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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반기억의 생성, 평의회 코뮤니즘/ 노동자의 책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노동자의 책'이라는 사이트에서 평의회 관련된 자료들을 번역해서 올려놓았습니다.
 
'노동자의 책'은 노동자들에게 지식을 돌려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사이트인데, 사실 사이트만으로는 부족하고 이러한 시도 자체가 인터넷을 넘어선 하나의 운동이 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사이트 후원회원도 모집하니까 여유있으신 분들은 후원을 하시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겁니다. 하여튼,

http://www.laborsbook.org/book.php?uid=76&no=1185

회원 가입해야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하지만 무료니까 가입해서 보세요. 근데 번역은 아직 상당히.. 거시기 하군요. 암튼, 그냥 대략적인 개요가 뭔가는 살펴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 중에서 판네쿠크의 '노동조합주의'라는 글에서 묘사적인 일부분을 아래에 따서 붙여봅니다. 아주 놀라울 정도로 최근의 노조운동의 분위기와 일치하는 묘사를 볼 수 있지요. 묘사가 같다고 분석이나 대안까지 같을 수는 없겠지만,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최근에 '평의회'가 나름대로 '유행'이라 할 때, 남한에서 노조운동의 전반적인 관료화와 제도화라는 정세와, 사업장단위 전투적 노조주의의 경험이라는 것이 함께 작동하는 것같습니다. 따라서 평의회주의가 '유행'할 수 있는 정세에 대해서도 비판이 필요하지요.  최근의 노조 관료화에 대한 비판이 평의회주의에서 일면적으로 강조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조주의에 대한 비판도 있는데,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라고 할 때도 그것이 '노조주의'이기 때문에 가지는 고유한 한계.. 이런 것을 사고할 필요가 있다고 할 때 고민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전체 글은 다운 받아보시구요.. 아래는 읽어보세요.

글 중간에 있는 "...그래서 악마적인 것과 깊고 푸른 심해 사이에서 노동조합이 만약 현명하다면, 자본가 계급은 거짓 투쟁(sham fighting)이 노조 지도자들이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라는 구절은 정말 짜릿하군요.
 

자본주의와 대산업의 성장에 따라 조합도 같이 성장한다. 조합들은 모든 도시와 모든 공장에서 수천명의 조합원을 확보하고, 나라 전체로 확장되며, 거대한 기업(corporations)이 된다. 업무를 수행하고, 재정을 관리하기 위해, 지역과 중앙에서 관료들(officials): 위원장, 사무총장, 재정담당이 임명된다. 그들은 자본가들과 협상하고, 이런 일들을 통해 특별한 기술을 갖추는 지도자들이 된다. 조합의 위원장은 자본가들만큼이나 큰 힘을 갖게 되고, 자신과 그리고 동등하게, 자신의 조합원들의 이익을 논의한다. 관료들은 노동조합이라는 직업에서 전문가가 되며, 공장일에 전적으로 몰두해 있는 조합원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판단하거나 그들을 지시할 수가 없다.

조합으로서의 거대한 기업은 단순한 개별 노동자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은, 그래서 자신의 정책, 특성, 정신, 전통, 그리고 기능을 갖는 조직체가 된다. 그것은 노동 계급의 이익과 괴리된 그 자신의 이익을 갖는 신체가 되며, 자기 실존을 위해 살고, 싸우려는 의지를 갖는다. 만약 노동 조합이 노동자들을 위해 더 이상 필요없다는 것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해도, 그것들은 순순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자금, 조합원, 그리고 관료들, 이 모든 것들은 즉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조직체의 구성요소로서 그들의 실체를 계속 유지할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노조 관료들, 지도자들은 특별한 노동조합 이익의 담지자들이다. 시초에 공장의 노동자였던 그들은 조직의 지도자로서 오랜 실무를 통해 새로운 사회적 특성(character)을 획득한다. 일단 특별한 그룹을 형성하기에 충분히 커지기만 한다면, 각각의 사회적 그룹에서, 그 작업의 본성은 그것의 사회적 특성, 사고와 행위의 양식을 주조하고, 결정한다. 관료들의 기능은 노동자들의 기능과 철저히 다르다. 그들은 공장에서 일하지 않고, 자본가들에 의해 착취당하지 않으며, 그들의 존재는 계속된 실업의 위협을 당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무실에 앉아서, 꽤 안정된 지위를 누린다. 그들은 조합의 일들을 처리하며, 노동자들과의 회의를 준비하며, 기업가들과 협상을 해야한다. 물론, 그들은 노동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익을 방어하고, 자본가들에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조직에서 임명되어, 그 조직 구성원들을 대표하여, 그의 全(전)역량을 그들의 이익을 방어하는 변호사의 위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한가지 차이점은 있다. 많은 노조 지도자들은 노동자 계급 출신이기 때문에, 그들은 임노동과 착취가 의미하는 것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 그들은 노동 계급의 일원으로서 느끼고, 그들 내면의 프롤레타리아트 정신이 강한 전통으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그들 삶의 새로운 현실은 계속해서 이 전통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경제적으로 그들은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그들은 (자본가들의) 이익에 대항한 (노동자들의) 이익을 챙기고, 임금과 노동 시간에 관해 협상하며 마치 반대의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자본가들과의 회의석상에 참여한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위치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의 위치도 이해하는 것을 배우고, 그들은 “산업의 필요성”에 관한 시각을 갖게 되며, 그것들을 중재하는 것을 추구한다. 물론 개인적인 예외는 있으나, 대개 그들은 노동자들의 기초적 계급의식을 가지지 못하며, 그들의 적절한 이익을 위해 투쟁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노동자들과의 갈등에 빠지게 된다.
...

노조가 강력한 조직체로 존재하는 산업에서, 그들의 지위는 이같은 자본의 집중에 의해 약화된다. 그들이 파업을 위해 모은 대규모의 기금은 그들의 적이 가진 금전적 파워와 비교했을 때 무의미했다. 두 번의 공장폐쇄는 그들을 완전히 고갈시킬 것이다. 자본주의 기업가들이 임금 삭감과 노동 시간의 강화를 통해 아주 심하게 노동자들을 쥐어짜더라도, 노조는 투쟁을 할 수가 없다. 계약이 갱신되어야 할 때, 노조는 자신들이 약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노조는 자본가들이 제안하는 나쁜 조건들을 수용해야 하고, 협상의 가능한 기술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이제 현장구성원과 관련된 근심(trouble)이 시작된다.
조합원들은 투쟁을 원한다. 즉, 그들은 싸우기 전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싸워서 잃을 것이 많지 않다. 하지만, 노조 지도자들은 노조의 재정력과 아마도 노조의 존재 자체 등 잃을 것이 많다. 그들은 투쟁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그들은 희망을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조합원들에게 조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낫다고 설득해야 한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자본가들의 조건을 노동자에게 강요하는 자본가들의 대변인처럼 행위 해야만 한다. 노동자들이 조합의 결정에 반대하며 투쟁을 주장할 때는 더 심해진다. 그러면 노조의 힘은 노동자들을 진압하기 위한 무기처럼 사용된다.

그래서 노조 지도자들은 산업 평화를 보장하는 자본주의적 과업의 노예가 된다 - 비록 그들은 최대한으로 노동자들에게 기여하려 하지만, 이제는 노동자들의 비용으로 그 일을 한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가 없고,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자본주의의 지평선 내에 존재하며, 투쟁은 쓸모없다는 생각이 옳다고 믿는다.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노동조합이 그 권력의 한계에 도달하였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더 나은 노동조건을 위해 자본가 계급과의 투쟁을 벌일 때, 자본가 계급은 그들을 증오하나, 그들의 힘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는다. 만약 노동조합이 그들의 투쟁에서 계급 전체의 힘을 동원해서 투쟁한다면, 자본가 계급은 그들의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그들을 탄압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행동이 반역으로 탄압받는 장면, 그들의 사무실이 구사대에 의해 파괴되는 장면, 그들의 지도자들이 투옥되거나 벌금을 무는 장면, 그들의 투쟁기금이 몰수되는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만약 노동조합이 그들의 조합원들을 투쟁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자본가 계급은 그들을 보존되고, 보호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집단으로 여길 것이고, 그 지도자들을 대우받을 만한(deserving) 시민으로 여길 것이다.
그래서 악마적인 것과 깊고 푸른 심해 사이에서 노동조합이 만약 현명하다면, 자본가 계급은 거짓 투쟁(sham fighting)이 노조 지도자들이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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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주의는 공산주의를 혐오한다. 공산주의는 그것의 존재의 근간을 제거해버린다. 공산주의에서, 즉 자본가들이 부재한 상황에서, 노조와 노조 지도자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노동자 집단이 사회주의자들인, 강력한 사회주의 운동이 존재하는 나라들에서 노조 지도자들은 기원에서뿐만 아니라, 환경에 의해서 노조 지도자들 역시 사회주의자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우파 사회주의자들이고, 그들의 사회주의는 욕심 많은 자본가들을 대신해 정직한 노조 지도자들이 산업 생산을 관리하는 복지의 이념으로 제한된다.

노동조합주의는 혁명을 싫어한다. 혁명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모든 일상적 관계를 뒤집어엎는다. 그 격렬한 충돌 속에서, 모든 세심한 관세 규정들은 쓸려 사라지고; 그 거대한 힘의 투쟁 중에 온건한 협상 기술을 가진 노조 지도자들은 그 가치를 잃게 된다. 전력을 다해 노동조합주의는 혁명과 공산주의의 사상에 반대한다.

이런 반대는 의미가 없지 않다. 노동조합주의는 그 자체 힘이 있다. 노조는 자신의 처분권 내에 상당한 자금을 확보하고 있고, 그것은 힘의 물질적 요소를 이룬다. 노조는 또한 정신적 힘을 가지는데, 그것은 힘의 정신적 요소인 정기적인 신문을 통한 지지와 선전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권력은 지도자들의 손에 쥐어진다. 그들은 노동조합의 특수 이익이 노동 계급의 혁명적 이익과 갈등을 일으킬 때는 언제든지 그것을 사용한다. 비록 노동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구성되지만, 노동조합주의는, 정부가 민중들을 지배하는 권력이 되듯, 노동자들을 지배하는 권력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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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책 사이트 : http://www.laborsbook.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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