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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14
    [교안]노동자운동,역사와 미래
    겨울철쭉
  2. 2007/11/07
    [교안]자본주의란 무엇인가
    겨울철쭉
  3. 2007/08/29
    [독서]생각의 탄생
    겨울철쭉
  4. 2007/07/04
    [교안]세기의 전환과 세계 노동자운동의 역사(2)
    겨울철쭉

[교안]노동자운동,역사와 미래

지난 주 교육에 이어서 두 번째로 진행한 노동조합 간부교육의 두 번째 주제는 노동자운동의 역사와 전망. 전체적으로 조직발전 전망을 논의하기 위한 사전단계로 진행되는 교육이기 때문에, 노동자운동이 처한 현재의 조건에서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공유하기 위한 내용이 요청되는 강의였다.
(지난 교육에 대한 글은 : [교안]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참고)

교안은 아래 링크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교안2차] 노동자운동, 역사와 미래

교육의 난점들

지난 번 교육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나 자신에게 썩 만족스럽지는 않다. 어쩌면 더욱 그런데, 정리할수록 분량은 방대해지지만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추어야할지는 더 어려워지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두 시간 가량의 교육으로 노동자운동 200~300년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그 전망까지 담는다는 것은 무모한 일일 수도 있다.

몇가지 강조점을 다른 노동운동사, 노동운동 전망 교육과 달리 두려고 했지만 그것들을 상호결합시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꼭 교육기술상의 문제만은 아닌 측면도 있다. 예를 들어 평의회 운동의 역사와 현재 요청되는 사회운동적(혹은 사회변혁적) 노동자운동을 결합시켜서 이야기하기에 쉽지 않다. 이론적인 연결을 찾는 노력이 필요한 지점도 있는 것이다.

한편, 강조점의 문제에 있어서는 실제 강의를 진행하는 것이 그것을 잡아내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된다. 조합원들의 반응을 보면서, 그리고 내가 스스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어느 지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단지 교육상의 강조점의 문제만은 아니고, 실제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할 쟁점들을 인식하는 과정인데, 교육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함께 교육된다고 할까. 따라서 교안 자체는 내용이 방만하지만 실제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교안자체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진행하면서 오히려 긴장감과 속도감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교육을 준비하고 교안을 작성하면서 애초에 의도했던 것은 올해 여름과 가을에 각각 진행된 사회진보연대의 “사회운동세미나” 중 내가 맡았던 “세계노동자운동의 역사”를 쉽게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손을 대기 시작하자 완전히 새로 쓰지 않으면 노조의 기초간부교육 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급하게 새로 쓰다 보니 내용적으로 부실하거나 심지어 틀린 부분도 있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이런 주제의 교육은 좀 더 교육 시간을 여유있게 잡을 필요가 있다. 물론 애초 교육기획처럼 역사와 전망을 결합해서 진행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제의 교육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능한 경우에는) 90분짜리 교육을 이어서 두 강의를 배치하는 방법인 것같다. 이번에 내가 진행한 강의는 총 2시간10분이 소요되었다.(앉아있는 조합원동지들도 힘들었을 것이다. ^^;;)

강조되어야할 것

교안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몇가지가 있다.

일단,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교육하는 데서는 (그것이 아무리 위대한 경험이라도) 사건들의 나열을 넘어서야한다는 것이다. 사건들이 처하는 역사적 맥락을 당시의 자본주의 구조, 운동의 발전과 함께 제시하고 따라서 그것이 현재에 갖는 의미를 공유해야한다. 특히 이를 위해서는 실버의 <노동의 힘>을 참고하는 것이 유리한데, 역사적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인식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세기적인 노동자운동의 형태를 단지 ‘덜 발전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 속에서 인식하고 현재적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노동자운동사의 많은 교재, 교안들은 노동자운동의 발전을 직선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구조적 인식이 취약하다.)

운동사 부분에서는 교안의 구성방식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강조되어야할 것들도 있다.
시간상 관계 때문에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지만 여성노동자운동과 노동자운동의 젠더편향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반영되어야한다. 전망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적 시각을 결합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또한 국제주의가 강조되어야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민족주의와 결합한 역사를 비판적으로 평가해야한다. 이 부분도 시간적인 문제 때문에 충분히 강조하지 못해 아쉬운 내용. 이러한 비판을 위해서는 전쟁들을 겪으면서 노동자들이 쟁취한 “민족국가의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약이자 독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쉽게 제시해야하는데 기술적으로도 잘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평의회 성격의 노동자운동의 역사에 대한 제시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교안은 노조-당을 중심으로 운동사를 제시하는 데, 이 속에서 평의회 운동의 경험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자가 어떤 식으로 대안세계를 만드는 역량을 갖고 있는지를--따라서 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평의회운동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강조될 필요가 있는 사건들은 파리코뮌-러시아소비에트-1919~20년 독일?이탈리아의 혁명적 경험-해방이후 전평과 자주관리?인민위원회-중국의 문화대혁명 등이다. (파리코뮌이나 전평의 경험을 평의회운동의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 같은데, 검토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이번에는 일단 교육적인 측면에서 그렇게 설명한 것이기는 하지만.)

전망의 부분에서는 사회운동적 노동자운동, 대안세계화운동의 일부로서 노동자운동, 지역을 중심으로, 비정규직노동자 등 새로운 운동주체를 형성하는 것의 중요성, 페미니즘과 국제주의 등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 노조 간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인만큼 핵심은, 새로운 운동주체가 과거의 운동관행(기업별 경제주의)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전망을 열어가야한다는 것. 그것을 위한 운동의 요소들을 제시하는 것이 핵심이다.

기존 교육의 문제점

교육을 준비하면서 기존의 노동운동사 교안과 '노동운동의 전망‘을 주제로 한 교안들을 검토했다. 몇가지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노동자운동사에 있어서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사건들의 직선적인 나열인 경우가 많다. 민주노총의 교육비디오 중에 유명한 “승리의 역사 진군의 역사”라는 것이 있는데, 간단한 조합원 교육을 위해서는 좋은 방법이지만 간부, 활동가 교육으로 넘어가면 적절치 않다. 그런데 간부 정도를 대상으로 하는 교안도 그런 식이 많다. 이제까지 단계적으로 발전해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식의 제시는, 글쎄, 미신적인 경험주의라고 할까, 의지주의라고 할까. 오히려 현재 우리의 노동자운동이 어떤 위기에 빠져있다면 그 원인을 역사적으로 인식하고 또한 대안도 역사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을 텐데 말이다.

(물론 역사적 경험 속에서 ‘감동’을 느끼도록 하고 결의를 주는 교육이 있다. 박준성 선생의 ‘슬라이드로 보는 노동운동사’와 같은 것이 그런데, 그런 교육은 나름의 고유한 목표가 따로 있는 것으로 그 자체가 매우 훌륭한 교육이다. 그에 비해서 내가 진행하고자 한 것은 보다 전략을 함께 고민하기 위해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역사를 제시하는 것이라 목표상에 차이가 있다. 양자가 비교 대상은 아닌 것.)

또한 많은 경우에 “노동자운동”이라기보다는 “노동운동”에 대한 설명. 따라서 역사적으로 노동자들이 싸워왔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운동에 주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노동’을 쟁점으로 하는 운동만이 아니라, 노동자가 해왔던 투쟁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운동의 전망에 대한 교육들을 보자. 많은 노조에서 ‘관성적으로’ 진행하는 교육이기도 하다. 특히 노조의 공식교육들은 연초에 만든 노조의 연간 사업계획(+정세분석)을 적당히 짜깁기 한 것들이 많은 데, 노조의 사업계획을 집행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될 때에는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고 해도, 교안은 나열적인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가 위기라고 하면서 이런저런 지표를 제시하다가 비정규직 확산 등 노동자의 위기를 말할 때에는 연결고리가 없이 그냥 언급. 그러다가 노동운동의 과제로는 신자유주의 반대, 비정규직 철폐, 전쟁반대.. 대체 이런 식의 투쟁과제를 나열하는 데 이것들이 현재의 자본주의로서의 신자유주의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혹은 각자의 운동과제끼리는 무슨 연관이 있는지가 제시되는 경우가 드물다. 이런 식의 교육은 개별의 투쟁과제를 소개하는 것일 수는 있지만, 그들이 과연 “어떤 방향”인지를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분명하다.

===
내가 작성한 교안도 한계가 분명하다. 특히 강의에서 강조한 내용이나 설명한 ‘구조적 원인’을 제대로 교안에 담은 것도 아니고, 내가 비판한 ‘역사적 사건들의 나열’이 나의 교안에서도 반복된다. (시간이 없어서 부분적으로 다른 사람의 교안의 내용을 카피한 경우도 있다.) 따라서 추후에 다른 기회가 있다면 보완되고 수정될 필요가 있는 것들. 필요한 동지들이 있다면 직접 해주어도 좋을 것 같다. 노동자 교육을 내용적으로 혁신하기 위한 토론을 할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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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안]자본주의란 무엇인가

노동조합 현장간부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집중 교육 프로그램 중 “우리가 사는 사회, 자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진행한 교안. 전체 교육 중에서 내가 맡은 것은 두 개의 강의인데, 이것과 함께 다음 강의는 “노동운동의 역사와 전망”이라는 주제.

참고삼아 필요한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다운받을 수 있다.
교안1차자본주의란무엇인가.hwp

사실 한계가 많은데, 게으르다보니 시간을 두고 준비하지 못한 것도 문제고 교육을 마치고 나니 초점을 정확히 맞추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의 강의에서 전달해야할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다소 복잡하게 구성된 것도 원인 중에 하나일 것이다.

교안의 개요

교안은 자본주의의 역사와 구조를 비정규직노조 현장간부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교안이 포함하는 내용은 이에 따라서 : △ 자본주의의 역사(아메리카 헤게모니 이전까지) △ 자본주의의 구조(자본의 증식과 착취) △ 자본주의와 계급투쟁의 정치 △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와 신자유주의(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본 남한자본주의의 발전과 정치) △ 신자유주의의 특성 △ 자본주의의의 미래 등에 대한 주제를 포괄한다.

특히 이러한 내용들을 설명하면서 각 주제가 구조적으로 관련되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계급투쟁을 필연적으로 만드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를 설명하는 가운데 신자유주의의 파괴성과 함께 붕괴의 필연성을 제시하면서, 노동자계급이 경제적인 방어투쟁만이 아니라 대안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투쟁으로 나가야한다는 점까지 제시하는 것이 목표.(그것을 위한 운동의 내용은 다음 주 강의의 주제다.)

교육의 난점들

강의를 진행하면서 주로 어려웠던 점이 몇가지 있다.

첫째, 역사적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역사와 자본축적의 일반적 법칙을 통합해서 설명하는 것. 자본주의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시종일관 결합하는 것은 별로 가능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특히 자본주의의 출현과 초기의 상업자본주의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동역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런 점이 있다. 이런 측면은 역사적 자본주의론을 비판하는 논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역사와 계급투쟁을 “선명하게” 연결시키는 데 난점이 있다는 측면과도 관계가 있다. (여기서는 “교육적인 효과” 때문에 무리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아니면 아예 별개의 주제로 진행해야하는 것일까?

둘째, 노동가치론과 이에 따라 잉여가치의 추출매커니즘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것은 교육을 함께한 간부조합원들이 제조업 사업장이 아니기 때문에 설명의 난점이 있었던 측면도 있겠지만, “노동자의 상식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노동만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교육의 방식, 논리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안을 작성할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실제로 진행하는 과정에서는 조합원들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설득력의 공백이 어느 지점에서 발생하는 지 당장 느껴진다.)

특히, 잉여가치에 대한 회계적인 설명을 지양하려다보니, 보통 잉여가치 추출의 도식으로 설명하는 “노동일 안에서 몇시간은 지불된 노동이고, 몇시간은 부불노동이다”라는 식의 설명을 진행하지는 않으려고 했던 측면이 있었다. 잉여가치를 양적인 측면으로 환원하는 회계적인 설명은 교육적인 목적에서 쉽게 설명할 수 있기는 한데, 별로 내용적으로 옳지는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무엇보다 잉여가치 추출은 계급투쟁이며 ‘생산관계’의 문제.)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경제학비판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교육적인 효과를 달성할 수 있는 설명방법이 무엇일지를 고민하게 된다.

셋째, 강의의 시간이나 분량 상 이데올로기 비판은 넣지 않았는데, 이것이 없이 계급투쟁에 대해서 특히 국가장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별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한된 시간, 분량 안에 결합할 수 있을까가 문제가 된다. 자칫 대중교육에는 적합하지 않게 한없이 학술적이 되거나 긴 시간을 요구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보니, 이제까지 마르크스주의를 도식화하는 이론과 설명방법들이 괜히 나타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느낄 수 있다. 스탈린주의 교과서의 도식들은 매우 깔끔한 설명이 가능하게 한다. 문제는 그것이 교육적인 목적을 넘어서 (물론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문제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론 자체를 도식화하고 왜곡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론적으로 올바르면서도 설득력있게 대중 교육이 가능한--이 말은 이론이 이를 통해 대중이데올로기로 전화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방식이 있을 것인가가 문제. 그것이 계속 연구되어야한다.

유사한 주제의 기존 교안들에 문제점

이런 점은 교안을 작성하면서 검토한 기존의 교안들을 보면서도 느낀 것이다. 교안들은 자본과 잉여가치에 대한 회계적인 설명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다소 도식적으로 자본주의 역사를 설명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공황을 설명하면서, “과잉생산 때문에 이윤율 저하가 나타나고 그래서 금융위기가 발생한다”는 식의 설명하다가 생산부문간의 불비례까지 언급하고 “공황의 극복을 위해 자본주의는 전쟁, 탈노동정책(???)을 취한다”는 부분도 있는데, 답답해질 지경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설명에서는 부정확한 개념들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고, 특히 사태의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보니 빈곤화(혹은 양극화), 실업과 비정규직 확대 등의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결과가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 한 채 단지 나열한다. 따라서 투쟁에 있어서도 결과에 대한 투쟁까지를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으로 제시하지만 정작 금융세계화(현시기의 자본주의 자체)를 넘어서 대안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정치적인 전망을 제기하지도 못한다.

비정규직 철폐투쟁을 그렇게 강조하지만 정작 그것이 “왜”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인지,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 이후를 준비하기 위한 투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공백으로 남게 된다.

보완되면 더 의미있을 부분들

한편, 강의를 진행하면서 좀 더 보강하면 의미가 있겠다고 느낀 측면들도 있다.(조합원들이 관심을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용 중에는 20세기 자본주의 역사와 함께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도래했는지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에서 세계자본주의의 역사와 함께 남한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해서도 결합해서 강의를 진행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동학과 정치를 함께 설명하게 만든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경제발전, 한일수교나 유신, 전태일 열사의 분신, 부마항쟁-10/26-광주항쟁과 같은 정치적 사건, 전두환의 집권과 80년대 경제위기와 85년 이후의 3저 호황과 87년 대투쟁, IMF 구제금융위기, 대선 등까지 조합원들이 살아가면서 직면한 중요한 정치, 사회적 사건들의 원인을 제시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설명의 결론은 노동자운동의 정치적 세력화(민주노동당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와 계급재형성, 대안사회 건설을 위한 투쟁 등) 조합원들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역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연령대가 높은 조합원들이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좀 더 보완되면 재미있을 부분.

자본주의 사회 계급투쟁의 동역학을 통해서 계급적 단결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 교육을 함께한 비정규직 노동자들 자신의 운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할 수 있다는 점도 풍부하게 보완하면 좋을 부분으로 생각된다. 자본주의 사회가 계급으로 나누어져 투쟁할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설명을 넘어서, 프롤레타리아의 분할과 그 반경향, 자본주의의 변화와 함께 형성되는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대표성과 비정규직 노동자 운동에 대한 설명 등.

이렇게 몇 가지 난점을 보완하고, 긍정적인 부분을 다듬는다면 더 좋은 교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마 난점들은 더 있을 것이고, 몇몇 부분에 이론적으로 정확치 않은 부분들도 있을 텐데 함께 점검할 필요가 있다. (게을러서 언제나 할지는 모르겠지만 ^^; 아마 언젠가 다른 교육을 할 기회가 있으면.)

조합원, 간부교육은 할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특히 매번 실제로 진행하면서 보완해야할 지점이 어디인지 등을 느낄 수 있다. 또 조합원들의 유언의 혹은 무언의 반응들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이번 교육에서도 (교육주제와 무관하기는 한 내용까지도 포함해서) 광주시청 비정규직 조합원동지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는 기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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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생각의 탄생


생각의 탄생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외 지음, 박종성 옮김 / 에코의서재


‘생각’에 대해서 생각하는 책. 사람의 사고가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방식들을 몇 개의 개념(생각도구)들로 정리한다. ‘생각하기’에 대한 매뉴얼이라고할까.

이 책이 제시하는 생각도구들은 모두13가지.
관찰, 형상화, 추상화, 패턴인식, 패턴형성, 유추,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차원적 사고, 모형만들기, 놀이, 변형, 통합 등이다.

대상을 인식하고 개념으로 다듬는 것에서 시작해서, 그것을 다른 차원의 인식들과 결합하고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는 과정까지를 13개의 생각도구를 이용해서 제시한다. 이런 과정은 모두 하나의 두드러진 목표, ‘창조성’을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저자들은 전인적 교육을 부활시켜야한다고 주장한다.(이 책은 ‘생각도구’들에  대한 책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교육제도에 대한 많은 제안들을 담고 있다.) 개별 학문들 사이에 벽을 쌓고 분리해서는 창조적 사고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예술과 과학은 교통해야할 뿐 아니라, 예술가는 과학자가, 과학자는 예술가가 되어야한다. 이 책의 저자들이 예를 드는 수많은 학자, 예술가, 사상가들은 그러한 주장을 확인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이러한 통합과정은 서로 다른 영역의 '개념'들이 만나는 과정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개념들과 감성이 만날 때, 심지어 몸과 만날 때, 그것은 다른 효과를 만들어낸다. 어떤 창조적인 과정이라는 것이 순수하게 상상의 산물은 아니며, 오히려 낯선 것들이 만나는 가운데 만드는 고유한 효과라는 것을 말하는 것같다. 마치 상이한 문명들이 만나는 변경지대에서 창조적인 것들이 형성된 것처럼 말이다.

이런 방식의 ‘생각도구’들은 순수한 개념들 사이의 운동으로는 사고가 뻔한 결말에 도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능력.

이 책을 읽으면서 13가지의 ‘생각도구’만큼 중요하게 제기되는 쟁점, 창조성과 그것을 육성할 수 있는 교육제도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다. 현대의 대중교육은 어떤 창조성을 가진 ‘전인’을 육성한다기 보다는 노동시장의 상황(이중 노동시장)에 맞는 노동력을 길러 내는 것에 중심이 가있다.

따라서 이 책이 제기하는 ‘전인’이란 전-신자유주의적인 어떤 지식인모델이거나 혹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요구되는 엘리트일 수도 있다. (책이 나온 시점이나 책에 열광하는 독자들을 봐서는 후자일 가능성이 많지만.) 아마도 여기서 배제된 사람들은 불안정노동시장을 구성하는 현대의 프롤레타리아로, 그들에게 창조성이란 별로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요구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한편으로는 엘리트 교육을 위한 방법론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창조적인 전인’이라는 이상이 단지 부르조아, 신자유주의 엘리트들의전유물일 수는 없다고 다시 주장해야한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창조성이란 어떤 거추장스러운 무엇이 아니라 삶을 실현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은 물론이려니와, 창조성이라는 것이 ‘실현’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물질적 조건이 구축되어야한다.

여기서 우리는 상이한 것들이 마주치는 과정을 통해서, 무엇인가 창조적인 것이 형성될 수 있다고 할 때, 저자의 13가지 생각도구에 더해서, 하지만 ‘부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핵심적인 것 하나를 추가할 수 있다. 바로 ‘노동’이다.

노동을 통해서, 개념들과 미적인 요소들을 현실과 만나게 하고 실현하고 변용할 수 있다. 노동 속에서 창조성은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저자들에게 ‘노동’이라는 항목이 이상하게도 빠져있는 것은 저자들에게나, 역사적으로나 창조적인 무엇은 노동과 분리된 엘리트들의 활동으로 정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창조성을 위한 사고의 도구이자, 그것을 실현하는 요소로서 노동이 강조될 수 있다면, 또 한편으로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창조적일 수 있도록 하는 현실의 조건(작업장과 교육현장에서)이 사고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은 모든 사람에게 전업화가가 되라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한편으로는’ 화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러스킨은 1850년대의 런던의 노동자들에게 데생을 가르쳤는데, 이는 데생을 통해서(그림을 직접 그리는 것을 통해서) 사물을 더 풍부하게 보고 느끼고, 그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러스킨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목수를 화가로 만드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목수로서 더 행복하게 살게하려는 것이다”, 혹시 소질과 의지가 있다면 화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에서 재인용)

이렇게 노동자들과 예술, 과학이 만날 때,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유산들과 창조성이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노동하는 대중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러스킨이 150년 전에 시작했던 일이 아직도-아직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도 말이다.


===
이 책에는 창조적인 사고의 사례로 여러 인물을 드는 데 그 중에는 헬렌 켈러도 있다. 그녀는 활동 과정에서 공산주의자가 된 것으로 알려져있고, 메카시즘 광풍에서 희생되기도 했다. 그녀가 한 것으로 알려진 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찾아보니 그녀가 한말은 아니고, 브라질의 해방신학 계열의 Helder Camara주교가 했던 말이라고 한다. 여튼, 훌륭한 어구가 다시 떠올랐기 때문에 인용.)

"When you give food to the poor, they call you a saint. When you ask why the poor have no food, they call you a communist."
-- Archbishop Helder Camara, Brazilian liberation theolog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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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안]세기의 전환과 세계 노동자운동의 역사

다소 거창한 제목의 교안. (교안인 만큼 역시 짜집기 텍스트이고, 특히 아리기의 짜집기)
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세미나의 일환으로 진행된 강연용입니다.

교안 텍스트
텍스트는 작년에 진행했던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의 강연의 텍스트를 수정해서, 특히 아리기의 노동자운동에 대한 지적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하려니, 목소리도 잘 안나오더군요; ㅎ (그러나 무엇보다, 함께한 분들과 특히 오늘도 오셨던 농민운동하시는 선배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세기의 전환과 세계 노동자운동의 역사"라는 내용으로 진행하면서 참 벅찬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무엇보다 역사적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그 속에서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따라서, (물론 1강에서 진행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러한 맥락에서 통합적인 강연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강연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러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현재의 노동자 운동의 위기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지, 따라서 어떠한 혁신이 필요한지를 사고할 수 있겠죠. 다들 결론을, 비정규직 운동이라느니, 사회적 합의주의 반대라느니, "쉽게" 이야기하지만 "왜"라는 질문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20세기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역사적 반성 속에서 던지지 않는 현실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저 역시 내용을 진행하면서, 그럼 대안은 무엇이냐라는 부분에서 갑갑하더군요.(그러니 듣는 분들은 얼마나 더 그랬을까요;;) 발리바르를 따라 '네 번째 공산주의' 혹은 대안세계화운동..이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의 실제의 내용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참 막막한 것이 사실입니다. 텍스트에 인용한 몇개의 문구와, 발리바르가 "공산주의 이후에는 어떤 공산주의가 오는가"라는 텍스트에서 이야기한, 국제주의와 인간학적 차이(지적-성적-문화적 차이)에 대한 사고가 필요하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종별적인 것의 목록에 무엇이 포함되어야할 것인지에 대한 소묘일 뿐이라는 점에서 대안에 대한 사고와 토론은 더 멀리, 더 구체적으로 진행되어야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대중운동들 속에서 발견되고 사고될 수 있을 텐데, 어려운 것은 그런 지점이죠.
다만, 그런 대안세계에 대한 전망까지는 아니지만, 노동자운동의 전망, 미래에 대해서는 몇가지 의미있는 흐름들은 남한에서도 항상 있어 왔습니다. 더구나 최근의 중요한 투쟁들이 노동자운동, 혹은 노조운동의 표상을 변화시키는 노력을 어렵지만 힘있게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조금 떨어져서 보기 때문에 더 잘보이는 지도 모르겠군요.)

최근 금속노조의 FTA반대총파업, 이랜드 상암점을 중심으로 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 국민연금 개악저지투쟁 등은 대중적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전형적인 표상이던 "대공장의 전투적인 경제투쟁"이라는 상에 생경한 충격을 주는 투쟁이라고 봅니다.

노조운동이 '다른' --계급적 이해에 관계되지만 사업장의 경제적 이해에 제한되지 않는, 신자유주의 개혁에 반대하는 사회운동적인-- 투쟁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비조합원 대중들 뿐 아니라, 노조의 조합원들도 변화시키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이러한 투쟁의 흐름이 강화되면서, 노동자운동의 지배적 표상을 내-외적으로 변화시켜나갈 수 있을 때 새로운 가능성이 더 가까와지겠죠. 그러나 여전히, 모호한 '대안세계'의 상을 대중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뒤따라야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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