을 더 썼으면 하는 맘은 간절한데, 정신없이 살다보니 책을 봐도 글 쓸 시간이 없다는;;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글을 쓸수는 없으니 말이죠) ^^;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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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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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연말에 친구덕에 호사를 좀 부리게 되었는데, '고흐전'도 좋았지만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도 좋더라고요. 우선 그림이 큼지막해서(^^) 좋았고, 초상화들이 참 좋았습니다. 시간있으면 한 번 가 보심이...부가 정보
겨울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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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아 맞아요, 칸딘스키전도 광고는 본적 있는데 잊고 있었네요. 빠리 퐁피두센터에서 봤던 적이 있는데, 그림이 큼지막하기는 하죠. ^^; 회화 속에 음악적 감각을 반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 그런 느낌이더군요, 색채와 형상을 연주하는 공감각적인 경험이 신기한 작품들이었던 기억이 납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