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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여행의 기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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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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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여행의 기술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여행을 준비하면서 잡다하게 챙겨읽고 있는, 여행에 대한 책들 중 한권. 하지만 가장 독특한 책이라고 할 만하다. 여행을 ‘낮선 곳에서 사진을 찍고 오는 행위’가 아닐 수 있게, 여행과 그 속에서 만나는 것들에 여행자가 스스로 의미들을 부여할 수 있도록 사고하게 하는 책.

 

글쓴이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다양한 장소들, 다양한 측면들.. 낯선 장소를 만나고 보고 느끼고 인식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보들레르나 위즈워스, 고흐와 같은 예술가들의 말을 경유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영국 숲의 덤불속에 어떤 생명에게서 나와 같은 시간대에 같은 행성을 살고 있다는 동류감을 떠올린다. 호퍼의 그림을 통해서, ‘외로움’과는 또 다른 ‘공동의 고립감’에 빠진다. 시나이의 사막에서 신이 빚은 위대한 창조 앞에서, 숭고한 장소들은 부드럽게 우리를 다독여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는 것을 느낀다.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화가들의 작업이란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화가가 보여주고 싶은 현실의 귀중한 특질들을 담아내는 것이라는 점을, 고흐를 통해서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마주치는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해서도.

 

보통이 말하는 모든 곳에 가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나도 실험해보고 싶어진다. (다행히 보통이 언급한 몇 군데는 앞으로 다녀오려고 하는 장기간의 여행 예정지 목록에 들어있다.)

 

특히 러스킨을 통해서 말하는 이 부분은 인용해볼만 하다.

 

러스킨은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한 관심을 통해 다섯 가지 중심적 결론에 도달했다.

첫째, 아름다움은 심리적인 동시에 시각적으로 정신에 영향을 주는 수 많은 복잡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다.

둘째,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타고난 경향이 있다.

셋째, 이런 소유에 대한 욕망에는 저급한 표현들이 많다. (앞서 보았듯이, 기념품이나 양탄자를 산다거나, 자기 이름을 기둥에 새긴다거나, 사진을 찍는 행위를 포함해서)

넷째,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심리적이고 시각적인)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이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대해 쓰거나 그림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하여 아름다운 장소를 묘사하는 것이다. (문단나누기와 강조는 나) 


여행에서 마주친 대상들에 대해서 데생을 하거나, ‘말그림’을 그려보는 방식으로 우리도 러스킨이 말한 것처럼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다.(그것은 러스킨의 언급처럼 기념품이나 사진으로 이루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렇게, 여행을 위한 영혼의 준비를 얼추 갖추었다면(아, 그리고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 노트도), 우리는 보들레르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 이제 떠나야할 시간이다. (아, 아직도 준비가 너무 부족한데, 이 곳의 눈물은 이미 너무 많구나!)

 

열차야, 나를 너와 함께 데려가다오! 배야, 나를 여기서 몰래 빼내다오!
나를 멀리, 데려가다오, 이 곳의 진흙은 우리의 눈물로 만들어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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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공존의 기술 -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


공존의 기술 -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
이기라.양창렬 외 지음 / 그린비


2005년 가을 이후 파리 외곽 지역을 중심으로 폭발한 (주로 "이주자들의 폭력사태"로 알려진) 소요를 분석한 책. 프랑스에 유학 중인 한국인 연구자들이 썼다. (책의 에필로그로는 발리바르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어찌보면 먼나라 이야기이기는 하겠지만 매우매우 흥미로운 정치적 쟁점들이 담긴 책.

“방리유”는 도시 근교를 일컫는 말이다. 프랑스 도시에서 방리유(근교)는 한편으로는 중산층들의 주택가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시테'라고 불리는 이주민, 하층 프롤레타리아의 열악한 주거지를 의미한다. 이 사건은 당시에 "선진국"이라는 프랑스에서, 그것도 "똘레랑스"의 나라라고 불린 곳에서 일어난 폭력적인 사건으로 많은 충격을 주었다.
 
이 책은 이 사건의 의미에 대해서 여러 측면에서 접근한다. 프랑스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역사, 국가의 정책, 노동자운동(주로 CGT)의 입장과 활동, 노동시장의 성격 등은 물론이고, 특히 국가의 대응으로서 범죄-치안담론, 이주자의 "배제적 통합"에 대한 정치철학적 비판 등도 다루고 있다.

프랑스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역사가 긴 만큼, 남한에서 생각하기 힘든 쟁점들도 있지만, 많은 부분은 "조만간" 우리에게도 현실화될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부는 벌써 현실이기도 하고.)

극우들이 이주자를 배제하는 인종주의적 의제를 제기하고, 우파들이 그것을 포용하며, 좌파들도 그 의제에 답을 하게 되는 상황에서 이주자와 관련된 쟁점들은 점점 더 우경화된다.(이런 걸 정책프레임 전쟁이라고 할텐데, 미국에서도 우파들이 강한 것으로 유명.)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의 불안정화, 실업의 문제를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로 전가하고자 하는 지배계급의 입장이 확대된다.

우파들은 백인 하층 노동자, 자영업자들의 불만을 이주자들에게 돌린다. 이 과정에서 이주자들을 범죄자로 몰아부치게 되는데, 이는 "사회보장"을 후퇴하면서도 대신 "사회적 안전"을 지킨다는 것으로 쟁점을 이동한다. 이를 위해서 방리유 지역에 대한 억압은 증대되고, 오히려 폭력과 저항을 유도한다. (2005년 사태도 사르코지가 의도적으로 도발했다는 강한 혐의가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남한의 국가가 노동자운동에 대해서 하는 짓거리도 이런 측면이 있는 듯)

치안담론 속에서 이슬람국가의 이주자들은 실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슬람원리주의 테러리스트와 상징적으로 연결되고, “범죄와의 전쟁‘은 ”테러와의 전쟁“과 같은 것으로, 사회적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으로 표상된다.

책은 너무나 많은 흥미로운 쟁점들을 많이 담고 있지만, 다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 특히 관심있게 본 쟁점 두개만 일단 언급하자.(쟁점들을 요약하는 것도 힘들다; 나머지는 담에 생각나면..)

이슬람 여성들의 히잡 착용 문제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종교적 상징물인 히잡(이슬람식 여성 스카프)을 착용하지 못하게 해야한다는 입장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법안으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문제는 법안이 아니라 이 안에 담긴, 드디어 폭발한 쟁점들이다.

여기에는 정교분리의 원칙부터, 다문화주의, 이슬람 사회(공동체와 가족)에서의 여성의 지위, 식민주의 등과 같은 쟁점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이런 쟁점들을 여기서 다 소개하기는 힘들겠지만, 다만 “정교분리”원칙에 대해서는; 이것은 애초 대혁명 이후 기독교 교회의 지배로부터 국가를 분리하려는 것이라는 점, 따라서 현재 언급되는 “정교분리”는 완전히 다른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는 점은 언급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논쟁에 대면하는 원칙으로 “그녀들의 입장에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히잡을 쓰는 이슬람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으로부터 생각하자는 것이다. 심지어 페미니스트들 조차,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서만 이슬람 여성들을 대상화해왔다는 비판.

이슬람 여성들(이슬람 페미니스트들도)은 오히려 스스로 히잡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것이 남성우월적인 이슬람 사회에서 자신을 “무성적인 존재로” 드러내는 역설적인 생존전략이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여성으로서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서.(사진은 마르세유에서 이슬람 여성들의 시위)

이것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무엇보다 문제는 히잡을 착용하는 이슬람여성들, “그녀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라져야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녀들이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드는 문제라는 점, 국가가 법으로 금지하고 오히려 그녀들이 학교로부터 철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은 전혀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자운동의 입장과 이중노동시장

이주자들에 대한 노동자운동의 입장은 어땠을까? 저자는 그것이 이중적이라고 말한다.(“연대”와 “통제‘의 모순) 한편으로 이미 합법화된 이주노동자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대변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새로운 이주노동자의 유입에 반대하고, 이에 따라 불법 이주자들에 대해서는 눈감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것은 프랑스의 노동자운동이 전후 사회적 합의의 한 주체로 자리하면서 노동시장 정책에 대한 입장에 제약이 가해진 상황과도 연관된다. 이러한 이중적 입장은 프랑스 공산당의 몇몇 쟁점들에 대한 모호한 입장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이것이 프랑스 노동자운동(특히 CGT)가 민족주의적이라는 것은 아닌데,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동유럽 이주노동자들을 비롯한 이주노동자를 조직해왔고, 이들을 대변해온 역사가 있다. 이주노동자 공동체를 형성-지원하고 이들을 대변하려한 노력들을 보면 단지 민주노총에 "가입시켜준" 정도의 활동 이외에는 적극적인 조직화 전략도 지원도 없는 남한 노동자운동의 이주노동자 운동에 대한 입장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러한 차이는 이주노동자의 합법화가 그나마 상당히 이루어져있다는 사정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장기간의 노동자 이주의 역사가 있고, 프랑스 사회에 거의 완전히 통합된 2~3세대가 노동시장에 진출하는 상황이다보니 남한과 단순히 비교하기는 힘들다. 남한 정부의 극단적인 이주노동자 관리, 불법화가 민주노총에게는 이주노동자의 합법-불법과 무관한 지원이라는 입장을 요구하는 셈이지만, 정부의 입장이 어느 정도 유화적으로 변화할 경우 민주노총의 입장도 모호해질 수 있다.

한편, 노동자운동은 방리유의 소요에 대해서 의미있는 행동을 조직하지 못했고, 입장도 모호했다. 방리유의 소요 이후 불과 만에 쟁점화된 CPE(최초고용계약법) 투쟁은 전혀 연결되지 못했다. 이는 시기적인 차이도 있겠지만, 이렇게 된데에는 노동자운동이 조직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 혹은 노조가 조직되어 있는 공공부문, 안정적인 노동시장에 몰두한다는 점도 작동한다고 지적된다.(사회운동적인 성격을 가져온 프랑스의 노동자운동에서조차 난점이었다는 점) 이들 방리유의 청년들은 실업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운동은 일자리로부터도, 사회로부터도 배제되는 이주자들에 대해서 어떤 입장으로 갖고, 또 실천할 수 있을까?
(한편, 이런 지점은 "노동운동을 잘하면 사회운동의 과제들은 다 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니냐"는 노동운동 좌파들의 입장들에 다시 한번 회의적이게 한다. 사회운동포럼 사전 토론에서도 제기되는 논점인데.. 노동운동으로 안되는 것들이 있답니다;;)

그밖의 쟁점들을 간단하게만 메모.

* 시빌리테(시민윤리)의 문제. 그것은 발리바르에 의해서 운동에 필요한 이념의 하나로 제시되기도 하는데, 이게 이주자와 관련해서 프랑스에서 기만적인 성격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즉, “무례한” 이주자 청년들.. 이런 식의 비방과 이를 범죄와 연결시키는 시도. 정작 문제는 이주자들에게 먼저 “무례한” 국가권력이 문제라고 하겠지만, 개념이 이런 현실에 봉착할 때 어떤 이론적 전략이 필요할까?

* 공동체주의 문제. 이주자들의 (민족에 기반한) 공동체는 긍정적인가? 그것은 공동체주의로 후퇴하는 것은 아닌가? 발리바르는 공동체주의를 강화하는 배제와 추방을 먼저 사고해야하고, 이주자들의 공동체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전환시킨다. 그러나 이도 매우 현실적인 문제.

* 정치의 부재 혹은 소멸의 상이한 양상.. 이주자들, 하층 프롤레타이아는 “대표되지 않음”으로서 정치에서 배제된다. 극단에서 초민족 부르조아지는 굳이 국내정치에서 대표될 필요가 없다. 방리유의 반란은 정치적 생성, 봉기적 생성의 계기일 테지만 그것은 여전히 슬로건도 정치적 목표도 부재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치는 어떤 생성의 계기를 가질 수 있을까.. (발리바르가 제기하는 7가지 논점 중에 하나)

* 이중노동시장. 프랑스에서도 이중노동시장이 고착되고, 2차 부문 노동시장(중소영세비정규직 일자리라고 보면 될텐데)에서 특히 이주자들과 백인노동자들이 경쟁한다. 이에 따라 주로 노조로 조직화된 1차 부문(공공부문, 대기업, 전문직)은 오히려 무관심. 일단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최저임금의 지속적인 인상으로 제시된다.(옳다고 본다) 문제는 제한된 일자리에서 경쟁하는 2차 부문 노동시장에서 인종주의적인 대결이 심화될 수 있다는 점. (남한에서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 적대적인 것처럼)

=====
한편, 극단적인 모습의 방리유를 무대로한 프랑스 영화도 있다.

“13구역”은 도시에서 방리유를 배제하는 방식의 극단을 상상한 영화다. 그곳에서 장관(아마도 내무부겠지)은 이미 콘크리트 장벽으로 고립된 방리유를 핵폭탄으로 날려버릴 음모를 꾸미는 것으로 나온다.

(마침 오늘 케이블 TV에서 하더군. 실제로 빠리 외곽의 방리유는 도시외각순환고속도로에 의해서 고립되어 있다고 한다.)


책을 읽고 보니, 사르코지가 비슷한 짓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징적 배제를 물리적 배제로 만드는 것은, 몇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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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슬럼,지구를 뒤덮다


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슬럼이 도시의 미래라고 말하는 이 책은, 단지 도시가 아니라 세계인구의 생존조건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신자유주의와 직결되는 문제라는 점을 말한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이 책은 어쩌면 슬럼에 대한 책이라고 보기 힘들다. 신자유주의가 세계의 민중들에게 어떤 것인지를 도시를 중심으로 말하고 있다고나 할까. 세계최대의 슬럼철거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 88올림픽을 위한 72만명 철거가 있었던 나라, 그리고 슬럼철거-재개발이 도시 내부의 극단적 분리와 함께 진행되는 나라인 남한에서도 매우 시사적인 책이다.

한편 이 책은 사센의 <경제의 세계화와 도시의 위기>의 진정한, 그리고 발전된 후속편이라 할만하다. 사센의 책은 금융세계화가 어떻게 초민족적 금융도시를 형성하는가를 보여주었다면 이 책은 그 이면에서 무엇이 벌어지는 지를 말한다. 한편에서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걸맞는 금융화된 세계도시가 발전하고, 그 이면에는 세계 전역에서 슬럼이 ‘폭발’한다.(확장 혹은 팽창이라는 낱말의 어감으로는 부적합할 정도로)

도시의 기괴한 팽창

도시는 급격하게 팽창하고 있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속도도 가속화되고 있다. 이미 세계인구의 절반은 도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2025년까지 세계인구가 100억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할 때 새로 증가하는 인구의 95%는 도시에 거주할 것이다. 이미 세계에는 2000만명 이상의 도시(지대)가 도쿄, 멕시코시티, 뉴욕, 서울(수도권 포함)에 형성되어 있다. 이 숫자는 아시아에서만 10여개 이상이 될 것이다. 아마도 도쿄-(서울)-상하이로 연결되는 동아시아 해안의 세계도시가 회랑형태로 연결될 것이다. 도시화는 기존 도시 자체의 확장만이 아니라 시골의 도시화를 동시에 의미한다.

이렇게 도시는 역사상 최대로 기괴하게 팽창하고 있다. 왜 그런가, 특히 주변과 반주변의 각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팽창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인가가 이 책이 묻고 답하고 있는 것들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저자는 도시의 문제가 바로 신자유주의의 문제라고 말하는 중이다.

도시의 미래는 슬럼

도시화는 산업화 때문일까? 이러한 고전적인 설명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주변-반주변에서 도시의 급격한 팽창은 중국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뭄바이, 요하네스버그, 부에노스아이레스, 상파울루 등은 산업화와 완전히 무관하게(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속에서 산업은 오히려 축소되는 중이다), 심지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경우 농업생산이 후퇴하는 데도 도시는 급격하게 팽창을 거듭한다. (사진은 뭄바이의 슬럼)

도시의 기괴한 팽창은 70년대 이후 외채위기와 80년대 이후 IMF가 주도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이다.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주변-반주변의 농업을 몰락시켰고 농촌은 공공서비스의 축소(의료지원과 같은)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에 따라 농촌에서 더 이상 살수 없는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든다. 이들이 도시에서 살수 있는 곳은 다양한 형태의, 그러나 한결같이 끔찍한 조건의 슬럼지대이다.

이런 방식으로, 대부분의 주변-반주변 국가에서 도시의 팽창은 곧 슬럼의 팽창과 정확히 동일한 말이 된다. 슬럼거주자는 선진국에서는 6%, 저개발국가에서는 78.2%에 달한다. 에티오피아와 차드에서는 99.4%의 도시인구가, 아프카니스탄에서는 98.5%가 슬럼에 살고 있다. 슬럼이 바로 도시 자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듯 미래의 도시는 이전 세대 도시계획 전문가들이 상상한 것처럼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도시가 아니라, 손으로 찍어낸 벽돌, 지푸라기, 재활용 플라스틱, 시멘트 덩어리, 나뭇조각 등으로 지어진 도시다. 21세기의 도시 세계는 하늘을 찌를 듯 빛나는 도시가 아니라, 공해와 배설물과 부패로 둘러쌓여 덕지덕지 들러붙은 슬럼도시일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슬럼에 설고 있는 10억 주민은 9000년 전 도시 생활의 여명기에 세워진 아나톨리아 정착촌 차탈회위크의 튼튼한 진흙집 잔해를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돌아볼 것이다."(이 책,33쪽)

슬럼 착취하기

시애틀과 아바나 시민의 1인당 소득격차는 739:1이다. 콜카타에서는 방 하나에 평균 13.4명이 살고 있다. 주거환경의 열악함은 물론이지만 나이로비의 경우 도시 외곽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월 수입의 반 이상을 출근을 위한 교통비에 사용해야한다. 인구 1000만의 킨샤사는 하수(그리고 분뇨)처리 시설이 “전혀”없다. 베이징에 주로 농민공(비정규직노동자)이 거주하는 슬럼에서는 6000명의 주민이 하나의 화장실을 사용한다.
(한편, 케냐의 나이로비는 세계사회포럼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슬럼주민들의 목소리는 상업화되기까지한 세계사회포럼에도 충격을 주었다. 아래 사진은 나이로비의 슬럼. 출처:프레시안/엄기호/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인용)


이렇게 빈곤한 슬럼에 대해서도 착취할 무엇이 있을까? 물론.

빈민들이 스쿼팅(squatting, 무허가 토지개척)한 토지는 주기적으로 재개발되면서 개발업자가 이윤을 취한다. 슬럼이 유지되더라도 경찰이나 관료들에게 돈을 상납해야한다.(비싼 유료화장실을 개설하기도 한다.) 세계은행WB의 기만적인 '빈민자조주택‘ 프로그램은 어떨까?

마닐라, 뭄바이 같은 곳에서 이 사업은 “오직” 빈민을 축출하고 개발업자를 배불렸을 뿐이다. 심지어 ’변기설치사업‘같은 경우에도 관리가 되지 않아 오히려 오수가 역류하고 전염병을 불렀을 정도다. 빈민을 위한다는 재개발 사업은, (남한에서도 정확히 같은 방식이지만) 중산층에서 주택을 공급할 뿐, 빈민들에게는 철거와 추방을 의미할 뿐이다.

특히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필수서비스의 사유화는 슬럼의 문제를 더욱 극단적으로 만든다. 사유화와 슬럼문제는 직접 연결된다. 특히 치열한 쟁점으로 부각되어 있는 물-상수도 사유화는 의료서비스의 사유화와 함께 가장 심각하다. 세계은행의 압력에 따라 상수도를 바이워커에 넘긴 다르에스살람에서는 수도 가격의 폭등으로 주민들은 위험한 수원을 이용해야한다. 그 결과 콜레라, 티푸스와 같은 수인성 전염병에 직접 노출된다. 열악한 위생환경은 기생충, 말라리아, 뎅기열 등을 발생시키지만 아무도 치료해주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은 여성에게 가족의 생존을 위한 모든 부담을 전가한다. IMF SAPs는 “가족의 생존이라는 문제에 직면한 여성의 노동력을 거의 무한대로 잡아늘일 수 있다는 믿음을 냉혹하게 활용하는 체제이다.” 여성들은 노동시장에서 장시간 노동은 물론 구걸, 매춘에 내몰린다. (이것은 “AIDS 대학살”의 원인이기도 하다.) IMF SAPs가 끝난 남한에서조차 여성일자리 정책과 같은 것들을 보면 이런 기대가 경제관료들의 상식인 것같다.

세계은행의 정책이 또 혜택을 준 집단이 있으니 개발업자들과 이들과 결탁한 관료, 독재자 외에 국제NGO들이다. 이들은 “지역사회 리더쉽을 전용하고 이제까지 좌파가 차지했던 사회공간을 패권화하는 데 있어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물론 세계은행은 자신들의 사업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NGO들을 활용한다.

심지어 이들은 “자활”, “자조”라는 명분하에 슬럼에 “자본주의적인 경제”를 도입하고자한다. 슬럼주민들에게 주택증서(등기)를 주자, 그렇다면 그들은 재산가가 될 것이다. 그리고 비공식경제를 기업형태로 조직하자, 그러면 곧 사업가가 출현하고 재산가와 만나서 일자리를 만들 것이다.. 이런 식의 사기극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대 인상으로 빈민들을 ‘새로운’ 슬럼으로 밀어낼 뿐이다.

국가의 해결책 : 철거

국가의 전형적인 해결책은 철거.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국제행사가 있을 때에는 더 심해지는 데 88 올림픽 당시 서울수도권에서 대규모로 벌어진 철거는 지금 베이징에서 잔인하게 반복되는 중이다.

특히 도시가 팽창하면서 새롭게 중산층을 위한 교외주택을 건설하기에 입지가 좋은 곳이나, 퇴락한 도심지역은 재개발의 대상이다. (서울에서도 뉴타운 건설을 위한 강북지역의 철거, 청계천 재개발과 도심재개발을 위한 철거가 극심하다.) 별다른 대책도 없이, 불도저와 경찰, 군인을 동원해서 “밀어버리는 것”이 끝이다. (역시 남한에서도 같은 방식이다.) 이렇게 한번에 수십만명의 주거지를 철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비공식부문 ;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도시를 미숙련, 무방비, 저임금의 비공식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잉여인간의 처리장으로 만들었다. 농토없는 농민들의 半프롤레타리아화와 유사한 수동적 프롤레타리아화. 법적으로 권리와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등장.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는 극단적이어서 새로 생기는 일자리의 90%는 이러한 비공식부문이다. 불완전고용과 실업, 식료품노점, 식당, 이발소, 소규모 물물교환.. 같은 것들이다. 국제금융기구와 신자유주의NGO들은 이들에게 “기업가정신”과 “자활”을 요구한다. (어디 안드로메다의 어느 별 같은 곳에서 왔나부지?) 그러나 그것이 성공할리는 없으며, 다만 정치적 수사들일 뿐이다.

 

한편, 이러한 대중들을 보자면, 전통적으로 사업장에서의 노-사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노동자운동의 절대적인 모델로 사고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 남한의 좌파들(현장파들)이 사업장(현장)의 노사관계로 제한되는 (전투적) 경제투쟁을 물신화하고 그것이 노동자 운동의 순수한 형태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도 말해준다. 노동자계급은 사회학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 구성되어야하는데, 그것은 안정적인 임단협이 가능한 사업장 노사관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구성되어야한다.(그런 점에서 남한 운동에서 '비공식노동자'란 아예 인식되지도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 하긴 '비정규직노동자'라는 것이 인식된 것조차 몇년 안되니.)  

가진 자들의 요새 도시와 새로운 중세

이와 동시에 벌어지는 일이 부유층의 요새화된 교외도시를 건설하는 작업이다. 이들은 캘리포니아식 생활양식을 모방하고자한다. 카이로 외곽에도 “비버리힐즈”가 있고 베이징 외곽에는 “롱비치”가 있으며 홍콩에는 “팜스프링스”가 있다.(남한에는 “타워팰리스”가 있다.)

이들 지역은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되고 24시간 사설경비가 이루어지고 개인 수영장과 폐쇄된 지역주민을 위한 헬스클럽, 쇼핑몰, 병원, 고급식당 등이 위치한다. (강남의 주상복합 건물들과 이렇게 같을 수가!) 이들은 경비를 갖추고 외부의 침입을 막는 ‘요새’를 만드는데, 강박증 증세를 보인다. 가난한자들에 대한 공포라고나 할까.

이러한 분리는 초민족적인 금융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주변-반주변의 엘리트들이 ‘안전하게’ 도시의 주민들과 분리되도록 한다. 이들이 생존하는 공간은 슬럼이 넘치는 현실의 도시라기보다는 뉴욕-런던과 연결된 금융네트워크이다. 이들이 투자하는 곳은 같은 도시 주민들의 일자리가 아니라 미국의 헤지펀드다. 그러니 더러운 도시빈민들과 분리되더라도,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이러한 분리는 도시의 장벽을 건설하고, “새로운 중세”를 불러온다.

콩고의 칸샤사. 이곳에서는 상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실상의 중세가 도래했다. 국가의 유일한 자금원인 광산산업은 세계은행이 부추긴 외채(이 돈은 독재자가 스위스은행에 빼돌린지 오래다)를 이유로 외국에 넘어갔다. IMF는 SAPs를 통해서 공기업매각, 공무원해고 등으로 공공서비스를 완전히 파괴하면서 이자까지 악날하게 모두 가져갔다. 공식경제는 물론 국가제도 마저도 억압장치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붕괴한 이 곳에 600만명이 살고 있다. 화폐는 전혀 무용하다. 연평균소득 100달러 이하(1년간 버는 돈이 우리 돈으로 10만원도 안 된다는 말이다.), 인구의 2/3가 영양실조. 이곳에서는 중세적인 미신이 창궐한다.

절망에 빠진 도시 주민들은 90년대 초 다단계 열풍에 휩싸였고 이것은 91년, 93년 붕괴한다. 이제 IMF와 세계은행도 콩고에서 철수한다. 이제 그들조차 더 이상 착취할 것이 남이있지 않게되었기 때문이다. 노동세계가 붕괴하고 도박이라는 환상마저 붕괴하자 남은 것은 주술과 예언종교. 오순절파 교회가 엄청나게 확대되면서 주술 서비스를 제공한다. 절대빈곤 속에서 선물경제, 호혜교환도 모두 붕괴하고 미신만 남았다. 이들은 추천명의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마녀사냥을 하는데, 아이가 마녀로 지목될 경우 부모는 아이를 유기해도 되기 때문에 그렇게 ‘처리’된다.

새로운 전쟁

슬럼으로 가득한 제3세계 도시의 청년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전의 병사, 범죄조직, 국제테러조직까지 갖가지 형태를 취한다.(그래서 저자는 네그리의 ‘리좀’과 ‘다중’이 이것이냐고 묻는다. 다소 조롱기로.) 그래서 역설적으로 도시의 미래에 대해서 가장 투명하게 통찰하는 것은 미국의 펜타곤이다. 공군아카데미, 랜드연구소 등등. 이들은 미래 전쟁을 예상하면서  "도시화지형에서의 군사작전"MOUT이라는 것을 발전시키고 전술을 혁신한다. 21세기의 전쟁은 바로 이러한 슬럼에서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제3세계에서 미국이 마주칠 것은 반란자들의 도시 해방구이자 범죄의 소굴, 이들은 모두 ‘테러와 범죄집단’으로 규정된다.  
(이와 관련해서 주변-반주변만이 아니라 중심부 국가에서 벌어지는 내부적 배제에 대해서는 최근 읽고 있는 <공존의 기술-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을 참고할 수 있을 것같다. 이 책은 다 읽으면 리뷰.)


따라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만드는 미래의 지구를 예상하고자한다면, 어떤 책보다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다소 장황한 인용과 소개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직접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슬럼은 도시의 미래일 뿐 아니라 지구의 미래이기도 하다. 그곳에서의 모든 정치적 쟁점들은 이 문제들을 우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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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 - 중국 현대사의 트라우마
백승욱 지음 / 살림

 

문화대혁명의 과정과 쟁점들에 관한 책. 얇은 책이지만, 흥미진진하다. 핵심적인 내용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책에도 언급되고 있지만, 모리스 마이스너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를 함께 보면 도움이 된다.(전반적인 과정에 대한 서술은 두 책이 보완적이다. 백승욱 선생의  이 책은 문혁의 '혁명적 주체'들인 조반파 내부의 지형과 운동에 대해서 더 자세히 언급한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문혁이 남긴 쟁점들은 정리해서 제시한다.

당장 현재적으로, 문혁의 기억은 자본주의적 모순이 첨예하게 부활하는 중국에서, 노동자들의 저항 속에서 불현듯 출현하고, 따라서 운동을 과잉-과소결정한다.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서 문혁 과정에서 제기된 쟁점들, 문혁이 남긴 쟁점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사고를--그리고 정치적 시도/실험들을-- 멈추지 말 것'을 요구한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로 후퇴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왜? 당내의 주자파(走資派) 때문에? 혹은 상부구조 변혁의 지체 때문에? 그렇다면 토대가 문제? 그럼 토대는 무엇인가? 이데올로기는 상부구조인가?라는 문제들. 그리고 자본주의 세계체계 속에서 민족국가 단위의 사회주의 체제가 부딪히는 곤란, 당을 관통한 문혁, 그리고 당이라는 쟁점, 대중과 당의 관계라는 쟁점. 그리고 대중의 급진적 진출과정에서 '대중의 공포'라는 쟁점.

 

하나하나가 단행본 책으로 나와도 모자를 매우 중요한 쟁점들이다. 이런 각각의 쟁점들을 문혁을 통해서 어떻게 사고할 수 있는지 저자가 알려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득하게 하는 책이다. 그런 연구가 있기 전까지 당분간은 몇몇 다른 이론들을 우회할 수밖에 없겠지만. (여튼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를 다시 보는 것은 도움이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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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된 "문혁16조"(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1966.8.8)는 문혁의 핵심지침이 되는 기본문건이다. 마오쩌뚱 지시로 천보다, 왕리 등이 초고를 작성한 후 수차례 수정을 거쳐 통과된다.

 

지금 읽어보아도 "문혁16조"에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다시 "혁명"을 하자는 요구가 담겨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내용에 대한 이론적, 역사적 평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이미 국가권력을 장악한 공산주의자들이 그것을 다시 혁명하자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야한다. 국가권력은 커녕 대중운동조직의 집행기구를 '개혁'하지도 못하고, 권력근처에조차 가보지 못했으면서도 '개혁'적 요구에도 주춤거리는 우리 운동들을 현재를 비추어보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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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김진호.최형묵.백찬홍 지음 / 평사리

 

[먼저 이들의 무사기환을 기원하면서 말하자면] 아프카니스탄에서 한국인들이 탈레반에 인질로 잡힌 후, 이 사건과 관련해서 기독교의 ‘해외선교’활동을 돌아봐야한다는 지적이 있다. (한겨레 신문 기사 등 ; ‘한국=기독교 선교’ 인식 탓 피해 가능성) 이번에 납치된 한국인들의 경우에 직접적인 '해외선교‘ 활동은 아닌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사건 전 교회의 입장등을 통해서 볼 때) 애초의 취지가 그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분당샘물교회 박은조 목사는 뉴라이트 계열의 기독교 우익 NGO인 '기독교사회책임'의 공동대표이기도 한데 그 연관성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남한 교회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해외에 파견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번 사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미국의 아프카니스탄 침공과 이에 함께한 남한 정부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은 확인하고 가자. 이 글은 사태의 본질을 흐리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고와 비판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도. 그러나 이 전쟁의 한 측면이 근본주의 간의 충돌이라는 점, 그것들이 정치가 불가능지는 정세를 폭력을 통해서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을 모방하는 남한의 기독교 근본주의의 공격적인 '해외선교' 역시도 문제의 일부라는 점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비록 정세적 고려 속에서 부차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입장은 다소 위험하게도 두 가지 모두와 쟁점을 형성할 수 있다. 기독교가 전적으로 문제라는 입장--포탈사이트 덧글에 만연한, 역시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입장이며 종교적 비관용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것--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면서도, 그것은 전혀 다루질 필요가 없다는 입장--예를 들어 "리장"님의 이 포스트--으로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공격적인 ‘해외선교’ 활동에 나서는 이유는 국내 교회 성장세의 둔화 등에서 가지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진단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쉽게 이해하기는 힘든 일이다. 종교기관이 (마치 자본과 같이) 무한이 증식하기 위해서 투자를 확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남한 기독교 교회가 성장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남한 교회가 내재화한 이데올로기, 반공발전주의와 관계되어 있다. 기독교 교회는 반공발전주의 국가에 적합하게 조직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였던 셈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남한 주류 기독교 교회의 이데올로기를 역사적 과정을 검토하면서 진단한다. 그것은 대한제국 말기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을 상징적 사건으로 하는 초기 조선 기독교 전통의 형성에서 일제에 순응하고 타협한 20세기 초반기, 미국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과 반공발전주의를 내재화한 해방이후, 군사독재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를 거쳐,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노골적인 우파 정치세력으로 변신을 시도하는 과정이다. 이에 비해서 반독재 투쟁에 나서고 노동자를 조직했던 진보적인 교회들은 비주류에다가 예외적인 경우였다.

 

이랜드노조가 투쟁하고 있는 상암월드컵 경기장에서 7월8일 열렸던 기독교의 대부흥 행사가 바로 "Again 1907"이었는데, 그것은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을 부활하자는 취지였다. 영적 각성, 교회의 통합 증진과 변화와 갱신을 1907년의 정신을 계승을 통해서 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기업이라는 이랜드의 비정규직 탄압과 이랜드 투쟁에 대한 외면에서 보이듯 그것은 타자에 대한 배려와 내면에 대한 성찰이 부재한, ‘무례’한 것을 넘어서 폭력적인 이벤트가 되어 버렸다.

 

세 명의 공저자 중 김진호 목사의 글이 가장 주목된다. 그는 1907년의 사건들을 정세적으로 분석한다. 러일전쟁 시기였고, 평안도 지역이 이 전쟁에서 일본군의 배후지였다는 점, 이에 따라 이 지역의 민중들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민중들은 최소한의 보호를 제공해줄 수 있는 기독교 교회로 모였지만, 전도사들은 이들 민중에 대해 의심을 품었고 ‘진정한 신앙’을 요구했다. 그 결과가 평양대부흥 운동이었던 셈이다. 이런 특수한 정세에서 전도사들은 대중의 상처를 교회제도에서 전도사의 헤게모니 확립, 비정치적인 종교활동으로 이끈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서 다양한 욕망과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카리스마적 지도력에 의한 통합을 선호하는 정서를 형성한다.

 

김진호의 이런 분석은 종교가 단일한 실체가 아니며, 그 내부에서 상이한 이데올로기가 경합하거나 결합한다는 점, 그것들은 물질적 정세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게다가 김진호는 이러한 분석에다가 집단적 정신분석도 결합한다. 일제시기 신사참배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대부분의 기독교 근본주의-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공산주의라는 더 큰 적을 발명함으로써 해결하려했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 이후에 남한의 주류 교회들은 미국과 반공발전주의 국가의 지원을 통해 크게 성장했다는 점, 산업화 과정에서 대중의 동요와 불안을 성장의 토대로 삼았다는 점도 중요한 분석이다.

 

이런 분석은 기독교 교회의 구체적인 인맥을 통해서 연결된다. 주로 백찬홍의 글은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의 전통을 검토하면서 이들 신학교에 유학했던 한국인 목사들의 의식, 이들의 인맥이 기독교 교회의 특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책은 이런 방식으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남한 기독교 교회의 현재와 그 역사를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김진호의 글이 특히 흥미로운 것은 종교제도가 형성되는 과정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물질적-정세적인 요인, 이데올로기적인 요인, 무의식적인 요인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특이하게 김진호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무례한 자들의 기독교” 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무례”는 다른 입장, 견해와 대화를 거부하고, 타자의 비판에 닫혀있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례(禮)”는 발리바르의 시빌리떼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어 흥미롭다. 종교가 자신을 하나의 보편성이라고 주장한다면(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문자주의자들에게는 불가능하겠지만 ‘영적인 것’과 관계되는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에서 종교가 자신의 보편성을 주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례(禮)”를 갖지 못할 때, 즉 무례할 때 그것은 상징적 폭력이 된다.(그리고 곧 쉽게 물질적 폭력으로 전화한다.)

 

김진호는 현재 주류 기독교 교회가 타인에 대한 무례함에서 기인한 위기를 정치세력화를 통해 해결하려한다는 점을 우려한다. 그것은 최근에는 시청앞 극우 단체와의 집회(70~80년대 성장한 선발대형교회들), 혹은 보다 세련된 형태로 뉴라이트 운동이나 '기독교사회책임‘과 같은 우익 NGO에 결합(80~90년대 성장한 후발대형교회)한다. 이러한 차이는 각각의 교회들이 성장한 역사와 기반하는 교인들의 정치적 성향을 반영한다. 주로 강남이나 신도시 중산층에 기반한 후발대형교회들은 보다 ’유연하고 세련된‘ 정치적 화법을 구사한다. 이들은 공화당 우파들, 네오콘과 연합한 미국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정치개입을 모방하려한다. 이는 향후 남한 정치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반독재 투쟁에 결합했던 진보적인 기독교 사회운동. 80년대 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로 결집한 진보적인 교회들. 이들은 기독교 내에서는 비주류였으나, 70~80년대에 그들의 역할로 인해서 과잉대표되었다가 이른바 “민주화 이후”에 위기에 있다. 이들 중 상당수 명망가들은 신자유주의 개혁정권에 지배엘리트로 합류했다. 그러나 저자들과는 달리 서경석 목사와 같이 민주화운동을 했던 인사가 우파(뉴라이트)로 전향하는 것과 이는 분리해서 볼 일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어떤 정치분파가 더 효과적으로 확립할 수 있는가에 판단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내용적으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적인 기독교 사회운동이 다시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비록 인맥으로는 결합되어 있을지라도) 신자유주의 정권에 함께 한 인사들을 비판하고 그것을 신자유주의 비판과도 결합할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 그러한 운동이 부활할 수 있어야 주류 기독교 교회에 대한 비판이 기독교 내부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

 

1.
저자들은 “제3시대 그리스도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다. 기독교 사회운동이나 민중신학이 생소한 나 같은 입장에서는 다양한 사회운동의 이론과 교통하는 것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http://www.minjungtheology.net/

 

2.
내용은 흥미롭지만 책 자체에 대해서 말하자면, 실망스러운 점이 많다. 편집 상의 문제와 목사님들 특유의 만연체까지 겹쳐서 상당히 방만한 느낌이다. 저자들 간의 토론을 통해서 내용을 추리고 표현을 손봤다면 발간된 책 분량의 반 이하로도 충분히 내용을 소화할 수 있었을 것같다.(심하게 말하면 1/4;;) 오타와 비문도 많아서 읽는 중간 중간에 걸린다. 내용 구성에 있어서도 내가 주로 언급한 남한 주류 기독교 교회에 대한 비판과 같은 것에서부터 신학적인 비판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상당히 불균등한 느낌이다. 책 말미에 있는 대담도 본문의 내용, 심지어는 표현과 문장까지 반복한다는 점에서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어야했거나 지면 낭비였거나.

 

3.
종교와 정치의 문제. 최근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지역 노조들의 필수서비스 사유화 반대를 위한 토론에서 쟁점이 되었던 사항이 있다. 어떤 노조활동가가 물 사유화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정치적일 뿐 아니라 윤리적, 종교적인 논리를 활용해야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서 인도에서 온 활동가가 강력히 반발한 것. 종교적 논리를 사회운동에 활용하게 되면 곧 종교 근본주의도 용인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충돌하는 인도와 같은 경우에는 이것이 매우 첨예한 정치적 쟁점이 될 수 있겠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정교분리가 확고하지 않을뿐더러 종교 근본주의 간 충돌이 일어나는 사회에서 종교와 사회운동의 관계는 다른 조건에 처하게 된다. 이런 사회들에서는 정치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당분간은 “예의 바르게” 개조될 가능성이 별로 없는 종교들과 연합하기 보다는 정치(그리고 사회운동)를 세속화하는 것, 운동에서도 정교분리를 도입하는 것이 필수적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종교들이 자신들이 서로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더라도, 타자를 인정할 수 있는 예의, 혹은 시민윤리(시빌리떼)를 수용할 수 있는가이다. 그것이 불가능한 정세, 종교들이 처한 조건이라면 종교와의 결합은 위험할 수 있다. 그것은 79년 이란 혁명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에 의해서 좌익들이 몰살당한 이란에서의 경험까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샤라프의 붉은 사원 공격 이후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 공세가 확대되고 있는 파키스탄과 같은 지역의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에는 매우 현실적이고 절박한 문제이다.
 

(이슬람이든 기독교이든 종교 근본주의자들과 오히려 좌파가 투쟁해야하는 이유 등에 대해는 타리크 알리의 <근본주의의 충돌>과 같은 책이 도움이 된다. 타리크 알리는 시오니즘과 기독교 근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이슬람도 개혁되어야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럴 때에만 일상화된 극단적 폭력들을 제어하고 ‘정치’가 가능할 것이다.)
 

남한에서 사회운동이 진보적인 기독교 교회와 결합했던 경험이나, 남미에서의 가톨릭 해방신학과 민중운동의 결합은 이와 다른 조건에서 가능했던 것이지만 일반화될 수 없다. 그것들 역시 정세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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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속 5센티미터 (秒速 5センチメ-トル)


초속 5센티미터 (秒速 5センチメ-トル), 신카이 마코토 감독


초속5센티미터, 벗꽃이 떨어지는 속도. 하지만 그건, 30~40억년을 생각 속에 뛰어넘는 우리들에게도 어쩌면 어떨 때는 너무 빠른 혹은 느린 속도.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같은 작품으로 잘 알려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에 대해서 이 블로그에서도 포스팅한 적이 있다. http://blog.jinbo.net/rudnf/?pid=123)

나름대로 취향을 탈 것같은 이 작품은, 감독의 전작인 단편 애니 <별의 목소리>를 보고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라면 좋아할만하다.(그래서인지 개봉관도 많지 않다. 상암CGV까지 조조 상영에 맞춰 헐레벌떡 겨우 찾아가서 봤는데, 그나마 '인디상영관'에서 상영중.) 극장에서 <초속5센티미터>를 보더라도, <별의 목소리>는 꼭 미리 보아야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아래 링크를 따라가 보시길. 취향에 맞지 않는다면 영화에 대한 아래 나의 이야기는 아마 다 헛소리로 들릴 공산이 크다.
<별의 목소리>(ほしのこえ)보기

영화는, 초등학교 때만난 타카키와 아카리의 관계를 축으로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1부),  고등학교(2부), 어른이 된 시기(3부), 세 편의 이야기를 연결한다.
1부 : 벚꽃 무리
2부 : Cosmonaut(우주비행사)
3부 : 초속5센티미터

그러나 이 영화는 청소년기의 감정을 그린 것은 아니다. 주인공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너무나 어른스럽게 감정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청소년기라는 설정이 작품에 독특한 효과를 주기 위한 하나의 설정일 뿐, 영화는 시간과, 사랑, 그것의 엊갈림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말해준다.
 
감독은 자신이 이미 사용했던 익숙한 소재들을, 다른 공간에서 변주한다. 예를 들어 <별의 목소리>에서 문자메시지라는 소재. 영화들에서, 문자메시지는, 먼 별 어느 곳에서 시간을 지나 수광년을 떨어져서도 달려오거나, 혹은 가까이서 수천번을 보내도 1센티미터도 다가가지 못하거나, 버릇처럼 수신자없이 쓰여지고, 누군가는 그 수신자가 자신이길 바라고.. 그것은 도착하지 않은 편지, 혹은 보내지 않은 편지, 그리고 감정.

이 영화가 독특한 것은, 주인공인 타카키가 나와 같다고 느낄 뿐 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 인물들, 아카리, 혹은 카나에..들이 어느 장면들에선가 모두 나와 같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건 3부, '초속 5센티미터'에 어른이 된 타카키가 선 상황이.. 오래 찾아오던 것을 어느 새 모르게 놓쳤을 때,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나의 현재와 같다고 느껴서만은 아니다. (그래서는 다른 인물들의 모습 하나하나를 나와 같다고 느낀 것을 설명할 수는 없을 테니까.)
画像

그것은 살면서 누구나 어느 정도는, 어떤 때에는 누구에겐가 상처를 주기도 하고, 누구에겐가 어떤 때에는 상처를 입기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자신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혹은 그/녀는 그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시간은 어긋나고, 그래서 모두 그/녀들 모두는 나와 같은.., 
혹은
타카키처럼 우리 모두는 언젠가 어느 새, 오래 찾아오던 것이 무엇인지조차.. 잊거나 놓치게 되기 때문에. 그리고 또 어느 순간 갑자기 떠오르기 때문에.
항상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라고 이야기하더라도 너무 늦게.
 
영화의 주제가인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가 흐르는 때가 영화의 클라이막스. 영화와 잘 어울리는 이 노래가 나올 때, 당신도 나처럼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에게도 위안이 된다면,
벗꽃이 초속 5센티미터로 떨어지던 그 철도 건널목, 마지막 장면에서
타카키가 아카리를 다시 마주치지 못했다고 해도,
벗꽃이 떨어지는 속도가 초속 5센티미터라는 것을 아카리가 이야기하는 첫 순간부터 그 장면까지..
그것이 슬프더라도, 여전히
모두 아름답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

これ以上 何を失えば 心は許されるの
이 이상 뭘 잃어야 마음을 용서할 수 있을까
どれほどの痛みならば もう一度君に会える
어느정도의 고통이여야 다시 한번 널 만날 수 있을까

one more time 季節よ うつろわないで
one more time 계절아 변하지 말아줘
one more time ふざけあった時間よ
one more time 함께 즐겼던 시간아

食い違うときはいつも 僕が先に折れたね
일이 안 풀릴땐 언제나 내가 먼저 양보했었지
わがままな性格が なおさら愛しくさせた
제멋대로던 성격이 더욱 사랑스러웠어

one more chance 記憶に足を取られて
one more chance 기억에 다리를 잡혀서
one more chance 次の場所を選べない
one more chance 다음 장소를 고를 수 없어

いつでも探しているよ どっかに君の姿を
언제나 찾고 있어 어딘가 너의 모습을
向かいのホーム 路地裏の窓
맞은편 홈 골목길 창가

こんなとこにいるはずもないのに
이런 곳에 있을리가 없는데

願いがもしも叶うなら 今すぐ君のもとへ
소원이 혹시라도 이뤄진다면 지금 바로 네 곁으로
できないことはもう何もない
안되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어
全てかけて 抱きしめてみせるよ
모든걸 걸고 끌어안아줄거야

さみしさ紛らすだけなら 誰でもいいはずなのに
슬픔을 달랠 뿐이라면 누구라도 좋을텐데
星が落ちそうな夜だから 自分を偽れない
별이 떨어질 듯한 밤이니까 자신을 속이지 못해

one more time 季節よ うつろわないで
one more time 계절아 변하지 말아줘
one more time ふざけあった時間よ
one more time 함께 즐겼던 시간아

いつでも探しているよ どっかに君の姿を
언제나 찾고 있어 어딘가 너의 모습을
交差点でも 夢の中でも
교차점에서도 꿈 속에서도

こんなとこにいるはずもないのに
이런 곳에 있을리가 없는데

奇跡がもしも起こるなら 今すぐ君に見せたい
기적이 혹시라도 일어난다면 지금 바로 네게 보여주고 싶어
新しい朝 これからの僕
새로운 아침 앞으로의 나
言えなかった「好き」という 言葉も
말하지 못했던 "좋아해"란 말도

夏の思い出がまわる ふいに消えた鼓動
여름의 추억이 맴돌아 갑자기 사라진 고동

いつでも探しているよ どっかに君の姿を
언제나 찾고 있어 어딘가 너의 모습을
明け方の街 桜木町で
새벽녘 거리 벛꽃나무 마을에서
こんなとこに来るはずもないのに
이런 곳에 올리가 없는데

願いがもしも叶うなら 今すぐ君のもとへ
소원이 혹시라도 이뤄진다면 지금 바로 네 곁으로
できないことは もう何も無い
안되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어
全てかけて 抱きしめてみせるよ
모든걸 걸고 끌어안아줄거야

いつでも探しているよ どっかに君のかけらを
언제나 찾고 있어 어딘가 너의 조각을
旅先の店 新聞の隅
여행 안내소 신문 모퉁이

こんなとこにあるはずもないのに
이런 곳에 있을리가 없는데

奇跡がもしも起こるなら 今すぐ君に見せたい
기적이 혹시라도 일어난다면 지금 바로 네게 보여주고 싶어
新しい朝 これからの僕
새로운 아침 앞으로의 나
言えなかった「好き」という 言葉も
말하지 못한 "좋아해"란 말도

いつでも探してしまう どっかに君の笑顔を
언제나 찾게 되버려 어딘가 너의 미소를
急行待ちの 踏み切りあたり
급행열차 대기소 횡단보도 근처

こんなとこに いるはずもないのに
이런 곳에 있을리가 없는데

命が繰り返すならば 何度も君のもとへ
생이 반복된다면 몇번이고 네 곁으로
欲しいものなど もう何もない
바라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어
君のほかに大切なものなど
너 외에 소중한 것따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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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파프리카Paprika


파프리카 (Paprika, 2006) , 콘 사토시 감독

줄거리나 설정은 검색엔진에 찾아보면 나올 테니 생략.
다른 사람의 꿈에 개입해들어갈 수 있는 DC mini라는 기계가 만들어지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놀라운 설정과 상상력의 산물. 프로이트를 애니메이션에 초대해서 '노는' 셈인데, 흥미롭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1.

다른 사람의 꿈에 개입한다는 것은, 무의식에 들어간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것은 우리 세계에서는 정신분석가, 혹은 정신과의사들의 일일텐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들이 우리 무의식에 접속하거나 들어오는 과정은 항상 불충분하다. 그러니 직접 '접속'할 수 있는 기계를 상상할 만도 하다.

그렇지만, 영화에서처럼 직접 '접속'할 수 있다면 좋을까? 그것은 확신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정신분석이나 정신과치료의 과정에서, 피분석자 혹은 환자는 '이야기하기'를 통해서 자신을 인식하고 치유해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 직접 무의식을 투명하게 보고, 개입한다고 되는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의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저항'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중요할 때가 있다.)
게다가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것은 전이-역전이를 너무나 위험하게 만들 것같다.
 
2.

A dream you dream alone is only a dream, A dream you dream together is reality.
John Lennon의 부인인 Yoko Ono가 한 잘 알려진 말.

그런데 영화는, 함께 꾸는 꿈이 현실..이 되긴 하는데, 그런데,
그 꿈이 악몽이면 어쩌지? 라고 묻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하나의 거대한 집단적인 꿈을 꾼다. 그것은 온갖 상징들, 욕망들이 뒤엉켜 혼란스럽고 기괴한 모습이다. (위에 포스터에서, "This is your brain on anime."라는 말, 파프리카 안에 있는 이미지들이 그것들이다.)

집단이 혹은 대중이 함께 꾸는 꿈은, 그래서 현실이 될 가능성이 언제나 있지만, 그것은 항상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하나의 집단적인 꿈이 현실이 된다면 어떨까?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이 공유하는 이데올로기가 반역에 필수적이라고 믿는 우리가 집단적인 꿈을 모두 기각할 필요는 없다. 감독은 오히려 집단적인 꿈 자체를 의문에 부치는 느낌이지만 말이다.(그 위험성에 비추어 볼 때 그 경고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의식적인-지적인 요소와 결합하고 반성하지 않는, 날 것 자체의 무의식과 욕망은 현실이 될 때 끔찍할 수 있다.
 
3.

(꿈 공간의) 파프리카는 (현실 세계의) 아츠코 치바의 또 하나의 주체. 파프리카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있는 꿈의 세계에서 치바 대신 나타난다.

지나가는 대사이지만, 매우 인상적인 것이 있는데, 이 장면. (그림은 파프리카)
대사를 그대로 옮겨보자.


(치바) : 멋대로 앞서가지 마, 파프리카
(파프리카) : 항상 너만 옳은 건 아니잖아
..
(치바) : 왜 내 말을 안 듣는 거지? 파프리카는 내 분신이잖아
(파프리카) 아츠코(치바)가 내 분신이라는 발상은 못 하나봐?
(치바) : 내 말을 들어
(파프리카) : 모든 사람이 자기 멋대로 되리라는 생각은 어느 대머리 아저씨랑 똑같은 것 같은데?

(참고로, 여기서 '어느 대머리 아저씨'는 모든 사람의 꿈을 지배하려는 노인네를 지칭한다.)
의식-무의식의 경계에 있는 주체인 파프리카가 오히려 의식-주체인 치바에게 네 멋대로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주체로서 우리는 항상 무의식에 이런 저런 것을 강제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무의식이 항변한다.. 그럴 때 신경증이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나나 다른 사람들도 그것 때문에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장면.
파프리카는, 치바의 말처럼 '멋대로 앞서'간다. 주체가 어쩔 수 없이..


정신분석책에나 나올 개념들을, 스토리로 구성해서 영상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후반부에는 이야기를 수습하는 데 약간 무리하는 것같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상상력과 사고력을 자극하는 흥미진진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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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여행자의 로망 백서


여행자의 로망 백서
박사.이명석 지음 / 북하우스


"
그러나, 갸날픈 인간이여, 살아남은 우리는 그 모든 상황을 '로맨틱'이라는 한 단어로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117쪽, 폭풍의 로망
"
 
노골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가진 것이 '로맨틱' 한 단어일 뿐라도, 로망이 있(었)다면 성공.
여행자가 꿈꾸게 되는 자질구레하고 잡다한, 그러나 당장이라도 짐을 싸고 싶게 만드는 로망들의 컬랙션. 손에 잡는 순간부터 내내 내 안에 있는(나 한테 그게 있기나 했었나?ㅎ) 방랑벽을 깨우는, 상상력으로 놀라운 책.
 
커피 한잔의 로망, 동물친구의 로망, 쇼핑의 로망, 이방인의 로망, 도장 꽝의 로망, 낯익은 문자의 로망, 길거리 낙서의 로망, 변장 여행객의 로망.. 그리고 시간여행객의 로망까지(오, 이건, 시간을 달리는 소녀.^^;;). 여행에서 경험해 보았거나 이야기 속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부터, 글쓴이들의 왕성한 상상력의 산물인 로망까지, 아, 정말 여행을 꿈꾸게 한다.
 
하나 하나 글 하나 하나와 함께 상상하면서 여행에 안달나게 만드는 책이지만, 덕분에 여행을 더 풍성하게 즐길 수 있을 듯. 또 여행에서 (어쩌면 다 똑같아 보일지도 모르는 미술관-박물관 틈에서) 더 많은, 생각치 못했던 것들을 보고 발견할 수 있을 듯.(사실 길거리 낙서의 로망같은 건, 느낄 줄 모른다면 어느 여행설명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을 머리 속에 담아두게 만들고, 그래서 여행의 정신없는 순간 속에서 더 많은 것들을 상상력 넘치게 풍성하게 느낄 수 있도록 나의 상상력도 자극하는 책이다. 상상력이 놀랍다.
 
나도 미처 몰랐던 나의 어떤 로망을 여행에서 더 발견할 수 있겠지. 나의 어떤 로망.
글쓴이들이 제시해준, 상상하고 느끼는 방법 덕분에 더 많은 것들을. Tha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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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반자본주의


反자본주의
사이먼 토미 지음, 정해영 옮김 / 유토피아


반자본주의라는 제목의, 다소 초정세적인 자본주의 반대운동을 다룰 것같은 이 책은 그러나 최근의 정세에서 반자본주의라는 정치적 지향이 가지는 의미를 소개한다. 20세기 후반부터 다시 활성화된 반자본주의 정치적 실천들을 개괄한다. 초보자를 위한 안내서라고 하지만, 정작 정세에 둔감한 고참 활동가들에게도 매우매우 유용한 책이다.

이 책은 현재의 반자본주의는 반신자유주의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보다 내용을 정확히 반영하는 책의 제목은 '반신자유주의'일 수도 있다.) 이 점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대중운동은 이전 시기의 반자본주의 운동으로서 좌파 운동을 한편으로는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특징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운동들에, 하나의 새로운 경향들이 활성화된다.

저자는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신자유주의가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는 데서 시작한다. 특히 두 가지 관점이 눈에 띄는데, 하나는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내에서 모순으로 작동하던 하나의 경향-시장의 절대적 우위를 관철하려는 시도라는 관점.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 내부의 모순의 작동으로 제기하는 셈이다. 또 하나는, 신자유주의가 정치의 종말(혹은 후쿠야마식으로 역사의 종말)을 주장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은 곧이어, 신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정치 양식이 출현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정치'에 대해서 사고할 수 있게 해준다.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시애틀 전투로부터 눈에 띄게 전면화된 반자본주의/반세계화운동에서 사파티스타, 세계사회포럼으로 이어지는 운동의 출현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 이 운동들 속에 어떠한 경향이 있는지, 그 지형을 보여준다.

그것을 크게 개혁주의-근본주의로 나누고 그 아래의 여러 경향을 소개한다. 개혁주의 진영에는 이 운동 스팩트럼의 가장 오른쪽에 있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자유주의적 개입주의, 미국에서는 민주당식의 국제주의=개입주의니까.)에서부터 '민족주의적 국제주의'로서의 사민주의, 전지구적 사민주의 등이 소개된다. 근본주의에는 구좌파적 마르크스주의에서부터 자율주의, 평의회 공산주의, '비-정통'급진주의 조류들, 아나키즘, 급진적 환경주의 등이 소개된다.

다만 이 과정에서 다소 거친 분석은 이러한 분류기준을 횡단하는 사고와 입장들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점이 단점이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 좌파들이 모두 당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대안세계화라는 논리를 저자는 초국적 시민권+세계정부라는 구도의 지구적 사민주의의 것으로 설명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사민주의와 무관하게(그러나 초민족적 시민권에 대해서는 긍정할 것이지만)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대안을 세계화하는 국제주의적인 근본주의 운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2003년에 나온 이 책에 붙인 2007년, 한국어판 후기에서는 일관되게 '대안세계화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지구적 시민성'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언급한다.)

별도로 강조되는 것은 사파티스타. 사파티스타는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가 나타났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열광한다.) 저자는 사파티즘가 탈이데올로기 정치를 구현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어떤 거대담론을 운동의 지침으로 삼는다기 보다는 대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특히 이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제도들이 약속해왔지만 언제나 배신해왔던 대중의 실질적인 정치참여를 가능하게 하고 '자유민주주의'와 다른 판본의-그러나 더 민주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한다. (이 점은 '소수자'-정치의 논리와도 이어진다. 이 개념에 대해서는 아래  문단 참고. 그러나 저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제도화를 배제하는 것이 능사는 아닌데, 제도화없이는 오히려 목소리 큰 일부가 득세하는 등 비민주적인 상황이 초래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재의 반자본주의/반세계화 운동을 "운동들의 운동"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포괄하는 범위가 매우 넓으며 통일적인 이데올로기-강령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다양한 운동들이 만나고 상호 작용하면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존재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운동을 밀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 좌파 운동과 다르게 현재의 반자본부의/반세계화운동이 당적 구조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점, 각각의 운동을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단일한 정치 프로그램에 종속시키는 것을 거부한다는 특징으로 이어진다. (물론 모두가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운동의 단층선이 발생하는데, 저자는 다소 거칠게 이것을 ['다수자'-정치]의 논리, ['소수자'-정치]의 논리로 구분한다.)

정치의 위기와 새로운 정치의 부활에 대한 지적은 눈여겨볼만하다. 저자는 각국에서 제도정치가 위기에 처하는 상황을 분석하면서 이는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라고 지적한다.(월러스틴의 지적과 통하는 부분일 텐데, 여기서 저자는 새로운 대항정치로 더 나간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신의 승리라고 간주했던 이데올로기의 위기와 관련이 있다. 68년 이후, 그리고 구 사회주의권이 붕괴 이후 저항정치의 공백 속에서 대중들은 새로운 정치─능동적인 직접행동을 중심으로하는─을 재발견한다.
 
이런 지점들 요약해서 저자는 한국어판 후기(2007)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용해보자.
"새로이 거듭난 반자본주의 운동이란, 목소리와 현전의 정치이자 대화와 소통의 정치이고, 저마다의 꿈을 나누며 구체화하는 정치인 셈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낡은 간판을 달고 있지만 전에 없이 새로운 유형의 정치를 펼치고 있다. 말하자면 대표와 엘리트들의 민주주의가 아닌, 다채로운 무늬를 지닌 민중들의 민주의의다."

이렇게 '성장중인' 반자본주의/반세계화 운동은 성공할 수 있을까? 혹은 몇번의 시위 이외에는 너무 힘이 미약할 뿐인 것은 아닌가? 저자는 전자의 질문에는 답변할 수 없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한다. 이미 신자유주의와 함께 역사가 끝났다는 주장, '대안은 없다'는 주장들이 이 운동의 과정에서 시효만료되었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도 몰락 중이다. 더 많은 변화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

* 그런데 이 책의 말미에 왜 이재영(민주노동당 전 정책실장)씨의 글("자본주의를 넘어서-한국에서의 도전")이 실렸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재영의 글은 결론이 없는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기껏해야 현재 민주노동당의 좌충우돌과 혼란을 변명하는 논리가 될 뿐이다.
 어찌보면 <反자본주의>의 저자인 사이먼 토미도 결론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 아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 반대 속에서 대안세계화운동으로 성장한 반자본주의 운동의 고유한 양식-성격과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지적한다. 그것은 논쟁도, 운동의 새로운 양식-성격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민주노동당 내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추상수준의 문제인 것이다. 한국에서의 반자본주의, 대안세계화운동은 민주노동당을 골백번을 들여다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을 대상으로 한 글이 그런 제목을 달고 들어가다니 참.
이재영의 글은 레디앙에도 실려있다. :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5923
 
* 글을 쓰고 나서 보니, 독일에서 아셈과 G8회의에 반대하는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이 참세상 블로그에 올라왔다. 책의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매일매일, 어느곳에서나, 세상이 예전과는 다르게 돌아가는 흐름이 지하에서부터 움직인다.
 [속보] 함부르크 아셈 반대! G8반대! 6000명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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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소금꽃나무,김진숙


소금꽃나무
김진숙 지음 / 후마니타스

 

 

이 책을 읽으시려는 분들은, 전철이나 도서관같은 곳에서는.. 읽지마세요, 낱말 하나하나에 가슴 울먹이다가, 어느 구절에선가 갑자기 울음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나오니까요.

 

 

김진숙의 글들.

하지만 김진숙은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다. 그의 글은 투쟁사든, 강연이든, 교육이든, 추도사든 그녀의 '말'의 흔적이다. 말은, 보통 하나의 순간에 명멸하지만, 그것이 가진 무게와 진실에 따라서는 순간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그리 두껍지는 않지만 낱말하나 문장하나의 무게 때문에 쉬이 읽어나갈 수 없고, 눈물과 반성 때문에 며칠을 걸려 읽어야하는 책.

 

노조가 주최하는 이런저런 교육에 조금 다녀본 사람이라면, 열사 투쟁에, 적어도 열사가 마지막 가는 길에는 함께 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 속에서 익숙한 내용의 글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장소들에게 김진숙을 만났다. 노조 간부들, 비정규직 노동자 교육들에서, 김주익, 배달호 열사의 추모식에서 만났다. 어떤 때에는 정신을 빼앗겨서 그녀의 삶과 투쟁에 대한 두시간 가까운 강연을 듣기도 했고, 열사들의 추모식에서는 정말 펑펑 울어버렸다. 창원시청 앞 광장에서 배달호 열사의 추모식이 있을 때, 한진중공업 횡횡한 도크위에서 김주익, 곽재규 열사의 추모식에서.

 

우리 노동자운동은 87년 이후, 자신의 가능성을 발전시키기보다는 90년대를 거치면서 오히려 자신의 한계 속에만 갇혀왔다. 그래서 87년을 말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전투적 투쟁을 회고하지만 과연 그 속에서 우리가 길어올려야할 진실이 무엇인지를 성찰한다기 보다는 '잘나가던 그때'를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김진숙의 글이 하나 하나 영혼에 울리는 것은, 그녀가 우리의 현재에 대해서, '잘 나가던'(혹은 지금도 잘나가고 있다고 믿는) 노동운동이 굳이 외면하거나 침묵하려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87년의 진실이 그 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김진숙은 부산지하철 매표소 비정규직노동자의 단식 투쟁에서 조수원 열사를 기억한다 .배달호 열사의 추모식에서 청소용역 비정규직노동자가 될 지 모르는 부인 황길영 동지를, 유통매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할지 모르는 두 딸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보수세력에 탄압당지만 꿋꿋하게 싸우는 전교조 선생님들의 투쟁을 소중히 말하면서도, 그들이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을 돌아볼 것을, 화룡점정할 것을 나즈막한 목소리로 주문한다.

 

이런 점들이 아니라도 책을 읽다보면, 왜 김진숙의 말이 낱말 하나하나에 가슴 울먹이게 하고, 어떤 구절에서 갑자기 눈물을 쏟게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깊은 상처를 건너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중학생 딸이 새벽신문배달로 사온 털신을 고이 간직한 어미니를 기억하는 사람, 돌아가실 때까지 '복직했냐'를 묻던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조카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사람.

   

그래서 마치, 남한의 노둥운동이 경제주의와 합의주의에 빠져서 희망은 이제 없어진 것이 아닌가 몇번이고 돌아보게 되는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침묵하거나 스쳐 지나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김진숙의 글에 영혼이 울리는 당신들이 있다면, 여전히 노동자들의 눈물의 역사는 계속된다. 그것은 끝나지 않았다.

 

"20년 가까이 초지일관 불굴의 신념만으로 버텼겠습니까? 그 폭력 앞에서 한 없이 비굴해지던, 살려만 준다면 글마들 발톱의 때라도 햝을 만큼 비굴해지던 스물여섯의 제 모습이 떠오르면 지금도 스름 끼칩니다.

오히려 그런 모습들 때문에 용기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용기야말로 얼마나 찬란한 자유인지, 뼈가 저리지요.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지지 않는 것, 그것만큼 소중한 게 또 있을까요" 239쪽

 

=====

배달호 열사의 추모제와 눈물들이, 배달호 열사 추모곡인 "호루라기 사나이"가 떠오른다.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곳(배달호 열사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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