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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08
    [영화]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
    겨울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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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색,계 (色, 戒: Lust, Ca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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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08/05
    [영화] 기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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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7/05/14
    [영화]내일의 기억 明日の記憶(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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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임순례 감독은, 전작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처럼, 어쩌면 진부한 소재를 진부하지 않게 그려낸다. 한국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 기껏해야 지하철에서 자리를 냉큼 차지하는 존재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 "아줌마"들의 삶에 대해서 말이다.

이 영화에 대한 좋은 이야기는 여기저기 많으니 한 가지만 이야기해보자.

국제 체육대회(국가대표)라는 소재는 사실 위험하다. 자칫하면 민족-국가에 인민들을 동원하는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그것을 소재로 다룬 영화도 반복하기 쉽다.(그것은 소재 자체에 각인된 것이기도 해서, 밑에서 말하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다루려고 해도 민족-국가는 끊임없이 복귀한다.)

그런 점에서 임순례 감독은 솜씨있게 다른 방식으로 소재를 다룬다. 영화에 등장하는 선수들은 어떤 민족적인, 국가적인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삶 혹은 꿈을 위해서 뛰어든다. 그것이 잘 어울리는 이유는,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어차피 민족-국가가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으며 앞으로도 이들에게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아줌마'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올림픽 시즌에 잠깐 주목받고, 금메달 카운트로만 집계되는 경기의 뒷면에는 그녀들의 삶이 있다.

임순례 감독은 그 금메달의 '뒷면'을 현실과 단락시킨다. 그녀들은 경기가 끝난 이후에도 뉴코아, 홈에버에서 물건을 파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일 것이고, 동네식당 "아줌마"(달리 그녀들을 부르는 어떤 용어가 있담?)일 것이고, 딸을 둔 이혼녀일 것이다.(한미숙-송정란-김혜경) 우리 옆에 있는 그녀들이다. 감독은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 실제 선수들과 감독의 인터뷰를 붙여넣는다. 영화는 다시 "올림픽이 끝나면 돌아갈 팀이 없는" 그녀들의 현실로 난폭하게 돌아온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국가"대표선수들에게조차 "국가"가 무엇인지, 혹은 그보다는 그녀들의 삶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대항의 국제 스포츠 경기에는 '경기'를 일으키는 나 같은 이도 그녀들의 결승전을 응원하면서 볼 수 있다. 그 경기는 민족-국가의 영광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그녀들이 생존을 위해서 싸우는 또 다른 삶의 현장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얼마전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올림픽 등 각종 세계대회에서 국위선양을 하고 있는 국가대표 선수들과 함께 이 영화를 관람"했다고 한다. 이명박에게는 그녀들의 삶이 아니라 "국위선양"이 보였던 모양이다. 소재의 위험은, 영화보다도 더 현실과 거리가 있는 그런 식의 상징조작도 가능하게 한다. 그러니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이 영화를 보고나서 그녀들에게 "민족-국가의 영광"을 위해 베이징 올림픽에서 열심히 뛰라는 얼빠진 이야기는 하지 말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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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그 해 여름
(2006) / 121분/2006-11-30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인데 뒤늦게 보았다. 작년에도 11월말에 개봉했으니, 여름이 배경이기는 하지만 겨울에 보는 게 적당한 것같기도 하다. 조금 더 영화와 거리를 둘 수 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영화는 관객 대부분이 갖고 있을 각자의 '그 해 여름'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래, 바로 '그 해 여름'이었다.

사실, 영화는 좀 어설픈 점들이 없지 않다. 1969년의 농활이라는 설정도 그렇거니와, 시대적인 배경을 생각해볼 때 영화에 나오는 방식으로 대학생들이 농민들을 만나는 설정도 어색하다. 그리고 서울에서 온 대학생이 농촌의 처녀를 사랑하게 된다는 설정은, 도시-농촌, 지식인-무지자의 차이를 남성-여성으로 환유하는 불편한 구도다. 사건의 전개는 어쩌면 상투적이기도 하다.

여튼, 진부한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영화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봄날은 간다>의 상우/유지태)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떤 사랑은 변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헤어지더라도 말이다.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정인(수애)처럼 혼자서 편백나무 잎을 세상 어딘가로 열심히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모든 사랑은 변한다"" 혹은 "어떤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서로 상충되는 두 가지 주장들이 가능할 것이다. 어느 쪽이 되든 절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뭐, 어느 쪽이든 좋은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어설픈 틈새들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살아있는 건 거의 두 명의 주연 배우 덕분이다. 특히 (그리 예쁘다고 할 수는 없는) 수애라는 배우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도 없었더랬는데 영화를 보면서 아주 깊은 매력이 있는 배우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흔한 미모보다는, 다른 종류의 매력이 있다. 좋은 배우를 좋은 연기로 만난 것같아 좋다.


영화를 보려고 떠올렸던 건, 영화와 별 상관은 없지만 제목은 같은 노래 때문이다. 새로산 MP3플레이어에 놓을 노래들을 고르다가, 한동안 잊고 있던 곡을 다시 듣게 되었다. '펄스데이(Pearl's Day)'의 '그해 여름'이라는 곡이다. 우연찮게도 이 영화에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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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색,계 (色, 戒: Lust, Caution)

보고나서는 한참 동안 멍하게 혼란에 빠지게 만드는 영화.

 

 

1.

파시스트들에게는 영혼이 없다.

그들은 타자의 자유를 억압할 뿐 아니라, 그 필연적인 귀결로서 자신들의 자유까지도 억압하고 지속적으로 소거해가기 때문이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그 말은, 파시스트들에게는 영혼이 교통하는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파시스트들에게 예컨데 soulmate라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영혼의 울림, 떨림을 동반하는 것이지만, 파시스트의 자기억압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 파시스트의 하수인인 이(양조위)는 자신의 주변에서는 만나지 못하는 대상을 저항군의 스파이인 왕치아즈(탕웨이)에게서야 찾을 수 있다. ('이'에게 부인은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도 '내려가서 마작이나 하라'고 말할 의미없는 대상이다. 파시스트와 함께 사는 여인들은 그저 마작을 하는 장면만 등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파시스트인 그에게는 '적당하지 않은' 것.. 따라서 왕치아즈(탕웨이)에게 만큼이나 이(양조위)에게도 이 사랑은 파멸적이다.

 

2.

영화는 저항군이 왕치아즈(탕웨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어떤 한계로 내모는 순간, 가장 잔혹하다. (사람을 수십번의 칼질로 난도질 때가 아니라 이 순간에.) 그렇다면 그것을 계속 견딜 것을 요구하는 저항군의 중간간부에게는 파시스트만큼의 영혼이 있는가?

 

적어도, 영화에서 그 중간간부는 왕치아즈(탕웨이)의 말, 이미 멈출 수 없게 이(양조위)를 사랑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그녀가 처한 성적 착취에 괴로워하는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어한다는 점에서 이것이 잘 못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끝까지 '조직의 이름으로' 작전을 지시한다.

그렇다면 '저항군'이라는 사람들은 결국 파시스트들과 어디서 다른가. 파시스트의 육체를 살해하기 위해서 동지의 영혼을 살해할 때..

 

운동은, 그것이 설사 그것 때문에 패배하더라도 지켜야할 것들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내가 서 있는 곳들에서조차 그런가.

 

3.

사랑이 정치적 적대와 얽혀들 때.

사랑에 대한 온갖 찬사들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다만 현실의 (정치적) 적대 속에 존재한다.

이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인 인랑 (人狼, Jin-Roh)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흥행을 포기했는지) 불길하게도 정치적 적대 아래서, 사랑은 가장 낮은 차원의 종속변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영화를 같이 보았던 애인과는 다음해, 첫직장에서 노조를 만들고 싸우는 과정에서 헤어졌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그녀와 노조활동에 대한  입장을 화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전에 연애에서도 그 '정치적 입장'이 문제였던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다른 가능성은 없었을까, 가끔 떠오르기는 하지만 역시 그 당시 상황에서 어떤 다른 판단들이 열려있었을까.

 

이 영화를 보면서, 그 모든 과정이 영화의 흐름과 동시에 다시 재생되었다. (극장에서 나는 두 개의 영상들을 본 셈이다.)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이후의 또 다른 과정에서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실패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라는, 아주 당연하고 별로 특별할 것도 없어보이는 결론을 고통스럽게 얻었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왜 사랑은 정치에 대해서 그렇게 강하지 못한지 생각하게 된다. '정치'라는 말 보다는 그/녀들이 처한 사회적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부터 '색, 계'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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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담

오랜만에 공포영화를 봤다, 기담.
(스포일러 조금 있음)
이런저런 평처럼 "잘 만든" 공포영화다.
서로 연결되는 세개의 에피소드가 액자구조 속에 있다. 액자의 밖은 1979년 유신 말기, 액자의 안은 1942년 일제 말기 경성. 억압적인 시대--따라서 그 자체가 공포들인--들이 절정에 있고 끝나가는 시기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싶었나보다.

영상도 좋다. 알려진 것처럼 일본식 건물과 복식들이 아름답고도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외국에서도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는데, 남한 사람들에게는 일본전통양식은 뭔가 알수 없지만 존재했던 공간,아직 봉건적--따라서 前-이성적--이고도 근대적--따라서 이성적--인 것들의 불안정한 공존을 상징하는 것같다.

그것은 민족의 존재이자 부재, 과학의 부재이자 존재를 드러낸다.(이 영화는 병원이라는 근대적인 '과학'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괴담.) 역시 잘만든 공포영화로 기억되는 '장화홍련'의 배경도 일본식 건물이었던 기억이 있다.

중간중간 깜짝깜짝 놀라게 하고 공포스러운 장면들이 '공포효과'를 만들어내지만, 정작 플롯 자체는 그다지 공포스럽지는 않다.

세개의 에피소드들에 있는 이야기들이 모두 역설적이게도 논리적--따라서 이성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여기서 '과학적'인 것이라면 정신분석이거나, 심리학적인. 다만 심리학을 과학이라해야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진정으로 공포스러운 것은 무의식의 어떤 불안을 건드리면서도 설명되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이 영화는 그에 비하면 너무 친절하다. (그래서 정신분석을 잘 아는 누가 꼼꼼하게 분석을 해주면 재미있을 것같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여러가지 정신적인 현상들을 소재로 가져온다. 시체성애 necrophilia, 엘렉트라 컴플렉스, 다중인격장애 같은 것들. 이것들은 모두 죽은자를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영화의 다른 포스터에는 "사랑에 홀린자, 여기 모이다"라는 카피를 쓰는데, 내용들은 모두 사랑하는 자의 죽음을 응시한다. 사랑하는 대상들은(그것이 이미 죽어있든 사랑하다가 죽었든) 살아있는 주체에게는 여전히 죽지않고 살아서 함께 한다. 그것은 마치 모든 타자에 대한 사랑은 타자 자신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타자(의 욕망)이라고 상상되는 내 안의 가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같다. 사랑하는 자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유령이다. 뭐, 사실 모든 사랑의 진실이 거기에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것을 통해서 망각하고 대상의 부재를 상징화해야한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것들에 실패하고 죽은 자들은 따라서 죽지 않는다. 특히 이런 점에서 세번째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애도작업이 수행되지 못하고 자아의 일부가 상실된 대상과 동일화 된다. 따라서 주체 안에서 죽지않고 공존하게 된다. (영화의 무대는 안생(安生)병원이라는 가상의 병원이다. 이름이 흥미롭다. 내가 보기엔 안(安)은 오히려 '아니-'라는 의미의 부정어로 보인다. 따라서 un-live라고 할 만한데,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un-dead.. 따라서 죽어도 죽지 않은, 살아도 살아있지 않은 좀비같은 존재다.) 이 영화의 공포효과는 이 부분, 죽었지만 죽지않은, 그리고 그 죽지않은 부분은(사실은 살아있는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살아남은 사람들, 당신들 안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데서 나온다.

하지만 앞서서 이야기했지만, 잘 만든 영화이지만 그렇게 대단히 공포스럽지는 않다.(이것은 욕이 아니다.) 모두 설명가능하고 공포스러운 장면들 또한 모두 상징들로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섭다기 보다는 지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영화.(흠.. 깜짝 놀라고 무섭기도 장면들도 많다. 감독이 만든 영상-음향 효과는 뛰어나다.)

공포영화들이 최근에는 가족(장화홍련, 4인용식탁)이나 학교(여고괴담)를 다루어온 것은 그것이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 주체들을 무의식에서 억압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제도적인 위기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이라... 사랑도 그것이 공포의 대상이 될 때가 있는 법이다. 그것이 과잉되어 자기파괴적이기까지 한 주이상스로 나타날 때..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인영'(이자 동시에 그녀의 남편인 '동원'이기도 한)이 마지막으로 남성 인턴을 살해하려는 장면은 마치 여성상위체위에서 성교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장면에서 인영은 사실은 그녀의 사랑의 대상인 '동원'이 부재하는 대상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나비(퓌지스psyche-영혼)모양의 비녀로 가슴을 찌르고 자살한다.

그리고 인영의 마지막 대사, "쓸쓸하구나.."
실재계에 갑자기 마주할 때, 그런 느낌이다.

공포스럽다기보다는 쓸쓸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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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내일의 기억 明日の記憶


내일의 기억(明日の記憶)

 

 

아래 포스트에 달린 '손님'의 댓글을 따라서 본 영화. 기억이나 불치병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많지만, 진부한 소재들을 진부하게 반복하지 않고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배우들의 연기가 영화를 더 단단하게 밀고갔다. 눈물을 흘리게 하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슬픔을 건드리고, 엔딩이 매우 인상적인 영화.

 

영화에서 두 사람의 이별은, 주인공이 상대에 대한 기억을 잃는 순간, 그래서 만나는 순간, 그 시점 이전으로 돌아간 순간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별은 마치 사랑 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사랑 전에, 과거의 일처럼 느껴진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타임리프를 탄 것처럼. 하지만 원하는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돌아가더라도 항상 너무 적게 혹은 너무 멀리 돌아가기 때문에 시간은 우리가 길들일 수가 없다.

 

사랑이 시작될 때처럼 이별도 각자에게 비동시적인 사건들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상호 동의하는" 이별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것일테다. 알츠하이머병 때문에 두 사람에게 사건은 비동시적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끝내 이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의 책임도 아닌. 따라서 주인공들은 그것을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아래 손님의 언급처럼,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변의 사람들에게나 사물에 남긴다. 영화는 그것을 하나씩 보여준다. 기억이 소멸할 때, 오히려 익숙했던 것들이 익숙하지 않게 되는 순간 드러나는 그 흔적들(의 도드라짐)을 통해서 감독은, 우리들 모두가 가지는 의미가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기억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아픈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도. 각자는 서로 교통하면서 모두의 영혼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당신의 기억이 소진될 때, 나의 영혼이 아플 수밖에 없다.

 

* 좀 더 자세한 영화 소개는, 씨네21 이동진의 글이 친절하다.

 

(나도 요즘 며칠간 지금 하는 활동을 쉬는 일을 고민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어려운 시간들에 따뜻하게 관심가져주고 있는 동지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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