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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2/10
    [독서]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2)
    겨울철쭉
  2. 2007/11/04
    [독서]중국노동자의 기억의 정치(2)
    겨울철쭉
  3. 2007/05/14
    [영화]내일의 기억 明日の記憶(3)
    겨울철쭉
  4. 2007/05/12
    나의 "육군수첩"에 대한 트랙백(7)
    겨울철쭉
  5. 2007/04/24
    [애니] 시간을 달리는 소녀 (時をかける少女) (5)
    겨울철쭉
  6. 2007/04/22
    [음반]루시드 폴,The Light Of Songs (노래의 불빛) (2)
    겨울철쭉
  7. 2007/01/14
    [만화&]플루토Pluto, 아톰Atom(1)
    겨울철쭉
  8. 2006/12/14
    김정환, 순금의 기억, 별
    겨울철쭉

[독서]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창작과비평사)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쁘리모 레비는 자살로 삶을 마무리하면서, '침묵과 죽음'을 자신의 마지막 증언으로 남겼다. 서경식은 불가리아 출신의 지식인 츠베땅 토르도프를 인용해 "레비가 1987년에 자살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단순 명쾌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고난에 대한 인간성의 승리와 구제의 서사로, 그 모든 것은 증언을 듣는 우리에게는 명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불가해한 질문을 던진다. 불가해한 질문에 직면한 그가 죽음으로서 우리는 그 질문에 내던져진다. 오히려 그 이유를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서경식은 말한다.

글과 여행을 통해서 쁘리모 레비를 찾아가는 이 책에서 두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 혹은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이 또 등장한다.

효율적인 학살을 통한 절멸(노동력이 없는자)이거나 "노동을 통한 절멸"(노동력이 남은자)이라는 프로젝트, 이 아우슈비츠는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한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과 닮은 행위이기 때문에, 또 그렇게 연결될 수 있는 위험을 갖고 있다. 그러나 끔찍하지만 우리와 같이 히틀러, 괴벨스, 히믈러, 아이히만과 같은 "독일인들", 그들도 인간의 일부라면, 그들을 "이해"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는 인간 자체에 대한 근원적 질문과 같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은 인간 이하'라는 사상에 희생된 까닭에, 그 사상을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대치해야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독일인'도 물론 '인간'에서 예외는 아니다."(181쪽)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모순은 쁘리모 레비와 같이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자하는 생존자의 삶을 갉아먹는다. 오히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피해자가 "인간이라는 수치"에 시달린다.

레비에게 "독일인"은 그런 존재다. 그들 전체를 인종주의적으로 재단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압도적인 다수가 공범인 행위를 볼 때, 그들이 행한 폭력이 취한 독일적 형식(식사나 노동의 양식, 오락의 취향, 언어감각, 나치식 농담의 센스까지!)을 볼 때 그런 이름을 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다수의 독일인은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나는 일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도된 무지는 무죄가 될 수 없다. 자신은 공범이 아니라는 변명은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이다. 스스로의 기억도 조작된다. 마치, 레비가 수용소에 I.G.파르벤의 화학공장에서 만난 민간인 뮐러 박사가 자신이 레비와 "우정을 쌓았다"라고까지 왜곡된 기억을 갖게 되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그래서 레비의 죽음은, 피해자는 결코 잊을 수 없고 매순간 노출되는 모순에, 가해자는 오히려 스스로 확신을 갖고 잊고-잊고자하고 "이제는 그만하자"고 말하는 현실을 대면시킨다. 역설적이다. 독일에서, 일본에서 이미 그런 목소리가 높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이스라엘과 미국은 눈감는다. 어떻게 가해자들이 먼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은 피해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 "인간"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일까?


[△ 사진은, 독일에 갔을 때 찍은 베를린 인근 작센하우젠 수용소의 처형장]

한편, 서경식은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이 왜 벌어졌는지를 물으면서, 그 질문을 유럽인인 쁘리모 레비에게도 되돌린다. 나치의 행위는 "중세 이후의 반유대주의, 히스테리컬한 패권욕과 식민지 획득욕, 약육강식.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과 우생사상, 인종주의 그리고 '효율'에 대한 물신숭배와 테크놀로지 신앙, 이 모든 요소가 복합적으로 상승작용을 하여 폭발한 것"이면서 동시에, 독일 자본주의의 발전경로와도 연관된다. 독일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유럽의 "바깥"에서 행한 행위를 유럽의 "안"으로 돌리게 되었다.

좀더 부연하자면, 역사적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독일이 영국 헤게모니를 대체하기 위해 (미국과) 벌인 경쟁 과정으로 이 시기를 연관시켜 볼 수 있다. 독일은 부족한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시장을 확대하는 등 내부로 확장의 방향을 추구한다. 중화학공업의 발전과 (힐퍼딩과 레닌이 비판한) 금융과두제는 이렇게 형성된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영역의 확장"은 한계를 가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활공간의 확장"이라는 나치식의 구호가 등장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독일 내부에서 정치적 압력을 가중시키고 소수자를 절멸하는 정치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과 함께, 곧이어 인근 국가들에 대한 전쟁으로 나간다. 1차 대전은 식민지 재분할 요구이 성격이 강했지만 2차 대전에서 독일은 유럽대륙을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하고자하고 보다 더 직접적인 유럽의 문제가 된다.

아우슈비츠는 유럽의 역사 자체가 만들어온 과정이기도 하다. "야만"이 유럽의 문제가 된 이때, 비로소 근대 유럽의 이념으로서 "인간"의 보편성을 둘러싼 자기모순이 드러난다. 쁘리모 레비조차 아우슈비츠를 묘사하면서 (비유럽적인 것으로서) "아만", "야만적인 피그미"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서경식은,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문명인가'를 물어야하는, 또 다른 과제가 주어진다고 말한다.

다른 책에서처럼 서경식의 장점은, 쁘리모 레비라는 사람을 그의 시간과 공간에 고립된 인물이 아니라 현재에, 그리고 글을 쓰는 자신의 삶에 불러온다는 데 있다. 그래서 쁘리모 레비는 "간첩"협의로 고문받고 투옥된 서승, 서준식 두 형제를, 디아스포라이자 그 투쟁과 고난에의 "외부"에 있다고 느끼는 저자 자신을 만난다. 팔레스타인을 만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우리도, 쁘리모 레비를 그리고 서경식을 지금 현재, 우리의 삶에 불러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타인의 고통에 동참(김상봉)하는 것과 동시에 나의 고통을 통해 타인과 연대할 수 있기 위해서도 말이다.


===
한편, 서경식은 일본과 독일의 상황을 비슷하게 진단한다. 일본의 우익정치인들이 "자학사관"을 넘어서자고 선동하는 것처럼, 독일에서도 "수정주의 사관"은 아우슈비츠를 다른 테러독재, 학살들과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태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차이가 있다고 느껴진다. 독일에서는 적어도 기억하고 반성하기 위한 시도들이 의미있게 지속되고 학살을 용인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금기가 더 강하다. 베를린의 "유태인 기념관"과 같은 곳은 일본에는 없는 것이다.

여행기에서 베를린에 대한 느낌에서 쓴 것처럼, 독일인들은 스스로의 힘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으로 느꼈다. 일본도 그럴까? 적절한 비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서 "폭주"라는 말이 일본에서 어떤 어감인지 느끼게 되었다.

이 책에는 일본인들이 2차 대전은 잘못된 정치인과 군인들이 "폭주"[暴走]한 것으로 이해한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지금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기도 한)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에서 "에바"는 통제불가능하게 "폭주"한다. 자신의 힘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순간이다.(그래서 에바의 전원장치는 에너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폭주를 '구속'하는 장치이다.) 독일인들이 느끼는 것으로 보이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과 유사한 것은 아닐까? 이 경우에는 훨씬 약하게 드러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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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중국노동자의 기억의 정치


중국 노동자의 기억의 정치
백승욱 엮음 / 폴리테이아


문화대혁명에 대한 중국노동자들의 기억을 구술을 통해 다시 불러오고 재구성한 책이다.
저자들이 밝히는 것처럼 문혁은 당시와 마찬가지로 40년이 지난 지금도 매우 정치적인 쟁점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는 것을 택한 지금의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는 문혁은 재앙이었다. 문혁은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한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도 계급투쟁이 지속되어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따라서 급속한 자본주의적 재편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결합할 수 있는 폭발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회주의 정치의 측면에서, 공산당의 국가권력 장악 이후에 문혁은 국가와 당을 관통하는 혁명이라는 점에서 다른 의미를 가진다. 스탈린주의 이후 관료주의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되어가던 사회주의는 중국에서 문혁을 거치면서 새로운 전망을 획득하기도 한다. 68혁명 과정에서 중국의 문혁이 주목되고, 이후에도 외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들을 당시 문혁에 참가한 노동자의 기억을 통해서 돌아본다는 것은 온갖 평가들--공식적이거나 그것에 반대하는 입장들 속에서 문혁의 구체적인 실제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길이다. 이렇게 바라본 문혁은 공식적으로 기록된 사건들의 나열을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전한다. 힘든 조사를 수행하고 정리한 저자들의 노력 덕분에 이런 기억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노동자들은 문혁 과정에서 무엇이었나? 노동자들은 문혁 속에서 능동적인 정치적인 주체로 거듭났다. 노동자들은 진정으로 자신이 ‘영도계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따라서 자신들의 사회주의 혁명을 밀고 가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자신들을 조직했다. 공장에서 자발적인 조직을 구성하고 진정으로 더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투쟁에 나선다. 심지어 당을 향해서도 투쟁하고 권력을 쟁취한다.

이것은 노동자들에게 매우 인상적인 기억이었다. 문혁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당시의 입장, 지금의 입장에 따라서 평가가 다른 점도 있지만, 주로 개혁/개방 이후에 노동자들이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위치를 잃고 기계의 부품이 되고 열악한 상황에 내몰린다는 점을 비판한다.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문혁 당시 기억에 기반해서 조직된다는 점도 지적된다. 중국노동자들의 이후의 투쟁이 문혁의 기억과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는 매우 중요한 쟁점이다.(그것은 또한 세계 노동자운동의 미래와 자본주의 세계체제 앞날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다.)

문혁 과정에서 생산 현장에서 권력이 재구성되고 직책이나 지적 위계에 관계없이 평등한 관계가 만들어진다.(오히려 간부나 기술자보다 노동자가 우위에 선다.) 이와 함께 노동자 조직은 공선대로 대학에 파견되어 학생운동(홍위병, 학생 조반파)을 오히려 정치적으로 지도한다. 한편으로는 학생 홍위병이 문혁 초기에 공장에 진입하여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급진화시킨다. 지식에 따른 정치의 위계를 적극적으로 철폐하고 지식인과 노동자가 정치적으로 교통한다.

이와 함께 교육도 혁신된다. (이는 주로 문혁 중앙지도부의 방침에 따른 것이기는 했지만.) 공농병工農兵 대학과 같은 제도를 통해서 평범한 노동자, 농민, 병사들에게 고등교육의 문이 열린다. 초중등 교육이 농촌지역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생산과 결합하여 교실만의 학습을 벗어난다. (우리가 가진 교육제도의 관념, 즉 전일제로 교실수업만을 통해 지식을 주입하는 형태와는 달리 훨씬 더 긴밀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학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과 함께 생산에서도 혁신이 이루어지는 데, 노동자들이 능동적으로 구체적인 생산 현장을 바꾸어나가기 때문이다. 문혁 기간 동안 생산을 잘 수행하는 것도 투쟁의 중요한 쟁점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인상과는 달리 생산이 중단되거나 파괴된 경우는 많지 않다. 오히려 이 기간 동안 경제성장률 등은 매우 높은 수치를 기록하기도 한다. 노동자들이 능동적인 참여를 통해 생산력의 성격조차 바꾼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생산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생산력의 측면에서도 계급투쟁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생산력의 혁신은 사회주의 단계에서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문화혁명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야한다는 점을 보여준다.(사회주의 단계가 공산주의로 가기 위한 혁명의 계속된 기간인 것처럼.)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기억을 통해서본 문혁은, 사회주의가 하나의 고정된 단계가 아니라 혁명의 계속이라면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그럴 수 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매순간 모든 곳에서 노동자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지속되어야한다. 국가권력의 장악은 단지 시작일 뿐인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이 지속적으로, 자발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공장과 지역, 학교를 혁명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기억은 사회주의 정치를 사고하는데 있어서 문혁은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점을 다시 증명한다. 사회주의는 국가 운영-관리의 기술이 아니라 언제나 대중운동의 이념이라는 점. 이것은 현재의 우리 운동에 있어서도 매우 현재적인 쟁점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성립 이후에 너무나 쉽게 잊혀진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문혁의 기억을 돌아본다는 것은 사회주의를 사고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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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내일의 기억 明日の記憶


내일의 기억(明日の記憶)

 

 

아래 포스트에 달린 '손님'의 댓글을 따라서 본 영화. 기억이나 불치병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많지만, 진부한 소재들을 진부하게 반복하지 않고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배우들의 연기가 영화를 더 단단하게 밀고갔다. 눈물을 흘리게 하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슬픔을 건드리고, 엔딩이 매우 인상적인 영화.

 

영화에서 두 사람의 이별은, 주인공이 상대에 대한 기억을 잃는 순간, 그래서 만나는 순간, 그 시점 이전으로 돌아간 순간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별은 마치 사랑 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사랑 전에, 과거의 일처럼 느껴진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타임리프를 탄 것처럼. 하지만 원하는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돌아가더라도 항상 너무 적게 혹은 너무 멀리 돌아가기 때문에 시간은 우리가 길들일 수가 없다.

 

사랑이 시작될 때처럼 이별도 각자에게 비동시적인 사건들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상호 동의하는" 이별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것일테다. 알츠하이머병 때문에 두 사람에게 사건은 비동시적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끝내 이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의 책임도 아닌. 따라서 주인공들은 그것을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아래 손님의 언급처럼,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변의 사람들에게나 사물에 남긴다. 영화는 그것을 하나씩 보여준다. 기억이 소멸할 때, 오히려 익숙했던 것들이 익숙하지 않게 되는 순간 드러나는 그 흔적들(의 도드라짐)을 통해서 감독은, 우리들 모두가 가지는 의미가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기억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아픈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도. 각자는 서로 교통하면서 모두의 영혼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당신의 기억이 소진될 때, 나의 영혼이 아플 수밖에 없다.

 

* 좀 더 자세한 영화 소개는, 씨네21 이동진의 글이 친절하다.

 

(나도 요즘 며칠간 지금 하는 활동을 쉬는 일을 고민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어려운 시간들에 따뜻하게 관심가져주고 있는 동지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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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육군수첩"에 대한 트랙백

자비님의 [일기] 에 관련된 글.

위의 글을 읽다가 오랜만에 군대생각이 났다. 26개월. 논산에서 훈련받고 철원 6사단, 최전방 사단에서 육군, 90미리 무반동총 소대에서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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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는 가장 끔찍한 기억이다. 물론 지금도 만만치는 않지만.
특히,
훈련소는 그렇다. 위의 글에서도 느껴지는 것처럼.

나에게는 낡은 "육군수첩"이 하나 있다. 그런 걸 보관하는 이유는, 내가 첫번째 면회를 하기 전까지,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는 공간인 입소대, 훈련소와 첫배치받은 부대에서 스스로와 대화하기 위해 작성한 글들이, 정말 깨알같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혀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나는 매일 밤, 화장실에서 몰래 글을 썼다.민중가요를 잊지 않기 위해서 생각나는 모든 노래를 적었고, 매일 일기를 썼다. 반공교육 교재에 나오는 한총련 출범 선언문을 배껴적었다.('교재'에서 배껴쓴 94년 슬로건; "자주의 시대, 그 길에 빛나는 백만의 영광, 미국반대 김영삼타도의 자랑찬 성전에서, 통일조국 건설로 내달리는 청춘은 승리한다", 이건 아직도 똑똑히 기억난다.)

아마 그것도 없었다면그 공간에서 나는 미쳐버렸을 지도 모른다.

수첩을 "보급"받은 날은 입대 3일째 되는 날부터. 이날의, 며칠의 일기. 어쩌면 유치하지만 가장 솔찍한.

나는 1995년2월28일 육군 논산훈련소, 28교육연대 제5교육중대에 입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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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째] 지루하다. 불안하다. (중략) 오늘부터 민가가사를 적기 시작했다. 지금도 몇개씩 틀리는 것이 잊고 기억안나는 것도 있다. 점점 더 잊어먹겠지. 빨리 기억에서 지워지기 전에 써야지. 그래도 오늘은 삼일절이다. 이런 글 쓸 정도의 여유라도 있다. 이런거라도 계속 쓰니까 시간은 간다. 갑자기 앞일이 막막하다. 그래, 오기 전 생각으로 지내야지. 가볍게 생각하자, 겨우 2년이다. 금방 갈거다. 제대해서 웃는 얼굴로 동지들을 다시 만나자! 아, 지금도 검은 창살아래 박노해, 백태웅, 수많은 구속수배 노동자들. 사회와 격리되고 운동과 격리되고 의미없는 하루하루를 소모할 수밖에 없는 동지들. 치열하게 자신과 싸우는 그런 동지들이 있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나은 편이겠지. 돌아가자, 살아서 돌아가자.

[4일째] (중략) 시를 외우기로 했다. 지금 갖고 있는 건 "썩으러 가는 길" 뿐이다. 다음에 편지하면 용운형과 명진이 형한테 시좀 프린트해서 보내달라고 할 생각이다. 일단 있는 것부터 외워야지. '민들레처럼', '강철은 따로 없다', '전사2'가 먼저 보고 싶다. 그 외에도 몇가지. 고 김남주님의 '시의 요람 시의 무덤' 등등등. 빨리 편지 쓸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나는 왜 언제나 최상의 조건만을 요구하는 지.. 나보다 고생하는 친구들은 많은데.  (중략) 그리고 오늘 새로온 친구들을 갈궜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고 그러다니, 고참되어서 남을 괴롭히지 않을까 걱정이다. 반성하자. (후략)
*가장 치욕스러웠던 순간 : '복무신조'라는 것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개소리 나올 때와 애국가를 부르라는 데 '동해물과~'가 나올 때. 이 치욕.

[일주일후-주특기배치후] '낙관적이라고 해로울 것은 없다. 나중에 실컷 울어도 늦지 않으니까" 리더스다이제스트에 95년2월호에 나온 말이다. 정말 좋은 말 같다. 정말 낙관적이라고 해서 손해볼 일은 없으니까.
군의 정신교육기능 중 하나로, 저들이 말하는 것이 국군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수호하지 않으며 오직 '자유민주주의'만을 수호한다는 것이다. 저들은 자신들 부르조아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같다..(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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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이후 26개월 동안 어쩔 수 없이 군가 몇곡을 부른 적은 있어지만 한번도 '애국가'와 '멸공의 횟불'같은 것은 부르지 않았다.(물론 지금도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다.) 그대신 눈밭 겨울 100km 행군 중에 '녹슬은 해방구', '빨치산의 밤'을 혼자서 불렀다.

그런 시기를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어쩌면 더 나약한 지도 모르겠다.
10년도 넘은 수첩을 다시 펼쳐보면서, 오늘의 나를 돌아본다. 오래된 내가 나의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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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시간을 달리는 소녀 (時をかける少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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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달리는 소녀 (時をかける少女) 

2006년작 애니메이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어 호평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SF 혹은 그냥 판타지의 성격을 띄기도 하지만 , 소녀의 성장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 듯.
 
주인공 콘노 마코토(소녀)는 우연한 기회에 타임 리프(시간을 뛰어넘는 것)를 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훌륭한 SF, 판타지들이 그렇듯 그것은 하나의 설정.
 
콘노는, 몇번이건 시간과 사건을 반복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시간과 사건을 자유자재로 반복할 수 있는 가운데, 시간과 그것과 연결된 사건은 유일무이하고, 단 한번, 그래서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이 작품에서 시간은 항상 사건과 연결된다.) 가장 소중한 시간-사건은 그 많은 반복가능한 시간-사건 속에서 다만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하나의 시간, 그것이 가장 소중하다.
 
이 영화에서는 그것은 미래에서 온 소년, 치아키와 마지막 순간. "미래에서 기다릴게"
 
 
이 영화는 소녀의 성장소설, 애니이라는 점에서 하야오의 <귀를 기울이면>을 떠올리게 한다. 소녀의 성장소설, 하지만 어떤 때엔 이미 지난 것처럼 보이더라도 여전한 사람의 마음, 꿈들에 대해서 다시 두근거리게 하는 작품들.
 
<귀를 기울이면>의 이 장면에서 함께 부르는 <컨트리로드>는 정말 명곡. 동영상을 구할 수 있는 분들은 꼭 보시길. 애니메이션 최고의 명장면과 OST.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찾은 시간의 의미. 우리는 굳이 타임리프가 없더라더라도 사건과 시간들을 수없이 반복한다. 마치 굴레 속에 있는 것처럼. 하지만 콘노처럼, 단 하나의 사건-시간의 의미를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야 겨우 알게 된다. 그것이 비가역적인 시간 속에 사는 우리의 운명.
 
이 영화의 멋진 주제가.  ガ-ネット
 
그라운드를 달리는 그대의 뒷모습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보다도 자유로워
노트에 나란히 쓴 네모난 문자마저
모든 것을 비추는 빛으로 보였어
좋아한다는 이 마음을 알지 못해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이 시간이
그 의미를 나에게 가르쳐줬어
그대와 지낸 나날을
이 가슴 깊이 새겨두자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괜찮게
언젠가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다 해도
당신은 영원히 특별하고 소중하고
또 다시 이 계절이 돌아와
끝없는 시간 속에서
그대와 만난 일이
무엇보다 날 강하게 만들어줬어
나도 모르게 달려온 내일을
맞이했다고 해도
당신은 영원히 특별하고 소중하고
또 다시 이 계절이 다가 와
언제까지나 잊지 않겠다고
그대가 말해준 여름
시간이 흘러가 이제 와서 난
눈물을 흘렸어
그대와 지낸 나날을
이 가슴 깊이 새겨두자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괜찮게
언젠가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다 해도
당신은 영원히 특별하고 소중하고
또 다시 이 계절이 돌아와
 
그래, 그래, 시간은 그런 것.
소녀, 힘껏 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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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루시드 폴,The Light Of Songs (노래의 불빛)

 

Lucid Fall (루시드 폴) - The Light Of Songs (노래의 불빛)
루시드 폴 (Lucid Fall) 노래 / 만월당

 

이 블로그 오른 쪽 위에 있는 프로필 이미지는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2004년 앨범 표지이다. 루시드폴이 자신의 라이브공연 앨범에 붙일 '노래의 불빛'이라는 제목을 생각해낼 때 아마 머리속에 떠오르지 않았을까. 공통점이 거의 없어보이는 두 앨범이지만 말이다.

 

루시드폴의 이제까지 세장의 앨범에 실렸던 곡들 중에 공연에서 불렸던 스무곡이 두장의 시디에 실려있다. 공연실황이라 녹음이 아주 깔끔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맛이 있고, 맘에 드는 좋은 곡만 모았기 때문에 듣기에 편하다. 가슴에 남는 곡들. 공연에 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루시드폴을 처음 안 것은 1집 후에 나온 <버스, 정류장>이라는 영화의 OST를 통해서였다. 지금 생각해도 가장 듣기 좋은 음반이다. 영화도 좋았다.

 

영화에서 테마였던 곡은 Sur Le Quai 라는 연주곡, 불어인데 영어로는 On the dock 라는 뜻이라고한다. 그래서, OST 표지에서나 뮤직비디오에서 시디표지와 같은 이미지가 사용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도 하다.

+ 음악듣기 link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실 <버스, 정류장>의 '정류장'이란 어쩌면 dock였다면 더 의미가 어울렸을지 모를 상징이다. 그래서 이 시디표지의 이미지는 너무 친절해서 약간 억지스럽다. 작품이 영화가 아니라 시였다면 '정류장'보다는 dock 였을 것같다. 그렇게 음악에서는 dock. 각각의 장르가 가진 고유한 가능성과 한계들.

 

dock은 땅의 끝, 걸어갈 수 있는 마지막 곳, 길이 끝나는 곳, 만나는 곳,헤어지는 곳, 알수없는 어딘가로 열린 곳...이기 때문이다. 가사가 없이도, 가사가 없는 것이 그래서 어울리는 곡.

 

아래 어느 포스트에서 내가 '길'의 이미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앨범을 BGM처럼 계속 듣는 이유는,

그런데 요즘 내가 서있는 곳은 길보다는 dock이 아닐까. 저 이미지에 뒷 모습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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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플루토Pluto, 아톰Atom

 
플루토 Pluto 
테츠카 오사무 지음, 우라사와 나오키 그림

술자리 대화에서 추천받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 <플루토>.
<20세기 소년>, <몬스터>, <마스터 키튼> 등을 그렸던 우라사와 나오키는 테츠카 오사무의 <철완鐵腕 아톰> 24~25화, "지상최대의 로봇"편에서 테마를 가져와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 테츠카 오사무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인지, '지음'을 그로 했다. 작품의 이미지, 인물 모든 곳에서 오마주를 확인할 수 있다.(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상최대의 로봇"편을 애니메이션으로 봐야한다.)  이제 일본 만화들이 세대를 넘어 세대간-재해석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작품소개는 주요 포탈사이트를 참고하시면 되겠고. 현재 국내에는 2권까지 정식발매되어있다.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 4권+a까지 볼 수 있다.)
"지상최대의 로봇" 편에 나오는 7개의 로봇과 이들을 차례로 '살해'하는 '플루토'가 나온다. 캐랙터들은 모두 재창조되었는데, 위에 책 표지에 나오는 것이 게지히트 형사(左)와 아톰(右)이다. 각각의 로봇 캐랙터 모두(인간도 마찬가지로) 보다 '인간적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http://member.jinbo.net/rudnf/blog/pluto1.jpg  http://member.jinbo.net/rudnf/blog/atom1.gif
△ [左] <철완 아톰>에서 게지히트 형사와 플루토의 대면, [右]  <플루토>에서 아톰.

그들은 모두 '인간적'이다. "공각기동대"에서 시작해서 헐리우드의 "AI", "바이센티니얼 맨", "아이,로봇"에 이르기까지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들의 인간화, 로봇이 인간과 유사한 영혼을 갖게 되는 이야기들은 많이 변주되어왔다. 그러나 그 원형은 아무래도 '아톰'이라고 할 만한데, 이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그들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마침내 '완벽한 로봇'은 증오와 분노, 질투, 그리고 슬픔까지(그렇다면 사랑까지), 인간의 감정을 갖게 된다는 (아톰의 원래 창조자인) 텐무 박사의 이야기는 이 작품이 놓여진 배경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단지 '배경'이라고 말한다. 이 만화는 발달한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철완 아톰>이 처음 연재된 50년대초부터 60년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방영된 70년대는 일본의 전후복구와 경제부흥이 가시화되면서 마치 인간이 기계의 부속으로 완전히 편입되는 것으로 느껴졌던 시기, 그래서 '인간적인 것'에 대한 고민이 더욱 커진 시기다. 그런 고민은 비인간적인 것의 인간화라는 우회로를 통해서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묻는다. 인간은 인간적인 무엇을 갖고 있는가.

(그런 점에 비해서 "공각기동대"는 고유한 '인간'에 비해서는 '인공적인 지능' 자체에 촛점을 두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를 제기하지만, 나는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 맥락, 의미는 <철완 아톰>에 비해서 후퇴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특히 "공각기동대2-이노센스"는 더 심하다.) 그런 점에서 그것을 다시 복제하는 헐리우드는 말할 나위가 없다.)

http://member.jinbo.net/rudnf/blog/pluto2.gif그래서, 우라사와 나오키의 이 작품도 오히려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적인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그것을 갖고 있는가. 그들은 전쟁에 가슴 아파하고, 아이를 돌보며, 사랑하는 사람과 로봇을 지키려고 하고, 살아있는 것들/혹은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을 갖고 있다.("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 해야지" /윤동주, 序詩) 증오와 분노로 고통받는다.(한 에피소드에 자신을 드러낸 플루토가 보여주는 감정은, 다른 것들보다 '슬픔'이다.) 당신들은 그것을 갖고 있는가.

"그 아이는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나는 마음이 벅차 올랐다. 로봇인 내가.."
(로봇 형사 게지히트가 아톰을 만나고 헤어지는 장면.)

고유하게 '인간적'이라고 정의된 것들에 대해서 질문하면서 우라사와 나오키는 이 속에 존재하는 증오와 고통을, 인간적인 것의 또 한 부분으로 대면시킨다. 가장 예술적이고 '인간적인' 영혼을 가진 플루토는 (오히려 아마도 그것 때문에) 고통받고 주체할 수 없는 폭력으로 나간다. 그런 점에서 우라사와 나오키는 또한 단지 '인간적인 것'이 고유하게 '선한 것'으로 규정된 어떤 것들이 아니라는 점, 그렇기 때문에 증오와 고통에도 눈감지 말 것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합성을 눈앞에서 대면할 것을 요구한다.

'플루토'는 말하자면 그런 존재다. 인간을 비추어보는 거울.

한편, 로마신화의 플루토Pluto는 그리스신화의 하데스Hades, 저승의 신이다. 그래서 Pluto는 명왕성冥王星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년, 국제천문연맹의 결정으로 태양계의 형성planet이 아니라고 '결정'되고 소행성asteroid 134340라는 이름을 얻었다. 마치 이 만화에서 플루토가 SOL228350..뭐 이런 이름을 달고 있는 것처럼. 작년에 이 결정이 있은 후에 '미국 방언협회'라는 단체가 plutoed라는 단어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고 한다. '추락하다, 위신이 떨어지다'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저승의 신이 이런 식으로 취급받아도 되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플루토, 하데스를 먼 태양계 외곽의 소행성대인 카이퍼벨트에 추방하고자하는 무의식들이 작동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라사와 나오키가 보여주는 것처럼, 플루토-죽음은 인간적인 것-삶의 이면이며,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한 측면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고, 우리의 '인간적인 것' 그 자체일지도 모르는 고통들에도 대면해야한다. 마치 아톰이, 플루토에게 뛰어드는 것처럼. 그래서 그 속에서, 그것은 (주인공격인) 게지히트, 이건 또 하나의 당신이라고, 아니 (어쩌면) 당신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4권,Act27) 그때 아톰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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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 순금의 기억, 별

<김정환 시집 1980~1999>를 읽다가, 말하지 못한 구절들을 위해 싣다.


순금의 기억

온몸이 몇천만 도로 타면 시체의
기억을 태워버릴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아닌, 純金의
기억, 아 기억만을 후대도 아닌,
손닿지 않고 보이기만 하는
보이지 않고 느껴지기만 하는
느껴지지 않고 간직되기만 하는
간직되지 않고, 있는
그런 순금의 보통명사를 남겨줄 수 있을까?

-- 시집 <순금의 기억>, 1996.「 제10부 세기말의 절벽 」중
정념을 잿빛 개념으로 탈색하는 것보다는, 나의 모든 것이 내가 아닌 '純金의 기억'이 된다면 찬란할 것같다. 순금의 보통명사로.




난 요새 별을 보면
뭔가 배경이 있는 것 같아
뭔가 어긋나고 있거든
그게 맞는 것같아
그리고 진실은 항상
참담한 것 이상으로 위안이 되지
어긋난다는 것 그리고 이유가 있다는 것
그게 의미인 것같아 죽음 앞에서는
빛의 속살이 어둠의 속살이
따스한 기쁨 아닌가

-- 시집 <희망의 나이>, 1992 「제2부 사랑노래」중
시가 쓰여진 1992년, 그때 '장기80년대'는 패배로 마무리되었지만 나는 대학1학년, '희망의 나이'였다. 지금, 진실은 참담한 것(이기도 하며, 또 그) 이상으로 위안. 때로는 참담한 것들만을 진실로 대면하게 될 때, 그것은 별로 위안이 되지는 못한다.



김정환 시집 - 1980-1999
김정환 (지은이) | 이론과실천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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