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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노동의 힘 -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과 세계화


노동의 힘 -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과 세계화
비버리 실버 지음, 백승욱.안정옥.윤상우 옮김 / 그린비
 
 
'노동운동의 위기'가 몇가지 사건을 통해서 가시화되면서 올해 상반기에 많은 논쟁들이 있었다.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노동운동의 위기라는 것이 상층조직들의 위기가 아니라 현장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위기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은 '노동운동의 메카'라고 하는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이다. 정규직 노동자들과 사내하청 방식으로 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단결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나마 좌파적인 집행부라고 하는 이상욱 집행부마저도 애초의 기대에 한참 미달하는 합의안을 비정규직을 위한 것이라고 들고 나왔다.
 
여기서 당연해보이기 때문에 주목하지 않았던 몇 가지를 다시 생각해보자. 왜 남한 노동운동의 핵심부대는 자동차 공장들인가? 그리고 위기는 노동의 불안정화와 이를 통한 노동자운동의 분할을 통해 시작되는가?
 

이 책을 읽는 것이 놀라운 독서경험인 것은, 이렇게 남한의 노동운동사의 특수한 역사를 세계체계의 변화와 함께하는 세계 노동자운동의 일반적 경향 속에서 읽을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노동의 힘>은 노동운동을 하고 있거나 관심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읽어보아야할 책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이 제시하는 수많은 쟁점을 모두 언급하거나 소개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눈에 띄는 몇가지를 언급하자.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20세기의 산업'인 자동차 산업의 예를 통해서 노동자운동의 세계적 동학을 이해할 수 있다. 실버는 "자본이 가는 곳에 갈등이 따라간다"고 말한다. 생산의 재배치에 따라서 노동자 집단이 형성되고 투쟁이 시작된다. 실제로 2세기, 세계의 전투적인 노동자 투쟁은 자동차 공업의 이동에 따라서 미국->서유럽->남유럽->제3세계(남아공, 브라질, 한국)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아마도 다음 순서는 중국이 될 것이며, 중국에서 일어날 거대한 노동소요는 노동정치만이 아니라 중국과 세계의 운명에도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지 노동자들의 권리만이 아니라 정치적 변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노동소요가 민족국가의 정치변동에 주는 영향은 새로운 투쟁의 주체들이 해당 국가의 시민권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는지 통합되어 있는지도 영향을 준다. 그리고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투쟁이 집중되는 지역이 정치 중심지와 가까운지 여부도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다. 이에 따라 북유럽과 남유럽, 남한과 브라질의 경우를 비교할 수 있다. 우연성에 기반한 물질성의 요소들을 사고해야한다.)
 
노동자들의 작업장 교섭력은 포드주의 생산 덕분에, 그리고 이후에 도입된 JIT(Just In Time:적시생산시스템) 때문에 오히려 증대했다. 비교적 소수의 인원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라인을 멈출 수 있었다. 자본의 대응은 생산을 공간적으로 이동하고 기술혁신을 통해 생산을 재조직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의 이동에 따라 갈등도 이동했으며 기술혁신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투쟁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일본의 경우다. 이 경우는 완성차 핵심 노동자들에 대한 종신고용의 보장과 광범위한 하청계열화에 의해서 갈등이 예방된다.(이중적 린생산) 다른 국가에서도 이런 방식은 모방되었지만 핵심노동자들에 대한 '종신고용' 보장없이는 효과가 없었다.(인색한 린생산) 이 전략의 성공은 하청 체계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었는데, 일본 외에는 이런 조건을 창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은 60년대까지는 농촌지역 노동예비군과 주로 상근남성노동자들의 가족으로 이루어진 여성노동력을 활용함으로써 별다른 저항없이 하청체계를 관리했고, 그 이후에는 이 체계를 동남아시아로 확대했다.)
 
저자는 따라서 세계자동차산업의 주요추세가 이중적 린생산으로 나가는 한, 미래에 발생할 자동차 노동자들의 주요한 소요는 하청체계의 하층 노동자들에 의해서 주도될 가능성이 클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이들의 강력한 불만이 강력한 작업장 교섭력과 병행하는 것은 아니며 더욱 상층 노동자들은 강력한 작업장 교섭력을 갖고 있지만 불만은 훨씬 작은 듯하고 또한 불만은 높지만 구조적 힘은 적은 하층 노동자들과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격리되어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한다. 이런 분할은 중심-주변의 지리적 분할에 조응하고 종족성, 거주지, 시민권의 차이와 중첩될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세계노동정치에도 중요한 함의를 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은 남한의 노동자운동의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일정한 양보와,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비타협적 탄압'이라는 현대자동차 사측의 입장은 (불완전하더라도) 이중적 린생산을 지향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작업장 교섭력의 문제나, 노동자들이 가지는 불만에 대한 진단도 일치한다. 이런 과정을 통한 노동자운동의 약화는 단지 자동차 산업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노동자운동의 주력인 자동차산업에서 벌어지는 운동의 약화는 전체 노동자운동에 파급된다. 생산의 (중국으로의) 공간적 이동을 통한 '산업공동화'와 함께 벌어지는 '정규직-비정규직 분할'은 이렇게 해서 '노동운동의 위기'를 불러온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이런 난점이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면, 이 난점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실천들 또한 우리만의 것은 아닐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럼 21세기에도 자동차 산업이 계속 노동소요를 몰고 다니는 선도산업일 것인가? 여전히 노동소요를 동반하겠지만 20세기와 같은 파금력을 갖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자본은 노동소요를 피해 공간적으로만이 아니라 부문간에도 이동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저자는 '새로운 선도산업'을 검토한다. 반도체산업, 운수산업 등이다. 이러한 비교를 위해서는 자동차 산업 이전, 즉 19세기의 선도산업과의 비교가 필요하다. 바로 섬유산업인데, 여기서 저자는 중요한 비교지점을 보여준다. 자동차산업만큼 작업장 교섭력을 갖지 못했던 섬유노동자들은 (비록 자동차노동자들처럼 실질적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또한 그 때문에) 강력한 전투성을 보여주었다. 부족한 작업장 교섭력을 '연합적 힘'으로 극복해야했기 때문에 지역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연대성을 보여주었다. 많지는 않지만, 이들이 성공한 경우도 민족해방 운동과 결합하는 등을 통해 연합적 힘을 배가시킬 때 가능했다.
 
반도체 산업과 같이 21세기에 선도산업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업종에서 노동자들의 처지가 20세기의 자동차 산업보다는 19세기의 섬유산업과 유사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그렇다면 새롭게 형성되는 노동자운동은 지역을 근간으로 연합적 힘을 확보할 수 있어야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해볼 수 있다.
 
(한편, 남한에서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전투적인 투쟁이 가지는 의미를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사고해볼 수 있다. 강력한 작업장 교섭력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전투적인 투쟁을 시작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들이 구축한 연합적 힘은 80년대 자동차노동자들의 강력한 구조적 힘과 결합하여 폭발적인 투쟁과 성과를 만들어냈다.)
 
자동차 산업 이후, 새로운 부문의 노동자운동에서 주목할 업종은 운수부문과 도시의 시설관리부문이다. (우연찮게 이 두 부문 모두가 현재 민주노총 안에서는 공공연맹이 포괄하고 있는 업종이라는 점에서 더 흥미롭다.)
 
생산의 세계화는 필연적으로 운수/물류의 중요성을 증대시킨다. 이 부문은 지역적 재배치를 의식적으로 할 수도 없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강력한 작업장 교섭력을 가진다. 이러한 강력한 구조적 힘이 이미 주어진 것이라면 문제는 이 운동이 전체 노동자운동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가 된다.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까지 대변하면서 노동자운동을 진전시킬 것인가 혹은 적절한 양보에 타협할 것인가는 이들이 가진 힘에 비추어 중요한 운동적 쟁점이다. 현실에서는 당장 진행되는 운수산업부문의 조직적 재편과 관련된 쟁점이 연관된다. 운수부문의 노동자만 별도로 뭉치자는 입장과 보다 광범위한 공공부문으로 뭉치자는 입장이 구체적인 쟁점으로 형성되고 있는데, 운수/물류 부문 노동자들이 가지는 구조적 힘의 향방은 노동정치 전반과 관련하여 중요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남한의 국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운수의 전략적 중요성을 '동북아 중심국가 - 동북아 물류허브'라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한편, 남한의 민족주의적 좌파는 민족적 발전전략 속에서 남북철도 연결을 통한 TKR-TSR 구축이라는 전망을 제시하는 데, 이는 남한의 국가가 가지는 발전 전략과 일치한다. '민주노동자전국회의'의 일부는 '통일운동의 활성화에는 운수산별노조가 도움이 된다'는 입장을 가지는 데 이런 맥락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가지는 국가에 대한 타협성, 코포라티즘 성향을 생각한다면 운수/물류 부문이 가지는 전략적 중요성은 노동자운동이 아닌 국가에 활용될 우려가 크다.)
 
한편, 도시의 시설관리노동자들도 중요한 전략적 지위를 차지한다. 도시가 쉽게 이동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들도 구조적 힘을 가진다. 특히 금융화된 '세계도시'에서 그렇다.(관련해서는  <경제의 세계화와 도시의 위기>/사스키아 사센  참고) 그러나 이는 충분히 지역에 근거한 연합적 힘을 전제할 때 가능하다. LA에서 SEIU가 진행했던 "건물관리인을 위한 정의" 켐페인-조직화 전략은 이들의 힘을 보여준다.(영화 '빵과 장미'에 생생하게 그려졌던 그 운동이다.) 
 
남한에서도 특히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주력은 이러한 도시의 시설관리노동자들로 형성되고 있다. 예를 들어 공공연맹의 조합원 10만명 중 비정규직 조합원이 약 1만명 정도 된다고 추정할 때, 이 중에서 최소한 7500명 이상은 지방자치단체나 공기업 또는 민간기업에 고용된 공공시설환경관리분야의 노동자들이다. 공공시설환경관리분과 내 환경미화원, 도로보수원 등과 시설관리노조 조합원. 민주노총에 직가입된 각 지역일반노조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한편, 이런 상황은 이 부문의 노동자들이 지역에 강하게 기반한 운동을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아직 부족하지만 지역일반노조나 지역공공서비스노조의 사례가 그것을 예증하고 있기도 하다.
 
실버는 책의 끝 부분에서 "이 책에서 수행한 분석은 전후의 세계적인 사회협약들이 노동에게도 자본에게도 안정된 해결책을 제공하지 못했으며, 특히 단순히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게 만들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노동운동의 우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협약이 해결책이 아니며, 좌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순히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다. 여기에 현재의 논쟁 구도 속에서 좌우파 모두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구성해야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처방은 물론, 운동의 노선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가는 시도 모두를 요구한다. (백승욱 선생은 옮긴이 후기에서, 지역적-국가적-국제적 수준에서 연합적 힘을 기르기 위해서라도 복수의 보편성에 대한 사유와 사회운동적인 노동자운동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책의 어느 부분을 읽는다고 해도, 이 책은 다른 세계의 문제를 서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바로 어제 오늘 참세상 뉴스, 매일노동뉴스에 실린 노동기사를 보면서 드는 의문, 바로 지금 방금 누군가와 논쟁한 운동의 쟁점과 연결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처한 노동운동의 조건이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저자들이 그 보편성을 탁월하게 추출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남한 노동운동의 전투성에 대한 과장된 환상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처한 물질적 조건을 객관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가장 강력하게 '보편적인' 구절 중 하나인 책의 마지막 구절을 읽어보자. 이 말은 당위적이거나 예의 하는 말이 아니라, 자본주의 역사에서 노동소요가 세계정치에 미친 영향에 대한 분석에 입각한, 구체적인 진술이다.
 
"...따라서 21세기 초에 세계의 노동자들이 마주한 궁극적인 도전은 단순히 노동자들 자신의 착취와 배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아니라, 진정으로 이윤을 만인의 생계에 종속시키는 국제체제를 향해 나아가는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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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노동의 힘 -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과 세계화, 옮긴이 후기

 

노동의 힘
비버리 실버 지음, 백승욱.안정옥.윤상우 옮김 / 그린비
 
 
이 책에 대해서 혹은 이 책을 읽고 하고 싶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전에 우선 이 책의 "역자후기"를 소개한다. 역자후기를 모두 그대로 타이핑해서 옮긴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저작권 침해일 수 있는데, 책 홍보도 되는 셈이니 그린비 출판사에서도 너그럽게 봐주지 않을까 싶다. ** 저작권 침해 지적이 들어오면 바로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다른 곳에 '펌'하지는 말아주세요.)
 

금융세계화는 노동운동을 최종적 위기에 빠뜨렸는가? 노동운동은 역사적으로 지양된 운동 또는 사멸중인 잔여적 종인가? '노동의 종말'이라는 선고는 어떠한가? 이런 의문들이 떠나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 한국사회에서 달아오른 '노동운동의 위기'라는 논쟁 역시 이런 위기가 20세기 말에 비로소 시작된 최초의 경험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장기 20세기에 노동(운동)의 위기는 계속 반복된 경험이었으며, 위기의 시간에 노동운동은 운동의 새 동학과 토대를 발견하며 재정립하였다는 점을 역사는 보여준다. 우리가 비비러 J.실버의 저작에 주목하는 첫번째 까닭은 바로 여기, 즉 이 책이 좀더 장기적인 역사적 동학을 분석할 필요성을 제기함으로서 우리가 서 있는 현재의 자리를 검토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다.
 
실버가 20세기 노동운동의 장기동학을 분석하며 노동소요에 주목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경험공간의 변동속에서 위기를 지양할 수 있는 토대와 지평을 발견하는 대중운동의 실천이성에 착목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점 때문에 실버의 작업은 그 동안 세계체계 분석의 대표적인 취약점인 대중운동의 동학에 대한 분석을 본격화하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이다. 세계체계 분석은 근대자본주의 세계체계라는 분석단위에 전지구적인 접근을 시도해왔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자본에 의해 체계구조가 전환되어온 측면에만 초점을 맞춰왔다는 비판에 늘 취약했다. 그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된 반체제 운동에 관한 논의도 1968년을 전후해 세계 사회운동의 지배적 담론에서 벌어진 전환에만 논의가 한정되어 왔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노동과 노동운동이 겪어왔던 역사적 존재형태의 전환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분석이 소홀했다고 할 수 있다. 실버의 작업은 바로 이런 공백을 메우고, 세계체계 분석과 대중운동의 장기동학 분석을 접합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이것이 우리가 실버의 저작에 주목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이런 시도는 노동운동을 노동운동의 경험공간에 가둬둔 채 논의하기보다는 논의의 지평을 노동운동 외부에서 노동운동을 약화시켜온 요인들로까지 확장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바로 그런 장점이 있기에 노동우동의 최종적 위기론에 대한 세계체계 분석의 정면도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실버는 노동--자본의 동학을 전지구적·역사적으로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운동의 최종적 위기론을 거부하는 동시에 노동운동의 진정성과 의지의 낙관만이 길은 아니라는 점도 인식하고 있다. 근대의 세계-역사적 과정은 노동계급과 노동자운동이 카타르시스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면서도 비극적·위기적(파국적) 상황을 겪어왔다는 것을 모두 보여준다. 실버가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현상과 새롭고 유례없는 현상을 구별하여 안내하는 곳은 바로 이런 두 상황 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의 주요 장점은 바로 노동운동의 장기동학을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현상과 유례없는 현상을 구별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는 바, 이런 인식지평은 그녀가 노동운동의 역사를 지역적 수준과 세계적 수준을 가로지르는 장기동학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비로서 열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과 노동계급이 지속적인 형성과 재형성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런 문제설정 덕택에 우리는 노동계급이 형성을, 통상적으로 제기되는 "누가 노동자인가?"라는 질문 속으로 던져버릴 위험성에서 비껴서 있게 된다. 노동계급의 역사적 존재형태라는 문제가 자본에 의한 노동시장의 분단, 인종·민족·젠더 등 비계급적 토대에 따른 노동계급의 배타적 자기동일성의 형성, 국가에 의한 시민권의 경계 분할 속에서 이뤄지는 지속적인 경계긋기의 과정으로 역사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건은 (재)형성을 추동하는 기제를 어떻게 분석하느냐가 된다. 실버가 자본이동, 제품주기, 세계정치의 측면에서 노동운동의 지역적·세계적 추세와 근대세계체계의 변화가 맞물리는 지점, 즉 시간의 동학과 공간의 동학이 맞물리는 접합을 분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계체계 수준에서 자본이동과 제품주기의 변화(역사적 자본주의와 공간·기술·제품·조직·금융적 재정립)는 특정 지역에서 노동운동의 위기를 낳는 요인이기도 했지만 노동운동의 중심지를 새로운 곳으로 옮기는 요인이기도 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런 계기들이 맞물리면서 노동계급이 새롭게 형성되고 노동운동이 중심지가 비서구로 옮아온 주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현재 중국으로 가는 전지구적 자본이동과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는 노동운동의 중심지가 중국으로 옮아갈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중심지 이동이 기존 지역적 노동운동의 최종적 위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실버의 논지 중 하나이다. 자본의 공간 재정립은 기존 노동운동의 중심축을 지역적으로 이동시킬 수는 있지만, 다른 형태의 새로운 재정립들 때문에 기존의 공간에 새로운 노동-자본의 갈등관계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방식은 단순히 갈등이 영원하리라는 선언이 아니고 노동-자본간 모순 관계의 역사적 전화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는 요청으로 읽어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버에 따르면 현재 노동운동이 겪고 있는 위기에 대한 해답이 출현할지(즉, 노동운동의 재정립이 이뤄질지)는 두고봐야 할 일로, 경험과 그에 적절한 새로운 대응만이 말해줄 수 있는 일로 남아있다.
 
여기서 출발해, 우리가 이 책에 주목하는 세 번째 이유는 실버가 과거를 보면서 앞을 내다볼 수 있는 개념의 창을 제시하여 이를 구체적인 조사분석과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운동의 장기동학이 두가지 시계추식 진동, 즉 맑스식 노동소요와 폴라니식 노동소요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인식과 발견이 그것이다. 폴라니식 노동소요는 생계의 권리를 약속한 기존의 사회협약(노동의 부분적 탈상품화)이 파괴되거나 약화되면서 일어나는 사회적 정당성의 위기에 대한 반격에서 기인한 노동소요를 가리킨다. 전지구적 수준의 경제변화와 자기조절적 시장의 확산은 노동자들의 시장교섭력을 약화시켜 노동의 (허구적) 재상품화를 강화함으로써 이런 정당성의 위기를 낳고 있다. 폴라니식 노동소요가 노동의 허구적 상품화와 사회의 자기방어 운동이라는 이중적 운동('시계추 운동')에 관계한다면, 새로운 차이--경향, '단계'(실버)--에 연루되는 것은 맑스식 노동소요라고 할 수 있다. 맑스식 노동소요는 수익성의 위기를 해결하고자하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재정립들이 (새로운 중심지와 산업의 등장을 포함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잇달아 새로운 노동계급을 형성하고 강화시킴에 따라 나타나는 노동-자본 갈등의 산물이다.
 
이처럼 유형화하게 되면, 결국 노동의 힘이 어디에 원천을 두고 있느냐는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 실버가 도입하는 것이 에릭 올린 라이트의 구조적 힘과 연합적 힘이라는 개념화이다. 구조적 힘은 노동자가 놓여있는 경제체계 안에의 위치 때문에 얻게되는 힘, 즉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의 공급이 부족한데 따른 시장교섭력(이것은 폴라니식 노동소요와 관련있다.)과 특정 노동자 집단이 핵심산업의 작업공정 내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에 따른 작업장 교섭력(이것은 맑스식 노동소요와 관련있다)을 가리킨다. 새로운 산업의 등장은 시장교섭력을 약화시킬 수 있지만, 작업장 교섭력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구조적 힘의 새로운 도약을 향한 새로운 경향은 아직 미약한 상태이다.
 
이럴 때 노동운동의 장기동학에서 요청됐던 힘의 원천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포함해) 기업과 산업차원을 초과하는 지역적·사회적·국제적 수준에서 다양한 형태의 집단 조직을 형성한 결과 얻게된 연합적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제 노동운동이 임금과 작업조건의 개선으로 환원되지 않는 노동자들의 운동, 즉 '노동운동'(labor movemebt)에 한정되지 않는 '노동자운동'(worker's movement)이라는 표상을 자기화해야한다고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연합적 힘은 결국 노동운동이 경계긋기 전략들, 즉 노동시장의 분단, 노동계급과 시민권의 분절에 도전하는 국내적·국제적 수준의 사회운동적 노동자운동으로 재정립되어야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노동운동이 시대적 성취를 이뤄낸 과거의 특정한 역사적 조직형태에 고착되어서는 안되며, 노동운동은 늘 그것을 둘러싼 더 큰 사회운동의 일부로서 존재해왔다는 것을 새삼 다시 확인해야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길은 보장되지 않은 길이다. 더욱이 현재 새롭고 유례없는 현상 중의 하나는 노동자운동의 동학과 세계정치의 동학이 맺고 있는 관계의 변화이다. 금융세계화가 기존 노동운동을 약화시키고 있지만,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중심지는 아직 뚜렷이 부상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현재 벌어지고 있는 세계적 규모의 전쟁, 즉 대규모 군사동원없는 하이테크 군사세계화는 20세기의 세계전쟁과 달리 노동자-병사의 동원을 극소화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동원과 노동자-시민권의 근대적 연계고리가 끊어지고 있다. 중심부 노동자들이 군사세계화를 시민권의 확장과 연계할 여지는 거의 없다. 용병활용은 상징적이며, 군사세계화는 재정을 악화시켜 외려 사회보장에 대해 역진성을 갖는다. 세계화 시대에 국제적인 교섭력이 취약한 비서구 세계의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서구 중심부 노동자들에게도 금융세계화와 군사세계화에 맞서는 새로운 국제체제의 수립이라는 의제가 아킬레스 건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실버의 작업은 오늘날 노동과 노동자운동의 위기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향을 정립하는 데 필요충분한가? 꼭 그렇지는 않다. 그렇지만 실버 역시 이 문제를 의식하고 있는데 이는 실버가 '누가 노동자인가?'라는 질문에 해독제를 제시하고자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노동의 중심성은 계속 전위되어왔기 때문이다. 노동의 역사는 노동의 개념과 노동의 조직방식이 일의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에 따라 노동자의 개념도 변해왔다. 가치와 사회관계(구체적 노동의 추상적 노동, 즉 자본으로의 전화로 표현되는 노동-자본 관계)의 생산이라는 맑스적 노동의 형상으로 포착할 수 없는 노동의 새로운 형상들이 문제가 된다.
 
오늘날 노동은 가치와 자본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삶 일반, 따라서 사회성의 (재)생산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돌봄노동을 포함한 가족 안팎의 정동노동/감정노동과 그 상품화, 폐미니즘의 기여). 우리가 노동의 일반화 또는 일반화된 노동으로 개념화해 보려고 하는 이런 경향은 노동의 최종적 위기론에 대한 또 다른 대답의 방향이다. 유럽의 대령실업과 사회적 위기는 노동의 소멸이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예증한다. 사회적 삶 일반, 즉 사회성의 (재)생산이 노동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은 노동이 잠재적으로 정치적인 행위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란 공동체·사회성을 어떻게 구성·조직할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의 전화는 여전히 공동체의 재구성에서 핵심을 차지한다.
 
문제는 노동중심성의 전위(표상, 의미, 조직, 실천 등)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와 함께 사회적 삶 일반을 (재)생산하는 일반화된 노동은 노동자들이 여전히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정치의 (잠재적) 주체라는 것을 함의하면서도 노동자운동의 방향이 달라져야함을 뜻한다. 노동의 현실과 개념 자체의 역사적 변화에 토대를 둔 '사회운동적' 노동자운동이 그에 대응하는 하나의 길이 될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실버(그리고 라이트)의 연합적 힘에 관한 논의에 동의하면서도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이를 보완해 발전해 나갈 필요성을 느낀다. 연합은 다양한 (잠재적) 정치주체들의 동일화를 뜻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노동자운동의 과제와 페미니즘의 과제는 노동의 일반화와 노동-가족의 상호작용 속에서 공감의 계기를 확장하고 있다. 두 운동은 기차의 레일처럼 어느 한쪽 없이 자신의 과제를 온전히 이루어낼 수 없다. 하지만 두 운동이 추구하는 보편성은 서로 감축 불가능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복수(複數)의 보편성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며, 이렇게 감축 불가능한 차이 때문에 소통이 더욱 필요하다. 이런 소통없이 기업이나 산업에 토대를 둔 노동 중심성을 전위해 지역적·국가적·국제적 수준에서 연합의 힘을 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운동적 노동자운동은 이런 인식에서 출발해야할 것인데, 이는 지난 노동운동의 추세를 연구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버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페르낭브로델센터의 연구집단이 실시한 공동작업에서 시작된 실버의 연구는 한편에서 노동(운동)의 역사를 다룬 이 책의 발간으로 진행됐고(이 책 『노동의 힘』은 출판된 이후 많은 연구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고, 20005년에는 미국 사회학회의 최우수 출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에서 세계자본주의의 헤게모니 교체를 분석하는 지오반니 아리기와 공동작업으로 진행됐다. 아리기와 함께 펴낸 『근대세계체계의 카오스와 거버넌스』(1999) 이후 실버는 아리기와 함께 20세기말 이후 세계체계의 변화를 19세기와 대조하는 여러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노동의 힘』은 실버와 아리기의 장기 20세기에 대한 다른 작업들과 함께 읽을 때 비로소 그 온전한 그림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번역작업에는 기획에서 출판까지 약1년의 기간이 걸렸다. 공동작업은 시간을 줄여주기도 하지만 번역용어의 통일에서 문체의 조정까지 예상치 못한 작업에 시간을 쏟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번역을 할 때 늘 그렇듯이 이 책을 번역하면서도 적절한 번역어를 찾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일례로 실버가 데이비드 하비에게서 빌려와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는 데 중요하게 사용한 'fix'라는 용어를 우리는 여러 가지 고민 끝에 '재정립'으로 번역했는데, 본래의 함의를 완전히 담아냈다고 할 수는 없다. 하비는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영어 'fix'에 담겨 있는 이중의 의미인 '수선'이라는 함의와 특정한 방식으로 '고정' 시킨다는 함의를 동시에 포함시키려 했는데, 한국어에는 그에 상응하는 단어를 찾기 힘들어, 이 두가지 함의를 어느정도 담을 수 있는 '재정립'으로 번역하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백승욱이 서문과 I~II장을, 윤상우가 III장과 부록을, 안정옥이 IV~V장을 번역한 뒤 번역자들이 번역을 서로 돌려보며 오역을 수정하고 용어와 문체의 통일을 이루도록 노력했다.
 
위기의 시대에 사회과학적 분석력의 중요성에 다시 힘을 실으려 노력하는 도서출판 그린비가 있기에 이 책의 출판이 가능했다. 편집과정에서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준 데 대해 편집부에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이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논쟁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2005년8월
옮긴이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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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대공황의 세계적 충격


대공황의 세계적 충격
디트마르 로터문트 지음, 양동휴, 박복영, 김영완 옮김 / 예지
 
 

저자는 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나 대공황이 확산되는 경로에 대한 설명에서 주로 케인즈의 논지를 따른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의 주기적 파동과 이윤율 하락을 대공황의 중심적인 원인으로 설명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접근과는 상이하다. 그러나 이 점은 공황의 양상을 설명하는 데는 어쩌면 더 유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고민했던 문제들과 직접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금본위제, 평가절상/절하, 재정정책 등에 대해서 그렇다.
 
저자는 대공황이 1929년의 월가의 주가폭락이라는 한번의 사건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 이미 1920년대부터 밀, 설탕, 커피 등 농산물 가격의 파동과 하락이 존재했고 이는 대공황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추세를 보여준다.
 
저자의 설명에서 주목되는 것은 대공황의 다양한 영향이다. 유럽에서도 독일에서 파시즘의 발호부터 스웨덴에서 사민주의의 안착까지 상이한 결과가 도출되었다. 영국은 자유주의 체제를 유지했지만 인도를 초과착취한 덕분이었다. 미국은 경제정책에서 갈팡질팡했으며 자신만이 아니라 세계 다수 국가들에서 대공황의 고통을 심화시켰다. (많은 칭송을 받는 로저벨트의 '뉴딜'도 수사학적 가치에 불과했으며 달러의 평가절하가 가장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도 대공황에 대한 잘못된 상식을 정정해준다.) 결국 미국의 정치적 고립주의(그러나 채무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는 독일에서 파시즘이 발호하는 한 원인이 된다.
 
유럽에서 위기는 중상주의적인 방식의 처방이 이루어졌지만 식민지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식민지는 유럽의 위기 극복을 위한 초과착취의 대상이 되어야했다. 식민지 지배자들은 고율의 관세를 유지하거나 관세수입이 줄어들 경우 인두세를 물리는 방식으로 손실을 보전하려고 했다. 또한 제국주의자들은 베기에령 콩고에서 자행되었던 강제경작과 같은 억압적 방식으로 착취를 강화했다. 이 결과는 온전히 농민의 부담이 급증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그나마 사용가능한 모든 현금과 장신구를 빼앗아가는 결과를 낳았다.
 
대륙별로 상이한 영향을 받았지만, 대룩 내에서도 상이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대공황은 수출대체공업화가 시작된 계기로 알려져있지만 그 정치적 결과는 상이하다. 아르헨티나는 1946년 페론이 집권하기 이전에 1930년대 '악명높은 10년'의 보수적 체제가 지배했다. 맥시코에서는 '제도혁명당'을 통해 '혁명'이 '제도화'되는 다른 결과가 진행되었다.
 
대공황이 과정을 겪으면서 각국에서 포퓰리즘 정치가 확산된다. 유럽에서는 파시즘이 발호한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코포라티즘으로 발전하며, 식민지 국가들에서는 민족해방운동으로 전개된다. 대공황에 강타당한 농민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식민지 지배 문제와 연결하여 인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1945년 이후의 세계를 크게 바꾸어놓게 된다. 한편으로는 전쟁을 불러오고 또 유럽의 약화와 함께 식민지 민족해방을 불러온다.
 
(포퓰리즘-인민주의-에 대해서는 최근에 출판된 <인민주의 비판 /정인경.박정미, 윤종희, 박상현> 참고. 개인적으로는 아직 책의 앞부분을 읽는 중. 다만, <인민주의 비판>은 축적체계와 헤게모니의 위기 시기에 기존의 정치이념이 쇠퇴하는 공백을 인민주의가 메운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서 <대공황의 세계적 충격>은 대공황의 경제적 위기가 선동적이며 임기응변에 능하고 희생양을 찾아내는 인민주의 정치를 활성화하는 조건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정치이념의 위기와 경제적 위기를 동시에 사고하고, 특히 그 위기가 대중 이데올로기에 작동하면서 특정한 정치적 결과를 낳는 구체적인 방식에 대해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특정한 계기들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인도가 중요한데, 인도에 대한 영국이 의존은 전쟁시기에 더욱 강화되었고 전후 인도의 발언력을 높이게 된다. 결국 영국은 인도의 독립을 막을 수 없었다. 이는 대영제국을 붕괴시키는 축이 된다. 또 이 결과 대영제국을 근간으로 한 유럽의 식민지배 체제도 모두 붕괴한다. 미국이의 전후 구성에서 직접지배 식민지를 폐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이러한 역사적 과정이 없이는 식민지 폐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전쟁-공황-전쟁으로 이어진 20세기 초반의 30여년은 19세기의 세계체제를 붕괴시켰다. 이 과정은 영국헤게모니의 붕괴와 미국 헤게모니의 등장, 법인기업 자본주의의 새로운 축적체계의 등장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대공황은 이런 과정에서 벌어진 극적이고 중심적인 사건의 하나이다. 그것은 영국 헤게모니의 경제적 붕괴가 최종적이고 폭력적으로 정치적 붕괴까지 이어지게한 계기이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다양한 정치적 귀결은,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의 시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적지않은 시사점을 준다.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경제위기와 정치위기, 전쟁 등의 어려운 상황을 예상할 수 있다. 이 책은 대공황기 좌파들의 운명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비극과 그 원인-한계를 알고 있다. 그리고 물론 식민지 국가들에서 민족해방 운동이 어떻게 사회주의와 결합했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대공황의 세계적 양상을 통해서 그 경제적 영향은 물론 정치적 영향, 이에 대한 좌파의 대응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부분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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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대한 또 다른 소개는 '말'지의 아래 기사를 참고. 아래 소개 덕분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달의 책 |『대공황의 세계적 충격』  
대공황 연구의 사각지대였던 식민지에 대한 역사적 조망 - 정지영
 
 
 
* 참고할 책
 

인민주의 비판 - 과천연구실세미나 27
정인경.박정미, 윤종희, 박상현 지음 / 공감
== 이 책을 통해서 대공황 등으로 대표되는 축적체계의 전환기의 정치적 상황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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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나쁜 과학 - 근본적으로 위험한 유전자조작 생명공학


나쁜 과학 - 근본적으로 위험한 유전자조작 생명공학
매완 호 지음, 이혜경 옮김 / 당대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 중에서 나중에 엉터리라는 것을 알고 분노한 일이 많이 있다. 그런 와중에도 굳건하게 믿음을 유지한 내용들도 있는데 물리, 화학, 생물 등 주로 자연과학과 관련된 학과목 내용이다. 자연과학이라는 것도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알튀세르와 쿤으로부터 배웠지만, 적어도 중고등학교 자연과학 과목에서 가르칠 정도의 기초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의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수십년 믿어온 '공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엉터리라는 것을 또 한번 발견할 게 될 때 황당함이란!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에 대해서, 그리고 이를 지탱하고 있는 생물학의 편견들에 대해서 말하는 이 책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물학과 생명공학에 대한 '상식'을 깬다. 이 '상식'들을 깨는 과정에서 유전자조작 생명공학이 약속한다고 하는 '멋진 신세계'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 우선 학교에서 배운 내용들을 다시 살펴보자.
 

다음 세대에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생물의 생식세포는 체세포 기관을 통해서 복사되는 만큼 체세포의 유전자 변화는 당연하게도 생식세포에 영향을 주고 다음 세대에 유전된다. 생명체는 외부 환경에 의해서 끊임없이 유전자 자체의 변화를 겪기 때문에, 이 말은 곧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말이다. 어찌보면 대단히 상식적인 내용인데도 '획득형질은 유전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이 진리라고 반복되는 것은 도그마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생명체 형태의 기본적인 내용은 모두 유전자 안에 있기 때문에 유전자만 적절하게 분석한다면 생명을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떨까? 그러나 유전자는 다양한 외부환경에 반응하면서 전혀 다르게 작동하기 때문에 동일한 유전자가 동일한 결과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혹은 다른 유전자와 상호작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유전자의 영향으로 인해 특성은 발현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도대체 우리가 알고 있는 유전자는 무엇인가?
 
생물학에 대한 편견들은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임은 물론 역으로 그것에 의해 강화된다.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에 대해서 이렇게 흥미로운 예도 없을 것이다. '우리 유전자 안에 있다'는 주장은 과학이자 이데올로기로서 나타나고,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을 가능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전제가 된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유전자 결정론', '사회 생물학'과 같은 사이비 과학들이 최첨단 유전자 공학 생명공학의 지지를 받으면서 대중에게 수용된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유전자 조작과 인간복제를 상업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지원할 수 있게 한다. 이데올로기와 과학과 자본의 고려가 동시에 작동하고 서로를 강화한다. 저명한 분자유전학자들은 이미 생명공학기업의 투자를 받거나 이사로 활동하는 등 긴밀한 이해를 공유하고 있는데, 이들은 또한 앞장서서 유전자 결정론을 선전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이데올로기는 기괴한 것이다. 농업생산을 늘리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유전자 조작농산물은 유전자 전이를 통해서 잡초의 제초제 내성을 길러주고 결국 농약으로 인해서 생산을 파괴한다. 사소한 기후 변화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농사를 망치게 된다. 세균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항생제는 박테리아에 대한 유전자 조작 과정에서 박테리아의 항생제 내성을 확산하여 '슈퍼 박테리아'를 만들게 된다. 유전자 조작 식품에 포함된 조직된 DNA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인체에 흡수될 수 있다. 이런 DNA에는 불임유전자와 같은 것도 있다. 유전자 전이를 쉽게 하기 위한 프로모터는 수평적 유전자 전이를 가능하는 한편, 이종 간 질병 확산이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최근의 조류독감 파동은 이런 직접적인 결과일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파괴적인데, 이들이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는 우생학을 합리화한다. 유전자 안에 있다면, 열등한 유전자를 찾아내어 박멸해야할 것이다. 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비만 유전자'나 '범죄 유전자'를 찾아서 유전자 치료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을 박멸(!)하기 위한 우생학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유전자는 '환경 속에서' 발현하기 때문에 동일한 유전자가 동일한 결과를 산출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방식은 정치적으로도 해악적일 뿐 아니라 실제로 유전병을 방지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재생산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박탈한다. 모든 것이 이미 유전자 안에 있다면 여성은 단지 유전자에 기입된 것을 발현하기 위한 인큐베이터에 불과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편견은 이미 제국주의 시대에 확립된 유전학이 가지는 관념, 모든 것을 지도, 통솔하는 유전자와 이에 따르는 재생산 세포라는 식의 구분, 자본-노동자의 구도를 본 딴 유전자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이해에서 시작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 산업은 제3세계에 대한 유전자 착취도 발명해냈다. 전통사회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작물들은 그것을 '발견'한 초국적 기업의 특허품이 된다. 그리고 제3세계는 유전자 조작 농산물의 시험장이 되면서 전통농업의 재생산 기반은 파괴되고 초국적 기업에 완전히 종속된다. 유전자 다양성의 파괴, 농약의존으로 인해 곧 농민들의 몰락을 부추길 뿐이다.
 
최근의 쟁점이 되는 인간복제 문제에 대해서도 이 책을 통해서 생각할 지점들을 찾을 수 있다. 인간복제 시도는 성공할 수 없는데, 이미 고유한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복제(동물복제)는 체세포의 핵을 난자에 이식하여 이를 착상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미 체세포의 핵에 있는 유전자는 성체의 성장과정에서 배아상태의 것과 같지 않고 변형되어 있다. 따라서 전혀 '같은' 유전자를 확보할 수 없다. 또한 체세포 유전자는 발생초기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공가능성이 극히 낮다. 수백개의 난자를 확보하여 진행한다고 해도, 출산에 성공하는 확률도 낮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 낮다. 복제양 '둘리'의 경우 300여개의 수정란을 조직함을 통해서 성공했다. 더 성장하더라도 이미 '늙어서 태어난' 것처럼 일찍 노화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복제의 문제는 인간 정신의 동일성이 복제된다는 오해와 같은 것 때문에 위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이 가지는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문제의 모든 결과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젝의 언급이 사고실험으로서 모순을 사고하는 것일 뿐이라고 해도 사실에 대한 무지와 정치적 쟁점에 대한 무시로 인해 해악적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나쁜 클론을 두려워 하는가?Who's afraid of the Big Bad Clone? http://blog.jinbo.net/taiji0920/?pid=623)
 
저자는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의 이런 수많은 쟁점들이 상호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상세하게 밝혀주고 있다. 무엇보다 장점은, 따로 따로 사고하기 쉬운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의 여러 쟁점, 문제들이 자본의 이해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밝혀준다는 점이다. 인간복제로부터 제3세계 유전자 착취, 우생학, 초국적 제약회사의 횡포, 곡물 메이저들의 착취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최근 뜸하던 황우석 교수는 개 한 마리를 복제한 이벤트로 다시 언론을 탓다. 이 책을 통해서 사실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다면 이제 황우석 교수의 인간배아 복제 시도가 가지는 위험과 성공 불가능성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개 복제가 결국 오로지 여론조작을 위한 부질없는 시도이며, 거대한 실망을 낳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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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학교와 계급재생산


학교와 계급재생산 - 반학교문화, 일상, 저항
폴 윌리스 지음, 김찬호 외 옮김 / 이매진
 

영국 고등학교에서 장래에 육체노동자가 될 '싸나이'들에 대한 문화기술지이자 분석인 이 책은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관찰이다. 다소 오래되기도 했고 영국의 상황이라는 점에서 시공간적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이데올로기가 주체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변용되고 작동하는지, 이 과정에서 어떠한 모순이 작동하는 지 보여준다.
 
'싸나이'들은 학교의 반항아들, '비순응적인' 아이들이다. 우리나라의 학교에는 이런 식의 '싸나이'들 보다는 '날라리' '양아치'같은 반항아들이 있는데, '싸나이'들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반항적인 아이들이 다른 성격을 가진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육체)노동자에 대한 관념, 계급 재생산의 방식이 많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싸나이'들의 반항성은 단지 청소년들의 일반적인 반항적 기질과 연관시킬 수만은 없다. 그건 어느 시대 청소년들에게나 있겠지만, 왜 '싸나이'들과 같은 특수한 양식으로 발현되는가가 문제이다. 이들이 가지는 반항성의 근원을 저자는 (보다 광범위한 계급 대중 속에 위치하는) 비공식집단이 가지는 계급적 지배구조에 대한 간파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자격증을 강제하지만 그것은 사실은 노동자의 통제와 분할지배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나, 학교에서의 성적이라는 것도 육체노동자가 되는 속에서는 의미가 없다거나, 학교가 가하는 통제가 가지는 본질과 같은 것을 (비록 의식적인 형태는 아니라고 해도) '간파'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간파는 자신들(노동자계급)에 대한 고유한 자존을 확립하는 과정과 동행하는데, 그것은 주로 육체노동자의 남성성을 긍정하고 숭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고유한 힘과 반항성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간파는 항상 '제약'을 동반한다. 자신들을 긍정하는 이데올로기적 근거로서 남성성은 남성 노동자들의 가부장성과 마초주의, 인종차별주의 등 퇴행적인 이데올로기로 쉽게 전화된다. (이미 그것과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육체노동에 대한 긍정은 역설적으로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단순육체노동에 불만없이 종사할 수 있는 대중을 생산한다.
 
책의 뒷부분에 이러한 결론도 흥미롭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앞 부분의 문화기술지 부분이다. 저자는 '싸나이'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서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검출하고 있는다. 예를 들어 노동현장에서 테일러주의적인 통제가 발전하면서 자본은 숙련 노동자에 고유한 기술을 포섭해가는 데, 노동자들은 비공식적 집단을 중심으로 작업 태만, 거짓말, 관리자 따돌리기 등으로 다양하게 대응한다. 이러한 방식은 학교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데 테일러주의적 통제의 전단계로서 시간표를 통해 학생들의 육체를 규율하려는 시도를 '싸나이'들의 비공식 집단은 끊임없이 교란시킨다.
 
저자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해 보여준다. 지배이데올로기는 순수하게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며 오히려 피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이 책에서 보여주는 '싸나이'들, 그리고 그들이 이후 속하게될 노동자들의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저자가 질문하는 것처럼, 피지배계급 자신의 이데올로기가 지배를 가능하게 해주는 역설이 존재한다.
 
그러나 저자는 급진적인 유래(간파)에서 보수적인 결과(제약)이 왔다고 해고 적어도 저항의 역량은 존재한다는 점, 급진화에 대한 논리적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데 주목한다.
 
사회적 행위자들은 이데올로기의 수동적인 담지자가 아니다. 그들은 그것을 능동적으로 전유하여 투쟁, 주장, 그리고 기존의 구조에 대한 부분적인 간파를 통해서 그 구조를 재생산한다. (349쪽)
 
그리고 노동자들이 그 속에서 발전시키는 문화는 도전적이고 반체제적인 성격을 유지하고 자본주의에 잠재적인 위협으로 존재한다.
 

1.
한편, 저자는 이러한 간파, 제약 등이 일어나는 공간, '싸나이'들 주체가 형성되는 공간이 '문화적 형태'의 독특한 차원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게 이것은 물질적 구조는 물론이려니와 이데올로기와도 구별되는 것으로 서술된다. 그러나 문화적인 것의 독특한 차원이 존재하는가는 논쟁적인 주제일 것이다. 오히려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공간이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인데, 그 속에서 '싸나이'들이 주체화되는 양식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별도의 '문화적 형태'라는 차원을 상정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마치 외부적으로 주어지는 '의식'으로 바라보는 편향에 근거한 것이 아닌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2.
육체노동자들 사이에 형성되는 남성우월주의는 이 책에서 분석하는 영국의 사례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가혹한 육체노동의 조건에서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 형성되며, 이는 이들 노동자들이 자본에 맞서 단결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게 작동한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상징의 정치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생산적이고 남성적인 자신들과, 그 반대의 상징을 가진 지본가의 상징을 대비시킨다.)  ※ 비공식 하위집단의 문화(노동현장문화)가 노동자들의 단결에 미치는 영향은 신병현 교수를 중심으로 '시월'등의 몇 개의 연구에서 분석된 바가 있다. [노동자문화론 신병현 지음 / 현장에서미래를]

그렇다면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동반되는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성 등도 필연적인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물론 현장의 남성적 상징도 마찬가지이다. 80년대 말 이후 대공장 남성 육체노동자를 주력대오로 해서 형성된 남한의 '민주노조운동'에서 이 것은 매우 심각한 쟁점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 활용될 수 있는가? 혹은 정치적으로 부당하기 때문에 활용되어서는 안 되는 이데올로기의 요소인가?
아마도 단결의 초기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 끊임없이 상징을 전화시키고, 남성 노동자들의 고유한 자존심이 타자들에 대한 경멸 혹은 지배의식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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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진술 몇 가지.
 
이 책은 89년에 처음 번역되어 많이 읽혔다. 당시에 이미 문예패나 몇몇 학회의 세미나 커리큘럼에 포함되어 학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의 경우에는 이 책을 이 이전에는 읽어본적이 없는데, 아마 내가 속한 학회의 관심사항과 달랐기 때문에 커리큘럼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아마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주제(교육)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무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교육문제에 대한 측면도 중요하기는 하겠지만,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는 지, 주체가 어떻게 재생산되는지 보여주는 데 있어서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에서 '탈학교론'의 전제를 발견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오히려 이데올로기적 재생산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그러한 결론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마도 이 책의 구도에 따르면, 다소 어정쩡하겠지만) '범생이'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입장에서 '싸나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 가지 묘한 감정에 빠지게 된다. '싸나이'들은 육체노동이나 손노동에 무능하고 수동적이며 순응적인 '범생이'들을 비난하는데, 이는 자신들이 반대로 육체적인 기능에 있어서 유능하고 독립적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이것은 육체노동자가 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준비이기도 하고 학교교육에 대한 적극적인 반항이기도 하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의 경험을 생각해보면, 그러한 측면에서 나를 포함한 범생이들은 참 비겁했다고 할 수 있고, 실제로 무능했다고 볼 수 있다.(이들이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지배계급의 일환이 된다는 것은 영국과 비슷한 구도이지만 참으로 짜증나는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지는 육체노동자에 대해서 가지는 콤플렉스의 기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그것은 내가 다른 운동공간이 아니라 굳이 노동조합운동을 택한 이유와도 관련되어 있다.) 물질적 세계에서 마치 만능인 것처럼 보이는 독립적이고 강인한 육체노동자 상에 대한 존경과 경외 혹은 두려움같은 것들. 그것이 운동에 있어서 노동현장에 대한 보다 의식적인 강조와 연결되기도 할 것인데, 한편으로 그러한 '현장성'의 이중성과 모순에 대해서 사고한다는 것은 나에게 필수적인 과제일뿐더러 매우 위험한 시도이기도 하다.(현장성의 이중성과 모순이란, 이 책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노동자 대중이 가지는 이데올로기의 모순적 성격에 기인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모순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대중이 가지는 이데올로기와 어떤 식으로든 결합하고 상호전화하지 않고서는 노동자 대중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에서 제기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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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반기억의 생성, 평의회 코뮤니즘/ 노동자의 책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노동자의 책'이라는 사이트에서 평의회 관련된 자료들을 번역해서 올려놓았습니다.
 
'노동자의 책'은 노동자들에게 지식을 돌려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사이트인데, 사실 사이트만으로는 부족하고 이러한 시도 자체가 인터넷을 넘어선 하나의 운동이 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사이트 후원회원도 모집하니까 여유있으신 분들은 후원을 하시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겁니다. 하여튼,

http://www.laborsbook.org/book.php?uid=76&no=1185

회원 가입해야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하지만 무료니까 가입해서 보세요. 근데 번역은 아직 상당히.. 거시기 하군요. 암튼, 그냥 대략적인 개요가 뭔가는 살펴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 중에서 판네쿠크의 '노동조합주의'라는 글에서 묘사적인 일부분을 아래에 따서 붙여봅니다. 아주 놀라울 정도로 최근의 노조운동의 분위기와 일치하는 묘사를 볼 수 있지요. 묘사가 같다고 분석이나 대안까지 같을 수는 없겠지만,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최근에 '평의회'가 나름대로 '유행'이라 할 때, 남한에서 노조운동의 전반적인 관료화와 제도화라는 정세와, 사업장단위 전투적 노조주의의 경험이라는 것이 함께 작동하는 것같습니다. 따라서 평의회주의가 '유행'할 수 있는 정세에 대해서도 비판이 필요하지요.  최근의 노조 관료화에 대한 비판이 평의회주의에서 일면적으로 강조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조주의에 대한 비판도 있는데,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라고 할 때도 그것이 '노조주의'이기 때문에 가지는 고유한 한계.. 이런 것을 사고할 필요가 있다고 할 때 고민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전체 글은 다운 받아보시구요.. 아래는 읽어보세요.

글 중간에 있는 "...그래서 악마적인 것과 깊고 푸른 심해 사이에서 노동조합이 만약 현명하다면, 자본가 계급은 거짓 투쟁(sham fighting)이 노조 지도자들이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라는 구절은 정말 짜릿하군요.
 

자본주의와 대산업의 성장에 따라 조합도 같이 성장한다. 조합들은 모든 도시와 모든 공장에서 수천명의 조합원을 확보하고, 나라 전체로 확장되며, 거대한 기업(corporations)이 된다. 업무를 수행하고, 재정을 관리하기 위해, 지역과 중앙에서 관료들(officials): 위원장, 사무총장, 재정담당이 임명된다. 그들은 자본가들과 협상하고, 이런 일들을 통해 특별한 기술을 갖추는 지도자들이 된다. 조합의 위원장은 자본가들만큼이나 큰 힘을 갖게 되고, 자신과 그리고 동등하게, 자신의 조합원들의 이익을 논의한다. 관료들은 노동조합이라는 직업에서 전문가가 되며, 공장일에 전적으로 몰두해 있는 조합원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판단하거나 그들을 지시할 수가 없다.

조합으로서의 거대한 기업은 단순한 개별 노동자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은, 그래서 자신의 정책, 특성, 정신, 전통, 그리고 기능을 갖는 조직체가 된다. 그것은 노동 계급의 이익과 괴리된 그 자신의 이익을 갖는 신체가 되며, 자기 실존을 위해 살고, 싸우려는 의지를 갖는다. 만약 노동 조합이 노동자들을 위해 더 이상 필요없다는 것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해도, 그것들은 순순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자금, 조합원, 그리고 관료들, 이 모든 것들은 즉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조직체의 구성요소로서 그들의 실체를 계속 유지할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노조 관료들, 지도자들은 특별한 노동조합 이익의 담지자들이다. 시초에 공장의 노동자였던 그들은 조직의 지도자로서 오랜 실무를 통해 새로운 사회적 특성(character)을 획득한다. 일단 특별한 그룹을 형성하기에 충분히 커지기만 한다면, 각각의 사회적 그룹에서, 그 작업의 본성은 그것의 사회적 특성, 사고와 행위의 양식을 주조하고, 결정한다. 관료들의 기능은 노동자들의 기능과 철저히 다르다. 그들은 공장에서 일하지 않고, 자본가들에 의해 착취당하지 않으며, 그들의 존재는 계속된 실업의 위협을 당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무실에 앉아서, 꽤 안정된 지위를 누린다. 그들은 조합의 일들을 처리하며, 노동자들과의 회의를 준비하며, 기업가들과 협상을 해야한다. 물론, 그들은 노동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익을 방어하고, 자본가들에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조직에서 임명되어, 그 조직 구성원들을 대표하여, 그의 全(전)역량을 그들의 이익을 방어하는 변호사의 위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한가지 차이점은 있다. 많은 노조 지도자들은 노동자 계급 출신이기 때문에, 그들은 임노동과 착취가 의미하는 것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 그들은 노동 계급의 일원으로서 느끼고, 그들 내면의 프롤레타리아트 정신이 강한 전통으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그들 삶의 새로운 현실은 계속해서 이 전통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경제적으로 그들은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그들은 (자본가들의) 이익에 대항한 (노동자들의) 이익을 챙기고, 임금과 노동 시간에 관해 협상하며 마치 반대의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자본가들과의 회의석상에 참여한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위치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의 위치도 이해하는 것을 배우고, 그들은 “산업의 필요성”에 관한 시각을 갖게 되며, 그것들을 중재하는 것을 추구한다. 물론 개인적인 예외는 있으나, 대개 그들은 노동자들의 기초적 계급의식을 가지지 못하며, 그들의 적절한 이익을 위해 투쟁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노동자들과의 갈등에 빠지게 된다.
...

노조가 강력한 조직체로 존재하는 산업에서, 그들의 지위는 이같은 자본의 집중에 의해 약화된다. 그들이 파업을 위해 모은 대규모의 기금은 그들의 적이 가진 금전적 파워와 비교했을 때 무의미했다. 두 번의 공장폐쇄는 그들을 완전히 고갈시킬 것이다. 자본주의 기업가들이 임금 삭감과 노동 시간의 강화를 통해 아주 심하게 노동자들을 쥐어짜더라도, 노조는 투쟁을 할 수가 없다. 계약이 갱신되어야 할 때, 노조는 자신들이 약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노조는 자본가들이 제안하는 나쁜 조건들을 수용해야 하고, 협상의 가능한 기술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이제 현장구성원과 관련된 근심(trouble)이 시작된다.
조합원들은 투쟁을 원한다. 즉, 그들은 싸우기 전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싸워서 잃을 것이 많지 않다. 하지만, 노조 지도자들은 노조의 재정력과 아마도 노조의 존재 자체 등 잃을 것이 많다. 그들은 투쟁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그들은 희망을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조합원들에게 조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낫다고 설득해야 한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자본가들의 조건을 노동자에게 강요하는 자본가들의 대변인처럼 행위 해야만 한다. 노동자들이 조합의 결정에 반대하며 투쟁을 주장할 때는 더 심해진다. 그러면 노조의 힘은 노동자들을 진압하기 위한 무기처럼 사용된다.

그래서 노조 지도자들은 산업 평화를 보장하는 자본주의적 과업의 노예가 된다 - 비록 그들은 최대한으로 노동자들에게 기여하려 하지만, 이제는 노동자들의 비용으로 그 일을 한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가 없고,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자본주의의 지평선 내에 존재하며, 투쟁은 쓸모없다는 생각이 옳다고 믿는다.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노동조합이 그 권력의 한계에 도달하였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더 나은 노동조건을 위해 자본가 계급과의 투쟁을 벌일 때, 자본가 계급은 그들을 증오하나, 그들의 힘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는다. 만약 노동조합이 그들의 투쟁에서 계급 전체의 힘을 동원해서 투쟁한다면, 자본가 계급은 그들의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그들을 탄압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행동이 반역으로 탄압받는 장면, 그들의 사무실이 구사대에 의해 파괴되는 장면, 그들의 지도자들이 투옥되거나 벌금을 무는 장면, 그들의 투쟁기금이 몰수되는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만약 노동조합이 그들의 조합원들을 투쟁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자본가 계급은 그들을 보존되고, 보호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집단으로 여길 것이고, 그 지도자들을 대우받을 만한(deserving) 시민으로 여길 것이다.
그래서 악마적인 것과 깊고 푸른 심해 사이에서 노동조합이 만약 현명하다면, 자본가 계급은 거짓 투쟁(sham fighting)이 노조 지도자들이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
노동조합주의는 공산주의를 혐오한다. 공산주의는 그것의 존재의 근간을 제거해버린다. 공산주의에서, 즉 자본가들이 부재한 상황에서, 노조와 노조 지도자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노동자 집단이 사회주의자들인, 강력한 사회주의 운동이 존재하는 나라들에서 노조 지도자들은 기원에서뿐만 아니라, 환경에 의해서 노조 지도자들 역시 사회주의자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우파 사회주의자들이고, 그들의 사회주의는 욕심 많은 자본가들을 대신해 정직한 노조 지도자들이 산업 생산을 관리하는 복지의 이념으로 제한된다.

노동조합주의는 혁명을 싫어한다. 혁명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모든 일상적 관계를 뒤집어엎는다. 그 격렬한 충돌 속에서, 모든 세심한 관세 규정들은 쓸려 사라지고; 그 거대한 힘의 투쟁 중에 온건한 협상 기술을 가진 노조 지도자들은 그 가치를 잃게 된다. 전력을 다해 노동조합주의는 혁명과 공산주의의 사상에 반대한다.

이런 반대는 의미가 없지 않다. 노동조합주의는 그 자체 힘이 있다. 노조는 자신의 처분권 내에 상당한 자금을 확보하고 있고, 그것은 힘의 물질적 요소를 이룬다. 노조는 또한 정신적 힘을 가지는데, 그것은 힘의 정신적 요소인 정기적인 신문을 통한 지지와 선전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권력은 지도자들의 손에 쥐어진다. 그들은 노동조합의 특수 이익이 노동 계급의 혁명적 이익과 갈등을 일으킬 때는 언제든지 그것을 사용한다. 비록 노동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구성되지만, 노동조합주의는, 정부가 민중들을 지배하는 권력이 되듯, 노동자들을 지배하는 권력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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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책 사이트 : http://www.laborsbook.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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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 / 교양인
 
 
 
최근에 만난 인터넷 포탈 사이트에서 미디어 관련된 업무를 하는 한 선배에게서 흥미롭지만 섬뜩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젊은 세대에 극우적 정서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단지 이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정치세력이 없을 뿐이라는 것이다. 한나라당과 같은 보수주의자들의 무능은 이들을 동원하지 못하고, 따라서 파편적이고 분산되어 있지만 이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유능한' 우파세력이 등장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 파시즘을 그 지도자들이나 이론가들의 담론이 아니라, 실재 역사 속에서 전개된 사실을 중심으로 고찰한다는 점이다. 파시즘은 '권력장악' 그 자체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일관된 이론이나 이데올로기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심적으로는 민족의 갱생, 혁신, 정화와 같은 목표가 선언되었지만, 세부적으로는 대중을 동원하기 위해서 편의적인 공약이 남발되었다. 대중을 동원하기 위해 사용하는 어법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어법이 달랐다.
 
역사적 과정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저자는 파시즘을 이렇게 요약한다.
 
파시즘은 '공동체의 쇠퇴와 굴욕, 희생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과 이를 상쇄하는 일체감, 에너지, 순수성의 숭배를 두드러진 특징으로 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양태이자 그 안에서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결연한 민족주의 과격파 정당이 전통적 엘리트층과 불편하지만 효과적인 협력관계를 맺고 민주주의적 자유를 포기하며 윤리적, 법적인 제약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내부정화와 외부적 팽창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라고 정의된다.
 
파시스트들의 주장에 대한 검토보다 역사적 과정에 대한 검토를 우선한 덕분에 우리는 파시즘이 도래한/할 수 있는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저자는 그것을 (1) 파시즘의 탄생 (2) 정치제도 안에 뿌리내리기 (3) 권력장악 (4) 권력행사 (5) 파시즘 정권이 급진화나 정상화 중 한가지를 선택하게 되는 장기지속 기간으로 시기구분한다. 저자는 특히 파시즘이 하나의 대중운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열정적으로 대중을 동원하려고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급진화'가 필연적이었으며 브레이크없는 폭주기관차가 될 운명이었다고 암시한다.
 
저자의 단계구분을 통해 우리는 실용적인 접근을 할 수 있는데(다소 실용주의가 과한 것이 문제다. 미국적 특성인가?) 어떤 정체에서 파시즘의 위협이 어느 정도인지 판별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이 2위의 대선득표를 한 프랑스의 경우 (2)의 과정에 있다고 볼수 있다. 이 경우 파시스트들은 제도정치 안에 안착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급진적인 담론을 완화한다.
 
앞서 우리나라의 최근 분위기를 언급했지만, 이들은 어떤 조건에서는 하나의 운동으로 효과적으로 조직될 수 있다는 있다는 점에서 우려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기존의 보수세력이 연합해야하고 제도정치에 안착해야한다. 물론 그러한 우려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 다음은 정세의 문제가 될 것이다.
 
각 과정을 통해서 성공한 파시스트들만이 권력을 잡았다. 유럽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그렇다. 다른 나라의 경우 운동으로서는 존재했지만 유연한 전술을 구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제도정치에 진입하지 못했거나 제도정치에 진입했다라도 이런저런 정세적 요인 때문에 세력을 확대하지 못했다.
 
이를 통해 저자는 파시즘의 득세와 집권은 객관적 조건만이 아니라 정세적인 요인과 함께 해당 인민들의 판단이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서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몇가지 논쟁점이 발생한다. 정치에서 구조와 주체의 문제. 저자는 이 문제를 계속 양자택일의 문제로 인식한다. (경향적으로 주체의 문제로 나간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구조적 인과성 개념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중이 특정한 판단을 하게 되는 정세는 단지 주체의 의지이거나 우연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저자는 파시즘을 피하기 위한 특정한 정책의 실현가능성을 믿는 것같은데, 그런 점에서도 미국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발리바르의 "구조적 인과성, 과잉결정 그리고 적대"를 인용해보자.
우선 과잉결정된 그리고 과소결정된 인과성 개념은 즉각 '구조'와 '정세'의 전통적인 대당을 제거한다. ; 더 낫게 말한다면 그것은 이 두 용어가 상호적임을 제안한다. 그것은 정세를 구조의 한 짧은 국면으로, 또는 구조의 연속적인 단계들간의 이행으로 더 이상 보지 않는데, 구조의 실재성은 정세들의 예측불가능한 연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정세는 단지 구조의 특정한 전위로 결정된다.
 
저자는 물질적 조건에 우선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것을 계속 유보한다. 그러나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득세할 수 있었던 정세적인 요인은 물질적인 것, 특히 경제적인 요인과 계급투젱의 지형에 있었다. 문제는 경제적인 것이 어떻게 정치를 과잉결정하는가, 그것이 특정한 정세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저자의 유보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책의 내용 자체를 그것을 충실히 서술하고 있다.
 
또 한편, 저자는 파시즘을 매우 협소한 의미로 사용하며, 프랑코의 스페인이나 2차 대전 이전의 일본까지도 파시즘으로 보기에는 힘들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것들이 열정적인 대중동원형 운동에서 기원하고 그것을 계속 수반했다고 보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이런 점에서 제3세계의 개발형 독재들을 파시즘의 범주에서 제외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발적 대중운동의 형태를 띄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대중을 파시즘과 같은 논리에 따라서 동원하고 지배할 수 있었다면 파시즘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일본의 경우, 지배계급이 위로부터 대중을 동원하기는 했지만, 민족적 생활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목표, 외부에 대한 공포를 조직하고 그것을 탄압하는 등 파시즘의 방식으로 대중을 동원했다.(일본을 제외한 것은 지나치게 서구중심적인 시각으로 보인다.) 남한의 군사독재의 경우에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고유한 정치적 동원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전형적'이지는 않을지라도 파시즘의 일환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파시즘이라는 것이 여러 정세적인 조건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저자의 지적처럼 다른 정세에서는 심지어 다른 이름으로, 다른 의식을 가지고 등장할 수 있다. 최근의 유럽에서 처럼 유태인이 아니라 이주노동자를 공격하면서 등장할 수 있다. 밀로세비치처럼 반대당을 노골적으로 금지하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파시즘의 위협은 현재적이다.
 
특히, 세계화와 경제위기 과정에서 특정한 국가가 더 이상 계급투쟁을 관리하지 못하고 붕괴했을 때가 문제가 된다. (마치 1919년 이후의 이탈리아처럼) 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인해 좌파적인 대안이 부재할 경우 파시즘은 손쉬운 대안이 된다. 세르비아의 밀로세비치는 가까운 사례이다. 이런 유형의 새로운 '파시스트'들은 세계화의 파괴적인 효과로서 절멸적인 인종갈등 전쟁을 확대하고 이 속에서 또한 확대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파시즘은 '대중들에 대한/대중의 공포'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저자는 파시즘의 대중을 공포를 통해 지배했다고 말한다. 외부의 적에 대한 공포, 국가의 무능이라는 공포(파시스트들은 거리의 노골적인 폭력을 통해 이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계급투쟁의 공포, 내부의 적에 대한 공포, 파시스트 자신들에 대한 공포까지. 더구나 보수주의자들이 파시스트들과 연합하는 과정에서는 지배자들의 '대중에 대한 공포'가 작동했다는 점, 대중은 자신들의 다른 모습은 파시스트 대중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는 점 등을 유념해보아야한다. 이러한 대중들에 대한/대중의 공포에 대해서는 역시 발리바르의 논의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 반오웰 : 대중들의 공포>, 스피노자와 정치 /발리바르, 진태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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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전에 파시즘과 관련된 책의 독서일기를 쓴 적이 있다.
 
 
'우리안의 파시즘' 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파시즘의 역사적인 형태와 정세에 주목해야한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책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점에서 유용하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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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경제저격수의 고백


경제 저격수의 고백
존 퍼킨스 지음, 김현정 옮김 / 황금가지
 
표지에 '세계경제의 뒷무대에서 미국이 벌여온 은밀한 전쟁의 기록'라고 쓰여있다.
 
미국의 정부와 정보기관이 제3세계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면서 이들 나라를 외채구렁텅이로 빠뜨리기 위한 매우 의도적인 작전을 전개했다는 것이 중심내용이다. 저자가 직접 한 일이라고 하는데, 현재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봐서는 다소간의 과장은 몰라도 믿을만한 이야기같다.

대부자본이 남아돌던 발전주의의 시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외채 대부를 제3세계에 유리한 방식이 아니라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잡행했다는 점에서 놀랍다. 전형적인 방식은 이런 것이다. 외채 대부를 제안하고, 이를 '경제발전을 위한' 에너지, 도로 등에 투자하도록 한다. 핵심은 이때 예상되는 에너지, 도로 등의 필요치를 최대한 높게 계산해서 과잉대부를 받도록 하고, 갚을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든다. 이를 약점으로 잡고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등등.
 
이런 종류의 개입을 정보기관이 구체적으로 개입하면서 창안했다는 점(다소 불확실하게 서술되어 있기는 하지만) 놀라운 일이다.
 
이런 방식은 현재도 큰 골격에서는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의 컨설팅 회사가 더욱 번창하고 있으며, 외채 대부가 IMF, IBRD 등을 매개로 더욱 정치화되었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를까. 최근 공공연맹과 공무원노조 등이 주빌리사우스와 함께 진행한 "물, 에너지 사유화 국제워크샵"(물·에너지 사유화 반대 아시아 노동자·사회운동 선언)를 통해서 들어본 제3세계의 사례는 아주 똑같은 내용이었다. 에너지, 물에 대한 투자를 이를 갚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외채를 통해서 하도록 하고, 이후에 사유화하도록 압력을 가한다는 것이다.
 
아래 기사를 더 참고할 것.
이를 통해 외채 문제와 금융세계화, 기업인수, 공공성 파괴, 인권침해 등등과 연결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런 측면 외에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구절은 음모이론의 기원에 대한 저자의 언급이다. 이데올로기론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지적이다.
 
음모론은,
 
1. 현상에 원인에 대한 대중의 무지가 상상을 만들어낸다는점

2. 혹은 진실을 알려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 물질적 이해관계 때문에, 그것을 알 수 없는 이들(프리메이슨, 유태인 집단)의 음모로 몰아간다는 점

경제저격수의 고백 356쪽
"제국은 기업정치를 지탱하는 대형은행, 기업, 정부가 만든 것이지 음모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미국인들이 기업정치를 만들어냈으며 기업정치가 바로 미국인 자신들이다. 그래서 기업정치에 맞서 싸우지 못한다. 그들은 대개 이런 은행, 기업, 정부에서 일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이들이 제공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누리며 살고 있기 때문에 기업정치를 직시하기보다 어둠속에 숨어 있는 음모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고 한다. 그동안 그들을 지탱해온 기업정치를 배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두번째가 중요하다. (둘은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무의식 속에서 물질적 이해 때문에 진실을 거부하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 이것이 대중의 상상을 왜곡된 방향으로 고착한다는 것. 따라서 현대에 음모이론이 만연한 원인을 생각할 수 있으다.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의 다른 측면으로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배계급은 이러한 물질적 이해때문에 현실적 관계에 대해서 상상적 관념, 이데올로기를 갖는다. 비극은 미국의 시민들의 경우(노동자에게 있어서도) 그러한 물질적 이해를 공유한다(혹은 그렇게 믿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이데올로기적 반역은 어디에서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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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김동률, Monologue


김동률 5집 - Monologue
김동률 노래 / Mnet Media

나오기 전부터 이곳저곳에서 주묵했던 앨범.
딴 곡들도 좋지만, 첫곡, '출발'이라는 노래는 참 좋더라.
또 여행을 떠나고 싶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촉촉한 길을 혼자 걷고 싶다.


아주 멀리 까지 가보고 싶어
그곳에서 누구를 만날수가 있을지
아주 높이 까지 오르고 싶어
얼마나 더 먼곳을 바라볼수 있을지

작은 물병 하나 먼지낀 카메라
때묻은 지도 가방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습기를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데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멍하니 앉아서 쉬기도 하고
가끔 길을 잃어도 서두르지 않는 법
언젠가는 나도 알게되겠지
이길이 곧 나에게 가르쳐 줄테니까

촉촉한 땅바닥 앞서간 발자국
첨보는 하늘 그래도 난 이큰길
언덕을 넘어 습기를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데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새로운 풍경에 가슴이 뛰고
별것아닌 일에도 호들갑을 떨면서
나는 걸어가네 휘파람 불며
때로는 넘어져도 내길을 걸어가네

작은 물병 하나 먼지낀 카메라
때묻은 지도 가방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습기를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데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내가 자라고 정든 이 거리를
난 가끔 그리워 하겠지만
이렇게 나는 떠나네
더 넒은 세상으로


노래는 아래에서 들을 수 있다. (내가 올리기는 귀찮아서 ^^:)
http://blog.naver.com/mangto91/80047524182

혼자서 여행을 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느낄 수 있었던 장면들이다.

김동률의 지난 앨범도 그런 느낌이었는데, 곡 하나마다 작은 플롯을 담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앨범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극처럼 느껴진다. 정작 가수 자신은 노래에서 "영화에서처럼 짜릿한 반전은 기대하지 않아"(4/ "JUMP")라고 말하지만, 6/ "The Concert" 나 3/  "오래된 노래" 같은 노래의 가사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사랑 이야기인 것으로 들리는 노래들이다. 사실, 누구에게나 있는, 그러나 한 사람에게만 고유한 그 사랑 이야기들은 영화같은, 혹은 그보다 더 극적일 테니까.


===
사실 요즘에 '필'이 꽃혀서 듣고 있는 앨범은 "디어 클라우드 Dear Cloud"라는 밴드의 1집.



지금 읽고 있는 <스피노자의 뇌>라는 책을 보면, '느낌'에 선행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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