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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산자와 죽은자


산 자와 죽은 자 1,2
제라르 모르디야 지음, 정혜용 옮김

  

(※ 열심히 썼다가 글이 등록이 안되고 날아갔는데 아주 힘빠지네요. 시스템을 탓할 것인가, 부주의를 탓할 것인가. 그래도 오기 발동. 다시 작성.)

 

프랑스의 소도시 로셀, '코스'라 불리는 공장폐쇄에 직면한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에 돌입한다. 한 신문은 이 소설을 "탈공업화 시대의 제르미날"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것보다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제르미날"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듯.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노동자들에게 어떤 삶을 강요하는지는 프랑스나 남한이나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것같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너무 전형적이고 따라서 사실주의적인 소설. 등장하는 노동자 인물들의 대사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의같기도 하다. (그래도 그만한 인식들이 어느 정도는 퍼져있으니 이런 묘사가 가능하겠지. 부럽다.)



생산에서 철수하는 자본, 금융세계화

 

이 소설의 주된 무대인 공장은 플라스틱필름을 제조하는 공장이다. 이 공장이 결국은 폐쇄되고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설수밖에 없는 과정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과정에서 자본이 생산에서 철수하고 금융투기로 전환하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1) 경쟁력이 약화된 공장을 한 초국적 기업이 인수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공적자금과 물질적, 행정적인 편의를 제공받는다.

(2) 그러나 이 기업은 생산을 남부유럽, 동유럽에 재배치하면서 물량을 감축하면서 수익성을 이유로 구조조정을 강요한다. 이를 이유로 다시 한번 정부의 공적자금 지원을 받는다.

(3) 이 회사는 다시 미국계 금융투기자본인 한 페이퍼컴퍼니에 매각된다. 이제 완전히 청산. 이 투기자본은 공장이 가지고 있는 특허권만 매각하고 나머지는 폐기한다.

전체 과정 속에서 국가는 자본의 금융화를 재정적으로, 제도적으로 지원하면서 노동자의 불만을 적절히 관리하는 역할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는 어떤일이 벌어졌을까? 구조조정 과정에서 300여명의 노동자들 중 70여명이 정리해고되고 임금은 삭감된다. 그리고 최종적인 공장폐쇄 과정에서 전체 노동자들은 해고된다.

 

이런 과정은 자본이 생산에서 철수하여 완전히 금융화되는 과정이나, 생산의 초국적 재배치와 관련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중심부, 반주변부 제조업이 처하게 되는 전형적인 상황이다.

 

작가가 이런 과정을 면밀하게 묘사하는 것은 프랑스에서 이런 식의 자본의 생산철수가 빈번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문제로서 금융화라는 쟁점이 대중적으로도 인식되는 사정도 더 이해할 수 있다.(ATTAC과 같은 대중적인 사회운동을 생각해보자.)

 

이에 비해서 남한에서 공장폐쇄는 주로 '해외이전', '산업공동화'로 이해된다. 강력한 생산기지로 부상하는 중국이 인접해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남한에서는 사회운동 진영에서조차 문제가 '금융화', '생산에서의 철수'에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중국으로의 공장이전에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정확한 인식보다는 중국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촉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최근 외환은행과 론스타, 오리온전기 사태 등에서도 보이는 것과 같이 금융투기, 금융화의 효과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뚜렷히 드러나는 중이다.

 

프랑스의 노동관행, 제도, 투쟁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에서 노동제도와 관련된 것들이다.

우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행동양식. 구조조정과 공장폐쇄가 진행되고 지방 소도시의 거의 유일한 공장인 300명짜리 직장이 사라질 위기가 되자, 이 문제는 지자체의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그리고 중앙정부 차원의 관심사로 등장한다. EU-정부-지자체가 해고 노동자들의 특별퇴직금을 분담하는 안까지 논의된다. (남한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노동조합과도 이러한 보상 방안을 두고 정부와 지자체가 직접 협상한다. (역시 남한에서는 거의 어림없는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국가의 폭력적인 본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투경찰이 등장하는 광경은 남한과 똑같다. 마지막 대규모 지역시위 과정에서 연대투쟁온 다른 공장의 노동자와 지역주민 여성이 각각 전투경찰 폭력으로 사망하고, 전투경찰도 한 명 죽는 사태가 발생한다. 지역주민 여성은 직격발사된 최루탄에 맞아서(이한열 열사처럼), 연대투쟁온 노동자는 곤봉에 맞아서(강경대 열사처럼) 죽는다.

 

한편, 정부가 이런 식의 교섭에 나오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노동조합의 입장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른 것으로 느껴진다. '코스'공장 안에는 세 개의 노동조합 조직이 있다. (복수노조니까 당연하겠지. 사실, 노동자가 자기가 속하고 싶은 조직에 가입한다는 것은 시민적 권리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이를 노동법으로 규제하는 남한의 현실은 웃음거리가 되기 알맞다.)

 

노동총동맹CGT, 노동자의 힘FO, 민주노동동맹CFDT 새개의 조직이 있다. 일반적으로 CGT는 공산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FO는 우익적, 실리주의적이고 경제주의적인 것으로, CFDT는 사회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들에 대한 묘사는 흥미로운데 아마도 현실에서 이들이 취하는 입장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려는 것같다.

 

CGT는 입으로는 원칙적인 입장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런 입장을 갖고 투쟁을 하지도 일관되게 밀고 가지도 못한다. CFDT는 온건하게 '합리적인' 입장을 가지지만 반여성적인 구조조정에 동의하고 인종주의적인 모습도 보인다. 차라리 경제주의적인 입장에 충실한 FO가 솔직하게 자기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한다. 여튼간에 이들은 시종일관 조합원들을 통제하려고 하지만 시종일관 실패한다. 현장의 자발적인 투쟁(와일드캣 스트라이크가 빈발한다)에 밀려서 협상장에 나서는 것이 이들의 포지션이다.

 

CGT의 모습은 공장에서 지부대표의 모습 뿐 아니라 중앙에서 파견나온 간부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파견나온 중앙 간부는 시종일관 공장폐쇄를 기정사실화하고 특별해고수당을 더 확보하고, 직업훈련기간과 그 기간의 임금을 더 확보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을 하는 순간에도 이들을 기만하고 현장에서 합의되지 않은 안을 갖고 협상을 진행한다. 더구나 간부는 현장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 아니라 정부(노동부와 지자체)와 협상하기 위한 '조정자'라는 신분으로 왔다.

 

이러한 모습은 민주노총의 '국민파 '보다도 우익적인 것으로서, 공산당을 지지하는 조직이라는 말이 민망한 일이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라면 공장점거와 투쟁을 주도하는 급진적인 젊은 노동자들이 대부분 CGT 조합원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시종일관 CGT의 방침을 거부하고 투쟁을 밀고 나가지만 말이다. 결국, 마지막 국면에서 CGT 대표가 쓰러져 병원에 옮긴 사이에 FO, CFDT 대표들은 후퇴된 합의안에 '직권조인'하고 공장에 합의를 (노동자에게) 강요하러 온다.

 

여튼, 이런 모습을 보면 그나마 남한의 민주노조 운동은 전투성이나 원칙에 있어서는 '양반'인가 싶기도 한데, 씁쓸한 일이다.

 

지역투쟁

 

이 소설의 절정이라고 할만한 대규모 지역시위. 인근지역 공장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결정도 없이 비공인파업에 돌입하여 연대한다. 지역주민들도 거리에 나선다. 지역주민들은 '코스' 노동자들의 친척이자 친구이며, 이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이런 방식의 지역투쟁이 가능한지는 알수 없는 일이지만, 지역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단체, 연대기구같은 것이 없이도 지역의 공동체성만 갖고 투쟁을 조직해서 나서는 모습은 놀랍다. 지역차원의 투쟁이 되기 위해서는 '지역민중연대'같은 조직도 중요하겠지만, 지역의 노동자`시민들이 공동체라는 관념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와 여성노동자

 

첫번째 구조조정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여성노동자들이다. 회사는 근속연수, 나이 등 여러가지로 '기준'을 만들지만 그것은 '손쉽게 정리할 수 있는' 여성노동자들을 해고대상으로 이미 염두에 두고 작성한 것에 불과하다. 기준자체가 젠더편향적이라는 얘기다.

 

게다가 여성들이 해고된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지자체는 직업훈련과 재고용을 약속했지만 정작 훈련받은 직업에 취직된 경우는 없다. 일자리가 사라지는 마당이니 취업할 수 있을리가 없다. 그나마 취업한 경우라면 가정부, 보육, 웨이트리스 등이 저임금, 비공식, 하인 노동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여성들을 어디로 내모는지 보여준다. 여성의 권리가 증진된 국가로 알려져있지만 그 근본적인 양상은 남한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국제적인 '통일성'을 새삼 확인한다.

 

놀라운 여남관계 ; 다중성과 개방성

   

이 소설의 주요 플롯에서는 조금 떨어져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소설에서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여남관계가 놀라울 정도로 개방적일 뿐 아니라 다중적이라는 점. 주인공 루디를 포함해서 많은 등장인물들이 결혼한 배우자가 아닌 남성, 여성과 성적 관계, 애정관계를 맺는다. (동성애도 있다.) 그러면서도 특별히 가책을 느낀다거나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전히 결혼한 배우자를 사랑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의 애정관계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전에 이미 관계가 안좋은 경우.) 우리나라에서의 관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이다.

 

이 책을 읽은 한 동지는 이 책을 보면서 '폴리 아모리'라는 개념이 떠올랐다고 이야기했다.  비독점 다자연애, 혹은 개방결혼이라고 번역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아내가 결혼했다> 소설로 알려진 개념. 소설에서와 같은 상황을 나타낸다는 것인데, 이성애, 동성애에 대한 관념이 사회마다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다시 발견한다.

 

이러한 관계방식은 콜론타이의 자유결합과도 또 다른데, 같은 시기에조차 동시에 복수의 이성과 애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페미니즘적인 입장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제르미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을 "탈공업화 시대의 제르미날"이라고 한 평가가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이 소설은 제르미날의 구도와도 매우 유사하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구조 자체와 연결된 자본가의 착취와 폭력에 맞서 투쟁하고 그 과정에서 폭력도 돌발한다. 그러나 결국 노동자들은 패배하고 누군가는 죽기도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개별 투쟁이 패배하더라도, 자본가들이 완전히 승리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손해를 보고 상처를 입는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단결이 가지는 힘과 한계를 모두 인식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함부로 다룬다면 같은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교훈으로 얻는데, 따라서 당면한 투쟁에 자본가가 승리하더라도 무작정 착취를 강화할 수만은 없게 된다. 제르미날Germinal, 혁명력, '싹트는 달'이라는 의미에 맞게.

 

이 책에서 주인공 격인 루디도 제르미날의 주인공인 에티엔느처럼 외지에서 온 사람이며, 젊은 노동자이고, 사회주의자이고 투쟁에 나서고, 또 패배한다. 그리고 작품의 맨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19세기와 21세기 두 세기를 넘어서도 노동자들의 투쟁이 유사한 방식(사실주의)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점이 어떻게 보면 놀랍다.

   

산자와 죽은자

 

소설의 제목은 산자와 죽은자. 이것을 작가가 어떤 의미에서 붙였는지 알수는 없지만, 산노동과 죽은노동이라는 마르크스의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자본가들에게 구조조정은 자본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서 숫자를 통제하고 결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수익률을 확보하기 위해 몇명의 노동자를 해고할 것인지, 해고수당을 얼마로 할 것인지 같은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자본가에게는 수익률과 다를 바없는 의미를 가지는 해고 노동자의 숫자는, 하나 하나가 한 노동자의 운명에 걸려있다.

 

이 소설에도 등장하는 노동자들도 그렇지만, 노동자들은 하나하나 생명이 있는 인간으로 구체적인 노동을 수행한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죽은 노동의 대리인일 뿐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인간=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노동자들이 쟁취하는 것은 시민권의 가장 중요한 실현. 이 책의 추천사에서 소설가 신경숙은 "새삼 훌륭한 시민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깊이 하게 하는 대작"이라고 썼다. 인간=시민으로서의 노동자의 권리가 곧 시민권이자 인권이라는 점에서, 신경숙의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시사적이다.(노동자가 시민이라는, 이 중요한 쟁점은 많은 경우에 잊혀지기 쉽상이지만 말이다.)

 

루디는 말한다. "자본가의 관점에서 보면 공장장님이 옳습니다. 그 기계는 코스의 재산,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코스를 지배하고 있는 회사의 재산이겠죠. 하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직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기계는 우리 것입니다. 이 기계에 그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노동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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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덤으로.

루디를 비롯한 젊은 급진적 노동자들이 점거중인 공장의 작업실 하나를 폭파시킨 후. CGT 공장지부 대표인 피냐르와 루디의 대화.

"지금 자네들이 한 짓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고 있나? 급진주의라고. 그럼, 급진주의란 뭔가? 그건 고용주들이 제일 반기는 것 아닌가?"

"그런 말은 신물나게 들었어요! 그러니 제발 더는 하지 마세요. 공산당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뒤로 죽 그런 소리를 해대지 않았나요!"

 

 


 

덤으로 하나 더. '제르미날'과 같은 프랑스혁명 후 혁명력에 대해서.(펌)

 

1793년 10월 5일 국민회의가 소집되어서 달력 체계를 완전히 바꾸는 법령을 통과 시킵니다. 그 내용으로는

1. 1년은 가을에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 즉 추분에 시작된다. 옛 달력으로는 9월 22일에 해당한다. 이 날은 최대한 정확한 천문학적 측정을 토대로 정해진 것이다.

2. 1년은 모두 30일씩 갖는 12달로 나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가을 1월 : 포도 수확의 달(Vende'maire, 방데미에르)
   2월 : 안개의 달(Brumaire, 브뤼메르)
   3월 : 서리의 달(Frimaire, 프리메르)
겨울 4월 : 눈의 달(Nivose, 니보즈)
   5월 : 비의 달(Pluviose, 플뤼뷔오즈)
   6월 : 바람의 달(Ventose, 방토즈)
봄     7월 : 싹의 달(Germinal, 제르미날)
         8월 : 꽃의 달(Floreal, 플로레알)
      9월 : 풀의 달(Prairial, 프레리알)
여름 10월 : 추수의 달(Mseeidor, 메시도르)
   11월 : 더위의 달(Thermidor, 테르미도르)
   12월 : 열매의 달(Fructidor, 프뤽티도르)

3. 나머지 5일은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 세력의 이름을 따라 상퀼로티드(Sansculottide)라고 통칭한다.

4. 윤년에는 여섯 번째 상퀼로티드를 추가한다. 윤년은 예전처럼 4년마다 오는 것이 아니라 불규칙적으로 정해지는데, 이것은 정확한 천문학적 관측을 통하여 새해 첫날, 즉 포도 수확의 달(방데미에르) 1일이 정확히 춘분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혁명 달력에 따른 윤년은 공화국 2년, 7년과 11년 이었다. 그레고리우스 달력에 의하면 1793년 1798년과 1802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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