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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만, 삶의 노래, 노동의 구체성

연영석.

 

김성만을 제목으로 한 글 머리에 왜 연영석이 등장하는가? 나는 연영석을 잘 모른다. 그러나 예전에 사회진보연대 기관지에 실렸던 인터뷰 하나를 보고 팬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제 노래고 불안정한 삶을 사는 노동자의 노래입니다)  노동현장의 문화운동, 노래운동이 노조에서도 단지 '선동'이 아니라 하나의 지적인 공간, 창작으로 발전 되어야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절되고 좌절하는, 젊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을 표현하는 방식의 노래를 제기하는 것에서 놀라웠다. (그것도 대공장집회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포장된) '단결투쟁'만을 외칠 것이 아니라 그 젊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구체성을 어떻게 제기할 것인가.

(아래 연영석 동지 이미지 출처는 네이버블로그 eticform)

 

비정규직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복수다.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외치지만(나는 이 구호를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사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조차도 모두 다양한 조건에서 자기 문화를 가진다.(앞서 연영석이 인터뷰에서 강조한 내용이기도 하다.)

 

내가 최근에 만나는 비정규직 동지들은 어떤가. 오늘 조합원 모임을 진행한 도시철도공사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중년의 여성노동자들이다. 엊그제 모임을 진행한 노동부비정규직노동자들은 30대 초중반, 낼모레 함께 투쟁선포기자회견이 예정된 노사발전재단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스마트한' 20대 후반의 청년노동자들. 430집회에서 만난 고려대 미화 조합원들은 중년이라기보다는 노년의 여성노동자, 오늘 노동조합을 결성하겠다고 상담차 찾아오신 환경미화원은 중년의 남성.

 

이들을 모두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묶는 만큼, 이들 각자가 가진 삶의 구체성을 존중하면서, 우리는 각자를 주체화하고 연대를 조직할 수 있을까.

 

자본의 추상화, 노동의 구체성

 

사실 이 개념(자본의 추상화, 노동의 구체성)은 정치경제학 비판의 것이다. 자본의 운동이 추상노동이 생산하는 가치와 잉여가치로 표현되는 반면, 노동자가 노동력을 지출하는 과정은 유일하게 현실적인 노동, 즉 구체노동으로서 나타난다.

 

이 속에서 우리는 현실에서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을 떠 올릴 수 있다. 자본은 언제나 추상적인 어떤 힘, 기껏해야 자본의 대리인에 불과한 사장과 같은 '것'(자본가의 본질은 인간이 아니라 추상적 사물이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언제나 구체적인 삶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의 집단이다. 물론, 그들이 '반역'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문화'의 일부이자 효과, 결과로서 이데올로기.

 

 

김성만, 삶의 노래

 

김성만은 거칠다. 그가 만든 노래도, (죄송하지만) 그의 노래 실력도 역시 그렇다. 연영석과 마찬가지로 김성만도 투쟁사업장에 공연보다는 '연대'하러 다닌다. 그래서 가난하다. 삐까번적한 큰 무대에는 부르지 않는다. 맥빠진 민주노총 집회에 섭외가 안될 때 불러도,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는 곳에서 소리를 지른다.

 

나는 오늘 도시철도공사비정규직 조합원들의 교육을 하는 김성만 동지를 보고, 또 한명의 동지에게 반했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어쩌면 하층문화, 그 속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삶의 진실을 길어올리는 모습을, 불과 몇십분 동안에 노래교육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연영석이 젊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삶의 분절성을 노래한다면, 김성만은 나이든 노동자들이 팍팍한 삶과 그 속에서 희망을 노래한다.

 

그가 직접 쓰고 오늘 노래한 "까대기"라는 곡. 악보 밑에는 "까대기란 여성의 유통노동자들이 박스에 들어 있는 물건을 풀어 진열대에 차곡차곡 쌓아 정리하는 것을 뜻함"이라고 씌여있다. 유통여성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하면서 만든 곡이라고 한다. "경괘한 뽕짝"이다.

 

세상에 포장을 뜯어  널 부러져 흩어진 것들 / 높은 곳에 차곡차곡 낮은 곳에 가지런하게

날 때부터 비정규직 울 때부터 차별을 받는 / 정해져서 바꿀 수 없는 그런 노동이 아냐

우리가 차곡차곡 우리가 하는 거야 / 노동이 아름답게 다시 쌓아야 해

우리가 하는 거야 우리가 힘을 모아 / 세상을 다시 한 번 까대기 하는 거야

다시금 사랑으로 다시금 희망으로 / 우리가 힘을 모아 함께 가는 거야

땅위에 하늘아래 차별이 없는 거야 / 사람이 사람답게 아 살맛나는 세상 (가사전체)

 

오늘 함께 한 도시철도 비정규직 조합원들과 신나게 불렀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구체적인 노동 속에서 대안세계를 노래한다.

 

지금 투쟁하고 있는 울산과학대와 광주시청의 여성비정규직노동자들과 연대하면서 만든 곡, "청소아줌마"라는 곡도 있다.

 

..쓰레기를 치우다 내가 쓰레기가 되었다.. 억장이 무너지고 너무 울어서 눈물이 말라버렸다... 청소만하다가 내가 청소되었다...내가 살아서 알몸뚱이로 분노에 벌벌 떨었다...(가사 일부)

 

울산과학대, 광주시청의 투쟁을 접한 사람들이라면 노래의 가사가 어떤 울림을 갖는지 알 것이다. 김성만은 그 울림을 노래로 공유하자고 한다. 아프지만, 조합원들이 같은 장소에서 함께 노래하고 하나되는 것처럼 먼 곳의 투쟁하는 비정규직노동자들과 공유할 수 있게, 노래로. 그 이야기를 이제 처음듣는 수천리밖에 있는 노동자들이 서로 공감할 수 있게. 노래로.

 

김성만은 겸손하게도 자신이 만든 '비정규직철폐연대가'가 '비정규직의 아픔을 그때까지는 잘 몰라서' 책이나 문서를 읽고 썼다고 했다. 그래서 다소 추상적이기도 한 '비정규직철폐연대가'는, '청소아줌마', '까대기' 때문에 더 빛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집회에서는 잘 포장된 '비정규직철폐연대가'만 연신 방송된다. 맥빠진 민주노총 메이데이 집회서 조차. 그것이 맥빠진 이유는 '청소아줌마'와 '까대기'의 삶의 구체성을 폄하하고 결코 노동절에 부르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노래 : 대중의 반역을 위해서.

 

대중은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의 반역이 결합될 때 혁명에 나선다. 착취의 모순이 자동적으로 이데올로기적 반역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신자유주의 최근10년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데올로기의 반역을?

 

김성만과 연영석은 대중의 구체적 삶을 노래로 서로 교통하자고 제안한다. 서로 주목하는 세대는 다르지만 말이다. 서로 다른 비정규직 대중들이, 서로의 구체적인 삶의 고통을 노래를 통해서 교통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경험이 가지는 보편성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이 새로운 주체화의 시작이 아닐까. 하나의 대공장에 모여있는 노동자들과는 달리 분절되고 흩어진 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는 삶의 구체성을 함께 할 수 있는 문화적 매개가 필요하다.

 

연영석이 인터뷰 말미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저는 다른 민중가요 가수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음반은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을 위한 음반이다. 네가 주로 가는 현장에서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렇게 말이죠."

 

삶의 구체성, 운동의 구체성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최근에 그 동안 활동하던 노조에서 활동을 곧 그만두고, 쉬고,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주변의 동지들과 많은 이야기를 더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그렇게 결론을 낼 것같다.

 

지난 시간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아주 잠깐씩 이런 계기를 통해서 돌아보게 된다. 나는 현재의 활동에서 얼마나 노동자들의 삶의 구체성에 접근하는 운동을 했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공간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삶의 구체성에 어떻게 다가가고 인식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지금처럼, sur le quai, 길이 끝난 곳에 서있을 때, 혹은 어디에 서있는지조차 혼란스러운 거리 한복판*에서 길을 잃을 때, 그것을 다시 생각한다.

 

 

[보너스 이미지]

==== * 아래는 언급한 그 "혼란스러운 거리 한복판"

*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거의 마지막 부분의 장면. 시간이 정지한 거리 한 복판. 치아키가 남겨지고 마코토는 인파 속에 사라진다.

 

 * 윗 장면이 나오기 직전. 예정된 사고를 결국 막지 못하고 "기진맥진 상처입은" 치아키. 다 소진한 줄 알았던 마지막 타입리프 단 하나,가 남아있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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