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코메디아

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2/11
    [독서]신곡-단테 알레기에리의 코메디아(2)
    겨울철쭉

[독서]신곡-단테 알레기에리의 코메디아


신곡 -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단테의 신곡을 읽으려고 마음을 먹은 직접적인 계기는 서경식의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에 대한 독서다. 책은 신곡 지옥편의 첫 두연으로 시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아우슈비츠에서 레비는 신곡의 구절을 생각하면서 인간임을 자각한다.

솔직히 말해서, 신곡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그리고 그 켭켭이 쌓힌 각주들까지)까지 모두 읽은 후에도 이 작품이 "인간임을 지탱하게 할" 힘이 있는지 나는 잘 확신할 수는 없다. 위대한 작품이라는데는 전혀 이견이 없지만 말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기질적인 무신론자인 나로서는 기독교 문명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의 감성에 완전히 일치되기는 힘들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레비의 언급을 통해서 신곡을 어떻게 읽어야하는 지를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는 말은 할 수 있다. 이렇게 읽기 시작할 수 있다. 레비는 지옥편의 오디세우스와 관련된 구절(26곡)을 수용소에서 기억한다.(아래 인용한 번역들은 모두 내가 읽은 민음사판의 것)

그대들의 혈통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덕과 지혜를 따르기 위해 태어났다

오디세우스는 운명 앞에도 불굴의 의지로,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도전한다. 그러나,

풍랑은 우리 배를 바닷물과 함께 세바퀴 돌게 했다오
네 바퀴째에 선미가 높이 솟아오르더니 뱃머리에서 떨어져
마침내 바다가 우리 위로 덮쳐왔소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대로였다오

레비는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대로였다오"라는 구절을 되씹는다. 인간의 위대한 행위가 하느님의 섭리 앞에서 좌절할 때, 그러나 지옥에서도 오디세우스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그것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죄악, 아우슈비츠라는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운명인가. 그것은 단테가 쓴 의도와는 다른 것일 수 있지만, 단테가 본 지옥도 인간의 눈으로 다시 읽을 수 있다. 신곡은 그렇게 열려있다.

작품 전체는 단테의 구체적인 시대적이고 개인적인 제약 안에 있다. 단테는 자신을 추방한 정적들을 하나씩 지옥편에 등장시킨다. 타락한 성직자들은 교황도 예외없이 지옥에서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데, 교황청의 금서가 될 만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비판이 가능했다는 것은 교황청의 권위에 근거한 중세 카톨릭 체제가 이미 붕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대의 과학지식에 따른 지리적 설명(주로 천국편에 등장하는)은 현대적인 시각으로 보면 단지 지리적인 오류만이 아니라 인종주의적이고 유럽중심주의적인 편견을 담고 있기도 하다. 지옥편에서 이슬람 지도자가 등장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점에서 시대적 한계를 이해하면서 읽는 것은 물론이지만 중간중간 불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그런 제약들에도 불구하고, 혹은 오히려 그런 구체성 때문에 신곡을 읽을만하다고 해야할 것같다. 그런 구체성들이 없다면 지옥-연옥-천국으로 이어지는 길은 따분한 교리문답에 그쳤을 것이다.( 죄송하지만 천국편의 상당부분은 사실 순전히 신학적인 교리문답이기도 하다.;;) 특히 그런 구체성의 핵심에는 베아트리체에 대한 단테의 사랑이 있다.

아홉살에 베아트리체를 처음 본후 사랑에 빠진 단테는 피렌체에서 추방되기 훨씬 전인 1290년, 그녀를 죽음으로 이별한다. 베아트리체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사진은 단테가 아홉살에 베아트리체를 처음 만났다고 하는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 여행할 때 만난  다른 여행자가 나의 작은 호의에 대한 답례로 이 이야기를 가르쳐주었는데, 신곡을 읽지 않고 온 것을 후회한 적이 있다.]

신곡 전체에 가장 가슴떨리는 부분은 연옥편의 후반부(30편~)부터, 연옥의 끝 에덴동산에서 베아트리체를 다시 만나는 장면이다. 그녀는 지옥에서부터 이제까지 순례자(단테)를 인도하던 베르길리우스(로마의 시인)를 대신해 천국을 안내한다. 천국편까지 베아트리체가 등장하는 구절들은, 단테가 이 작품을 무엇보다 자기위안을 위해서 썼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어느 구절보다 생생하게 빛나고, 그 것을 묘사하는 순간에 가장 행복한 사람의 글이라는 것을 700년이 지난 지금도, 다른 언어로 번역된 시로도 느낄 수 있다.

나를 하느님께 인도하던 그녀가 말했다. "이제
다른 생각은 그만 하세요. 내가 모든 고통을 덜어주시는
그분과 함께 있다는 것을 생각하세요"

그 사랑스러운 말에 나는 나의 위안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때 그녀의 거룩한 눈에서 본
사랑은 너무나 거대해서 말로 옮기지 못하겠다.

내 말이 실패할까 두렵기도 하고,
누군가가 위에서 인도하지 않으면 내 정신이
그런 높이까지 오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순간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녀를 바라보면서 내 마음이
다른 모든 추구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기쁨이 베아트리체의 얼굴에 곧게
비치고 있었고, 그 반사광이 나를
기쁨으로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미소의 빛줄기로 나를 압도하면서
말했다. "이제 몸을 돌려 잘 들으세요.
천국은 내 눈에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 천국편 18곡 중

단테가 천국의 안내자, 혹은 동행자(그러니 그녀는 진정으로 Soul Mate라고 할만 하다)로 베아트리체를 등장시킨 것은, 그녀가 구원의 여성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와 함께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단테의 사랑이 비록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었을지라도 천국을 희망하는 삶의 힘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고, 방대한 신곡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물론 이것이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일방적 판타지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이 판타지는 성녀-창녀의 이분법을 전제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서로의 영혼의 발전에 도움을 주는 관계를 우정이든, 날개달린 에로스든 만들어갈 수 있을테니까.)

한편, 기독교 신자가 아닌 나는 신곡을 통해서 기독교적인 구원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한국에서는 교회를 통해 복을 내려주는 기복신앙의 대상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그것은 절대자를 통해서 영혼의 고양, 완전성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어떻게 보면 하느님이라고 하는 인격신은 이름만 있는 것이지 실제로는 각자의 영혼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매개로 그 자체가 하나의 비유일 수 있다. 다만, 불교와 같은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자신안에 있는 부처를 찾으라고 가르치는 데 비해서, 기독교는 하느님을 매개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물론 사소한 차이는 결코 아니다.)

인간은 자기 한계 내에는 결코
완성될 수 없어요. 그러니 계속해서 겸손하고
복종하는 자세로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것은

거스르려 했던 그만큼 자꾸오르려 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혼자 힘으로
하느님께 이르기 힘든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말하자면 두 길들 중 하나로,
혹은 두 길 모두를 통해
인간이 완전한 삶으로 이르는 길을 마련하신 것이지요.

그 일을 행하는 자가 더 감사하는 만큼,
그 마음에서 나오는 자비가 더 선하게
우러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온 세상에 자국을 남긴 영원한 하느님의 덕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기꺼이 다시 한 번
인간을 끌어 올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 천국면 7곡 중 베아트리체의 말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하느님"의 표상, 인격신으로서 "야훼"는 이중적인 효과를 가진다. 한편으로는 이해하기 쉬운 인격적 상징으로, 누구나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키는 길을 따라갈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쉬운 비유 때문에 왜곡되기도 쉽고,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에게 원래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미신의 대상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말씀이나 성경 자체도 물론이지만 심지어 "하느님"의 표상까지도 일종의 비유일 수 있다는 생각을 열어야, 영혼을 ("천국"으로 불리는 지고의 장소까지) 고양시키는 기독교 안의 위대한 가르침을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신곡은, 지옥에서 연옥으로, 천국까지 길을 걸으면서 인간과 악마, 천사와 신을 만나고 깨달음을 얻어가는 일종의 "여행기"라 할 만하다.(SF영화와도 비교할 수 없을 우주적 규모의 여행기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여행에 신곡의 독서를 통해 동반하면서, 단테가 추구하려고 했던 영혼의 고양을 함께 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 장면을 구경해 볼 수 있다. 물론, 각자의 베아트리체를 만나는 경험은 현세에서들 하셔야겠지만.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