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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준비하면서 잡다하게 챙겨읽고 있는, 여행에 대한 책들 중 한권. 하지만 가장 독특한 책이라고 할 만하다. 여행을 ‘낮선 곳에서 사진을 찍고 오는 행위’가 아닐 수 있게, 여행과 그 속에서 만나는 것들에 여행자가 스스로 의미들을 부여할 수 있도록 사고하게 하는 책.
글쓴이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다양한 장소들, 다양한 측면들.. 낯선 장소를 만나고 보고 느끼고 인식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보들레르나 위즈워스, 고흐와 같은 예술가들의 말을 경유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영국 숲의 덤불속에 어떤 생명에게서 나와 같은 시간대에 같은 행성을 살고 있다는 동류감을 떠올린다. 호퍼의 그림을 통해서, ‘외로움’과는 또 다른 ‘공동의 고립감’에 빠진다. 시나이의 사막에서 신이 빚은 위대한 창조 앞에서, 숭고한 장소들은 부드럽게 우리를 다독여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는 것을 느낀다.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화가들의 작업이란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화가가 보여주고 싶은 현실의 귀중한 특질들을 담아내는 것이라는 점을, 고흐를 통해서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마주치는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해서도.
보통이 말하는 모든 곳에 가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나도 실험해보고 싶어진다. (다행히 보통이 언급한 몇 군데는 앞으로 다녀오려고 하는 장기간의 여행 예정지 목록에 들어있다.)
특히 러스킨을 통해서 말하는 이 부분은 인용해볼만 하다.
러스킨은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한 관심을 통해 다섯 가지 중심적 결론에 도달했다.
첫째, 아름다움은 심리적인 동시에 시각적으로 정신에 영향을 주는 수 많은 복잡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다.
둘째,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타고난 경향이 있다.
셋째, 이런 소유에 대한 욕망에는 저급한 표현들이 많다. (앞서 보았듯이, 기념품이나 양탄자를 산다거나, 자기 이름을 기둥에 새긴다거나, 사진을 찍는 행위를 포함해서)
넷째,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심리적이고 시각적인)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이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대해 쓰거나 그림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하여 아름다운 장소를 묘사하는 것이다. (문단나누기와 강조는 나)
여행에서 마주친 대상들에 대해서 데생을 하거나, ‘말그림’을 그려보는 방식으로 우리도 러스킨이 말한 것처럼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다.(그것은 러스킨의 언급처럼 기념품이나 사진으로 이루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렇게, 여행을 위한 영혼의 준비를 얼추 갖추었다면(아, 그리고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 노트도), 우리는 보들레르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 이제 떠나야할 시간이다. (아, 아직도 준비가 너무 부족한데, 이 곳의 눈물은 이미 너무 많구나!)
열차야, 나를 너와 함께 데려가다오! 배야, 나를 여기서 몰래 빼내다오!
나를 멀리, 데려가다오, 이 곳의 진흙은 우리의 눈물로 만들어졌구나!
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슬럼이 도시의 미래라고 말하는 이 책은, 단지 도시가 아니라 세계인구의 생존조건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신자유주의와 직결되는 문제라는 점을 말한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이 책은 어쩌면 슬럼에 대한 책이라고 보기 힘들다. 신자유주의가 세계의 민중들에게 어떤 것인지를 도시를 중심으로 말하고 있다고나 할까. 세계최대의 슬럼철거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 88올림픽을 위한 72만명 철거가 있었던 나라, 그리고 슬럼철거-재개발이 도시 내부의 극단적 분리와 함께 진행되는 나라인 남한에서도 매우 시사적인 책이다.
한편 이 책은 사센의 <경제의 세계화와 도시의 위기>의 진정한, 그리고 발전된 후속편이라 할만하다. 사센의 책은 금융세계화가 어떻게 초민족적 금융도시를 형성하는가를 보여주었다면 이 책은 그 이면에서 무엇이 벌어지는 지를 말한다. 한편에서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걸맞는 금융화된 세계도시가 발전하고, 그 이면에는 세계 전역에서 슬럼이 ‘폭발’한다.(확장 혹은 팽창이라는 낱말의 어감으로는 부적합할 정도로)
도시의 기괴한 팽창
도시는 급격하게 팽창하고 있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속도도 가속화되고 있다. 이미 세계인구의 절반은 도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2025년까지 세계인구가 100억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할 때 새로 증가하는 인구의 95%는 도시에 거주할 것이다. 이미 세계에는 2000만명 이상의 도시(지대)가 도쿄, 멕시코시티, 뉴욕, 서울(수도권 포함)에 형성되어 있다. 이 숫자는 아시아에서만 10여개 이상이 될 것이다. 아마도 도쿄-(서울)-상하이로 연결되는 동아시아 해안의 세계도시가 회랑형태로 연결될 것이다. 도시화는 기존 도시 자체의 확장만이 아니라 시골의 도시화를 동시에 의미한다.
이렇게 도시는 역사상 최대로 기괴하게 팽창하고 있다. 왜 그런가, 특히 주변과 반주변의 각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팽창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인가가 이 책이 묻고 답하고 있는 것들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저자는 도시의 문제가 바로 신자유주의의 문제라고 말하는 중이다.
도시의 미래는 슬럼
도시화는 산업화 때문일까? 이러한 고전적인 설명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주변-반주변에서 도시의 급격한 팽창은 중국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뭄바이, 요하네스버그, 부에노스아이레스, 상파울루 등은 산업화와 완전히 무관하게(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속에서 산업은 오히려 축소되는 중이다), 심지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경우 농업생산이 후퇴하는 데도 도시는 급격하게 팽창을 거듭한다. (사진은 뭄바이의 슬럼)
도시의 기괴한 팽창은 70년대 이후 외채위기와 80년대 이후 IMF가 주도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이다.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주변-반주변의 농업을 몰락시켰고 농촌은 공공서비스의 축소(의료지원과 같은)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에 따라 농촌에서 더 이상 살수 없는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든다. 이들이 도시에서 살수 있는 곳은 다양한 형태의, 그러나 한결같이 끔찍한 조건의 슬럼지대이다.
이런 방식으로, 대부분의 주변-반주변 국가에서 도시의 팽창은 곧 슬럼의 팽창과 정확히 동일한 말이 된다. 슬럼거주자는 선진국에서는 6%, 저개발국가에서는 78.2%에 달한다. 에티오피아와 차드에서는 99.4%의 도시인구가, 아프카니스탄에서는 98.5%가 슬럼에 살고 있다. 슬럼이 바로 도시 자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듯 미래의 도시는 이전 세대 도시계획 전문가들이 상상한 것처럼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도시가 아니라, 손으로 찍어낸 벽돌, 지푸라기, 재활용 플라스틱, 시멘트 덩어리, 나뭇조각 등으로 지어진 도시다. 21세기의 도시 세계는 하늘을 찌를 듯 빛나는 도시가 아니라, 공해와 배설물과 부패로 둘러쌓여 덕지덕지 들러붙은 슬럼도시일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슬럼에 설고 있는 10억 주민은 9000년 전 도시 생활의 여명기에 세워진 아나톨리아 정착촌 차탈회위크의 튼튼한 진흙집 잔해를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돌아볼 것이다."(이 책,33쪽)
슬럼 착취하기
시애틀과 아바나 시민의 1인당 소득격차는 739:1이다. 콜카타에서는 방 하나에 평균 13.4명이 살고 있다. 주거환경의 열악함은 물론이지만 나이로비의 경우 도시 외곽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월 수입의 반 이상을 출근을 위한 교통비에 사용해야한다. 인구 1000만의 킨샤사는 하수(그리고 분뇨)처리 시설이 “전혀”없다. 베이징에 주로 농민공(비정규직노동자)이 거주하는 슬럼에서는 6000명의 주민이 하나의 화장실을 사용한다.
(한편, 케냐의 나이로비는 세계사회포럼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슬럼주민들의 목소리는 상업화되기까지한 세계사회포럼에도 충격을 주었다. 아래 사진은 나이로비의 슬럼. 출처:프레시안/엄기호/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인용)
이렇게 빈곤한 슬럼에 대해서도 착취할 무엇이 있을까? 물론.
빈민들이 스쿼팅(squatting, 무허가 토지개척)한 토지는 주기적으로 재개발되면서 개발업자가 이윤을 취한다. 슬럼이 유지되더라도 경찰이나 관료들에게 돈을 상납해야한다.(비싼 유료화장실을 개설하기도 한다.) 세계은행WB의 기만적인 '빈민자조주택‘ 프로그램은 어떨까?
마닐라, 뭄바이 같은 곳에서 이 사업은 “오직” 빈민을 축출하고 개발업자를 배불렸을 뿐이다. 심지어 ’변기설치사업‘같은 경우에도 관리가 되지 않아 오히려 오수가 역류하고 전염병을 불렀을 정도다. 빈민을 위한다는 재개발 사업은, (남한에서도 정확히 같은 방식이지만) 중산층에서 주택을 공급할 뿐, 빈민들에게는 철거와 추방을 의미할 뿐이다.
특히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필수서비스의 사유화는 슬럼의 문제를 더욱 극단적으로 만든다. 사유화와 슬럼문제는 직접 연결된다. 특히 치열한 쟁점으로 부각되어 있는 물-상수도 사유화는 의료서비스의 사유화와 함께 가장 심각하다. 세계은행의 압력에 따라 상수도를 바이워커에 넘긴 다르에스살람에서는 수도 가격의 폭등으로 주민들은 위험한 수원을 이용해야한다. 그 결과 콜레라, 티푸스와 같은 수인성 전염병에 직접 노출된다. 열악한 위생환경은 기생충, 말라리아, 뎅기열 등을 발생시키지만 아무도 치료해주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은 여성에게 가족의 생존을 위한 모든 부담을 전가한다. IMF SAPs는 “가족의 생존이라는 문제에 직면한 여성의 노동력을 거의 무한대로 잡아늘일 수 있다는 믿음을 냉혹하게 활용하는 체제이다.” 여성들은 노동시장에서 장시간 노동은 물론 구걸, 매춘에 내몰린다. (이것은 “AIDS 대학살”의 원인이기도 하다.) IMF SAPs가 끝난 남한에서조차 여성일자리 정책과 같은 것들을 보면 이런 기대가 경제관료들의 상식인 것같다.
세계은행의 정책이 또 혜택을 준 집단이 있으니 개발업자들과 이들과 결탁한 관료, 독재자 외에 국제NGO들이다. 이들은 “지역사회 리더쉽을 전용하고 이제까지 좌파가 차지했던 사회공간을 패권화하는 데 있어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물론 세계은행은 자신들의 사업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NGO들을 활용한다.
심지어 이들은 “자활”, “자조”라는 명분하에 슬럼에 “자본주의적인 경제”를 도입하고자한다. 슬럼주민들에게 주택증서(등기)를 주자, 그렇다면 그들은 재산가가 될 것이다. 그리고 비공식경제를 기업형태로 조직하자, 그러면 곧 사업가가 출현하고 재산가와 만나서 일자리를 만들 것이다.. 이런 식의 사기극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대 인상으로 빈민들을 ‘새로운’ 슬럼으로 밀어낼 뿐이다.
국가의 해결책 : 철거
국가의 전형적인 해결책은 철거.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국제행사가 있을 때에는 더 심해지는 데 88 올림픽 당시 서울수도권에서 대규모로 벌어진 철거는 지금 베이징에서 잔인하게 반복되는 중이다.
특히 도시가 팽창하면서 새롭게 중산층을 위한 교외주택을 건설하기에 입지가 좋은 곳이나, 퇴락한 도심지역은 재개발의 대상이다. (서울에서도 뉴타운 건설을 위한 강북지역의 철거, 청계천 재개발과 도심재개발을 위한 철거가 극심하다.) 별다른 대책도 없이, 불도저와 경찰, 군인을 동원해서 “밀어버리는 것”이 끝이다. (역시 남한에서도 같은 방식이다.) 이렇게 한번에 수십만명의 주거지를 철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비공식부문 ;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도시를 미숙련, 무방비, 저임금의 비공식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잉여인간의 처리장으로 만들었다. 농토없는 농민들의 半프롤레타리아화와 유사한 수동적 프롤레타리아화. 법적으로 권리와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등장.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는 극단적이어서 새로 생기는 일자리의 90%는 이러한 비공식부문이다. 불완전고용과 실업, 식료품노점, 식당, 이발소, 소규모 물물교환.. 같은 것들이다. 국제금융기구와 신자유주의NGO들은 이들에게 “기업가정신”과 “자활”을 요구한다. (어디 안드로메다의 어느 별 같은 곳에서 왔나부지?) 그러나 그것이 성공할리는 없으며, 다만 정치적 수사들일 뿐이다.
한편, 이러한 대중들을 보자면, 전통적으로 사업장에서의 노-사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노동자운동의 절대적인 모델로 사고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 남한의 좌파들(현장파들)이 사업장(현장)의 노사관계로 제한되는 (전투적) 경제투쟁을 물신화하고 그것이 노동자 운동의 순수한 형태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도 말해준다. 노동자계급은 사회학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 구성되어야하는데, 그것은 안정적인 임단협이 가능한 사업장 노사관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구성되어야한다.(그런 점에서 남한 운동에서 '비공식노동자'란 아예 인식되지도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 하긴 '비정규직노동자'라는 것이 인식된 것조차 몇년 안되니.)
가진 자들의 요새 도시와 새로운 중세
이와 동시에 벌어지는 일이 부유층의 요새화된 교외도시를 건설하는 작업이다. 이들은 캘리포니아식 생활양식을 모방하고자한다. 카이로 외곽에도 “비버리힐즈”가 있고 베이징 외곽에는 “롱비치”가 있으며 홍콩에는 “팜스프링스”가 있다.(남한에는 “타워팰리스”가 있다.)
이들 지역은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되고 24시간 사설경비가 이루어지고 개인 수영장과 폐쇄된 지역주민을 위한 헬스클럽, 쇼핑몰, 병원, 고급식당 등이 위치한다. (강남의 주상복합 건물들과 이렇게 같을 수가!) 이들은 경비를 갖추고 외부의 침입을 막는 ‘요새’를 만드는데, 강박증 증세를 보인다. 가난한자들에 대한 공포라고나 할까.
이러한 분리는 초민족적인 금융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주변-반주변의 엘리트들이 ‘안전하게’ 도시의 주민들과 분리되도록 한다. 이들이 생존하는 공간은 슬럼이 넘치는 현실의 도시라기보다는 뉴욕-런던과 연결된 금융네트워크이다. 이들이 투자하는 곳은 같은 도시 주민들의 일자리가 아니라 미국의 헤지펀드다. 그러니 더러운 도시빈민들과 분리되더라도,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이러한 분리는 도시의 장벽을 건설하고, “새로운 중세”를 불러온다.
콩고의 칸샤사. 이곳에서는 상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실상의 중세가 도래했다. 국가의 유일한 자금원인 광산산업은 세계은행이 부추긴 외채(이 돈은 독재자가 스위스은행에 빼돌린지 오래다)를 이유로 외국에 넘어갔다. IMF는 SAPs를 통해서 공기업매각, 공무원해고 등으로 공공서비스를 완전히 파괴하면서 이자까지 악날하게 모두 가져갔다. 공식경제는 물론 국가제도 마저도 억압장치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붕괴한 이 곳에 600만명이 살고 있다. 화폐는 전혀 무용하다. 연평균소득 100달러 이하(1년간 버는 돈이 우리 돈으로 10만원도 안 된다는 말이다.), 인구의 2/3가 영양실조. 이곳에서는 중세적인 미신이 창궐한다.
절망에 빠진 도시 주민들은 90년대 초 다단계 열풍에 휩싸였고 이것은 91년, 93년 붕괴한다. 이제 IMF와 세계은행도 콩고에서 철수한다. 이제 그들조차 더 이상 착취할 것이 남이있지 않게되었기 때문이다. 노동세계가 붕괴하고 도박이라는 환상마저 붕괴하자 남은 것은 주술과 예언종교. 오순절파 교회가 엄청나게 확대되면서 주술 서비스를 제공한다. 절대빈곤 속에서 선물경제, 호혜교환도 모두 붕괴하고 미신만 남았다. 이들은 추천명의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마녀사냥을 하는데, 아이가 마녀로 지목될 경우 부모는 아이를 유기해도 되기 때문에 그렇게 ‘처리’된다.
새로운 전쟁
슬럼으로 가득한 제3세계 도시의 청년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전의 병사, 범죄조직, 국제테러조직까지 갖가지 형태를 취한다.(그래서 저자는 네그리의 ‘리좀’과 ‘다중’이 이것이냐고 묻는다. 다소 조롱기로.) 그래서 역설적으로 도시의 미래에 대해서 가장 투명하게 통찰하는 것은 미국의 펜타곤이다. 공군아카데미, 랜드연구소 등등. 이들은 미래 전쟁을 예상하면서 "도시화지형에서의 군사작전"MOUT이라는 것을 발전시키고 전술을 혁신한다. 21세기의 전쟁은 바로 이러한 슬럼에서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제3세계에서 미국이 마주칠 것은 반란자들의 도시 해방구이자 범죄의 소굴, 이들은 모두 ‘테러와 범죄집단’으로 규정된다.
(이와 관련해서 주변-반주변만이 아니라 중심부 국가에서 벌어지는 내부적 배제에 대해서는 최근 읽고 있는 <공존의 기술-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을 참고할 수 있을 것같다. 이 책은 다 읽으면 리뷰.)
따라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만드는 미래의 지구를 예상하고자한다면, 어떤 책보다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다소 장황한 인용과 소개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직접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슬럼은 도시의 미래일 뿐 아니라 지구의 미래이기도 하다. 그곳에서의 모든 정치적 쟁점들은 이 문제들을 우회할 수 없다.
문화대혁명 - 중국 현대사의 트라우마
백승욱 지음 / 살림
문화대혁명의 과정과 쟁점들에 관한 책. 얇은 책이지만, 흥미진진하다. 핵심적인 내용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책에도 언급되고 있지만, 모리스 마이스너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를 함께 보면 도움이 된다.(전반적인 과정에 대한 서술은 두 책이 보완적이다. 백승욱 선생의 이 책은 문혁의 '혁명적 주체'들인 조반파 내부의 지형과 운동에 대해서 더 자세히 언급한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문혁이 남긴 쟁점들은 정리해서 제시한다.
당장 현재적으로, 문혁의 기억은 자본주의적 모순이 첨예하게 부활하는 중국에서, 노동자들의 저항 속에서 불현듯 출현하고, 따라서 운동을 과잉-과소결정한다.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서 문혁 과정에서 제기된 쟁점들, 문혁이 남긴 쟁점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사고를--그리고 정치적 시도/실험들을-- 멈추지 말 것'을 요구한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로 후퇴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왜? 당내의 주자파(走資派) 때문에? 혹은 상부구조 변혁의 지체 때문에? 그렇다면 토대가 문제? 그럼 토대는 무엇인가? 이데올로기는 상부구조인가?라는 문제들. 그리고 자본주의 세계체계 속에서 민족국가 단위의 사회주의 체제가 부딪히는 곤란, 당을 관통한 문혁, 그리고 당이라는 쟁점, 대중과 당의 관계라는 쟁점. 그리고 대중의 급진적 진출과정에서 '대중의 공포'라는 쟁점.
하나하나가 단행본 책으로 나와도 모자를 매우 중요한 쟁점들이다. 이런 각각의 쟁점들을 문혁을 통해서 어떻게 사고할 수 있는지 저자가 알려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득하게 하는 책이다. 그런 연구가 있기 전까지 당분간은 몇몇 다른 이론들을 우회할 수밖에 없겠지만. (여튼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를 다시 보는 것은 도움이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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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된 "문혁16조"(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1966.8.8)는 문혁의 핵심지침이 되는 기본문건이다. 마오쩌뚱 지시로 천보다, 왕리 등이 초고를 작성한 후 수차례 수정을 거쳐 통과된다.
지금 읽어보아도 "문혁16조"에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다시 "혁명"을 하자는 요구가 담겨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내용에 대한 이론적, 역사적 평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이미 국가권력을 장악한 공산주의자들이 그것을 다시 혁명하자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야한다. 국가권력은 커녕 대중운동조직의 집행기구를 '개혁'하지도 못하고, 권력근처에조차 가보지 못했으면서도 '개혁'적 요구에도 주춤거리는 우리 운동들을 현재를 비추어보면 더욱 그렇다.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김진호.최형묵.백찬홍 지음 / 평사리
[먼저 이들의 무사기환을 기원하면서 말하자면] 아프카니스탄에서 한국인들이 탈레반에 인질로 잡힌 후, 이 사건과 관련해서 기독교의 ‘해외선교’활동을 돌아봐야한다는 지적이 있다. (한겨레 신문 기사 등 ; ‘한국=기독교 선교’ 인식 탓 피해 가능성) 이번에 납치된 한국인들의 경우에 직접적인 '해외선교‘ 활동은 아닌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사건 전 교회의 입장등을 통해서 볼 때) 애초의 취지가 그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분당샘물교회 박은조 목사는 뉴라이트 계열의 기독교 우익 NGO인 '기독교사회책임'의 공동대표이기도 한데 그 연관성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남한 교회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해외에 파견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번 사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미국의 아프카니스탄 침공과 이에 함께한 남한 정부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은 확인하고 가자. 이 글은 사태의 본질을 흐리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고와 비판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도. 그러나 이 전쟁의 한 측면이 근본주의 간의 충돌이라는 점, 그것들이 정치가 불가능지는 정세를 폭력을 통해서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을 모방하는 남한의 기독교 근본주의의 공격적인 '해외선교' 역시도 문제의 일부라는 점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비록 정세적 고려 속에서 부차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입장은 다소 위험하게도 두 가지 모두와 쟁점을 형성할 수 있다. 기독교가 전적으로 문제라는 입장--포탈사이트 덧글에 만연한, 역시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입장이며 종교적 비관용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것--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면서도, 그것은 전혀 다루질 필요가 없다는 입장--예를 들어 "리장"님의 이 포스트--으로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공격적인 ‘해외선교’ 활동에 나서는 이유는 국내 교회 성장세의 둔화 등에서 가지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진단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쉽게 이해하기는 힘든 일이다. 종교기관이 (마치 자본과 같이) 무한이 증식하기 위해서 투자를 확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남한 기독교 교회가 성장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남한 교회가 내재화한 이데올로기, 반공발전주의와 관계되어 있다. 기독교 교회는 반공발전주의 국가에 적합하게 조직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였던 셈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남한 주류 기독교 교회의 이데올로기를 역사적 과정을 검토하면서 진단한다. 그것은 대한제국 말기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을 상징적 사건으로 하는 초기 조선 기독교 전통의 형성에서 일제에 순응하고 타협한 20세기 초반기, 미국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과 반공발전주의를 내재화한 해방이후, 군사독재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를 거쳐,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노골적인 우파 정치세력으로 변신을 시도하는 과정이다. 이에 비해서 반독재 투쟁에 나서고 노동자를 조직했던 진보적인 교회들은 비주류에다가 예외적인 경우였다.
이랜드노조가 투쟁하고 있는 상암월드컵 경기장에서 7월8일 열렸던 기독교의 대부흥 행사가 바로 "Again 1907"이었는데, 그것은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을 부활하자는 취지였다. 영적 각성, 교회의 통합 증진과 변화와 갱신을 1907년의 정신을 계승을 통해서 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기업이라는 이랜드의 비정규직 탄압과 이랜드 투쟁에 대한 외면에서 보이듯 그것은 타자에 대한 배려와 내면에 대한 성찰이 부재한, ‘무례’한 것을 넘어서 폭력적인 이벤트가 되어 버렸다.
세 명의 공저자 중 김진호 목사의 글이 가장 주목된다. 그는 1907년의 사건들을 정세적으로 분석한다. 러일전쟁 시기였고, 평안도 지역이 이 전쟁에서 일본군의 배후지였다는 점, 이에 따라 이 지역의 민중들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민중들은 최소한의 보호를 제공해줄 수 있는 기독교 교회로 모였지만, 전도사들은 이들 민중에 대해 의심을 품었고 ‘진정한 신앙’을 요구했다. 그 결과가 평양대부흥 운동이었던 셈이다. 이런 특수한 정세에서 전도사들은 대중의 상처를 교회제도에서 전도사의 헤게모니 확립, 비정치적인 종교활동으로 이끈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서 다양한 욕망과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카리스마적 지도력에 의한 통합을 선호하는 정서를 형성한다.
김진호의 이런 분석은 종교가 단일한 실체가 아니며, 그 내부에서 상이한 이데올로기가 경합하거나 결합한다는 점, 그것들은 물질적 정세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게다가 김진호는 이러한 분석에다가 집단적 정신분석도 결합한다. 일제시기 신사참배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대부분의 기독교 근본주의-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공산주의라는 더 큰 적을 발명함으로써 해결하려했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 이후에 남한의 주류 교회들은 미국과 반공발전주의 국가의 지원을 통해 크게 성장했다는 점, 산업화 과정에서 대중의 동요와 불안을 성장의 토대로 삼았다는 점도 중요한 분석이다.
이런 분석은 기독교 교회의 구체적인 인맥을 통해서 연결된다. 주로 백찬홍의 글은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의 전통을 검토하면서 이들 신학교에 유학했던 한국인 목사들의 의식, 이들의 인맥이 기독교 교회의 특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책은 이런 방식으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남한 기독교 교회의 현재와 그 역사를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김진호의 글이 특히 흥미로운 것은 종교제도가 형성되는 과정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물질적-정세적인 요인, 이데올로기적인 요인, 무의식적인 요인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특이하게 김진호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무례한 자들의 기독교” 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무례”는 다른 입장, 견해와 대화를 거부하고, 타자의 비판에 닫혀있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례(禮)”는 발리바르의 시빌리떼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어 흥미롭다. 종교가 자신을 하나의 보편성이라고 주장한다면(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문자주의자들에게는 불가능하겠지만 ‘영적인 것’과 관계되는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에서 종교가 자신의 보편성을 주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례(禮)”를 갖지 못할 때, 즉 무례할 때 그것은 상징적 폭력이 된다.(그리고 곧 쉽게 물질적 폭력으로 전화한다.)
김진호는 현재 주류 기독교 교회가 타인에 대한 무례함에서 기인한 위기를 정치세력화를 통해 해결하려한다는 점을 우려한다. 그것은 최근에는 시청앞 극우 단체와의 집회(70~80년대 성장한 선발대형교회들), 혹은 보다 세련된 형태로 뉴라이트 운동이나 '기독교사회책임‘과 같은 우익 NGO에 결합(80~90년대 성장한 후발대형교회)한다. 이러한 차이는 각각의 교회들이 성장한 역사와 기반하는 교인들의 정치적 성향을 반영한다. 주로 강남이나 신도시 중산층에 기반한 후발대형교회들은 보다 ’유연하고 세련된‘ 정치적 화법을 구사한다. 이들은 공화당 우파들, 네오콘과 연합한 미국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정치개입을 모방하려한다. 이는 향후 남한 정치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반독재 투쟁에 결합했던 진보적인 기독교 사회운동. 80년대 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로 결집한 진보적인 교회들. 이들은 기독교 내에서는 비주류였으나, 70~80년대에 그들의 역할로 인해서 과잉대표되었다가 이른바 “민주화 이후”에 위기에 있다. 이들 중 상당수 명망가들은 신자유주의 개혁정권에 지배엘리트로 합류했다. 그러나 저자들과는 달리 서경석 목사와 같이 민주화운동을 했던 인사가 우파(뉴라이트)로 전향하는 것과 이는 분리해서 볼 일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어떤 정치분파가 더 효과적으로 확립할 수 있는가에 판단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내용적으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적인 기독교 사회운동이 다시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비록 인맥으로는 결합되어 있을지라도) 신자유주의 정권에 함께 한 인사들을 비판하고 그것을 신자유주의 비판과도 결합할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 그러한 운동이 부활할 수 있어야 주류 기독교 교회에 대한 비판이 기독교 내부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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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들은 “제3시대 그리스도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다. 기독교 사회운동이나 민중신학이 생소한 나 같은 입장에서는 다양한 사회운동의 이론과 교통하는 것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http://www.minjungtheology.net/
2.
내용은 흥미롭지만 책 자체에 대해서 말하자면, 실망스러운 점이 많다. 편집 상의 문제와 목사님들 특유의 만연체까지 겹쳐서 상당히 방만한 느낌이다. 저자들 간의 토론을 통해서 내용을 추리고 표현을 손봤다면 발간된 책 분량의 반 이하로도 충분히 내용을 소화할 수 있었을 것같다.(심하게 말하면 1/4;;) 오타와 비문도 많아서 읽는 중간 중간에 걸린다. 내용 구성에 있어서도 내가 주로 언급한 남한 주류 기독교 교회에 대한 비판과 같은 것에서부터 신학적인 비판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상당히 불균등한 느낌이다. 책 말미에 있는 대담도 본문의 내용, 심지어는 표현과 문장까지 반복한다는 점에서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어야했거나 지면 낭비였거나.
3.
종교와 정치의 문제. 최근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지역 노조들의 필수서비스 사유화 반대를 위한 토론에서 쟁점이 되었던 사항이 있다. 어떤 노조활동가가 물 사유화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정치적일 뿐 아니라 윤리적, 종교적인 논리를 활용해야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서 인도에서 온 활동가가 강력히 반발한 것. 종교적 논리를 사회운동에 활용하게 되면 곧 종교 근본주의도 용인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충돌하는 인도와 같은 경우에는 이것이 매우 첨예한 정치적 쟁점이 될 수 있겠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정교분리가 확고하지 않을뿐더러 종교 근본주의 간 충돌이 일어나는 사회에서 종교와 사회운동의 관계는 다른 조건에 처하게 된다. 이런 사회들에서는 정치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당분간은 “예의 바르게” 개조될 가능성이 별로 없는 종교들과 연합하기 보다는 정치(그리고 사회운동)를 세속화하는 것, 운동에서도 정교분리를 도입하는 것이 필수적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종교들이 자신들이 서로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더라도, 타자를 인정할 수 있는 예의, 혹은 시민윤리(시빌리떼)를 수용할 수 있는가이다. 그것이 불가능한 정세, 종교들이 처한 조건이라면 종교와의 결합은 위험할 수 있다. 그것은 79년 이란 혁명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에 의해서 좌익들이 몰살당한 이란에서의 경험까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샤라프의 붉은 사원 공격 이후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 공세가 확대되고 있는 파키스탄과 같은 지역의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에는 매우 현실적이고 절박한 문제이다.
(이슬람이든 기독교이든 종교 근본주의자들과 오히려 좌파가 투쟁해야하는 이유 등에 대해는 타리크 알리의 <근본주의의 충돌>과 같은 책이 도움이 된다. 타리크 알리는 시오니즘과 기독교 근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이슬람도 개혁되어야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럴 때에만 일상화된 극단적 폭력들을 제어하고 ‘정치’가 가능할 것이다.)
남한에서 사회운동이 진보적인 기독교 교회와 결합했던 경험이나, 남미에서의 가톨릭 해방신학과 민중운동의 결합은 이와 다른 조건에서 가능했던 것이지만 일반화될 수 없다. 그것들 역시 정세의 문제.
이 책을 읽으시려는 분들은, 전철이나 도서관같은 곳에서는.. 읽지마세요, 낱말 하나하나에 가슴 울먹이다가, 어느 구절에선가 갑자기 울음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나오니까요.
김진숙의 글들.
하지만 김진숙은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다. 그의 글은 투쟁사든, 강연이든, 교육이든, 추도사든 그녀의 '말'의 흔적이다. 말은, 보통 하나의 순간에 명멸하지만, 그것이 가진 무게와 진실에 따라서는 순간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그리 두껍지는 않지만 낱말하나 문장하나의 무게 때문에 쉬이 읽어나갈 수 없고, 눈물과 반성 때문에 며칠을 걸려 읽어야하는 책.
노조가 주최하는 이런저런 교육에 조금 다녀본 사람이라면, 열사 투쟁에, 적어도 열사가 마지막 가는 길에는 함께 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 속에서 익숙한 내용의 글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장소들에게 김진숙을 만났다. 노조 간부들, 비정규직 노동자 교육들에서, 김주익, 배달호 열사의 추모식에서 만났다. 어떤 때에는 정신을 빼앗겨서 그녀의 삶과 투쟁에 대한 두시간 가까운 강연을 듣기도 했고, 열사들의 추모식에서는 정말 펑펑 울어버렸다. 창원시청 앞 광장에서 배달호 열사의 추모식이 있을 때, 한진중공업 횡횡한 도크위에서 김주익, 곽재규 열사의 추모식에서.
우리 노동자운동은 87년 이후, 자신의 가능성을 발전시키기보다는 90년대를 거치면서 오히려 자신의 한계 속에만 갇혀왔다. 그래서 87년을 말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전투적 투쟁을 회고하지만 과연 그 속에서 우리가 길어올려야할 진실이 무엇인지를 성찰한다기 보다는 '잘나가던 그때'를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김진숙의 글이 하나 하나 영혼에 울리는 것은, 그녀가 우리의 현재에 대해서, '잘 나가던'(혹은 지금도 잘나가고 있다고 믿는) 노동운동이 굳이 외면하거나 침묵하려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87년의 진실이 그 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김진숙은 부산지하철 매표소 비정규직노동자의 단식 투쟁에서 조수원 열사를 기억한다 .배달호 열사의 추모식에서 청소용역 비정규직노동자가 될 지 모르는 부인 황길영 동지를, 유통매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할지 모르는 두 딸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보수세력에 탄압당지만 꿋꿋하게 싸우는 전교조 선생님들의 투쟁을 소중히 말하면서도, 그들이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을 돌아볼 것을, 화룡점정할 것을 나즈막한 목소리로 주문한다.
이런 점들이 아니라도 책을 읽다보면, 왜 김진숙의 말이 낱말 하나하나에 가슴 울먹이게 하고, 어떤 구절에서 갑자기 눈물을 쏟게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깊은 상처를 건너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중학생 딸이 새벽신문배달로 사온 털신을 고이 간직한 어미니를 기억하는 사람, 돌아가실 때까지 '복직했냐'를 묻던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조카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사람.
그래서 마치, 남한의 노둥운동이 경제주의와 합의주의에 빠져서 희망은 이제 없어진 것이 아닌가 몇번이고 돌아보게 되는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침묵하거나 스쳐 지나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김진숙의 글에 영혼이 울리는 당신들이 있다면, 여전히 노동자들의 눈물의 역사는 계속된다. 그것은 끝나지 않았다.
"20년 가까이 초지일관 불굴의 신념만으로 버텼겠습니까? 그 폭력 앞에서 한 없이 비굴해지던, 살려만 준다면 글마들 발톱의 때라도 햝을 만큼 비굴해지던 스물여섯의 제 모습이 떠오르면 지금도 스름 끼칩니다.
오히려 그런 모습들 때문에 용기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용기야말로 얼마나 찬란한 자유인지, 뼈가 저리지요.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지지 않는 것, 그것만큼 소중한 게 또 있을까요"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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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호 열사의 추모제와 눈물들이, 배달호 열사 추모곡인 "호루라기 사나이"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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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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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상하게 읽을 때 마다 새로 읽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워낙에 잘 모르는 예술가들이 등장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여행이라는 느낌이 갈 때 마다 늘 새롭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부가 정보
겨울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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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라는 게 워낙 매번 변화무쌍하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저도 드네요. 보통의 이 책은 여행을 이렇게 느끼고, 또 사고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게 매력적입니다. 구르미님 말씀을 보니 여행다녀와서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부가 정보