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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내일의 기억 明日の記憶


내일의 기억(明日の記憶)

 

 

아래 포스트에 달린 '손님'의 댓글을 따라서 본 영화. 기억이나 불치병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많지만, 진부한 소재들을 진부하게 반복하지 않고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배우들의 연기가 영화를 더 단단하게 밀고갔다. 눈물을 흘리게 하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슬픔을 건드리고, 엔딩이 매우 인상적인 영화.

 

영화에서 두 사람의 이별은, 주인공이 상대에 대한 기억을 잃는 순간, 그래서 만나는 순간, 그 시점 이전으로 돌아간 순간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별은 마치 사랑 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사랑 전에, 과거의 일처럼 느껴진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타임리프를 탄 것처럼. 하지만 원하는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돌아가더라도 항상 너무 적게 혹은 너무 멀리 돌아가기 때문에 시간은 우리가 길들일 수가 없다.

 

사랑이 시작될 때처럼 이별도 각자에게 비동시적인 사건들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상호 동의하는" 이별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것일테다. 알츠하이머병 때문에 두 사람에게 사건은 비동시적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끝내 이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의 책임도 아닌. 따라서 주인공들은 그것을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아래 손님의 언급처럼,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변의 사람들에게나 사물에 남긴다. 영화는 그것을 하나씩 보여준다. 기억이 소멸할 때, 오히려 익숙했던 것들이 익숙하지 않게 되는 순간 드러나는 그 흔적들(의 도드라짐)을 통해서 감독은, 우리들 모두가 가지는 의미가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기억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아픈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도. 각자는 서로 교통하면서 모두의 영혼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당신의 기억이 소진될 때, 나의 영혼이 아플 수밖에 없다.

 

* 좀 더 자세한 영화 소개는, 씨네21 이동진의 글이 친절하다.

 

(나도 요즘 며칠간 지금 하는 활동을 쉬는 일을 고민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어려운 시간들에 따뜻하게 관심가져주고 있는 동지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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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선거는 민주적인가


선거는 민주적인가
버나드 마넹 지음, 곽준혁 옮김 / 후마니타스


한미FTA를 생각해보자 한미FTA를 추진하는 노무현에게 우리는 그 권한을 위임한 적이 없다.
그럼 노무현은 할 수 없는가?  죄송하지만 할 수 있는 권한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왜? 선거를 통한 대의제가 대표의 자율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한미FTA 국민투표는 따라서 선거 대의제와는 다른 민주주의 모델을 사고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 책을 통해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선거는 민주적일 수도 있지만 선거가 민주주의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거는 민주주의와는 별로 상관없는 별도의 제도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으로서 선거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발생한 제도이고, 선거가 민주주의를 담보하지도 않는다는 것.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오히려 추첨제도가 민주주의에 근접할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선거는 귀족정의 것으로, 추첨은 민주정의 것으로 사고 되었다. 추첨을 통해서는 누구나 공직에 접근할 수 있고 관직을 평등하게 교체할 수 있다. 추첨이 작은 공동체에만 가능한 것도 아닌데, 추첨제도와 부분적인 선거, 자격조건을 혼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테네 폴리스의 예를 보면, 직접민주주의는 오직 작은 공동체에만 가능하다는 것은 선거로 구성된 대의제도를 절대화하기 위한 신화에 가깝다.)

또한 이러한 제도는 '전문가'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는다. 엘리트의 배타적 지배를 막는 효과가 기대되었다. 이것은 지적 차이가 권력이 되는 사회를 방지하고, 오히려 지식을 권력의 문제와 무관하게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을 만든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이러한 제도는 '평등'에 대한 자본주의 사회의 이해와는 다른 이해를 발전시킨다. 추첨과 자발성의 결합이 (정치적) 평등이라는 것이다. 결과의 평등 혹은 기회의 평등이라는 개념 구분과는 전혀 다른 평등개념인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평등 개념의 새로운 가능성을 사고할 수 있다. (물론 이 자발성이란,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지적, 경제적 독점을 배제하는 장치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정치적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이나 생계때문에 정치에 개입할 수 없는 시민은 정치로부터 '자발적으로' 배제되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선거는 귀족정에 적합한 것으로 사고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근대초기에도 마찬가지어서, 이탈리아의 공화제 도시국가에서도 추첨이 널리 사용되었다. 루소는 "추첨에 의한 선발은 민주정의 본질"이라고 말하고 선거는 귀족정에 적합하다고 쓴다. 귀족정은 시민들 사이의 차이와 구별이 자유롭게 나타날 수 있는 그런 체제이다. (따라서 현대 자본주의-대의민주정 사회도 귀족정에 가깝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17~18세기를 지나면서, 선거가 가진 정치체에 대한 정당성 부여라는 효과 속에서 선거제도는 민주정에 필수적인 것으로 이해되어간다. 영국(청교도)혁명과 미국독립전쟁이 특히 중요한 정치적 계기가 된다. 새롭게 구성된 정체에서, 정당성의 확보는 필수적이고, 선거는 여기에 유용했다. 또한 미국 헌법 논쟁은 선거의 의미를 더 확장한다. 통치에 우월한 자를 선정하는 데 선거가 유용하다는 것이다. '민주적 귀족정'이라 불릴 만한 것이 출현한다.

한편, 이러한 선거제도와 함께 확립된 대의제에서 여론의 자유는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선거로 선출된 대표가 자율적 판단을 허용받았기 때문에 인민에게는 '여론'을 형성할 자유가 주어졌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보가 공개되어야하고,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의 표현이 가능해야한다. 이 '의사표현'은 개별적인 것은 물론 집단적인 것을 포함한다.

대의제도는 정당정치 속에서 변형된다. 대표를 선출하는 투표행위는 소속감을 반영하는 행위가 된다. 특히 서유럽에서 계급정당의 발전은 투표행위는 계급공동체나 종교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하는 행위로 변형된다. 투표는 소속감과 정체성의 문제가 된다. 정당정치 속에서 '대표의 자율성' 혹은 '의회 내 토론' 과정도 제한된다.

저자는 최근의 경향으로 '청중민주주의'라는 것을 제시한다. 정당보다는 신뢰받는 개인, 미디어 선거, 여론조사의 영향력확대 등등이 요소이다. 저자는 이것이 인민이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방식으로 서술한다. 이 과정은 최근 각국에서 (특히 계급에 기반한) 정당정치의 약화, 인민주의의 확산과 궤를 같이 한다.

저자가 '청중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것의 한 경향인 인민주의 정치로 노무현 정권은 탄생했다. 그 정권은 대의제의 맹점인 권력의 위임을 극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의제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통치에 대한 정보의 공개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고(한미FTA 협정문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여론의 형성과 정치적 의사의 표현도 봉쇄하고 있다.(집회/시위의 원청봉쇄, 방송광고 봉쇄 등등까지) 이를 통해서 노무현 정권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선거제도의 한계와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해서 다른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컨데 '민주주의'가 '선거'는 아닌 것이다.

이 책은 '선거'를 역사적으로 고찰할 수 있게 함으로서 그것이 민주주의와 갖는 제한적 관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것은 선거를 절대화하고 맹목하는 것을 넘어서 민주주의 자체를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

한편 노동조합과 같은 대중조직에서 선거는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정치체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와 똑 같은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조직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대중적 권위를 부여하고, 대중이 신뢰하고 이들을 따르도록하는 헤게모니를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민주주의'는 아니며, 따라서 다른 민주주의를 담보할 수 있는 제도들이 도입되어야한다. (일부 공직에는 추첨이 이용될 수도 있다. 자발성과 결합하여, 평등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조합원 발의, 대표소환, 중요한 결정에 대한 조합원 투표가 보장되고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남한의 '민주노조' 운동에서 모든 노사합의사항은 '잠정합의'로서 조합원 찬반투표를 거쳐야하는 것과 같은 관행은 직접민주주의가 노동 현장에서 '발명'되었던 87년 민주주의 투쟁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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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시간을 달리는 소녀 (時をかける少女)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간을 달리는 소녀 (時をかける少女) 

2006년작 애니메이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어 호평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SF 혹은 그냥 판타지의 성격을 띄기도 하지만 , 소녀의 성장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 듯.
 
주인공 콘노 마코토(소녀)는 우연한 기회에 타임 리프(시간을 뛰어넘는 것)를 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훌륭한 SF, 판타지들이 그렇듯 그것은 하나의 설정.
 
콘노는, 몇번이건 시간과 사건을 반복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시간과 사건을 자유자재로 반복할 수 있는 가운데, 시간과 그것과 연결된 사건은 유일무이하고, 단 한번, 그래서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이 작품에서 시간은 항상 사건과 연결된다.) 가장 소중한 시간-사건은 그 많은 반복가능한 시간-사건 속에서 다만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하나의 시간, 그것이 가장 소중하다.
 
이 영화에서는 그것은 미래에서 온 소년, 치아키와 마지막 순간. "미래에서 기다릴게"
 
 
이 영화는 소녀의 성장소설, 애니이라는 점에서 하야오의 <귀를 기울이면>을 떠올리게 한다. 소녀의 성장소설, 하지만 어떤 때엔 이미 지난 것처럼 보이더라도 여전한 사람의 마음, 꿈들에 대해서 다시 두근거리게 하는 작품들.
 
<귀를 기울이면>의 이 장면에서 함께 부르는 <컨트리로드>는 정말 명곡. 동영상을 구할 수 있는 분들은 꼭 보시길. 애니메이션 최고의 명장면과 OST.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찾은 시간의 의미. 우리는 굳이 타임리프가 없더라더라도 사건과 시간들을 수없이 반복한다. 마치 굴레 속에 있는 것처럼. 하지만 콘노처럼, 단 하나의 사건-시간의 의미를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야 겨우 알게 된다. 그것이 비가역적인 시간 속에 사는 우리의 운명.
 
이 영화의 멋진 주제가.  ガ-ネット
 
그라운드를 달리는 그대의 뒷모습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보다도 자유로워
노트에 나란히 쓴 네모난 문자마저
모든 것을 비추는 빛으로 보였어
좋아한다는 이 마음을 알지 못해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이 시간이
그 의미를 나에게 가르쳐줬어
그대와 지낸 나날을
이 가슴 깊이 새겨두자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괜찮게
언젠가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다 해도
당신은 영원히 특별하고 소중하고
또 다시 이 계절이 돌아와
끝없는 시간 속에서
그대와 만난 일이
무엇보다 날 강하게 만들어줬어
나도 모르게 달려온 내일을
맞이했다고 해도
당신은 영원히 특별하고 소중하고
또 다시 이 계절이 다가 와
언제까지나 잊지 않겠다고
그대가 말해준 여름
시간이 흘러가 이제 와서 난
눈물을 흘렸어
그대와 지낸 나날을
이 가슴 깊이 새겨두자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괜찮게
언젠가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다 해도
당신은 영원히 특별하고 소중하고
또 다시 이 계절이 돌아와
 
그래, 그래, 시간은 그런 것.
소녀, 힘껏 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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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루시드 폴,The Light Of Songs (노래의 불빛)

 

Lucid Fall (루시드 폴) - The Light Of Songs (노래의 불빛)
루시드 폴 (Lucid Fall) 노래 / 만월당

 

이 블로그 오른 쪽 위에 있는 프로필 이미지는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2004년 앨범 표지이다. 루시드폴이 자신의 라이브공연 앨범에 붙일 '노래의 불빛'이라는 제목을 생각해낼 때 아마 머리속에 떠오르지 않았을까. 공통점이 거의 없어보이는 두 앨범이지만 말이다.

 

루시드폴의 이제까지 세장의 앨범에 실렸던 곡들 중에 공연에서 불렸던 스무곡이 두장의 시디에 실려있다. 공연실황이라 녹음이 아주 깔끔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맛이 있고, 맘에 드는 좋은 곡만 모았기 때문에 듣기에 편하다. 가슴에 남는 곡들. 공연에 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루시드폴을 처음 안 것은 1집 후에 나온 <버스, 정류장>이라는 영화의 OST를 통해서였다. 지금 생각해도 가장 듣기 좋은 음반이다. 영화도 좋았다.

 

영화에서 테마였던 곡은 Sur Le Quai 라는 연주곡, 불어인데 영어로는 On the dock 라는 뜻이라고한다. 그래서, OST 표지에서나 뮤직비디오에서 시디표지와 같은 이미지가 사용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도 하다.

+ 음악듣기 link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실 <버스, 정류장>의 '정류장'이란 어쩌면 dock였다면 더 의미가 어울렸을지 모를 상징이다. 그래서 이 시디표지의 이미지는 너무 친절해서 약간 억지스럽다. 작품이 영화가 아니라 시였다면 '정류장'보다는 dock 였을 것같다. 그렇게 음악에서는 dock. 각각의 장르가 가진 고유한 가능성과 한계들.

 

dock은 땅의 끝, 걸어갈 수 있는 마지막 곳, 길이 끝나는 곳, 만나는 곳,헤어지는 곳, 알수없는 어딘가로 열린 곳...이기 때문이다. 가사가 없이도, 가사가 없는 것이 그래서 어울리는 곡.

 

아래 어느 포스트에서 내가 '길'의 이미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앨범을 BGM처럼 계속 듣는 이유는,

그런데 요즘 내가 서있는 곳은 길보다는 dock이 아닐까. 저 이미지에 뒷 모습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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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아민 말루프 지음, 김미선 옮김 / 아침이슬

  

애초에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사람잡는 정체성>이라는 책 때문이었다. 책의 저자인 아민 말루프는 레바논에서 태어나서 프랑스에 사는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강요하는 것이 어떤 폭력이 되는 지 흥미롭게 보여주었다.(이 책 역시 추천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그리고 그가 쓴 또 다른 책인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은 이런 저자의 시각에서 쓰여진 책이다. "아랍인의 눈"이라고는 하지만 아랍인의 입장을 '종파적으로' 대변한다기 보다는, 침략당한 자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쓴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를 바라본다.

 

유럽인의 시각으로 재단된 '성전'으로서의 십자군 전쟁이 아닌 다른 시각을 접하기 위해서 의미있는 이 책은, 여기에 더해서 매우 흥미롭기도 하다. 100여년의 시간 동안 수많은 인물들이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소아시아 지역의 전쟁에서 명멸해갔던 것이다. 마치 팔레스타인의 삼국지라고 할 수 있을 것같은 이 역사는 하나의 서사이기도 하다.

 

특히 이 책의 포인트는 왜 아랍인들이 그렇게 무기력하게 침략당하고 학살당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솔직하게 보여주는 데 있다. 아랍세계는 단일한 정치체제가 무너진 후에 만성적인 내전에 시달려왔으며, 정치적 통일은 요원하였다. 심지어 수만명이 사는 도시의 인구가 깡그리 학살당하는 상황에서도 이런 조건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랍이 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정치적 단결을 우선 회복해야 했으며 여기에는 10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 점에서 아랍세계를 통일하고 프랑크족을 몰아낸 살라딘이 현대의 아랍 지도자들에게 이상적인 인물로 비치고 모방하기 위한 상징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미국이라는 기독교국가가 창설한 "라틴왕국"인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아랍인들을 학살하고 있지만, 아랍세계는 만성적인 정치적 분열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지 않는가. 그러니 살라딘의 땅인 시리아에서부터 칼리프의 땅인 이라크까지 (민족주의자이자 발전주의자들인) 바트당의 독재자들이 살라딘과 자신을 동격화하려는 것은 절실한 정치적 요구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 형식이지만 소설과 같이 생생하다. 김태권의 뛰어난 만화작품인 <십자군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다시 받을 수 있다. (도대체 <십자군 이야기> 3권은 언제 나온담!) 무지막지한 보에몽, 정신나간 사기꾼에 가까운 '은자 피에르'를 떠올리면서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생생한 느낌을 얻으려면 시공디스커버리총서로 나온 <십자군 전쟁-성전탈환의 시나리오>를 함게 보는 것이 좋다. 십자군 전쟁의 역사를 풍부한 도판과 함께 보여주기 때문에 당시에 프랑크족(유럽인들 말이다)과 아랍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다.

 

이런 시각적 이해 속에서 특이한 점을 곧 발견할 수 있다. 유럽인들이 그린 전투장면은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느낌이 드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영화 <반지의 제왕>이다. 수많은 판타지 작품들의 기원 말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후의 판타지작품들에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아래는 영화에 정의의 편으로 나오는 중세기사들, 이런 녀석들이 바로 십자군 전쟁에서 프랑크족이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서 영화에서 우르크하이 같은 녀석들은 유럽이 그린 아랍인과 유사한 이미지. 검은피부에 갑옷도 못갖추고 있다. 당시 전투에서 프랑크족의 주력은 갑옷을 입은 기병이었으며, 이에 비해서 아랍인들은 갑옷은 없는 경기병 혹은 기마궁수였다.

 

<반지의 제왕>만이 아니다. 일전에 화제가 되었던  <다빈치 코드>는 "성전기사단Knights Templar"의 전설에 대해서 다룬다. <다빈치 코드>가 신성한 존재로, 핍박받는 순교자로 그리는 "성전기사단"은 죄송하지만 십자군 전쟁의 호전적인 학살자들이었다. 이들은 무장한 수도사들과 같은 조직으로, 기사와는 달리 상비군을 구성하고 강력한 무장력을 갖추었다. 덕분에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는데, 이런 과정에서 발생한 유럽의 왕조들과의 대립은 아시아에서 프랑크국가들의 몰락 이후 성전기사단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진다. 이들이 탄압받았다고 해서 '선량'한 것은 전혀 아닌 것이다. 갖가지 방식으로 침략 전쟁의 침략자들을 미화하는 방식이라고나 할까. (이들 "성전기사단Knights Templar"은 여러 판타지에, 심지어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게임에도 반복된다. "하이템플러" 혹은 "다크템플러"로 등장하는 포로토스 유닛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미지는 최근의 영화에도 다시 반복되고 있다.

말도많은 <300>이라는 영화다. 크게 히트하고 있다고 하는데,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아래의 이미지가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유럽인들이 처음 보고 놀란 동방의 괴물, 바로 코끼리인데, 당시 유럽인들은 코끼리를 보고 놀라서 이렇게 그렸을 것이다. (왼쪽은 <반지의 제왕>, 오른쪽은 <300>의 한 장면.)

 

 

 코끼리뿐 아니라 야만족의 모습도 비슷한데, <300>에서는 이 야만족은 직접적으로 페르시아인, 현재의 이란을 지칭한다. 결국 이 모든 이미지가 동일한 근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십자군 전쟁에서 시작된 아랍인에 대한 이미지를 인종적, 문화적 편견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페르시아는 그리스에 비해서는 한참 앞선 문명국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이런 점에서 <300>이라는 영화가 가지는 정치적 프로파겐다로서의 성격을 지적한 아래 기사도 참고할만하다. 프레시안의 기사 "괴벨스의 나치선전물 같은 영화 <300>" 나도 TV의 영화소개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영상만 보고도 역겨웠는데 역시 그렇고 그런 정치영화였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로보면, 아랍인이 훨씬 문명적이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적이라고 해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으며, 학살을 일삼는 프랑크족을 이해하지 못했다. 문화적으로도 훨씬 성숙되어 있었는데, 이후 유럽은 이 전쟁 이후 많은 것을 아랍으로부터 배워갔고, 특히 이들이 다시 접하게된 그리스-로마의 유산은 르네상스를 촉발한다.

 

그에 비해서 아랍의 피해의식은 아랍세계를 점진적으로 후퇴시키는 요인이 되는데, 이 결과는 십자군 전쟁 후 6~700여년이 지난 19세기, 20세기 유럽에 의한 아랍의 정복과 분열까지 이어진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은 굳이 '현재의 시각으로' 역사를 재해석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실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역사적 사실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만으로 현재를 다시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모든 전쟁에서 침략자가 아니라 피침략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먼저 바라보아야한다면 십자군 전쟁에도 마땅히 그래야한다. 그 과정에서 보다 많은 진실을 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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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사람풍경, 천개의 공감


사람풍경
김형경 지음 / 예담

천 개의 공감
김형경 지음 / 한겨레출판

  

정신분석학의 여러 개념들은, 나에게는 말 그대로 '개념'들일 뿐이었다. 물론 자기분석을 해보는 과정에서나, 몇번의 정신과 상담에서 드문드문 그 개념들의 현실적 의미를 생각할 수 있었지만, 아무튼 나에게는 그 개념들은 현실의 지시대상이 불분명한 채, 이론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점유하는 토픽(topique)들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두 책은 그 개념들이 현실의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나에게 있어 추상적인 개념들이 현실의 지시대상을 획득했다고나 할까. 놀라운 독서 경험. 사람들에게 추천하거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사람풍경>은 외국을 여행하면서 있었던 이런 저런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정신분석의 개념들, 혹은 사람들의 정념의 정신분석학적 의미를 설명한다. 낯선 곳에서의 여행이, 그 '낯선 것'들을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도 알았다.(그래서 '관광'이 아니라 '여행'이 의미있는 것이란 걸 이제야 알다니!) 

 

<천개의 공감>은 신문에 연재된 상담을 묶은 책으로, 정신적 문제를 앓고 있는 사람들의 사례를 분석하고 나름의 처방을 내려주고 있다. 역시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저자가 각각의 책에서 솔직하게 자기분석의 결과를 책 속에서 드러내는 덕분에 이해가 쉽다. 그것은 또한 똑같이 나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녀와 내가 유사한 정신적 문제를 갖고 있다고 느꼈다면 아마 다른 독자들도 그랬을 텐데,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이 유사한 정신적 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형경은 소설가다. 오랜 동안 정신분석치료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비전문가인 작가가 이렇게 구체적이고 능수능란하게 사례들과, 개념들을 다루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비전문가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서 서로 논쟁하는 상이한 학파들의 개념을 편리하게 끌어 쓸 수 있다는 것이, 드문드문 서로 논리적으로 정합하지 않는 설명을 내놓는 단점으로 작용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 정도는 독자들이 가려읽을 일이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많은 것이 나의 이야기로, 어떤 것은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로 들려왔다. 무엇보다 각각의 주체 안에 그런 여러가지 정신적인 문제들이 복합적이며, 그나마 내가 나를 가장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게다. 많은 사람들이 또 그런 각자의 문제를 나와 유사하게 갖고 있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위안이 된다. 많은 이들과 동병상련.

 

이 책들을 통해서 우리 경험의 어떤 구체적인 요소들이, 그를 통해 형성된 무의식의 어떤 측면들이 우리에게 어떤 문제들을 나타나게 하는 지 알 수 있다. 그것도 평범한 우리 모두가, 한국 사회의 가족구조에서 겪었을 문제들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건 매우 값진 일인데, 추상적인 개념 이전에 우리가 가족 속에서 어릴 적부터 겪었을  문제들을 한국의 가족형태, 이 가족형태의 모순 속에서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우리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례가 된다.(어쩌면 소설가로서 저자의 묘사능력이 도움을 주었을 수도 있다.)

 

책을 읽는 동안, 한장 한장을 넘길 때마다 내내 나 자신을 돌아보느라 독서의 속도가 나지 않는다. 나에게 이런 상황은 정신의 어떤 요소를 형성시켰을까, 그래서 내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의 충족 혹은 좌절에 어떻게 반응해왔을까, 때로 그것이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상처도 되었겠구나..

 

그렇게 해서, 나 자신의 고유한 문제를 인식할 수 있게 하고 그것을 한결 더 객관적으로 대면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단번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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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1

 

정신분석 치료는 너무 비싸고 시간도 많이 들어서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은 엄두를 내기 힘든게 사실이다. 이런 종류의 치료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할 때, 건강보험은 물론 이려니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얻어내는 데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뜻맞는 사람들이 있으면 같이 해볼 만한 운동의 하나라는 생각도 든다.

 

그건 그렇고 책을 읽으면서 생각난 노래 두가지만 언급해보자.

 

우선, 델리스파이스의 '동병상련'

여기서 들을 수 있다. : "푸른사막"님의 블로그

어쩌면 모든 것이 여기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왜냐하면 모든 문제들의 근원에 있는 '사랑'이라는 정념이 시작되는 데서, 김형경이 지적하는 것처럼 (자신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사랑을 선택하는 병리적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Simon & Garfunkel의 Bridge Over Trouble Water.

여기서 들을 수 있다. : "나야"님의 블로그

When you're weary, feeling small, When tears are in your eyes.
I'll dry them all, I'm on your side.
Oh, when times get rough and friends just can't be fou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

여기서 "I"란 말 그대로 그 누구보다 "나"일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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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2

 

다만 정신분석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경향인 것같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정신분석이 특정한 치료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그 치료의 결과는 사회의 '정상적' 관계망 속으로 환자를 복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 결과, 기존의 사회적 관념에서 부적절하거나 병리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것은 '교정'의 대상이되고 이데올로기적 통념이 '정상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이런 것은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근대 정신의학의 성격으로 지적한 것이다. 정신의학과 결합한 형태로 진행되는 정신분석의 특수성(한국에서만 그런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김형경이 제시하는 정신분석의 실천도 본질적으로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서 직장에서 반항적인 여성에 대해서 외디푸스 컴플렉스단계를 제대로 거치지 못했다고 진단한다거나(-따라서 그 단계를 반복해야한다고 말할 때), 군복무가 나르시즘을 치유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거나하는 언급 등이 있다. 정상가족이 정신건강을 위해서 필수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도 있다. 매번의 정신적 문제가 해결되는 목표는 '가족의 유지'가 되기도 한다.(그럼 다른 가족 형태를 시험하는 것은 정신건강에 해로운 일로, 지양되어야하나?)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통념, '정상'이라고 규정된 정신적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주체의 무의식을 치료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정신분석과 이를 통한 치유의 결과가 기존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통념에 기초한 '정상적인 상태'에 이르러야만 주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 설사 그렇다고해도, 그렇다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다른 종류의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단적인 주체는 치료의 대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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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흐름,「새로운 실천을 꿈꾸며」


'새로운 실천을 꿈꾸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는 금속노동자들" 엮음


재작년 금속연맹 임원 선거(박병규 선본)을 통해서 하나의 세력 혹은 경향(흐름)으로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새흐름"은 작년 7월에 300여 페이지 분량의 책자를 발표했다. '노동운동의 발전과 미래를 고민한 글 모음'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소책자는 그 동안에 "새흐름"의 내부에서 공유되고 간간히 외부에도 제안되곤 했던 문서들을 정리해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새흐름'은 스스로의 주장처럼 명확한 조직적 형태를 취하기 보다는, 하나의 경향성이고 네트워크 형태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경향들을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이 중에는 서로간에 매우 이질적인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만큼 정치적 방향에 있어서도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타 정파'들로부터는 이들의 비일관성이라든지, '새흐름'으로 분류된 일부의 문제점을 전체 '새흐름'의 문제인 것으로 부풀려 비난한다든지 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렇다고 해도 이들이 '새흐름'의 일부인 이상 비판이 아예 틀린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은 문서로 제출된 입장을 살펴보는 것일테다. '새흐름'은 주로 금속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 소책자는 매우 흥미롭다. '조직'의 입장을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려니 부담되는 점도 없진 않지만, 암튼, 개인적인 느낌들이다. 우선 소책자의 핵심적인 주장, 내용을 살펴보고 몇가지를 평가해보자.


현장의 정서(자동차 대공장을 중심으로)

우선, 앞 부분은 현장의 정서를 금속 자동차 공장을 중심으로 진단한다. 현장활동가들의 증언을 모았기 때문에 생생하게 제조업 대공장 노동자들의 정서를 읽을 수 있다.(금속 외부의 활동가들에게는 좋은 읽기 경험이다.) 생산의 해외이전 추세, 98년 정리해고 경험 등으로 고용불안이 극히 심화되어 있다.(2007년 위기설 등) 이와 함께  “있을 때 벌자”는 분위기가 현장에 팽배하다.  이것은 장시간 노동으로 이어지는 데 주40시간제 시행에도 불구하고 잔업을 확보하는 것이 노조의 능력으로 평가받는 것이 현실.

이  속에서 삶의 질은 오히려 지속적으로 저하된다. 그러나 잠재된 휴식에 대한 욕망은 이 이면에 팽배하다. 과도한 장시간 노동으로 인하여 가족의 위기가 발생하고 오히려 삶의 질을 저하되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불만도 잠복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노동조합의 현장 장악력은 저하되고 있다.  회사측의 일상적 회식을 통한 조직관리 등에 노동조합이 대응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조합원과 활동가의 거래’가 선거를 매개로 일어난다. 조합원은 자신의 실리를 직접 요구한다.  작업장 내부의 공동체성은 붕괴되는 중이다. ( 이는 새흐름이 노동자운동의 대안으로 ‘작업장 혁신’을 주장하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완성차와 부품사 노조의 갈등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 바이백 등에 대응하는 데에는 완성차의 지원이 필요하지만 무관심한 것이 현실이다.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대부분 무관심하지만 (사업장에 따라서는) 투쟁이 ‘과도하다’는 정서도 존재한다. 그러나 노조는 구조조정의 방패막이로 사고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노동조합 활동의 관행과 타락

현장조직, 활동가들은 노조 선거에 대한 과도하게 몰입하고 있다. 현장투쟁보다 선거 대응이 중심이며 대공장 현장조직은 사실상 선거조직이라고 볼수 있다. 이들 현장조직들은 선거 때마다 후보의 인맥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새흐름의 이런 주장만이 아니라도, 이에 대한 연구논문도 많이 나와있다.) 그러나 중소사업장에서는 간부층을 충원하기 어려워 임원선거도 힘든 조건이다.

상급단체의 정파적 대립이 이러한 현장단위의 ‘맹목적’ 대립과 선거정치를 부추기고 있다.  운동노선에 따른 현장조직의 분립은 이미 과거의 이야기이며  현장조직에 속하는 것이 작업장 배치 등에 있어서 일종의 ‘보험’을 드는 것으로 사고될 정도다.  상급단체에서도 간부의 인선이 ‘전문성’, ‘현장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줄’을 기반으로 형성되고 있다.

이  속에서 현장 조합원들 사이에는 ‘노조 도구주의’가 만연한다.("자판기 노조") 노조가 노동자 민중과 투쟁하는 기관이 아니라 자신의 협소한 이권을 지키기 위한 이익단체, 도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업별로 담합적 노사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노조가 연대를 배제하고 이권을 단위 기업별 노조 안에서 나눌 뿐이며 그렇다면 전투적이라고 해도 담합적일 수 있다고 진단한다.  이를 비판하기 보다는 득표를 위해서 담합적 노사관계를 인정하는 정파들도 함께 문제가 있다.

민주노총 평가

주로 96-97년 총파업투쟁을 평가하면서 민주노총은 가두정치를 선택하기 보다는 의회 내의 타협을 통한 재협상을 선택했다고 비판한다. 민주노총은 IMF 이후 이갑용(현장파) 집행부도 총파업을 번복하면서 동일한 한계를 반복한다.  현대자동차 등 대공장에서도 비정규직 비율 16.9%유지합의라든가 식당여성노동자 정리해고 수용과 같이 신자유주의 공세에 후퇴해왔다.

새흐름은 민주노총의 위기에 몇가지 사례를 드는데 이런 것들이다. 대의원대회 정족수 미달, 재정자립 실패(정부보조금 수령), 한국노총과 차별성 약화 등. 특히 이들은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는 상층 지도부만의 위기는 아니라는 점. 실리주의는 현장에서 더욱 만연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대공장)현장에서 사용자로부터 관리되는 대의원, 활동가, 노조간부는 한편으로는 권력화되고 한편으로는 대중과 유리된다. "노동운동은 무능을 넘어 위선으로 나가고 있다"

지도부가 문제인가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도부 교체 전술은 한계가 분명하다. 98 노사정 합의 이후, 2002 4.2파업 철회 이후 비대위와 새 집행부가 구성되었지만 역시 제대로된 투쟁은 조직하지 못했다.따라서  지도부 교체가 대안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현장이 대안이라는 주장도 한계가 있다.  현장이 실리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점에서 “깨끗한 민주노조의 근거지”로만 사고할 수는 없으며 현장을 바꿀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정정파의 문제라는 주장도 한계가 있다. 정파들은 줄서기를 통한 권력장악에 몰두해왔다.  98년 이후 현장파-중앙파-국민파가 민주노총 권력을 번갈아 교체해왔지만 어느 집행부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역사가 있다. 따라서 특정정파가 민주노총 위기의 원인이라 주장하기 힘들다는 것이 명확하다. 모두가 위기의 공범이라는 인식이 필요한 대목. 그러나 현실에서 정파들은 역설적이게도 위기를 봉합하기 위한 정파연합을 발전시킨다.

노동단체 운동도 한계가 드러났다.  단체들은 독자적인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노조와 당의 정책사업을 대리하는 정도의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다.  정파들도 민주노총 내 정치에만 몰두하는 중이다.

또한 현장주의, 조합주의의 한계도 지적한다.  산업적, 지역적, 사회적 의제를 간과하는 ‘현장제일주의’는 협소하다는 것. 조합원의 실리주의와 계급적 노동운동의 원칙 사이에 동요하다가 전투적 실리주의로 전락해왔고 이는 (민주노동당을 통한) 조합주의적 정치활동으로 연결된다. 정치/경제의 분리로 노조의 실리주의는 정당화된다.  이런 상황에서 ‘투쟁이냐 타협이냐’는 식의 (잘 못된) 대립구도는 결국 국민파의 입지만 강화시키고 있다.

각 정치운동에 대해서는 이렇게 평가한다.  민주노동당은 의회 선거정치에만 올인하고 사회운동을 외면하고 있다. 노동자의 힘은  ‘중앙파와 연합한 반국민파 결집’을 반복한다. 만약 ‘비제도적 투쟁정당’의 이상이 민노당 내에서 가능하다고만 하면 중앙파와 혹은 민주노동당 내 해방연대 등 좌파들과 차이가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의 힘은  정파운동의 방식 반복하는데, 노조 투쟁지원단체로 등장하다가 현장 셀을 꾸리고 조직원을 늘려가는 방식의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새흐름은 노힘에게 "오히려 자신의 정치계획을 제시하라"고 요구한다. 또한 비합정파들. 이들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전위’를 구성하고 대중을 지도하려 한다는 점에서 관념적이고 여전히 계몽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흐름은 "좌파 통합"은 불가능성하다고 말한다. ‘좌파’의 위치는 오직 ‘반우파’로만 확인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내 좌파, 민주노총 내 좌파들) ‘공유 지반’이 없기 때문에 ‘좌파통합’노선은 불가능하다는 것. 이제까지 노동자의 힘은 좌파 중 중간정도의 스펙트럼으로 ‘좌파 좌장’ 역할로서, 중앙파와도 연합할 수 있고 비합좌파와도 연합할 수 있는 위치에서 힘을 발휘해왔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각 정파들의 차이가 소진되는 상황에서, 좌파가 단일한 정치노선을 갖지 못하는 현실에서 노동자의 힘을 중심으로한 좌파 결집론은 불가능(’활동가 조직‘)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좌파통합’ 보다는 새로운 질의 운동을 시작할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 과제라는 주장이다.

운동적 대안

새흐름은 우선 운동의 현실, 즉 정파, 단체운동의 쇠퇴와 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재편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대안을 구성하자고 제안한다. 이 속에서  이념을 급진화하자, 신자유주의에 대항하자는 등의 주장을 하지만 이 소책자에서 그 실체는 모호하게만 나타난다. 다만  대안‘의제’를 만들자는 주장은 보다 구체적이다.

우선 "분배에서 개입과 통제로" 나가자고 제안한다.  경제투쟁으로 대공장의 임금은 인상되었지만 하청과 임금격차는 더욱 심화되었다. 노동과정에 대한 개입과 통제, 기업과 산업, 사회적 통제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기술을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위해 사용할 것인가를 제기하자는 것. 새흐름은 구조조정에 대한 개입과 통제를 통해 노동자가 작업장과 산업에 개입하는 것은 자본주의 소유관계에 대한 투쟁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제기되는 주장이 논란이 되는 사회적 합의와 관련된 것. "사회적 합의주의는 반대하지만 사회적 합의는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동자가 요구하고 정부와 자본이 받아들이는 것이 사회적 합의라면 국가차원의 교섭구조, 산업차원의 교섭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의제'를 통해 노동자를 사회적·정치적 계급으로 형성하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협소한 현장주의를 넘어서 재생산영역을 포괄하는 "계급형성"(의료, 주거 등)의 쟁점들이다.  재생산의 정치=생활의 정치=산업과 지역의 정치. 현장에서 재생산의 정치란 더 적게 더 쉽게 더 안전하게 일할 권리, 노동의 질을 추구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작업장 혁신이 제기된다. 그밖에 요구에 있어서 공세적인 투쟁, 시기에 있어서 계획된 투쟁, 투쟁형태의 혁신 등을 주장하고 사회적 연대 강화를 제기한다.

임단투도 혁신되어야하는데, 임금은 양의 문제에서 구조의 문제로 전환되어야한다. 산업연대임금을 형성하자는 제안은 여기서 나온다. 사회적 복지, 사회적 임금을 확보하자는 것. (완성차의 2004년 ‘사회기금’의 예)  단협은 경영과 산업의제에 개입할 수 있도록, 작업장 혁신을 위한 규범을 담아야한다. 대공장은 단협을 통해 경영권과 산업의제에 대한 개입과 통제의 근거를 만들고 그에 기초하여 생산과 투자계획에 대한 협상, 산업정책에 대한 협상에 주력해야한다.

이어서 임금전략, 고용전략, 노동의 질, 산업정책과 경영에 대한 개입과 통제를 요구하는 것으로 투쟁의제를 혁신하자고 제안한다. 산업적-사회적 의제란 이런 것들이다.

제조업 공동화에 대한 대응으로 산업정책에 개입. 이는 조합원의 단기 실리주의 극복의 방법이며, 노조의 사회적 고립에 대응, 노동운동의 전략적 발전 방향이다.(노동자가 사회적 주도계급으로 나선다) 이를 위해서는 임단협 수준이 아닌 운동전략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의제선점도 필요하다. 이와 함께  산업적·사회적 의제를 다루기 위한 교섭은 필요하다.(“아무런 대책없이 노사정위 불참을 주장하는 대안없는 반대를 외쳐서는 안된다.”)

새흐름의 주장 중 또한 독특한 것이 '작업장 혁신'이다. 작업장을 노동자 생애의 가장 중요한 터전으로 사고하자는 것이다.  작업장은 노동계급의 자기 훈련과 재생산의 핵심공간(작업장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응력필요)이라는 점에서 작업장 혁신은 단순히 작업현장투쟁이 아닌 자본전략에 대한 전면적 투쟁이라고 주장한다. 작업장 진단,작업장 ‘협상의 혁신’ 사업을 진행하자는 것.

조직적 대안

새흐름은 산별노조에 대해서 '널뛰기' 입장을 보여왔다. 신자유주의 시대, 산별노조 전환은 한계를 갖고 있다고 진단한다.(그래서 자동차 업종산별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어서 금속산별에서 “이중단일체계”를 제안하기도 했다.(업종과 지역 동시편제)) 그러나 이후 형성될 산별교섭과 투쟁은 (1) 산업정책⇒지역산업정책  (2) 지역적 공간적 동일성⇒지역공동체 두가지 방향이 가능하나, (1)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지역연대강화가 가지는 한계가 있다는 것.

정규직, 비정규직, 신세대 노동자, 정당 등 모두 새로운 운동 주체가 출현하기는 한계적.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활동가 네트워크 자체가 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

 

구체적인 현장감각과 노동자운동이 처한 현실 분석

새흐름의 이 소책자의 전반부가 매우 흥미로운 이유는 생생한 현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이데올로기 공간인 '현장'에 대한 진단은 구체적이고 치밀하다.

(나는 '현장' 개념에 대해서 예전 홈페이지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현장"은 어떤 신비화된 공간도 아니며, 어떤 때는 계급적 입장에 맞게 투쟁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보수적-퇴행적이기도 한 대중들의 삶의 공간 자체, 노동대중들이 노동"현장"에서 자발적으로 구성하는 하나의 "사회"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간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모순들이 관통하는 모순적인 공간이다. - "현장" 개념의 모순과 난점)

특히 자동차 대공장 노동자들이 가진 △ 대중 이데올로기, △ 그것이 형성된 배경과, 또한 △ 그것이 노동조합 활동관행, 노조운동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연결고리를 해석하는 대목은 인상깊다. 이러한 분석들을 통해서 자동차 대공장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가지는  생산과정에서의 '구조적 힘'을 자각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할지는 아직 잘 방향잡지 못한 상황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럼 그 '방향'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가이다.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운동대안

그러나 이 소책자를 읽으면서 1/2 정도의 분량을 넘어가면서부터는 물음표가 쳐지기 시작한다. 운동의 대안을 제시하는 대목에서는 현실진단에 걸맞는 깊이가 부족하다. 그래서 새흐름의 현실진단과 대안은 대단히 불균형하게 느껴진다.

대표적인 대안으로 제시하는 작업장 혁신, 산업정책 개입과 같은 것들. 이런 과제들은 (이런말 죄송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연맹급의 노조 상급단체의 정책담당자의 현실적 고민이 될 만한 문제들이다. 문제는 이런 대안은 딱 그 정도의 수준이지, 애초에 새흐름이 제시하려고 했던 "노동운동의 발전과 미래"를 말하기에는 크게 미달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문제 분석과 대안 제시가 논리적으로도 불균등하기 때문이다. 현장의 문제로 제기된 것들이 발생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과정이다. 따라서 원인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안, 투쟁방향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로 나와야한다. 그런데 정작, 작업장 혁신, 산업정책 개입과 같은 것은 중요한 정책적 과제이기는 하지만 운동의 방향으로는 부정합하다.

그러다보니 사회적 교섭과 같은 쟁점에서는 혼란이 발생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코포라티즘의 위상, 국가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쉽게 산업정책 개입을 위한 사회적 교섭을 말하기 힘들 것이다. 공장이전과 같은 문제는 국가의 산업정책 개입의 문제라기 보다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본의 생산으로부터의 철수와 금융화, 초민족화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정책실무 차원에서 국가의 산업정책에 개입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겠지만 그것은 '운동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좌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작업장 혁신'과 같은 쟁점도 신자유주의 하에서 린생산, 적기생산과 같은 자본의 전략에 대한 면밀한 비판이 없이는 위험하게 동요할 수 있다.

정책실무 차원의, 실무적 고민은 산별노조와 관련된 입장에서는 동요로 나타난다. 사회운동과의 연대 확장이 중요하다는 새흐름이 오히려 업종 산별, 자동차 대공장을 중심으로 한 업종노조를 옹호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산별이 가결된 상황에서도 지역-업종본부의 '이중단일체계'를 주장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광역지역본부'를 주장한 좌파들보다 후퇴한 안이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지역본부를 골간으로 하자는 입장으로 전환하였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이런 동요 역시, 실무적 고민이 정세 분석에 기반한 운동적 전망을 압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로 보인다. 이렇게 실무적인 단기 판단을 자주하다가는 자신의 정체성조차 혼란스러워지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이는 지역운동과의 결합, 지역중심의 운동과 같은 쟁점에 대해 '의미는 인정하지만 현실 가능하지 않다'는 접근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는 자동차 산업에 주로 기반한 인식틀 때문이기도 하다.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은 사업장 내의 구조적 힘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지역적 연대를 통한 연합적 힘 형성에 소극적이었는데, 이런 경향이 새흐름에서도 변형된 형태로 반복된다.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이 21세기에도 여전히 노동자계급의 전형일 수는 더 이상 없다는 점에서, 이런 한계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자운동의 전망을 고민하는 데 있어서 치명적일 수 있다.

넘어서야할 곳

그래서 안타깝다. 한 금속 활동가 동지는, 금속에서는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솔직한 사람'을 만나서 일을 함께 해야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적어도 새흐름은 그런 점에서 '솔직'하고 진정성이 있어 보인다.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것이 '운동'인 이상 어떤 방향으로 하는 것인지는 결정적인 문제다.(솔직한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옳은 말'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여전히 중요하다.) 새흐름은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를 인정하고, 그럴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옳은 말'만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문제들의 본질도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인식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매우 소중한 장점이다.

그러나, 운동적 대안을 내고 함께 투쟁하기 위해서는 더 나가야한다. 솔직한 것만으로 운동의 대안이 나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의 원인을 인식하고 투쟁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인식이 필요하다. 현재에 있어서 그 고갱이는 신자유주의 비판이다. 이에 대한 인식이 누락되고는 보다 일반화된 대안을 제출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 비판이란, 단지 신자유주의가 나쁘다, 그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라고 말하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새흐름의 이 소책자도 충분히 하고 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문제는, 그것이 원인은 무엇인지, 따라서 어떻게 작동하고 노동자 민중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래서 어떻게 싸워야하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새흐름의 이 소책자가 온 지점은 여기까지인 것같다. 자동차 대공장의 현실에 대한 인식,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한 정책, 운동의제 대안. 그러나 이 활동가들이 단지 자동차 업종 운동을 할 것이 아니라 사회운동, 변혁운동의 일부로서 '노동자운동'을 하고자 한다면 한 걸음 더 나가야할 것같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실천'은 요원할 것이다. 새흐름 동지들이 "새로운 실천을 꿈꾸며"라는 소책자에서 보여준 진정성을 생각해본다면, 새흐름의 그런 전진은 우리 운동에 큰 성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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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플루토Pluto, 아톰Atom

 
플루토 Pluto 
테츠카 오사무 지음, 우라사와 나오키 그림

술자리 대화에서 추천받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 <플루토>.
<20세기 소년>, <몬스터>, <마스터 키튼> 등을 그렸던 우라사와 나오키는 테츠카 오사무의 <철완鐵腕 아톰> 24~25화, "지상최대의 로봇"편에서 테마를 가져와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 테츠카 오사무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인지, '지음'을 그로 했다. 작품의 이미지, 인물 모든 곳에서 오마주를 확인할 수 있다.(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상최대의 로봇"편을 애니메이션으로 봐야한다.)  이제 일본 만화들이 세대를 넘어 세대간-재해석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작품소개는 주요 포탈사이트를 참고하시면 되겠고. 현재 국내에는 2권까지 정식발매되어있다.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 4권+a까지 볼 수 있다.)
"지상최대의 로봇" 편에 나오는 7개의 로봇과 이들을 차례로 '살해'하는 '플루토'가 나온다. 캐랙터들은 모두 재창조되었는데, 위에 책 표지에 나오는 것이 게지히트 형사(左)와 아톰(右)이다. 각각의 로봇 캐랙터 모두(인간도 마찬가지로) 보다 '인간적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http://member.jinbo.net/rudnf/blog/pluto1.jpg  http://member.jinbo.net/rudnf/blog/atom1.gif
△ [左] <철완 아톰>에서 게지히트 형사와 플루토의 대면, [右]  <플루토>에서 아톰.

그들은 모두 '인간적'이다. "공각기동대"에서 시작해서 헐리우드의 "AI", "바이센티니얼 맨", "아이,로봇"에 이르기까지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들의 인간화, 로봇이 인간과 유사한 영혼을 갖게 되는 이야기들은 많이 변주되어왔다. 그러나 그 원형은 아무래도 '아톰'이라고 할 만한데, 이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그들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마침내 '완벽한 로봇'은 증오와 분노, 질투, 그리고 슬픔까지(그렇다면 사랑까지), 인간의 감정을 갖게 된다는 (아톰의 원래 창조자인) 텐무 박사의 이야기는 이 작품이 놓여진 배경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단지 '배경'이라고 말한다. 이 만화는 발달한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철완 아톰>이 처음 연재된 50년대초부터 60년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방영된 70년대는 일본의 전후복구와 경제부흥이 가시화되면서 마치 인간이 기계의 부속으로 완전히 편입되는 것으로 느껴졌던 시기, 그래서 '인간적인 것'에 대한 고민이 더욱 커진 시기다. 그런 고민은 비인간적인 것의 인간화라는 우회로를 통해서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묻는다. 인간은 인간적인 무엇을 갖고 있는가.

(그런 점에 비해서 "공각기동대"는 고유한 '인간'에 비해서는 '인공적인 지능' 자체에 촛점을 두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를 제기하지만, 나는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 맥락, 의미는 <철완 아톰>에 비해서 후퇴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특히 "공각기동대2-이노센스"는 더 심하다.) 그런 점에서 그것을 다시 복제하는 헐리우드는 말할 나위가 없다.)

http://member.jinbo.net/rudnf/blog/pluto2.gif그래서, 우라사와 나오키의 이 작품도 오히려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적인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그것을 갖고 있는가. 그들은 전쟁에 가슴 아파하고, 아이를 돌보며, 사랑하는 사람과 로봇을 지키려고 하고, 살아있는 것들/혹은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을 갖고 있다.("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 해야지" /윤동주, 序詩) 증오와 분노로 고통받는다.(한 에피소드에 자신을 드러낸 플루토가 보여주는 감정은, 다른 것들보다 '슬픔'이다.) 당신들은 그것을 갖고 있는가.

"그 아이는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나는 마음이 벅차 올랐다. 로봇인 내가.."
(로봇 형사 게지히트가 아톰을 만나고 헤어지는 장면.)

고유하게 '인간적'이라고 정의된 것들에 대해서 질문하면서 우라사와 나오키는 이 속에 존재하는 증오와 고통을, 인간적인 것의 또 한 부분으로 대면시킨다. 가장 예술적이고 '인간적인' 영혼을 가진 플루토는 (오히려 아마도 그것 때문에) 고통받고 주체할 수 없는 폭력으로 나간다. 그런 점에서 우라사와 나오키는 또한 단지 '인간적인 것'이 고유하게 '선한 것'으로 규정된 어떤 것들이 아니라는 점, 그렇기 때문에 증오와 고통에도 눈감지 말 것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합성을 눈앞에서 대면할 것을 요구한다.

'플루토'는 말하자면 그런 존재다. 인간을 비추어보는 거울.

한편, 로마신화의 플루토Pluto는 그리스신화의 하데스Hades, 저승의 신이다. 그래서 Pluto는 명왕성冥王星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년, 국제천문연맹의 결정으로 태양계의 형성planet이 아니라고 '결정'되고 소행성asteroid 134340라는 이름을 얻었다. 마치 이 만화에서 플루토가 SOL228350..뭐 이런 이름을 달고 있는 것처럼. 작년에 이 결정이 있은 후에 '미국 방언협회'라는 단체가 plutoed라는 단어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고 한다. '추락하다, 위신이 떨어지다'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저승의 신이 이런 식으로 취급받아도 되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플루토, 하데스를 먼 태양계 외곽의 소행성대인 카이퍼벨트에 추방하고자하는 무의식들이 작동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라사와 나오키가 보여주는 것처럼, 플루토-죽음은 인간적인 것-삶의 이면이며,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한 측면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고, 우리의 '인간적인 것' 그 자체일지도 모르는 고통들에도 대면해야한다. 마치 아톰이, 플루토에게 뛰어드는 것처럼. 그래서 그 속에서, 그것은 (주인공격인) 게지히트, 이건 또 하나의 당신이라고, 아니 (어쩌면) 당신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4권,Act27) 그때 아톰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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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산자와 죽은자


산 자와 죽은 자 1,2
제라르 모르디야 지음, 정혜용 옮김

  

(※ 열심히 썼다가 글이 등록이 안되고 날아갔는데 아주 힘빠지네요. 시스템을 탓할 것인가, 부주의를 탓할 것인가. 그래도 오기 발동. 다시 작성.)

 

프랑스의 소도시 로셀, '코스'라 불리는 공장폐쇄에 직면한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에 돌입한다. 한 신문은 이 소설을 "탈공업화 시대의 제르미날"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것보다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제르미날"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듯.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노동자들에게 어떤 삶을 강요하는지는 프랑스나 남한이나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것같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너무 전형적이고 따라서 사실주의적인 소설. 등장하는 노동자 인물들의 대사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의같기도 하다. (그래도 그만한 인식들이 어느 정도는 퍼져있으니 이런 묘사가 가능하겠지. 부럽다.)



생산에서 철수하는 자본, 금융세계화

 

이 소설의 주된 무대인 공장은 플라스틱필름을 제조하는 공장이다. 이 공장이 결국은 폐쇄되고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설수밖에 없는 과정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과정에서 자본이 생산에서 철수하고 금융투기로 전환하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1) 경쟁력이 약화된 공장을 한 초국적 기업이 인수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공적자금과 물질적, 행정적인 편의를 제공받는다.

(2) 그러나 이 기업은 생산을 남부유럽, 동유럽에 재배치하면서 물량을 감축하면서 수익성을 이유로 구조조정을 강요한다. 이를 이유로 다시 한번 정부의 공적자금 지원을 받는다.

(3) 이 회사는 다시 미국계 금융투기자본인 한 페이퍼컴퍼니에 매각된다. 이제 완전히 청산. 이 투기자본은 공장이 가지고 있는 특허권만 매각하고 나머지는 폐기한다.

전체 과정 속에서 국가는 자본의 금융화를 재정적으로, 제도적으로 지원하면서 노동자의 불만을 적절히 관리하는 역할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는 어떤일이 벌어졌을까? 구조조정 과정에서 300여명의 노동자들 중 70여명이 정리해고되고 임금은 삭감된다. 그리고 최종적인 공장폐쇄 과정에서 전체 노동자들은 해고된다.

 

이런 과정은 자본이 생산에서 철수하여 완전히 금융화되는 과정이나, 생산의 초국적 재배치와 관련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중심부, 반주변부 제조업이 처하게 되는 전형적인 상황이다.

 

작가가 이런 과정을 면밀하게 묘사하는 것은 프랑스에서 이런 식의 자본의 생산철수가 빈번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문제로서 금융화라는 쟁점이 대중적으로도 인식되는 사정도 더 이해할 수 있다.(ATTAC과 같은 대중적인 사회운동을 생각해보자.)

 

이에 비해서 남한에서 공장폐쇄는 주로 '해외이전', '산업공동화'로 이해된다. 강력한 생산기지로 부상하는 중국이 인접해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남한에서는 사회운동 진영에서조차 문제가 '금융화', '생산에서의 철수'에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중국으로의 공장이전에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정확한 인식보다는 중국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촉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최근 외환은행과 론스타, 오리온전기 사태 등에서도 보이는 것과 같이 금융투기, 금융화의 효과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뚜렷히 드러나는 중이다.

 

프랑스의 노동관행, 제도, 투쟁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에서 노동제도와 관련된 것들이다.

우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행동양식. 구조조정과 공장폐쇄가 진행되고 지방 소도시의 거의 유일한 공장인 300명짜리 직장이 사라질 위기가 되자, 이 문제는 지자체의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그리고 중앙정부 차원의 관심사로 등장한다. EU-정부-지자체가 해고 노동자들의 특별퇴직금을 분담하는 안까지 논의된다. (남한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노동조합과도 이러한 보상 방안을 두고 정부와 지자체가 직접 협상한다. (역시 남한에서는 거의 어림없는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국가의 폭력적인 본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투경찰이 등장하는 광경은 남한과 똑같다. 마지막 대규모 지역시위 과정에서 연대투쟁온 다른 공장의 노동자와 지역주민 여성이 각각 전투경찰 폭력으로 사망하고, 전투경찰도 한 명 죽는 사태가 발생한다. 지역주민 여성은 직격발사된 최루탄에 맞아서(이한열 열사처럼), 연대투쟁온 노동자는 곤봉에 맞아서(강경대 열사처럼) 죽는다.

 

한편, 정부가 이런 식의 교섭에 나오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노동조합의 입장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른 것으로 느껴진다. '코스'공장 안에는 세 개의 노동조합 조직이 있다. (복수노조니까 당연하겠지. 사실, 노동자가 자기가 속하고 싶은 조직에 가입한다는 것은 시민적 권리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이를 노동법으로 규제하는 남한의 현실은 웃음거리가 되기 알맞다.)

 

노동총동맹CGT, 노동자의 힘FO, 민주노동동맹CFDT 새개의 조직이 있다. 일반적으로 CGT는 공산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FO는 우익적, 실리주의적이고 경제주의적인 것으로, CFDT는 사회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들에 대한 묘사는 흥미로운데 아마도 현실에서 이들이 취하는 입장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려는 것같다.

 

CGT는 입으로는 원칙적인 입장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런 입장을 갖고 투쟁을 하지도 일관되게 밀고 가지도 못한다. CFDT는 온건하게 '합리적인' 입장을 가지지만 반여성적인 구조조정에 동의하고 인종주의적인 모습도 보인다. 차라리 경제주의적인 입장에 충실한 FO가 솔직하게 자기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한다. 여튼간에 이들은 시종일관 조합원들을 통제하려고 하지만 시종일관 실패한다. 현장의 자발적인 투쟁(와일드캣 스트라이크가 빈발한다)에 밀려서 협상장에 나서는 것이 이들의 포지션이다.

 

CGT의 모습은 공장에서 지부대표의 모습 뿐 아니라 중앙에서 파견나온 간부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파견나온 중앙 간부는 시종일관 공장폐쇄를 기정사실화하고 특별해고수당을 더 확보하고, 직업훈련기간과 그 기간의 임금을 더 확보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을 하는 순간에도 이들을 기만하고 현장에서 합의되지 않은 안을 갖고 협상을 진행한다. 더구나 간부는 현장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 아니라 정부(노동부와 지자체)와 협상하기 위한 '조정자'라는 신분으로 왔다.

 

이러한 모습은 민주노총의 '국민파 '보다도 우익적인 것으로서, 공산당을 지지하는 조직이라는 말이 민망한 일이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라면 공장점거와 투쟁을 주도하는 급진적인 젊은 노동자들이 대부분 CGT 조합원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시종일관 CGT의 방침을 거부하고 투쟁을 밀고 나가지만 말이다. 결국, 마지막 국면에서 CGT 대표가 쓰러져 병원에 옮긴 사이에 FO, CFDT 대표들은 후퇴된 합의안에 '직권조인'하고 공장에 합의를 (노동자에게) 강요하러 온다.

 

여튼, 이런 모습을 보면 그나마 남한의 민주노조 운동은 전투성이나 원칙에 있어서는 '양반'인가 싶기도 한데, 씁쓸한 일이다.

 

지역투쟁

 

이 소설의 절정이라고 할만한 대규모 지역시위. 인근지역 공장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결정도 없이 비공인파업에 돌입하여 연대한다. 지역주민들도 거리에 나선다. 지역주민들은 '코스' 노동자들의 친척이자 친구이며, 이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이런 방식의 지역투쟁이 가능한지는 알수 없는 일이지만, 지역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단체, 연대기구같은 것이 없이도 지역의 공동체성만 갖고 투쟁을 조직해서 나서는 모습은 놀랍다. 지역차원의 투쟁이 되기 위해서는 '지역민중연대'같은 조직도 중요하겠지만, 지역의 노동자`시민들이 공동체라는 관념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와 여성노동자

 

첫번째 구조조정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여성노동자들이다. 회사는 근속연수, 나이 등 여러가지로 '기준'을 만들지만 그것은 '손쉽게 정리할 수 있는' 여성노동자들을 해고대상으로 이미 염두에 두고 작성한 것에 불과하다. 기준자체가 젠더편향적이라는 얘기다.

 

게다가 여성들이 해고된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지자체는 직업훈련과 재고용을 약속했지만 정작 훈련받은 직업에 취직된 경우는 없다. 일자리가 사라지는 마당이니 취업할 수 있을리가 없다. 그나마 취업한 경우라면 가정부, 보육, 웨이트리스 등이 저임금, 비공식, 하인 노동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여성들을 어디로 내모는지 보여준다. 여성의 권리가 증진된 국가로 알려져있지만 그 근본적인 양상은 남한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국제적인 '통일성'을 새삼 확인한다.

 

놀라운 여남관계 ; 다중성과 개방성

   

이 소설의 주요 플롯에서는 조금 떨어져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소설에서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여남관계가 놀라울 정도로 개방적일 뿐 아니라 다중적이라는 점. 주인공 루디를 포함해서 많은 등장인물들이 결혼한 배우자가 아닌 남성, 여성과 성적 관계, 애정관계를 맺는다. (동성애도 있다.) 그러면서도 특별히 가책을 느낀다거나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전히 결혼한 배우자를 사랑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의 애정관계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전에 이미 관계가 안좋은 경우.) 우리나라에서의 관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이다.

 

이 책을 읽은 한 동지는 이 책을 보면서 '폴리 아모리'라는 개념이 떠올랐다고 이야기했다.  비독점 다자연애, 혹은 개방결혼이라고 번역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아내가 결혼했다> 소설로 알려진 개념. 소설에서와 같은 상황을 나타낸다는 것인데, 이성애, 동성애에 대한 관념이 사회마다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다시 발견한다.

 

이러한 관계방식은 콜론타이의 자유결합과도 또 다른데, 같은 시기에조차 동시에 복수의 이성과 애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페미니즘적인 입장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제르미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을 "탈공업화 시대의 제르미날"이라고 한 평가가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이 소설은 제르미날의 구도와도 매우 유사하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구조 자체와 연결된 자본가의 착취와 폭력에 맞서 투쟁하고 그 과정에서 폭력도 돌발한다. 그러나 결국 노동자들은 패배하고 누군가는 죽기도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개별 투쟁이 패배하더라도, 자본가들이 완전히 승리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손해를 보고 상처를 입는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단결이 가지는 힘과 한계를 모두 인식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함부로 다룬다면 같은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교훈으로 얻는데, 따라서 당면한 투쟁에 자본가가 승리하더라도 무작정 착취를 강화할 수만은 없게 된다. 제르미날Germinal, 혁명력, '싹트는 달'이라는 의미에 맞게.

 

이 책에서 주인공 격인 루디도 제르미날의 주인공인 에티엔느처럼 외지에서 온 사람이며, 젊은 노동자이고, 사회주의자이고 투쟁에 나서고, 또 패배한다. 그리고 작품의 맨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19세기와 21세기 두 세기를 넘어서도 노동자들의 투쟁이 유사한 방식(사실주의)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점이 어떻게 보면 놀랍다.

   

산자와 죽은자

 

소설의 제목은 산자와 죽은자. 이것을 작가가 어떤 의미에서 붙였는지 알수는 없지만, 산노동과 죽은노동이라는 마르크스의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자본가들에게 구조조정은 자본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서 숫자를 통제하고 결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수익률을 확보하기 위해 몇명의 노동자를 해고할 것인지, 해고수당을 얼마로 할 것인지 같은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자본가에게는 수익률과 다를 바없는 의미를 가지는 해고 노동자의 숫자는, 하나 하나가 한 노동자의 운명에 걸려있다.

 

이 소설에도 등장하는 노동자들도 그렇지만, 노동자들은 하나하나 생명이 있는 인간으로 구체적인 노동을 수행한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죽은 노동의 대리인일 뿐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인간=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노동자들이 쟁취하는 것은 시민권의 가장 중요한 실현. 이 책의 추천사에서 소설가 신경숙은 "새삼 훌륭한 시민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깊이 하게 하는 대작"이라고 썼다. 인간=시민으로서의 노동자의 권리가 곧 시민권이자 인권이라는 점에서, 신경숙의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시사적이다.(노동자가 시민이라는, 이 중요한 쟁점은 많은 경우에 잊혀지기 쉽상이지만 말이다.)

 

루디는 말한다. "자본가의 관점에서 보면 공장장님이 옳습니다. 그 기계는 코스의 재산,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코스를 지배하고 있는 회사의 재산이겠죠. 하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직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기계는 우리 것입니다. 이 기계에 그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노동이니까요."

 

--

마지막 덤으로.

루디를 비롯한 젊은 급진적 노동자들이 점거중인 공장의 작업실 하나를 폭파시킨 후. CGT 공장지부 대표인 피냐르와 루디의 대화.

"지금 자네들이 한 짓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고 있나? 급진주의라고. 그럼, 급진주의란 뭔가? 그건 고용주들이 제일 반기는 것 아닌가?"

"그런 말은 신물나게 들었어요! 그러니 제발 더는 하지 마세요. 공산당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뒤로 죽 그런 소리를 해대지 않았나요!"

 

 


 

덤으로 하나 더. '제르미날'과 같은 프랑스혁명 후 혁명력에 대해서.(펌)

 

1793년 10월 5일 국민회의가 소집되어서 달력 체계를 완전히 바꾸는 법령을 통과 시킵니다. 그 내용으로는

1. 1년은 가을에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 즉 추분에 시작된다. 옛 달력으로는 9월 22일에 해당한다. 이 날은 최대한 정확한 천문학적 측정을 토대로 정해진 것이다.

2. 1년은 모두 30일씩 갖는 12달로 나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가을 1월 : 포도 수확의 달(Vende'maire, 방데미에르)
   2월 : 안개의 달(Brumaire, 브뤼메르)
   3월 : 서리의 달(Frimaire, 프리메르)
겨울 4월 : 눈의 달(Nivose, 니보즈)
   5월 : 비의 달(Pluviose, 플뤼뷔오즈)
   6월 : 바람의 달(Ventose, 방토즈)
봄     7월 : 싹의 달(Germinal, 제르미날)
         8월 : 꽃의 달(Floreal, 플로레알)
      9월 : 풀의 달(Prairial, 프레리알)
여름 10월 : 추수의 달(Mseeidor, 메시도르)
   11월 : 더위의 달(Thermidor, 테르미도르)
   12월 : 열매의 달(Fructidor, 프뤽티도르)

3. 나머지 5일은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 세력의 이름을 따라 상퀼로티드(Sansculottide)라고 통칭한다.

4. 윤년에는 여섯 번째 상퀼로티드를 추가한다. 윤년은 예전처럼 4년마다 오는 것이 아니라 불규칙적으로 정해지는데, 이것은 정확한 천문학적 관측을 통하여 새해 첫날, 즉 포도 수확의 달(방데미에르) 1일이 정확히 춘분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혁명 달력에 따른 윤년은 공화국 2년, 7년과 11년 이었다. 그레고리우스 달력에 의하면 1793년 1798년과 1802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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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그리스비극에 대한 편지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김상봉 지음 / 한길사


비극과 혁명, 그리고 슬픔에 마주친 우리의 자세

결국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신의 개념화에 입각해서 알튀세르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정치에 대한 비전은 비극적tragique이라는 점을 인정하자...(중략).. 그것은 '대중들'(피지배 계급들, 인민계급들에 속하는 개인들의 잠재적 통일성)이 돌이킬수 없도록 분할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대중들이 두개의심금들, 그들 자신의 가상의두 개의 실존및 조직양식들 사이에서 내재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하자.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또그 힘이 단순한 '관념들'의 힘과는 비교될수 없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기능작용에 부합하는 '정상적' 행동과그 핵심에서는 항상 이미 잠재적 반역이 살아있는 그들의 경험의 공동체적,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적 결과들 사이에서 말이다. 그런데 후자의 측면이 전자의 측면보다 우세할 것이라는 어떤 보장도 절대로 없다.그 역도 마찬가지다.
- 발리바르, 「비동시대성: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中

혁명적 정치가 비극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혁명적 낙관주의가 아니라 왜 비극이며, 또 그것은 비관주의 혹은 종말목적론과는 왜 구별되는 것일까?

그것은 미래에 대한 어떠한 보증도 없는 현재의 운동이다.(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를 위한 11개의 테제/발리바르)  따라서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정세의 변화, 대중의 움직임에 따라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실패해왔다고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주체가 이데올로기적 미망에 빠져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실패를 예상하면서도 투쟁해야하는 경우가 있다. 이전에 쓴 포스트 <판의 미로, 랜드 앤 프리덤, 카탈로니아 찬가> 에서 언급한 것처럼, 숭고한 가치를 위해서,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운명을 상대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80년 광주에서 도청에 남은 시민군에게서, 1944년의 스페인 반군에게서 발견한다. 이것은 안티고네가 죽음의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이나,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파멸에 이르는 운명 앞에서도 진실을 대면하려는 것, 자신이 죽을 운명으로 예언된 전투에 스스로 나서는 아킬레우스와 같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의 의미는 이러한 운명 앞에 선 주체의 숭고함을 드러내는 것에만 있지 않다.저자는  예술형식으로서 그리스 비극은 서사시와 서정시의 시대를 지나 '시민의 시대'에 적합한 형태, 폴리스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서사시는 세계(존재)의 총체성을 반영하고 정신의 완전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서사시가 보여주었던 질서있고 조화로운- 완전한 삶의 모형이 정치적 혼란 속에서 해체되면서 개인을 자각하는 서정시가 나타난다. 기원전 600년경, 그리스의 서정시인 사포Sappho는 이때 등장한다. 시인이 자신을 기억 속에서 반성할 때, 자신은 자립적인 정신으로 나타난다.

서사시의 비극성은 죽음과 삶의 비극성도 완전한 삶의 일부라는 점을 긍정하는 것으로 긍정된다. 이에 비해서 서정시의 비극성은 주체의 갈등과 분열에 뿌리를 둔다. 시간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주체(조건과 정념)의 변화에 따라 주체가 타자가 되는 속에서 발생하는 슬픔을 보여준다.(아마도 그것은 시간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 순간 안에도 존재하는 주체의 분열과 갈등을 생각해보자.)

(한편, 저자는 비극은 자기연민이 아니라고 말한다. 비극은 정신의 숭고함을 표현하지만, 특히 서정시의 경우에는 나르시시즘이나 자기연민으로 후퇴할 수 있다. 그런 예로 김수영의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하는 「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를 든다. 우연찮게도, 나는 다른 글(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에서 김수영의 이 시를 비판한 적이 있다.)

자, 이제 서사시와 서정시의 시대를 지나 비극의 시대. 비극이라는 예술형식은 아테네의 민주주의 시대와 관련되어 있다. 고립된 주체를 공동체의 시민으로 도야하기 위한 예술. 사람들이 함께 비극 공연을 감상하고 광장에서 만날 수 있게 한다. 예술의 형태에 있어서도 코러스와 대화로 구성된 공연방식은 시민들의 교통을 상징한다. 그래서 코러스보다는 대화가 더 중요하다. 그것은 (코러스가 나타내는) 공동체로의 고양 이전에 시민들이 자신의 주체성을 보존하는 가운데에서도 서로 마주치고 교통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럼 그러한 교통이 비극을 통해 느끼는 슬픔 속에서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단지 그/녀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그/녀가 내 속에 들어와 머물고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고 그것은 그/녀의 슬픔이 내 속에서 쉴 때 뿐이라고 말한다. "내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속에서 타인의 슬픔이 고요히 움직이는 것을 느낄 때인 것". 안티고네와 크레온은 서로 다른 입장이지만 모두 고통받았고, 슬픔 속에서 평등하게 서로 만나게 된다.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의 눈물 속에서 자신의 슬픔을 발견하고 공감하게 된다.

저자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위대한 예술인 그리스 비극이 가장 위대한 정치적 예술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혁명적 정치의 비극성에 대한 인식이 있는 한, 혁명적 정세를 이유로 정치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은 지양할 수 있을 것이다. 성공을 보증할 수는 없을지라도. (이 점에 대해서는 최원씨의 <비극의 의의 혹은 취중결론>이라는 글 참고) 책의 서문 한 구절을 인용하자.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정치는 내가 너와 만나 우리가 되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서 가장 본질적인 계기는 만남이다. 그런 한에서 정치적 예술이란 단순한 저항예술도 아니고 반대로 관변예술도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적으로 만남을 지향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참된 의미에서 타인과 만날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우리가 슬픔 속에 있을 때이다. 만남은 슬픔이 주는 선물인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이것에 대한 가장 심오한 증거이다. 그것은 정치적 예술로서 만남의 총체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만남이 오직 슬픔과 고통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 정치적 예술은 비극예술이 되었던 것이다. - 25쪽

물론, 경험 속에서는 유사한 슬픔을 공유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경우들도 많다. 만남의 그런 불가능성은 슬픔을 주체 안에 가두어 둘 것이지만, '자기연민'이 아닌 '교통'을 선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처음 인용했던 발리바르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자. 비극적 관점은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해후, 과잉결정으로서의 혁명에 대한 사고.  혁명은 "낙관도 비관도 아니고 승리도 패배도 아닌 비극"인 이유.(『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윤소영)

그러나 비극적 관점이 비관적pessimiste 관점은 아니며, 종말목적론적fataliste 관점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의 생산양식으로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모든 '계기'에서(모든 '단계'에서) 자본주의의 모순들 속에 착근된 하나의 가능성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발리바르, 「비동시대성: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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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읽은 책 중 가장 인상적인 책 한 권. 슬픔을 정념으로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준 책. 따라서 슬픔에 마주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하는지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 나의 슬픔 때문에/에도 불구하고 타인들-그/녀들과 만날 수 있어야한다는 점을 알려주는 책. 따라서 마침내 '나'라는 자명하지 않은 주체에 대해서 반성하고 고통의 원인을 인식하며, 그것을 치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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