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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3/20
    [독서]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4)
    겨울철쭉
  2. 2008/03/15
    [독서]자본주의의 노동세계
    겨울철쭉
  3. 2008/02/11
    [독서]신곡-단테 알레기에리의 코메디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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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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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8/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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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8/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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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8/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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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8/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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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8/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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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8/01/21
    [독서]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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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책을 읽고 글을 남기는 블로그를 가진 나로서는, 가끔 예전에 쓴 글을 볼 때, 내가 과연 이 책을 읽었는지, 이런 글을 썼는지 낯설고 놀라울 때가 있다. 아닌게 아니라, 며칠전에 동생이 보고 있는 책을 재밌겠다고 빌린 나는, 예전 홈페이지에 이 책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다지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다니, 이런.

그런 한편으로는, 책을 사놓고도 절반 정도밖에 읽지 못하는 나로서는, 항상 책상 위에 쌓아놓은 책들과 서점 사이트의 장바구니에 담긴 책들, 그리고 펼쳐놓고 보고 있는 책들 중에서 갈등하고 있다.(그러다가 기껏하는 일이라곤 장바구니에 한권을 더 담아서 주문하는 일 따위다.) 게다가, 그러다가는 이책 저책 손대다가 결국 읽기를 중단한 책을 볼 때 마다 몰려오는 부채감에 부들부들 떨고는, 다시 무거운 마음으로 외면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일들로 해서 책읽기에 자괴감을 가진 나 같은 독자에게, 이 책은 유쾌한 해독제와 같다. 모든 독서는, 그 순간부터 지속적으로 시간 속에 흩어지는 비독서로 바뀌어가고, 그래서 본질적으로 독서와 비독서의 차이조차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저자 피에르 바야르는 책을 이렇게 구분한다.
  • UB ; Unknown Book 전혀 접해보지 못한 책
  • SB ; Skimmed Book 대충 뒤적거려 본책
  • HB ; Heard Book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책
  • FB ; Forgotten Book 읽었지만 내용을 잊어버린 책
보면 알겠지만, 그냥 "읽어본 책"(Red Book;RB, 그런데 써놓고 보니 Red라니 ^^;;)란 아예 범주에조차 없다. 그것은 굳이 말하자면 (읽었다는 사실조차도) 읽었지만 잊어버린 책들이라 할만하다. 모든 읽어본 책은 이미 FB가 되어가는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몽테뉴의 이런 말은 얼마나 위안과 공감이 되는지 모른다.

이미 수년 전에 꼼꼼히 읽고 주까지 이리저리 달아놓은 책들을 마치 한번도 접한 적이 없는 최신저작인 양 다시 손에 든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기에, 나는 내 기억력의 그러한 배반과 극심한 결함을 어느 정도 보완하기 위해, 얼마전부터 의례적으로 모든 책(한번만 읽어보고 싶은 책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의 말미에 그 책을 다 읽은 때와 그 책에 대한 개략적인 판단을 덧붙이곤 한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책을 읽으면서 품게된 저자에 대한 전체적인 관념과 그 분위기만이라도 남을 것같기 때문이다. - 몽테뉴, '수상록'

그러니까, 이 블로그도 몽테뉴식의 메모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책이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라기 보다는 유동적인 대상이다. 책은 만나는 순간마다 다르게 해석되고 읽힌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것인 종이 묶음 형태를 한 물질적인 실체로서의 책이라기 보다는, 형성된 관념으로서 (저자의 용어를 따르면서 다소 도식적으로 정리하자면) "화면 책", "내면의 책", "유령 책" 같은 것들이다. 그것은 각각 "집단 도서관", "내적 도서관", "잠재적 도서관"에 소장된 것들이다.

책을 읽은 순간부터 그것은 독자의 내면에서는 주관적인 "내면의 책"으로 남고, 그것은 담론을 공유하는 집단들의 도서목록 속에서 특정한 이미지를 취하기 시작한다. "화면 책"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집단 도서관의 관계들 속에서 형성된 위치를 차지하는 대상이다. 그것은 급기야 무의식 속에서 재구성된 "유령 책"이 되는 데 이 것이 원래의 책과 얼마나 유사한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유령책들은 실재하는 책들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실재하는 진짜 책들보다 훨씬 더 우리의 대화와 몽상을 풍요롭게 해주는 책이 된다.

"화면 책"의 대표적인 예로 저자는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수도사 조사관 바스커빌이 찾아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을 든다. 바스커빌은 책을 들고는 중요한 부분을 읽기도 전에 <시학>2권의 내용을 추측해서 말한다. 이런저런 책들을 통해서, 혹은 사건들을 통해서 그 위치가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심지어 이미 실체적인 책으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책으로 존재한다. 독서가 시작되는 즉시,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서로 말하는 즉시 진짜 책 대신 화면 책과 그 담론들과 견해들만 남게 된다. 예컨데, 책에 대한 이 블로그에는 진짜 책이란 없으며 책에 대한 이미지들만 존재하는 것과 유사할 것이다. 여튼, 호르헤 수도사가 이 책에 접근한 자들을 죽이는 방법은 책갈피에 묻은 독인데, 그러니 진짜 책에 "중독"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게 좋을 것같다.

사실, 서점에 꽂혀있는 대부분의 책이 어차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읽을 수 없는 것들이라면 그것들 중에 어떤 것을 실제로 읽어보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돌이켜보면 "원전"이라고 우리가 불렀던 (그리고 숭상했던)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원저작들은 (나는 물론이지만 내 주변에도) 대부분의 동료들에게 HB, 혹은 UB였는데, 그러니 그 책들의 이미는 실재하는 어떤 대상으로서의 의미라기 보다는 우리의 "집단 도서관" 안에 있는 "화면 책"일 뿐이었던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친구들이 용돈을 모아서 다섯권짜리 자본론 전집과 여섯권짜리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을 사놓곤 했는데 기껏해야 그 책은 SB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들을 폄하하는 순간, 우리는 그 "원전" 자체를 폄하하게 되는 셈이니 이쯤에서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이 모두에게 좋을 것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나에게나 읽지 않은 책을 인용해서 세미나를 지도하던 선배들이나, 그 책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들을 위해서도 말이다.)

이런 주장은 급기야, 비평을 위해서는 책을 대충 훑어보아야한다거나, 영혼이 침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책과 거리를 두어야하고, 학생들의 창조성을 위해서라도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것까지 연결된다. 이쯤되면 농담인지 진담인지 헛갈리기 시작하지만, 뭐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 마저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오스카 와일드에 대해서라면 그가 쓴 책은 모두 나에게는 UB 혹은 HB에 속한다.)

 "나는 내가 논해야하는 책은 절대 읽지 않는다. 너무 많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Thank you, Mr. 오스카 와일드!

물론, 이 책에는 독서의 본질 같은 것에 대한 철학적인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점에서는 매우 유용한 실용서라 할만하다. 예컨데 이런 실용적인 충고들도 담고 있는 것이다. ; 저자를 만나면 책의 내용이 아니라 모호하게 좋았다는 이야기를 할 것,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 말할 때는 책을 꾸며내고 돌려댈 것 등, 누가 지적할 경우 착각했다고 둘러대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등등.

사실, 이 책의 교훈대로 서문부터 역자후기까지 모두 읽어야한다는 강박관념만 아니라도 훨씬 재미있는 독서가 될 것같지 않은가. 그러니. 이 책은 나와 같은 증세를 가진 게으른 책 "중독"자(독묻은 책갈피를 조심했어야했는데..)에게나 혹은 정말 실용적으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은 독자들 모두에게 "독서"(혹은 이를 둘러싼 대화)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훌륭한 책이라고 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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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자본주의의 노동세계


자본주의의 노동세계
찰스 틸리, 크리스 틸리 (지은이), 윤정향, 이병훈, 조효래 (옮긴이) | 한울(한울아카데미)


우리가 "노동"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이렇다. 정해진 출근 시간에 직장이라는 공간으로 가서 관리자의 통제나 지시를 받으면서 정해진 시간을 일하고 일급, 주급, 혹은 월급을 받는다. 일자리를 구할 때에는 채용공고를 보고 찾아나서는데, 이런 제도를 "노동시장"이라고 한다, 등등. 저자들에 따르면 이런 이미지는 널리 확산되어 있기는 하지만 자본주의 노동세계의 극히 일부만을 묘사할 뿐이다. 노동세계는 훨씬 복잡하다. 이 책은 그런 양상을 통해서 노동을 다시 이해하기 위한 시도다.

말을 꺼냈으니 "노동"에서 시작해보자. "노동"을 "재화와 서비스의 사용가치를 증가시키는 인간의 노력"이라고 할 때, 20세기 이전의 세계노동자들의 대다수는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유급일자리가 아닌 다른 환경에서 일했다. 서구 산업자본주의와 그 노동시장에서 조성된 편견은 집밖에서 임금을 위해 일하는 것만을 "진정한 노동"으로 인정하고 다른 것들은 단순히 놀이이거나 집안일, 범죄 등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진정한 노동"을 다른 것들과 구별하는 본질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자와 사용자를 연결해주는 노동시장도 "노동경제학"에서 나오는 것처럼 깔끔한 계산이 가능한 영역은 아니다. 수많은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관습, 관행, 관계의 복잡한 체계다. (그래서 저자는 모든 노동계약이 생산과 비생산 관계를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사회적 관계들에 배태embeded되어 있다고 말한다.) 노동시장이란 것이 형성되던 시기에 자본가들도 그리 탐탁히 않아 했는데, 왜냐하면 노동시장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사용자들이 생산수단에 투자하는 것은 물론 노동과정을 조직하고 감독해야하고 채용, 해고, 직무배치, 보상 등의 인사관리체계를 만들어야할 뿐 아니라 최소한의 생계비를 지급해야하고 이런 과정에서 정부기관이나 노조, 노동자가구 등의 개입에 대비해야하는 등 골치아픈 일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노동시장의 발명과 확산은 노동자의 프롤레타리아화와 함께 일어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19세기 내내, 그리고 20세기 후반까지 지속적으로 강화되어왔다. 예를 들어 전문직이라는 의사들조차 미국에서 관리의료의 확산과 더불어 자영업자에서 일종의 종업원으로, 임금노동자로 변화되어가는 중이다. 전형적인 과정은 18~19세기 면방직 공업에서 상업자본의 (가내생산에 대한) 구매시스템은 선대제(원료와 생산수단을 제공하는)로 변화하고, 또 산업자본의 방직공장을 통한 직물 생산으로 변화되면서 프롤레타리아화가 진행된 일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역전현상도 발생한다.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의 확산과정에서 오히려 비공식노동이 증가하고 고전적인 노동시장이 약화된다. 이러한 상황은 20세기말 이후 19세기적 형태의 노동소요(연합적 힘에 기반한)이 확산되는 과정을 설명해준다. 게다가 노동시장들은 다른 노동조직들을 완전히 제거하지도 못했다.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아직도 만은 노동들은 노동시장 외부에서, 즉 학교, 가장, 감옥, 비공식경제, 가족기업, 소상품생산 등등, 심지어는 노예노동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상당히 그렇지만,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공개적인 노동시장이라기 보다는 "연줄"이라고 불리는 노동자들의 네트워크를 통해서다.(공급네트워크)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채용네트워크) 예를 들어 한국계 미국인의 친족집단은 뉴욕의 식품점 점원을 채용하는 데 있어서 거의 친족-인종 네트워크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미국의 경우 특정한 인종에 따라 직업별로 큰 편차가 발견되기도 한다. 노동시장, 작업장에서의 분할은 사회적 관계가 깊은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간호사에는 백인과 흑인은 있지만 히스패닉은 거의 없는 식이다. 이런 인종, 민족, 성, 종교에 따른 차별화된 네트워크는 직무의 차별적 배치로 강화되고, 이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남-녀의 임금격차는 대부분 직무능력의 차이나 동일직무 내의 임금차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직무들의 성별분리에서 비롯된다.(따라서 남녀고용평등법, 비정규법의 차별시정제도는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차별은 순환논리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효율성에 대한 평가도 객관적이라 보기 힘들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 간호사들이 의사보다 환자들과 더 지속적으로 접촉한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이 더 잘 진료할 수 있다는 일반적으로 가정되고, 이는 처우에도 반영된다.)

이런 노동시장을 어떻게 통제하는가는 공급자나 수급자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노동력공급자 측면에서 노동시장 통제전략의 대표적인 경우는 전문직들이다. 의사들이나 변호사, 회계사 등은 적극적으로 공급을 제한하려고 시도한다. 일전에 있었던 의사파업 사태 이후, 남한의 인구당 의사수는 매우 낮은데도 불구하고 의대 정원은 감축되거나 동결되었던 것이다. 로스쿨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변협의 태도같은 것도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런 노동시장은 내부에서 상이한 집단으로 분절되어 있다. 단일한 노동시장이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종적으로 분할되어있을 뿐 아니라, 성별, 학력 등 다양한 기준이 적용된다. 상이한 직종들 사이의 투쟁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아이를 낳을 때 지금처럼 누구나 산부인과 병원에 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미국에서조차 20세기초 이전에는 조산사가 출산을 봐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여성인 조산사 혹은 산파는 집안일까지 봐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도 내부의 투쟁과정에서 조산사는 거의 사라졌다. 아이는 산부인과에서 낳는 것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노동시장에서 산부인과의사들이 승리했던 것이다.

심지어 의사들 내부에서도 20세기 초를 거치면서 어떤 의료행위가 "정상적"이며 어떤 의료행위가 "사이비(돌팔이)의사"의 것인지 규정하는 과정을 통해서 노동시장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이 진행된다. 병원 안에서는 의사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했던 간호사들이 점차 세력화하면서 증대된 영향력을 임금과 권력에 반영시킨다. 병원관리자들은 비싼 의사들 대신에 간호사들에게 여러가지 의료과정을 맡겼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간호사들의 노동조합 조직화와 함께 여성운동의 발전이 동시에 영향을 준다. 노동자 집단들 사이의 권력관계에 변화에 노동자의 조직화와 사회운동이 개입하는 순간이다.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 사회운동은 노동세계의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기술변화조차도 순수한 기술적 과정이라기 보다는 계급투쟁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마르크스주의적인 선험적 주장이 아니다.) 분업은 자본가들이 노동자들로부터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선제공격의 성격이 있다. 효율성만이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노동력의 수급은 권력관계를 변화시키고 이것은 생산기술에 영향을 준다. 노동력이 부족했던 미국에서는 면방직 공업에서 노동절약적인 링방적기가 확산되어 숙련노동자를 제거했던 반면, 영국에서는 뮬방적기가 상당기간 동안 더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석탄 채광에서도 유럽과 미국에서는 각각 긴벽생산방식, 기둥생산방식이라는 상이한 기술이 도입되었던 것이다. 파업물결 이후에도 조직구조의 변화가 시도된다. 이탈리아의 뜨거운 가을(1969)를 계기로 노동자들은 공장수준의 노동자조직구조를 형성했고, 사용자들은 생산시스템을 바꾸는 것으로 대응했다. 외주하청, 작업팀 구조의 도입 등이 확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 노동자들이나 사용자들이나 노동현장에서 노동력과 임금만을 교환하거나 그것만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기업의 생존, 작업장 안에서의 질서, 공동체 안의 위상, 권력과 같이 상이한 목표들을 추구한다. 노동자들은 돈을 벌기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위해, 작업장 안에서의 사회적 관계, 일을 배우는 즐거움, 동료와의 좋은 관계나 전통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일한다. 이런 요소들 중에서 특히 작업장에서의 권력이 문제가 된다. 조직의 유지와 권력은 '효율성'에 대한 사용자들의 명시적인 강조에도 불구하고 항상 강력하게 작용한다. 특히 노동체계, 작업조직 형태의 혁신은 권력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매우 드문일이며, 오히려 현존 방식의 유지가 일반적이다. 중간관리자들에게 특히 권력은 핵심적인 문제가 되며, 따라서 작업장 체제의 변화에 대한 아래-위의 압력에 강하게 저항한다.

사용자들은 권력을 강화하는 노력으로 노동자들로부터 헌신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부단히 시도한다. 그러나 이 이면에는 노동자들의 저항이 존재한다. 노동자들은 설사 집단적인 저항(노조와 같은)이 아니라도 일거리를 회피하거나 작업기구를 망가뜨리거나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개인적으로 저항한다. 사용자가 집단적인 저항을 분쇄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모든 형태의 저항을 분쇄하고 헌신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은 사회적으로 제도화된다. 초기의 전투적인 저항의 형태는 국가에 의해 정교한 협상과 투쟁의 절차로 만들어지고 "정당한 파업"이라는 것이 특정한 것으로 규정된다. 이런 틀 안에서만 집단적 저항이 가능하게 된다. 이는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조직을 안정화하고 혹은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법적으로 안전할 수 있다는 이유로) 촉진하지만 더 이상 극단적으로 위험한 것은 아니게 만든다. (남한에서도 노동자들의 파업은 완전히 불법적인 경우는 거의 없으며, 불법을 감수해야만 하는 투쟁--공공부문이나 비정규직과 같이 노동3권이 제한된 영역--에서도 그러한 여지를 최소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법적 절차를 끝까지 가져가게 된다.)

노동자들의 집단적 저항, 특히 파업은 사업장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지만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중간집단 노동자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노동시장을 통제하는 권력을 강하게 가진 전문직들은 파업이 별로 필요없다. 또한 너무나 조직적으로 취약해서 승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경우에도 파업은 매력적인 선택이 아니다. (이러한 조건은 변호사와 의사와 같은 전문직뿐 아니라 비정규직, 특수고용,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 오히려 노동조합에 조직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저자들이 인용하는 사무엘 콘Samuel Cohn의 파업연구는 흥미로운 점을 몇가지 지적한다. 당면 파업이 실패했을 때조차 작은 파업은 인금인상을 불러온다는 점, 노동조건과 정치현안에 대한 파업은 임금파업보다 더 장기적인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점, 단기적인 파업이 장기적인 파업보다 효과적이라는 점, 관료화되고 중앙집권화된 노조들은 더 적은 성과를 얻는다는 점, 이데올로기적으로 분열된 복수노조는 노동자의 이익을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 그러나 이런 이득은 모두 노동자의 동원능력, 확살한 파업위협의 존재여부에 좌우된다는 점 등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할 수 있는 파업투쟁의 효과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인 셈인데, 남한에서의 노동자운동만의 경험이 아니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세계는 잘 정의된 노동시장 제도, 노사분쟁의 제도와 관행 같은 것들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요소들 중에서는 단지 설명적인 의미를 갖는 것도 있지만 노동자운동에서 고려할 중요한 사항들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경험하지만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 "인간답게 살고싶다"는 노동자들의 요구가 투쟁을 촉발할 경우, 그것은 고전적인 임금인상 투쟁은 아니지만 노동자들의 노동세계 경험 속에서는 충분히 중요한 요구가 된다. 억압적인 중간관리자의 해고를 요구하는 투쟁도 노동현장의 권력문제라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마지막에 언급한 콘Cohn의 지적처럼 실천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내용들도 있다.


===
다만 이 책은 원래 좀 너무 많은 개념이 방만하게 사용되는 느낌인데다가, 번역 또한 읽기 쉬운 우리말 문장으로 된 것은 아닌 것같다. 그래서 읽기가 상당히 힘들다는 점은 언급해야겠다. 한동안 다른 책에 대해서 쓰지 못한 이유 중에 하나는 이 책과 "싸움"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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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곡-단테 알레기에리의 코메디아


신곡 -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단테의 신곡을 읽으려고 마음을 먹은 직접적인 계기는 서경식의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에 대한 독서다. 책은 신곡 지옥편의 첫 두연으로 시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아우슈비츠에서 레비는 신곡의 구절을 생각하면서 인간임을 자각한다.

솔직히 말해서, 신곡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그리고 그 켭켭이 쌓힌 각주들까지)까지 모두 읽은 후에도 이 작품이 "인간임을 지탱하게 할" 힘이 있는지 나는 잘 확신할 수는 없다. 위대한 작품이라는데는 전혀 이견이 없지만 말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기질적인 무신론자인 나로서는 기독교 문명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의 감성에 완전히 일치되기는 힘들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레비의 언급을 통해서 신곡을 어떻게 읽어야하는 지를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는 말은 할 수 있다. 이렇게 읽기 시작할 수 있다. 레비는 지옥편의 오디세우스와 관련된 구절(26곡)을 수용소에서 기억한다.(아래 인용한 번역들은 모두 내가 읽은 민음사판의 것)

그대들의 혈통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덕과 지혜를 따르기 위해 태어났다

오디세우스는 운명 앞에도 불굴의 의지로,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도전한다. 그러나,

풍랑은 우리 배를 바닷물과 함께 세바퀴 돌게 했다오
네 바퀴째에 선미가 높이 솟아오르더니 뱃머리에서 떨어져
마침내 바다가 우리 위로 덮쳐왔소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대로였다오

레비는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대로였다오"라는 구절을 되씹는다. 인간의 위대한 행위가 하느님의 섭리 앞에서 좌절할 때, 그러나 지옥에서도 오디세우스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그것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죄악, 아우슈비츠라는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운명인가. 그것은 단테가 쓴 의도와는 다른 것일 수 있지만, 단테가 본 지옥도 인간의 눈으로 다시 읽을 수 있다. 신곡은 그렇게 열려있다.

작품 전체는 단테의 구체적인 시대적이고 개인적인 제약 안에 있다. 단테는 자신을 추방한 정적들을 하나씩 지옥편에 등장시킨다. 타락한 성직자들은 교황도 예외없이 지옥에서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데, 교황청의 금서가 될 만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비판이 가능했다는 것은 교황청의 권위에 근거한 중세 카톨릭 체제가 이미 붕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대의 과학지식에 따른 지리적 설명(주로 천국편에 등장하는)은 현대적인 시각으로 보면 단지 지리적인 오류만이 아니라 인종주의적이고 유럽중심주의적인 편견을 담고 있기도 하다. 지옥편에서 이슬람 지도자가 등장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점에서 시대적 한계를 이해하면서 읽는 것은 물론이지만 중간중간 불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그런 제약들에도 불구하고, 혹은 오히려 그런 구체성 때문에 신곡을 읽을만하다고 해야할 것같다. 그런 구체성들이 없다면 지옥-연옥-천국으로 이어지는 길은 따분한 교리문답에 그쳤을 것이다.( 죄송하지만 천국편의 상당부분은 사실 순전히 신학적인 교리문답이기도 하다.;;) 특히 그런 구체성의 핵심에는 베아트리체에 대한 단테의 사랑이 있다.

아홉살에 베아트리체를 처음 본후 사랑에 빠진 단테는 피렌체에서 추방되기 훨씬 전인 1290년, 그녀를 죽음으로 이별한다. 베아트리체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사진은 단테가 아홉살에 베아트리체를 처음 만났다고 하는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 여행할 때 만난  다른 여행자가 나의 작은 호의에 대한 답례로 이 이야기를 가르쳐주었는데, 신곡을 읽지 않고 온 것을 후회한 적이 있다.]

신곡 전체에 가장 가슴떨리는 부분은 연옥편의 후반부(30편~)부터, 연옥의 끝 에덴동산에서 베아트리체를 다시 만나는 장면이다. 그녀는 지옥에서부터 이제까지 순례자(단테)를 인도하던 베르길리우스(로마의 시인)를 대신해 천국을 안내한다. 천국편까지 베아트리체가 등장하는 구절들은, 단테가 이 작품을 무엇보다 자기위안을 위해서 썼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어느 구절보다 생생하게 빛나고, 그 것을 묘사하는 순간에 가장 행복한 사람의 글이라는 것을 700년이 지난 지금도, 다른 언어로 번역된 시로도 느낄 수 있다.

나를 하느님께 인도하던 그녀가 말했다. "이제
다른 생각은 그만 하세요. 내가 모든 고통을 덜어주시는
그분과 함께 있다는 것을 생각하세요"

그 사랑스러운 말에 나는 나의 위안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때 그녀의 거룩한 눈에서 본
사랑은 너무나 거대해서 말로 옮기지 못하겠다.

내 말이 실패할까 두렵기도 하고,
누군가가 위에서 인도하지 않으면 내 정신이
그런 높이까지 오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순간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녀를 바라보면서 내 마음이
다른 모든 추구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기쁨이 베아트리체의 얼굴에 곧게
비치고 있었고, 그 반사광이 나를
기쁨으로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미소의 빛줄기로 나를 압도하면서
말했다. "이제 몸을 돌려 잘 들으세요.
천국은 내 눈에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 천국편 18곡 중

단테가 천국의 안내자, 혹은 동행자(그러니 그녀는 진정으로 Soul Mate라고 할만 하다)로 베아트리체를 등장시킨 것은, 그녀가 구원의 여성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와 함께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단테의 사랑이 비록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었을지라도 천국을 희망하는 삶의 힘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고, 방대한 신곡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물론 이것이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일방적 판타지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이 판타지는 성녀-창녀의 이분법을 전제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서로의 영혼의 발전에 도움을 주는 관계를 우정이든, 날개달린 에로스든 만들어갈 수 있을테니까.)

한편, 기독교 신자가 아닌 나는 신곡을 통해서 기독교적인 구원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한국에서는 교회를 통해 복을 내려주는 기복신앙의 대상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그것은 절대자를 통해서 영혼의 고양, 완전성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어떻게 보면 하느님이라고 하는 인격신은 이름만 있는 것이지 실제로는 각자의 영혼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매개로 그 자체가 하나의 비유일 수 있다. 다만, 불교와 같은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자신안에 있는 부처를 찾으라고 가르치는 데 비해서, 기독교는 하느님을 매개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물론 사소한 차이는 결코 아니다.)

인간은 자기 한계 내에는 결코
완성될 수 없어요. 그러니 계속해서 겸손하고
복종하는 자세로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것은

거스르려 했던 그만큼 자꾸오르려 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혼자 힘으로
하느님께 이르기 힘든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말하자면 두 길들 중 하나로,
혹은 두 길 모두를 통해
인간이 완전한 삶으로 이르는 길을 마련하신 것이지요.

그 일을 행하는 자가 더 감사하는 만큼,
그 마음에서 나오는 자비가 더 선하게
우러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온 세상에 자국을 남긴 영원한 하느님의 덕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기꺼이 다시 한 번
인간을 끌어 올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 천국면 7곡 중 베아트리체의 말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하느님"의 표상, 인격신으로서 "야훼"는 이중적인 효과를 가진다. 한편으로는 이해하기 쉬운 인격적 상징으로, 누구나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키는 길을 따라갈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쉬운 비유 때문에 왜곡되기도 쉽고,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에게 원래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미신의 대상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말씀이나 성경 자체도 물론이지만 심지어 "하느님"의 표상까지도 일종의 비유일 수 있다는 생각을 열어야, 영혼을 ("천국"으로 불리는 지고의 장소까지) 고양시키는 기독교 안의 위대한 가르침을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신곡은, 지옥에서 연옥으로, 천국까지 길을 걸으면서 인간과 악마, 천사와 신을 만나고 깨달음을 얻어가는 일종의 "여행기"라 할 만하다.(SF영화와도 비교할 수 없을 우주적 규모의 여행기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여행에 신곡의 독서를 통해 동반하면서, 단테가 추구하려고 했던 영혼의 고양을 함께 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 장면을 구경해 볼 수 있다. 물론, 각자의 베아트리체를 만나는 경험은 현세에서들 하셔야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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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창작과비평사)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쁘리모 레비는 자살로 삶을 마무리하면서, '침묵과 죽음'을 자신의 마지막 증언으로 남겼다. 서경식은 불가리아 출신의 지식인 츠베땅 토르도프를 인용해 "레비가 1987년에 자살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단순 명쾌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고난에 대한 인간성의 승리와 구제의 서사로, 그 모든 것은 증언을 듣는 우리에게는 명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불가해한 질문을 던진다. 불가해한 질문에 직면한 그가 죽음으로서 우리는 그 질문에 내던져진다. 오히려 그 이유를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서경식은 말한다.

글과 여행을 통해서 쁘리모 레비를 찾아가는 이 책에서 두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 혹은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이 또 등장한다.

효율적인 학살을 통한 절멸(노동력이 없는자)이거나 "노동을 통한 절멸"(노동력이 남은자)이라는 프로젝트, 이 아우슈비츠는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한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과 닮은 행위이기 때문에, 또 그렇게 연결될 수 있는 위험을 갖고 있다. 그러나 끔찍하지만 우리와 같이 히틀러, 괴벨스, 히믈러, 아이히만과 같은 "독일인들", 그들도 인간의 일부라면, 그들을 "이해"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는 인간 자체에 대한 근원적 질문과 같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은 인간 이하'라는 사상에 희생된 까닭에, 그 사상을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대치해야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독일인'도 물론 '인간'에서 예외는 아니다."(181쪽)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모순은 쁘리모 레비와 같이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자하는 생존자의 삶을 갉아먹는다. 오히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피해자가 "인간이라는 수치"에 시달린다.

레비에게 "독일인"은 그런 존재다. 그들 전체를 인종주의적으로 재단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압도적인 다수가 공범인 행위를 볼 때, 그들이 행한 폭력이 취한 독일적 형식(식사나 노동의 양식, 오락의 취향, 언어감각, 나치식 농담의 센스까지!)을 볼 때 그런 이름을 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다수의 독일인은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나는 일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도된 무지는 무죄가 될 수 없다. 자신은 공범이 아니라는 변명은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이다. 스스로의 기억도 조작된다. 마치, 레비가 수용소에 I.G.파르벤의 화학공장에서 만난 민간인 뮐러 박사가 자신이 레비와 "우정을 쌓았다"라고까지 왜곡된 기억을 갖게 되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그래서 레비의 죽음은, 피해자는 결코 잊을 수 없고 매순간 노출되는 모순에, 가해자는 오히려 스스로 확신을 갖고 잊고-잊고자하고 "이제는 그만하자"고 말하는 현실을 대면시킨다. 역설적이다. 독일에서, 일본에서 이미 그런 목소리가 높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이스라엘과 미국은 눈감는다. 어떻게 가해자들이 먼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은 피해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 "인간"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일까?


[△ 사진은, 독일에 갔을 때 찍은 베를린 인근 작센하우젠 수용소의 처형장]

한편, 서경식은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이 왜 벌어졌는지를 물으면서, 그 질문을 유럽인인 쁘리모 레비에게도 되돌린다. 나치의 행위는 "중세 이후의 반유대주의, 히스테리컬한 패권욕과 식민지 획득욕, 약육강식.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과 우생사상, 인종주의 그리고 '효율'에 대한 물신숭배와 테크놀로지 신앙, 이 모든 요소가 복합적으로 상승작용을 하여 폭발한 것"이면서 동시에, 독일 자본주의의 발전경로와도 연관된다. 독일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유럽의 "바깥"에서 행한 행위를 유럽의 "안"으로 돌리게 되었다.

좀더 부연하자면, 역사적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독일이 영국 헤게모니를 대체하기 위해 (미국과) 벌인 경쟁 과정으로 이 시기를 연관시켜 볼 수 있다. 독일은 부족한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시장을 확대하는 등 내부로 확장의 방향을 추구한다. 중화학공업의 발전과 (힐퍼딩과 레닌이 비판한) 금융과두제는 이렇게 형성된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영역의 확장"은 한계를 가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활공간의 확장"이라는 나치식의 구호가 등장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독일 내부에서 정치적 압력을 가중시키고 소수자를 절멸하는 정치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과 함께, 곧이어 인근 국가들에 대한 전쟁으로 나간다. 1차 대전은 식민지 재분할 요구이 성격이 강했지만 2차 대전에서 독일은 유럽대륙을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하고자하고 보다 더 직접적인 유럽의 문제가 된다.

아우슈비츠는 유럽의 역사 자체가 만들어온 과정이기도 하다. "야만"이 유럽의 문제가 된 이때, 비로소 근대 유럽의 이념으로서 "인간"의 보편성을 둘러싼 자기모순이 드러난다. 쁘리모 레비조차 아우슈비츠를 묘사하면서 (비유럽적인 것으로서) "아만", "야만적인 피그미"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서경식은,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문명인가'를 물어야하는, 또 다른 과제가 주어진다고 말한다.

다른 책에서처럼 서경식의 장점은, 쁘리모 레비라는 사람을 그의 시간과 공간에 고립된 인물이 아니라 현재에, 그리고 글을 쓰는 자신의 삶에 불러온다는 데 있다. 그래서 쁘리모 레비는 "간첩"협의로 고문받고 투옥된 서승, 서준식 두 형제를, 디아스포라이자 그 투쟁과 고난에의 "외부"에 있다고 느끼는 저자 자신을 만난다. 팔레스타인을 만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우리도, 쁘리모 레비를 그리고 서경식을 지금 현재, 우리의 삶에 불러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타인의 고통에 동참(김상봉)하는 것과 동시에 나의 고통을 통해 타인과 연대할 수 있기 위해서도 말이다.


===
한편, 서경식은 일본과 독일의 상황을 비슷하게 진단한다. 일본의 우익정치인들이 "자학사관"을 넘어서자고 선동하는 것처럼, 독일에서도 "수정주의 사관"은 아우슈비츠를 다른 테러독재, 학살들과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태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차이가 있다고 느껴진다. 독일에서는 적어도 기억하고 반성하기 위한 시도들이 의미있게 지속되고 학살을 용인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금기가 더 강하다. 베를린의 "유태인 기념관"과 같은 곳은 일본에는 없는 것이다.

여행기에서 베를린에 대한 느낌에서 쓴 것처럼, 독일인들은 스스로의 힘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으로 느꼈다. 일본도 그럴까? 적절한 비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서 "폭주"라는 말이 일본에서 어떤 어감인지 느끼게 되었다.

이 책에는 일본인들이 2차 대전은 잘못된 정치인과 군인들이 "폭주"[暴走]한 것으로 이해한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지금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기도 한)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에서 "에바"는 통제불가능하게 "폭주"한다. 자신의 힘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순간이다.(그래서 에바의 전원장치는 에너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폭주를 '구속'하는 장치이다.) 독일인들이 느끼는 것으로 보이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과 유사한 것은 아닐까? 이 경우에는 훨씬 약하게 드러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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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임순례 감독은, 전작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처럼, 어쩌면 진부한 소재를 진부하지 않게 그려낸다. 한국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 기껏해야 지하철에서 자리를 냉큼 차지하는 존재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 "아줌마"들의 삶에 대해서 말이다.

이 영화에 대한 좋은 이야기는 여기저기 많으니 한 가지만 이야기해보자.

국제 체육대회(국가대표)라는 소재는 사실 위험하다. 자칫하면 민족-국가에 인민들을 동원하는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그것을 소재로 다룬 영화도 반복하기 쉽다.(그것은 소재 자체에 각인된 것이기도 해서, 밑에서 말하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다루려고 해도 민족-국가는 끊임없이 복귀한다.)

그런 점에서 임순례 감독은 솜씨있게 다른 방식으로 소재를 다룬다. 영화에 등장하는 선수들은 어떤 민족적인, 국가적인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삶 혹은 꿈을 위해서 뛰어든다. 그것이 잘 어울리는 이유는,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어차피 민족-국가가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으며 앞으로도 이들에게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아줌마'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올림픽 시즌에 잠깐 주목받고, 금메달 카운트로만 집계되는 경기의 뒷면에는 그녀들의 삶이 있다.

임순례 감독은 그 금메달의 '뒷면'을 현실과 단락시킨다. 그녀들은 경기가 끝난 이후에도 뉴코아, 홈에버에서 물건을 파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일 것이고, 동네식당 "아줌마"(달리 그녀들을 부르는 어떤 용어가 있담?)일 것이고, 딸을 둔 이혼녀일 것이다.(한미숙-송정란-김혜경) 우리 옆에 있는 그녀들이다. 감독은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 실제 선수들과 감독의 인터뷰를 붙여넣는다. 영화는 다시 "올림픽이 끝나면 돌아갈 팀이 없는" 그녀들의 현실로 난폭하게 돌아온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국가"대표선수들에게조차 "국가"가 무엇인지, 혹은 그보다는 그녀들의 삶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대항의 국제 스포츠 경기에는 '경기'를 일으키는 나 같은 이도 그녀들의 결승전을 응원하면서 볼 수 있다. 그 경기는 민족-국가의 영광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그녀들이 생존을 위해서 싸우는 또 다른 삶의 현장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얼마전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올림픽 등 각종 세계대회에서 국위선양을 하고 있는 국가대표 선수들과 함께 이 영화를 관람"했다고 한다. 이명박에게는 그녀들의 삶이 아니라 "국위선양"이 보였던 모양이다. 소재의 위험은, 영화보다도 더 현실과 거리가 있는 그런 식의 상징조작도 가능하게 한다. 그러니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이 영화를 보고나서 그녀들에게 "민족-국가의 영광"을 위해 베이징 올림픽에서 열심히 뛰라는 얼빠진 이야기는 하지 말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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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삶의 한가운데


삶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지금, 단테의 신곡(코메디아)을 읽고 있다. 지옥편,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어두운 숲에 처했었네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무엇보다 지난 2007년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서른다섯, 장기간의 병가와 휴직, 여행, 그리고 이혼까지, 인간의 자연적 수명이 일흔이라는 잠언(89:10)의 구절이 아니라도, 나의 영혼의 수명은 아마 일흔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삶의 한가운데"를 지나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애니어그램 성격 테스트의 지표까지 모든 것이 송두리채 변했던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 니나는, 오늘 서른일곱을 마무리한다. 나 혹은 그녀처럼, 말 그대로 "삶의 한가운데"를  지나왔다고,  생각하게 된다.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를 읽게 된 것은, 아마도 이런 정황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미 대학생들의 필독서로 이야기되었던 책이라고는 하지만, 공대생, 운동권으로 20대를 보낸 나의 독서 목록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루이제 린저는 이 작품 속에서 전후무후한 인물들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 인물들은 마치 작가, 그녀의 여러 변신
變身들 같다. 일인칭 서간체의 소설이어서일까? 어느 소설에서보다, 이 책의 인물들, 누구보다 니나, 그리고 슈타인은 그녀의 일부로 느껴진다.

니나는 자신의 경험 속에서 좌절하고 무능하게 된 한 남자 교수의 이야기를 한다. 이 에피소드의 결말은 (나의 다소 보수적인 도덕관념으로는) 좀 경악스럽기는 하지만, 니나의 표현으로는 이 사람의 부인은 이런 사람이다. "짐작하기에 부인은 착하고 현명한 여자 같았어, 아울러 마치 간호사들처럼 정확하고 친절은 하지만 남자들에게 꿈을 주는 못하는 부류의 여자였던 것같아. 언니, 이해해? 이 세상엔 그런 여자들이 많아."

19세의 니나를 처음 만나고 치료한 의사인 슈타인은 18년 동안 그녀를 원했지만, 짧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안정적인 연애관계를 갖거나 결혼하지는 못한다. 평생을 모호한 관계를 유지하지만 말이다. (이 작품은 그 과정을 기록한 슈타인의 일기로 이어지면서, 또한 니나의 회상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직소 퍼즐같이 연결된다.) 그것은 슈타인 자신의 말대로 너무 우유부단하거나 신중해서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녀의 정치적 이상에, 혹은 그보다는 그녀의 솔직한 행동주의에 슈타인이 다가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간접적으로는 기여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어떤 점에서, 슈타인은 나와 비슷하게도 느껴진다. 나도 한편으로는 우유부단하며, 지나치게 신중하기도 하다. 또한 시간 속에 길을 잃지만, 잊을 수는 없다. 슈타인은 니나를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이런 모습이다.
"니나는 엘베 강과 같은 존재다. 유혹적이고 순진하며 도덕이 얽매여 있지 않고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멀고 낯설게 느껴져 붙잡을 수 없다"(123)

이런 성격이 이 책이 출간된 이후에, 니나에게 많은 젊은이들이 열광하게 만든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같다. 그러나 다만, 이것이 그저 젊은 사람들의 반항적인 한때의 기질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행동에 까지 이르는, 자신의 사라지지 않는 본질이라는 점을 함께 공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는 이미 서른 여덞이니 그것은 젊은 한 때의 혈기만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시 나 자신을 떠올리게 된다. 이 작품은, 모든 구절에 나의 존재를 대입하게 되는 신기한 매력이 있다. 그래서 작품을 일반화하고 거리를 두기 보다는, 작품의 그 안에 나를 위치시키고 생각하게 된다. 작품 속에서 순간 순간 슈타인이 되거나 니나가 되어서 혹은 알렉산더이든, 퍼시이든 그 등장인물 중 하나가 되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슈타인에 대해서라면, 그의 "내밀한" 일기는 마치 나의 일기에도 쓰지 못한 말들을 그가 대신 쓴 것처럼 느껴진다. (여성 작가인 루이제 린저가 어떻게 이렇게 한 남성의 영혼 자체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슈타인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온갖 위험들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정치적으로 행동하고, 아마도 또 그렇게 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관념이 그 자체로만 존재하고 물질적으로 실현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그것은 알튀세르를 내가 깊이 공감하면서도 다른  부분이다. 알튀세르는 수용소 탈출 계획을 세운 것으로 만족했지만[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비록 엄청나게 동요하더라도 결국은 나는 그것을 실행하는데 충동을 느낄 것이다. 혹은 실행하지 못한다면 참을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느낄 것이다. 어떤 컴플렉스?)  정치에 대해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니나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다.

한편으로 위안은, 모든 관계의 고통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람의 자연적 수명을 넘어설수는 없을 것이라는, 절대적인 물리적 한계에 대한 것이다. 슈타인에게 그것은 18년이었다. 나에게 그것이 얼마일지는 모르겠지만 니나, 그녀의 온갖 삶의 굴곡을 넘어선 어떤 시간일까..? 여튼 그것은 어떤 식이든 나의 물리적 존재의 한계라는, 끝이 있는 과정이다. 그러니, 그리 절망하지 않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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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만남-서경식 김상봉 대담


만남 - 서경식 김상봉 대담
서경식, 김상봉 지음 / 돌베개

나는 이런저런 '이벤트'에 응모하거나 복권을 사거나 하는 성격이 아니다.(사실 거의 해본적이 없다.) 그러나 출판사에서 이 책의 저자들과의 대화 이벤트를 한다는 공지를 보고는, 잡혀있던 회의일정을 연기하면서까지 응모하고, 또 운좋게도 당첨되었다. 아래 이야기는 책으로 만난 대화에 대한 이야기이도 하면서, 저자와의 만남 행사에서 또 한번 만난 기억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시간상의 이유"로 내 질문서는 잘렸지만 말이다 ^^;

***
김상봉은 서경식이 자신의 "걸어다니는 철학문제"라고 말한다. 앞에 <디아스포라>에 대한 포스팅의 덧글에서도 말했지만 서경식은 디아스포라라는 "상태"가 아니라 그 모순이 "작동"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김상봉은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 "걸어다니는 모순"을 사고할 수 있는 남한에서 몇 안되는 철학자 중 한명이다. 그러니, 이 만남에 어떻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

저자와의 만남에서 김상봉은 이 대담이 518 광주 이후 한세대가 끝난 시점에서, 다음 세대에게 문제를 계승하고 제기하는 과정으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괜한 공언이 아니라, 이 만남 속 대화 전체는 이제 한세대가 지나서 화석화되고 박제화된 이른바 "민주화투쟁"'의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젊은 세대들에게 제기하기 위한 철학적 일반화의 과정, 매우 치열한 과정이다.

만남의 주제를 요약할 수 있을까? 상징적으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제목이 있다. "디아스포라와 서로주체성의 만남"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의 꿈"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디아스포라라는 서경식의 문제의식과 서로주체성이라는 김상봉의 문제의식은 "새로운 공동체"에서 만나는가? 혹은 어긋나는가?

서경식이 디아스포라의 고통에 주목한다면, 김상봉은 그 고통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 새로운 주체성, 이른바 "서로주체성"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긴장이 있다. 서경식에게 그 고통은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개인들의 분투인데 비해서 김상봉에게 그것은 소통의 매개이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의 모순, 국민국가를 넘어서고 횡단하는 새로운 주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과 가장 극한의 역사적 고통에 직면한 주체라는 조건에서, 김상봉의 시도는 전자를 의미하는 것일까?



씨알, 선험적 희망?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이들은 대담에서 디아스포라의 경험을 "코스모폴리탄적 자유"라고 말하는 것은 환상이라고말하고 한편으로는 디아스포라의 경험이 일종의 "유산"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김상봉의 경우에는 오히려 디아스포라 일반보다는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고통을 한반도 민중의 경험 속에서, 함석헌의 "씨알"개념 속에서 접목하고 해석하려고 한다. 한반도에서는 절대적인 종교적/정치적 권위가 부재한 가운데 민중의 끊임없는 투쟁, 혹은 그 가능성이 존재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김상봉은 역사를 비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씨알에게 언제나 희망이, 선험적으로 있다면 비극이 어떻게 사고될 수 있다는 말인가?[김상봉이 그리스 비극에 대한 책을 썼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의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역사에 목적론이고, 그렇게 된다면 비극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게 아닐까? 그러나 나는 또 다른 디아스포라인 벤야민이 말한 "역사의 나쁜 방향"에 우리가 처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고자하는 주체의 비극적 상황--그러나 주체를 숭고하게 만드는--을 염두에 두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서경식의 말에 귀기울이면서 어떤 회의를 갖게 된다. 저자와의 만남에서, 서경식이 말한 것처럼 디아스포라의 경험, 특히 아우슈비츠의 유태인이나 팔레스타인처럼 극한의 고통 속에서는 다른 무엇이 있다. 디아스포라 주체는 그것을 증언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한편으로는 가해자를 "이해-인식"해야한다는 고통속에서 진행되고, 어떤 순간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결국 프리모 레비는 자살했다. 그렇다면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주체들 사이에서 공감하고 이러한 "고통에 참여"하는 것은 가능한가?

디아스포라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묻는 것이다. 김상봉의 '서로주체성'이 디아스포라를 예로 하거나 그들에게도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나에게는 그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그 주체들에게 조차 항상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고통이 아닌가.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디아스포라의 경험은 보편적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또한 서경식에게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러한 고통을 교통하고 공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라면, 증언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단지 언제 누구에게 닿을 지 알 수 없는 "투병통신"(병에 넣은 편지를 바다에 던지는 행위)이라면 디아스포라의 경험은 대중정치에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이 기껏, 소수의 디아스포라 자신들과, 아주 예민한 일부의 공감으로, 지식인들의 하나의 지적 유행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정치의 문제는 대중정치의 문제, 대중 이데올로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저자와의 만남에 갔던 이 날, 우연찮게도 나는 단속추방에 반대하는 이주노동자 농성단 동지들과 함께 하는 일정이 있었다. 이주노조 조합원 동지들에게 한국에서 노동자운동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진행했다.(일제시대~80년대 중반까지 1강. 전체 3강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짧은 강의였지만, 진행하면서 나 스스로 생각하게 된 점이 많다. 우리가 운동을, 사회를 바라볼 때 "이주자의 눈으로" 보아야한다는 점.(교육을 통해서 교육자인 나 스스로를 교육하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예를 들어 일제시대 조선의 노동자운동사를 말하려면 일본에 징용된 이주노동자들, 지금도 중국, 러시아, 미국에 이산되고, 다시 "조선족"으로 남한에 돌아오는 이주노동자들의 눈으로 현재를 보아야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이라는 민족국가의 역사의 시각이 아니라 적어도 아시아, 그리고 세계체제의 시각에서 남한이 처했던 위치를 인식해야하고 이러한 자본주의 세계체계 때문에 이주자가 된 노동자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한다는 것. 또 그들의 모국이 현실과 변혁의 과제와 남한에 노동자운동의 과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한다는 점.

90년대 초중반 이후의 계급구성의 변화는 비정규직의 증가만이 아니라, 그것의 필연적 일부인 이주노동자의 증가와 함께 사고해야한다. 98년 imf구제금융 이후의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양산과정에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도입확산과 통제정책을 함께 생각해야한다, 등등.(한국인 비정규직만이 아니라 이주노동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제까지 내가 얼마나 "내국인"의 시야에 갇혀있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생각할 수 있게 된 지점은, 노동자운동의 쟁점에 접근할 때 '내국인''의 시야에 갇혀서는 안되며 그래서 오히려 "이주노동자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볼 때 온전히 전체를 인식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 정도이다. 운동의 이데올로기를 바꾸어가는 끈기있는 노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전히, 그것이 어떻게 대중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는지(혹은 바꿀 수 있는지)는 아직 답이 없는 문제로 느껴진다. 여전히 노동자주체는 민족국가의 "국민"이며, 투쟁의 과정에서 항상 이 이데올로기는 회귀한다.(이것을 단지 지배 이데올로기=피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실천을 통해 가능할까. (혹은 그것은 직접적으로 디아스퍼라의 고통에 대한 참여가 아니라도 매시기 "비국민"이 되는 실천들을 통해서 가능한 것일까? 예컨데 어떤 경로, 실천으로 가능한가?)



새로운 민족국가? 철학인가 정치적 행동주의인가.

저자와의 만남에서 이들은 새로운 국가, "가장 열린 공동체"가 한반도에서 가능할지 묻는다. 김상봉은 한반도의 재통일 과정에서 새로운 민족국가의 가능성에 대해서 그러한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할 희망에 대해서 혹은 정치적 과정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사실 한반도의 재통일과 같은 현실의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 책에서나 혹은 저자와의 대화에서도 언급들은 있지만 모호하고 추상적이기 짝이 없다. 한반도의 정세, 남북이 처한 정세를 볼 때 통일 과정을 어떤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계기로 생각하는 것은 거의 비현실적이다. 오히려 그것이 현실화되는 시기는 반공주의에 대한 투쟁, 민족주의에 대한 투쟁, 북조선 인민을 이등국민으로 전락시키는 내부 식민화에 대한 투쟁의 계기가 될 것이다.(물론 공동체 간의 관계를 문제삼을 수는 있겠지만, 오히려 전체주의 북조선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가 혹은 어떤 식으로 변용될 것인가가 정치적 쟁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정작 더욱 문제라고 느꼈던 것은 저자와의 대화에 참석한 독자들의 태도였다. (철학자거나 사상가인) 저자들에게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독자들조차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은 정치적 프로젝트, 현실의 변화를 위한 실천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철학적 공론의 문제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독자들의 질의와 토론과정에서도 구체적인 정치전략의 대상이 되어야할 정치의 변혁, 공동체의 변혁이라는 과제에 대해서 추상적인 개념들만 언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철학이 어떤 순간에는 오히려 정치적 사고와 실천을 게으르게 만들 위험, 혹은 그 게으름에 변명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혹은 현실의 정치,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이 <만남>의 대화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일까? 둘 다 다른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정치적 실천에는 철학적 방향에 대한 고민이 당연히 전제되어야하지만 거기에 머물면서 정치의 영역, 그리고 실천--정치전략을 실현하는 데로 나가지 않는데서는 그것은 공문구들에 불과하다. 하다못해 디아스포라 개념을 말하면서도 이주노동자 운동에 어떤 물질적이고 실천적인 기여가 없다면 그게 무슨 현실적 의미가 있는가? 개인의 1500cc 두뇌용량 안에 같힌 사고를 넘어서 말이다.

나는 그러한 문제의식을 저자와의 대화에 참가한 독자들만이 아니라 두분 선생에게도 느낄 수밖에 없다. 김상봉 선생은 즉자적인 reaction이 아니라 정신의 유대/연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해고 50일의 GM대우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에는 정신의 유대/연대가 아니라 몸이 따라가는 실천의 연대가 필요하다. 이랜드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구정매출 제로투쟁의 집회참가가 중요하다. 그것은 서경식 선생에게도, 죄송하지만 마찬가지이다.

선생은 자신의 '외부'에 있으며 ''내부'에 참여하지 못하는 데 부채의식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선생이 서있는 곳은 김상봉 선생의 지적처럼 그 자체가 내부일 것이라는 점을 먼저 언급하자. 게다가 문제는, 정치적 교통을 위해서는, 고통의 증언을 위해서도 그를 넘어선 참여를 조직해야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그 주체(디아스포라라고 해도) 스스로가 타자의 고통에도 또 한번 먼저 참여해야한다는 것이다. (디아스포라에게 그것이 가혹한 요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디아스포라가 아닌 주체들의 책임성을 전제하는 가운데, 둘 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주노조 동지들은 한국의 비정규투쟁에 가장 열심히 연대하는 주체들 중 하나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 발언하고, 그것을 '사회운동'으로 조직하거나 참여해야한다. 서경식 선생이 전날 만났다고 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과의 연대와 같은 실천이, 주체들 사이의 교통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다.(자신의 고통을 증언하는 것으로 어떻게 연대가 만들어질 수 있는가? 연대는 말이나 사고가 아니라 서로 실천속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어떤 "희망"을 위해서

이런 모든 것을 저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철학자들에게는 그의 역할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인은 아니다. 그러나 독자들도 자신을 철학자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정치적 실천은 이른바 '정치인'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옆에 앉은 어떤 독자가 자신은 "씨알" 개념 속에서 정치적 희망을 발견했다는 요지의 말을 할 때 황당해졌던 것이다. 김상봉 선생에게 내가 가장 의문스러운 점은 민족 혹은 한반도 인민에 고유한 것으로서 "씨알"개념을 초민족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지, 그것이 단지 '선험적'--타고났다는 점에서--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하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씨알"이, 구체적인 정세에 대면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대중"을, 따라서 "정치"를 대체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여전히 그 독자들이 어떤 종류의 실천을 통해서 현실을 바꾸는 나름의 실천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이 대화의 시도는 의미있다. 저자와의 대화 마지막 부분에서 서경식 선생의 말을 주목하자. (공동체 내부의 주체인) "우리"에게 희망의 요소가 보이지 않아도 "외부와의" 소통 속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희망이 소진되어아가는 일본사회의 정세 속에서 더욱 이해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보편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공동체의 변혁을 위해서라도 다른 공동체와 교통하고, 오히려 내부에 존재하는 그들의 시각-- 이주자, 디아스포라의 시각으로 운동을 사고하고 실천해야한다는 점. 교통 자체가 실천이지만, 그것에서 또 다른 실천을 시작할 수 있다면.

김상봉 선생은 또 이렇게 말한다. 도덕, 가치, 그리고 희망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원래-당연히 있는 것이 아니다.(어떤 초월적 주체가 이런 것을 부여해준 적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에 절망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것을 만드는 것이 과제가 된다. (김상봉 선생은 그것을 "우리 역사"에서 찾자고 말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내가 썩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그 "우리"의 민족적 성격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정치적 희망을 우리는 교통 속에서, 그리고 역사적 경험 속에서 얻자는 제안이다. 그 '희망'이라는 것을 '낙관의 감정적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 실천의 방향으로 생각할 때 현실에서 진짜 희망이 될 수 있다. 두 사람의 대담을 그것을 찾는 과정으로 읽는다면 더 값질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서경식, 김상봉 두 사람의 대화는 여전히 눈부시다. 문제는, 다시 한번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그것을 수동적으로 되뇌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에서 다시 사고할 의무가 있는 것. 이정표가 길을 걸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두 다리가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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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디아스포라 기행-추방당한 자의 시선


디아스포라 기행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많은 언론에 추천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순전히 (내일 이 책에 대해서 글을 쓸 것이다) <만남>-서경식,김상봉 대담 때문이다. 그 전에는 목차를 보고는 그냥 독특한 여행책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의 첫 목차는, '마르크스의 무덤'. 나는, 마르크스의 커다란 두상이 놓여있는, 그렇게 꾸며진 마르크스의 무덤을 좋아하지 않았다. 런던에 가서도 그 곳에 가지는 않았다.

***

서경식, 서준식의 동생. 이렇게만 알고 있었다. 서준식 선생에 대해서라면, 그분을 실천과 글을 통해서 알 수 있었고, 떠나시게 된 이유를 나중에야 듣게 되었다. 그러나 존경하는 분의 형제라고 해서, "그렇구나"하는 이상의 별 생각은 가질 수 없었다. 그러다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을 읽고, 아...하고 감탄 혹은 탄식. 왜 아직까지 이런 분을 몰랐을까, 지금, 처음 읽었을까.

***

이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만남>이라는 책을 만나고, 또 길을 돌아서 다시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커다란 두상이 얹힌 무덤의 주인이 아니라, 한명의 디아스포라로 등장한다. 그도, 고향에서 뿌리뽑히고 흩어진 자, 디아스포라였던 것이다. 이 책은 말 그대로 디아스포라 기행, 여행기가 아니라 살아있거나 혹은 이미 죽은, 디아스포라들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다.

디아스포라는 어떤 이들인가,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 중에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참 한 후에, 전혀 예상치 못하게, 집에 돌아가 가스벨브를 틀거나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리는 낙관주의자들이 있다.(..) 누군가 죽으면 그 사람은 이제 어깨의 짐을 전부 내려놓았구나하고 쾌활하게 생각해보곤 한다.  - 50쪽에서 재인용, 한나 아렌트 "우리 망명자들" 중에서

서경식도 이 구절을 읽고 갑자기 자살한 유쾌한 친척을 떠 올리고, 자신도 이렇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존재 자체가 동요와 불안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저런 정치적 이유로 공동체에서 분리된 망명자들, 이주자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민족적, 문화적 근원으로부터 분리된 이주민 2,3세들 소수자들. 이들은 정도와 양상의 차이가 있지만, 자신의 존재와, 존재하는 곳에서 근원적인 불일치를 경험한다.

서경식과 같은 재일 조선인은 모어-모국어가 일치하지 않는다. 모어는 일본어이고 일본어로 사고하지만 모국어는 한국어, 그것은 오히려 생소하고 거칠게 입안에서 맴도는 언어다. 디아스포라는 조국(선조의 출신국), 고국(자신이 태어난 나라), 모국(현재 '국민'으로 속해있는 나라)가 분열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내셔널리티의 분열과, 그리고 영혼을 구성하는 언어의 분열은 개인에게 항구적인 상처와 균열을 새길 수밖에,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일지는 나와 같은 '내국인'들에게는 생각하기 힘들다.

더구나, 이런 분열이 살인적 폭력에 의한 경우에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란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여성 미술가 시린 네샤트는 어떨까, 우간다에 살던 인도 이주민의 후손으로, 이제는 영국에 망명해서 살아야하는 자리나 빔지는 어떨까. 백인 사회에서 자라난 코리언 입양아들은 어떨까. 그리고, 자신의 모어가 파시스트의 끔찍한 폭력의 언어가 되어 버린 독일계 유태인 시인, 강제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파울 첼란에게는 어떨까. 그리고 바로 지금, 재일조선인과 고향에서 쫒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이라크 사람들과 파리 방리유의 이민2세들과 르완다 난민들과 코소보 사람들과... 그리고, 우리 옆에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어떨까.

<만남>에서 김상봉은, 서경식은 타자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특이한 존재라고 말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것을 상상하기도 힘든 것이다. 영혼이 어떻게 그것들을 견딜 수 있을까. 디아스포라에게라면 그 자신의 영혼의 고통 덕분(?)에 타자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일까? 아니, 오히려 우리 모두에게 공동체의 윤리가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하려면 서경식과 같은 디아스포라의 예를 드는 것은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그래서 서경식은 솔직하게, "보편적인 고통같은 것에 저는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만남>356쪽)

그러나 서경식이, 한명의 디아스포라로서, 우리와 대화하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고통의 차이를 과시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대화하고 만나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도 오히려 만남에 나서야한다. 그/녀들의 고통이 대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해도, 상상하기 힘든 것이라고 해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녀들을 통해서 세계를 만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타자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래서 오히려 디아스포라를 만나는, 나와 같은 '내국인'에게 요구되는 윤리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에 함께 하기 위해서 "있을 수 없는 비국민"(잭 시라이)이 되는 것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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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김동률, Monologue


김동률 5집 - Monologue
김동률 노래 / Mnet Media

나오기 전부터 이곳저곳에서 주묵했던 앨범.
딴 곡들도 좋지만, 첫곡, '출발'이라는 노래는 참 좋더라.
또 여행을 떠나고 싶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촉촉한 길을 혼자 걷고 싶다.


아주 멀리 까지 가보고 싶어
그곳에서 누구를 만날수가 있을지
아주 높이 까지 오르고 싶어
얼마나 더 먼곳을 바라볼수 있을지

작은 물병 하나 먼지낀 카메라
때묻은 지도 가방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습기를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데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멍하니 앉아서 쉬기도 하고
가끔 길을 잃어도 서두르지 않는 법
언젠가는 나도 알게되겠지
이길이 곧 나에게 가르쳐 줄테니까

촉촉한 땅바닥 앞서간 발자국
첨보는 하늘 그래도 난 이큰길
언덕을 넘어 습기를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데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새로운 풍경에 가슴이 뛰고
별것아닌 일에도 호들갑을 떨면서
나는 걸어가네 휘파람 불며
때로는 넘어져도 내길을 걸어가네

작은 물병 하나 먼지낀 카메라
때묻은 지도 가방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습기를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데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내가 자라고 정든 이 거리를
난 가끔 그리워 하겠지만
이렇게 나는 떠나네
더 넒은 세상으로


노래는 아래에서 들을 수 있다. (내가 올리기는 귀찮아서 ^^:)
http://blog.naver.com/mangto91/80047524182
사진은 알프스의 산길.  "서쪽길"을 들었던 날, 날씨가 좋았다..

가사가 묘사하는 것들은 혼자서 여행을 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장면이다.

김 동률의 지난 앨범도 그런 느낌이었는데, 곡 하나마다 작은 플롯을 담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앨범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극처럼 느껴진다. 정작 가수 자신은 노래에서 "영화에서처럼 짜릿한 반전은 기대하지 않아"(4/ "JUMP")라고 말하지만, 6/ "The Concert" 나 3/  "오래된 노래" 같은 노래의 가사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사랑 이야기인 것으로 들리는 노래들이다. 사실, 누구에게나 있는, 그러나 한 사람에게만 고유한 그 사랑 이야기들은 영화같은, 혹은 그보다 더 극적일 테니까.


===
사실 요즘에 '필'이 꽃혀서 듣고 있는 앨범은 "디어 클라우드 Dear Cloud"라는 밴드의 1집.
CD 케이스가 구름처럼 폭신거린다.



지금 읽고 있는 <스피노자의 뇌>라 는 책을 보면, '느낌'에 선행하는 '정서'가 생기기 위해서는 마치 자물쇠에 맞는 열쇠같은, 어떤 자극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앨범의 몇몇 곡이 그런 셈이다. (물론 위에서 이야기한 김동률의 '출발'도 나에게 여행의 정서를 다시 불러오는 열쇠다.)

하지만 꼭 맞지 않아도 열리는 것을 보면, 내 자물쇠가 좀 허술한 것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
다락방이 있던 집에 대한 추억같은 것은 없지만,  "그 다락방이 그립습니다"라는 노래에 특정한 정서와 그것으로 인한 느낌과 이런 저런 생각들이 따라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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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
강양구 지음 / 프레시안북

 

아톰과 코난은 20~30대라면 누구나 기억할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이다. 원자력 에너지를 쓰는 아톰의 시대에서, 태양의 에너지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코난의 시대로 가자고 주장한다. 바로 석유시대를 넘어서 말이다. 프레시안 에서 황우석 사태 등 과학기술과 관련된 쟁점에 좋은 글을 써왔던 강양구 기자가 썼다.

 

석유 에너지 시대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들, 바이오디젤, 바이오매스, 태양에너지, 풍력에너지 등을 소개한다. 각각의 에너지가 유럽 등지에서 어떻게 실제로(!) 활용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공상이 아니라 이미 현실이며, 그리고 절박한 미래이기도 하다.

 

여기에 비해서 남한의 현실은 “참으로 암담하다.” 법과 제도, 정부의 의지는 재생에너지 혹은 석유 대체에너지의 개발과 사용을 촉진하기는커녕, 가능성을 봉쇄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석유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시점에 비참한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석유 정점 oil peak가 2015~25년으로 예상되는 마당에 이미 임박한 현실이다.) 90년대, 쿠바와 북한이 처했던 상황이 그것이다.

 

폐식용유로 만든 바이오디젤로 시내버스를 운행하는 오스트리아의 그라츠, 바이오매스로 필요한 난방, 전기에너지는 물론 비료를 생산하는 독일의 윤데 등의 사례는 흥미롭다. 이런 사례들은 대체 에너지를 사용해서 살아가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소도시들에 불과하고 농업에 기반하고 있는 사례들이라는 점에서, 전체 에너지를 대체하기에는 힘들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적어도 이런 방식의 시작이 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한편, 이러한 대체 에너지와 관련해서는 여러 쟁점이 있다. 바이오디젤과 관련해서는, 이것의 생산(재배와 운송, 가공)을 위해서 들어가는 화석에너지로 인한 온실가스 발생, 식량대신 바이오디젤 생산을 위한 농업이 진행되면서 물의 부족, 열대우림의 파괴, 식량가격의 인상이 일어난다. 저자는 이런 쟁점에 대해서도 비교적 균형있게 소개하고 있다. (물론 내가 보기에는 저자는 바이오디젤에 대해서 너무 관대하다. 식량 가격의 측면에서 보아도, 가격인상이 ‘아직’ 충분히 현실화되지 않았을 뿐, 바이오디젤 산업이 전면화되면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을 통해서 접할 수 있는 대체에너지들이 딱히 어떤 명확한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은 아니다. 소개하는 사례들은 지역적으로 제한적이고 고군분투하고 있고 아직 돈이 많이 든다.(따라서 저소득 국가에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과연 환경적으로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논쟁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에너지 체제 전환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직은 실험, 대안 “만들기”의 과정이다. 그것을 감당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어떤 명확한 대안, 깔끔한 전망이 아직 없다고 해도 에너지 체제의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실험과 실패는 필수적인 기회비용인 셈이다. 그래서 '감히' 시도해나가야한다.

 

한편, 이러한 대안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북한에 대한 대체 에너지 지원 방안이다. 북한에 경수로 대신 풍력에너지, 바이오매스를 활용할 수 있는 시설을 제공하자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에서도 이미 제안한 바 있는 이런 대안은 에너지 체제전환과 평화를 결합하는 의미있는 방안이다.

 

유가 폭등의 시대, 유류세 인하가 쟁점이 되고 있지만, ‘언발에 오줌누기’ 식의 대책만 논의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시기일수록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현재의 석유에너지 체제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을, 운동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책에도 언급되지만 환경운동단체, 민주노동당, 공공노조-연맹 산하의 에너지 관련 노조들(가스공사지부, 발전노조 등)로 이루어진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의 활동을 더욱 활성화하고, 또한 노조운동의 유기적 일부가 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점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 최근 프레시안이 낸 책들은 이런 점에서 흥미롭다. <대한민국 병원사용 설명서>는 보건의료, 건강보험 제도와 시민의 생활의 문제를 생생하게 풀어낸다. 이 책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는 에너지체제 전환을 위해서 (노동자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의 대안에 대해서 말한다. 직접적으로 공공부문 노동자운동에 필요한 이념들을 (노조운동에 제한되지 않는) 사회운동의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셈인데, 나 같은 노조활동가들에게는 실천적(혹은 실용적)으로도 매우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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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난의 시대’에 대해서는 물론,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코난이 맞서 싸웠던 인더스트리아에서 전쟁광들이 얻어내려고 했던 에너지도 “태양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미아자키 하야오는 작품 속에서 플롯의 전개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모순을 드러내기를 즐기는 것같은데, 이것도 그 사례의 하나라고 할 만하다. (그런 사례로, 나우시카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여성인 크샤나, 모노노케 히메에서 철의 문명을 만들고 동물들과 싸우는, 그러나 여성과 나병환자를 보호하는 에보시와 제철소 마을의 존재 등을 들 수 있다.)

 

인더스트리아에 숨겨진 태양에너지는, 석유 제품(플라스틱)의 재활용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전쟁을 위한 것으로 전유된다. 그에 비해서 라나의 하이하바섬은 태양과 바람 속의, 평화로운 농경 공동체이다. 미래소년 코난의 결말은, 마치 하이하바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같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새로운 세계를 쓰자고 제안하는 것같다. (인터스트리아가 가라앉은 후 새로 떠오른 대륙처럼)

그 세계는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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