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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육군수첩"에 대한 트랙백

자비님의 [일기] 에 관련된 글.

위의 글을 읽다가 오랜만에 군대생각이 났다. 26개월. 논산에서 훈련받고 철원 6사단, 최전방 사단에서 육군, 90미리 무반동총 소대에서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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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는 가장 끔찍한 기억이다. 물론 지금도 만만치는 않지만.
특히,
훈련소는 그렇다. 위의 글에서도 느껴지는 것처럼.

나에게는 낡은 "육군수첩"이 하나 있다. 그런 걸 보관하는 이유는, 내가 첫번째 면회를 하기 전까지,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는 공간인 입소대, 훈련소와 첫배치받은 부대에서 스스로와 대화하기 위해 작성한 글들이, 정말 깨알같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혀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나는 매일 밤, 화장실에서 몰래 글을 썼다.민중가요를 잊지 않기 위해서 생각나는 모든 노래를 적었고, 매일 일기를 썼다. 반공교육 교재에 나오는 한총련 출범 선언문을 배껴적었다.('교재'에서 배껴쓴 94년 슬로건; "자주의 시대, 그 길에 빛나는 백만의 영광, 미국반대 김영삼타도의 자랑찬 성전에서, 통일조국 건설로 내달리는 청춘은 승리한다", 이건 아직도 똑똑히 기억난다.)

아마 그것도 없었다면그 공간에서 나는 미쳐버렸을 지도 모른다.

수첩을 "보급"받은 날은 입대 3일째 되는 날부터. 이날의, 며칠의 일기. 어쩌면 유치하지만 가장 솔찍한.

나는 1995년2월28일 육군 논산훈련소, 28교육연대 제5교육중대에 입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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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째] 지루하다. 불안하다. (중략) 오늘부터 민가가사를 적기 시작했다. 지금도 몇개씩 틀리는 것이 잊고 기억안나는 것도 있다. 점점 더 잊어먹겠지. 빨리 기억에서 지워지기 전에 써야지. 그래도 오늘은 삼일절이다. 이런 글 쓸 정도의 여유라도 있다. 이런거라도 계속 쓰니까 시간은 간다. 갑자기 앞일이 막막하다. 그래, 오기 전 생각으로 지내야지. 가볍게 생각하자, 겨우 2년이다. 금방 갈거다. 제대해서 웃는 얼굴로 동지들을 다시 만나자! 아, 지금도 검은 창살아래 박노해, 백태웅, 수많은 구속수배 노동자들. 사회와 격리되고 운동과 격리되고 의미없는 하루하루를 소모할 수밖에 없는 동지들. 치열하게 자신과 싸우는 그런 동지들이 있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나은 편이겠지. 돌아가자, 살아서 돌아가자.

[4일째] (중략) 시를 외우기로 했다. 지금 갖고 있는 건 "썩으러 가는 길" 뿐이다. 다음에 편지하면 용운형과 명진이 형한테 시좀 프린트해서 보내달라고 할 생각이다. 일단 있는 것부터 외워야지. '민들레처럼', '강철은 따로 없다', '전사2'가 먼저 보고 싶다. 그 외에도 몇가지. 고 김남주님의 '시의 요람 시의 무덤' 등등등. 빨리 편지 쓸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나는 왜 언제나 최상의 조건만을 요구하는 지.. 나보다 고생하는 친구들은 많은데.  (중략) 그리고 오늘 새로온 친구들을 갈궜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고 그러다니, 고참되어서 남을 괴롭히지 않을까 걱정이다. 반성하자. (후략)
*가장 치욕스러웠던 순간 : '복무신조'라는 것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개소리 나올 때와 애국가를 부르라는 데 '동해물과~'가 나올 때. 이 치욕.

[일주일후-주특기배치후] '낙관적이라고 해로울 것은 없다. 나중에 실컷 울어도 늦지 않으니까" 리더스다이제스트에 95년2월호에 나온 말이다. 정말 좋은 말 같다. 정말 낙관적이라고 해서 손해볼 일은 없으니까.
군의 정신교육기능 중 하나로, 저들이 말하는 것이 국군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수호하지 않으며 오직 '자유민주주의'만을 수호한다는 것이다. 저들은 자신들 부르조아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같다..(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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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이후 26개월 동안 어쩔 수 없이 군가 몇곡을 부른 적은 있어지만 한번도 '애국가'와 '멸공의 횟불'같은 것은 부르지 않았다.(물론 지금도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다.) 그대신 눈밭 겨울 100km 행군 중에 '녹슬은 해방구', '빨치산의 밤'을 혼자서 불렀다.

그런 시기를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어쩌면 더 나약한 지도 모르겠다.
10년도 넘은 수첩을 다시 펼쳐보면서, 오늘의 나를 돌아본다. 오래된 내가 나의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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