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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선거는 민주적인가


선거는 민주적인가
버나드 마넹 지음, 곽준혁 옮김 / 후마니타스


한미FTA를 생각해보자 한미FTA를 추진하는 노무현에게 우리는 그 권한을 위임한 적이 없다.
그럼 노무현은 할 수 없는가?  죄송하지만 할 수 있는 권한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왜? 선거를 통한 대의제가 대표의 자율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한미FTA 국민투표는 따라서 선거 대의제와는 다른 민주주의 모델을 사고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 책을 통해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선거는 민주적일 수도 있지만 선거가 민주주의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거는 민주주의와는 별로 상관없는 별도의 제도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으로서 선거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발생한 제도이고, 선거가 민주주의를 담보하지도 않는다는 것.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오히려 추첨제도가 민주주의에 근접할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선거는 귀족정의 것으로, 추첨은 민주정의 것으로 사고 되었다. 추첨을 통해서는 누구나 공직에 접근할 수 있고 관직을 평등하게 교체할 수 있다. 추첨이 작은 공동체에만 가능한 것도 아닌데, 추첨제도와 부분적인 선거, 자격조건을 혼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테네 폴리스의 예를 보면, 직접민주주의는 오직 작은 공동체에만 가능하다는 것은 선거로 구성된 대의제도를 절대화하기 위한 신화에 가깝다.)

또한 이러한 제도는 '전문가'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는다. 엘리트의 배타적 지배를 막는 효과가 기대되었다. 이것은 지적 차이가 권력이 되는 사회를 방지하고, 오히려 지식을 권력의 문제와 무관하게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을 만든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이러한 제도는 '평등'에 대한 자본주의 사회의 이해와는 다른 이해를 발전시킨다. 추첨과 자발성의 결합이 (정치적) 평등이라는 것이다. 결과의 평등 혹은 기회의 평등이라는 개념 구분과는 전혀 다른 평등개념인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평등 개념의 새로운 가능성을 사고할 수 있다. (물론 이 자발성이란,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지적, 경제적 독점을 배제하는 장치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정치적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이나 생계때문에 정치에 개입할 수 없는 시민은 정치로부터 '자발적으로' 배제되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선거는 귀족정에 적합한 것으로 사고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근대초기에도 마찬가지어서, 이탈리아의 공화제 도시국가에서도 추첨이 널리 사용되었다. 루소는 "추첨에 의한 선발은 민주정의 본질"이라고 말하고 선거는 귀족정에 적합하다고 쓴다. 귀족정은 시민들 사이의 차이와 구별이 자유롭게 나타날 수 있는 그런 체제이다. (따라서 현대 자본주의-대의민주정 사회도 귀족정에 가깝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17~18세기를 지나면서, 선거가 가진 정치체에 대한 정당성 부여라는 효과 속에서 선거제도는 민주정에 필수적인 것으로 이해되어간다. 영국(청교도)혁명과 미국독립전쟁이 특히 중요한 정치적 계기가 된다. 새롭게 구성된 정체에서, 정당성의 확보는 필수적이고, 선거는 여기에 유용했다. 또한 미국 헌법 논쟁은 선거의 의미를 더 확장한다. 통치에 우월한 자를 선정하는 데 선거가 유용하다는 것이다. '민주적 귀족정'이라 불릴 만한 것이 출현한다.

한편, 이러한 선거제도와 함께 확립된 대의제에서 여론의 자유는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선거로 선출된 대표가 자율적 판단을 허용받았기 때문에 인민에게는 '여론'을 형성할 자유가 주어졌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보가 공개되어야하고,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의 표현이 가능해야한다. 이 '의사표현'은 개별적인 것은 물론 집단적인 것을 포함한다.

대의제도는 정당정치 속에서 변형된다. 대표를 선출하는 투표행위는 소속감을 반영하는 행위가 된다. 특히 서유럽에서 계급정당의 발전은 투표행위는 계급공동체나 종교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하는 행위로 변형된다. 투표는 소속감과 정체성의 문제가 된다. 정당정치 속에서 '대표의 자율성' 혹은 '의회 내 토론' 과정도 제한된다.

저자는 최근의 경향으로 '청중민주주의'라는 것을 제시한다. 정당보다는 신뢰받는 개인, 미디어 선거, 여론조사의 영향력확대 등등이 요소이다. 저자는 이것이 인민이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방식으로 서술한다. 이 과정은 최근 각국에서 (특히 계급에 기반한) 정당정치의 약화, 인민주의의 확산과 궤를 같이 한다.

저자가 '청중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것의 한 경향인 인민주의 정치로 노무현 정권은 탄생했다. 그 정권은 대의제의 맹점인 권력의 위임을 극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의제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통치에 대한 정보의 공개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고(한미FTA 협정문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여론의 형성과 정치적 의사의 표현도 봉쇄하고 있다.(집회/시위의 원청봉쇄, 방송광고 봉쇄 등등까지) 이를 통해서 노무현 정권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선거제도의 한계와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해서 다른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컨데 '민주주의'가 '선거'는 아닌 것이다.

이 책은 '선거'를 역사적으로 고찰할 수 있게 함으로서 그것이 민주주의와 갖는 제한적 관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것은 선거를 절대화하고 맹목하는 것을 넘어서 민주주의 자체를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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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노동조합과 같은 대중조직에서 선거는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정치체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와 똑 같은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조직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대중적 권위를 부여하고, 대중이 신뢰하고 이들을 따르도록하는 헤게모니를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민주주의'는 아니며, 따라서 다른 민주주의를 담보할 수 있는 제도들이 도입되어야한다. (일부 공직에는 추첨이 이용될 수도 있다. 자발성과 결합하여, 평등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조합원 발의, 대표소환, 중요한 결정에 대한 조합원 투표가 보장되고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남한의 '민주노조' 운동에서 모든 노사합의사항은 '잠정합의'로서 조합원 찬반투표를 거쳐야하는 것과 같은 관행은 직접민주주의가 노동 현장에서 '발명'되었던 87년 민주주의 투쟁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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