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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15
    [독서]성경을 해방시켜라
    겨울철쭉
  2. 2008/01/13
    [독서]금융세계화와 한국경제의 진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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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7/12/13
    [독서]대한민국 병원 사용설명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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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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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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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빅토르 세르주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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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09/05
    [독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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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09/05
    [독서] 88만원 세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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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08/29
    [독서]생각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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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성경을 해방시켜라


성경을 해방시켜라
존 쉘비 스퐁 지음, 한성수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기독교 성경을 몇번이고 읽어보려고 했지만 나에게는 사실 몇장을 넘기기가 고역스럽다. 구약부터 읽으려면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고, 신약부터 읽으려고 해도 도대체 "그래서 말하려는 게 뭐지?"라는 생각이 이내 들기 시작한다. 생각해보면 구약은 다른 민족들의 그것처럼 '신화'일 뿐이고, 그런 측면에서 읽으면 될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것이 문자 그대로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나조차 그 프레임에 갖혀있는 셈이다. 신약에 대해서라면 ("무조건 믿어라"가 아니라) "어떻게 읽어야할지" 알려줄 사람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다.(그것을 정직하게 '신화'로 읽는다면 우리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상징들과 무의식을 사고할 수 있는 것처럼, 성경에서도 그런 소득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 개신교 교회의 추악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기독교라는 종교에 무엇인가 배울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성경에 다가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화와 잠언 속에 어떤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는 이가 필요하다. 천지창조와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문자 그대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그런 억지 말고.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같은 무신론자도 기독교를 비로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고, 존중할 수 있게 만든다. "머리가 거부하는 것은 결코 가슴이 예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저자는 종교적 교의도 맹신의 대상이 아니라 사고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온갖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가득한 것으로 보이는 성경을 어떻게 머리가 거부하지 않게 할 수 있단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문자 그대로 성경을 이해할 경우 그런 허무맹랑함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구약 안에는 상이한 성격의 신화들이 섞여있고 따라서 대표적인 이야기인 창세기와 아담과 이브 신화는 서로가 일치하지도 않는다. 구약은 기원전 900여년 경부터 문자로 고정되기 전까지 수개의 서로 다른 신화가 융합되면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고대 유대민족의 상이한 기원과 역사적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약은 "역사적 문서"다.

한편, 신약의 기원도 복잡하다. 그것들은 적어도 예수 사후 30년이 지나서야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고, 그나마 상이한 분파들이 다른 뉘앙스를 갖고 기록했다. 입에서 입으로, 분할된 종파들 안에서 전해진 예수의 가르침이 일관되게 제시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심지어 예수탄생과 부활의 에피소드도 각각의 복음서가 전혀 상이하게 전하고 있다.) 신약은 예수라는 하나의 기원에서 출발했지만 상이한 집단에서 다른 성격으로 발전한 종교운동의 기록을 모은 것이다. 유대인 기독교도에게(마태복음), 소아시아의 비유대인 기독교도에게(누가복음), 로마라는 세계도시의 기독교도에게(바울) 예수의 가르침은 다르게 변용될 수밖에.

그렇다면 '역사적 문서'인 성경의 가르침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고대문서의 꾸러미에 불과할까?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성경, 예수의 가르침이 가지는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각자의 입장에서, 역사적 경험에서 변용되지만 여전히 보전되는, 오히려 그러한 역사적 경험에 따라 확장될 수 있는 예수의 가르침이 있으며, 따라서 2000년이 지난 우리에게도 예수는 여전히 현재적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현재적인가? 저자에 따르면 예수가 당대에 그렇게 많은 추종자를 모았으면서도 동시에 증오받고 살해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는 것, 그것은 제도적이고 관습적이며 종교적인 안전장치들을 무장해제시키면서 제기되는 것, 어떤 이도 배제하지 않는 보편적인 사랑-인류애, 보편적 공동체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이였던 것이다. 그것은 이방인들, 문둥병자, 창녀, 세금징수원, 도둑들에게도 열린 것이다.(현대라면 이주노동자, AIDS감염인, 성노동자 같은 하위계급-소수자들일 것이다. 물론, 현재의 한국 교회는 이들을 '절멸'하고자 할 것이다. 이들의 '근본주의'는 얼마나 反-그리스도적인가!) 따라서 그것은 지배자들에게 격렬한 증오를 받고, 또 그런 소외된 자들에게 수용되고 확산된다. (이런 내용을 통해서 예상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인식은  정치적으로 좌파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유대신화의 인격적이고 부족적인 신이 아니라 보편적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무한하고 영원한 정신, 누구나 만날 수 있고 어디에나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된다. 그것은 인격적인 신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스피노자의 신, 세계 자체에 가깝다. 각자의 정신이 고양되고 무한히 확장될 때 만날 수 있는 우주-존재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신을 만나는 경험은 "존재의 심리학"에서 매슬로가 말하는 "절정경험"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자신을 대면함을 통해서 세계를 만나고 고양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매슬로 역시 절정경험의 하나로 종교적 경험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영지주의적이기도 하다. 물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이단'이라고 펄펄 뛸 일이다.)

저자 스퐁의 시도는 이런 점에서 어찌보면 위험하다. 그것은 나같은 무신론자가 성경을 역사적 문서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종교를 강력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구조--신비적 외양을 벗겨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문자주의를 거부한다는 것 뿐 아니라, 이런 점에서서도 기존 교회의 강력한 거부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역설적인 것은, 예수의 가르침은 이렇게 합리적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신비화될 때 물질적-이데올로기적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예수의 가르침과는 별로 상관없는 주장을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여전히 스퐁의 저작에도 불구하고 문자주의-근본주의 기독교 보수세력들은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명박이 소망교회 신도들을 청와대로 불러들이고 있는 마당에 그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이 무슨 상관이람!)

그러나 스퐁과 같은 방식으로 기독교를 이해한다면, 위대한 예술가들의 종교적 색채를 갖는 걸작들이 왜 "영적인" 감동을 주는 지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허무맹랑한 신화에 빠지지 않더라도 그러한 숭고한 경험들을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미신적인 기복신앙이 아니라도 다른 종교적 경험이 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아마도 나 같은 무신론자들은) 앞으로도 교회 신도들처럼 신이나 종교를 여전히 믿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예수에게서 시작된 2000년의 가르침에 대해서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다. (2000년 전에 단 한번 발생했을 뿐 아니라 위대한 예술가들이 재현해온 것들까지.) 그리고 덕분에 문자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이며 미신적인 신자들이 아닌 기독교 신자들과는 열린 대화를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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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금융세계화와 한국경제의 진로


금융세계화와 한국 경제의 진로
조영철 지음 / 후마니타스

 

이명박이 당선된 이후에 재벌에 대한 규제완화를 비롯한 "친기업정책"이 쏟아지고 있다. 이런 정책들은 온통 재벌, 대기업에게 유리한 것들로 채워져있다. 이명박의 정책패키지는 이전 정권들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더욱 급진화시킬 것이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명박의 경제정책들은 "친기업적"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상당히 모순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모순은 조만간 작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을 상징하는 인물이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국가경쟁력강화특위장인 사공일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발전국가 하에서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인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의 재등장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발전국가를 재도입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왜 그런지, 그것이 성공할 수 있는지를 이 책을 통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사공일은 5공 하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한 인물이고, 3저 호황 시에 재경부 장관이었다. 그가 주도하는 '세계경제연구소'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씽크탱크인 국제경제연구소(IIE)와 긴밀하게 연계해왔다.)

 

금융세계화에 대한 실증적 분석으로 채워진 이 책은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금융세계화의 역사에서 시작해서 미국-독일-북유럽 모델을 검토한다. 한국자본주의에 대한 평가와 진로가 이 책의 또 한 축인데 꼼꼼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책을 소개하는 것이 여기서 목적은 아니니 몇가지 눈에 띄는 시사점을 언급해보자.

 

우선, 금융구조, 기업지배구조, 노사관계 제도/관행을 포함하는 경제체제는 각각이 결합되어 있어서 각각 분리해서 몇몇 개별적인 제도를 '도입'하는 방식으로 적용되기는 대단히 어렵다는 점이다.(혹은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북유럽이나 독일에서 산별노조-중앙교섭은 정부 차원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과 복지제도뿐 아니라 기업이 자금을 주식시장이 아니라 주거래은행을 통해서 확보한다는 사정까지 연관되어 있다. 주주자본주의의 취약성은 기업의 장기적 성장에 이해관계를 갖는 은행자본과 종업원(경영진과 노동자)들이 타협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거시적 차원에서의 타협도 가능하다.)

 

작년부터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던 "사회연대정책"과 같은 경우는 북유럽모델 경제정책 패키지의 일부인 "연대임금정책"의 한국판 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문제는, 이런 정책이 스웨덴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경제구조가 달라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연대임금정책을 "노동자양보론"이라고 비판한 입장들도 정당하긴 하지만 더 나가서 말할 필요가 있다. 요컨데 그렇게 제기되어서는 "불가능"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의 문제는, 민주노동당이 "국민연금 개혁"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의할만한 정책대안을 "사회연대전략"이라는 운동전략 수준으로 비약시켰다는 점에도 있다. 물론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주체들의 입장은 다분히 논쟁적이고 '의도적'이었지만 말이다.)

 

물론 남한이 미국과 같은 조건이 아닌 이상, 미국식 경제체제로 수렴될 것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구조의 변화는 전면적인 것이어야 그나마 '사소한' 개량주의 정책, 사민주의적인 정책이라도  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물론 나의 입장에서는, 세계자본주의의 생산적 팽창이 일어나던 시기에 가능했던 그러한 경제모델이 금융세계화 국면에서, 반주변에서는 실현되기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경제체제를 전면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에 동반되지 않은 채 제기되는 "사회연대전략"과 같은 것은 허망할 수밖에.

 

둘째로, 주주자본주의의 전면화라는 방식의 금융화된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에 조차도 "역사의 필연적인 완성"은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적으로도 (심지어는 영미에서도) 주주자본주의가 전면화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을 뿐더러, 현재에도 유럽이나 일본 등에서는 상당히 독자적인 모델의 자본주의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 물론 이들이 영미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인 구조가 바뀌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금융세계화를 미국식 주주자본주의의 전면화로 이해하고, 따라서 (쌍둥이 적자로 유지되는) 미국경제의 유지불가능성을 곧 금융세계화된 자본주의 자체의 유지불가능성으로 등치시키려는 유혹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미국경제의 붕괴가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심각하고 결정적인 위기가 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지만, 앞으로 발생할 위기의 원인이 모든 국가의 경제모델이 미국식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금융세계화가 심각하게 진전되고 있으나 미국과 같을 수는 없고, 따라서 한국의 조건에서 제기될 수 있는 구체적인 경제체제 대안이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구체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기껏해야 다른 자본주의 모델을 대안사회 모델로 제기하는 것과 같은) "정책대안"이라는 방식으로 제기되어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남한"이 아니라 "세계"자본주의 체계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변혁적이고 국제주의적인 대안이 제기될 필요가 있다. 요컨데 일국적 모델이 문제가 아니다.

 

세째로, 이런 맥락에서 한국에서의 정세를 진단하고 대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책은 특히 한국전쟁이후 남한 자본주의의 역사를 국가의 개입이라는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서술하는데,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90년대와 2000년대, 현재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이명박의 경제정책은 모순된 요소를 포함한다. 한편으로는 금융허브 구축, 금융자유화를 추진하고, 또 한편으로는 금산분리완화, 출총제완화, 공정위 폐지(축소)와 같은 친재벌적인 금융정책, 그리고 대운하건설과 같이 경기부양을 위한 (아마도 결국은 재정정책이 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편, 몇몇 전략적인 업종에 대해서는 산업정책도 시행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금융자유화는 재벌의 왜곡된 지배구조 보장과 충돌하고 과도한 재정정책은 거시경제 측면에서 금융자본의 이해를 침해한다.

 

아마도 지배계급 입장에서는 과거에 찬란한 영광을 안겨준 발전주의 전략(산업정책과 금융정책, 재정정책)과 현재 국제적인 자본주의의 "대안"인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모두 결합하고 싶겠지만 그것은 "동그란 네모"와 같이 불가능한 전략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합해주는 것은 "친기업정책"이라는 정치적 선언일 뿐이지만 조만간 정책적 실패 앞에서는 그런 수사는 별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결국 이명박 정권은 한 쪽의 선택을 해야할 것이라는 것인데, 그 지점에서 동요하다가 임기응변을 '실용주의'로 포장할 가능성이 많다.(이명박도 노무현만큼 럭비공처럼 튀어다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대중-노무현이 오히려 정책적으로 일관되었던 셈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권의 (예정된) 실패가 가지는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예상하는 것이 앞으로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는 우리가 그것을 대중들에게 어떻게 폭로하고 어떤 대안을 낼 것인가와도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재벌옹호 정책을 신자유주의 논리로 비판하는 (참여연대 식의) 비판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비판은 위에서 "어떤 다른 대안"과 함께 제기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책의 저자의 주장이 내가 이제까지 언급한 이런 것들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민주적 시장경제"를 주장하고 이를 위해서 정책정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일단 통합신당은 불가능해 보이니, 결국 민주노동당이 그러한 역할을 자임할 것인가?) 미국경제의 위기를 예상하는 가운데 내포적 성장전략을 채택하고 조정시장경제와 (숙련된 인적자원을 활용하는) 고진로 전략으로 정책을 전환하자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에 곧바로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저자가 제기하는 수준의 구체성을 가진 논쟁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장점은, 금융세계화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서 대안에 대한 논의도 구체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한편, 이런 입장과 지난 대선에서 가장 가까웠던 것은 창조한국당 문국현과 한국사회당 금민이었다. 노동자운동 안에서도 "새흐름"의 일부 분파는 이와 유사한 입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향후에 노동/사회운동 안에서  고전적인 좌-우 구분이 흐트러질 것을 예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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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대한민국 병원 사용설명서


대한민국 병원 사용 설명서
강주성 지음 / 프레시안북

 

 

책을 쓴 강주성씨는 참 독특한 사람이다. 사회운동과는 거리가 먼 생활인이던 그는 백혈병 환자가 된 후 우리나라 의료체계의 모순을 온몸으로 경험한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자기몸 하나 간수하기도 급급했을 텐데, 그는 동료 환자들과 함께 이 모순에 싸우기 위해 집단적인 힘을 모았다. 다행히 병을 고친 그는 이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 한국의 보건의료 체제와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지금은 '건강세상네트워크'라는 보건의료운동 단체에서 일한다.)

 

그래서 그가 쓴 이 책은 죽음의 문턱, 가장 절박한 시기에 병원을 '사용'한 사람이 느낀 절박함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런만큼 치열한 대안에 대한 고민도 담겨있다. 그 절박함은 자신은 물론, 돈이 없어도 살아남을 권리를 주장하다가 먼저 세상을 뜬 동료 환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한국의 보건의료 체제의 문제, 의료기관의 부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고발하는 것을 넘어서 매우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제도를 어떻게 바꾸어야하는가에 대한, 환자(따라서 보통의 시민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현장에서의 시각으로 탄생한 대안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아주 더 실용적으로, 환자의 입장에서 실제 병원을 이용할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 '매뉴얼'을 담았다. 사회적인 대안과 개인적인 대책을 모두 담은 셈이다.

 

저자는,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운동은 물론 개인들이 병원을 이용할 때 병원에게 원칙대로 할 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운동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자기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병원을 당혹스럽게 하고 귀찮게 하는 것도 그들을 강제하는 큰 힘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병원이 꼼짝할 수 없는 '사소한 것들'(그러나 환자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것들)이 너무나 많은 현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순들은 병원이 사실상의 영리기관으로 자본의 논리에 따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부가 그러한 자본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을 개혁이라고 생각하는, 황당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급기야 한미FTA는 최악의 상황을 몰고 올 것이라는 것을,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은 단지 '보건의료 부문' 혹은 '의료개혁'에 대한 책만은 아니다. 제한된 영역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이 부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필연적으로 전체 사회운동과 관련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부문운동'이라 불리는 것이 '부문'에 갇히지 않는 사회운동이 되는 방식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보건의료 영역의 이러한 중요한 쟁점들을 모르고 있던 내가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주장하면서 켐페인 사업을 하기 전에 노조의 조합원들과 이런 내용을 교육사업 등을 통해서 공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삶의 문제, 생명과 직결된 문제가 어떤 식으로 사회운동이 쟁점들과 연관되는지, 우리가 평등한 의료체계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왜 해야하는지를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으로부터 이른바 노조의 '사회공공성 투쟁'이라는 것도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지하철 선전전 이전에 말이다.)

 

병원을 이용할 수 밖에 없는, 그리고 가난한 우리들에게 이 책은 실용적인 매뉴얼이면서 운동의 지침서이기도 하다. 다른 운동영역들에도 이런 식으로 글을 쓰고 대중들과 대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프레시안에서 처음 낸 책이다. 프레시안에 책 소개 기사가 잘 실렸다.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71116143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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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존재의 심리학


존재의 심리학
아브라함 H. 매슬로 지음, 정태연.노현정 옮김 / 문예출판사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가 이 책에서 한 주장은 주로 "인사노무관리" 서적에 주로 도식으로 인용된다. 사람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나누어 위계화한 그래프인데, 한 번 쯤 본 적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 안전 욕구(sefety needs), 애정과 소속의 욕구(love and belongingness needs), 자기 존중의 욕구(self-esteem needs), 그리고 자아 실현의 욕구(self-actyalization needs)가 등장한다. 이들 그래프에서는 아랫 단계가 충족되어야 위에 단계가 가능하다고 인용하면서, 조직 안에서 자아실현의 욕구를 어떻게 창출(따라서 기업조직에 충성)할 것인가를 검토한다.

하지만, 정작 매슬로의 핵심적인 주장은 이러한 인용의 도식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목적에 있어서도 조직에 충성스러운, 혹은 창의적이고 따라서 효율적인 인간을 만들기 위한 것과도 다르다.

오히려 매슬로는, 자기실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위의 욕구들이 부차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실현을 통해서 보다 건강하고 고귀한 인간형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 핵심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절정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절정경험'은 자기 자신과 세계-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몰입의 순간이다.)

매슬로에게 자기실현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경이로운 가능성과 심층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동기는 결핍을 채우기위한 욕망이라기 보다는 존재를 실현하기 위한 욕구가 된다.(매슬로는 이런 맥락에서 프로이트를 '결핍의 심리학', 자신의 주장을 '존재의 심리학'이라 부른다. 책의 제목은 이렇게 나왔다.)

사실, 이 책에서 매슬로의 주장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론'이라고할 만큼 근거를 갖거나 논리적인 체계를 갖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책 전체의 내용은 '묘사'들에 불과하고 기껏해야 묘사에 대한 설명에 불과하다. (저자도 어느 정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는데, 자신의 주장을 발전시켜 동료학자들이 이론적으로 증명해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구절들이 등장한다.) 물론 '설명적'인 부분에서도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정신분석 혹은 심리학적인 상식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흥미로운 내용들은 많다. 설득력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떤 이론적인 동기라기 보다는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이 책의 주장, 즉 자신과 대상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순간(매슬로는 '절정경험'이라고 부른다.)이 존재하며, 이를 통해서 자신을 더 발견하게 될 때, 사람은 더 높이 고양된다는 것(매슬로는 이를 지속적인 과정으로서 '자기실현'이라고 부른다)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 블로그에 여행기를 남기기도 했지만, 최근에 여행에서 경험한 강렬한 자기고양의 순간들은 매슬로가 묘사하는 '절정경험'과 대단히 유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의 효과--자기존중과 고양, 신경증 증세의 해결 혹은 완화--도 그렇다.

여행에서 그 경험들은, 상당한 기간 동안 전혀 새로운 것들을 만나오면서, 그리고 나 외에는 대화할 사람이 없는 곳에서 불현듯 나 자신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눈물이 나는 아픈 것이기도 했지만 어느 때에도 경험하지 못했을 행복을 동시에 느꼈던 것이다. 암스테르담의 고흐 미술관에서, 베를린 아테 미술관의 네페르티티 상 앞에서, 스위스의 등산열차, 절벽 앞에서, 피렌체의 두오모 쿠폴라 정오의 종소리에서, 피사의 다리 위에서, 아테네 리카비토스 언덕의 야경 앞에서, 등등. (다른 어떤 이유보다, 이런 경험이 짧은 기간에 집중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지난 여행은 내 삶에 최고의 시간들이었던 셈이다.)

(한편, 매슬로가 언급하는 것처럼 그런 절정경험은 보통 사람들에게 연애/사랑에서 자기고양과 대상에 대한 직접적/총체적 인식으로 나타난다. 나에게도 이와 비견할 수 있는 것은 지난 연애들 중에 적어도 한 번의 사건--그 보다 강렬하지만 오히려 섹스는 아닌--에서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주장을 내가 모두 신뢰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매슬로가 보여주는 묘사의 내용은 나의 개인적 경험과 생생하게 일치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의 주장은 어떤 이론적인 근거를 갖는다거나 실증적인 증거도 거의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매우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이 책의 묘사, 그리고 이런 것이 적어도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증명하는 노력이 더 있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한편으로, 이 책은 묘사적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근거를 갖지 못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장점이기도 하다. 이 책의 묘사들은 읽고 있으면,  그런 경험들의 순간이 생생하게 다시 떠오르고 행복해진다. 그래서 매우 개념적인 언어들로 이루어진 묘사이지만 마치 시처럼 느껴진다. 글의 어떤 논리적 구조보다, 이어지는 낱말들의 연쇄가 행복을 준다.

자, 어쩌면 다른 이들의 독서에서는 말도 안된다는 비난을 받을지 모를 책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적어도 매슬로가 말한 것들(정확한 개념도 부여하기 힘든 것들일 수 있다)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이 책의 독서는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마치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같았던 나의 독특한 경험을 누군가 "나도 그랬어"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 것 같다. 더 좋은 것은 그 경험이 자신의 발전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해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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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그라나다의 처형은 자유로운 인간이라면 누구나 총부리 앞에 세워질 수 있는 시대, 시인이 총살당하는 시대가 왔음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1936년, 프랑코 파시스트 쿠데타군에 의해서 살해당한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살해되는 순간, 이 열전의 첫번째 인물에 대한 글의 한 구절이다. "시인이 총살당하는 시대", 20세기에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하지만 의외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도 많다. 서경식 선생이 일본에서 연재한 글을 모은 것이니 내가 들어보지 못한 일본인들은 등장할 수 있다고 쳐도, 로르카부터도 그렇지만 잭 시라이, 파블로 카잘스, 에른스트 톨로.. 이런 삶들을 내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아주 역설적으로, 이 책이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잘 기억되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말이다. 어떤 잘 알려진 위인들보다도 위대한 삶을 살다가, 위대하게 죽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 그리고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더 그럴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면 부끄러워지는 일이다.

이 책에 소개된 49명은 대부분, 파시스트 독재나 전쟁에 대항해서 투쟁하고, 또 상당수는 그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인물들이다. 살아남은 이나, 그렇지 않은 이나, 이들은 모두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앞에서도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살해한 자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존엄한 파시스트"란 존재할 수 없는 말, 형용모순이다.)

한명 한명의 삶과 죽음이 가지는 무게 때문에 그리 두껍지 않은 이 책에 책장 하나하나를 쉽게 넘기기 힘들다.  그 중에도 가장 강렬하게 기억되는 인물은 잭 시라이.

일본에서 고아로 자라서, 항구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미국에 밀항하여 식당노동자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 국제여단에 참전한 그는 파시스트의 총탄에 1937년7월11일 사망한다. 일본인으로 미국노동자가 되어 스페인에서 공산주의자로 죽었다.

시라이의 죽음에 대해 뉴욕주재 일본영사관은 "있을 수 없는 비국민"이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가 되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 바로 그런 "있을 수 없는 비국민"이 아닌가!

20세기는, 그런 "비국민"들을 "있을 수 없게"하기 위해서 살해하고 기억에서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겨우' 기억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
떠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오늘, 우리는 언제, 떠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 될까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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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중국노동자의 기억의 정치


중국 노동자의 기억의 정치
백승욱 엮음 / 폴리테이아


문화대혁명에 대한 중국노동자들의 기억을 구술을 통해 다시 불러오고 재구성한 책이다.
저자들이 밝히는 것처럼 문혁은 당시와 마찬가지로 40년이 지난 지금도 매우 정치적인 쟁점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는 것을 택한 지금의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는 문혁은 재앙이었다. 문혁은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한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도 계급투쟁이 지속되어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따라서 급속한 자본주의적 재편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결합할 수 있는 폭발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회주의 정치의 측면에서, 공산당의 국가권력 장악 이후에 문혁은 국가와 당을 관통하는 혁명이라는 점에서 다른 의미를 가진다. 스탈린주의 이후 관료주의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되어가던 사회주의는 중국에서 문혁을 거치면서 새로운 전망을 획득하기도 한다. 68혁명 과정에서 중국의 문혁이 주목되고, 이후에도 외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들을 당시 문혁에 참가한 노동자의 기억을 통해서 돌아본다는 것은 온갖 평가들--공식적이거나 그것에 반대하는 입장들 속에서 문혁의 구체적인 실제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길이다. 이렇게 바라본 문혁은 공식적으로 기록된 사건들의 나열을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전한다. 힘든 조사를 수행하고 정리한 저자들의 노력 덕분에 이런 기억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노동자들은 문혁 과정에서 무엇이었나? 노동자들은 문혁 속에서 능동적인 정치적인 주체로 거듭났다. 노동자들은 진정으로 자신이 ‘영도계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따라서 자신들의 사회주의 혁명을 밀고 가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자신들을 조직했다. 공장에서 자발적인 조직을 구성하고 진정으로 더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투쟁에 나선다. 심지어 당을 향해서도 투쟁하고 권력을 쟁취한다.

이것은 노동자들에게 매우 인상적인 기억이었다. 문혁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당시의 입장, 지금의 입장에 따라서 평가가 다른 점도 있지만, 주로 개혁/개방 이후에 노동자들이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위치를 잃고 기계의 부품이 되고 열악한 상황에 내몰린다는 점을 비판한다.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문혁 당시 기억에 기반해서 조직된다는 점도 지적된다. 중국노동자들의 이후의 투쟁이 문혁의 기억과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는 매우 중요한 쟁점이다.(그것은 또한 세계 노동자운동의 미래와 자본주의 세계체제 앞날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다.)

문혁 과정에서 생산 현장에서 권력이 재구성되고 직책이나 지적 위계에 관계없이 평등한 관계가 만들어진다.(오히려 간부나 기술자보다 노동자가 우위에 선다.) 이와 함께 노동자 조직은 공선대로 대학에 파견되어 학생운동(홍위병, 학생 조반파)을 오히려 정치적으로 지도한다. 한편으로는 학생 홍위병이 문혁 초기에 공장에 진입하여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급진화시킨다. 지식에 따른 정치의 위계를 적극적으로 철폐하고 지식인과 노동자가 정치적으로 교통한다.

이와 함께 교육도 혁신된다. (이는 주로 문혁 중앙지도부의 방침에 따른 것이기는 했지만.) 공농병工農兵 대학과 같은 제도를 통해서 평범한 노동자, 농민, 병사들에게 고등교육의 문이 열린다. 초중등 교육이 농촌지역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생산과 결합하여 교실만의 학습을 벗어난다. (우리가 가진 교육제도의 관념, 즉 전일제로 교실수업만을 통해 지식을 주입하는 형태와는 달리 훨씬 더 긴밀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학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과 함께 생산에서도 혁신이 이루어지는 데, 노동자들이 능동적으로 구체적인 생산 현장을 바꾸어나가기 때문이다. 문혁 기간 동안 생산을 잘 수행하는 것도 투쟁의 중요한 쟁점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인상과는 달리 생산이 중단되거나 파괴된 경우는 많지 않다. 오히려 이 기간 동안 경제성장률 등은 매우 높은 수치를 기록하기도 한다. 노동자들이 능동적인 참여를 통해 생산력의 성격조차 바꾼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생산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생산력의 측면에서도 계급투쟁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생산력의 혁신은 사회주의 단계에서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문화혁명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야한다는 점을 보여준다.(사회주의 단계가 공산주의로 가기 위한 혁명의 계속된 기간인 것처럼.)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기억을 통해서본 문혁은, 사회주의가 하나의 고정된 단계가 아니라 혁명의 계속이라면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그럴 수 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매순간 모든 곳에서 노동자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지속되어야한다. 국가권력의 장악은 단지 시작일 뿐인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이 지속적으로, 자발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공장과 지역, 학교를 혁명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기억은 사회주의 정치를 사고하는데 있어서 문혁은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점을 다시 증명한다. 사회주의는 국가 운영-관리의 기술이 아니라 언제나 대중운동의 이념이라는 점. 이것은 현재의 우리 운동에 있어서도 매우 현재적인 쟁점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성립 이후에 너무나 쉽게 잊혀진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문혁의 기억을 돌아본다는 것은 사회주의를 사고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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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빅토르 세르주 평전


빅토르 세르주 평전
수잔 와이스만 지음, 류한수 옮김 / 실천문학사

<빅토르 세르주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지금은 폐쇄된) 케산/세르쥬님의 블로그를 통해서였다. 블로그 글 중에서 세르주를 인용한 것이 있었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내용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실천문학사에 나온 책을 사두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여행을 다녀와서야 읽게 되었다.>


빅토르 세르주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는
[한겨레21] 박노자, “실패한 혁명가”를 읽는다  참고

아나키스트에서 출발해서 볼세비키가 되었으며, 좌익반대파의 일원으로 수감되고 소련에서 추방된 혁명가.

빅토르 세르주는 소수파 중의 소수파였다. 그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반대한 소수파였고, 소련에서는 스탈린에 반대한, 그리고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소수의 좌익반대파였으며, 트로츠키의 제4인터네셔널에 대해서도 종파주의이며 국제당을 만들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고립된 좌익반대파의 마지막 소수였다.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단지 우리가 기질적으로 정당치 못한 것에 더 참지 못하는 소수파이기 때문일까? (우리 역시 소수파인 이른바 ‘운동권’들일 뿐 아니라, 그 중에서 소수인 좌파이며, 좌파 중에서조차 소수파이다.)

세르주는 더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러시아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를 두고 벨기에인으로 자라났으며 프랑스에서 투쟁하고 수감되었다가 러시아혁명에 참여했고, 코민테른 성원으로 독일에서 혁명운동을 했으며, 소련에서 추방당하고 벨기에, 프랑스에서 투쟁하고 스페인 내전을 지원했고 나치 치하의 프랑스를 탈출해 멕시코에서 정치활동을 하다가 사망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20세기 초반의 공산주의 운동이 진정으로 국제적인 이념과 활동양식을 가졌던 시기, 그리고 그것이 파괴되어 가는 시기를 일생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는 또한 혁명가였지만 사회, 경제를 분석한 사회과학자였을 뿐 아니라, 혁명시기의 역사와 혁명가들의 전기를 서술했다. 언론을 위한 기사를 쓰기도 했고 시를 쓰고 소설을 출간하고 러시아어 저작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다른 사상 조류의 지식인들과도 풍부하게 교류했다. 그는 독특한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지식이 혁명과 관련해서 사용될 수 있는 모든 분야에 열정을 다했다. 분과적이지 않은, 종합적인 지식인으로서 혁명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그는 왜 소수파 중에 소수파가 되었나? 그것은 그가 모든 것의 정당성에 대해서 회의하고 자신 속에서 반성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솔직함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비극적이게도 이런 그의 자질이 그를 소수파로 만들었다는 것인데, 그의 이런 정신을 사랑한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미치광이같은 정세가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볼세비키가 내전 이후에도 계급독재가 아니라 당독재를 지속하는 것을 반대했다. 노동자조직이 ‘노동자계급의 국가’에서 분쇄되는 것을 혁명의 후퇴라고 인식했다. 소련 사회의 관료주의를 비판했고, 자신도 그 일원이었던 좌익반대파가 실패하는 원인, 즉 그들의 당에 대한 본능적이고 맹목적인 충성심도 비판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망명한 좌익반대파의 사실상의 수장이었던 트로츠키에 대해서도 (그러나 노 혁명가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존경, 그리고 품위를 잃지 않은 채로) 스탈린의 거울대당이라 할 그의 종파주의와 권위주의를 비판했다.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에 대해서나 혹은 좌익반대파와 함께한 정치활동에 대해서 비판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세르주에 대해서 읽는 이유는 그가 가진 진정으로 타협하지 않는 혁명가다운 정신 때문이다. 바로 혁명이 고립되고 패배하고 혁명가들이 변절하는 시대.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야만이 희망을 압살하는 시대.

세르주는 사방에서 역사의 나쁜 측면들에 마주했을 때, 그러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고난을 헤쳐간 인물이다.(그런 점에서 그는 비록 ‘실패한’ 혁명가이지만 영웅이라고 할만하다.)

더욱 역설적이게도 그는 (트로츠키주의자들과 같이) 근거없는 낙관주의에는 빠지지 않은 채로도 시종일관 희망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동지들이 망명지에서 탄압받고 소련 첩자들에게 살해당하고 자신도 살해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항로는 희망행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소렐)이라기보다는, 어떤 (비극적인) 운명에 대해서도 담대하게 상대하겠다는 영웅적인 자세와 더 가까워보인다. 그가 모든 운명을 상대했던 방식들을 생각해자면 그렇다.

트로츠키주의자를 제외한 좌익반대파는 사실상 소멸했다는 점에서(게다가 트로츠키주의자도 사분오열되고 의미있는 혁명투쟁을 전개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반스탈린투쟁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체제, 그리고 스탈린주의는 훨씬 오래 국제 공산주의운동을 지배했다는 점에서, 소련 사회주의는 결코 갱신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인민들에 의한 민주주의에 의해서 다음 혁명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체제경쟁에서 패배하고 붕괴했다는 점에서 그는 그의 시대에는 물론 훨씬 더 먼 미래에도 실패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 역사의 전개방향과 결과를 미리 알고 있었더라도, 20세기 초중반의 세계에서 한명의 공산주의자였다면 얼마나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까를 묻게 된다. 그것은 쉽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일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내가 더 용감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강하지 못하기 때문일 뿐이다.
 



1.

좌익반대파들이 줄줄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당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당을 통해서 대중을 만나야한다는 강박, 당의 일괴암성에 대한 (신뢰하기 힘든) 신화가 중요한 원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당’이라고 생각한 것을 배신할 수 없었지만 그 ‘당’은 이미 스탈린의 권력도구가 된지 오래였던 것이다.

그러나 추방된 좌익반대파들은 당에 대한 사고를 쇄신한 것은 아닌데,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제4인터내셔널이라는 또 다른 국제당을 만드는 것을 통해서 대응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문제삼았어야하는 것은 당형태 자체였을 것이다. 그들의 올바른 비판 중에는 이미 소련사회에서 대중운동은 존재하지 않으며 당이 국가와 융합하고 관료들의 지배가 완성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료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 체카(KGB의 전신)의 테러가 공공연히 사용된다는 점을 비판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들은 ‘당을 관통하는 투쟁’을 당 자체에 한정시킨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특히 중국의 문혁과 대비해서 그렇다. 문혁에서는 당내의 모순이 계급투쟁의 반영일 뿐 아니라, 계급투쟁 자체가 당을 관통한다는 점이 그러났다. 소련공산당 내의 투쟁에서 생존이 절박한 상황에서조차 좌익반대파들은 대중을 조직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점은 당형태에 대한 맹목이 얼마나 견고한 것이었는지 보여준다.(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좌파들에게 그렇지만.)

(한편, 스탈린과의 당내 투쟁에서 패배한 러시아의 혁명주의 세력들은 국내에서는 숙청되고 유배되고 살해되어 청산되거나 외국에서는 개별적으로 고립되거나 코민테른 소속의 공산당들에게 탄압받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트로츠키주의 정도가 살아남게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혁명에서 얻을 수 있는 역사의 긍정적인 측면은 인적으로는 거의 완전히 청산되거나 트로츠키주의 안에서 부분적으로만 계승될 수 있었을 뿐이다.)

2.

해외에 망명한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을 위협한 것은 소련 스파이조직(체카 이후 게페우, 엔카베데, KGB로 바뀐다)의 항상적인 위협이었다. 이들은 혁명가들을 살해하는 것은 물론, 각국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조직에서 이들을 비방하는 임무를 맡거나 직접 망명 공산주의자들의 사회에 침투해서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다. 책에는 이 과정에서 오히려 ‘변심’하고 양심고백을 하는 엔카베데 요원의 이야기도 있다.

이들은 단지 망명한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한 것이 아니라, 스페인에서는 (스탈린주의적인 통일사회당과 경쟁하는) 통일노동자당에 대해서도 테러를 자행했던 것이다. 이쯤되면 소련의 국제사업이 코민테른을 통해서 국제주의적인 혁명을 지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스탈린주의 위성정권을 세우는 것에 초점이 가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는데, 이런 점은 후에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과정, 이후 프라하의 봄 진압과 같은 사건에서 더 비극적으로 드러난다. 도대체 그나마 소련이 혁명세력이라고 믿을 수 있는 여지가 도대체 얼마나 남아있었던 것일까.

3.

그러나 한편으로는 (스탈린의 독재와 테러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해도) 대외 정책의 결정과정에서 소련 공산당의 결정이 처한 어려움은 생각하게 된다. 즉, 혁명 후 내전의 과정에서 독일과 강화조약을 체결해야하는가의 문제, 2차 대전 직전에 독소불가침조약 체결 문제. 혹은 더 큰 전쟁을 촉발할 위험이 있는 상태에서 스페인내전과 같이 외국의 혁명투쟁을 직접 지원하는 문제 등.

이런 판단에서는 더 큰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정치적 쟁점들을 쉽게만 판단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문제들은 자칫하면 혁명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한 판단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쟁점들이기는 하다. 따라서 ‘쉬운’ 판단은 ‘안전빵’으로, 보수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쟁점들에 직면해서 소련 공산당이 내린 결정은 “항상” 국제적인 혁명이 아니라 자국의 이해와 안전이라는 기준에서 판단되었다는 데 있다. (물론 “항상” 국제적인 혁명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유지한 채로.) 오히려 그들은 이 과정에서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책임감과 이 때문에 생기는 갈등을 정작 별로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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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여행을 앞두고 읽은 "여행도서" 중 하나.
전우주적인 농담을 엽기발랄하게 진행하는 책이다.
다만 5권 합본인 이 책의 쪽수는 1236쪽에다가, 두께가 상당해서 가벼운 책이지만 질량은 꽤 나간다. 그래서 침대에 누워서 볼만한 책을 책상에 좌정하고 봐야하는 고통이 있다. (그래서 다섯권을 따로 사는게 좋을 수도 있는데 다만 2000원이 비싸다.)

마치 여행안내서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책이다.
여행안내서라면 우리나라건 너무 딱딱한 편이고, Lonely Plenet 같은 경우만 해도 어떤 도시를 "쇼핑몰만 있는 형편없는 도시"라고 말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자유분방한 편.(사실 책 제목도 애덤스가 여행하다가 "유럽을 여행하는 히키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착상한 것이다.)

이런 책하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루이스 캐럴의 말장난의 계보를 이은 것같다. Give me your hand(도와줘)라고 하면 로봇 마빈이 자기 팔을 떼어준다. (영국식 말장난 유머라고나 할까, 이해하기 쉽지 않다. ─.─;;) (위에는 영화에 나오는 "안내서"이미지. "겁먹지 마세요"라고 씌여있다. 여행자에게 꼭 필요한 문구다.)

영국에서는 라디오드라마로 시작했고 책으로 나왔다. 나름대로 코믹SF라는 장르를 뚜렷하게 형성한 웃기고 재밋는 책. (하지만 시시껄렁한 영국식 유머에 간질나는 분들에게는 비추.) 뜬구름 잡는 말장난만은 아니고, 우리가 사는 사회의 웃기는 짬뽕들이 우주적 차원에서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다룬다고나 할까.

워낙 유명한 책인데다가 영화도 나왔기 때문에 내용소개는 필요없겠지만, 소설에서 남성들은 하나같이 나사가 한두개가 아니라 백개 이상 단위로 빠진 것같고, 여성들은 그나마 "제 정신"에 가깝다.(가장 괜찮은 생물은 돌고래인데, "그 동안 물고기는 고마웠어"라고 노래하고 그냥 지구를 떠나 버린다. 어디로? 알게뭐야) 그게 아주 자연스럽게 읽히는 걸 보면, 현실에서도 그런 경향이 뚜렷하다는 걸 다시 느낄 수 있다.

여튼 책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해함(Mostly Harmless)이라 할 수 있다. (이건 지구에 대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설명이다.---여기 소설책 말고 그 설명서 말이다---전체가 두 단어나 된다;; 이 책의 5권 제목이기도 하고.)

가장 호감이 가는 인물(?)은 마빈인데, 우울증에 걸린 로봇이다. 아.. 너무 아는 것도 많고 고민이 많아서 그렇다. 영화에는 이런 이미지로 나온다. 머리가 행성만큼 크고 특별히 설계된 GPP를 갖고 있다. GPP? "Genuine People Personalities" 크크



사실, 영화는 책에 비해서 좀 실망스러운데, 너무 "그럴 듯하게" 결론을 낼려고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다. 우주는 말도 안되게 엉망이라야하거든. 그래서 영화에서는 딱 두개, 마빈의 이미지와 돌고래들이 부르는 엽기발랄한 노래(So long and thanks for all the fish)만은 맘에 든다.
마빈은 위에 이미지, 돌고대들의 노래는 아래 동영상.



가사가 이렇다. (시작하는 부분의 영화 자막까지)

"사물들이 겉보기와는 항상 똑같지 않다는 것은 중요하고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은 지구상에서 자기들이 가장 지적인 종족이라고 늘 알아왔지만, 알고보면, 인간은 3번째 영물밖에 안되고 두번째 영물은 돌고래로서, 흥미롭게도, 돌고래들은 오래전부터, 지구의 종말이 임박해 있음을 알아왔다.

그들은 인류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수많은 시도를 했으나, 인간들은 돌고래들의 대부분의 의사소통을 축구공을 펀치하거나 생선 한조각을 먹고 싶어 휘파람을 부는 등의 인간들을 즐겁게 하는 놀이 정도로 오해를 하였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그들 자신만이라도 지구를 단독 탈출하여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심지어는,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마저 오해를 하였는데, 휘파람 불며 고리를 뒤로 재주넘어 통과하는 묘기를 하기 위한, 고난이도의 놀이 정도로 또 잘못 해석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인즉은 그 메세지는 이랬다 "
        
잘있게들, 그 동안 맛있는 생선은 고마웠어...
이렇게까지 되어서 너무 슬퍼   
우리는 너희들에게 알려줄려고 무진장 노력을 했건만,   
우리 가르침에 귀를 안기울이니 우린들 어쩌겠나   
너희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적인 경이로움에   
무신경하게도 존경하지 않은 결과라네   
안녕 안녕, 생선은 고마웠네   
너희 세상은 곧 파괴가 될걸세   
너무 안절부절 할 필요 없네   
그저 느긋하게 누워서   
지구가 네 주위에서 분해되도록 놔두면 되는거야
참치군을 쓸어가는 저인망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의 대부분은 착하고 괜찮은 종족이라고 생각했네   
특히 너희들의 임산부와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 말이네...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생선은 고마웠네   
만약 내게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맛있는 생선을 맛보고 싶어   
만약 우리가 한가지를 바꿀 수만 있다면,   
그건 우리 모두가 노래부르기를 배우는 것   
자 모두들, 어서요   
인간과 포유 동물   
나란히 나란히   
생명의 위대한 유전 풀 안에서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고마워!    
생선은 고마웠~~~~~네

아아, 이번 여행이 끝나면 언젠가 은하수 여행도 해야할텐데, 언제나 할 수 있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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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88만원 세대


88만원 세대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88만원.
비정규직노동자의 평균임금 119만원에 전체 세대에서 20대의 임금비율을 곱한 값이다.
비정규직이 아니면 일자리가 없는 20대가 직장에서 벌 수 있는 금액. 저자들은 이 숫자로 20대 표현한다.

이들은 어떤 세대인가?
당장 보기에, 이들은 문화적으로는 소비주의에 물들어있고, 붉은악마-황우석-디워까지 이어지는 민족주의 마케팅에 쉽게 동원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는 악플을 남기고, 학생운동은 하지 않으며, 비권/반권 후보를 찍는다. 보수적인 인민주의에 휩쓸린다. 토익에 몰두하면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거나 고시촌에서 근근히 살아간다. 정규직 노동자의 파업을 비난하고 차라리 구조조정하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비정규직노동자에 파업에 연대하는 것도 아니고 노조에도 잘 가입하지 않거나 몰입하지 않는다. 소비는 동네수퍼가 아니라 대형할인매장, 찻집이나 동네빵집이 아니라 스타벅스, 뚜르주르 같은 프렌차이즈만 이용한다.

이런 20대가 한심해 보이나?
(특히 386의 눈에 그렇게 보일 것이라고 저자들은 예상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따라서 왜 그런지 물어야한다는 것, 그리고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경제"를 보라는 것이 저자들의 말이다. 하다못해, 도대체 20대가 왜 스타벅스만 가는지 같은 것이 궁금하더라도 이렇게 해야 답을 찾을 수 있다.

남한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되는 속도가 가속화되면서 이제 과거와 같은 노동시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 대학을 나오면 학점이야 어떻든 취업이 가능했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지속적으로 임금이 인상되면서 정년퇴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IMF구제금융, 노무현정권의 성장전략을 거치면서 이제 그런 일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노무현은 독점의 기형적 강화를 촉진함으로써 사태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다.) 이제는 아무리 경쟁해도 비정규직일자리뿐이고, 공공부문의 안정된 일자리나 대기업의 정규직은 "거의" 불가능한 꿈이다.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은 고졸 여성인데, 이들은 대졸 남성의 취업난이 부각되는 와중에 주목조차 받지 못한다.

게다가 앞선 세대인 386은 안정적 노동시장의 막차를 타면서, 뒤따를 수 있는 문을 모두 닫아버리고 자기들끼리 연대한다. 그러니, 386의 눈에 20대가 한심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386이 신자유주의 1세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기만적인 일이다. (저자들은 이를 "386의 배신"이라고 부른다.)

386만이 아니라 그 앞선 세대인 40,50대도 20대를 착취하는데는 모두 공범이다. (저자는 이런 식의 악날한 세대착취가 이루어진 예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주장한다.) 10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10대 아르바이트에 대한 노동인권 침해는 이미 많이 알려져있다.

(그러나 전혀 해결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시교육청의 결정으로 옥수동에 있는 "동호정보공업고등학교"가 폐교될 상황에 처하게 됐다. 공고학생들 불량해서 집값떨어진다는 주변 아파트주민들의 민원때문이다. 자신을 대변할 수 없는 10대들--정치적 대표성이 사실상 부재하기는 20대도 마찬가지다--에 대해서 잔인하다. 노동시장의 최하층에 몰릴 이들에 대해서 이 어른들이 작업장에서는 어떻게 할지 눈에 선하다. 참고:[왜냐면] 동호공고 폐교는 정당한가? / 이상조)

이들을 하나의 세대로 정의하면서 주목하는 것은, 특별한 대책이 없이는 이들이 처한 상황이 고착될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가 그것은 한국경제의 미래에 두고두고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남한 경제의 "현재의" 모순을 통해서 미래를 예상하는 작업인데, 단지 지금의 문제를 언급하기도 급급한 입장들보다 상당히 앞서 나가있는 흥미로운 분석이다. 특히 경제를 특정한 대중들의 문화와 정치에 단락시킴으로서 대중들이 처한 조건(따라서 대중운동의 조건)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점에서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열어주는 시야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20대가 어떻게 (기만적이고 과잉된 허구적인 "희망" 마케팅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논쟁적인 지점들도 있다.
우선 저자들에게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비판이 없다. 저자들은 이건 당장 어찌할 수 있는 해법의 영역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국내정책적인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저자들이 제안하는 대안은 아르바이트에 대한 노동권보호와 보조금지금, 20대가 연대할 수 있도록 하는 창업지원, 사회적 일자리 사업을 통해서라도 좋은 일자리decent job을 확대하는 것 등이다. 10대들에게는 사교육의 금지를 포함한 교육제도의 개편과 같은 다른 대안들도 제시하는 데, 10대들까지 그대로 두면 지금의 20대보다 더 절망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제안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급격한 혁명같은 것이 없이도 충분히 '개혁적'이기만 해도 실현가능한 것들이라 매력적으로 보인다. (민주노동당은 물론 문국현이나 류시민도 이런 제안들을 수용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책활용수단이 제한되어 있더라도 사태가 이렇게 전개된 데에 대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분석은 필수적이라는 점은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국내 경제정책적인 측면에서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안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단기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미봉책이 그칠 수 있다. (정책의 실현가능성에 주목하는 저자들과 나는 쟁점이 있다.)

특히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20대가 자신들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스스로 발언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때, 그런 점에서는 여전히 20대는 정치무능세대로, 기성세대의 어떤 양보가 없이는 절망적인 세대로 규정되는 것같다.(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스스로를 대표할 것인가..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과 같은 기존의 운동들이 그것을 함께 할 수 있을까? 아니면 파시즘, 인민주의? 이 책은 지금같이 가다가는 20대가 파시즘에 쉽쓸릴 수 있다는 점도 경고하는 데, 매우 현실적인 정치적 문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이 제안하는 대안들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들이 제기하는 대안들은 비록 당장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어쩌면 작은 제도들의 변화일 수도 있겠지만 바로 그 '작은 것'들 속에 신자유주의 착취 체제의 문제들이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이다. 독점을 규제하거나, 20대에게 정부가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하고 취업을 지원하거나, 사교육을 금지하는 것과 같은 "현실적인" 대안도 이미 지금의 착취체제에 핵심적인 요소가 된 것들을 건드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작은 변화도 큰 저항을 불러오고, 또 그만큼 정치적으로 어렵고 급진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다만, 저자들이 제안한 대안조차 수용이 쉽지 않은 조건이라면 거기에는 정책대안을 넘어서는 다른 논의가 필요하게 된다. 정치적으로 실현가능하게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

하지만 이런 질문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20대가 처한 조건, 다들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는 느끼고 있지만 그것이 왜 그런지,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 알지 못했던 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준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든) 20대를 위한 대안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과 이전 세대가 "안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고 투쟁하는 과정에서도 20대가 오히려 자신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현재의 시기에, 비정규직운동을 조직하기 위해서라도 20대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선배 세대들은 물론, 20대도 꼭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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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생각의 탄생


생각의 탄생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외 지음, 박종성 옮김 / 에코의서재


‘생각’에 대해서 생각하는 책. 사람의 사고가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방식들을 몇 개의 개념(생각도구)들로 정리한다. ‘생각하기’에 대한 매뉴얼이라고할까.

이 책이 제시하는 생각도구들은 모두13가지.
관찰, 형상화, 추상화, 패턴인식, 패턴형성, 유추,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차원적 사고, 모형만들기, 놀이, 변형, 통합 등이다.

대상을 인식하고 개념으로 다듬는 것에서 시작해서, 그것을 다른 차원의 인식들과 결합하고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는 과정까지를 13개의 생각도구를 이용해서 제시한다. 이런 과정은 모두 하나의 두드러진 목표, ‘창조성’을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저자들은 전인적 교육을 부활시켜야한다고 주장한다.(이 책은 ‘생각도구’들에  대한 책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교육제도에 대한 많은 제안들을 담고 있다.) 개별 학문들 사이에 벽을 쌓고 분리해서는 창조적 사고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예술과 과학은 교통해야할 뿐 아니라, 예술가는 과학자가, 과학자는 예술가가 되어야한다. 이 책의 저자들이 예를 드는 수많은 학자, 예술가, 사상가들은 그러한 주장을 확인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이러한 통합과정은 서로 다른 영역의 '개념'들이 만나는 과정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개념들과 감성이 만날 때, 심지어 몸과 만날 때, 그것은 다른 효과를 만들어낸다. 어떤 창조적인 과정이라는 것이 순수하게 상상의 산물은 아니며, 오히려 낯선 것들이 만나는 가운데 만드는 고유한 효과라는 것을 말하는 것같다. 마치 상이한 문명들이 만나는 변경지대에서 창조적인 것들이 형성된 것처럼 말이다.

이런 방식의 ‘생각도구’들은 순수한 개념들 사이의 운동으로는 사고가 뻔한 결말에 도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능력.

이 책을 읽으면서 13가지의 ‘생각도구’만큼 중요하게 제기되는 쟁점, 창조성과 그것을 육성할 수 있는 교육제도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다. 현대의 대중교육은 어떤 창조성을 가진 ‘전인’을 육성한다기 보다는 노동시장의 상황(이중 노동시장)에 맞는 노동력을 길러 내는 것에 중심이 가있다.

따라서 이 책이 제기하는 ‘전인’이란 전-신자유주의적인 어떤 지식인모델이거나 혹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요구되는 엘리트일 수도 있다. (책이 나온 시점이나 책에 열광하는 독자들을 봐서는 후자일 가능성이 많지만.) 아마도 여기서 배제된 사람들은 불안정노동시장을 구성하는 현대의 프롤레타리아로, 그들에게 창조성이란 별로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요구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한편으로는 엘리트 교육을 위한 방법론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창조적인 전인’이라는 이상이 단지 부르조아, 신자유주의 엘리트들의전유물일 수는 없다고 다시 주장해야한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창조성이란 어떤 거추장스러운 무엇이 아니라 삶을 실현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은 물론이려니와, 창조성이라는 것이 ‘실현’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물질적 조건이 구축되어야한다.

여기서 우리는 상이한 것들이 마주치는 과정을 통해서, 무엇인가 창조적인 것이 형성될 수 있다고 할 때, 저자의 13가지 생각도구에 더해서, 하지만 ‘부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핵심적인 것 하나를 추가할 수 있다. 바로 ‘노동’이다.

노동을 통해서, 개념들과 미적인 요소들을 현실과 만나게 하고 실현하고 변용할 수 있다. 노동 속에서 창조성은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저자들에게 ‘노동’이라는 항목이 이상하게도 빠져있는 것은 저자들에게나, 역사적으로나 창조적인 무엇은 노동과 분리된 엘리트들의 활동으로 정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창조성을 위한 사고의 도구이자, 그것을 실현하는 요소로서 노동이 강조될 수 있다면, 또 한편으로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창조적일 수 있도록 하는 현실의 조건(작업장과 교육현장에서)이 사고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은 모든 사람에게 전업화가가 되라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한편으로는’ 화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러스킨은 1850년대의 런던의 노동자들에게 데생을 가르쳤는데, 이는 데생을 통해서(그림을 직접 그리는 것을 통해서) 사물을 더 풍부하게 보고 느끼고, 그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러스킨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목수를 화가로 만드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목수로서 더 행복하게 살게하려는 것이다”, 혹시 소질과 의지가 있다면 화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에서 재인용)

이렇게 노동자들과 예술, 과학이 만날 때,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유산들과 창조성이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노동하는 대중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러스킨이 150년 전에 시작했던 일이 아직도-아직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도 말이다.


===
이 책에는 창조적인 사고의 사례로 여러 인물을 드는 데 그 중에는 헬렌 켈러도 있다. 그녀는 활동 과정에서 공산주의자가 된 것으로 알려져있고, 메카시즘 광풍에서 희생되기도 했다. 그녀가 한 것으로 알려진 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찾아보니 그녀가 한말은 아니고, 브라질의 해방신학 계열의 Helder Camara주교가 했던 말이라고 한다. 여튼, 훌륭한 어구가 다시 떠올랐기 때문에 인용.)

"When you give food to the poor, they call you a saint. When you ask why the poor have no food, they call you a communist."
-- Archbishop Helder Camara, Brazilian liberation theolog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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